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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교회사 : 감리교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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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감리교 운동

현재 감리교로 알려져 있는 개신교의 한 교파는 18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루터와 칼빈이 죽은 지, 그리고 영국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거의 2백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영국의 청교도 정신은 사라졌고, 국교회의 감독들은 세속에 빠져서 스포츠와 정치와 오락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설교의 내용은 복음의 진리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참된 신앙이 거의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였다. 이때 하나님은 상황을 돌이키기 위해서 택한 종들을 일으키셨다.

1. 신성 클럽(The Holy Club)

당시의 국교회는 완전히 신앙의 형식만 남은 종교 기관이었다. 본래부터 교리보다는 의식에 더 치중해 왔던 터였다. 목사들은 다른 유럽의 교회들처럼 국가에서 주는 봉급을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교회는 국가의 기관으로 머리 된 왕에게 충성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의식화되고 형식화된 교회는 영혼의 문제에 별로 양향을 주지 못했다.

이러한 모습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비치는 당시의 교회 모습이었다. 청교도 신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영혼 구원은 잊혀진 이야기였다. 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술에 빠져 있었고 성경이나 교회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간혹 신앙에 열심인 사람들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막연한 이해밖에 가질 수 없었다. 그저 선하고 착하게 살면 된다는 식의 신앙이었던 것이다.

당시 상류층 사람들은 자신들의 도덕적인 수준을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구원은 버러지 같은 천한 사람들, 무뢰한들에게나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신앙을 하나의 교양 있는 삶 정도로 보는 것 같았다. 천민들은 되는 대로 살아갔고 귀족들은 교만과 악으로 가득해서 재물과 명성을 쌓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도덕은 외형뿐이었다.

신성 클럽은 이러한 상황에서 나타났다. 이 클럽은 1729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몇몇 학생들의 모임으로 시작되었다. 개인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 이 모임을 결성하였기에 이들은 우선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성경 벌레들’(Bible moths)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경건의 훈련을 위해 까다로운 규칙을 준수하며 서로를 감독했다. 그리하여 ‘메소디스트’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이는 지독한 형식주의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매일 저녁에 모여서 6시부터 9시까지 기도, 헬라어 성경과 교부들의 글 읽기, 그 날의 일 검토와 반성 그리고 다음날의 계획 등을 세웠다. 일주일에 한 번은 성찬식을 하였고, 이들은 금식과 기도를 하였다. 자선, 감옥 방문, 병자 위문 등 이들의 선행은 끝이 없었다. 어찌나 열심을 내었던지 옥스퍼드 대학 근방의 술집들이 문을 닫아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수년이 지나도록 신성 클럽의 회원들은 순수한 은혜의 복음을 깨닫지 목하고 있었다. 그들은 구원이 적어도 어느정도는 자신들의 꾸준한 노력과 거룩한 생활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무엇인가 공헌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단독 사역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러한 노력은 서로를 한없이 피곤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피차간에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면 신앙이없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속 끝없이 열심을 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을 해도 웨슬리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었다. 그는 그 모임의 지도자였다. 결국 그는 선교사가 됨으로써 최상의 헌신을 하려고 하였다. 그가 떠남으로 이 모임도 중단되었다.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와 동생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1707-1787)는 링컨셔의 엡워드(Epworth)에서 성공회 목사였던 사무엘 웨슬리와 수산나의 열아홉 명의 자녀들 중 열다섯 번째와 열여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저들은 어머니 수산나로부터 많은 종교적인 영향을 받았다. 존 웨슬리는 영국 국교회에서 임명을 받아 옥스퍼드와 링컨 대학에서 고전 교수로 일했다. 그러던 그는 30세가 지나서야 자기가 받은 사명이 대학에서 편안하게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보다는 복음을 위한 순회 사역자가 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존 웨슬리는 동생 찰스 그리고 다른 두 사람의 옥스퍼드 출신과 함께 1734년 조지아로 향했다. 그곳에 가는 첫째 목적은 선교사가 됨으로써 자신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함이요, 다음으로는 그 구원을 인디언들에게 전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이상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가 이해한 신앙은 자기의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구원을 스스로 이루어가는 것이었다.

존 웨슬리는 선교지에서 3년을 채우지 못했다. 그 짧은 시간이 그에게는 무서운 실패의 기나긴 시간이었다.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했고, 교인 처녀와 연애 사건에 말려들었다. 불명예스런 소문에 그는 연속적으로 감정적이고 조잡한 결정을 하고 말았다. 좌절과 낙망 속에 기진맥진한 그는 본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신성 클럽의 결론이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노력은 인간의 힘이 다함과 동시에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죄에 오염된 인간의 본성만으로는 절대로 율법의 요구 사항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러므로 바울의 고백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 속 내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줄 아노니…’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하나님의 힘으로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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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웨슬레의 회심

웨슬리는 동생 찰스와 영국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몇 달 동안의 여행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폭풍이 몰려왔다. 물결에 배는 거의 뒤집어질 듯하였다. 웨슬리는 아직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무서운 하나님 앞에 설 준비는 더더욱 되어 있지 않았다. 덮쳐오는 파도에 밀리고 있는 그는 이미 죽은 사람처럼 된 가련한 인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그의 귀에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노래, 아니 찬송가였다. 바람 소리, 폭풍우 소리, 사람들의 비명 소리, 물결 부딪치는 소리에도 압도되지 않고 작지만 힘 있게 들리는 소리, 그것은 그와 동생이 예배 시간에 그렇게 열심히 불렀던 찬송가였다. 그는 이 무서운 상황에서 그 찬송가가 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니 하나님조차 그와 아무 상관이 없는 상태가 아니었던가!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노래하는 이들! 그들은 20여 명의 모라비아파 선교사들이었다.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의연한 사람들! 이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 속에는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계셨다. 배와 함께 흔들리면서 고요히 찬송하는 이들의 모습은 진정 천사와 같았다. 이것은 웨슬리 형제들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모라비안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웨슬레는 이들의 비밀이 믿음에 의한 구원의 경험임을 알게 되었다. 모라비안들은 자기들이 실질적으로는 하나님께 사랑받고 구원받을 가치나 자격이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용서받았으며, 용납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진리는 예상치 않은 방법으로 이들을 찾아왔다. 런던에 돌아온 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저녁이었다. 웨슬리는 신앙 문제로 계속 고민하면서 지내다 올더스게이트란 거리의 한 교회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답답하고 메마른 심정으로 앉아 있을 때 앞에서 어떤 평신도가 읽는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이 들려왔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자기의 노력이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말씀은 계속되었다.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으로 삼는 길밖에는 없다. 그 외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지는 길은 없다.”그의 마음속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9시 15분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사람의 심령에 변화를 일으키신다.’는 루터의 고백을 들을 때 내 심령이 이상스럽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지금까지의 방황이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그는 말했다. “나는 확신을 얻었다. 그리스도께서 정말 내 죄를 사하셨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모라비아파 선교사들이 그처럼 평화로웠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졌고 죄를 모두 사함받았다는 놀라운 확신이 그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 앞에 떳떳한데 무엇이 무서우랴!

웨슬리는 자신의 노력으로 선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선을 자기 것으로 삼아서 선하다고 인정받는 것이라는 하늘의 계시를 깨달았다. 이 의는 우리의 선행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온 의였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불렀다. 그것은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기에 루터는 그것을 수동적인 의라고 불렀다.

이제 존 웨슬리는 율법적인 믿음에서 복음적인 회심의 단계로 나아간 것이다. 그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교리를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당시 국교회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교리여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국교회에서는 유아 세례와 성찬의 효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국교회의 입장에서 메소디스트들은 광신자들에 지나지 않았다.

존 웨슬리는 며칠 전에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한 그의 동생 찰스, 그리고 훨씬 더 일찍 같은 경험을 한 휫필드와 한 무리가 되어 복음을 전하기로 하였다. 찰스는 이 체험 후에 6천여 개의 찬송을 지었고 휫필드와 존 웨슬리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까?” 이것이 웨슬리 평생의 설교 주제였다. 말년에 그는 “올더스게이트의 체험은 내게 믿음만이 능력의 원천임을 가르쳐 주었다. 지나간 50년 동안의 경험은 이것이 사실임을 의심 없이 증명해 주었다.”고 회상하였다. 이것은 단지 신비적 체험이 아니었다. 복음의 이해와 함께 오는 바른 신앙 체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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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순회 전도와 부흥 운동

1738년 여름 웨슬리는 모라비안의 본고장 독일의 헤룬후트(Herrunhut)와 마리엔보른(Marienborn)을 직접 방문해 그곳의 모라비안 공동체의 모습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웨슬리는 그곳에 2주 동안 머물면서 진젠도르프를 만나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조나단 에드워드의 부흥운동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면서였으며, 조지 휫필드를 만나 함께 사역하면서였다.

웨슬리 형제와 휫필드는 어디든지 장소만 생기면 설교하였다. 이들의 설교는 부흥회 식이었다. 그들의 설교는 상류층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사람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죄인이요 지옥 자식’이라는 설교 때문이었다. 교양 많고 선행 많고 도덕적으로 수준 높은 상류층은 자신들을 천한 하류층 사람들과 동일시하는 것을 참아낼 수 없었다.

차츰 이들은 일반 교회에서 설교할 기회를 얻기가 힘들어졌다. 더욱이 존 웨슬리가 1744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설교한 이후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는 ‘옥스포드에서는 마귀의 신앙과 불신자들의 생활 방법을 따르는 이들을 훌륭한 신자라고 부르고있다.’고 설교했다. 이때부터 그에 대한 박해는 증가되었다. 이제 그에게 강단을 허락하는 목사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설교할 곳은 이제 야외뿐이었다. 휫필드는 탄광의 광부들을 상대로 야외에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당시 야외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불경건한 행동이었다. 웨슬리도 처음에는 휫필드의 이러한 방법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휫필드는 웨슬리에게 자기의 야외 설교를 도와 달라고 부탁하였다. 1739년 그는 처음으로 3천 명 앞에서 야외 설교를 하였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의 야외 설교와 전도 여행은 평생을 두고 계속되었다. 웨슬리는 전세계를 자기의 교구로 삼았다. 웨슬리와 휫필드는 아무 곳이나 사람들만 모이면 설교를 하였다. 술집이든, 거리든, 들이든, 감옥이든, 대상만 있으면 복음을 외쳤다. 국교회의 지도자들로부터는 계속적인 핍박을 받았다. 하지만 소외된 계층에서는 새로 예수님을 믿기로 한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다. 집단적인 부흥이 계속 일어났던 것이다. 위클리프와 그의 추종자였던 롤러즈(Lollards) 시대 이후로 그러한 전도 전략이 그토록 광범위하고 효과적으로 전개된 적은 없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회심의 체험을 강조하는 이들의 설교는 많은 영혼들을 거듭나게 하였다. 성령의 감동에 의한 중생, 성령의 계속되는 활동으로 변화되어 가는 성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한 사죄, 믿음을 통한 칭의 등의 교리를 강조하는 설교는 영어 문화권의 모든 지역들을 움직였다. 그리고 일
단 중생을 경험한 이들은 너무도 확실한 신자가 되었다.

동생 찰스가 만든 찬송은 당시 부흥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종교개혁부터 18세기까지는 운문으로 번역한 시편이 노래되고 있었는데, 이것은 칼빈이 시작하여 청교도들이 답습했던 관습이다. 그러나 이런 찬송은 신약적인 내용이 부족했다. 그래서 아이삭 왓츠가 이러한 점을 지적하여 찬송을 많이 썼다. 찰
스도 그의 주장을 따라 찬송을 소개하는데 공헌을 하였다.

찰스 웨슬리는 모두 7,000여 편의 찬송시를 썼다. 우리나라 찬송가에도 그의 찬송이 열세 곡이나 실려 있다. 그의 찬송은 부흥에 큰 영향을 미쳤고 영어권 나라에 널리 알려졌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많은 다른 찬송 작가들을 만들어 냈고 공적인 예배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전의 단조로운 시편 찬송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예배 분위기에 혁신을 가져온 것이다.

존 웨슬리는 유능한 설교자였을 뿐 아니라 뛰어난 조직가였다. 그는 사람들의 힘을 어떻게 모으며 그들을 어떻게 지도할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전도 단체를 여러 개의 속으로 나누어서 평신도 지도자들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이 속들을 몇 개의 구역으로 묶어서 각 구역에는 감독들을 배치하였다. 결국 이것이 하나의 독립된 교단으로 성장하여 갔다.

그의 교단은 전에 신성 클럽에 붙여졌던 ‘메소디스트’란 이름으로 불리어졌다. 이번에는 조직이 강하다는 의미였다. 적어도 이 교단은 존 웨슬리가 생존해 있는 동안은 갖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국교회에 충실하게 속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국교회로부터 인정을 얻지 못하자 그가 죽은 뒤에 새 교단으로 분리되었다. 이것이 바로 ‘메소디스트’(감리교)이다.

존 웨슬리는 메소디스트답게 아주 규칙적으로 생활하였다. 그는 건강하였고 대단히 검소하게 살았다. 새벽 4시에 일어나고 첫 설교를 새벽 5시에 하였다. 거의 50이 되어서 한 결혼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열심히 전도 사업에 전력하였다. 성격은 원만한 편이었으며 85세가 되었어도 얼굴빛이 아름다웠고 마음은 행복하였다.

그는 자기 교회를 순회하기 위해 하루에도 20 내지 30km나 되는 거리를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다. 일단 가면 45회에 걸쳐 설교를 하였다. 어떤 때는 3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기다리고 있기도 하였다. 그가 여행한 거리는 40만 km가 넘는다. 그는 일생 동안 13만 5천 명의 교인과 514명의 순회 설교자를 얻었다. 또한 웨슬리는 훌륭한 학식을 갖춘 사람으로 5개 국어에 대한 문법책을 저술하였으며, 몇몇 고전 작가들에 대한 작품을 쓰기도 하였고, 성경 주석을 썼으며, 기독교 저술가들로부터 인용하면서 글을 써나가는 50권으로 된 총서를 준비하는 등, 200여 권의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그 중 가장 훌륭한 것은 매일의 활동을 적은 그의 일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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