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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교회사 : 미국 개척과 청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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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미국 개척과 청교도

아메리카의 개척에 가장 늦게 참여한 나라는 영국이다. 이미 스페인은 대부분의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의 남쪽부분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대부분은 프랑스가 차지하고 있었으며, 지금의 뉴욕 부분은 네덜란드인들에 의해서 개발되고 있었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한 몫을 얻어낸 나라가 영국이다. 하지만 가장 늦게 참여한 이 사람들이 지금의 미국을 건설하게 된다.

1. 신대륙의 영국 식민지

세력이 확장되면서 영국은 전쟁을 통해 네덜란드인들의 영토를 빼앗았다. 차츰 영토를 넓혀 17세기 말쯤에는 스페인이 차지한 플로리다의 북쪽에서부터 메인에 이르는 동부해안 지역을 차지하였다. 영국 식민지의 주된 거점은 버지
니아와 뉴잉글랜드였다. 그러면서 두 지점 사이는 좁아져갔다. 그리고는 서쪽으로 영토가 넓어졌다. 소위 서부 개척이 시작된 것이다.

버지니아는 영국의 최초 식민지로서 1607년 개척이 시작되어 사람들이 보내졌다. 버지니아란 처녀 왕 엘리자베스를 존경해서 붙인 이름이었다. 여기에 보내진 이들은 주로 부랑자들이었다. 영국에는 산업의 부산물로 도시마다 부랑자들이 넘치고 있었다. 이들은 감옥이나 신대륙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이 무위도식자들은 그 비싼 뱃삯도 내지 않고 신대륙으로 보내졌다.

이들을 보내면서 영국인들은 꿈에 부풀었다. ‘이제 새로운 인종이 탄생할 것이다. 그래서 미개한 인디언들은 문명을 전수받게 되고 혼혈의 인종이 새 나라를 세울 것이다. 이 나라는 영국을 존경하고 섬길 것이다. 그리고 영국은 이들
에게 발달한 모든 문명을 심어 줄 것이다. 영국에서 간 백인들과 현지의 토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새로운 나라, 이상의 나라를 건설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부랑자들은 영원히 부랑자였다. 그들은 절대로 일을 하지 않았다. 이들은 영국에서처럼 먹을 것을 구걸하였다. 인디언들도 영원히 이들을 먹여 살릴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친절했지만 결국에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부랑자들은 강도가 되었다. 총으로 인디언들을 몰살시키고 그들이 저장한 옥수수를 모조리 털어 갔다. 이런 일은 한없이 계속되었다.

부랑자들 외에 신대륙에 온 이들은 종교적 불만 세력들이다. 주로 청교도들과 각종 분파들과 가톨릭교도들이었다. 1632년에는 가톨릭교도인 볼티모어에 의해서 매릴랜드가 시작되었다. 여기서 매리는 예수님의 모친을 말하는지 당시
국왕 찰스 1세의 아내 매리를 말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여기서는 모든 이주자를 환영했지만 특별히 가톨릭교도들이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식민지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은 것은 청교도들이었다. 이들은 미국의 건국 정신을 세웠다고 인정될 정도로 분명한 신앙적, 도덕적 기초를 다졌다. 청교도들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한다. 본래 이들은 버지니아를 목적지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물결은 그들을 북쪽 해안으로 밀어 갔고 결국 그들이 도착한 곳이 지금 플리머스(Plymouth)라 불리는 곳이었다.

이들은 영국에서 직접 나오지 않았다.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에 11년 동안을 머물렀다. 본래 고국에서 좋은 직업을 가지고들 있었으나 네덜란드에서는 노동밖에 할 일이 없었다. 그들의 자녀들은 네덜란드 사람들의 풍습을 배워 살고
있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영국인들보다 훨씬 덜 보수적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주일이나 교회 생활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이래저래 이들 영국인들은 네덜란드를 싫어했다.

그렇다고 영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들은 영국인으로 살면서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 신대륙행을 결심했다. 이들의 우두머리는 후에 스스로 플리머스 식민지의 총독이된 윌리엄 브래드포드(Bradford)였다. 그는 신앙심이 투철
한 사람이었고 신학적인 지식도 깊었다. 그가 쓴 일기는 당시 플리머스 식민지 사람들의 신앙과 삶을 살펴보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메이플라워호는 백여 명의 청교도 순례자들을 싣고 있었다. 선실은 환기 상태가 불량하였다. 승객들은 너무도 비참한 여건으로 인해 신음하며 석 달을 풍파 속에서 보냈다. 배가 너무 북쪽에 도착하자 선원들에게 남쪽으로 보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선원들은 거기에 상륙하기를 고집하였다. 때는 11월 중순이었다. 해변은 춥고 황량하였다. 원주민들은 불친절해 보였다.

별수 없이 그들은 거기에 내렸다. 내리자마자 통나무집을 세워야 했다. 가져 온 식량은 얼마 남지 않았고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6개월 동안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고 나머지 사람들의 생존은 기적이었다. 그들의 신앙심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세월이 20년 정도 흐른 후 그 지역은 이만 명이 넘는 청교도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고국의 이름대로 그곳을 뉴잉글랜드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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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청교도들의 약속의 땅

뉴잉글랜드는 청교도들의 땅이었다. 이들은 성경 그대로의 나라를 건설해 보겠다는 뜨거운 의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땅을 종교개혁 시대까지 감추어 두셨다가, 이제야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도성을 세우라는 사명을 주셔서 신대륙에 보내신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여호수아와 그의 백성들로서 ‘구세주의 나라’(The Redeemer Nation)를 건설하고자 했다.

저들의 이러한 확신들은 계약 신학으로부터 흘러 나왔다. 저들은 자신들에게‘분명한 운명’(manifest destiny)이 주어졌다고 믿었다. 그것은 신대륙에 ‘언덕 위의 도시’(a city upon a hill)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언덕 위에 새집을 짓는다란 말은 일상생활 속에 평범히 살겠다는 간단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지칭하며, 선교 명령을 수행한다는 전략적 뜻이 포함된 의미심장한 말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곳을 거론한 것이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으로 진입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듯이, 영국인들의 죄와 영국 교회의 부패를 재현하지 아니하는 참신자
의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결단적인 선언인 것이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뜻이 지배하는 의로운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심부름하는 아이들’로 보내졌다고 믿었다.

이 일을 위해서 총독은 진실한 신자로서 성직자 못지않은 신앙과 학문 그리고 인격을 가졌으며, 목사들 또한 총독 못지않은 권력을 가졌다. 목사들은 모든 면에서 사람들의 지도자였다. 만약 주일 성수를 하지 않고 못된 짓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대로에서 벌을 세우기 위해서 묶어 놓을 수도 있었고 채찍을 가하도록 시킬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신정 정치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청교도들은 신앙 고백의 내용을 믿을 뿐 아니라 깨닫기도 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덧붙여서 그 내용들을 행동에 옮겨 눈에 보이도록 선행을 하여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인간의 선행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의가 인간에게 전가된 것을 믿어야 가능한 것이며, 이렇게 의롭게 된 다음에야 하나님은 힘을 공급해 선행을 하도록 도우신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에게 복종하여 그분의 도움으로 선한 일을 하게 되는 것이 성화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선행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것이므로 그것만으로는 신앙이 좋은지 안 좋은지 알 수 없다. 또한 선행으로 얼마든지 자신을 선한 사람으로 속일 수도 있지 않은가!

청교도들은 진실로 중생한 사람인지 아닌지 밝혀내는 일에 관심이 높았다. 그래서 절대로 아무나 교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선 교회를 세울 때에도 최소한 일곱 명의 발기인들이 서로의 신앙과 인격에 대해 만족하고 있어야 했다. 교인이 될 수 있는 기준은 중생의 체험과 기초적 교리에 관한 지식이었다. 일곱 명 이상의 발기인들은 이웃 교회의 목사와 지역 행정관을 모셔 와서 자신들의 자격을 심사받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세워질 수 없었다.

만약 이런 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그들 중 몇 사람의 자격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일곱 명 이상의 유자격자들이 나타날 때까지 교회 설립은 보류되었다. 일단 교회가 설립되면 칼빈의 가르침대로 목사, 교사, 장로, 집사 등으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세워지고 다시 이들에 의해서 새로운 교인의 자격이 심사되었다. 여기서 교사란 오늘날의 신학교 교수 정도의 직책으로 보면 되겠다.

어떤 사람이 교회의 교인이 되고자 할 때는 장로들 앞에 나와서 자신의 신앙적 지식과 체험을 시험받아야 했다. 신앙 지식이 빈약한 자, 중생하지 못한 자, 또는 문제아는 여기에서 일단 걸러졌다. 만약 시험에 통과되었다면 전체 교인들 앞에 소개되었다. 그때 교인들이 그 사람의 문제점들을 말하는 순서가 있었고 거기서 지적당한 명백한 잘못은 공중 앞에서 회개하는 과정이 있었다.

여기까지 무사히 통과하면 몇 사람이 교회 앞에 이 사람을 교인으로 받아줄 것을 요청하는데, 약 15분 동안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를 간증한다. 그러면 여러 질문들이 따라 나온다. 그런 연후에 교인들이 좋게 생각하면 자신의 신앙을 대중 앞에 고백하고 교인들은 투표로서 그의 영입 여부를 결정한다. 통과되면 교회로부터 교인됨을 공식적으로 통고 받았다. 얼마나 교인되기가 어려웠던가!

이들은 택한 백성이라는 분명한 긍지가 있었다. 이들은 주일을 성수하고 십일조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을을 떠나야 했다.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 가장은 가족 전체를 포장마차에 태우고 수십리 길을 달려갔다. 설교는 보통 서너 시간씩 계속되었고 주로 성경을 강해하였다. 아이들도 어른들과 함께 설교를 들었다. 예배 후 돌아가는 길에 가장은 가족에게 목사의 설교를 정리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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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국의 청교도 전통

17세기 전체를 통해 영국의 불안정한 정세, 특히 청교도들에 대한 박해는 많은 이주민을 북아메리카로 떠나게 했다. 특히 제임스 1세의 박해와 그 아들과 후계자 찰스 1세 치하의 박해 동안 더 많은 청교도들이 고국을 등지게 되었다. 청교도들은 회중교도, 장로교도, 침례교도 그리고 여러 부류의 좀더 특수하거나 과격 집단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7세기 후반에는 퀘이커교도들도 이주해 왔다. 이들은 청교도들 중에 과격파로 분류된다. 퀘이커는 모든 종류의 폭력을 거부하였다. 설립자 폭스는 그의 괴상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심오한 신앙적인 확신과 지도력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영국에서는 다른 청교도들보다 더욱 심한 박해를 받았지만 그 수가 급속히 늘어났다. 이들의 많은 수가 미국으로 이주했던것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지금의 펜실바니아 주로 이주하였다. 1682년 세워진 이 주는 윌리엄 펜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는 1667년에 퀘이커교도가 되었다. 이미 저명한 인물이었던 펜의 전향으로 퀘이커교도들은 지위가 높아졌다. 펜은 자신의 부와 영향력을 가지고 자신의 동료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여 안식처를 찾았다. 이곳은 처음부터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은 주로 뉴저지 주에 정착하였다. 영국인들 외에도 독일, 화란, 스칸디나비아 등에서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1685년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철회함으로써 수많은 위그노들이 조국을 등지고 신대륙으로왔다. 이리하여 수많은 개신교도들이 본국을 떠나 신앙의 자유와 새로운 삶을 찾아 아메리카로 몰려들어 여러 인종의 집합장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청교도들의 삶은 미국의 근본적인 전통을 세워 주었다. 19세기 중반까지 백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의 머리글자를 조합한 와스프(WASP)란 단어는 미국 정신의 중심이 되었다. 이 기본 정신을‘녹이는 국솥’(melting pot)으로 해서 다른 이민들의 문화를 여기에 동화시켰다. 아무리 새로운 인종들이 몰려와도 여기에 흡수될 뿐이었다.

영국 청교도들의 삶이 미국의 근본적인 전통을 세워주는 기초가 된 데에는 청교도 신앙에 의거한 교육이 그 효과를 거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메사추세츠 식민지에서는 1640년에 50세대를 가진 지역마다 1명의 교사를 두어 읽고, 쓰고, 셈하는 소위 3R(Reading, Writing, Arithmetic)의 초등 교육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규칙은 급속도로 다른 미국 식민지에도 영향을 주어 식민 주민이 내는 세금으로 공립학교나 교회 학교가 설립되었고, 사람이 적게 사는 산간벽지에는 순회 교사를 파견하여 문맹을 퇴치하였다.

1636년에는 미국 최초의 대학인 하버드가 매사추세츠 주 캠브리지란 곳에 세워졌다. 대학 이름은 존 하버드(1607-1638)를 그리고 장소 이름은 그가 영국에서 나온 대학을 기념한 것이었다. 하버드는 1638년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자녀도 없었다. 그는 자기 재산의 절반과 장서 320권을 기증하였다. 하버드 대학은 청교도들의 거주지에서 그들의 신앙과 학문을 위한 지도자 양성에 들어가게 되었다.

저들은「학문을 발전시켜, 이것을 자자손손에게 영원히 전해주며, 장차 교회가 학문을 배우지 못한 목사에게 맡겨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동 대학 교문에 새겨져 있는 1643년의 문서)라는 신념 아래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비슷한 취지로 17세기부터 다른 주에도 대학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일례를 들면
1693년 버지니아에 윌리엄 메리 대학이, 1701년에는 코네티컷에 예일 대학이, 1746년에는 뉴저지에 프린스턴 대학이, 1754년에는 뉴욕에 컬럼비아 대학이, 1755년에는 펜실베니아에 브라운 대학이 설립되었다. 이 대학들은 성경 학습과 일반교양 학습을 교과 과정으로 채택함으로써 미국에 청교도적인 전통을 수립해 나갔다.

미국은 이 전통에 의해서 문화적인 보수 성향을 유지했다. 유럽처럼 자유주의 사상에 쉽게 물들지 않고 거의 20세기 초반까지 전통적인 신앙을 유지했다. 청교도들의 근면과 검소하고 정직한 삶의 태도는 미국인들의 자부심이었다. 계약 사상은 미국식의 중상주의와 민주주의 토대를 제공하였다. 과연 청교도들은 미국인들이 나라의 조상들이라고 여길만하였다.

청교도들의 삶은 늘 정돈되어 있었고 사는 거리는 깨끗하였다. 그들의 생활은 풍족하였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하나님 말씀을 자신의 진리요 힘이요 일용할 양식으로 삼았다. 그들은 신앙을 실천하려고 하였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축복하셨다. 그들은 영국에서 하지 못하던 단순하고 소박한 그러나 말씀대로의 예배와 생활을 신대륙에서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전통만큼 경건심까지 오래 계속된 것은 아니다. 겨우 한 세대로 그치고 만 것이다. 그들의 후손들은 부모덕에 부요해지고 질서가 잡힌 미국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부모의 경건은 점점 잊혀져갔다.

그래도 청교도 신앙은 장로교, 침례교, 회중교회 뿐 아니라 여러 종파들의
뿌리가 되었고 그 정신은 미국인들의 마음속에 언제까지나 살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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