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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교회사 : 미국의 대각성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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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미국의 대각성 운동

미국의 신앙은 전세기 청교도들이 활동할 때와는 여러모로 달라졌다. 청교도들의 신앙은 한두 세대로 그치고 말았다. 그들의 활동으로 뉴잉글랜드는 질서를 잡았고 복받은 지역이 되었다. 그리고 청교도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은 조상처럼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교회 출석률은 떨어지고 교회에도 명목상의 신자들뿐이었다.

그나마 뉴잉글랜드 지역과 펜실바니아, 뉴저지 등은 나은 편이었다.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신앙을 찾아서 고향을 등진 이들이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은 더욱 상황이 나빴다. 특히 하류층과 버려진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는 곳은 더 심했다. 이들은 이신론과 상관없이 아예 신앙에 관심이 없는 이들이었다. 많은 이들이 열등감과 자포자기에 싸여 있었다. 이들은 쉽게 술과 방종에 빠져 들어갔다.

당시 뉴잉글랜드의 목사들이 가장 잘 사용했던 성경 구절은 예레미야 애가였다. 거기에는 이스라엘의 타락과 장차 다가올 심판을 보고 있는 선지자의 아픈 심정이 표현되어 있었다. 목사들은 이들 청교도의 후손들이 조상의 신앙을 떠나 악한 생활을 하고 있음을 신랄하게 비난하며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예고했다. 그리고 회개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상황은 변화될 것 같지 않았다.

1. 대각성 운동의 시작

유럽과 신대륙의 신앙이 대단히 침체된 가운데 있을 때, 부흥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존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를 중심으로 메소디스트 운동이 일어났고, 미국에서는 여러 차례의 큰 부흥이 일어나서 사람들의 영혼을 변화시켰다. 미국에서의 부흥 운동을 대각성이라고 부른다. 이때 일어난 영적 각성은 미국 건국의 기초가 되었다.

두 운동은 그 배경을 독일 경건주의에 두고 있다. 웨슬리는 경건주의의 한 분파인 모라비안 형제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미국의 부흥 운동은 경건주의의 총본산인 독일 할레 대학에서 공부한 목사들이 이민 옴으로써 가능했다. 그리고 경건주의는 그 뿌리를 루터와 칼빈이 가르쳤던 복음적 신앙에 두고 있
었다.

데오도르 프레링하이즌(Theodore Jacobus Frelinghuysen, 1691-1747)이란 목사는 1720년 네덜란드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왔다. 그는 네덜란드 프리즐란트 동부 링겐에서 태어나 당시 네덜란드 칼빈주의에서 유행하던 경건주의에 심취되어 목회 사역을 하다가 아메리카의 네덜란드인 교회들에 훈련된 목사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20대 말에 뉴저지로 이주하여 사역하였다. 그는 위대한 설교자로서 중생을 강조하였다. 그의 설교는 큰 감동을 주어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다. 곧 교인 수가 늘기 시작하였고 주위의 교회들도 설교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로부터 부흥회가 시작되었다.

1718 년 아일랜드에서 이민 온 장로교도 윌리엄 테넌트(William Tennent, 1673-1746) 목사는 펜실바니아와 뉴욕에서 목회를 한 후, 펜실바니아의 네샤미니(Neshaminy)에서 목회를 하였다. 그는 통나무집을 세우고 자신의 네 아들을 비롯하여 열다섯 명의 젊은이들에게 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테넌트는 그들에게 철저하게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를 가르쳤고, 무엇보다도 열정적인 신앙을 전수하느라 노력하였다.

윌리엄 테넌트의 큰아들 길버트는 유능한 설교자가 되었다. 프레링하이즌은 그를 도와서 교회가 세워지도록 했다. 길버트 테넌트와 통나무 대학 출신의 목사들은 프레링하이즌이 시작한 부흥 운동이 계속 진행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들의 뜨거운 설교는 사람들의 영혼을 변화시켰다. 부흥은 장로교도들 가운데 일어나 뉴저지로부터 버지니아까지 숲속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뉴잉글랜드의 부흥은 조나단 에드워즈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는 미국이 꼽고 있는 초창기 대표적인 인물로서 미국의 정신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1703년 코네티컷 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외할아버지는 회중 교회의 목사였다. 그는 열일곱 살에 예일대학을 졸업하였고 2년 후에는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최우수 졸업생 기념패는 아직도 예일대학에 남아있다.

에드워즈는 하루 열두 시간 성경을 연구하면서 충실한 목회를 하였다. 그의 설교는 두 시간 이상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지루한 경우도 많았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는 별로 웅변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음성은 약했고 위엄도 없었다. 한 손에는 원고를 움켜쥐고 다른 손에는 촛불을 들고 외쳤다. 당연히 제스츄어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간절한 열정을 가지고 설교하였다.

그가 메사추세츠의 노댐프턴에서 목사로 있을 때 굉장한 부흥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1734년에 시작되어 다음해까지 이어진다. 이것이 미국 역사에서 그토록 중히 여기는 대각성 운동이다. 단지 200가구뿐인 에드워즈의 작은 마을에서 무려 300명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이 부흥 운동은 뉴잉글랜드 전역으로 퍼져 나가 주위의 다른 주들로 전해졌다.

부흥 운동은 얼마 동안 소강 상태에 빠졌다가 1740년과 그 다음 해에 다시 계속된다. 후반기의 부흥 운동은 조지 휫필드의 활동과 관계된다. 모든 부흥회에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그로부터 나오는 완전한 은총이 전해졌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악을 회개하였다. 그 회개는 너무도 강렬했
다. 울고불고, 펄펄 뛰고, 넘어져 뒹구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에드워즈는 그 부흥 운동에 관해서‘놀라운 회개의 이야기’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많은 젊은이들이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만 의로워지는 교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유럽을 떠나서 신대륙에 뿌리를 내린 이들이 이제는 신앙 문제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에드워즈는“그들이 생각하는 한 가지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었고, 모두들 그리로 몰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의 마음은 장차 올 영원한 진노에서 생명을 건지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고 묘사하였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영혼의 대각성을 경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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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휫필드를 통해 계속되는 부흥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는 1714년 영국의 글로체스터에서 태어났다. 여관업을 하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그는 공립학교를 다닌 뒤에 옥스퍼드 펨브로크 대학의 근로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리고 몇 권의 중요한 저서들을 읽고 율법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복음의 빛 아래로 들어왔다. 그는 이때 자신이 무슨 선한 것을 행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행한 것이 자신을 위한 것임을 믿음으로써 구원 얻는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1736년 스물두 살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당시 설교 관습과는 다르게 훌륭한 제스츄어를 섞어가며 즉석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복음은 청아한 목소리만큼 명료하고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차츰 그의 열광적인 설교를 달가워하지 않는 성직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미 세례 받은 교인들에게까지 중생의 도를 설교하는 것에 분개하였다. 그에게 강단을 제공하는 교회가 줄어들었다.

이 고통스런 시기가 그에게 새로운 전도 사역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는 이제 야외에서 설교하기 시`했다. 주일에 교회에 가지 않는 많은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이 아닌가? 그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야외에서 설교하기 시작한 것이다. 1739년 휫필드는 어느 탄광촌에서 백 명 가량의 광부들에게 설교하였다. 곧 수천 명이 몰려들었다. 검은 얼굴들에는 눈물 자국으로 두 줄기 하얀 선이 생겼다.

두 달 뒤에는 무어필즈에서 3만 명을 앞에 두고 설교했다. 음향 시설이 없었던 그 시대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려면 얼마나 목소리가 크고 발음이 분명해야 했겠는가? 1739년부터 34년 동안 그는 18,000회 정도 집회를 인도하였다. 이런 변화는 영국의 국교회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크고 빠른 것이었다. 결국 휫필드는 거의 대부분의 국교회 성직자들과 관계가 끊어지고 말았다.

1738년부터 1770년까지 그는 미국으로 일곱 번의 선교 여행을 감행하였다. 미국에서의 성공은 굉장한 것이었다. 뉴잉글랜드에서 시작한 부흥회는 조지아로 내려가면서 계속되었고 다시 올라오면서 많은 영혼을 감동시켰다. 그는 조지아에 고아원을 설립하였다. 그 고아원의 운영은 그에게 끊임없이 부담을 주었고 전도 여행 중에도 계속 모금을 하게 만들었다.

미국에서의 그의 전도 방법은 진취적이었다. 그는 전통 교리와 복음적인 열정을 조화시켜서 둘이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진행되던 대각성의 흐름을 타고 그의 부흥회는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식민지 사람들은 구원의 복음을 통해서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기쁨을 누렸다. 그들은 이제 식민지로 밀려난 하층 계급이라는 열등감을 더 이상 느낄 수 없었다.

어떤 농부는 밭에서 일하다가 휫필드가 수마일 떨어진 장소에서 정오에 설교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연장을 그대로 둔채 자기의 아내와 함께 말을 타고 집회 장소로 향하였다. 그가 말의 짐을 덜어주기 위하여 때때로 내려서 걸으면서 예정된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많은 무리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설교자는 호리호리한 체격의 젊은이로서 천사처럼 보였다. 그는 위대하신 하나님으로부터 권능을 받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그는 묘사했다.

휫필드는 설교를 통해서 청중들에게 각자가 하나님의 잃어버린 존재임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기 전에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앞의 농부는 말했다. “그의 설교를 들을 때 내 마음은 상한 심정이 되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내가 의지했던 옛 사람과 그 힘은 무너졌다. 나의 의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영국인들 가운데 휫필드는 최고의 설교자였다. 휫필드보다 훨씬 학식이 있고 인기를 얻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보다 더 설득력 있고 감동을 주지는 못했다. 라일(J. C.Ryle)은“35년 동안 휫필드가 자신의 청중들을 사로잡았던 것처럼 완전하게 청중을 사로잡은 설교자는 아무도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합당한 것이었다.

1770년에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휫필드는 뉴잉글랜드의 뉴베리포트에 묻혔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그는 자기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렇게 말하였다.

“주 예수여, 나는 피곤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역에 싫증이 난 것은 아닙니다. 만일 나의 갈 길을 아직 끝마치지 않았다면 한 번 더 밖에 나가 주님을 위하여 외치게 하소서. 그리고 진리를 외치고 집에 돌아와 숨지게 하소서.”

그의 이러한 요청은 허락되었다. 그의 마지막 야외 설교는 2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그는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좋다. 일을 하라. 행위(일)를 통하여 하늘나라에 가려는 자여, 그것은 모래로 새끼를 꼬아 그 줄을 잡고 달에 가려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내가 살아서 그리스도를 전파하기를 얼마나 원했던가? 그러나 그분과 함께 있기 위하여 죽는 것이다.”

그 날 밤 천식이 발작하여 그는 육신의 장막을 벗어나 하늘의 자유를 얻었다. 이렇게 하여 근대의 가장 위대한 전도자가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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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각성과 독립

1776년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이 독립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정치, 경제적인 요소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힘은 무엇보다도 신앙이었다. 대각성은 이 일을 위해서 식민지인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바꾸어 놓은 계기를 제공하였다. 부흥 운동을 통한 회개와 중생은 이들을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고 청교도들의 신앙을 다시 살려 놓았던 것이다.

대각성은 식민지인들에게 공통된 신앙의 감정을 가지게 만들었다. 독립 전쟁 때에 공통된 정치적 요소들을 제공했던 워싱톤이나 프랭클린 또는 제퍼슨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기 이전에 먼저 에드워즈, 테넌트 그리고 휫필드 등이 공통적인 신앙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식민지인들은 부흥회를 통해서 서로 교파가 달라도 신앙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이들은 영국이 식민지의 교회들을 위해서 감독을 파송하는 일에 반발하였다. 성공회 신자들까지도 이 일을 반대하였다. 영국에서 감독이 파견되면 자신들의 신앙의 자유가 침해될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1766년 뉴잉글랜드의 회중 교회를 비롯하여 뉴욕, 뉴저지 장로교인들은 회동하여 식민지인들 스스로 감독을 뽑는 것에 대해 의논하였다.

건국 이전의 교회들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처럼 국교회 제도를 놓고 논란이 많았다. 이 제도를 택하면 한 지역에는 한 형태의 교회만 있어야 했다. 또한 그 지역의 주민들은 교회에 나가든 안 나가든 종교세를 내어야만했다. 당시 뉴잉글랜드 지역은 회중교도들이, 뉴욕이나 남부 지역은 성공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로교, 루터교, 침례교인들은 국교회 제도를 반대했다.

결국 모든 교회를 법적으로 평등하게 대우할 것과 어느 특정 교파에게만 재정을 지원하는 것을 삼간다는 원칙이 세워지게 되었다. 독립 후에는 미국에서 어느 누구나 어떤 종교를 믿든 간에 자유롭다는 법률까지 제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미국 교회의 특성을‘자발적인 신앙’ 또는‘전도’라는 말로 표현되게 만들었다. 당시 미국의 이런 상황은 신앙에 있어서 개인적인 결단과 회개를 강조하는 경향으로 흘렀다. 그리하여 유럽식 의식 위주의 신학이 많이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개인적인 회개와 결단으로 이끄는 전도와 부흥회는 미국 개신교의 대표적 특징이었다. 미국에서는 40년 정도를 주기로 대 부흥이 일어났다. 부흥회로 말미암아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얻고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했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한동안 신앙적인 분위기가 사회를 이끌어 갔다. 이때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질서의 근원이 되었다.

결국 식민지인들은 독립을 위해 영국과 전쟁을 하게되었다. 그러자 성직자들은 거의 비슷한 비율로 갈라졌다. 영국에 충성하는 이들과 독립을 원하는 이들이었다. 존 웨슬리가 영국에 충성을 다짐하자 감리교인들은 대단히 어려운 입장에 빠졌고, 미국인들은 한동안 그들을 비애국자들로 간주하였다. 퀘이커 교도들과 모라비안들은 전쟁 자체를 반대하였다. 신앙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전쟁을 위해서 많은 젊은이들이 의용군으로 지원했다. 이때 젊은이들은 자기 마을의 목사를 모시고 나가는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1774년 이스트 길포드에서 83명의 의용군이 토드 목사와 함께, 해돈에서는 100명이 메이 목사와 함께, 차탄에서는 100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보드만 목사와 함께 종군했다는 기록이 있다. 목사들은 자기 마을 젊은이들의 군대의 군목으로 지명되었다.

마침내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영국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1776년 독립 국가로 새롭게 탄생한다. 독립 전에도 이미 유럽에 있는 모교회(母敎會)와 아무런 공식적 연관 없이 지내는 많은 교회들이 있었다. 하지만 성공회, 가톨릭, 감리교회 그리고 개혁교회는 유럽 본국 교단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전쟁 이후 독립하면서 유럽 본국의 지배를 벗어나게 되었다.

본래 미국의 정신적 뿌리는 유럽, 특히 영국이었다. 이제 거기에 더해서 그 나름대로의 고유한 미국 정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던가? 복음적인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온 청교도 신앙, 광활한 땅에 펼쳐진 개척 정신, 수십 리 포장마차를 타고 온 가족이 달려가 참석했던 뜨거운 예배 그리고 부흥회로부터 온 대각성 운동이 이를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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