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경건주의 운동
한 세대가 지나자 종교 개혁은 본래의 열정을 잃게 되었다. 목회자들은 예배의 열정보다 형식을 더 강조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앙은 생활과 더욱 거리가 생겼다. 당시를 풍자하는 만화는 이 점을 부각시켰다. 목사는 원고 뭉치를 읽고 있고 신자들은 교회당 아래, 위층에서 모두 다 침을 흘리며 자고, 성탄절에 한 목사는 마구간 만드는 법을 설교하고 있었다. 끝없는 교리 논쟁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에 대한 관심을 잃게 만들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면 되지 행위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생각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대항해 신앙을 실생활에 적용시켜 보려는 신자들의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1. 경건주의의 시조 필립 야곱 스페너
(Philip Jacob Spener, 1635-1705)
이러한 풍조에 대항해 일어난 것이 스페너의 경건 운동이었다. 필립 야곱 스페너(Spener)는 1635년 알사스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때는 30년 전쟁의 중간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공작의 고문으로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더욱 경건하였다. 그의 큰누나의 남편도 뛰어난 목사였다. 그의 가정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철저하게 가르쳤다.
그의 아버지 서재에는 장서들이 대단히 많았다. 스페너는 거기서 존 아른트의‘진정한 기독교’란 책을 읽고 감명을 받는다. 거기에는 당시 기독교의 무능을 비판하는 글이 있었다. 신학적인 논쟁 자체에만 몰두하거나, 능력은 없이 교리만 외워서 하는 신앙생활은 빈껍데기와 같다. 신앙과 생활은 절대로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생활에서 실천되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그는 열여섯에 스트라스부르그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역사학 강사로 있으면서 신학에 몰두했다. 그러다가 루터의 글을 만나 매혹되었다. 그는 구원은 죽은 뒤에나 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현재 느끼는 것임을 배운다. 이렇게 해서 아른트에게서 배운 실천적 신앙은 루터에게서 원동력을 얻게 된다. 신자는 믿음으로 생활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매순간 느끼는 것이다.
경건주의는 하나님에 대한 내적인 경험을 실제적인 윤리생활에 나타나게 하는 것을 주요한 가르침으로 삼고 있었다. 참 신앙은 행동으로 표현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목사가 된 후 스페너는 루터가 가르친 믿음의 의와 실천을 설교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잘 적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교리를 외우는 정도로밖에 훈련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신자들을 자기 집에 불러 모으고 성경 공부와 기도 그리고 예배를 강조하였다. 신앙을 위한 토론회도 가졌다. 그 결과 신자들의 신앙은 성숙해졌고 교회는 크게 부흥했다.
이러한 성공의 결과 때문에 스페너는 1670년 프랑크푸르트의 초청을 받아 그 도시의 12명 이상 되는 고참 목사들을 통괄하면서 성경 과목을 강의하는 한편, 큰 교회 담임 목사가 되었다. 다른 목사들도 스페너의 모범을 따랐으며 경건주의자들의 숫자는 급속히 증가하게 되었다. 1692년에는 할레(Halle)에 대학이 세워졌으며, 그 후 오래지 않아서 그 대학은 경건주의의 중심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죽은 정통’이 있는 곳에 ‘살아있는 믿음’이 회복되었다.
경건주의는 신비주의가 아니었다. 신비주의(mysticism)는 사람들을 세상 생활로부터 격리시켜 성경에서 ‘착한 행실’이라고 부르는 것들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러나 경건주의는 겸손을 실천하고 여러 가지 유용한 일들을 실천하기에 힘썼다.
스페너는 50세 때에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드레스덴(Dresden)으로 가서 선제후 게오르그 3세(Johann George Ⅲ)의 궁전에서 설교 책임자가 되었다. 여러 대신들은 그를 조롱하고 비웃었다. 결국 스페너는 드레스덴을 떠나 베를린에서 일하라는 소명에 순종하였다. 여기에서도 1705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했다.
루터교회로부터 열심 있는 신자들을 끌어내는 것이 스페너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들을 더욱 영적으로 훈련시켜 루터교회 안에 남아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 유용한 신자들이 되도록 돕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은 그의 가르침을 기성 교회를 떠날 수 있다는 선언으로 이용했다. 그리하여 여러 집단들이 생겨나서 기성 교회의 틀을 벗어나서 활동하게 됨으로써 루터파 교인들을 분열시켰다는 심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스페너는 1675년‘경건의 열망’(Pia Desideria)을 출판했다. 경건주의 운동의 헌장이 된 이 저서에서 스페너는 경건주의의 성격을 제시했고, 당대의 죄악들을 단죄했다. 그가 제기한 그 시대의 죄악상은 교회에 대한 정부의 간섭, 성직자의 합당치 못한 삶, 평신도들의 술취함과 부도덕과 이기주의 등이었다.
이 저서에서 스페너는 개신교 개혁을 위한 여섯 가지 제안을 했다.
그 내용은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가 성경을 열심히 공부할것, 만인제사장직의 실제적인 표현, 즉 모든 신자들이 제사장임을 알고 더 적극적으로 교회 생활에 참여할 것, 선한 행위가 동반된 신앙을 강조할 것(신앙과 선행은 분리될 수 없다. 이를테면 신앙은 태양이고 선행은 태양의 빛이다.), 논쟁을 피할 것, 교역자들의 영성 훈련을 강화하고 신학 교육을 현실적으로 개혁함으로써 신학과 실천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할것, 학문적인 설교보다는 신자들의 신앙을 길러주면서 말씀에 순종하게 하는 설교를 할 것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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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는 1663년 뤼벡(Lubeck)에서 법학박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랑케는 소년 때부터 매우 종교적이었으나 대학을 졸업하면서 종교에 무관심하게 되었고, 깊은 종교적 고민과 갈등을 경험하게 되었다. 2년 동안은 깊은 종교적 회의에 빠져서 하나님의 존재까지 의심했다. “오 하나님이시여, 당신이 존재하신다면 나에게 보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고백하기를“내 자신을 구원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나는 더 깊은 불안과 회의 속에 빠져 들어갔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약성경을 펴들고 있는 프랑케를 향해서 그의 기숙사 사감선생이 “그렇다, 이 책 속에 우리는 놀라운 보배를 소유하고 있다.”고 하였다. 바로 그때 프랑케의 눈은 고린도후서 4장 7절(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을 읽고 있었는데, 프랑케는 그와 같은‘섭리적인 일치’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고 자기의 허물과 죄악을 돌이켜 보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프랑케는 또한 1687년 요한복음 20장 31절에 근거한 자신의 설교에 감화를 받아 회의와 절망으로부터 벗어나 영혼의 평안을 체험했다고 한다. 1688년에는 스페너를 방문하여 수개월동안 그와 함께 드레스덴에 머물면서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후, 1689년 초에 라이프치히로 돌아와 성경공부 반을 지도함으로써 경건주의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강의가 마을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게 되자 그를 지지하는 이들이 점점 증가했다. 이에 대학 당국은 프랑케가 대학에서 분열을 일으키고 마을 사람들을 동요시킨다는 것을 이유로 프랑케의 경건주의 운동에 제재를 가했다. 그는 결국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밀려났고, 그 다음에 에르푸르트(Erfurt)로 옮겨갔다. 그런데 거기서도 그의 경건 운동은 박해를 불러왔다. 그는 경건주의자로 낙인찍혀서 에르푸르트에서 48시간 이내에 떠나라는 통지를 받았으며, 같은 날 신설된 할레(Halle) 대학의 교수로 초빙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1692년 그는 할레에서 목사와 교수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35년 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경건주의가 널리 그리고 오랫동안 힘을 발휘하도록 봉사하였다.
프랑케는 스페너의 영향과 브란데부르크 선제후의 후원을 힘입어 할레 대학에서 경건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그리하여 할레 대학은 곧 경건주의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프랑케와 대부분의 경건주의 지도자들인 할레 대학 교수들은 경건주의와 루터교의 전통적 신학을 비교하는 일에 열심을 쏟았고 전통적인 신학을 서서히 수정하기 시작했다. 이들에 의해서 경건주의 운동은 신학적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했다. 할레 대학은 보다 덜 논쟁적인 신학, 보다 덜 냉담하고 보다 덜 세속에 물든 교회, 성경에 정통하고 사랑의 실천에 열심을 내는 그리
스도인의 교제를 강조했다.
프랑케가 말하고 있는 사역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그의 관심에서 우러나왔다.
할레 대학의 신학 교수이자 대학 인근에 있는 마을인 글라우카우(Glauchau)의 목사였던 프랑케는 1695년에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무료 초등학교를 세웠고, 2년 후에는 중등학교를 세웠다. 프랑케는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불행에 충격을 받아 기부금 상자를 만들어 거기서 생기는 돈을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전에 보다 엄청나게 많은 돈이 모금되어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이것이 바로 할레에 세워지게 되는 많은 교육기관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모두 2,507명의 어린이들을 도와주고 교육을 시켰다. 이 모든 것을 기부금으로 운영했고 그들을 가르치는 교사는 175명이었다.
프랑케는 또한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도 세웠다 그것은 믿음의 금자탑이었다. 왜냐하면 프랑케에게는 이러한 기관을 세울 만한 능력이나 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믿음과 기도로 고아원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독일 각지의 친구들과 뜻있는 자원자들이 기부금을 보내었고, 오로지 이 기부금만으로 운영되어 갈 수 있었다. 아울러 성경학교를 설립하여 많은 평신도들에게 성경지식과 신학적인 지식을 보급했다. 또 극빈자를 위한 병원, 과부들의 쉼터, 라틴어학교, 성경 출판사,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무료 숙박소 등 여러 기관들을 두루 세웠다. 1710년에는 성서협회를 설립하여 성서를 싼값에 출판하여 보급시켰다. 이와 같은 사업을 돕기위해 유럽 각처에서 무명의 헌금이 넘치도록 들어왔다. 이것은 프랑케가 강조했던 기도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이었다.
프랑케의 지도 하에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어 가던 경건주의 운동은 성경연구와 토론 그리고 그것을 일상생활과 경건생활의 함양에 적용하는 것을 강조했다. 또 성경의 조명자로서의 성령의 기능을 강조했고 신앙의 표현으로서의 선행도 강조했다. 그리하여 독일의 루터 교회 안에 새로운 영적 활력이 주입되었다. 다시금 열심 있는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목회자들의 영적인 능력이 향상되고, 평신도들의 교회 사업 참여가 확장되었으며, 성경연구에 힘쓰게 되었다.
경건주의자들은 개신교 선교의 개척자들이었다. 이들의 선교에 대한 열심은 대단했다. 드디어 경건주의자들이 해외선교에 눈을 돌리게 되는 계기가 주어졌다. 경건주의의 예찬자인 덴마크의 왕이 인도에 있는 그의 식민지들에 처음으로 시도하는 선교활동을 위해 프랑케에게 할레 대학에서 선교사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프랑케는 1705년에 남 인도에 첫 번째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이들의 편지와 보고서가 독일 경건주의자들에게 큰 선교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할레는 국내외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아시아, 아프리카, 태평양 제도에서 할레 출신의 선교사들의 선구자적 사명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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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진젠도르프(Zinzendorf)와 모라비안 교도들(Moravians)
스페너와 프랑케의 경건주의는 루터파 귀족인 진젠도르프의 백작 니콜라우스 루드비히(Nikolaus Ludwig, Countvon Zinzendorf, 1700-1760)의 일생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아버지는 진젠도르프가 태어난지 6주만에 죽었다. 진젠도르프는 프랑케의 개인적인 친구였던 할머니에 의해서 양육되었다. 10세 때에 할레에 있는 프랑케의 문법학교로 보내졌으며, 거기에서 그는 영적 생활에 필요한 자양분을 충분히 섭취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자 하는 결심을 굳게 했던 그는 신학을 공부하고자 했으나 그의 가족들이 설득하여 법률을 연구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비텐베르그(Wittenberg)와 유트레히트(Utrecht)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1721년에 국가의 관리가 되었으나 그의 취미와는 맞지 않았다. 그때에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하여 그의 인생에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진젠도르프가 살아 있을 동안에‘모라비안 형제단’(Moravian Brethren)은 매우 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다. 모라비안 형제단은 15세기 종교개혁의 선구자 존 후스에게서 감화를 받아 보헤미아의 모라비아 지방에서 생겨난 프로테스탄트의 종교단체였다. 후스 전쟁(1419-36) 후 보헤미아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화해한 보헤미아 국민교회가 성립되었는데, 거기에서 만족을 얻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보헤미아 동부 지방 모라비아에서 형성된 작은 종교 집단이 그 기원이다. 이들은 신약성서의 산상수훈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이들은 가톨릭의 반종교개혁 운동과 30년 전쟁 때에 심한 탄압을 받고 뿔뿔이 흩어졌었는데, 그들 중의 일부가 박해를 피하여 삭소니에 있는 그의 영지로 피난오기 시작했다.
1722년 당시 22세였던 진젠도르프는 모두 300명이 넘는 피난민들에게 베르텔스도르프(Berthelsdorf)의 근처에 있는 그의 커다란 사유지에 정착하도록 허락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거주지를 헤른후트(Herrnhut)라고 불렀는데, 그것은‘주님의 보호’라는 의미이다. 이들은 자기들 힘으로 집을 짓기로 결정했다. 짧은 시간 내에 나무로 지은 건물들이 완성되어 지금 서 있는 많은 헤른후트 건물의 시초가 되었고 세계 각곳에서 이를 따라 건물을 짓게 되는 모형이 되었다. 헤른후트에 세운 공동체는 철저한 공동체 생활, 선한 사업들, 엄격한 도덕 그리고 근면함에서 수도원을 닮았다.
여기에서 모라비안 교도들은 사도 시대의 교회생활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이들은 세족식, 평화의 입맞춤, 제비뽑기등을 실시했고, 이 공동체의 행정을 위해서‘장로들’을 세웠다. 1727년에 진젠도르프는 이상적인 마을로 변화되는 중에 있는 헤른후트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꿈꾸어 오던 이상이 실현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할레에서의 학생시절에 그는 선교에 대한 열정에 불타서 ‘겨자씨 선교단’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소년들의 경건생활을 지도하면서 세계 선교의 정신을 심어주었던 일이 있었다. 이처럼 소년시절에 선교사업에 대한 강력한 동기를 제
공해준 경험이 있었던 진젠도르프의 지도 하에 헤른후트 공동체는 강력하게 복음주의적이고, 선교 지향적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진젠도르프는 1731년에 덴마크의 코펜하겐을 방문하는동안, 서인도 제도의 흑인을 우연히 만나게 되어 해외 선교에 대한 관심이 다시 불붙게 되어서 여생을 선교를 위해 살았다.
선교의 열심이 타올랐던 헤른후트 공동체는 1734년에 그들의 최초의 선교사들을 카리브인들에게 파송했다. 얼마후에는 서인도, 그린랜드, 북아메리카, 기아나, 이집트, 남아프리카, 네덜란드, 영국, 남아메리카 그리고 발틱 해 국가들에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파송되었다. 그리하여 18세기말에 이르러는 서인도에 67명, 그린랜드에 18명, 라브라도에 26명, 남아프리카 희망봉에 10명, 인도에 5명의 선교사가 파송되었다. 이들이 해외 선교를 위해 자신들의 교회를
떠날 때, 그들은 교통비를 제공받았으나 선교지에 도착하고나면 그들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아내를 얻었고, 그곳에서 살다가 죽고 그 땅에 묻혔다. 헤른후트는 세계 각 곳과 연락을 하는 중심지가 되었고 거기를 본 딴 신앙 공동체가 많은 나라에 세워지게 되었다.
1736년에 진젠도르프는 모라비안 교회의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11년동안 여행하면서 가는 곳마다 경건주의 사상을 전했다. 유럽을 두루 여행하면서 모라비안 형제단 공동체를 세웠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공동체가 네덜란드와 영국에 있다. 1741년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인디언 선교와 모라비안 교회를 세우는데 주력하면서 2년을 보냈다. 그는 1743년에 헤른후트로 돌아온 후, 영국에 있는 교회와 더불어 일한 5년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그곳에서 목회 사역에 전념했다. 그는 모라비안 교도들을 위해 많은 사재를 썼다. 말년에 개인의 비극(아내와 아들의 죽음)과 재정의 어려움으로 타격을 입기도 했다. 그는 1760년 5월 9일 헤른후트에서 60세를 일기로 소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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