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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신학 : 이성에서의 도피 - 프란시스쉐퍼 (요약본 / 과제용 / 강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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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쉐퍼, 「이성에서의 도피」

 

 

* 동서양사상의 접근

 

성경적인 기독교 신자는 서양의 여러 나라에서 이제는 소수를 면치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세속주의가 팽창되고, 동시에 비기독교적인 신비주의가 성장하고 있다.
이는 범심론적 성격을 띄고 있다. 청소년들층의 히피와 마약중독자들의 신비주의.
역사적 기독교를 포기하면서도 교회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신비주의. 


동양은 여러 세기를 두고 종교적 범신론의 본고장이어 왔다.

본서는 문예부흥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문예와 철학사상을 독특한 논법으로 간명하게 파헤침으로써 현대의 사상과 현대인의 고민을 분석하고, 아울러 기독교 신앙이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가지며 또한 가져야 할 것인지 설명한다.


1 장  자연과 은총

 

자연과 은총

 

현대인의 기원, 세계를 실제로 변화시킨 한 사람의 사상.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
자연과 은총의 문제를 처음으로 논하였다.

은총, 상층부 : 창조주 하나님, 천국, 천상의 사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과 땅에 미치는 그 영향, 인간의 영혼- 통일성     

                                                   
자연, 하층부 : 피조물, 땅과 땅의 것들, 가시적인 것과 인간과 자연이 하는 일, 인간의 육체- 다양성

 

아퀴나스의 시대까지 인간의 사고방식은 비잔틴적이었다.


천상의 사물들이 너무나 중요하고 너무나 거룩하기 때문에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못했다.


예, 마리아와 그리스도를 한 번도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고 다만 상징적으로 그렸다.
또한 미술가들은 단순한 자연, 즉 나무니 산이니 하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아퀴나스가 등장함에 따라 휴메니즘의 문예부흥이 비로소 탄생을 보게 되었다.
아퀴나스의 자연과 은총에 대한 견해에서는 양자 간의 불연속은 볼 수 없다. 애당초 통일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예부흥의 좋은 결과- 자연이 적절한 평가를 받게 됨.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을 경멸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경멸하는 것.

 

아퀴나스와 자율

 

파괴적인 결과도 초래하였음.


인간의 의지는 타락하였으나 지성은 타락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인간의 지성이 자율적이 되었다. 자연신학의 발달. 자율사상에서 자연신학은 성경과는 관계없이 추구할 수 있는 하나의 신학으로 성립.

이 자율적인 원리를 근거로 하여 철학도 역시 자유를 얻어 계시와는 무관하게 되었다. 날개를 단 격이 되어서 성경과는 관계없이 어디든지 가고 싶은 대로 훨훨 날아가기 시작하였다.


자율사상이 미술에도 침투했다.

 

철학과 미술, 이 두 부문의 자연적인 교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의 교육 과정에 약점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우리는 모든 학문 분야를 서로 관련이 없는 평행선상에다 두고 연구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바로 복음적인 기독교인들이이 세대의 격랑에 기습을 당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성경 해석은 성경 해석으로, 신학은 신학으로, 철학은 철학으로, 예술을 예술로 공부할 뿐, 이러한 것들이 인간에게 속한 것이며 인간에게 속한 것들은 서로 아무런 관계없는 평행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화가와 저술가

 

자율사상에 영향을 입은 최초의 화가는 지옷토의 스승, 씨마부에. 자연의 사물을 자연 그대로 그리기 시작하였다. 단테가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은 식으로 글을 쓰기 시작.


페트랄치, “등산을 위한 등산을 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에 대한 관심은 좋은 것이고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아퀴나스가 자율적인 휴메니즘과 자율적인 철학으로 가는 길을 터놓았지만 이러한 자율주의 사상운동이 한 번 꿈틀하자 곧 홍수가 터지듯 파급되었다.

 

은총 대 자연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원리는 자연이 자율적인 것이 되자 곧 자연은 은총을 잠식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문예부흥시대를 통틀어 단테의 시대로부터 미켈란젤로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자연은 점차로 완전히 자율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휴매니즘의 철학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로이 떠나 더욱 자유롭게 사고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문예부흥이 그 절정에 달할 즈음에 와서는 자연이 은총을 몽땅 삼켜 버리고 말았다.

 

1415년경에 그린 <그랑드 와르 드 로항>이라는 화제의 그림;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를 데리고 에집트로 피난가는 길에 어떤 사람이 씨를 뿌리고 있는 들을 그들이 지나갈 때 일어난 기적 이야기. 한 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곡식이 자라고 열매가 맺어 추수를 하게 되었다. 농부가 추수를 하려고 하던 찰나에 뒤를 쫓는 병정들이 와서 물었다. “그들이 여기를 지나간지가 얼마나 되었나?” 농부는 자기가 씨를 뿌리고 있을 때 그들이 지나갔다고 말하자 병정들이 되돌아 갔다. 이 작은 그림의 구도법이 흥미를 끈다. 마리아와 요셉, 몸종, 당나귀가 유달리 크게 화면의 맨위에 그려져 있다. 아래쪽 화면에는 낫질을 하고 있는 사람과 병정의 모습이 아주 작게 그려져 있다. 위쪽의 배경이 금색선으로 덥혀 있다. 이 그림은 은총이 훨씬 중요하고 자연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종래의 개념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반 에이크- 새로운 방식으로 자연에 대한 문호를 연 사람. 자연을 사실적으로 그리기 시작.


1410년은 미술사상 중요한 해. 아주 작은 그림. 5인치 x 3인치. 사실적인 풍경을 그린 최초의 그림. 그림의 주제는 예수의 세례였지만 그것은 화면의 극히 일부를 차지할 뿐이었다.


배경에 강이 흐르고 실감을 느끼게 하는 성과 집들이 보이고 언덕과 솟아 있는 경치가 눈에 뜨인다. 그는 1435년에 <롤린 대신의 마돈나>를 그렸다. 마리아를 마주보고 있는 롤린 대신의 모습이 마리아의 모습과 같은 크기로 그려져 있다.

 

마사치오- 사실적인 원근법과 공간처리를 시도함.

 

필립포 립피- 풍경을 배경으로 아주 예쁜 처녀를 마돈나로 그렸다. 그가 마리아로 그린 처녀는 그의 부인이었다. 자연이 은총을 마구 좀먹게 된 것이다. 이제 자연이 은총을 죽이고 있었다.

 

푸케- 1450년경 왕의 정부 아그테소렐을 마리아로 그렸다. 그녀의 한쪽 젖가슴을 노출시킨 채로 그렸다. 은총은 사멸하고 만 셈. 특히 유의해야 할 것은 자연이 자율적인 것이 되자 그것이 곧 파괴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자율적인 영역이 허용되자 마자 하층부는 상층부를 잠식하기 시작한다.

 

레오날드 다 빈치와 라파엘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방식을 도입하였고, 코지모는 신플라톤주의를 옹호하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상층부에 무언가를 줄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유 때문에 신플라톤주의가 지배적인 사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념과 이상을 다시 말해 보편적인 것을 회복해보고자 신플라톤주의를 받아들였다.


 은총-보편자  
 자연-개별자


여기서 보편자는 모든 개별자에 의미와 통일성을 주는 것을 말하며 개별자는 모든 개체 사물들을 말한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그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플라톤의 사상의 차이를 묘사.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손을 아래쪽으로 내려뻗치고 있는데, 플라톤은 손으로 위를 가리키고 있다.

 

레오날도는 다양성과 통일성의 문제를 두고 씨름을 하였다. 그는 신플라톤주의 화가요 현대수학의 시조이다. 그는 통일을 위해 영혼을 그리려 노력하였다 . 기독교적인 영혼이 아니라 보편적인 영혼을 그리려고 했다. 특수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을 한데 묶는 합리적인 통일에대한 희망을 실현할 수 없었으므로 낙심한 가운데 임종을 맞이하였다고(젠틸레).

 

과거에는 지식의 통일을 고집하는 것이 지성인의 특징이었다. 그는 현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식의 통일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2장  자연과 은총의 통일

 

자연과 은총의 통일

 

역사적인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칼빈은 1509년에 탄생하였으며, 그가 기독교 강요를 내놓은 해가 1536년이었다. 레오나르도가 죽은 것이 1519년, 즉 루터와 에크 박사가 논쟁을 벌였던 바로 그 해였다. 레오나르도를 그의 만년에 프랑스로 데리고 온 사람이 프란시스 1세였는데, 바로 이 왕에게 칼빈은 자신의 기독교 강요를 헌정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기가 바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교차되는 시기였다.

이 통일의 문제에 대하여 종교개혁은 르네상스와 완전히 반대되는 대답을 제시했다. 종교개혁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신플라톤주의의 해석을 거부하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자라나는 묵은 인본주의와 자율적인 인간으로 풀어놓아주는 불완전한 타락을 말하는 아퀴나스의 신학에서 문제점이 싹트게 되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은 성경에서 말하는 전적 타락을 인정하였다.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진리였다.

첫째, 최종적 권위면에서 볼 때 자율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종교개혁자들은 궁극적이며 충분한 지식은 성경에 있다고 주장했다. 교회나 자연 신학 등 다른 어떤 것을 성경과 동등하게 여겨 성경에 첨가하는 견해와는 달리, 성경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둘째, 구원 문제에서 인간이 자율적이라는 것을 찾아 볼 수 없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구원을 얻는 데에 두 가지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인간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받을 자격을 갖추는 일이 겸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인본주의적 요소가 개입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인간의 자율적이거나 인본주의적인 노력, 또는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인 노력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시공간에서 죽으심으로 완성하신 사역을 근거로 해서만 사람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으로 빈손을 들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다. 즉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역에는 분열이 있을 수 없다. 궁극적인 규범이 되는 지식에는 분열이 없다. 교회나 자연 신학이 말하는 것과 성경이 말하는 것이 달라서도 안 되고, 성경과 합리주의자들의 견해가 차이가 나서도 안 된다. 구원 문제에 대해서는 분열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성경과 믿음만이 있을 따름이다.

 

여기서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유의해야 할 점은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이라고 하였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만일 누구든지 종교개혁자들이 가졌던 성경관을 떠나면, 그리스도란 말에서 아무런 내용을 발견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신학에서 나타나고 있는 경향이다. 현대 신학은 그리스도를 성경에서 분리시키고 있으므로 결국 “그리스도”라는 낱말을 내용 없이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관하여 말씀하신 계시를, 기록된 성경의 계시와 연결시킴으로써 그리스도 자신의 교훈을 따른다.

 

성경은 두 종류의 지식에 대한 열쇠를 제시한다. 즉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인간과 자연에 관한 지식이다. 위대한 종교개혁의 고백문들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자기의 속성을 인간에게 계시하였으며, 또한 이 계시는 인간에게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인간에게 말씀하셨으며,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참된 지식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북부 유럽에 종교개혁과 종교개혁 문화는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참된 진리”는 성경에서부터 얻는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원리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진리와 인간에 관한 참된 진리를 알며 또한 자연에 관한 참된 것을 알게 된다. 즉 우리는 성경을 기초하여, 비록 완전한 지식은 아니지만 참되고 통일된 지식을 소유한다.

 

종교개혁과 인간

 

성경을 통해 인간의 기원과 누구라는 것을 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인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중생”할 때 놀라운 존재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셨기 때문에 훌륭한 존재다. 인간은 타락 이전의 원래 상태 때문에도 소중한 것이다. 인간의 기원을 모르고서는 사람들을 인간답게 대할 수가 없고, 높은 수준의 참 인간으로 그들을 대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누구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그러므로 인간은 놀라운 존재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인간의 다른 면을 말씀해 주신다. 타락에 관해서 말씀하신다. 이는 우리가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 알아야 할 다른 문제에 눈을 뜨게 한다. 왜 인간은 그렇게 훌륭하면서도 그렇게 결함투성이인가?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훌륭하지만 역사의 어느 시공간에서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결함이 생겼다고 가르친다.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했기 때문에 지옥에 갈 것을 알았다. 종교개혁자들과 이들을 좇아 북부 유럽의 문화를 이룩한 사람들은, 인간이 존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으로 죄를 짓긴 했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전혀 무가치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대인은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현대인과는 정반대로 생각했다. 비록 타락했을망정, 또한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초인간적 해결과 그의 대속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긴 하지만,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인 결과로 종교개혁은 사람들 개개인이 기독교인이 되게 하는 데와 일반 문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상층부”와 “하층부”에 관하여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 즉 하늘에 속한 것에 대한 참된 진리를 계시로 말씀하시고, 자연, 즉 우주와 인간에 관한 사실도 참된 계시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식의 참된 통일을 이룩하였다. 그들에게는 르네상스에서 다루던 자연과 은총의 문제는 없었다. 그들은 참된 통일성을 갖고 있다. 상하층의 양 영역에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에 근거한 통일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퀴나스에 의하여 자유를 구가하게 된 인본주의와 로마 카톨릭식의 인본주의와는 달리 개혁자들에게는 자율적인 부분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예술과 과학에 대한 자유가 없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니, 정반대로 계시된 규범 안에서 가능한 참된 자유를 향유할 수가 있었다. 예술가나 과학자 역시 성경의 계시 아래 있기 때문에 자율적인 것은 아니다. 예술과 과학이 자율적으로 되기를 시도할 때마다 항상 어떤 원리가 나타났다. 즉 자연이 은총을 “잠식”해 버려서 예술과 과학이 곧 무의미해지기 시작했다.

 

종교개혁은 실로 엄청난 결과를 낳았다. 비록 우리 세대가 지금 폐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또한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문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종교개혁은, 20세기의 사고방식을 빌리면 “프로그램화되지 않은 인간”인 한 아담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는 컴퓨터 시스템 안에 있는 구멍 뚫린 카드로서 정립된 존재가 아니다. 20세기 인간은 결정주의 사상에 젖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상을 상상할 수 없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전적으로 결정되었거나 조건 지어진 것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개념을 내세우는 입장을 취한다. 아담은 프로그램화되지 않은 인간이었으며, 의미 있는 역사 속의 한 의미 있는 인간으로 역사를 변경시킬 수 있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고수하려고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진리를 상실하였기 때문에 이 개념을 고수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사상에서 우리는 인간은 중요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반역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는 실제로 반역했으며 그것은 “연극의 한 토막”이 아니다. 인간은 프로그램화되지 않은 존재이며, 실제로 반역했기 때문에 진정한 도덕적 죄책이 있다. 이것으로 인해 개혁자들은 또 다른 진리를 이해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이해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대속자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인간을 진정한 죄책에서 구하기 위한 제물이 되었다고 이해했다. 진정한 도덕적 죄책에 대한 성경의 개념을 심리학적으로든, 신학적으로든 함부로 변경한다면 예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그 견해는 더 이상 성경적인 견해가 아닌 것이다.

 

인간의 모습

 

이제 인간의 다른 면모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 체계 속에 있는 만물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나는 성경의 체계를 하나의 체계(system)로서 사랑한다. 만물이 시초로 돌아가며 따라서 이 체계는 독특하게 아름답고 완전하다. 모든 것이 이 체계를 정점으로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거기” 계시는 하나님으로 시작된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의 시작이요, 정점이므로 모든 것이 여기에서부터 모순 없이 전개되고 있다. 20세기의 사람들에게 가장 의의가 있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을 가리켜 인격적이신 하나님이요, 무한하신 하나님이라고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이 바로 “거기” 계시고 실재하시는 하나님이다. 더 나아가서는 이것이 유일한 체계요, 이러한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한 종교이다. 동양의 신들은 정의상, 다시 말하면 선악을 다 포괄한다는 의미에서 무한하다. 그러나 인격적인 신들은 아니다. 서양의 신들은 인격적이나 이들은 극히 유한한 신들이다. 독일의 신들과 로마와 그리스도의 신들이 하나같이 다 인격적이지만 무한한 신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 즉 성경의 하나님은 인격적이며 무한하시다.

 

성경의 이 인격적이며 무한하신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시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무에서부터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것은 유한하고, 피조물이다. 하나님만이 무한하신 창조주시다. 이것을 도표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인간과 동물과 식물, 그리고 기계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무한성의 면에서 볼 때, 인간은 기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인격적인 면을 보면 전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 관계를 도식화하면 틈의 위치가 바뀐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도록 만들어졌다. 인간의 관계는 아래쪽으로만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20세기 사람들은 이 점에서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현대인은 아래쪽의 동물과 기계와의 관계를 찾는다. 성경은 이러한 인간관을 배척한다. 인격적인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가 있다. 우리는 무한하지 않고 유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존재하시는 인격적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참으로 인격적인 존재이다.

 

종교개혁과 르네상스와 도덕

 

르네상스 사상과 종교개혁 사상 사이의 이러한 차이점은 여러 면으로 실제적인 결과를 낳았다. 예를 들면 르네상스는 여자를 해방시켰으며, 종교개혁 역시 그러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부르크하르트는 1860에 출판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명」에서 여자들은 자유를 얻기는 하였으나 전반적인 부도덕이라는 큰 대가를 지불하였음을 지적한다. 그 이유는 자연과 은총에 대한 당시의 견해를 보면 이해가 간다. 사람들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상층부에는 “정신적 사랑”과 이상적 사랑을 가르치는 서정 시인이 있고, 하층부에는 관능적 사랑을 가르치는 소설가와 희극 시인이 있다. 당시에는 외설 서적이 범람하고 있었다. 르네상스기의 이러한 요소는 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생활로 표현되었다. 자율적인 인간이 이원론에 빠지게 된 것이다. 단테는 첫 눈에 한 여자에게 사랑을 느끼고는 평생토록 그 여자를 사랑하였다. 그런가 하면 그는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가사를 돌보게 했다.

 

결국 자연과 은총의 분리는 르네상스 시대의 모든 생활 영역에 파급되었으며, 자율적인 “하층부”가 늘 “상층부”를 잠식했다.

 

전인(全人)

 

종교개혁의 성경적 견해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아주 다른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플라톤의 견해와는 달랐다. 육체나 영혼이 다같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전인(全人)을 만드셨기 때문에 이 전인이 중요한 것이다. 죽은 자의 육체적 부활을 가르치는 교리는 결코 낡아빠진 교리가 아니다. 이 교리는 하나님께서 전인을 사랑하시며, 따라서 전인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플라톤 사상과는 정반대다. 플라톤은 영혼을 대단히 중요시하고 육체를 아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성경의 견해는 인본주의의 견해와도 다르다. 인본주의는 인간의 육체와 자율적인 정신을 중요시하고 은총을 별로 중요시하지 않으며 모든 보편자와 모든 절대 기준을 상실한다.

 

종교개혁에서 주장한 성경적 입장은 첫째, 하나님께서 전인을 만드셨으므로 하나님은 전인에 관심을 가지시며, 둘째, 역사 속의 시공간에서 타락이 이루어져 전인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셋째, 구주 예수의 하신 일을 근거하고 성경의 계시에서 얻는 지식을 가짐으로써 전인의 구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장차 전인이 죽음에서 부활하여 완전한 구원을 얻을 것이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이생에서도 우리는 전인적 구원의 실체를 가지게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와 믿음을 통한 성령의 능력으로 비록 이생에서는 완전하지는 못하나- 실현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전인을 지배하시는 진정한 주님이시다. 이것이 개혁자들이 깨달은 바이고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이다. 앵글로 색슨계의 기독교보다 화란에서는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문화를 다스리시는 주가 되심을 의미한다고 더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양 영역을 다스리시는 주가 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성경의 권위를 떠나서는 자율적인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전인을 만드셨으므로 전인에 관심을 가지신다. 그러므로 통일을 이룰 수 있다. 이처럼 르네상스에서 현대인이 탄생하던 바로 그 때에 종교개혁은 현대인의 딜레마에 대하여 해답을 제시하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르네상스적 인간의 이원론은 현대적 유형의 인본주의를 낳았으나 그와 함께 현대인에게 슬픔을 안겨 주었다.
 

 

3장  절망선

 

초기의 근대 과학

 

우리는 근대과학이 기독교에 동조하며 기독교의 환경에서 살던 사람들에 의하여 시작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기독교가 근대 과학을 탄생시키는 데에 필요한 역할을 다했다고 말한다.

 

동양 사상과는 대조적으로 히브리-기독교의 전통은 하나님께서 “자신 밖에” 참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주장한다. “자신 밖에”라는 말은 공간적 의미에서 한 말이 아니라, 우주가 하나님의 본질의 연장이 아니며 하나님의 꿈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쓴 말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논의하고 탐구하는 대상이 되는 객관적인 실재가 거기에 존재한다. 기독교는 객관적인 실재와, 원인과 결과에 대한 확실한 근거, 즉 체계를 세우기에 충분한 근거를 제시한다.

 

초기의 과학자들은 이성적인 우주를 창조하신 이성적인 하나님이 계시고, 따라서 인간은 이성을 사용하여 우주의 형상을 발견해 낼 수 있다고 믿은 기독교와 견해를 같이했다. 프란시스 베이컨,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케플러 등이 이런 틀 안에서 우주를 보고 과학 활동을 하였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이와 같은 것들이 초기의 근대 과학 태동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자연은 비잔틴적 사고방식에서 풀려나와 성경적인 올바른 해석에 의해 보호를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근대 과학을 탄생시킨 것은 실로 성경적인 사고방식이었다.

 

초기의 근대 과학자들은 첫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식을, 즉 하나님 자신과 우주와 역사에 관한 지식을 주셨다는 것을 확신했으며, 둘째, 하나님과 인간이 기계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라는 기계적인 작용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칸트와 루소

 

칸트(1712-1778)와 루소(1724-1804)에 이르면 아퀴나스에서 시작된 자율사상이 충분히 발전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그 전에는 자연과 은총이 논의의 대상이었는데, 이 때에 와서는 은총이란 개념이 아예 없어졌다. 이 단어는 이제 적합하지 않은 말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합리주의가 상당히 발전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그래서 그 어디에서도 계시라는 개념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문제는 이제 “자연과 은총”이 아니라 “자연과 자유”가 되었다.


이것은 세속화된 상황을 말해 주는 일대 격변이라 하겠다. 자연이 은총을 완전히 삼켰다. 그래서 “상층부”에는 “자유”만 남아 있게 되었다.

 

이 시기에 자연이 정말 전적으로 자율적이 되자 결정론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결정론이 거의 언제나 물리학의 영역, 다시 말하면 우주의 기계적인 부문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인간의 자유 역시 자율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자유와 자연을 도식화한다면 양자가 다 자율 부분에 있다. 개인의 자유를,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유로 볼 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자유로 본 것이다.

 

루소는 자유를 고수하기 위한 투쟁을 열심히 수행하였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들의 문학과 예술을 통해 마치 문명이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인 양 외면한다. 이리하여 보헤미안(원래는 보헤미아 지방에 사는 사람, 자유주의자, 집시들, 자유영혼, 방랑자)의 이상이 탄생하게 되었다. 자연주의 과학은 그들에게 만만치 않은 강적이 되었다. 자유가 상실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자율적인 자유와 자율적인 기계가 서로 대치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율적인 자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인을 우주의 중심으로 하는 자유를 말한다. 자율적인 자유는 속박을 받지 않는 자유이다.

 

그런데 인간이 기계가 누르는 중압감을 느끼기 시작하자, 루소 등은 그들의 생각하는 인간의 자유를 위협하는 과학을 욕하고 저주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옹호하는 자유는 그것을 속박하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 자율적이다. 그것은 이제 합리적 세계에 적합하지 않은 자유이다. 유한한 개개의 인간이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는 것은 희망과 노력에 불과하다. 남아 있는 것이라곤 개인의 자기 표현이 있을 뿐이다.

이런 현대인의 형성기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희랍 시대 이후 지금까지 서양의 철학 학파들이 세 가지 중요한 원리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첫째로, 그들은 합리주의적(rationalistic)이었다. 즉 인간은 절대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출발하여, 개별자에 관한 지식을 종합하여 보편자를 형성한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하여 합리주의적이라는 낱말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다.

 

둘째로, 철학자들은 하나같이 합리적인 것(the rational)을 신봉했다. 이 말은 소위 합리주의(rationalism)와는 관계가 없는 말이다. 그들은 이성의 타당성에 대한 인간의 갈망이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초로 행동하였다. 그들은 반정립(antithesis)과 연관지어 사고하였다. 만일 어떤 사물이 참되다면 그와 반대되는 것은 참되지 않다. 도덕에서 어떤 것이 옳다면 그와 반대의 것은 옳지 않다. 사실상 이것은 인간이 사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반정립사상-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은 존재하신다는 실재에, 또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는 달리 존재한다는 실재에 근거를 둔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시작되지 않았다. 반정립 사상은 하나님의 창조된 인간이 실재에서 생활하고 관찰하고 생각하도록 한다. 고전 논리학의 기초는 “A는 A이지 비A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셋째로, 철학자들은 하나의 통일된 지식의 영역을 구축할 수 있다는 희망을 항상 버리지 않았다. 칸트의 시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반대 세력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이러한 희망을 고수하였다. 그들은 합리성과 합리주의를 통하여 하나의 완전한 해답, 즉 모든 사상과 모든 삶을 포괄할 수 있는 해답을 얻게 될 거이라고 생각하였다.

 

현대적 근대 과학

 

현대 과학자들은 하층부와 상층부의 완전한 통일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상층부는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하나님도 자유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기계 속에 있다. 그러므로 자연 원인의 제일성을 강조하던 것이 닫힌 체계 안에서의 자연 원인의 제일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전환됨으로 인하여 과학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 전환은 새롭게 발견된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전제의 변화, 즉 유물주의나 자연주의 세계관으로의 전환 때문에 생겼다.

 

그들의 자연주의는 이제 물리학만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과 사회 과학까지 기계 속에 있게 한다. 이런 식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자유를 배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헤어날 수 없는 결정론에 빠지고 만다. 즉 닫힌 체계 안에 있는 자연 안에 있는 자연 원인의 제일성을 근거하고 통일을 추구한 결과는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에 있던 상층부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이 자율적으로 되어 은총과 자유를 잠식한 것이다. 자율적인 하층부는 항상 상층부를 잠식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교훈이 성립한다. 이원론을 주장하면서 하층부에 하나의 자율적인 부분을 두면 반드시 하층부가 상층부를 잠식해 버리는 결과가 생긴다. 지난 수세기 동안 이 일이 되풀이 되었다. 만일 이 두 영역을 억지로 분리시켜서 한쪽에만 자율을 주면 자율적인 부분이 다른 부분을 곧 지배하고 말 것이다.   
 
현대적 근대 도덕

 

도덕에도 역시 영향이 없을 수 없다. 20세기 외설 문학자들의 선구는 마르키 드 사드(1740-1814)이다. 이삼십 년 전만 하더라도 만일 영국에서 그의 책을 가지고 있다가 발각이 되며 법적 제재를 당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사드는 희곡, 철학, 문학에서 다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인간이 기계 속에 살 때 무엇을 할 것인지를 이해하였던 것이다. 만일 우리의 삶 전부가 그저 기계적이라면- 그것이 존재하는 것의 전부라면- 도덕은 고려할 필요도 없다. 도덕은 단지 사회학적 틀을 위한 말에 지나지 않게 된다. 도덕은 기계 속에서 사회가 조종하는 수단이 될 뿐이다.

 

이것은 다음 단계, 즉 남자가 여자보다 강하다는 생각을 낳게 되었다. 자연이 남자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남자는 여자에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권리가 있으며, 매춘부를 취해서 자신의 쾌락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구타하는 행위는- 이 때문에 사드는 군주 정치하에서나 공화 정치하에서 투옥되었다- 본질상 정당하다는 것이다. 사디즘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철학적 개념과 관계가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디즘은 단순히 남에게 상처를 주는 데서 얻는 쾌락만은 아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은 옳다는 것이며 자연이 힘으로 규정한 것은 전적으로 옳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로이트도 심리학적 결정론의 입장에서 사드가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기계의 일부일 뿐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에게 줄곧 그들이 기계라고 일러주면 얼마 안가서 그들이 기계처럼 움직이는 것을 우리는 문화를 관찰함으로써 알 수 있다. 우리의 문화 전반에서- 잔인한 활극에서, 거리를 휩쓰는 폭력에서, 으슥한 곳에서 벌어지는 살인에서, 예술과 생에 있는 인간의 죽음에서- 그 효력이 발생됨을 본다. 역사와 철학의 흐름에서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이것 역시 자율적인 것을 허용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불완전한 타락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연을 자율적인 것으로 인정하면, 그것은 곧 하나님, 은총, 자유 그리고 결국은 인간까지 삼켜버린다. 우리는 루소나 그의 추종자처럼 자유라는 말을 기를 쓰고 사용하여 한 동안은 자유를 향유할 수 있으나 얼마가지 못해 자유는 결국 비자유가 되고 만다.

 

헤겔

 

이제 칸트 이후 철학 사상에 거보를 내디딘 헤겔을 생각해 보자. 칸트와 헤겔은 현대인에 이르는 관문인 셈이다. 수천 년 동안 반정립을 근거로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이 진행되었지만 아무런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철학적 인본주의 사상은 합리주의와 합리성, 그리고 통일된 영역에 매달렸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헤겔은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새로운 방법이 오랜 세월을 두고 나타난 결과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두 가지 면에서 경기의 규칙을 변경시킨 셈이다. 즉 인식론과 방법론의 변혁이었다. 이제 우리는 반정립(antithesis)으로 사고하지 말자. 우리는 정립(thesis) 및 반정립이라는 개념으로 사고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사고는 종합(synthesis)을 이루는 해답을 얻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세계에 하나의 변혁을 가져왔다. 자녀들은 자기 부모 세대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다른 해답을 가지고 나타난 것뿐만이 아니라 방법론도 달라지고 진리도 변화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합리주의적인 인간이 원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세기 동안 합리주의적 사고가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한 데서 온 절망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였다. 한 선택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선택은 합리성을 희생시키고 합리주의를 고수하는 것이었다. 헤겔은 합리성과 관계를 가지는 하나의 종합을 바랐다. 그는 현대인의 특징으로 향하는 문호를 열었다. 진리로서의 진리는 사라지고 대신 종합이 상대주의와 함께 지배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 반역하는 인간의 근본 위치란 인간이 우주의 중심에 있고 인간은 자율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합리성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합리주의와 반역, 그리고 전적인 자율 혹은 부분적 자율을 고집할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와 절망선

 

헤겔을 이어 등장하는 키에르케고르(1813-1855)는, 레오나르도와 다른 모든 사람들이 부정한 것을 받아들였다는 의미에서 진정한 현대인이다. 그는 통일된 지식의 영역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였다. 그 공식은 이제 다음과 같다.


 

 

 

이 새로운 사고 방법은 세 가지 방식으로 퍼져 나갔다.


첫째로, 지리적으로 보면 독일에서 퍼져나가 화란과 스위스로 퍼져서 영국으로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따라서 영국과 미국은 옛 방식을 훨씬 더 오래 답습하였다.

둘째로 그것은 각각 다른 사회계층으로 퍼져 들어갔다. 지성인들이 맨 처음 영향을 받고, 그 다음에는 대중 매체를 통해 노동자계층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그러나 중산층은 이러한 사고방식에 접촉이 없었고 아직도 접촉이 없는 사회계층이다. 여러 면으로 보아 이 중산층은 종교개혁의 산물이다. 그들은 때때로 올바르게 사고하면서, 즉 진리는 진리, 정의는 정의라는 식으로 생각하면서도 이에 대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관습에 젖은 대로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20세기의 자녀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어려운 문제 중 하나는 대부분의 이 중산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녀들의 사고 내용이 다를 뿐 아니라 사고방식도 다르다. 청소년들의 사고는 “기독교는 참되다”고 할 때 이 말을 우리와는 전혀 달리 이해할 정도로 다르다.

 

셋째로, 이 새로운 사고방식은 철학, 미술, 음악, 일반 문화 등 각 분야에 퍼졌으며, 신학에까지 침투하고 있다. 신학에 이 사고방식을 도입한 사람은 칼 바르트(1886-1968)이다.

 

헤겔로부터 절망선은 시작된다. 절망은 지식과 삶에 대한 통일된 해답을 바라던 희망을 포기하는 데서 오는 절망이다. 현대인은 통일된 해답에 대한 합리적 희망을 저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합리주의와 자율적인 반항을 고집하고 있다. 옛날에는 지성인들이 합리성과 통일된 지식의 영역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인은 통일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절망 가운데서 산다. 이제까지 인간이 갈망하던 것이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절망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4장  도약

 

도약

 

키에르케고르는 신앙의 도약을 말한다. 도약은 통일에 대한 희망을 앗아갔다. 그가 물려준 것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상하층부 두 영역을 연결하는 접촉점에 대한 희망이 사라져 버렸다. 양 영역의 삼투나 상호 교류란 있을 수 없고, 상하층 사이에는 완전한 이분법이 있을 뿐이다. 상하층 사이의 분계선이, 이를테면 철근을 넣어 다진 만척 두께의 콘크리트 벽이 되어버린 것이다.

 

분계선 아래에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것이 있다. 그 상층에는 비합리적이며 비논리적인 것이 있어서 양편은 전혀 무관할 뿐이다. 하층부에서 모든 이성을 근거로 하여 볼 때, 인간다운 인간은 벌써 죽었다. 인간은 다만 수학, 개별자 그리고 기계를 다룰 뿐이다. 인간은 아무런 의미나 목적 혹은 의의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나 상층부에는 비합리적, 비이성적 도약을 근거로 한 비이성적인 신앙이 있어서 이것이 낙관론을 허용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의 철저한 이분법이다.

 

세속적 실존주의

 

실존주의는 키에르케고르를 기점으로 세속적 실존주의와 종교적 실존주의로 나누어졌다.


세속적 실존주의는 크게 세 흐름으로 분류된다. 프랑스의 사르트르와 카뮈, 스위스의 야스퍼스 그리고 독일의 하이데거의 실존주의가 그것이다.

 

현대인을 현대인이게 하는 것은 이분법이지, 도약을 통해 상층부에 늘어놓은 것들이 아니다. 세속적이든 종교적이든 그 어떠한 표현을 상층부에 늘어놓더라도 그것이 이러한 이분법에 근거하고 있다면 대동소이하다. 이 이분법이야말로 인본주의적인 통일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던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과 현대인을 구별할 수 있는 특징인 동시에, 성경 계시의 내용을 근거로 상하층의 합리적 통일을 실제로 소유하였던 종교개혁 시대의 사람과도 구별할 수 있게 하는 현대인의 특징이다.

 

종교적 실존주의

 

세속적 실존주의에서 타나나는 것과 동일한 일반적인 양상이 칼 바르트의 사상과 그의 사상의 연장인 신신학에도 나타난다. 그에 의하면 상하층의 합리적 교차점은 없다. 그는 죽을 때까지 고등 비평 이론을 지지했는데, 성경은 오류를 내포하고 있으나 어쨌든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교적 단어”가 성경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종교적 진리”는 성경의 역사적 진리와 분리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성이 설 자리도 없고 검증의 가능성도 없다. 이리하여 종교적인 도약이 이루어진다. 아퀴나스는 하층부에 독립된 한 인간을 등장시켰다. 즉 성경으로부터 자율적인 자연 신학과 철학을 도입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세속적인 사고에서는 모든 희망을 비합리적인 상층부에 둘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신정통주의 신학에서는 인간이 도약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인간은 전인으로서 합리적인 것의 영역에서는 하나님을 찾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신정통주의에서 말하는 인간은 성경이 가르치는 타락한 인간보다 더 못하다.

 

종교개혁자들과 성경은 인간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이성을 사용하여 “종교적 진리”는 물론 역사와 우주를 취급하는 성경을 탐구할 수는 있다.


종교적이며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의 분리는 비합리주의의 핵심이다. 이러한 경우 신앙은 이성으로부터 분리된다. 그것은 현대인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종교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상층부에 여러 단어들이 열거되고 있으나 그것이 근본 체계를 바꾸지는 않는다. 체계에 관한 한 종교적인 용어를 사용하거나 세속적인 용어를 사용하거나 하등의 차이가 없다. 주목할 중요한 점은 도약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키에르케고르의 학파의 생각이 형태만 바꾸어 끊임없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합리적이며 논리적인 것은, 비합리적이며 비논리적인 것과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도약은 전체적일 수밖에 없다. 신앙은 아무 검증이 없는 도약이 된다.

 

우리가 무슨 용어를 사용하든 상관이 없다. 도약은 현대인의 사상 모든 영역에 보편화되어 있다. 인간은 단순히 기계로 살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도약이라는 절망을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마련이다. 회화, 혹은 음악, 소설, 드라마, 종교 등 그 어느 것으로 표현되든 바로 이러한 인간이 현대인이다.

 

신신학

 

과거의 강경한 합리주의적 자유 신학에서 생겨난 신정통주의는 정의된 단어를 분계선 아래에 둔다.

 

 

 

정의되지 않은 단어를 분계선 위에 둔다. 이 “도약의 신학”은 매사를 정의되지 않은 말로 다룬다. 틸리히는 “하나님 뒤에 계시는 하나님”(God behind God)이라는 말을 쓴다. 두 번째 “하나님”은 전혀 정의되지 않은 말이다. 분계선 위에 있는 내포적 단어들의 가치는 그것들이 정의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신정통주의는 세속적 실존주의보다는 유리한 점을 가지고 있다. 신정통주의는 인류의 기억 속에 뿌리박혀 있는 강한 내포적 단어들, 즉 부활이니 십자가니 그리스도니 에수니 하는 등등의 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대화의 미궁에 빠져들게 하는 데에 안성맞춤이다.

 

사람들이 예수라는 말을 듣고 그것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나 그 말은 결코 정의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말들은 언제나 비합리적이며 비논리적인 영역에서 사용된다. 이것들은 역사와 우주로부터 격리되어 있으므로 하층부에 있는 이성이 검증할 도리가 없다. 따라서 상층에 무엇이 있다는 확증도 없다. 이것은 모든 희망을 합리성의 영역에서 제거하는, 즉 상하층을 분리시키는 절망적 행위이다. 종교적인 말들을 사용한다고 하여 달라지지 않는다.

 

상층부 경험

 

이 상층부 경험을 사르트르는 “실존적 체험”, 야스퍼스는 “한계 체험”, 하이데거는 “불안”이라고 한다. 알더스 헉슬리는 “제일의 체험”이라는 말을 쓴다. 이 체험을 얻기 위해 약물 사용을 주장하였다. 하층에서는 삶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사람들은 합리성의 세계와는 무관한 신비한 경험을 가져 보겠다고 약물을 사용했다. 야스퍼스는 이러한 체험이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헉슬리는 약물을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경험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건다.

 

오늘날 약물을 취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도피나 반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절망에 있다. 합리성과 논리를 근거로 볼 때 인간은 무의미하며 따라서 문화도 역시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제일의 체험”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발버둥친다. 1960년대의 약물 만연의 이면에는 이와 같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범신론과도 관계가 있다. 동양의 신비 종교에서는 종교적 체험을 얻고자 대마초라는 마약을 수세기 동안 써왔다.

 

상층부에 무엇을 두든지 하등의 차이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또 하나의 예가 낙관주의적 진화론적 인본주의이다. 이 사상은 줄리안 헉슬리가 주창한 것이다. 이것의 희망은 항상 내일(manana)이라는 도약에 근거를 두고 있다. 사람은 확증을 얻기 위해 항상 내일을 기다리는데 이러한 낙관론은 하나의 도약이다. 이 낙관론에는 합리적인 근거가 없다. 비합리적이다. 사람들이 신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기능을 더 잘 발휘할 수 있으리라는 기본 명제를 그가 설정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헉슬리에 의하면, 신은 없지만 그냥 신이 있다고 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알더스 헉슬리가 약물을 의지한 것처럼, 줄리안 헉슬리는 종교적인 도약에 기대를 건 것이다. 물론 그에게는 신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거짓이다. 

 

분명한 것은 합리주의자나 인본주의자가 기독교는 충분히 합리적 종교가 아니라고 전제하고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제 그는 먼 길을 우회하고 와서는, 특수한 의미의 신비이기는 하지만, 그 자신이 신비적인 사람이 됨으로써 종결을 짓는다. 이 신비주의자는 신앙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누가 있건 없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세속적인 말로 표현되든 종교적인 말로 표현되든 그것은 “신앙”을 믿는 신앙이다. 현대인은 도약함으로써 합리성을 떠나고 이성을 떠나, 상층부에서 해답을 찾는 데 열중하고 있다.  

 


5장  상층부로 도약하는 예술

 

루소 때부터 자연과 자유 사이에 이분법이 이루어졌다. 자연은 기계의 포로가 되어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인간과 더불어 결정론과 기계를 대표하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로 인간이 상층부에서 자유를 얻기 위해 있는 것을 본다. 이때 추구하는 자유는 무제한의 절대적 자유이다. 인간을 규제할 하나님은 없고 심지어 보편자도 없다. 그러면서도 그는 동시에 기계 속에 빠지는 저주를 느낀다. 이것이 바로 현대인의 갈등이다.

 

예술 분야는 이러한 갈등을 다양하게 드러낸다. 이러한 갈등은 현대 예술의 대부분이,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자기표현으로서는 너무 추하다는 흥미 있는 사실을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자신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훌륭하지만 지금은 타락한 인간의 성품을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인간이 자율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자유를 표현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그의 예술의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많은 부분이 무의미하고 추하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많은 산업 디자인이 진정한 아름다움으로 더욱 정연해지고 있다. 존재하는 사물의 곡선을, 다시 말하면 우주의 형상을 따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또한 이와 같은 과학이 자율적으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함을 실증한다. 비록 과학자가 모든 것이 무질서하고 무의미하다고 말하더라도, 그가 일단 우주 안에 들어가면 자기의 철학 체계가 어떻든 제한을 받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발견하는 것을 따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과학은 한낱 공상과학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산업 디자인 역시 과학과 마찬가지로 우주의 형상을 따르게 마련이어서 흔히, 인간의 반역과 추악함과 절망을 표현하는 예술보다 더 아름답다.

 

 


6장  신비주의

 

희망과 이성을 분리시키는 이분법의 논리적 귀결점은 모든 이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상층부에 아무도 없는 신비주의는 결국 범주 없는 신비주의이다. 그러므로 상층부에다 종교적인 용어를 갖다 붙이건, 혹은 비종교적인 용어 또는 예술의 상징적 표현이나 외설적 표현을 사용하건 상관이 없다.

 

이와 같은 원리는 급진주의 신학에도 적용된다. 즉 하층부의 인간은 죽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 역시 하층부에서는 죽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죽었다”고 말하는 신학자들은 아주 분명하게 “상층부의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이야기 한댔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차라리 정직하게 하나님은 죽었다고 말하자”라고 한다.

 

급진적 자유주의 신학을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애용물로서 신이라는 단어만을 소유할 뿐이다. 내포적 단어를 근거로 한 의미론적 대답뿐이다. 현대 신학은 이제 불가지론이나 심지어는 1980년대의 무신론과 별 다름이 없다. 수백년 전에 아퀴나스는 그의 신학, 철학의 체계에 자율적 부분을 설정했고, 현대의 신신학은 거기에서 온 결과이다.

 

하나님은 죽었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아직도 예수란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는 정의되지 않은 하나의 상징으로 드러난다. 그들이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이 말이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기들 멋대로 내용을 갖다 붙인, “예수”라고 불리는 종교적인 표상을 가진 인본주의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사람들이 예수란 말을 갑자기 하나의 내포적 단어로 바꾸어 상층부에다 슬쩍 갖다 붙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최근 일부 복음주의자들이 명제의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은 주의하지 않은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이 그런 식으로 말할 때, 그는 분석적 형태로든 비분석적 형태로든 상층부로 도약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현대의 사상 논쟁의 압력에 물려 절대적인 성경을 제쳐 두고 단순히 상층부에다 예수니 체험이니 하는 말을 갖자 붙인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아 마땅하다. “이렇게 하는 것과, 세속 불신자들이 의미론적 신비주의에서 하는 것이나 급진주의 신학이 하는 일이 다를 바가 무엇인가?”그런데 아직 두드러지게 눈에 뜨일 정도는 아니지만, 그게 다 동일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다음 세대에 가서는 그것이 다 같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농후해질 것이 확실하다.

 

만일 상층부의 것이 합리성과는 별개의 것이라면, 또한 성경이 우주와 역사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 검증 가능한 것으로 논의되지 못하다면, 복음주의에서 말하는 상층부와 극단적인 현대 신학이 말하는 상층부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무슨 권리로 선택을 할 것인가? 힌두교의 비슈누의 이름하에 만나는 것과 예수를 만나는 것이 다를 것이 무엇인가? 또한 이러한 말을 사용하지 않고 약물을 사용함으로써 어떤 체험을 추구하지 말라는 법이 어이 있는가?

 

오늘날 우리에게 시급한 일은 현대 사상의 전모를 이해하는 일이다. 즉 이원론과 이분법 그리고 도약의 의미를 잘 파악해야 한다. 상층부는 여러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종교적인 것, 세속적인 것, 추한 것, 정결한 것, 무엇이든 다 가능하다. 현대 사상의 골자를 캐 들어 가면 상층부에 무슨 말을 적용시키든 상관이 없다. 즉 예수라는 애호되는 말까지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는다.

 

이러한 시비를 가릴 합리적, 성경적 내용이 없고 보니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과는 정반대되는 내용을 가르치는 데에 사용되고 있다. 사람들은 대단한 열심으로 이 말을 따르도록 요구받는다. 급진주의 신학을 따르는 새로운 도덕에서 더욱 그렇다. 자기를 원하는 이성과 동침을 하는 것도 예수와 같은 행위라는 것이다. 인간답게 되려고 노력하는 한, 예수께서 가르치신 특정 도덕을 어기더라도 다른 사람과 동침하는 것은 예수와 같은 행위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의 교훈은 문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층부의 합리적 성경 내용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예수라는 말이 참 예수의 적이 되었으며 예수님의 교훈에 대한 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이 “예수”라는 내용 없는 표상을 경계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내용 없는 표상과 싸워야 한다. 이것은 실로 큰 매력을 가지고 인류의 기억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으며, 또한 사회학적 형식과 통제를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의 영적 자녀들에게도 이것과 싸우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와 같이 악화일로에 있는 경향을 보면, 예수께서 말세에 적그리스도들이 등장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나타날 큰 적은 적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그리스도의 적이다. 지난 수년 동안 성경의 내용과는 동떨어진 예수라는 말이 점점 역사적인 예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고 다시 오실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적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만일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 이분법에 말려들어 예수와의 만남을 성경의 내용과 분리시키기 시작한다면(고의는 아니더라도), 자신들과 다음 세대를 현대 사조의 소용돌이 속에 내던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현대 사조는 거의 한 덩어리가 되어서 우리를 포위하고 있다.

 


7장  이성과 신앙

 

이성과 신앙

 

신앙을 비성경적인 방법으로 이성과 대치시키는 데서 오는 결과는 다음과 같다.
기독교를 상층부에 두는 데서 파생되는 문제는 첫째로 윤리 문제이다. 상층부의 기독교와 일상 생활의 윤리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에 대한 답변은 간단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상층부에는 범주가 없다. 따라서 상층부가 범주를 설정할 방도도 없다. 결국 오늘날 “그리스도와 같은”행위를 결정하는 것은 교회나 사회가 특정 상황에서 바람직한 것으로 합의하는 것이다. 이성과 신앙을 대치시키는 이상, 우리는 실제 세계에서 실제 윤리를 가질 수 없다. 단지 상대적인 윤리만을 가질 따름이다.

 

이런 분리에서 오는 두 번째 결과는, 법이 존재할 적절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전체 법 체계는 하나님께서 실제적인 것을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계시하셨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스위스의 폴 로버트가 그린 재판관들을 교훈하는 정의의 여신이라는 그림은 손에 든 칼로 “하나님의 법”이라고 적힌 책을 가리키고 있다. 종교개혁 시대의 사람에게는 법에 대한 근거가 있었다. 반면에 현대인은 기독교 신학을 내동댕이쳤을 뿐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윤리와 법의 근거로 가졌던 것에 대한 가능성마저 포기하였다.

 

세 번째의 결과는 악의 문제에 대한 답변마저 폐기했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이에 대한 해답을 역사적, 시공간적, 실제적이고 완전한 타락에서 찾는다. 아퀴나스의 오류는 불완전한 타락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적 입장은 시간과 공간과 역사 속에서 프로그램화 되지 않은 인간이 있었는데 그가 스스로의 결정으로 하나님을 거역하였다는 것이다. 일단 이러한 입장을 포기하면 “하나님이 있다면 그는 악마이다”라고 한 보들레르의 말이나, “만일 그가 하나님이면 결코 선한 분일 수가 없고, 만일 그가 선하다면 하나님일 수가 없다”고 말한 매클리시의 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 의의 있는 인간을 만드셨는데 사탄으로 말미암아 그가 악하게 되었으며, 인간의 반역이 실제로 역사의 시간과 공간에 있었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없다면 결국 해답은 없는 것이고, 보들레르의 진술을 받아들일 도리밖에 없다. 일단 역사적 기독교의 해답이 거부되면 상층부로 무조건 도약하여 이성을 묵살하고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만일 우리가 이원론을 받아들여 현대 문화와 사상의 마찰을 피하겠다고 생각한다면, 환상의 함정에 빠지고 말 것이며, 몇 발자국 뛰어 보아도 늘 같은 장소에서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네 번째로 기독교를 상층부에 두는 데서 오는 결과는 곤경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전도할 기회를 빼앗기게 된다. 현대인은 자신의 파멸이라는 해답보다는 다른 해답을 갈망한다. 기독교는 기독교의 해답이 바로 현대인의 절망해 버린 것, 즉 바로 사상의 통일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말해 줄 기회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는 삶의 문제 전체에 대한 통일된 해답을 준다. 인간은 자기의 합리성을 포기해야 하지만, 그 다음에는 논의할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것을 근거로 하여 그의 합리성을 회복할 수 있다. 내가 일찍이 합리주의와 합리성이 다른 점을 아주 강조하여 지적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대인은 후자를 상실하였다. 그러나 그는 검증과 논의가 가능한 구체적인 것을 근거로 삼아 삶에 대한 통일된 해답으로 합리성을 회복할 수 있다.

 

현대인과 대면하려면 이분법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자신과 역사와 우주에 대하여 참된 진리를 가르치는 성경을 가지고 대면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종교개혁 당시 우리의 선조들이 너무나 잘 파악했던 진리이다.

 

무한의 면에서 보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어 있으나, 인격적인 면에서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에 관하여 무한히는 아니지만 참되게 가르치실 수 있다(우리는 유한한 피조물로서 모든 것을 무한히 알 수는 없다). 그분은 우주와 역사에 관한 진리를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표류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성경관을 고수하지 않는 이상 이와 같은 해답을 얻을 수 없다. 예수님 자신은 자기의 권위와 성경의 내용과의 통일을 전제로 행동하셨다. 하나님도 성경과 분리시킨다면 충분한 내용이 없으므로 내용 없는 표상이 있게 될 뿐이다.

 

이 모든 것에는 인격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시요, 즉 인생의 모든 면의 주님이시다. 만일 예수가 나의 지적 생활 전체의 주가 아니라면 그를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만물의 주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다. 만일 내가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찬양하면서 나 자신의 자율적인 생활을 그냥 고집한다면, 나는 거짓되고 전도된 사람일 뿐이다. 나의 성생활이 자율적일 때에도 그렇고 나의 지적 생활의 전부 혹은 극히 일부가 자율적일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율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다 잘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내용에 구애되지 않는 것을 자율적이라고 한다면, 자율적인 과학이나 자율적인 예술 역시 그릇되다.

 

과학과 예술이 자율적인 하층부의 틀에 놓이게 되면 인류 역사를 통하여 경험해온 것과 동일한 비극적 종말을 면치 못한다. 무슨 이름으로든 하층부가 자율적으로 되면, 순식간에 하층부가 상층부를 잠식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고찰하였다. 즉 하나님만 자취를 감출 뿐 아니라 자유와 인간 역시 사라지고 만다.

 

성경의 독자성

 

성경은 비로 내가 유한한 존재이긴 하나 문제의 답을 제시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의 틀 안에서 모든 문제들을 하나의 체계로 연결시키는 밧줄을 쥐고 있는 것처럼 풀 수 있었다. 성경이 가르치는 체계를 취하여 인간들의 사상 시장에다 내놓고 발표하더라도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성경의 가르침은 다른 사상과는 전혀 다르다. 성경은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 즉 자신에게서부터 시작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를 말해주는 유일한 종교 또는 철학 체계이다. 사실상 우리 자신을 떠나서는 문제를 다룰 수 없다. 작자가 다 자신의 눈을 통하여 사물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진정한 문제가 있다. 무슨 권리로 내가 여기에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다른 종교나 철학은 그러한 권리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내가 해야 할 일, 즉 자신에게서부터 시작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를 제시한다.

 

우선 성경은, 태초에 만물이 인격적이고 무한하신, 언제나 존재하시는 하나님에 의하여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만물은 근원적으로 비인격적이라기보다는 인격적이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이 자신 밖에 만물을 창조하였다고 말한다. 나는 이 “자신 밖에”라는 말이 20세기 사람들에게 창조를 설명하는 데에 가장 적절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을, 공간적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는 신의 본질의 연장이라고 보는 범신론적 견해를 부인하기 위하여 쓰는 것이다. 우주는 참으로 인격적 기원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사랑과 의사소통이 본래적인 것과 상치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의의가 있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특별히 자기의 형상대로 만드셨다고 성경은 말한다. 만일 인간의 기본적 관계가 위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래쪽에서 그것을 발견하려 할 것이다. 기본적 인간관계를 아래쪽에서 찾아 결국 자신을 동물과 간련시키는 사람은 벌써 케케묵은 옛 사람이다. 오늘날 현대인은 자신을 기계와 관련지으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준거선을 아래로 그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에 위로 가야 한다. 인간은 결코 기계가 아니다.

 

만일 우주의 기원이 본래적으로 인격적이라는 것을 부정한다면, 그 다음에 오는 결과는 무엇인가? 인간은 비인격인 것+시간+우연의 산물이란 해답밖에 없다. 이러한 근거에서 인격을 발견해내는 데에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경은 인간이 인격적인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말하며, 우리에게 희망적인 시발점을 제시한다. 어떠한 인본주의의 사상도 인간이 자신에게서부터 시작하는 것을 정당화하지 못했다. 성경의 해답은 유일무이하다. 성경은 인간이 해야 할 일, 즉 자신에게서부터 시작하는 일을 해도 되는 이유를 제시하며, 이에 적절한 준거점, 즉 무한하시고 인격적이신 하나님을 말해 준다. 이유도 방향도 모르면서 자기에게서부터 시작하는 다른 사상과는 완전히 대조가 된다.

 

자신에게서 시작했으나

 

인간이 자신에게서부터 시작하여 인생과 우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경우,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명확하게 규정해야 한다. 여기에는 두 개의 개념 혹은 두 개의 사상이 있으므로 양자를 구분해야 한다. 그 첫째는 합리적인 또는 인본주의적인 개념, 즉 다른 모든 사물과는 전연 무관하게 자율적으로 시작할 때 인간은 궁극적 진리로 향하는 교량을 세울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둘째는 기독교의 개념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신- 무한한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자신- 에게서부터 출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타락한 인간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많은 지식을 주셨다고 말한다.

 

인간이 타락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은 것은 아니다. 인간이 비록 타락했어도 역시 인간임에는 변함이 없다. 비록 타락했으나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만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나아가 기독교인이 아닌 화가도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랑을 하고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실증하는 행위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만이 가지는 “인간됨”을 드러내는 것은 그 이유에서이다.

 

그러므로 비록 인간이 타락한 결과 비뚤어지고 부패하고 버림받았다 하여도 아직도 역시 인간임에는 틀림없다. 기계가 된 것도 아니요 동물이나 식물이 된 것도 아니다. 인간은 아직도 “인간됨”을 지니고 있다. 사랑, 합리성, 의미에 대한 욕망, 비존재에 대한 공포 등등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인간을 동물과 식물, 혹은 기계와 구별지어주는 요소들이다. 한편 자율적으로 자신에게서만 시작한다면,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해결점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그러나 타락 이후의 인간의 반역이라는 사실을 이에 첨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존재하는 것의 증거, 즉 외부 우주와 그 형식 그리고 인간의 “인간됨”을 거역하고 왜곡시킨다.

 

필요한 지식의 원천

 

성경은 스스로 성경이 무엇인가를 설명한다. 성경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문자를 빌려 전달하는 절대적인 진리라고 말한다. 닫힌 체계 안에서의 자연 원인의 제일성(齊一性,uniformity of natural)을 전제로 하는 오늘날의 세속적 혹은 비성경적 신학 사고로는 이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명백히 말한다. 시내산에서 “너희가 보고 들었다“고 말한다(신5:23-24). 역사적 시공간의 상황 속에서 주신 명제적 진리이다. 그것은 어떤 내용 없는 실존적 체험도 아니요 반지성적 도약도 아니었다. 신약에서도 꼭 이와 같은 말씀 전달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히브리어로 말씀하신 경우이다. 우리는 한편으로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명제적 말씀을 가지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이 명제적 말씀이 누구에게 주어지는가를 알 수 있다.

 

성경은 인간이 비록 절망적으로 버림받은 자가 되었으나,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라고 가르친다. 인간이 버림받았다는 것은 그가 비록 존엄성과 훌륭함을 지니고 있다고 하여도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인간의 업적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과학적 업적은 인간이 쓰레기가 아님을 보여 준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영원성을 포함하여 역사에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견해는 인간을 인간으로서 경이에 찬 존재로 본다.

 

이와 반대로 합리주의자는 자신을 우주의 중앙에 두고, 자신이 모든 지식에서 자율적으로 시작하다가 결국은 자신이 무의미함을 발견한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의 의를 실현하는 데 완전하지 못하므로 역사에 좋은 흔적과 함께 나쁜 자취를 남긴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결코 인간이 무(無)는 아니다.

 

기독교의 교리는 논의될 수 있는 일단의 사상으로 구성되어 있는 체계이다. 성경의 체계는 시작이 있으며 이 시작과 모순됨이 없이 전개된다. 이 시작은 만물의 창조자인 무한하고 인격적인 하나님이다. 기독교는 전혀 검증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의 도약”에 근거하는, 일단의 전달 불가능한 모호한 체험이 아니다. 회심(기독교인 생활의 시작)도 영성(성장)도 결코 도약이 아니다. 이 두 경험이 다 같이 살아 계신 하나님과 또한 그가 우리에게 주신 지식과 연관되어 있으며 인간의 전인격을 포함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도약”하는 정신

 

현대인은 진리에 대한 새로운 자세를 받아들임으로써 현재의 위치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은 다른 어느 분야에서보다도 현대 신학에 가장 현저하게 또한 비극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스인의 진리 개념과 유대인의 진리 개념이 있다. 그리스인의 진리 개념은 모든 점에서 조화를 이루는, 멋있게 균형 잡힌 하나의 형이상학적 체계이다. 그러나 유대와 성경의 진리 개념은 전혀 다르다. 이성적 개념이 중요하지 않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성경이 모든 합리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개념을 바탕으로 기능하고 있으므로- 유대인들에게는 더 확고한 것이 필요하였다는 점에서이다. 더 확고한 근거란 말하자면 실제 역사, 즉 기록에 남길 수 있고 역사로서 논의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다.  

 

현대인의 진리관은 이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견해의 기로에 서 있다. 그러나 현재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 현대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인을 합리적 진리를 가진 사람으로, 유대인을 실존주의자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하여 성경을 자기들 나름대로 해석하려고 한다. 전적으로 잘못이다. 유대인의 사상은, 그것이 시공간의 역사에 근거하고 있고 균형잡힌 체계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리스인의 사상과 다르다. 그러나 유대적이며 성경적인 진리관은, 그리스인이 인간의 “인간됨”의 한 부분, 즉 반정립을 이용하여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논의할 수 있다는 합리성에 대한 욕망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현대인의 사상보다는 그리스인의 사상에 더 가깝다.

 

변하는 세계 속에 있는 불변의 것

 

복음을 전달할 때에 우리가 잘 알아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참되고 불변하는 사실들이 있다는 점이다. 이것들은 급격히 변하는 사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런 것이 변하면 기독교는 어떤 다른 것이 된다. 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오늘날 복음주의적인 기독교인들 가운데 의사전달의 결여를 절실히 느낀 나머지, 현대인과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 불변하는 것을 그대로 두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변경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멈춘다면, 온전한 모습을 제시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급속히 변하는 역사적 상황에 직면하고 있음을 인식해야겠고, 또 복음을 전하려면 현재 사상의 조류가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불변하는 기독교 원리를 말해 보아도 소귀에 경 읽기가 되고 말 것이다. 심혈을 기울여 변하는 역사적 상황 속에 있는 그들에게 어떤 모양으로 영원한 복음을 전할 것인가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허드슨 테일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그들이 믿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러기에 그의 생애는 이 역사가 일어나도록 간구하는 기도의 생애였다. 그러나 그는 또한 복음을 들어야 믿을 수 있음을 알았다. 교회는 그 시대와 장소의 언어와 사고방식을 고려하여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복음을 전할 책임이 있다.

 

우리 자녀들과도 말이 통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사고방식이 우리의 사고방식과 얼마나 다른가를 알아보려고 노력을 하지 않는 탓이다. 독서와 교육 그리고 현대 문화의 대중 매체를 통하여, 오늘날의 중산 자녀들도 완전히 20세기적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다. 많은 영역에서, 그리스도인 부모들과 목사들과 교사들은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자녀들과 교회 밖에 있는 대다수의 청소년들이 마치 외국어나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전혀 대화를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에 있는 것은 단지 지적으로 논의할 문제만은 아니다. 이것은 20세기에 복음을 전하려는 일에 진지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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