Ⅵ. 18세기 미국의 신앙
17세기 동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유럽 대륙과 영국으로부터 대서양을 건너왔다. 그러나 18세기에는 또 하나의 대륙(아프리카)이 역사의 표면에 부각되었다.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 사이에 악명 높은 노예무역이 엘리자베스 치세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1562년 존 호킨스(John Hawkins)는 시에라리온(Sierra Leane)의 해안에서 흑인들을 붙잡아서 대서양을 건너 서인도제도로 왔다. 거기에서 스페인 이주민들에게 흑인들을 넘겨주고, 그 대가로서 영국에 팔면 큰 이익을 남길 수 있는 짐승 가죽, 생강, 설탕, 진주 등을 받았다.
일찍이 17세기 초반부터 노예무역은 쌀과 담배 농업이 풍부한 북아메리카 남부의 식민지까지 확대되었다. 열네 명의 흑인들을 실은 화란 상선이 1619년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Jamestown)에 도착하였다. 그때부터 인육 무역의 반대와
금지를 위한 여러 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증대되었다. 왜냐하면 유럽인들에게 있어서는 신대륙의 남부 기후가 노동하기엔 너무나 뜨거웠기 때문에 남부의 농장주들이 노동력 확보를 위하여 노예들을 사들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1713년 스페인이 독점해 오던 노예무역권을 영국에도 허용하자 수많은 노예들이 식민지에 실려 왔으며, 많은 뉴잉글랜드 사람들이 노예무역을 통하여 돈을 벌려고 혈안이 되었다.
남부의 농장주들 가운데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노예들에게도 구원받아야할 영혼이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떤 노예의 여주인은 영국 국교회 목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한다. “내 노예들 중에도 천국에 갈 수 있는 사
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 또 내가 천국에서도 그들을 만나야 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노예들이 세례를 받으면 자동적으로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노예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종교였다.
아메리카의 흑인들을 위하여 사역했던 대표적인 사람은 엘리아스 노(Elias Neau)라는 프랑스인이었다. 그는 자기의 개신교 신앙 때문에 3년 동안 투옥되었으며 7년 동안 배에서 노를 저어야 했다. 마침내 그가 풀려났을 때 그는 당시
일천 명의 노예들이 있던 뉴욕에서 사업가가 되었다. 1722년 죽을 때까지 그는 노예들의 회심과 계몽을 위하여 수고하였다. 그는 세례가 노예들을 주인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는 신념에 반대하여 자기의 지지자들과 함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세례 후에도 주인이 노예들에 대한 권위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법령을 통과시키도록 하였다.
인디언들을 위하여 사역하는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특별히 어려움이 많았다. 그것은 각 종족마다 배우기가 매우 힘든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존 엘리오트 당시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기록된 문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자들은 통역자들의 도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설혹 존 엘리오트 같은 사람이 백 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을 도와줄 통역자들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인디언 부족들은 유목민들이었다. 그래서 보통 한 군데에 오래 머물지 않았으므로 그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들짐승들을 따라 그들의 오두막집을 옮기고 항상 이동하는 생활을 하였다. 따라서 그들이 일하는 사역의 각 초소에 알맞은 방식의 복음 사역자들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엘리오트의 뒤를 이어 인디언 사역에 헌신한 사람은 유명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1718-1747)였다. 그는 코네티컷 주 하담에서 태어나 1739년 산책을 하다가 갑작스러운 회심을 체험하고 예일 대학에 진학하였다. 24
세에 그는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으며「스코틀랜드 복음 전파회」(1709년 창설)에 의하여 인디언들을 위한 사역자로 임명받았다. 처음에 그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자 그는 뉴저지의 뉴왁 근처에 있는 크로스윅성(Crossweeksung)에서 인디언들과 함께 살기로 결심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추수의 기쁨을 맛보았다. 그는 1745년 11월까지 이미 4천 8백km가 넘는 거리를 말을 타고 돌아다녔으며, 1745-1746년에는 자신의 표현대로‘놀랄만한 은혜의 사역’을 체험하게 되었다. 1746년 3월까지 이미 130명이 넘는 인디언들이 개종하였다.
그러나 브레이너드는 너무나 과로하여 건강이 악화되었다. 병이 악화되어 은퇴할 수밖에 없게 되자 동생 존이 그의 사역을 넘겨받았다. 그는 뉴잉글랜드에 있는 에드워드(Johathan Edwards)의 집에서 4년 동안의 사역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짧은 사역 기간에도 불구하고 브레이너드는 위대한 선교사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어느 저술가는 브레이너드의 주님께 대한 헌신과 열심은 사도 시대 이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참으로 그의 일기는 경건 서적의 고전이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어 선교 사역에 헌신하도록 하였다. 그 가운데는 인도와 페르시아에서 하나님을 섬긴 헨리 마틴(Henry Martyn)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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