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십자가와 구속
제 1 장 참 놀라운 십자가
(갈6:12-14)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의 전도와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다. 바울이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는 요점은 이 세상에서의 삶은 매우 심각하고 엄숙한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는 다 죽게 되어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되며 몸으로 행한 행실을 그 앞에 직고할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은 우리가 이 세상의 삶에서 행한 것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인생은 거대한 과제이다. 육체를 위하여 심느냐, 성령을 위하여 심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인생은 심고 거두는 것의 문제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어떻게 하면 성령을 위하여 심느냐? 어떻게 살아야만 이 세상과 오는 영원한 세계에서 기쁨과 행복과 평강의 축복을 거둘 것인가?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성경 전체가 그 문제의 해답을 말하고 있다.
- 참 메시지는 무엇인가? 무엇이 기독교 복음인가? 여기 대사도가 우리를 위해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는 그가 자랑하는 것이다. 바울이 지적하는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 위에서의 죽으심이다. 사도들은 모두 한결같이 자기들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메시지를 전하노라‘고 말했다. 사도들은 그 십자가를 전했으며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결코 인기가 없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고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 십자가를 전하면 그것이 언제나 사람들에게 거침이 되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전했고 그들이 계속 고수해 나갔기 때문에 급기야는 고난을 받아 순교의 죽음을 당하였다.
- 기독교 복음은 일차적으로 주님의 교훈이 아니다. 오늘날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산상설교)의 대목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든 세대 중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적 존재로 생각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만을 설교한다면 인류의 난제를 풀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을 더 악화시켜 순전한 정죄감 밖에는 불러 일으키지 못할 설교를 하는 격일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 산상설교를 이행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산상설교 외에는 자랑할 것이 결코 없나니 예수님의 윤리적 교훈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노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가르치지 않았다. “기독교 메시지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가 산 것처럼 살기로 작정하자”라는 식으로 자주 설교를 한다. 기독교 메시지는 결국 그 국면에 이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메시지의 핵심도 아니고 우선적인 것도 아니다. 사도가 최초로 전하는 것은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사건의 의미이다.
- 또한 신약을 검토 해보면 십자가가 우리 주님 자신의 가르침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음을 발견한다.(마16:13-23) 베드로가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위대한 고백을 하고 난 후에 우리 주님께서 즉각적으로 자기가 죽으실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으며, 제자들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음을 알수 있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책망하시며 사실 이렇게 말씀하신 셈이다. “너는 이해하지 못한다. 너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자체가 너희를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 너희를 구원하는 것은 내가 이제 막 하려고 하는 그 일이다.”
그런 다음에 최후의 만찬을 배설하고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19-20) 주님의 가르침 속에 그 십자가가 명백하고 분명하고 단순하게 들어 있다.
- 변화산상에서 모세와 엘리야 두 사람이 영으로 나타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달아날 방도를 모색했었다고 하지만 율법과 선지자들의 대표격인 모세와 엘리야가 십자가에서의 주님의 죽음에 관하여 주님과 논의하였던 것이다. 십자가가 중심이다.
복음서를 읽고 우리 주님의 죽으심에 할애된 분량을 비율로 계산해 보고 얼마나 상세하게 그것이 묘사 되었는지 살펴 보자. 그렇게 두드려져 있는 것은 중차대하고 중추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복음서들은 십자가로 가득 차 있다.
사도행전 13:14-41을 읽어 보라. 바울은 안디옥 사람들에게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강조했고, 특히 바로 이 사람과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전파되고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롬 3:20-25)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
(롬 5:06-10)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장, 2장, 15장, 고린도후서 5장을 읽어 보라. 우리 주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전도가 기독교 복음전도의 가장 본질적이고도 중심적인 메시지이다.
-어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피에 야유를 퍼부으며 십자가가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가르침이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는 것이라고 말할 권한이 있는가? 신약 전체는 그리스도의 피,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선포한다. 그것이 기독교 복음의 중심이요 구원의 좋은 소식이다.
-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제일되고 중추적인 것이다, 사도가 그것을 전했던 첫 번째 이유이다.
두 번째 그가 왜 이것을 자랑하는가?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이 십자가로 말미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십자가를 전한 까닭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케 하고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점은 절대적으로 사활을 좌우하는 요점이다.
십자가는 우연적인 사건도 아니고 공포스런 비극도 부끄러운 사건도 아니다. 그 십자가를 중심에 전면에 놓으라. 십자가를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선포하라.(갈3:1) 십자가를 후회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그것을 잊으려고 하거나 이상화시키려 하지 말라. 또한 십자가에 대하여 철학적으로 말하려 하지 말라. 또 그것을 아름답고 기이한 것으로 만들려고도 하지 말라. 여러분이 할 말은 “나는 그것을 사랑하노라”여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지 아니하셨으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전해야 할 복음도 없었을 것이다.
- 이 십자가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는가?
여러분은 작은 갈보리 언덕위에 세워진 세 개의 십자가를 바라보라. 그리고 중간에 있는 십자가와 거기에 달려 죽어가는 그분을 바라보라. 그 분은 누구인가? 그는 종교적으로 뛰어난 천재인가? 정치적 선동자인가?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주’이시다. 예수님은 영광의 주님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다. 그는 복되신 성삼위 중 제2격이시다. 그는 성자 하나님이시다.
그 분은 자신이 어째서 세상에 오셨는지, 그 십자가 위에서 무엇을 하셔야 하시는지 정확히 말씀하셨다(마20:28). 하나님의 아들은 죽기 위해 하늘로부터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바로 그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던 것이다. 죽음의 고난을 받기 위해서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되셨던 것이다. 죽기 위해서 인성을 취하셨다. 저와 여러분과 모든 인류가 죄 아래 있고 거룩한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기 때문에, 멸망당할 이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
-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시다. 죄를 심판하셔야 한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 구약에서 죄에 관한 희생제사에서 보게 되며, 애굽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죽음이 지나쳤으며 그들의 죄는 심판받지 않았다.
세례 요한은 “보라 ---저 하나님의 어린양,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외쳤다. 다른 모든 것들의 모형과 그림자와 상징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참된 하나님의 어린양이 오셨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가 받으실 제물을 공급하셨다. 저와 여러분의 죄를 취하여 그 자신의 아들의 머리위에 두시고 그 아들을 치셨다. 심판으로 끝내 죽이셨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갈2:19-20)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것이 복음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율법이 그리스도 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나는 자유케 되었다.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오직 한 가지 일은 이 메시지를 믿는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 말라. 만일 여러분이 그렇게 말한다면 진리를 알지 못한 것이다. 여러분이 어떠한 사람이었던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가 십자가에서 여러분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대신 형벌을 받으신 것을 믿고 감사한다면, 여러분은 철저하고 완전하게 의롭다 함을 받는다. 사도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는 전 세계를 두루 다니면서 전할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을 찬미하며 모든 날들을 기쁘고 즐겁게 보내고 있는가?
제 2 장 진위 테스트
(갈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 우리에게 있어서 중대한 문제는 성령을 위하여 심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다.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심 만을 믿어야 하며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참으로 의지해야 할 권위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하여 명백해야 한다. 성경이냐 아니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다른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만일 이 책에 기초하여 의견을 말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하고 싶지 않다.
참된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못박히심” 십자가에 대한 우리 주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그의 죽으심이 바로 핵심이요 중심이다. 그 주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기 때문이다.
- 사도는 단순히 십자가를 믿는다고만 말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기독교 신앙고백을 시험하는 시금석이다. 사도는 십자가에 대해 궁극적으로 두 입장만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거치는 것이 되든지, 아니면 우리가 그 다른 어느 것보다 더 자랑하는 것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어디에 서 있는지 명확해야 한다.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는 모든 지식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미련한 자가 되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나는 지혜에 대해 안다. 그것은 감추인 지혜이다 그것은 신비요 하나님의 지혜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류의 삶을 사느냐를 결정할 뿐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점은 긴박하게 하나의 결단을 요구한다.
- 십자가의 도가 불신자에게는 거치는 것이라고 한다(고전1:23). 바울은 자기 동족들에게 핍박을 받고 학식있는 헬라 사람들에게 비웃음과 조롱을 받았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이며, 기독교에서 마져 십자가를 조롱하는 일이 있다. 그들은 피를 언급하면 질색하며 “피의 신학”이라고 부른다. 구약의 번제와 희생제사들을 원시적인 종교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십자가는 어설픈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현대인들에게는 여전히 거침돌이다. 십자가를 가장 크게 꺼리는 사람들은 표면상으로 십자가는 매우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는 류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십자가를 감상주의적인 관점에서 보고 큰 정념을 가지고 십자가에 대해서 말한다. 십자가를 실상 그대로 알면 참으로 거치는 것임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가장 아름다운 것 일종의 심리적인 행동 등으로 추락시킨다.
- 십자가를 바르게 가르치고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를 알아보는 시금석은 십자가를 전했는데 그것이 자연인에게 아무런 거리낌이 되지 못했다면 십자가를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십자가에 대한 거부감을 전혀 느끼지 않았거나 그것이 여러분에게 거리끼는 것임을 느끼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안 적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연인이었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왜 십자가는 자연인에게는 거치는 것인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과 본질은 같기 때문에 1세기나 20세기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첫 번째, 그것은 현대인의 이지에 거리끼는 것이다. 이유는 그 전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선입견적 관념들과 상념들을 다 잘라버리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구세주가 권능과 능력을 소유한 큰 왕과 정복자로 오셔야 했다. 십자가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일을 한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일에 대하여 나름대로 상념을 가지고 있어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십자가는 바로 그러한 생각들을 도려낸다.
두 번째, 십자가는 대번에 우리가 관념들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선포한다. 생각이나 이해, 철학으로 구원받지 않는다. 가장 선한 사람들,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이 우리를 구원하지도 않는다. 십자가는 그들이 믿는 것을 다 무산시켜 버린다.
세 번째, 사람들은 십자가에 대한 전체 개념이 부도덕하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하여 그 아들을 징벌하고 죽이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은 공정하지 못한 것이고 그들의 정의와 도덕성의 의식과는 전혀 배치가 된다고 주장한다.
- 그들의 생각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믿지 않겠다. 내가 이해하기 전에는 어느 것에도 내 자신을 맡기지 않겠다.” 사람은 스스로 모든 진리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십자가는 신비이다. 대속이 신비요, 죽지 않을 자가 죽는 신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이다. 그들이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신적인 것이고 이적적인 것이며 초자연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미워한다.
- 모든 인간의 고통들은 교만에서 파생된다. 사람이 타락한 것도 교만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것이 우리더러 교만에 영합하여 우리를 높이고 자신을 믿으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교만을 참으로 훼손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왔을 때 그를 미워하였을 뿐 아니라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 오셨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말한 것처럼 선행을 하는데 시간을 보낸 것이다.
-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찿아 구원하려 함이로다”(눅19:10) 이 말씀은 그들을 격분케 하였다. 자기들이 구원받는 쪽에 있는 것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타락하여 구원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잃어버린 자들이라는 암시를 싫어했던 것이다. 그들은 “내가 백퍼센트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소. 그러나 저 절망적인 사람과는 다르오. 세상에는 선과 악이 있고 또 종교적인 사람과 비종교적인 사람들이 있소. 모든 사람들이 같은 입장에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되오. 당신은 모든 도덕적 원리마저 다 파괴시키고 있소. 당신은 방종과 방탕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오” 세상은 선을 행한다고 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 그들은 조직을 구성하고 세상을 바로 잡으려고 애도 쓴다.
-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차이가 없다고 한다. 우리의 모든 의가 더러운 옷과 같고, 우리가 가장 좋게 여기는 것은 모두 분토와 배설물이요, 전적으로 쓸모가 없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능력을 믿는 우리에게 당신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우리를 땅바닥에 메다꽂아 버린다.
여러분은 땅바닥 먼지와 재와 흙 가운데 절망적으로 누워 끝내 소망이 없는 존재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그리고 마음이 상한 적이 있는가? 이는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를 믿으라는 현대의 이단과는 전혀 반대가 되는 것이다.
-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이다. 바울은 단순히 십자가에 탄복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단순히 아름답고 기이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순히 그것을 그저 믿고만 있지도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믿을 뿐 아니라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이다. “결코 자랑 할 것이 없으니” 십자가를 떠벌리고 자랑하는 것이다.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것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역사상 가장 의미심장한 일이었고 일어난 사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임을 의미한다.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 됨을 뜻한다. 그가 그 됨도 십자가 때문이다. 그것 없이는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찾는다. 바울이 여기서 자랑한다는 말이 그러한 뜻이다.
- 그는 그로 하여금 십자가를 자랑하도록 만드는 것을 그는 그 십자가에서 본 것이다. 죽지 않을 자가 죽다니요! 전 우주에서 그처럼 놀라운 광경을 어디에서 볼 수 있겠는가? 사랑과 슬픔이 함께 하고, 왕관과 가시가 함께 어우러져 있음을 본다. 죄 없으신 분이 징벌을 당하는 것을 본다. 전적으로 완전히 무죄한 자가 악하고 무가치하고 비열한 자를 위해서 죽어가고 있다. 이 끝없는 역설, 전혀 모순되어 보이는 것들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가 되어 광채와 영광을 발하고 있다.
또 “말씀” 되신 영광의 주를 본다.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잡고 계시는 분” 원자핵들을 붙잡고 계시며 전 우주를 장악하고 계시는 분, 바로 그분이 기진하여 죽어가고 계심을 발견한다. 능력과 무능력이 동시에 함께 어우러져 있다. 아버지의 영광만 생각한 나머지 자기의 영원한 영광을 버리고 실로 종의 모양과 형체로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분을 본다.
- 그 분을 다시 볼 때, 무엇보다 더 놀라운 것은 사랑함으로 그 모든 일을 행하셨다는 점이다(롬5:6-10). 여러분과 저를 사랑하는 그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다(갈2:20). 신성 모독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인 다소 사람 바울을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셨다. 이것이 바로 그의 사랑의 분량이다. 이 모든 것의 희미한 그림자만이라도 보았다면 그것을 믿지만 말고 그리고 그것을 찬미하지만 말고 그것을 떠벌리며 자랑해야 한다.
-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그 사실을 진실로 믿는가?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으면 진실로 믿는다고 말할 수 없다. 여러분이 진실로 믿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안다면 그것은 여러분에게 모든 것이 된다. 그것이 여러분의 모든 것이 되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당신은 십자가를 자랑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성령을 위하여 심어 왔고 심고 있으며, 결국 영생을 거둘 것이라는 말을 들을 만한 것이다.
제 3 장 하나님의 지혜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그리스도인은 무엇이 일어나든지,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지, 원자폭탄이든지, 내게는 십자가에서 일어났던 일에 필적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제 우리는 멈추어 서서 다른 모든 것은 옆으로 제쳐 놓고 그 십자가를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영광스런 십자가가 함축하고 있는 이 심오한 것들, 무한한 것들과 광대한 것들 중 얼마를 발견하기까지 십자가를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하는 일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 성경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무엇 때문이라고 말하는가?
첫 번째, 그 십자가 사건은 그저 단순한 사람들의 행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언된 일이었다. 이사야 53장, 시편 22편을 읽어 보라.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께서 당하실 죽음에 대한 완벽한 예언이다. 유월절 어린양과 모든 번제들과 희생제물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날이 올 것을 예언하는 것이었다. 요한복음 3장14절에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친히 죽으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베드로의 첫 설교에서 “그 나사렛 예수, 예수 그리스도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그렇게 되도록 정하신 이는 하나님이셨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미리 정하셨던 것을 시간 세계 속에서 행하고 있었던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처음과 끝이시다.
- 아담 타락 이후에 태어난 우리는 비참한 죄인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우리 각자 모두에게 있어서 인생은 하나의 도덕적 난제요, 도덕적 실패요, 도덕적 난관이다. 인간은 문명을 발달시켜 일을 바르게 하려고 노력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처럼 악하고 교육은 받았지만 더 도덕적이지 못하다. 아무것도 더 나아진 것이 없다. 어떻게 하면 정결하고 건전하고 순결하고 정조 있는 삶을 살 수 있는지 그 법을 모르고 있다.
왜 바울이 그것을 그처럼 자랑하는지 아는가? 하나님께서 이 비참하고 곤고하고 실패로 가득 찬 죄악 세상을 위하여 세우신 계획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다.
- 두 번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계획의 중심이다.
영원한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드러내고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는 성자만 계신 것만 아니고 성부도 거기에 계신다. 우리의 모든 고통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데서 나온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성품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내보이지 아니하시면 하나님을 알 도리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고 있는가? 심리학이, 현대의 모든 지식이 여러분 자신을 알고 이웃을 알도록 진실로 도와주는가? 진정 그것이 생과 사에 대한 참된 이해를 주는가? 배우면 배울수록 우리의 무지가 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자연을 통해, 은사를 통해, 유대인을 통해, 역사를 통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밖에는 보지 못한다. 요한은 요한복음 1:18에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하나님이 가지신 존재의 속성 때문에 우리는 계시된 것 외에는 알 수 없다. 복음의 메시지는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자비롭고 은혜로우사 창조를 통해서, 섭리와 역사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을 뿐 아니라 그보다도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자신을 계시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 아들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의 영원하신 품 속에 계시다가 아버지에 관하여 우리에게 가르치고 일러주시러 오셨다. 그 분은 십자가 위에서 그 점을 최고로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모든 것이 바로 이 십자가에 다 응축되어 있다(요14:6). 예수 그리스도, 특히 그의 십자가상의 죽음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알고 싶고 영원하시고 영존하신 하나님을 알기 원한다면 여기 오직 한 길, 저 놀라운 십자가를 쳐다보고 응시하고 묵상하고 곰곰이 생각하라.
- 거기서 볼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복음은 우리 중 누구라도 우리 자신의 손으로 구원받지 못하며 오직 전적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으며 바로 설 수 있다고 말한다(엡2:8). 사람들은 수세기에 걸쳐서 그것을 시험해 보았다. 만일 여러분이 하늘에 갈 만하다고 여긴다면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러나 지옥밖에는 받을 자격이 없음을 아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다. 여러분의 의를 다 떼어내 버리라.
- 두 번째는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심을 말한다. 하나님은 죄와 타협할 수 없다. 빛과 어두움, 선과 악이 서로 타협할 수 없다. 하나님의 진노는 모든 불의에 대하여 나타난다(롬1:8). 우리들은 순결과 절대 의와 절대 거룩을 생각할 수 없다. 죄를 그저 행동의 차원에서만 생각하지 말라. 죄는 태도의 문제이다. 죄를 죄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요, 불의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더 악한 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다.
- 세 번째는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이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며 동시에 어떻게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가? 바울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 네 번째는 하나님의 불변성이다. 하나님은 변하지도 변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그는 언제나 당신이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신 그대로 존재하신다. 비록 그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바꾸지 않으신다.
- 다섯 번째는 “우리를 향한 사랑”이다(롬5:8). 용서한다는 수동적이고 타율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의 육체 속에 죄를 정하시고 십자가에 세우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사야 53장을 다시 읽어보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후5:21).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내어 주셨다”(롬8:32). 그는 친히 아들을 때렸다. 여러분과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아들에게 행하신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굴을 돌리신다. 우리가 징벌을 당하지 않고 지옥에 가지 않고 지옥에서 비참과 불행 속에서 영원히 보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 일을 하신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하신 것은 십자가의 메시지가 전파되기 위함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 그분이 여러분의 죽음을 짊어지고 대신 죽으시고 여러분이 당할 형벌을 지시고 여러분 대신 고통을 받으셨음을 믿으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여러분이 평화를 얻었음을 믿으라. 여러분이 즉시 용서를 받으셨음을 믿으라.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에 의해서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 내 모든 의도 십자가를 생각할 때 다 헛되다. 내가 이러한 일을 알게 되는 것은 십자가를 곰곰이 생각할 때이다. 그 십자가 속에서 모든 신적 속성들의 조화를 보게 된다. 거룩과 사랑을 보며, 긍휼과 진리가 함께 만나며, 의와 평화가 서로 입맞추는 것을 본다. 그 속에서 의와 사랑과 자비와 긍휼 사이에는 전혀 모순이 없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느니라.”
- 자기의 선한 행위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 교회에 다닌다고도 말하지 말라. 여러분은 십자가를 자랑하고 있는가? 그 십자가가 여러분의 모든 것이 되는가? 그것이 여러분의 생명인가?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는 한 그 십자가를 알지도 못했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보지도 못한 것이다. 그것을 보지 못했다면 그것을 진실로 믿지 못한다. 만일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모두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눈을 열으사 십자가의 영광을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제 4 장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바울은 자기가 이스라엘 사람이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이요, 팔일 만에 할례 받았다는 사실을 자랑하곤 했다. 또한 율법의 지식에 능한 사람이요, 지극히 종교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했다. 그는 언제나 강하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모든 것은 끝장이 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우리는 무엇을 자랑하고 뽐내고 있는가? 그것의 대답은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알게 한다.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기 사상의 중심에 놓고 자랑하며 그것에 의하여 가장 깊이 감동을 받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지 못한 데도 자기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만일 그리스도의 십자가보다 자기 나라를 더 자랑한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다.
-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이유는 구원이 바로 그 십자가로 말미암기 때문임을 알았다. 우리를 구원한 것은 십자가 위에서의 주님의 죽으심이다.
세상은 위대한 영웅들, 큰 일을 한 사람들을 기억하기를 좋아하고 그들에 대해서 읽고 바라보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을 자기들의 자랑으로 삼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그러한 방식으로 죽은 것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인가를 이해한다면 그 외에 다른 모든 것은 의미가 없어진다. 십자가가 영원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속성들, 하나님의 지혜, 세상과 우주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 등을 어떻게 우리에게 드러내 주는지 알게 된다. 그 십자가에서 그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과 불쌍히 여겨주심과 오래 참으심이 나타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의 완전성과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서 궁리하신 그 방도에 대한 것도 알게 된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알게 될 때 우리 앞에 어느 것도 서 있을 수가 없다.
- 바울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십자가가 그에 대해서 하는 일 때문이다. 바울은 자기에 관한 한 그 십자가가 세상을 못박아 죽였다고 말한다. 그 십자가가 세상을 제거시켰다.
세상과 세상을 대표하는 모든 것이야말로 세상의 인간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비극들의 주요 원인이다. 우리의 모든 시련과 환난을 산출하는 것도 세상이다. 세상에서 건져 주는 오직 유일한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다. 한 타입은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 세상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랑한다. 또 다른 타입은 더 이상 자기가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자랑한다. 자기들은 외인이요, 나그네요, 여행자요, 순례자들로 이 시간 세계를 지나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한다. 아벨이나 가인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다같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세상을 향하는 이상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바울은 자기가 처해 있는 그 세상에서 건져내어 전적으로 새로운 영역에 서게 하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자랑하며 감사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십자가가 우리에 대하여 세상을 십자가에 못박았고, 바꾸어서 그는 대신 세상에 대해서 십자가에 못박힌 바 된 것이다.
- 세상의 의미는 무엇인가? 세상이란 물질적인 우주를 의미하지 않고 사고방식이나 관점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서 생각하고 보고 영위하는 삶을 의미한다. 삶과 죽음과 인간과 다른 모든 것을 하나님과 성경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보는 관점이다. 세상은 과학이나 철학, 인간적 사상 같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 없이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집합하여 놓은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의 탐구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한다(고전1:21).
- 또 바울은 세상이란 이 세상의 풍속을 따라서 영위되는 삶이라고 말한다(엡2:1-2). 그 사고방식은 인간적인 생각과 능력에만 의존하여 있다. 그 나름의 교훈과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 그것은 사람을 중심에 놓는 방식이요, 사람을 궁극적인 권위로 만드는 사고방식이다. 그것은 이 세상밖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관점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 대다수를 통제하고 있는 생각이요, 그리스도인이 아닌 모든 사람들을 조정하고 있다. 그들은 초자연적인 것이나 기적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을 믿지 않는다. 사람 위에 사람보다 초월하는 어떤 것도 믿지 않는다.
-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라고 말할 때에 바울은 자기가 그러한 사고방식에서 건짐을 받은 사실을 자랑한다.
- 세상적 사고방식의 특징은 탐욕이다. 탐욕은 강한 욕심을 말한다. 성경은 이생은 욕심의 조정을 받는 삶이라고 말한다. 비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을 부정하며 자기들은 지성에 의해서만 통제를 받는다고 말한다. 인간은 그 속에 엄청난 충동을 가진 존재이다. 내면에 원초적인 본능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이성보다 더 강력한 것이 정욕과 욕심과 엄청난 충동이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한다. 그것은 탐욕과 불순한 정욕 같은 것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 요한은 그것을 “육신의 정욕”이라는 말로 특징지어 말하고 있다. 세상의 삶은 주로 몸을 위해서 영위되는 삶이라는 뜻이다. 먹고 마시고 섹스를 위해 살고 있다.
“안목의 정욕”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외모와 겉치레와 화려함을 숭배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과는 다른 외적인 모든 것이다. 안목이란 말이 뜻하는 것은 체면과 부정직함과 위선을 말한다. 모든 것이 외양을 위해 드려진다. 사실과 실체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위장과 회칠이요, 그 뒤에는 상한 심령이 없다. 주님께서는 바리세인에게 “너희는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고 청결히 하나 안은 그렇지 않다-그 안에서 너희들은 무엇을 발견하는가? 그 안에는 더러운 것들과 쓰레기가 있을 것이다. 거기서 너희들은 어리석은 것만 발견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이다. 그런 다음 모든 것을 덮어 가리고는 야심과 교만(헛된 긍지) 정욕이 삶의 긍지를 형성하고 그런 것을 자랑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위해서 살아가며 그 속에서 영광을 취한다. 위대하고 중요해지기를 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생의 자랑이다. 이것이 세상에 속한 사람의 삶에 대한 성경의 분석이다.
-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세상을 이처럼 무섭게 만드는 것이다.
가인의 죄는 바로 그것이었다. 하나님께 제사를 지낼 때 피 있는 희생제물로 드려야 된다는 하나님의 법을 동생은 지켰지만 가인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지적해 주실 때 만일 가인이 속죄제를 드릴 수만 있다면 용서 받을 수도 있었고 회복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반역했었다. 세상적인 사고방식은 언제나 그러한 결과를 가져온다.
- 전쟁은 궁극적으로 가진 자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 사이의 투쟁이다. 인간 역사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억누르고, 강한 자가 강한 자를 대적하여 싸우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탐욕이고 이것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특징 지어지는 세상적 사고방식이다. 성경 외에는 세상의 진정한 본질과 성격을 보여 주는 것이 없다. 하님의 영원한 아들이신 그가 왜 세상에 오셔야만 했는가? 세상은 너무나 포악하고 썩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오지 않고는 그 어느 것도 세상을 구원할 수 없었다. 그 주님이 오심으로써 우리의 눈이 열려 세상의 상태를 보게 된 것이다. 만일 어느 다른 것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이 그 일을 해냈을 것이다. 율법은 철저히 실패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야 했다.
- 예수님은 외모에는 이생에서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안목의 정욕을 불러 일으킬 만한 것도 없었다. 그는 온유하고 겸손했고 정결하고 거룩했고 자신을 드려 섬겼으며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히 복종하였다. 그런데 세상은 그를 미워하고 핍박하였고 배척하였다. 그 분보다 살인자를 원했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오늘날에도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를 비웃으며 그들의 조상들이 행했던 그 일을 하고 있다.
- 세상은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강조하나 예수님은 영혼을 강조하셨다. “사람이 ---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막8:36-37) 그 분은 세상의 물질적인 복이나 세상을 개선하기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 죽으셨다. 우리 영혼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그는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말씀하셨다. 주님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와 지옥의 고통을 당하는 부자를 그린다. 여러분은 세상의 생각과 사고방식, 하나님 아들의 생각과 사고방식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알 수 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곧바로 세상을 여러분의 원수요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게 되고 그 속에 죽음의 원리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더 이상 세상을 위해서 살거나 그것을 뽐내지 않을 것이다.
- 성경의 메시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세상이 끝이 있으며 끝은 심판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다시 세상에 오실 것이고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과 대적하는 모든 것은 심판받을 것이며 멸망 당할 것이다. 당혹한 인간들이 “바벨론이여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계14:8)라고 울부짖게 될 날이 오고 있다. 바벨론은 그리스도 없는 세상이다. 그처럼 위대하고 놀랍던 바벨론, 모든 왕들과 임금이 왕래하던 그 바벨론 사람들은 바벨론이 얼마나 위대한가라고 자랑한 그것이 그리스도 없는 세상이다. 요한계시록 20:12-13은 책이 펼쳐지고 그 앞에 각 사람이 서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중 어느 누구든지 세상에 임할 그 멸망에서 건져내는 것은 십자가뿐이다.
-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다 세상에 속하여 태어났다. 세상에서 구별되지 않는 한 그 운명을 함께 당할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세상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임할 심판을 스스로 담당하시고 죽으셨고 형벌을 받고 계셨다. 이 모든 것을 알았다면 여러분은 세상에서 구별되어 나온 자들이다. 그래서 세상이 멸망하게 될 때 여러분은 구원받고 멸망에 사로 잡혀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흑암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긴 자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나라, 빛의 나라, 영광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고 세상은 나와 상관이 없다. 내 시민권은 하늘에 있고 거기서부터 구주를 기다린다. 또한 우리가 영원히 그 주와 함께 거하게 될 것을 안다.
제 5 장 십자가의 승리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철학과 역사 등 학문들은 어떻게 하면 세상을 바르게 할까에 대하여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그러나 수세기에 걸친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세상은 이 모양인가? 오늘의 고통은 전적으로 인간들의 조건과 세상의 조건이 안고 있는 난제를 심오한 방식으로 대면해 본적이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근본적인 문제를 성경만이 제기하고 그 해답을 줄 수 있는 질문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이 세상의 삶은 마치 어떤 무장한 강한 자가 죄인을 지배하는 큰 궁정과 같다. 주님께서는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눅11:22). 바로 그것이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에 대한 주님 자신의 묘사이다. 주님은 자신의 포악한 권세로 사람들을 꼼작 못하게 지키고 있는 “강하게 무장한” 마귀를 대적하러 오셨다.
- 오늘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온 세상을 진실로 고통케 한 자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이 세상의 신이 사람들을 어두움에 묶어 두고 있다(고후4:3-4) (엡2:1, 6:12) (요일5:18-19). 우리는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어야 했다. 카이제르나 무솔리니나 히틀러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만들었나? 세상이 무섭고 처참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의 원인은 사람이 아니라 마귀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엡6:12). 정치가나 철학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인간 본성에 대하여 생각하고 그들을 조사하고 인간 본성을 이해하려 한다.
- 영적 세계는 두 부류로 나뉜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계시고 또 한편에는 마귀와 그 세력들이 있다. 마귀는 천사적인 존재로서 하나님께 창조 받아 사람보다 먼저 존재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완전하게 만드셨으나 자기의 교만과 무례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배역하여 하나님과 동등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모반하였고 여러 천사들을 설득하여 자기와 같은 보조를 취하게 했다. 이렇게 하여 마귀와 타락한 천사들이 생겼고 그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넘어 뜨릴까 하는 생각으로 사로 잡혀 있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마귀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그 이름과 그 영광을 손상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시키는 것임을 알았고 그래서 사람에게 다가와 시험을 했다. 사람은 타락하여 죄의 상태로 빠지게 되고 온 우주를 끌고 죄 가운데로 들어간 것이다.
- 마귀의 시험과 유혹에 청종한 인간은 마귀의 노예가 되었다. 그 때문에 마귀를 “공중 권세 잡은 자”,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부른다. 인류 전체는 마귀의 노예가 되었다. 성경은 마귀의 권능이 엄청나다고 말한다. 구약의 아브라함과 족장들, 선지자들과 경건한 사람들이 다 마귀 앞에 거꾸러졌다. 아담은 완전한 사람이었음에도 마귀에게 졌고 마귀는 너무나 교활하고 강하다.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롬3:10)라고 했다.
- 마귀는 우선적으로 “이지”를 통해 하나님을 미워하도록 설득하고 마귀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한다. 불신앙이라 해서 손해될 것 하나도 없다. 복음은 언제나 그렇게 반대를 받아 왔다. 마귀는 대부분의 인류의 삶을 지배한다(마7:13-14).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도 믿지 않았고 아들의 속죄의 죽음도 믿지 않았으며 그들은 그것을 조롱했으며 미련한 것이라고 말했다. 마귀는 그런 사람의 눈에 가리개를 하고 마귀가 원하는 것만 보도록 한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은 진리를 보는 것이다. 마귀는 사람의 생각을 통제할 뿐만 아니라 소원도 통제한다.
그리고 의지까지 지배하여 “삶 전체”를 지배하고 두려움을 조성한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음에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라”(히2:14-15).
- 왜 인류는 죽음을 두려워 하는가? 그들은 죽은 다음에는 심판이 있고 율법이 우리 모두를 저주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자기들은 이 모든 것들을 믿지 않는 것처럼 점잖을 빼지만 할 수만 있으면 죽음을 피하고 싶어 한다. 이교도들은 태양과 달과 별들을 무서워하고 자기들이 만든 신상을 두려워한다. 마귀가 그러한 삶을 산출해 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과 낙원을 산출하신다. 마귀는 혼란을 산출하고 하나님의 질서를 혼돈으로 바꾼다. 인간의 생각과 마음과 의지를 장악하여 우리가 친숙해 있는 혼돈으로 끌고 간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 성, 마귀가 지키는 궁성에서 빠져 나갈 수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강한 자가 필요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마귀를 멸하러 오셨다.
- 우리 주님께서 사람들 뒤에 있는 이 권세와 사력을 다해 싸우시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서사시이며 얼마나 훌륭한 싸움이며 얼마나 대단한 용전인가? 예수께서 태어나기 전부터 마귀는 그를 없애 버리려고 했으며 그리고 그 싸움은 계속되었다. 헤롯의 칙령, 광야에서 사십 주야를 시험 받으시고 귀신들려 고생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어떠한 싸움을 했는지 살펴보라.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처럼 땅에 떨어지던 그 모습, 주님은 원수를 진정으로 싸워 이길 수 있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순간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아셨던 것이다. 십자가는 끝까지 저항하고 덤벼드는 마귀를 대항한 종결된 싸움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일어난 일은 이 세상이 심판 받는 것이었다(요12:31-33).
-여러분은 사람들 뒤에 마귀가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가? 나사렛 예수의 범죄가 무엇이었는가? 그가 누구에게 해를 끼쳤는가? 그의 가르침과 이적에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는 선을 행하러 오셨고 인간을 구원하러 오셨다. 그는 어떤 대접을 받으셨는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혐오와 조롱과 모독적인 행동을 보라. 그들의 신성모독과 조롱을 보면 그것은 사람 속에 역사하는 마귀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 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끓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마27:29-31)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27:39-44). 예수님은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셨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였다(눅13:53).
- 여러분도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고 언제나 선을 행하며 다니던 이러한 사람을 미워하며 조롱하며 야유하며 침을 뱉겠는가? 아니면 이와 같은 분을 대접하겠는가?
주님의 죽음은 죽음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사람들 속에서 이렇게 끝이 났다. 마귀는 그를 죽일 수만 있다면 그것은 끝장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야말로 마귀의 무서운 오산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스스로 파멸시키고 자신의 궁극적인 운명을 가져온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사도는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참으로 약해 보였지만 마귀와 그 권세를 없이하시고 부끄럽게 하셨으며 그것들을 이기셨다고 말한다. 마귀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하나님의 능력과 더 이상 접촉하지 아니하는 사람 외에는 어떠한 권세도 부릴 수가 없다. 마귀를 제어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하나님과 접촉에서 벗어나는 순간 마귀에게 사로잡히게 되며 우리는 마귀의 무능한 도구가 되며 그의 집에 잇는 소유물처럼 그의 나라 안에서 희생물이 된다.
- 사람을 지옥과 마귀의 손아귀에서 건져낼 수 있는 오직 유일한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뿐이다. 그러나 어떻게 내가 그 능력을 가질 수 있는가?
먼저 하나님과 화해해야 한다. 골로새서에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의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다음에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두 가지 일이 함께 한다. 주님은 바로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하나님께 화해시키고 계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에 대한 벌책으로 형벌을 담당하셨으므로 우리가 그를 믿으면 우리는 형벌로부터 벗어나고 정죄에서 자유로워진다. 우리는 하나님께 화해하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마귀와 그의 군대로부터 우리를 건져내고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긴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이 바로 그 일이다. 마귀는 자기가 그리스도를 멸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께 화해시키고 계셨던 것이다.
-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속에 들어오고 우리는 거듭나서 새 본성을 받고 새 사람들이 되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고 그리스도의 임재가 우리를 돕기 위해 항상 우리 앞에 가까이 있다. 아마도 마귀가 우리를 두렵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나 그러나 마귀는 우리를 건드릴 수 없다. 이제 강한 자보다 더 강한 자가 온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이기셨다.
십자가가 있기까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제외하고 온 세상나라를 마귀가 통제했었다. 십자가의 순간부터 이방인들이 믿기 시작하였고 하나님의 나라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늘로 올라가셔서 성령을 내려 보내신 순간 복음은 모든 곳에서 전파되었다. 이방인들이요 이교도들이었고 무지했으며 죄 가운데서 살았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이끌려져 왔고 마귀의 권세에서 풀려났다.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그 능력은 십자가에서 발휘되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사람과 우주를 타락시켰던 궁극적인 원수인 마귀를 파하셨고 마귀는 사슬에 묶였다. 마귀는 짐승들과 그 모든 거짓선지자들과 함께 불못에 던지움을 당할 것이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저 유명한 정복자를”를 보는가?
모든 것을 이긴 예수
위를 향하여 진군하네
능력의 불에 휩싸여
죄악의 땅은 더 이상 주를 반대할 수 없고
지옥은 당신의 말씀에 기가 꺾이네
주의 큰 이름이 너무 높아
모든 여우들 두려움에 움츠리네
주께서 가까이 오심을 알고 모든
피조물들이 공포에 떠네 - 월리암 월리암스 -
제 6 장 그는 우리의 평강이시다
- 복음의 진수는 십자가에 관한 이 메시지이다. 사도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사람들 사이에 참된 연합과 진정한 평강을 산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긴장과 분쟁과 투쟁과 전쟁의 위험이 가득 찬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고, 불행과 고통이 가득 찬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성경은 언제나 이 세상이 악한 세상이라고 말해 왔다. 모든 나라들도, 가정 내에서도 분쟁과 투쟁과 불일치와 오해가 존재한다. 여러분 개인 안에는 투쟁과 갈등과 긴장은 없는가? 우리 모두는 안팎에서 겪는 갈등의 존재로 태어났고 삶의 모든 영역과 부분에서 갈등하는 존재들이다. 이 순간에 투쟁과 긴장과 싸움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온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구주의 십자가뿐이다.
- 십자가로 인해 산출된 그리스도의 교회를 보라. 놀라운 것은 교회 내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서로 하나를 이루어 공존하고 있다. 그들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 졌다는 것이다(엡2:11-15).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모였고 기독교회 안에서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같은 구주를 영화롭게 하는 일에 한 새사람을 이루게 되었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중요한 이유들 가운데 하나이다.
- 오늘날 세상에 존재하는 분쟁과 불행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육신적이고 중생치 못한 인간 마음의 자랑(교만) 때문이다. 성경은 맨 처음부터 형이 동생을 죽인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가인은 시기심 때문에 아벨을 죽였다. 시기심은 교만의 자녀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고통의 원인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9:23-24) 모든 비극의 본질적인 원인이 교만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 사람들은 자기들의 출생, 인종, 능력, 지성들을 자랑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일들 때문에 서로 나누어져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인간 존재는 영혼뿐이나 인간들은 나누어 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 가지려는 자와 가진 것을 지키려는 자 사이에 긴장과 투쟁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전 세계는 헬라인과 야만인, 지혜자와 무식자로 또한 나뉘어져 있다. 이 교활한 분쟁과 차별이 삶 전체에 침투해 들어와 있는 것이다.
- 세상에는 오늘의 세계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상은 전혀 평화를 이룰 수 없다. 세상은 고작해야 적대감을 잠시 멈추게 하는 일 외에는 어느 일도 하지 못한다. 곧 세상은 싸우지 않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평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평화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것이다. 평화는 사랑과 동정과 이해와 참된 연합을 의미한다. 세상은 그러한 일을 해낼 수 없다. 나라들이 독가스를 보유하고 있다. 양편이 독가스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평화가 아니다. 그것은 해 받을 일을 잠깐 피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공포이다. 노예제도가 있는 곳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또 파업 같은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평화가 아니다. 평화는 적극적이고 사랑이다.
- 세상은 근사한 평화의 모습은 보여 줄 수 있다. 그것은 지혜롭고 정치적이고 실리적이기 때문에 그러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국가들이 하는 말이나 서약들을 믿을 수 있는가? 세계 역사는 모든 그럴듯한 조약이 거짓말임을 증험한다. 최근의 이론은 “사람들을 교육시키기만 하면 전쟁을 불식시킬 수 있다. 싸우는 것은 무지한 사람들이고 무지할수록 더 잘 싸운다”(웰스) 라고 주장한다. 모든 세기 가운데서 가장 교육을 많이 받은 이 세대가 가장 피를 많이 흘렸고 바로 이 세대처럼 전쟁과 긴장과 투쟁과 논박으로 가득 찬 때가 없었다. 고통거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지 사람들의 이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 정욕과 탐욕과 소욕과 자랑이 문제인 것이다. 자신의 자랑을 높이고 그것을 뽐내기 위해서 더 내밀함 속에서는 악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잘못된 일들을 행할 것이다. 세상에서 평화와 연합을 가져오고 사람들을 하나로 묶고 참된 평강의 소망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십자가이다. 그래서 사도는 그것을 자랑한 것이다.
- 십자가는 어떻게 이 일을 하는가? 복음은 단순하다. 복음은 문제의 뿌리로 원천으로 들어간다. 첫 번째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보여준다. 십자가는 우리 자신에 대한 단순하고 명백한 진리를 말한다. 사람뿐만 아니라 단체나 국가를 겸비케 하는 것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다. 십자가와 거기에서 죽으신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은 거기에서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너는 완전한 실패자이다. 네가 너무나 실패한 나머지 그가 하늘로부터 오셔야만 했다. 이 세상에서 가르치고 전하고 그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오셨다” 다른 어느 것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었다. 그의 가르침도 지킬 수 없었고 율례를 따를 수도 없었고 일상적인 법칙도 지킬 수 없다.
- 다소 사람 바울은 자신이야말로 완전한 사람이요, 절대적으로 도덕적이고 종교적이고 바라새인 중에 가장 잘 배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랑한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만나 한번 보았는데도 그는 먼지 가운데 주저앉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자기가 그처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율법에 비추는 빛을 통해서 자기는 그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즉시 깨닫게 된 것이다. 자기가 완전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고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말과 행동에 있어서 철저하고 절대적인 실패자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다. 그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었다. 그는 곤고하기 짝이 없는 가증한 실패자이었다. 십자가는 그를 낮추고 땅바닥에 메다꽂았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그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다른 사람을 용서하게 된다.
- 십자가는 다른 사람에 대한 진리를 밝혀 준다. 먼저 나를 낮아지게 하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보도록 도와준다. 피부 색깔이 어떠하든지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학식이 있든지 무식하든지 그것이 문제가 아님을 보여 준다. 그들은 모두 나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인간 본성의 존영을 지니고 하나님 앞에 나처럼 서 있다. 그들의 문제 행동은 그들도 나처럼 마귀의 희생물들이다. 내가 이점을 알고부터 그들을 불쌍히 여기기 시작한다. 나와 다른 사람은 전혀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죄 가운데에서 하나요, 같은 실패자요, 같은 비참에 싸여 있는 사람들이다. 무능과 절망에 있어서 하나이다. 십자가는 우리를 겸비케 한다. 우리 모두를 같은 위치에 내려서게 한다.
- 감사하게도 여기서 끝나지 않고 전 세상과 우주를 감쌀 수 있는 오직 유일한 분이 여기 계신다. 구원하시는 그분이다. 주님은 십자가로 나아가셔서 모든 일을 하셨다. 바울은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롬3:27) 라고 말한다. 우리는 오직 유일한 구세주를 함께 믿는다. 죄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동일한 자녀들이다.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같은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며 영광의 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모두 다같이 감격과 찬양과 기쁨과 영광을 가지고 같은 구주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오직 유일한 길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서 있던 ‘중간의 막힌 담’이 허물어졌다.
- 십자가는 여러분을, 여러분과 함께 다른 사람도 높일 것이다. 십자가는 평화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둘이 한 새 사람을 이루게 하여 화평을 조성할 것이다. 십자가를 일단 알기만 하면 모든 분쟁은 사라지고 같은 메시지를 믿는 모든 사람들과 하나되어 그를 즐거워하고 자신의 보배로운 피의 대가로 여러분을 위해서 사신 새 생명을 즐거워할 것이다.
- 먼저 여러분 자신들을 생각해 보라. 아직 옛날 자랑, 여러분을 지배하던 것이 남아 있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빛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보여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 드린다. 또한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으사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과 화평케 하시며 사람들끼리 서로 화목케 하신 그 주님을 우러러볼 수 있기를 기도 드린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제 7 장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말한다
- 그리스도의 십자가, 십자가의 피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메시지를 들어보았는가? 십자가가 참 기이하고 놀라운 것은 사람이 아무리 여러 번 십자가에 관하여 설교했더라도 십자가에 관하여 할 말이 더 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십자가를 자랑하는 데 끝이 없다고 말한다.
사람의 영혼이 매우 보배롭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계셨던 것은 사람의 불멸하는 영혼의 가치때문이다. 물론 몸도 중요하고 또한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여러 많은 것들도 중요하다. 그러나 문제되는 것이 사람의 영혼이요, 우리가 죽을 때에도 계속 존재하는 것이 영혼이라고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의 임무이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신 것은 우리 몸의 병이 낫고 더 잘 먹고 더 많은 정보나 지식을 가지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주님은 오셨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소유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놓고 몸마저 놓고 갈 때가 오는 것이다.
- 십자가의 메시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지 않으면 사람과의 관계도 전혀 바로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사람들과 하나님이 바른 관계를 맺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 일을 하라고 주님을 보내셨다. 죄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이고 무서운 것은 죄가 하나님을 거스려 모반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죄는 자신을 세워 하나님과 겨루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무서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 일은 하나님과의 일을 단절시키며 자신을 신으로 세우려고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계속 “죄에 대한 심판이 있으며 죄는 형벌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죄는 하나님께 사소한 일거리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아버지의 계명도 어기지 않으셨고 마귀마저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그가 죽으셨다. 십자가는 그 문제를 해명한다.
- 죄의 난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라도 가장 다루기 힘든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용서 한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죄를 용서하실 수 없다. 만일 다른 방식으로 죄를 용서하실 수 있으셨다면, 자기의 독생자를 십자가로 보내 그 위에 자기의 진노의 잔을 부으셨겠는가? 창조는 말씀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용서는 말씀만으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자기의 독생자를 하늘의 궁정을 떠나 땅에 내려와 인성을 취하시고 사람처럼 사시고 그 십자가 위에서 “매맞고 하나님의 침을 당해야” 했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여러분이 도덕적인가 부도덕적인가, 여러분의 생각이 어떠한가 하는 등의 문제가 아니다. 십자가가 제기하는 첫 번째 질문은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다.
-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도록 했다. 문제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느냐?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의 최고 되는 목적과 목표이냐? 여러분이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자신을 드리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그것을 하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은 죄인이다. 그는 여러분의 마음과 여러분의 충성과 여러분 삶의 중심을 원하신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은 사람이 바로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그것을 말하고 있다.
- 두 번째 십자가는 선포와 능력있는 선언이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3:25) 하나님께서 그것을 공적으로 세우시고 선언하시고 그것에 주목하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의롭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의롭고 절대적으로 거룩하시면서 어떻게 동시에 죄인을 용서하실 수 있는가?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서는 죄를 심판하고 계셨다. 거룩한 진노가 죄에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던 그 일을 공적으로 수행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는 거기 십자가에서 단번에 모두를 위해 역사의 중심에 서서 자기 아들의 몸 안에서 사람들의 죄를 향하여 진노를 퍼붓고 계셨다. 그는 죽었고 그의 흘린 피가 말하고 있다. 이것은 죄와 악에 대한 형벌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던 일, 곧 죄를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신 바로 그 일을 행하였다는 힘있는 선언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죄의 난제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식임을 선포하고 공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죄인들이 화목해졌다.
- 세 번째 그리스도의 피는 해석과 선언, 선포에서 머물지 않고 초청과 호소이다. 우리에게 들으라고 요구한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사45:22) 유대인들이나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이나 율법에 전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야만인과 같은 사람들에게도 그 초청의 말씀이 전달된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2:17) 바로 그러한 자들에게 주님은 이 초청장을 주신다. 십자가의 피는 오늘날 온 세상에서 다른 아무것도 말해 줄 것도 없는 자들에게 말한다. 철학은 두뇌와 총명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의 이성과 논리와 용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말한다. 도덕과 윤리는 이미 선한 사람들에게만 말한다. 또 종교는 그 종교에 열성을 가진 몇몇 사람들에게만 말한다. 그러나 그 피는 다른 어느 것도 접근하여 말해 주는 이 없는 자들에게 말한다. 그 피는 자기 의를 자랑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절대로 부르지 않는다. 자기 만족을 하는 그들을 위해서 오라고 하지 않는다.
- 이 십자가의 초청장은 실패한 사람들, 자기 잘못을 아는 사람들, 수치감으로 가득 찬 사람들, 투쟁에서 지치고 곤비한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진리를 알기 전에 선한 삶을 살려고 애썼으나 실패하고 지친 그런 사람들에게 초청장이 주어진다. 삶은 여러분을 낙담시켜 곤고하고 지치고 비참하고 슬프게 한다. 양심이 여러분을 때리고 정죄하고 과거를 앞에 가져다 놓는다. 자기가 썩어 있으며 자기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삶이 두렵고 자신이 두렵고 여러분의 연약과 내일을 맞을 것이 무섭다. 죽음이 두렵다. 오 이 곤고한 사람인 나를 위해 누가 짐을 져 줄 것인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십자가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은혜롭고 영광스러운 초청장을 발부한다.
- 그뿐 아니라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받으실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세상은 변죽만 울리고 지나가 버리고 여러분을 홀로 남겨두고 관심도 두지 않는다. 여기 여러분 모두에게 안식을 주실 분이 계신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앉아서 뿌린 피가 말하는 소리를 들어보라. 기다리고 멈추어 네 활동을 정지하라. 네 모습 그대로 나는 너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네 더러움과 누더기 같음과 비열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너희를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다. 쉬라.” 뿌린 피는 말한다. “나를 들어라 너희 죄가 징벌을 받았느니라.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죄의 징벌이 이러하기 때문이다. 나를 들어라 너희가 용서함을 받고 사죄를 받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하기 위해 내가 흘려졌다.” 여기에 정결케 하는 효력이 있다. 여러분의 비열함과 불의의 흠을 발견할 때 그것을 알게 된다.
- 뿌린 피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처한 그 비참에서 기쁨을 가질 수 있고 재 대신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새로운 성품을 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삶을 새롭게 출발하게 해줄 것이다. 새로운 능력과 힘을 줄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소망을 줄 것이다.
십자가는 용서와 사죄의 새로운 은사를 공표한다. 화해와 회복과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선포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과 영원한 소망 등 그 모든 것을 선포한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몸이 찢기고 피가 흘려지기 시작했던 이 복되신 분으로부터 나온다. 그는 여러분을 초청하고 부르고 계신다.
제 8 장 새로운 본성
- 사도가 십자가를 그렇게 자랑하는 것은 자기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렸던 모든 축복의 원천과 중심이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이다. 십자가 없이는 복락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다.
사도가 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내가 산상설교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의 가르침은 제자들 마음 속에 침투하지 못하였고 주님께서 자기의 죽으심에 관해서 말씀하실 때 그들은 넘어졌다. 사람들이 크게 높이는 산상설교를 생각해 보자. 존귀하게 여기는 것과 그것을 실행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사람의 힘으로 산상설교를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산상설교를 지킬 수 있고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도 있다고 한다.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한다. 모든 것이 가능해지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복락이 우리 앞에 열려진 것은 바로 그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로부터이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5:1) “그러므로”라는 말보다 더 중요한 말은 없다. 특별히 바울 서신들에서는 교리를 설정하고 “그러므로”라는 말을 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니 당연히 이러저러하다는 뜻이다.
첫 번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린다. 오늘날 인류의 모든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들은 사람이 하나님과 그릇된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우리는 문명의 방법으로 혼돈 속에 질서를, 그리고 평화를 정착시키려 얼마나 애썼는가?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한 위치에 있을 때까지는 결단코 그 평안을 얻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부와 학식과 감화력 권세를 가진다 할지라도 악한 자리에 있는 한 평화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소망이 없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없이도 잘해 나갈 수 있다는 사람들을 내 버려둔 상황이 바로 현대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이다.
- 사람은 하나님께 의존하게끔 지음을 받았다. 사람 속에는 하나님으로만 만족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차원의 요소가 있다. 사람은 부와 희락과 술 취함과 여자와 포도주를 통해서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은 그런 것으로 만족을 얻기에는 너무 큰 존재이다. 그래서 쉼이 없고 만족이 없고 두려움에 차있으며 죽음을 두려워한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메시지로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길을 예비하셨음을 말씀하고 계신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든 요구가 거기에서 만족 되었고 또한 그 십자가가 우리들에게도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를 안다면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알게 되며 하나님께 대한 여러분의 모든 자세가 변할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 되며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케 됨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내려다 보실 때 긍휼 어린 눈으로 내려다 보시며 용서하시는 눈으로 보신다. 또한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미소를 지으신다.
- 두 번째 현재 인류가 처한 모습, 즉 죄의 보편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담은 인류의 첫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를 인류의 대표자로 삼으심으로 그가 행한 모든 것은 그 후손 전체에도 미치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그가 넘어질 때 그와 함께 다같이 타락하였다. 우리는 아담의 죄의 결과로 죄인으로 태어난다. 그런데 복음의 메시지가 이르렀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두 번째 아담으로, 두 번째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는 여러분의 대표자가 된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다. 그를 믿기만 하면 그와 함께 죽고 형벌을 담당한 셈이며, 전에 여러분이었던 옛 사람과 관계를 끊고 더 이상 아담 안에 속해 있지 않으며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전적으로 새로운 출생, 새로운 시작, 새로운 본성, 새로운 생명을 가질 수가 있다. 그래서 그는 새사람이 된다(고후5:17). 그 결과 우리의 입장과 지위는 전적으로 달라진다(롬6:14). 사람들은 기독교를 그저 우리 죄를 용서하는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 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것은 내 모든 입장이 바뀌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라지는 것이다.
- 세 번째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롬:15).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율법 아래 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 내 계명이 있다. 너희가 율법을 지킬 수 있으면 만족할 것이다. 그럴 수 없으면 나는 너희를 벌하겠다.”는 것이 율법 아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으로 율법을 요구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요약하여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눅10:27)라고 하셨다. 문제는 율법은 여러분에게 그것을 지킬 하등의 힘도 주지 않는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다.”고 사도는 말한다. 전혀 불가능 하다.
- 그러나 이 십자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의 죽으심을 믿는 여러분은 그 처지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지위에 서게 될 것이다. 은혜의 하나님은 여러분의 아버지이다. 우리가 받을 만한 공로가 전혀 없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바라보시며 축복하시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여러분은 전적으로 새로운 지위에 서있는 것이다. 십자가가 바로 그 지위에 서게 한 것이다.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떨며 서지 않게 된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가 이 세상에 여전히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전체 난제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네 번째 더 나아가 하나님의 능력있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계셔 자기의 기쁜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내게 하늘문이 열리고 나로 기도할 수 있게 만든다. 기도는 하나님의 면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전능하시고 거룩한 하나님께 아뢰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독한 우리의 모습으로 어떻게 하나님 면전으로 갈 수 있는가?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것이다.
여러분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전능하신 하나님께 아뢰면 참소자는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의 양심도 말하며 옛 것들을 들추어 낼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와 불의에서 우리를 정결케 한다.
-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화평을 내게 주셨다. 그는 내게 새로운 본성을 주셨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은혜 아래 있다. 그는 나로 하여금 살게 하셨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내 모든 원수들에게 대적하는 답을 할 수 있다. 모든 거룩한 영광 중에 계신 하늘의 하나님께 마저 말씀드릴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가?
제 9 장 값주고 사서 자유케 하였느니라
- 한때 바울에게도 그 십자가가 거침돌이 되었었다. 구주께서는 위대하고 능력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군사력이 있고 행차 때마다 큰 화려함과 의식이 뒤따라야 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베들레헴 구유에서 나시고 목수로 일한 사람이 메시야라니, 그러한 관념이 그에게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했다. 그가 특별히 멸시했던 것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십자가야말로 모든 것을 매고 있는 중심핀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는 십자가를 찬탄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그 십자가를 모방하려고 애쓰고 있노라고 말하지 않는다. 십자가는 주목할 만한 삶과 비극적이고 매우 후회스러운 삶 속에서 드러난 한 우연한 사건이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이고 가장 큰 일이다. 인류가 알았던 것 중에 가장 위대한 것이다.
- 사람들은 십자가는 오직 회심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고 그것을 떠나 더 깊은 영적인 삶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편지를 쓰는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최고의 성숙도에 도달한 사람이다. 그는 그의 체험의 극에 도달했을 때에도 십자가는 여전히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 된다. 그것은 모든 것이 십자가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진 모든 것의 원천과 샘은 바로 십자가이다. 십자가가 전적으로 자기를 새로운 위치에 서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고 죽었으며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한다.
- 만일 십자가가 여러분의 중심이 되지 아니하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여러분이 “나는 예수님을 존경하며 그의 가르침을 가장 크게 생각한다”고 말하더라도 그냥 도덕주의자일 수는 있어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다. 십자가는 중심적이고 사활적인 것이다. 모든 것이 거기서 나온다. 그가 고후 5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의 요약이 17절로 나타나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을 이해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해주는 가장 놀라운 것들 가운데 하나는 자신에 대한 전혀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자신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자신에게서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알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구원들 가운데 하나이다.
- 십자가의 메시지를 알지 못한 사람은 육체를 따라서 자신을 본다는 것이다. 바울은 언제나 육체와 영을 대조하고 있다. 육체를 따라 사물을 본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비추어 주시는 빛 없이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그것이 사람이 자신에 대하서 가지는 사고방식이다. 이 세상에서의 자기의 위치와 지위의 차원에서 생각한다. 이것들의 차이로 세상은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질투와 경쟁의식과 또한 모든 멸시로 가득 차 있다. 또 자신의 천성적인 능력과 기질의 차원에서 자신을 생각하고 자기의 선함의 차원에서도 생각한다. 악을 극복하기 위해 선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적인 것이 들어오고 사람들은 종교적인 것을 자랑하며 그리고 고상한 전통을 지키고 있음을 자랑한다.
- 사람들은 1. 자기들이 처한 방식의 차원에서만 생각한다.
2. 전적으로 자기 중심적이다(고후5:15). - 육신적인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살아간다. 언제나 자기를 의식하며, 자기를 쳐다보며, 자기를 존중하며, 그리하여 결국 자기를 사랑하게 된다. 이것은 자랑으로 인도하고 자만으로 빠지게 한다.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은 그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비극적이며, 인류가 가진 저주거리이다. 우리 모두는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들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필요한 것이다. 모든 경쟁과 다툼과 투기가 거기서 나온다. 자기를 배부르게 하고 자기를 부추기며, 자기만이 여러 가지 것들을 가지기를 원하고 자기를 세우고 만족케 하기를 바란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예민한 감정을 유발시키고 그러한 생각대로 잘 되지 않을 때는 무력감을 느끼고, 불만을 토로하게 된다. 그리하여 과민반응으로 피해 감정이 생기고 결국 자기 과잉보호적인 반응을 유발 한다.
설상가상으로 인간은 본질상 자기를 의뢰하며 자기 신뢰심을 가지고 있다. “나는 운명을 마음대로 주장하는 자이다. 나는 내 영혼의 주인이다.” 그래서 종교를 거부한다. 세상의 심리학은 “너 자신을 믿어라”라고 말한다. 자기가 자신의 신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신경질적이고 예민하고 두려워하며 과민한 상태에 있다.
- 바울도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분의 죽음의 의미를 알기까지는 그러하였다. 이제 바울은 그의 모든 옛 삶으로부터 해방 되었다. 그 옛 삶의 진실을 알았을 때 그것은 수치스럽고 기만적인 삶이었다. 그리고 마음에 평화가 없고 안식과 만족이 없는 삶이었다. 자기에게 진실된 자기 모습을 보여 준 것은 십자가이다. 그는 다른 모든 사람과 같이 자기도 죄인이요, 비열한 죄인임을 알게 되었다. 자기(self)는 모든 것들의 원인이다. 그뿐 아니라 자기는 실패자임을 알게 되었다. 자기 속에 있는 죄, 자기 지체들 속에 있는 죄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 것인가?(롬7:24) 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싶다. 그러나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있어 나를 끌어 잡아당기고 나를 꼼짝 못하게 한다. 자신은 전적으로 힘이 없는 사람임을 인식한다. 이 모든 것을 보여 주었던 것은 십자가이다. 바울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사고 계셨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고전6:19-20). 그는 흑암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워졌다. 그는 구속 되었다.
- 그는 자기의 것이 아니다. 그는 전에 자신을 위해서 살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렇지 않다. 그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 바울은 감격을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 위해 산 것이라”(갈2:20)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마저도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다(고전4:1-4).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얼마나 엄청난 구원인가! 바로 그 모든 일을 십자가가 해냈다. 그는 이제 어떻게 하면 새로운 방식으로 살 것인가를 안 것이다.
-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제공한다. 사람이 십자가의 메시지의 의미를 알기 전에는 선과 악의 차원에서 생각하며 행동들의 차원에서만 생각한다. 그러나 더 이상 나갈 수 없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어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과 우리가 애호하는 것들, 세상이 눈부시게 펼쳐 보여주는 것들이 우리 영혼의 원수라고 밝혀 준다. 십자가는 그것의 겉에 발라놓은 모든 현란한 색깔들을 다 벗겨버리고 그것의 비열함과 어리석음을 드러내 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주신 것은 단지 지옥에서 우리를 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그 악한 삶에서 건지기 위한 것이다(롬2:11-14). 만일 내가 자기 중심적인 삶을 계속 살아간다면, 그것은 그를 십자가로 가게 한 바로 그 일을 부인하는 것이요, 그 뿐만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믿는다고 자랑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는 셈이다.
-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2-13) 곧 여러분의 성화는 십자가에 대한 여러분의 관점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말이다. 십자가는 사죄나 회심에 대해서만 말한다고 주장하거나 십자가를 떠나서 더 높은 곳으로 향해 가야 한다거나, 우리는 오직 성령의 영역 안에 들어 있다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십자가는 거룩하게 되는 것을 주장한다. 십자가는 성화에 대한 가장 강력한 논증이다(요일3:2-3). 십자가의 메시지를 알면 선한 생활을 살려고 발버둥 친다거나 율법이 허용하는 최소한의 한도 내에서만 의롭게 살려고 하지 않는다. 고소 당하지 않으려고 바둥거리지도 않고 오히려 안식하는 것을 택한다. 이제 그 모든 것은 끝났다. 그는 새로운 사람이다. 이제 그가 죄 짓는다는 것은 사랑을 손상시킨다는 것이지 율법을 어긴다는 것이 아닌 것이다. 나는 값으로 산 것이고 나는 나 자신의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랑을 손상할 하등의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이제 그리스도의 노예이다.
-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을 받게 되었다. 그는 우리에게 어떻게 사느냐를 가르쳤고 고난받는 법도 가르쳐 주셨다.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질과 화살들을 대처하는 방식도 가르쳐준다(벧전2:18-25). 오직 한가지 길 십자가뿐이다. 주님께서 그러하셨듯 우리도 다 죽어야 함을 가르친다. 마지막 원수는 사망에 대한 공포이다. 예수님은 사망에서 쏘는 것을 뽑았다(고전15:54-57). 그는 그를 믿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적인 죽음의 효력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사망의 쏘는 것을 제거하셨다. 그는 사망과 무덤을 이기셨다. 여러분은 그 쏘는 것이 없어졌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살펴보아야 한다. 주님께서 가시면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셨다(요14:1-3). 바울은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한다(빌1:20-24). 죽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됨을 의미한다.
- 그처럼 십자가로부터 사람이 자기의 가련한 자아로부터 건짐을 받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가르침을 받고 능히 살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어떠한 고난이 온다 하더라도 그 고난을 어떻게 맞을지를 배우게 된다. 또한 승리하며 개선가를 부르고 죽는 법을 익히게 된다. 이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이 놀라운 일인가?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여러분 자신을 자랑하고 있는가? 여러분 자신을 알았는가? 십자가를 바라 보라. 그러면 여러분 자신을 알게 되고 자신을 미워하게 되며 그 자신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하여 기도할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내가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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