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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 이야기 : 니고데모의 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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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의 안경 / 신국원 지음

 

 

서언 : 우리의 기독교 세계관 이야기

니고데모는 안경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진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기 원했다면 말이다. 그것을 모른 채 그가 예수님과 나누는 대화는 답답하기 그지없다. 지식인 소리를 들었을 그가 다음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보다 더 말귀를 못 알아들었다. 대화는 동문서답으로 헛돌다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었던 것은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우리 주변에 있었던 니고데모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우리의 니고데모가 누구인지 궁금해 할 필요는 없다. 그 이야기는 20여 년 전 최루탄과 화염병의 매캐한 냄새가 대학가를 뒤덮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눌리는 마음으로 학교를 다녔다. 사회 전체가 끝없이 요동치는 것이 불안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엉거주춤한 태도 때문이었다. 친구가 반정부 데모를 하러 가자고 했을 때 망설이던 모습이 그랬다. 본래 비전은 어두운 시대를 배경으로 서서히 빛나게 마련이라고 했던가. 그들이 기독교 세계관이 제시하는 비전에 눈을 뜨게 된 것도 이런 암울한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였다. 똑같이 무거운 마음을 풀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큰 위안이 되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들의 눈을 열어 준 것은 개혁주의 신앙의 폭넓은 관점이었다.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찾기 힘들었던 삶과 세계에 대한 실제적 비전이 있었다. 그것은 이들에게 신앙과 삶을 바라볼 새로운 안목을 열어 주었다. 정치 현실에 대한 고민을 통해서 신앙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런 도전은 학문의 길을 택했던 이들에게 더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성경과 기독교 신앙이 세계와 삶에 대한 구체적인 조망을 제시한다는 점에 긍지를 갖게 된다. 자연주의, 인본주의, 마르크스주의, 무신론보다 더 신빙성 있고 설득력 있는 세계관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은 운동권과는 다른 방식으로 행한 현실 참여였다.

 

한 세대 전,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동기를 제공했던 상황은 이제 많이 달라졌다. 우리 사회 전체를 좌우했던 민주화라는 거대한 담론은 다양한 실천적 관심사로 분산되었다. 그람시(Antonio Gramsci)가 말한 바와 같이 이제는 전면전이 아니라 참호전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런 상황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바, 거대 담론에 대한 의심이 특징인 포스트모더니즘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런 가운데 거대 담론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세계관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는 시대가 달라도 변하지 않는다. 순종하는 방식이 변할 뿐이다.

 

우리는 이런 상황일수록 비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위기가 닥치면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의 해결이다. 다시 성경적 세계관의 뿌리도 돌아가야 한다. 시대의 변화에 적절한 대응을 못하면 운동성은 급속히 약화되기 마련이다. 생명력과 역동성을 잃은 운동은 늘 염증을 느끼게 마련이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진부한 상태에 빠졌다면 거기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 밖에 없다. 근본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일이다. 그래서 이 책을 쓰면서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여러분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입니다.”

 

1장 세계, 세계관 그리고 문화

우리는 여러 가지 창문을 통해 세상을 본다. 이 세계는 물론 하나다. 그러나 인간은 그 하나의 세계를 각기 독특하게 인식한다. 세상을 보는 창문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세계관은 세상과 인생을 내다보는 창이다. 세계관은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을 열어 준다. 그것은 세계를 경험하는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특이한 방식이다. 개인의 차원에서 보면 세계관은 그 사람의 인격과 안목의 수준이다. 한 사회와 문화 역시 독특한 사조와 비전과 생활 방식을 공유한다. 파편화가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공통정신이라는 것은 분명 역설이다. 인간은 세상과 삶에 대한 전체적 조망을 본능적으로 추구한다. 이러한 인간은 여러 가지 질문을 품게 되는데 이 질문은 의도적으로 묻는 것이라기보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떠오르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지적하듯이 세계관 형성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과 답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세상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나?

인생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왜 세상은 이다지 고통과 죄악으로 가득한가?

구원이 실제로 있는지,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며, 세상과 역사의 목적과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은 이런 근본적인 질문들을 묻고 답함으로써 세상과 삶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갖게 된다. 세계관을 형성하는 질문의 답은 과학적인 연구와 조사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성적 사유와 과학적 연구 조사가 이런 전제들에 입각해서 이루어진다. 결국 세계관은 본질적으로 학문의 차원이 아니라 종교적 성격을 띤다. 누구도 그 질문의 답을 이론적으로 얻을 수 없다. 물론 이성적 요소가 결여된 것은 아니지만 주로 전통과 문화 그리고 믿음에서 얻는다. 능동적으로 파악하기보다 주어진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삶과 세상에 관한 이야기들은 모두 이런 질문과 답을 달고 있다. 그 질문들은 근본적인 것이다. 자연히 그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심오한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지만, 답을 모르는 경우도 많다. 사실 가장 흔한 답은 모르겠다"는 것이다. 성경에도 이런 문제로 씨름하는 구절들이 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3:11) 하나님이 인생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알 수 없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욥처럼 마치 퍼즐 조각 같은 삶의 단편들을 맞추려고 애쓴다. 이 또한 전도서 저자의 말과 같이 인간에게 주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3:11)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계관은 인간의 독특한 존재의 본성과 맞물려 있다. 유한하나 영원을 꿈꾸고 의미를 찾을 수밖에 없는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세계관이란 세상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단지 시각, ()’이란 말로 표현한 일종의 제유(提喩). 그러나 그것이 함축하는 것은 시각만이 아니다. 모든 감각을 통해 얻는 세계에 관한 이해 전부를 말한다. 즉 사람을 두고 어떤 인상을 갖듯이 세상과 인생에 대해서 어떤 인상을 갖는 것이다. 세계관은 세상과 인생에 대한 이해와 앎의 통합적 기초다. 눈이 어디를 향하며 무엇을 듣느냐는 단지 감각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안목은 삶의 방향 설정에 영향을 미친다. 세계관에서 삶의 행보가 정해진다.

 

나아가 인간의 시각은 카메라와 달라 의도적이다. 보는 것을 믿기도 하지만, 믿는 것을 보는 이유가 그것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의식의 게슈탈트 구조(Gestalt factors)가 이를 증거한다. 그래서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reetz)나 제임스 올시우스(James Olthius)의 말처럼 세계관은 두 가지 요소를 가진다. 첫째, 세계관은 세상과 삶에 대한 조망(view of the world and life)이다. 둘째, 세계관은 세상과 삶을 위한 조망(view for the world and life)이다. 전자를 세상과 삶에 대한 이해라 한다면 후자는 비전이다. 이해는 비전의 토대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관은 지도와도 같다. 그것은 삶의 안내가 된다. 이는 세계관이 단지 세상을 이해하는 것에서 머물지 않고 세상을 만드는 전략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우리는 바라보는 세계를 일정한 관점에서 이해하고 그에 따라 세계를 만들어 간다. 이렇게 해서 생긴 또 하나의 세계는 인간적인 세계다. 우리는 그것을 문화라고 부른다. 그래서 자연-세계관-문화라는 순서가 가능하다. 세계에 대한 다양한 이해는 세계를 형성하기 위한 전략으로 나타나고 그로 인해 다양한 문화가 만들어진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자칫 세계관이 매우 상대적인 개인의 관점처럼 이해될 수 있다. 같은 사회 속에서 여러 관점이 가능하고 개인차도 나기는 한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도 세계관에는 공동체적 성격이 강하다. 세계관은 공동체적이다. 대개 같은 문화, 같은 언어권인 경우 세계관이 같거나 흡사하다. 사실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모던 사회에도 일련의 공동체적 특성이 나타난다. 그래서 그것은 포스트모던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세계관이 공동체적이라는 또 다른 증거는 강력한 국가나 문화 뒤에는 강력한 세계관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문화의 차이 뒤에는 반드시 세계관의 차이가 존재한다.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돌출 건물은 보험 회사인 대한생명 63빌딩이다. 대부분의 도시가 다 그렇다. 지금은 테러로 붕괴되었으나 예전에 뉴욕에서 가장 큰 건물인 102층짜리 쌍둥이 건물은 무역회관이었다.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돈이며 경제라는 사실을 이보다 더 분명하게 가시적으로 보여 줄 수는 없다.

 

왈쉬와 미들톤이 지적한 대로 세계관은 삶의 체험을 통해 교육되고 전수된다. 그것은 목욕 방법이나 음식과 가족 관계에 배어 있다. 세계관은 의식적인 교육에 앞서 생활 속에서 전수된다. 또한 세계관은 대개 개념적으로 명시되거나 학술적으로 체계화되어 있지 않다. 신화, 전설, 설화 등 이러한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공유하는 집단의 미래를 지시하는 비전의 역할을 한다. 세계관은 삶의 밑그림과도 같다. 세계관은 이렇게 우리 삶의 방향과 세부 행위를 인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세계관 전수 방식은 이야기다. 이야기는 과거를 회상하지만 그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반드시 비전, 즉 전망을 담고 있다. 이야기와 비전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과거를 설명하는 이야기와 미래를 투사하는 비전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한 민족이 역사적 전기를 마련하고자 할 때 대부분 역사 바로 세우기가 선행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야기를 통해 비전을 제시하는 세계관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역시 히브리 전통이다. 히브리인들은 들음에서 진리를 발견했다. ‘환상은 특히 구약 성경에서 많이 사용되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열조들은 모두 이 비전을 통해서 삶과 세상을 바라본 사람들이었다.

 

2장 기독교 세계관

그리스도인의 비전은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 형성되어야 마땅하다. 기독교 세계관이 다양하다는 말은 통일성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은 되지만 그 공통성은 성경이 담보하고 있다. 그 공통성은 흔히 이 책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창조, 타락, 구속의 진리로 대표된다. 또는 교파를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이 고백하는 사도신경이 담고 있는 기본 진리로 표현된다.

 

기독교 세계관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이 세계관이라는 말의 철학적인 근원에 대해 경고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알버트 워터스(Albert Wolters)는 이 말이 독일의 낭만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역사적 상대주의를 함축하게 되었음에 유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관이라는 말은 세계에 대한 하나의 견해 또는 관점에 불과하다는 의미가 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함의가 묵직한 이 말을 채용하여 기독교적 삶의 체계를 나타내는 어휘로 처음 사용한 사람은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per)였다. 그는 이 말이 단지 철학적 체계라는 인식을 피하기 위해 삶과 세계에 대한 관점(life-and-worldview)이라는 다소 어색한 긴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였다. 그의 생각은 1889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행한 스톤 강좌(The Stone Lectures)칼빈주의(lectures on Calvinism, 세종출판사 역간)에 잘 설명되어 있다. 이 강의와 책은 기독교 세계관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거기서 이렇게 말했다. “칼빈주의는 교회 제도에 그치지 않고 생활원리(life-system)로 발전했으며 교리의 구성을 위하여 전력했을 뿐만 아니라 인생관과 세계관을 창조했다.” 그는 또한 그 강좌의 주된 목표가 칼빈주의가 전적으로 교리적인 교회 운동을 대표하고 있다는 그릇된 관념을 뿌리 뽑으려는 것이었다고 했다.

 

카이퍼는 총체적 삶의 체계로서의 기독교 세계관의 필요성을 역설했는데, 그 철학적 바탕을 일구어 낸 것은 그가 세운 네덜란드 자유대학 출신 헤르만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의 몫이었다. 도예베르트는 서구 문화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통해 네 개의 다른 지류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형상/질료의 그리스적 동인, 자연/은총의 스콜라적 동인, 자연/자유의 인본주의 동인, 창조/타락/구속의 성경적 동인이다. 이 네 개의 다른 문화적 동인들은 각기 상이한 종교 기반을 가진 특징적 세계관으로서 각각 다른 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켜 왔다는 것이다. 결국 이 동인은 사상과 문화의 영성인데, 이것에 대한 인식은 사상과 문화의 초월적 또는 종교적 비판과 연관된다. 도예베르트가 생각하는 서구 사상의 기본 동인은 모든 그 기반에서 종교적인 근원을 가진 것들로, 본질적으로 절대성을 가진 것이다. 비성경적 동인들과 성경적 동인은 궁극적으로 대립(antithesis) 관계에 있다.

 

기독교 세계관은 우리의 안목을 고쳐 주는 치료 효과를 가지고 있다. 존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성경을 자연인의 안목을 고치는 안경이라 했다. 성경은 우리의 안력을 바로잡아 주는 삼중 렌즈로 된 특수 처방 안경이다. 레슬리 뉴비긴(Lessile Newbigin)이 잘 말한 것과 같이 성경은 우리가 그것만을 바라보아야(Look at) 할 책이 아니다. 성경은 그것을 통해 보아야(Look through) 할 책, 즉 안경이다. 세계를 우리의 눈과 의식만으로 보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 아니 마음이 죄로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만드신 대자연의 스펙터클 또는 하나님의 극장을 제대로 보기 위한 안경이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성경을 들여다보지 말고 양끝에 줄을 달아 눈에 쓰라고 말한다. 성경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안경은 투명해야 제 역할을 하는데, 마치 눈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워야 한다. 안경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 잘 보기 어렵다. 안경사가 아니라면 늘 안경만 만지고 있을 이유는 없다.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의 진리에 따라 세상을 보는 안목이다.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과 성경적 세계관이라는 말은 서로 바꾸어 사용할 수 있다. 창조와 타락과 구속은 세상을 바로 이해하게 하는 성경의 삼중 렌즈다. 이 진리들은 다초점 렌즈와 달리 따로 움직이지 않는다. 창조, 타락, 구속의 진리는 서로 맞물려 우리의 눈을 밝혀 준다. 만일 창조의 진리만 강조되고 타락과 구속이 빠진다면 자연신론이나 이신론에 근접할 것이다. 타락만 강조하는 세계관은 불교와 같이 세상을 부정하는 관점을 줄 것이다. 구속만을 강조하는 관점은 세상의 존재 이유나 역사의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할 것이다. 이 세 진리가 함께 작동하는 성경의 세계관은 철저히 일원적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11:36). 바울의 찬양 그대로다. 음과 양이 대립되거나 선과 악의 근원이 별도로 나란히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욥은 자녀와 전 재산 그리고 건강마저 잃은 상황에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2:10).

 

다른 세계관들은 통합적이지 않다. 그것은 한 세계관 내에 궁극적으로 상반되는 여러 초점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세상은 선/, /, 자연/문화, 자연/은총, 자연/자유와 같은 이원론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이런 세계관들은 세상을 하나의 통합된 관점으로 설명하거나 의미를 주지 못한다. 다신교적 신앙 역시 눈을 흐리게 한다. 상황에 따라 여러 신을 섬기기 때문이다. 다신론과 다원론의 관점은 마치 잠자리 눈처럼 초점이 여럿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사조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일단 형성된 세계관은 바꾸기가 매우 힘든데, 그것은 세계관 교육이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관은 개개인이 만들기보다 문화를 통해 전수받는다. 세계관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그것을 그리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의 밑그림과도 같다. 우리는 그 밑그림을 토대로 해서 나머지 부분을 맞추어 그려 나가는 아이와도 같다. 물론 이것은 일반적인 가능성이다. 때로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서 주어진 밑그림을 없애고 새로운 그림을 들여올 수도 있다. 대개 사람이 거듭나는 것과 같은 과정에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 1980년대 대학가에서 행해진 운동권의 의식화 작업이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물론 온전한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르나, 그들의 작업은 대학 입학 전까지 가졌던 세계관을 벗기고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하는 데 효과적이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오른 눈이 범죄케 하면 빼어 버리라”(5:29)는 말씀의 세계관적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럼 이제 창조, 타락, 구속의 기독교 세계관의 세부 내용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그것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한다.

 

3장 하나님의 창조계획

신학에서 창조론은 가장 발전하지 못한 부분이고, 자연히 교리적으로 취약지구이다. 근래까지 진화론 외에는 창조의 의미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게끔 한 도전이 없었는데, 아마도 그것이 이 부분의 성경적 진리에 대한 이해가 깊이 있게 발전하지 못한 이유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신학은 매우 실천적인 학문이기 때문이다.

 

창조는 세상과 만물이 어디로부터 왔으며, ,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가르쳐 준다. 우리는 창조 진리를 단지 성경의 문을 여는 이야기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세상을 그토록 신비롭고 장엄하게 만드신 창조주의 능력과 지혜를 보는 눈을 거기서 얻어야 한다(시편8). 그러나 창조의 진리는 창조주의 능력과 대자연의 아름다움에 관한 선포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실천적 교훈들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창조 질서에 관한 이해는 오늘의 문화 사회적 환경 속에서 성에 대한 바른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 매우 중요한 원리다. 창조 질서는 남녀 관계나 성, 결혼, 이혼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규범을 제시한다. 동성애나 트랜스젠더와 같이 논란의 여지가 많은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다. 이런 문제에 접근할 때 창조의 진리가 판단의 근거가 되어야지 상식이나 지배적인 이론에 입각해 접근해서는 안 된다. 다음은 창조 진리의 풍성한 실천적 함축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것들이다.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창조의 진리가 말해 주는 역사와 문화의 의미이다. 창조는 완성을 예견하는 시작이었다. 창조 세계는 단지 정체된 존재가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새 예루살렘성까지 가는 역동적인 과정이 펼쳐질 것을 예견하고 있다. 이처럼 창조 진리에는 독특한 역사관과 문화관이 들어 있다. 역사와 문화는 창조 계획의 일부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역사를 완성하실 때 거기에 또 다른 모습의 세상이 영원히 있을 것이다. 성경은 소위 역사가들이 지적하는 대로 직선적인 역사관을 보여 준다. 그것은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나아간다. 그렇다면 역사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동산에서 성까지 가는 역사의 의미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를 지으시는 것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거기에는 과정이 있다. 하나님이 이 일을 계획하셨고 지금도 그것을 이루고 계신다.

 

우리는 우주의 비밀을 알고, 이미 그 역사의 결과도 알고 있다. 그것을 아는 것은 하나의 은총이다. 그것을 아는 것이 우리 믿음의 근거와 행위의 동기가 되어야지, 세상의 현상과 종말에 대한 비관이나 게으름의 변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스킬더(Klaas Schilder)는 이를 염두에 두고 문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안식이라 했다. 인간이 타락에 빠지지 않고 충성스럽게 문화 명령을 수행했더라면 창조주와 더불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것이었다. 창조에는 이미 완성을 향해 가는 종말론적 비전이 담겨 있었다.

 

창조 이야기에는 하나님이 지금도 만물을 손에 붙잡고 일하시는 모습이 포함되어 있다. 모든 것이 비인격적인 자연 법칙에 의해 돌아간다고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관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창조 이래 지금까지 일하신다고 하셨고, 자신도 그러하다고 하셨다(5:17). 베드로는 하나님이 만물을 마지막 날까지 간수하고 보존하신다고 했다(벧후 3:5,7).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우주의 질서를 하나님의 이러한 역사와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는다. 창조의 질서를 비인격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주로 자연주의 세계관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17세기 경부터 일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대두된 이신론의 영향 때문이기도 한데,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와 자연주의 세계관의 영향으로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기계로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맹목적인 힘에 의해 방향 없이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 방향은 이성적 인간이 만들어 내야만 하는 것이거나 역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만들어지고 지금도 그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그 과정의 주관자는 창조주 자신이시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삶의 방향과 목적에 대한 믿음을 주며, 낙관과 비관을 넘어서는 바른 삶의 태도를 부여한다.

 

모든 세계는 그의 말씀으로 질서 정연하게 만들어졌다. 만물은 있으라하시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있게 되었다. 성경의 표현대로라면 창조는 말씀(“가라사대”)과 아멘(33:6-7,9)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만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있다. 그의 뜻하신 바대로 존재한다. 창조의 체계는 말씀과 순종함이었다. 오늘날 모든 피조물은 그분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존재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와 존재의 법이요, 규범이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뜻의 산물이다. 그런 점에서 도예베르트의 말처럼 존재는 곧 의미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창작의도를 드러내는 명백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사물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란 없다. 예를 들어, 먹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생명체는 없다. 하나님이 존재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옮고 그름을 가릴 기준이 된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법도는 하나님이 내신다. 따라서 국가나 결혼과 같은 문화 사회적인 기구와 제도도 그 온전함의 판단 기준은 하나님의 법도이어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규범으로 인해 옴짝달싹 못하게 얽힌 세계를 연상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런 말을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사실 나는 저녁 반찬으로 콩나물과 숙주나물을 놓고 선택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예정론 따지듯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하나님의 뜻을 찾아 행하려는 강박 관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저녁 반찬으로 준비하기 원하시는 것이 단 한 가지로 정해져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방법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선택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순종하는 일에는 창조적이며 자유로운 놀이의 여백이 충분하다. 콩을 가지고 콩나물국만 끓여 먹으라는 법이 없다. 메주를 쑤어 된장, 간장, 청국장을 담글 수 있다. 두부를 만들어도 연두부, 순두부, 비지 등으로 다양하게 만들 수 있다. 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요 기뻐하실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콩을 원료로 한 반찬과 상품의 종류가 그토록 많을 수 있겠는가.

 

4장 사람이 특별한 이유

창조 진리는 바로 인간 근원과 목적에 대한 물음에 답을 준다. 창조는 우주와 역사의 기원과 더불어 인간이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위해 있게 되었는지를 밝혀 준다. 성경은 인간의 창조를 특별한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은 창세기 1:26-28과 시편 8편이다. 이 본문들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보여 준다. 아니, 어떠한 존재였는지 보여 준다고 해야 좀더 정확할 것이다.

 

독일의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세상이 어떻게 시작되는가에서 인간의 창조가 얼마나 특별했는지를 잘 설명한 바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중대 결단이었다고 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모여 의논하여 결정하실 만큼 중대한 일이었다. 틸리케는 이를 강조하기 위해, 인간 창조는 하나님의 모험이었다고까지 했다. 세상이 인간에게 맡겨지고 그에 의해서 좌우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을 만들고 그로....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1:26) 이것이 삼위 하나님의 결단이었다. 하나님은 시공간 내의 유무형의 모든 것을 인간에게 맡기셨다. 그분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분의 기쁘신 뜻가운데 그렇게 하셨다고 할 수밖에 없다.

 

신학자들은 사람이 창조와 역사의 동역자로 창조되었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나무를 땅에서 솟아나게 하거나 자라게 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가꿀 수는 있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고 운영하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다. 신학자들은 흔히 인간의 특성을 하나님의 형상을 다스림이라는 독특한 사명과 연관시킨다. 물론 거기에는 성경적인 근거가 있다. (1:26-28) 소위 문화명령이라 불리는 구절이다. 네덜란드의 신학자 스킬더는 인간을 분명한 사명을 부여받은 사역자라고 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주를 다스리는 부제(副帝)로 만드셨다고도 했다. 이렇게 볼 때 사람들이 진화론에 영향을 받아 흔히들 상상하는 한가한 원시인의 모습은 허구임이 드러난다. 땅을 정복하고만물을 다스림은 인간의 주권적인 지위를 보여준다.

 

인간은 자연을 일구어 문화를 만드는 사명을 가진 일꾼이다. 우주만물의 지휘자요, 창조의 비밀을 여는 열쇠(8:19-22). 인간이 창조의 청지기라는 사실은 인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음을 내포한다. 창조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듯, 문화와 역사도 그에 순종해야 한다. 문화는 자연과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세운 계획과 질서를 세상에 부여하는 주권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사역자다.

 

인간의 다스리는 특권은 자연을 돌볼책임과 같이 온다. 문화 명령에 나타나는 정복과 다스림은 자연을 경작하며 돌보고 가꾸고 풍성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거기에는 현대 문화의 특성인 지배와 착취, 탐욕스러운 낭비와 파괴가 정당화될 여지가 없다. 특히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문화개발은 더욱 그럴 수 없다. 인간은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며, 그분과 함께, 또 그분을 위하여 일하는 일꾼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한 주가 안식일로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행사는 창조주를 예배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바른 관계 속에서 다른 피조물을 그분의 뜻대로 다스리고 돌보는 관계를 누리며 살 수 있다.

 

창조의 진리는 세상의 근원뿐만 아니라 문화의 기원도 보여 준다. 문화 명령은 사물의 본성을 연구하여 그 지으신 목적대로 개발함으로 성취된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동물의 이름을 짓는 모습(2:19-20)이 그 좋은 예다. 이름은 사물을 다루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이다. 그것은 개념적인 파악이며 언어를 통해서 사물을 지배하고 다루는 행위다. 이름을 통해서 인간은 세상의 사물을 분류하고 정리하여 나름의 질서를 세운다. 미셀 푸코(Michel Foucault)의 주장처럼 사물의 질서는 곧 말의 질서다. 그러므로 말의 질서가 하나님이 만드신 사물의 질서를 올바르게 반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푸코의 말처럼 폭력이 개입될 수 있다. 인간은 사물의 본성을 파악함으로써 하나님이 창조 때에 만드신 것들을 열어 발전시킨다.

 

문화는 인간의 의도가 담긴 자연의 변형 또는 조작 행위 전체다. 어떤 이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처럼 타락 이후 인간들이 만들어 낸 것도, 타락 이후 죄악을 억제하기 위해 고안된 처방전도 아니다. 문화는 타락보다 앞선다. 문화의 기원은 창조에 있다. 창조와 문화는 타락으로 인해 무효화되지 않았다. 문화 명령의 수행은 창조 질서와 사물의 본질을 아는 데서 비롯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세상을 탐구해야 한다. 여기에는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겸허하고도 진지한 자세가 필요하다.

 

문화는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창조 세계를 조성하고 보호하며 가꾸는 일을 통해 이루어진다. 여기서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적인 기준에서 생각하는 성공이나 찬란한 무엇과 동일시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문화의 표지는 화려하거나 큰 것이 아니라 샬롬, 즉 의와 화평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4:17). 스킬더는 문화의 궁극적인 의미를 안식이라 했다. 여기서 안식이란 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의와 평강을 누린다는 의미가 강조된 것이다.

 

인간이 문화사역자라는 것은 자유 의지를 가진 인격으로 지음을 받은 사실과 직결되어 있다. 사물은 하나님의 말씀에 자동적으로 순종한다. 존재 자체가 순종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특권을 받았다. 또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해 자연을 개발하여 문화를 만들어 낸다. 인간에게 문화가 가능한 것은 자유라는 독특한 은사 때문이다. 자유가 인지 능력보다 더 분명한 인간의 특성으로 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 역시 본능을 비롯한 상황에 지배를 받지만 의지로 그것을 극복하기도 한다. 그래서 가치 있는 일이라면 죽음도 무릅쓰고, 극한 상황에서도 거리를 두고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은 열려 있는 존재다. 인간은 물질적인 존재인 동시에 영혼을 가진 존재다. 죽으면 그만인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유한 속에 살면서도 영원을 바라보는 안목을 가졌다.

 

성경의 인간관은 큰 영향력을 가진 다음 두 가지 인간관과 대조적이다. 첫째, 자율적인 인간관과 다르다. 근대 철학의 대표격인 칸트나 헤겔은 인간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존재로 보고 자유를 인간의 본질로 규정했다. 실존주의는 스스로 결단하지 않는 삶은 존재로 보지도 않는다. 이들은 실제 인간에게는 그렇지 않은 면이 있음을 간과한다. 둘째, 여러 종류의 결정론적 인간관과도 다르다. 유물론자들이 말하듯 인간이 물질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산업과 결제 구조의 산물만은 아니다. 프로이트의 생각처럼 본능과 잠재의식에 의해 지배되는 것도 아니다. 사회적인 관계만이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한다고 주장하는 구성주의와도 다르다. 달라스 윌라드는 마음의 혁신(Renovation of the Heart, 복있는사람 역간)에서 인간을 지의를 갖춘, 마음과 몸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까지 통합하는 인격 중심의 영혼으로 묘사한다. 윌라드에 의하면 인간은 주어진 존재인 동시에 인격적 결단을 통해 만들어지고 혁신되는 존재다.

 

인간의 탁월함은 창조주 하나님과도 인격적인 결단으로 관계를 맺는다는 것에 있다. 이것이 틸리케가 말하는 하나님의 모험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더불어 대화할 수 있는 로 만드시고, 유일하게 인간을 향해서만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것을 말씀하신다. ‘우주를 돌보며 다스리라는 적극적인 명령과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고 순종하는 가운데 행하라는 기준도 제시하신다. 이것이 창조에 수반된 문화 명령과 선악과 명령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의, 지식, 거룩과 같은 신적 성품을 주셨다. 인간은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인격적 명령에 자유로이 순종함으로 그분과 복된 관계에 있도록 지음 받은 존재다. 선악과 명령은 사람을 지으신 것에 본래 내포되어 있던 종교 명령의 구체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지를 증거하는 표지였으며, 문화 명령을 바르게 수행하기 위한 기초였다. 인간은 물질적인 조건의 충족만으로 살 수 없다. 피조물과의 관계도 생존의 필요조건일 뿐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8:3, 4:4).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산다.

 

5장 악과 고통의 문제

앞에서 살펴본 창조에 대한 이해는 세상과 삶을 보는 바른 관점 형성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것만 알고 타락에 대한 내용을 간과한다면 낙관론에 젖을 수 있다. 지금의 세상은 창조된 그대로가 아니기 때문이다. 타락 이후의 세계는 첫 창조 세계와 연속성뿐 아니라 불연속성도 가진다. 현실은 문제와 비정상적인 것들로 가득하다.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죄와 악으로 물든 비극적인 곳이기도 하다. 타락한 세상 속에서 인간은 갖은 고통에 시달린다. 죄악과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세상을 바로 알 수 없다. 하지만 악의 문제에 대한 답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죄와 악은 죽음과 더불어 인간이 직면하는 최대의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다.

 

세상에서는 죄와 악의 근원을 흔히 구조적인 결함에서 찾는다. 구조적 결함이란 세상과 인간성이 본래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환경과 팔자소관, 부모와 사회를 탓하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세상이 악한 것이 구조적인 결함 때문이라면 인간에게는 책임이 없다. 과연 이 세상에도 구조적인 결함이 있는 것인가? 창조타락구속(Creation Regained, IVP 역간)을 쓴 알버트 월터스는 구조와 방향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이 질문에 답한다. ‘구조란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방식이다. ‘방향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을 맡아 운영하는 인간의 태도를 말한다. 세상이 죄악에 빠진 것은 구조에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다. 악은 방향이 잘못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바로는, 악이 세상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결단에서 비롯되었다. 타락한 천사인 사탄이 뱀을 도구로 하여 인간을 유혹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유혹에 빠져 악을 세상에 들인 것은 인간이다. 성경은 인간이 창조주와의 언약을 깨뜨린 일을 통해 악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한다(3; 5:12). 본래 선하던 세상이 악과 고통에 빠진 것은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타락에서 비롯된다. 인간이 선악과에 관한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즉 타락은 인간이 문화 명령을 수행하는 데 무능하거나 게을러서 생긴 것이 아니라 문화 명령의 기초를 이루는 종교적 언약을 바로 지키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인간의 타락이 악의 원인이라는 관점은 성경에만 있는 특별한 진리다. 타락은 본래 세상 어디에 악 또는 악의 씨앗이 있어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성경은 결코 선과 악이 본래부터 존재했다는 이원론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악은 철저하게 후천적이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언약을 깨뜨린 순간 세상에 나타났다. 죄와 악이 본래 있었던 것이며 구조적인 것이라는 주장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변명이다. 아담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묻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주신 여인을 탓했다. 여인은 다시 뱀의 사악함을 핑계로 들었다(3:12-13). 이러한 변명이 곧 죄와 악을 구조화하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여인과 뱀을 만드신 하나님을 죄의 원인으로 만드는 태도다.

 

죄악이 세상의 구조를 망치는 것이 아니다. 죄악으로 인해 세상의 본질이 바뀌거나 다른 세상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세상은 타락 이전에도 이후에도 단 하나다. 하나님이 지으시고 보존하시는 세상의 질서는 인간의 불순종 때문에 달라지지 않는다. 달라지는 것은 세상과 인간이 나아가는 방향 그리고 그 가운데 달라진 삶의 자세다. 타락과 죄악에 대한 오해는 세상의 문제를 바로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 성경이 말하는 타락은 실정법을 어기거나 관습을 깨뜨린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성경은 타락이 삶의 근본과 관련되었다고 말한다. 소위 법 없이도 살 만한 사람도 죄인이며 악에 빠져 있다. 그들 역시 정도의 차이일 뿐, 생명의 근원에서 멀리 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법도를 벗어난 자들로 살아간다.

 

이 때문에 인간의 죄악은 자율(自律, autonomy)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다. 하나님은 법이다(2:17).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 같이 그 법 아래 순종함으로 존재한다. 물론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자유 의지를 가지고 순종한다. 타락은 법 아래에 있어야 할 존재가 스스로 법의 제정자가 되기를 원한 데서 일어났다. 타락의 핵심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의지적으로 거부하고 인간의 주권을 내세우는 것이다. 인간이 자의적인 결단으로 하나님을 배신하고 자신의 판단대로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타락은 궁극적이며 절대적인 기준이 하나님에게서 인간 자신에게로 옮겨졌음을 뜻한다.

 

타락은 인격의 중심인 마음이 부패한 것이다. 인격 간의 최대의 악은 신뢰를 깨뜨려 관계를 망치는 것이다. 범죄 후 아담이 하나님 앞에 나서지 못한 것은 벌거벗은 수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두려웠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두려움이 생긴 것이다. 하나님을 배신하지만 인간은 그 앞에서 자신이 피조물임을 직시할 수밖에 없다. 비록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경외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창조주와 동등한 지위를 주장할 수 없는 존재다. 경외와 사귐이 깨어진 하나님과의 만남에는 두려움만 남는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경험하는 공포와 쓴 뿌리의 원인이다.

 

왜 선악과를 만드셨는가? 타락은 누구의 잘못인가? 분명한 것은 선악과는 에덴동산의 구조적 결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악과는 결코 인간을 악의로 시험하려는 유혹거리나 함정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실수로 만드신 것은 더더욱 아니다. 선악과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데 필수적인 것이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독 인간만은 창조된 이후에도 계속 만들어져 가는 존재다. 인간이 인간답게 되려면 자유 의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선악과는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 중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맺은 두 언약, 즉 창조의 언약과 종교적 언약을 실효성 있게 만드는 표지였다. 선악과에 대한 금지로 표현된 종교 언약의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이다. 선악과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상징이라는 점에서 종교적인 것이었다.

 

선악과는 평소에는 모든 것이 정상임을 게시했다.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순종이 있음을 보여 준다. 본래 개수대로 달린 열매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며 바로 살아가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의롭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처음과 달리 열매의 개수가 줄어든 날,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거역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경보판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자행된 죄와 악을 드러내는 증거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그 앞에서 의롭지도 떳떳하지도 못하며 숨을 수밖에 없게 되는 상황이 되었음을 광고하는 악의 나무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아니시다.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신 것은 그들을 죄악에 빠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인간에게 분별력을 주셔서, 본능에 매인 닫힌 존재가 무한한 가능성에 열려 있는 존재가 되게 하신 것도 마찬가지다. 인간에게 선악과를 두고 금지하신 것도 마찬가지다. 자유와 선악과는 모두 인간의 특성이며, 인간을 인격적인존재요 로 대우하신 증거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라는 시편 기자의 말처럼 이 사실은 찬양의 이유일망정 불평의 소지가 아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선악과는 하나님이 인간을 성숙시키시기 위한 무감독 시험과 같은 것이었다. 선악과 언약은 한시적인 것이다. ‘한시적이라는 말은 천국에는 그것이 없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생명나무는 있지만 선악과 나무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이 선악과는 사람의 온전한 자유와 그것을 행사하는 능력을 성숙하게 하는 수단이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달리 인격적으로 대하셨다는 증거다. 그것은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구분하는 선한 나무였다. 선악과는 종교 언약의 가시적 표현이라는 점에서 율법과 성격이 같다. 선악과는 눈에 보이는 계명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했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불순종을 행동에 옮겼다. 그것을 통해 들어온 타락은 인격의 일부에만 관여하지 않는다. 그것은 감각적, 인식론적 요소와 윤리적 요소가 포함된 전인격적인 행위다.

 

6장 타락의 결과

아담과 하와에게는 충분히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좋은 것을 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지금처럼 늘 죄악 속에서 잘못된 선택으로 기우는 본성을 타고나는 우리와는 상황이 달랐다.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는 다른 피조물과 의논하거나 비교해서 얻을 수 있는 통찰이 아니다. 이런 모든 궁극적인 문제는 계시 외에는 답을 얻을 수 없다.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의지적으로 불복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고, 그리하여 자신의 모든 사고와 행위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모두 상실했다. 타락한 인간은 그의 핵심적 기능인 지의가 왜곡되고 비뚤어졌다. 몸은 정욕에 사로잡혔다. 벌거벗음이 부끄럽게 느껴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인간관계는 불신과 남을 탓하는 태도로 파괴되었다. 모든 것이 망가져 버렸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전적 타락, 전적 부패, 전적 무능력(total depravity)이라고 한다. 이 말은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모두 상실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 능력을 바르게 행사할 수 있는 자세를 상실했다는 말이다.

 

타락의 결과는 이토록 심각한 것이다. 아담의 범죄 후 오래지 않아 하나님이 한탄하실 정도로 죄악이 세상에 차고 넘쳤다(6:5). 이후 세상의 형편에 대한 성경의 진단은 단호하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성경이 타락을 한탄하는 것은 단지 죄와 악이 넘치는 현상 때문이 아니다. 타락이 중대한 문제인 까닭은, 그로 말미암아 생명의 근원인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만물이 사망에 이르기 때문이다(2:1; 6:23). 이제 하나님이 세상을 저주하지 않으셔도 만물은 그 자체로 멸망을 향해 치닫게 되어 있다. 흔히 세상이 신의 심판으로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관점이다.

 

타락한 세상 속에 사는 우리는 악을 체험하는 동시에 죄악의 권세로부터 세상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살아간다. 욥이 복과 재앙의 근원을 모두 하나님께 돌리면서도 여전히 신실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실 뿐 아니라 만물과 만사를 주관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분은 고난이나 재앙과도 무관하시지 않고, 그에 대해 무력하시지도 않다. 죄와 타락의 주제는 결코 이원론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것은 선한 창조가 왜곡된 상태이며 일종의 질병이다. 성도들 역시 죄악과 그로 인한 세상의 재난에서 면제되어 있지 않으시므로 욥처럼 갈등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해결과 신앙의 승리 역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의식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타락은 세상의 역사와 문화 전체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쳐서(4:16-25) 인간 사회를 넘어 자연만물에도 그 해가 미친다. 인간의 죄성과 타락한 심성이 그가 맡아 다스리는 모든 만물 속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도예베르트는 이를 타락의 우주적 영향”(cosmic effects)이라고 불렀다. 인간 피차간의 관계가 힘들게 되었다. 노동 역시 성취의 기쁨을 상실한 고역이 되었다.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어 힘든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할 것이었다. 출산의 기쁨에 앞서 산고가 따를 것이었다. 이런 어려움은 정신적이며 문화적인 영역으로 확대되어 간다. 누군가의 말처럼 아마도 비행기가 그토록 빠르게 발전한 것은 전쟁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탁월하다 하는 모든 것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모습은 참담할 뿐이다. 코넬리우스 플란팅가의 말처럼, 인간이 문화를 형성하지만 동시에 문화가 인성을 형성하기에 이런 일은 더욱 심화된다(Cornelius Plantinga, Jr., Engaging God's World, p.57).

 

만물은 이런 고통 속에서 탄식하며 회복을 기다린다. 만물은 또한 타락의 악영향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대체된다. 인간은 문화활동을 통해 헛된 우상을 섬긴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반역한 자기 자신을 섬긴다. 여기서 타락은 곧 우상 숭배라는 등식이 성립됨을 알 수 있다. 피조물을 바로 사용하는 대신 남용하고 악용한다. ‘의인이라 일컬어지던 노아의 포도주 남용이 그 자식의 실수와 저주로 이어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 때 만약 술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자신이 남용되는 것을 한탄했을 것이다.

 

하지만 타락은 세상을 즉각적인 심판과 종말로 몰아간 것은 아니었다. 물론 타락은 창조 계획에 매우 근본적이며 치명적인 타격을 가져왔으나, 창조를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과 비전을 무효화시키지는 못했다. 타락의 본질은 종교적이다. 형이상학적이며 존재론적이기보다는 윤리적이다. 그것은 구조적인 변질을 가져오지 않으나 선한 구조에 기생하면서 원래의 목적을 비틀고 왜곡한다. 살인자는 남을 해할 만큼 건강해서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 죄악은 사실 선한 창조의 구조와 그 능력 때문에 가능하다. 매춘이나 동성애로 인해 성적 정체성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악한 사용에도 불구하고 성적 매력은 유지된다. 만약 죄가 존재론적 변화를 즉각적으로 가져왔다면 더 이상의 범죄는 가능하지 않다.

 

타락의 원리는 유전된다. 인류의 대표로서 아담이 지은 죄는 인류 모두에게 전가된다(5:12). 하나님은 죄와 악을 벌하신다(3:14-19). 이로 인해 삶 자체가 파괴되고 고난을 겪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죄악된 행위로 인해 창조가 완전히 파괴되는 것을 방치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을 벌하고 자의적인 행위를 제어하기 위하여 죽음, 에덴에서의 추방, 노동의 고통, 해산의 고통, 땅의 엉겅퀴 등 여러 가지 저주를 내리셨다. 그러나 인간에게 주셨던 문화 명령이 취소되거나 완전히 상실된 것은 아니었다. 타락 이후 하나님의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인간이 극단적인 타락과 자멸적 파괴로 치닫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간섭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창세기 3장 전체를 타락과 죄에 대한 기록으로 보기를 거부하고 즉각적인 치유의 은총의 기록으로 본다. 이러한 하나님의 결정은 타락으로 인한 인간의 죄악된 방향성에도 불구하고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이 은총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죄악된 방향을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카이퍼는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이것을 칼빈의 용어를 빌려 일반 은총” (common grace)이라 부르고, 구속하는 은총인 특수 은총”(special grace)과 구별했다. 카이퍼는 문화가 가능한 이유가 일반 은총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개혁주의자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일찍부터 감지하고 있었다. 이미 칼빈에게는 구원하지는 않으나 보존하는 은총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 만일 일반 은총을 통해서 문화가 보존되고 유지된다면 카이퍼의 말처럼 문화는 대립이 유지되는 장이다. 거기서 우리는 세상의 문화를 채용하거나 활용하는 것을 넘어서 구속과 회복에 힘쓰고 변혁으로 나아가야 한다. 홍수로 세상을 구속하고 정화하듯 말이다. 홍수 후 인류에게 다시금 창조의 문화 명령을 확인하신 하나님의 모습은 일반 은총에 대한 또 다른 증거이다. 또 악인과 선인에게 해와 비를 공히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총(5:45; 14:17)도 자주 언급된다. 그 외에도 자연법이나 가정과 국가의 법 제도 등과 같은 것을 통해서 인류의 존속과 안정이 유지된다. 타락의 파괴적인 원리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역사와 문화가 유지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삶이 가능하고 문화가 계속되어 온 것은, 하나님께만 감사하고 그에게만 영광이 돌아가야 할 일이다.

 

7장 세상의 소망

이 세상에는 과연 살 소망이 있는가? 사람들은 어떤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가? 죄와 악 그리고 타락에 대한 이해가 깊을수록 세상과 삶은 암울하게 보인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살려던 세상은 오히려 아무런 의미와 소망이 없는 곳이 되었다. 조금이라도 진지한 사람은 세상과 삶이 고난과 고통으로 가득한 것을 직시한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을 갈망하게 만든다. 인간은 누구나 무엇인가에 소망을 두고 그것을 바라며 살아간다. 모든 소망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구원에 관한 진리는 이런 질문들에 답을 준다. 그 진리는 죄악으로 고통 받는 세상에 소망이 있다고 말해준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이 죄악으로 자멸하도록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 준다. 소위 일반 은총외에도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죄악으로 어두워진 세상에 개입하신다. 그것도 타락 후 즉각적으로 그렇게 하셨다. 프란시스 쉐퍼의 말처럼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분이실 뿐 아니라 거기에 몸소 임하셨다.

 

하나님의 자비는 타락의 현장에서부터 분명히 드러난다. 인간이 범죄한 그 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날이 서늘해질 즈음 하나님은 동산에 오셨다. 타락이라는 엄청난 사고가 일어났지만 그 현장을 기습하지는 않으셨다. 평소 인간과 함께 동산을 거닐던 시간까지 기다리신 것이다. 그것도 먼저 기척을 내고 동산에 오셨다. 죄에 빠진 인간은 두려워 숨었으나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 이는 죄인에 대한 힐문이 아니라 회개와 구원으로의 초청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그들의 현 위치를 돌아보도록 그렇게 부르시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리고 이들의 변명을 인내하며 들으시고, 그들의 모순을 깨우쳐 주시며 벌을 내리신다. 이들은 에덴에서 쫓겨나고 죽음을 맛볼 것이며, 땅은 이들로 인해 저주를 받았다.

 

그러나 바로 그 이야기 후반에 들어서면 은총을 만나게 된다. 무화과 나무 잎새를 대신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이다. 피 흘림을 통해 주어지는 사회(9:22)가 실물로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최대의 은총은 타락의 비참함과 죄악을 궁극적으로 극복할 구원자 메시아에 관한 약속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3:15). 이 말씀이 뱀 곧 사탄을 벌하시는 선고 가운데 나온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죄와 악을 향해 전쟁을 선포하신 것이다. 신학자들은 이를 ()복음또는 최초의 복음이라고 부른다. 이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가장 힘든 선택을 하셨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구속의 계획은 최악의 대안일 수 있다. 여자의 후손을 통해 뱀의 머리를 부수는 일이란 죄악에 빠진 인류를 통해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의 동역자로 만드셨기 때문에 이제는 망가진 세상을 회복하시는 일에도 동참시키시겠다는 것이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망쳐 놓은 장본인에게 말이다.

 

타락 이후 인류의 소망은 오로지 구원에 대한 약속에 있었다. 특히 구원을 가져올 여자의 후손”, 즉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이 소망의 근거였다. 아담은 아들이 태어났을 때 그 이름을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의미로 카인이라 지었다. 메시아에 대한 소망의 한 표현이었다. 여러 세대 후 라멕은 자신의 아들이 비범한 모습을 보이자 이 아들이 우리를 위로하리라하며 노아라 불렀다. 아브라함도 아들로 위로 얻기를 기다렸다. 이사야의 예언인 임마누엘기묘자모사그리고 평강의 왕도 그런 소망의 표현이다.

 

구약 시대의 오랜 기다림이 끝나고 과연 약속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1:29)이라 했다.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맞이한 시므온과 안나를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2:25)라 부른 것도 그 소망의 연장선에서 나온 표현이다. 시므온과 안나가 모든 구약 성도들을 대표하여 아기 예수를 봄으로써 그 위로의 약속이 성취되었다. 구속의 역사는 이 언약이 이루어져 가는 역사다. 이것은 인류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실행된다. 구약 성경은 점점 더 구체적으로 그 메시아의 모습을 그려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구약 성도들의 비전의 핵심이었다. 그것은 구약성도들의 비전이 핵심이었다. 그들도 율법을 지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제사 제도는 죄없는 희생 제물이 죄인을 대신해 죽어 죄를 사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을 예표한다. 구약이나 신약 모두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살리라”(2:4)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그를 믿는 것이 구원이 되는 것은 그가 독특한 분이기 때문이다. 또 그가 하신 일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를 알고 믿는 것이 구원의 핵심이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믿어야 한다. 그는 바로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시며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말로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보여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가장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제자들과의 문답이다(8:27-34; 16:17-20;9:18-23).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정확한 답변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의 핵심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난 후에 거기에 덧붙여 자신의 일에 대해 가르치셨다. 복음서는 명확하게 예수님이 이 때로부터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비로소가르치기 시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16:21). 죽음과 부활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다. 그 분의 가장 중요한 은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었다. 그것이 바로 여자의 후손메시아로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아담 이래 반복되어 오던 죄악의 사슬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절단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들이시며 세상 죄를 대신 지신 구원자이시다.

 

성경은 오실 예수오신 예수에 중심을 두고 있다. 또한 예수님 자신도 자기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였는지를 가장 중요한 메시지로 삼으셨다. 그분의 부르심은 이런 고백과 그 고백에 따라 변화하는 심령과 삶으로의 초청이다. 이 초청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안목이 바뀌게 마련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비전을 갖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구속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8장 구속된 세상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회복이다(고후 5:17-18). 아담이 깨뜨린 언약을 회복하는 것이다. 구속은 세상을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대로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재창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것은 새 언약에 기초한다(31:31-34; 고전 11:25; 6:13; 7:1-10:39; 9:15). 그 언약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시며(8:8-13; 9:15; 10:20; 12:24), 이 일은 오직 그분만이 하실 수 있고, 이미 완성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이 깨뜨린 언약을 지키셨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셨다. 아울러 문화 명령을 바로 수행할 능력도 회복하셨다. 구속은 에덴동산으로의 복귀나 단순한 창조의 회복이 아니다. 그것은 본래 창조의 계획대로, 하나님 나라로 향해 가는 행보를 회복하는 것이다.

 

구속이란, 타락으로 죄악 가운데 죽은 자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구원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소극적으로는 사죄(赦罪), 즉 죄값을 십자가 죽음으로 갚아 주신 것이고(4:25; 2:14; 2:10), 적극적으로는 의롭게 된 새사람으로 지음 받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4:25). 세례도 이와 똑같은 진리를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에 연합하여 죽는데, 세례 중에 물에 들어가는 행위가 이를 표상한다. 우리는 물에서 나올 때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난다(6:3-4). 구원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두 단계의 진리로 이루어진다.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죄를 범하는 자는 율법의 고발과 양심의 죄책에 시달린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바로 이 저주에서 속함 받는 것이다(3:13). 구원을 체험한 사람은 더 이상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런 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풀어주셨기에 가능하다(3:13). 구속은 예수의 피를 통해 죄인을 보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서린 계획과 비전을 모두 포함한다(고후 5:19-21). 성경에서는 이 구속의 내용을 가능한 구체적이고 다양한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희생 제물은 구약의 제사에서 나온 용어다. 공의의 만족이란 표현은 법정 용어다. 속량이나 대속이란 잃었던 무엇 특히 납치되거나 포로가 된 사람의 몸값을 지불하고 되찾아 올 때 쓰던 말이다. 그런가 하면 되물림이라는 시장 용어도 있고, 심지어는 십자가에서 승리하심,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냄 등의 군사 및 전쟁 용어도 사용된다. 이러한 다채로운 표현들은 모두 구속이 죄와 악에서부터의 구하심과 해방을 의미함을 잘 보여 준다.

 

칭의(秤義), 즉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은 구속의 적극적인 면을 포착한다. 인간은 여전히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근거하여 그분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돌리신 하나님의 주권적 선포로 의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새 생명은 우리를 온전히 회복시킨다. 원칙적으로 죄와 악에서 온전히 새롭게 거듭난다. 그리하여 이제는 죄악의 권세를 벗어나 새로운 생명의 원리를 따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그러했듯이,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무리다. 거룩해질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거룩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요 의무다.

 

구속은 순간적인 역사인 동시에 하나의 긴 과정이다. 이 양면을 이해하는 것이 바른 신앙을 키우는 데 중요하다. 세상을 구속하시는 역사는 구속자로 임하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이미 이루어졌으나,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회복은 심판주요 교회의 신랑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완성된다. 개인적으로 볼 때에도 구속은 예수를 믿을 때 이루어지지만, 그 완성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긴 과정이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패배주의 신앙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한 변화의 비전은 열리지 않는다. 사도바울은 너희 구원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루라고 명령한다(2:12). 나는 성경에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명할 때에는 두 가지가 전제된다고 생각한다. 우선, 그것이 가능하기에 명령하는 것이다. 또한 강하게 명하지 않으면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기에 그렇게 명령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화(聖化)를 통해 온전한 상태인 영화(榮化)에 이르는 과정에는 성도의 견인이 포함되어 있다. 견인(堅忍)이란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을 끝까지 붙잡으신다는 의미다. 인간의 편에서는 믿음의 인내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계속적인 싸움과 경주다. 얻었다 함도 아니고 이루었다 함도 아니어서 끝까지 매진해야 한다(3:12).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택함을 받은 사람은 무엇을 하건 괜찮다는 잘못된 예정론이다. 또한 어느 때고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으므로 끊임없이 두려워 떨며 노력해야 한다는 사상도 피해야 한다. 이 둘 모두 잘못된 구원관이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시작된 거룩을 향한 선한 싸움이 조금씩 열매를 맺어 가는 모습이다.

 

여기서 히엘레마의 칭의와 성화에 대한 비교가 도움이 될 것이다. 칭의는 선물이지만 성화는 선물인 동시에 책임이다. 구원받기 위해 우리가 노력할 필요는 없다. 아니, 그럴 수도 없다. 하지만 성화를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듯(work in us) 우리는 구원을 밖으로 이루어 내야(work in) 한다.” 칭의는 개인적이지만, 성화는 개인적인 동시에 공동체적이다. 나만 거룩해질 것이 아니라 결혼, 가정, 사업, 교회, 사회, 국가가 거룩해져야 한다. 칭의는 완성되었으나 칭의의 함축과 결과인 성화는 계속된다. 칭의와 성화 모두 우리 전 인격과 관계된다(Dallas Willard, Renovation of the Heart, pp. 26-27)

 

9장 하나님 나라의 내림

하나님 나라는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며, 천국은 세상 나라와 대립하는 초월성을 드러내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미묘한 어감의 차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천국은 하늘 저 너머 우주 한 모퉁이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신구약 성경 어디에서도 그런 인상은 받을 수 없다. 하나님 나라 도래란, 잃었던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월터스는 창조타락구속에서 구원이 창조계의 회복이라는 사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살펴보면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된다고 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계의 회복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동일한 일이기 때문이다.

 

창조, 타락, 구속의 통합적 진리인 성경의 복음 진리는 단순한 개념이나 교리가 아니라 삶 속에서 능력으로 나타나는 진리다. 기독교 진리는 이성적인 면을 도외시하지는 않지만, 철학과 달리 구원에 대해 깨달음으로 얻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신앙은 지적인 이해나 감정적 느낌 또는 의지적 결단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전인적인 체험이다. 몸이 변하지 않는 중생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삶이 변화되지 않는 구원은 문제다.

 

로마 제국이 392년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하나님 나라가 로마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환상이 퍼졌다. 그러나 당시 로마는 이미 쇠퇴기에 들어선 후였다. 그 환상은 오래지 않아 알라릭(Alaric)이 로마를 침공해서 약탈하는 사건(주후 410)이 벌어지면서 무너졌다. 어거스틴이 신국론(De Civitate Dei, 분도 역간)을 쓴 것은 그런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로마는 물론이고 그 어떤 나라도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될 수 없음을 보이고자 한 것이다. 중세 유럽, 청교도 혁명 직후의 영국, 건국 초기 미국에 대한 환상도 잘못이기는 마찬가지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것도 아니다. 천국을 마음속에만 있는 것으로 보고 지나치게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만 보는 것도 오해다. 가톨릭이나 특정 교단과 같은 제도적인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는 것도 물론 커다란 잘못이다. 이 모두가 그리스도의 왕권의 범위를 제한하는 일이 된다. 이 세상은 본래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범위는 카이퍼의 말처럼 한 치도 빠짐없는 세상 전체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회복 목표도 이 세상 전체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보다 훨씬 큰 실재이며, 그 범위는 구속을 통해 회복되는 세계 전체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반면, 교회는 한시적인 기구다. 사도 요한이 본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성전이 없다고 나와 있다(21:22). 교회의 지경을 넓혀서 세상을 덮으려는 것은 중세적 발상이다. 세상에서 교회의 세력이 날로 커지는 가운데 오히려 하나님 나라는 점점 축소될 수도 있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진정한 방법은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군사와 일꾼을 기르는 훈련소라 할 수 있다. 즉 전도와 선교의 전초 기지다. 교회는 결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피해 그 안에서 안주하는 게토(ghetto)가 아니다. 물론 직접적인 전도와 선교만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은 아니다. 신자들은 자신의 구별된 삶을 통해 불의한 세상 속에서 의의 빛을 발해야 한다. 미국의 대중문화는 군사력보다 훨씬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전 세계에 미국식 가치관과 생활 방식을 퍼뜨린다. 반드시 군대를 동원해서 침략을 감행해야 주권을 빼앗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 원리도 이와 흡사하다.

 

재림과 함께 있을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성경적 비전의 절정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은 기다려야 할 미래의 사건으로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도 중요하다. 이런 이해가 없으면 삶이 잘못되기 쉽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잘못된 관점은 항상 신앙과 삶을 왜곡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교회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교훈이다. 예를 들어 이미 임한 나라만 강조하면 현세적인 된다. 그것은 자칫 혁명적인 세계관으로 이어진다. 해방 신학과 민중 신학이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신학은 그 나라의 시민을 혁명의 주체로 간주되는 가난하고 억눌린 자와 동일시하여 배타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반면 아직도 기다려야 할 나라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경우에는 내세적이며 비현실적인 신앙의 원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이 오로지 내세를 위한 대기소일 뿐이다. 흔히 이단에서 그 날과 그 시를 예고하는 경우가 그 극단적인 예가 된다.

 

10장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

믿음, 소망, 인내는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와 완성될 하나님 나라 사이의 과도기적 덕목이다. 성도들은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실상을 지금 여기서 경험하며 살아간다. 아울러 소망 중에 아직도 임할 그 나라를 기다리며 살아간다. 이 소망은 믿음의 표현이다. 히브리서 11장은 이 비전을 품은 이에게 너무도 친숙한 풍경을 담고 있다. 노아와 아브라함 그리고 모세를 생각해 보라. 노아는 구름 한 점 없는 마른 하늘 아래서 세상을 덮을 홍수를 바라보았다. 아브라함은 평생 가나안을 방랑하면서 하나님이 주실 땅을 보았다. 모세는 노예로 전락한 민족을 앞에 두고 영광스러운 메시아 왕국을 보았다. 무엇보다 이들은 믿음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다”(27). 믿음과 소망은 그들에게 인내할 힘도 주었던 것이다(10:36). 믿는 것을 보는 비전은 시력보다 훨씬 강했다. 그들은 멀리서나마 끝을 보고 있었다.

 

해석의 근본 원리는 전체와 부분 사이의 의미 순환이다. 전체 의미 속에서 각 단락과 장들의 의미가 온전해진다. 한편 전체의 의미는 다시 작은 단위들의 의미가 모이고 소통하는 순환 속에서 형성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우리 시대의 작은 이야기들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각 개인이 살아가는 의미 역시 하나님의 큰 이야기 속에서만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흔히 구약을 그림자라 하고 신약을 실체라고 하는 데 이것은 신약과 비교해서 그런 것이지, 그림자라 해서 내용 없는 껍데기라는 뜻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처럼 예수님을 이름으로 알지 못하고 예언으로만 알았지만, 우리 못지않게 메시아를 믿고 구원의 실상을 맛보고 살았다. 마찬가지로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는 지금 보지 못하는 영생의 약속을 기다리며 산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약속된 영생을 미리 맛보며 살 수 있다. 이것이 신학에서 말하는 미리 맛봄”(foretaste)의 의미다.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완성을 기다리는 사람은 구속 역사의 동참자로 살아간다. 그들은 세상이 주는 쾌락과 재미에 탐닉하지도,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지도 않는다. 기도나 묵상을 위주로 하는 명상에만 빠지지도 않는다. 이들은 월터스토프의 말처럼 세계 형성적 신앙을 갖고 있다. 어떤 사람과 가장 가까워지는 방법은 함께 살고 더불어 일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 그분을 가장 잘 알게 된다. 구속 역사에 동참하는 사명은 문화 변혁이라는 구체적인 회복 활동으로 나타난다. 문화와 사회는 인간의 의지와 결정 그리고 행위의 결과이다. 타락한 문화와 사회는 복음에 기초를 둔 변혁을 통해 회복되어야 한다. 한 선교학자의 지적처럼 그리스도는 결코 문하의 손님으로 임하시지 않는다. 그는 문화의 변혁자로 오신다. 아니면 심판주로 임하신다. 그리스도인은 문화의 누룩이다. 복음을 통한 변혁은 언제나 내부로부터 근본 원리가 변화되는 것, 즉 문화와 삶의 근본과 전제조건이 변하는 것이다.

 

천국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상상력은 빈곤하기 그지없다. 나는 오늘날 신앙인들이 무기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여기서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리처드 마우(Richard Mouw)현재의 문화와 미래의 천국(When the Kings come Marching In, 두란노 역간)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생한 비전을 제시한 바 있다. 그는 특히 이사야서 60장에 나오는 천국 도시에 대한 예언을 토대로 그 비전을 그려 내고 있다. 이 도시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예고편과도 같다. 그것은 새 예루살렘의 원형이다. 그 비전의 핵심은 이 하늘 도시의 모습이 현재의 문화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 관계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마지막날 완성될 하나님 나라는 분명히 슬픔이나 고통이 없는 곳이다. 사자와 양이 함께 누울 수 있는 샬롬의 터다. 독사 굴에 아이가 손을 넣어도 해를 당하지 않는다. ‘평강이 강조되고 있다. 한편, 하나님 나라는 매우 번화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천국은 결코 영혼들만 배회하는 황량한 공터가 아니다. 현재 문화의 산물들도 거기로 들어갈 것이다. 이사야는 심지어 그 나라를 상업의 중심지인 양 그리고 있다. 땅의 왕들이 세상의 보화를 가지고 거기에 들어오는 모습을 조명한다. 하나님 나라는 에덴동산이 변화된 모습이다. 그것은 성이다. 에덴에는 금과 은을 비롯해서 각종 보석의 원석이 언급되어 있다. 새 예루살렘에는 금으로 포장된 도로가 나온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재능과 재료가 갈고 닦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는 곳일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빛의 나라다. 어둠과 그 권세를 몰아낸 나라요, 도시 전체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력(磁力)을 가진 나라다. 누구나 그곳에 들어와 살기 원한다.

 

월터스토프는 공의와 화평이 입맞출 때까지(Until Justice and Peace Embrace)에서 또 다른 관점을 제공한다. 그는 특히 우리의 삶과 행위가 하나님 나라에 기여하는지를 판정할 잣대로 샬롬을 제시한다. 즉 우리가 하는 연구나 사업, 예술을 통해 평강과 공의가 증진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반성해 보라는 것이다. 월터스토프가 샬롬을 하나님 나라의 표지로 내세운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는 이 세계가 20세기 이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맞고 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는 가장 극심한 가난과 잔혹한 전쟁을 경험하는 자들이 있기에, 그는 이것을 정의의 문제로 보았다. 정의가 없는 곳에 화평이 있을 수 없다. 정의란 자기가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다. 화평은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세계와 온전하고도 정의로운 관계를 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책 제목을 시편 85:11-12에서 가져왔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

 

우리의 신앙 선조들도 천국 비전을 따라 걸었다. 우리는 단지 그들의 전통을 오늘의 역사에서 이어갈 뿐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이 이런 비전을 가지고 현실 속에서 긴장을 견디며 살아가는 이들을 자녀로 부르시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다고 증거한다(11:16). 이 말씀은 동일한 길을 따라 걷는 우리도 자랑스럽게 여기실 것이라는 약속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지금 역사의 끝에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누릴 복이며 소명이다. 이 얼마나 벅차고 감격스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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