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차 복종하라 – 결혼의 참된 의미
그리심, 브레이언 체펠, 윤혜경 역
서론. 누구의 책임인가?
성경은 남편에게 배우자 간의 역할을 유지하는 권리와 책임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성경은 남편들이 아내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도 말해주고 잇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대한 피상적인 지식 때문에, 성경이 배우자 중 한사람이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거나 독재를 발휘하라는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크리스천 가정의 사랑의 관계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깊은 진리에 순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희생의 영광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뜻을 알기 위해서는 어떤 특별 계시를 받아야 하거나, 비밀스런 암호나 특별한 통찰력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의 중심되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마음과 정신을 활짝 열면, 누구나 하나님께서 이기적인 것을 좋아하지도 그것을 명령하지도 않으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만족보다 다른 사람을 섬기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가장 고귀한 삶이라는 것을 알도록 계획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의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는 전제 하에 결혼이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의 영이 사시도록 우리의 마음에 부여된 가장 깊은 사랑은 무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의 삶 속에서 서로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힘쓴다면, 배우자들은 결혼 생활의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하게 되어 개선된 결혼 생활에서 지속적인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희생에 대한 질문들
성경적인 리더십은 남자가 자기 자신보다도 가족의 관심사에 마음을 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장은 그의 리더십을 통하여 모든 가족이 하나님의 보살핌을 알고 경험하게 하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이런 가장에게 순복하는 아내는 남편이 계속해서 이기적인 사람이 되도록 부추기지 않습니다. 도리어 아내는 모든 가족을 경건하게 양육하고 보살피며 모자람을 보충해 줍니다. 이런 식으로 부부는 저마다 책임들을 상대방에게 떠넘기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는” 성경적인 사랑의 정의를 성취합니다.
희생의 표준들
세속 사회의 가치들이 크리스천의 가정을 계속해서 공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음세대의 영적 강건함과 복음을 위해 영향력 있는 증인의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크리스천 가정들이 점점 더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현재의 자기 중심적인 경향이나 과거의 ‘남자는 왕, 여자는 신하’라는 판에 박힌 구조를 철저히 반대하는 하나님의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버리신 사라의 메시지는 우리의 결혼 생활과 가족에 절대로 반항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필요를 위해 자신의 우선 순위를 희생하라고 가르침으로써 세상이 무시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진리를 비출 계획이었습니다.
희생의 사명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경건하지 않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크리스천 가정은 무엇에 비할 수 없는 영적으로 위대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가정을 변화시킨 것처럼, 또한 종종 보도되는 붕괴되고 있는 가정들에게 필요한 답을 줄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호소력이 있고 능력 있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제 1부 희생적인 남편 정상에 오르기
우리의 목표는 누가 다른 사람보다 앞서느냐가 아니고 두 사람 모두 정상에 도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 책임을 맡은 사람은 그 자신의 잠재력과 동반자를 위해 지켜야 할 규범들과 지시할 것들을 자신이 먼저 실천에 옮길 뿐만 아니라 자신도 상대방을 인도하여 두 사람 모두 정상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제1장 남자의 책임- 섬기는 자로서의 리더십
남편의 가장 주가 되는 우선권은 가족이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를 아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크리스천 가정의 모든 남편들에게 요구하시는 책임의 표본입니다. 남편은 자신의 권리를 넘어 자기 아내에게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고려합니다. 그때 남편은 가정에서 지도자로서 그의 역할을 내던지지 않고, 가정의 경제적인 문제와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잘 관리하여 안와 자녀들의 최상의 관심사를 채우기 위해 그의 성경적인 권위를 사용합니다.
머리됨이 아닌 것들
가정에서 머리가 된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고 말함으로써 머리됨 개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에 교회를 거룩하고 영광스럽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모범에서 책임을 동반한다는 사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자신을 주신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남자가된다는 말의 정의를 흔히 고귀한 것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한다든지 가족에게 무관심하거나, 개인적인 해방을 이상화하는 미성숙한 모습과 소년처럼 행동하는 것을 남자답다고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적인 가장은 하나님께서 보살피라고 맡기신 사람들을 위해 희생적으로 행동합니다. 이러한 머리됨은 머리가 된다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힘을 추구하는 것과 동일시하는 현대적인 시각을 불식시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용어가 세속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모진 고통의 대가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결혼 생활에서 머리됨을 핑계로 남편이 수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가정에서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나도 하지 않으려는 이런 남편들은 자기가 머리됨의 특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성경적인 책임을 포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자기의 책임을 소홀히 하는 것은 사실상 잘못된 관계로까지 확대되는 행동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잘못된 결혼의 일반적인 모습은 매번 격분하면서 오랫동안 냉각기에 접어드는 것입니다. 관계가 조금 진정될 때에 남자는 아내의 불평들에 대해 최소한도의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머리됨이라는 말을 가정에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일에 대한 변명처럼 사용하거나, 가족을 무시하는 것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성경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정에서 성경적인 머리가 되는 것은 성가신 일이든 불안하게 하거나 진절머리가 나게 하는 것을 수동적으로 피하는 것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가족 일원의 필요에 무관심 하는 것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머리됨의 의미는 아닙니다. 크리스천과 세속적인 상황에서 유행하고 있는 가르침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가장에게 능동적인 희생을 요구하십니다. 성경에서 머리가 된다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적인 머리됨은 실제로 존재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자기중심의 생활에 변명하는 방향으로 머리됨을 정의해서도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해서도 안 되는 것처럼, 우리는 성경이 지지하지 않는 정의들을 강요하면 안 됩니다. 성경적인 머리됨은 이기적인 유익을 위해 자기의 권리나 힘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머리됨의 의미
가장은 가정에서 대부분의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이 단순하고 명료하게 말하고 잇는 것을 읽기만 해도 하나님께서 남편들에게 이러한 권한을 부여하신다는 결론은 회피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가정을 인도하는 남편의 권위는 가족들에 대해 마음대로 하고 이기적인 행동을 하고 자기 멋대로 지배하려는 권한을 부여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남편의 머리됨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사이의 유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가정에 권위를 행사하는 권리는 그리스도의 성품과 목적들과 일관성을 가지고 행사될 때에만 존재합니다. 머리됨이라는 말 자체가 결함이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들을 성취하기 위해 계획되었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 머리됨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남편이 자신의 머리됨을 하나님의 목적에 어긋나게 사용한다면, 그런 구체적인 잘못된 행동들에 대해서는 성경적인 권위가 없는 것입니다. 아내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정하는 범위에서만 범사에 남편에게 순복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하나님을 순복하는 면에 있어 서로서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이 명령했거나 무시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표준들을 무시할 권리가 있다거나 무시하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부부가 이러한 신앙생활의 기본적인 원리들을 잊어 버렸을 때 그 결과는 불행뿐입니다. 머리됨은 신성한 목적들과 실천이 있을 때에만 성경적인 지지와 인정을 받습니다. 성경적 머리됨은 가정에서 모든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축복들을 경험하는 일을 확실하게 해주기 위해 남편에게 머리됨을 부여했으며, 그것을 양심적인 깊은 애정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성경적 머리됨은 다른 사람을 위해 책임있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가장은 모든 가족의 선한 것을 섬기기 위해 그의 머리됨을 사용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적 머리됨은 섬김을 요구합니다. 바울의 교훈에서 우리의 호기심을 일으키고 그 교훈의 특성을 강조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순복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 말한 내용입니다. 첫째로, 바울은 그들의 권위를 주장합니다. 가장은 자신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아내와 가족을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은 가장에게서 권위를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규명했습니다. 그들의 권위는 개인의 유익을 위해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하는 권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가정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관심사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은 가족의 유익을 위해 희생하며, 가정에서 다른 가족의 필요를 위해 자신의 욕망을 포기해야 합니다. 남편의 머리됨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이 자기의 가정에서 그리스도의 주된 대표자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좋습니다. 가장이 내리는 결정과 그가 행하는 행실들을 통해 아내와 자녀들은 구세주의 사랑을 더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베풀어야 하며, 하나님의 돌보심을 표준으로 가족을 인도해야 하며, 하나님의 조건이 없으신 사랑으로 가족관계를 관리해야 합니다. 이것은 막중한 책임입니다. 모든 남자에게 요구하시는 이런 저항할 수 없는 책임을 위해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만 합니다. 가장은 자기의 가족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서며, 하나님을 대신하여 가족 앞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유일한 머리됨의 의미입니다.
제2장 섬기는 자로서의 리더십이 필요한 하나님의 이유들
하나님께서 크리스천인 남편에게 주신 지도자의 책임에는 구원과 관련된 의도가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그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가치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그들의 권위를 행할 때 그리스도의 머리됨을 반영합니다. 가장은 아내의 관심사들을 우선적으로 실천하되, 아내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도록 해야 합니다.
아내를 영예롭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남편의 머리됨은 여자에게 영광을 가져다줍니다. 남편은 그의 배우자에게 부족한 것이 있거나, 환경적인 어려움이 있거나 자존감이 빈약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돌보심을 알 수 있도록 아내를 늘 격려할 수 있습니다. 남편이 노력해야 하는 이러한 구원의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부인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묘사하는 바울의 글에 분명히 드러납니다. 사도는 남자들에게 이런 영적 관계를 남편으로서 그들의 아내를 사랑하는 모델로 삼으라고 촉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해 가지고 계신 목적은 남편이 아내 속에 있는 신성한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며, 그것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인데, 아내에게서 이러한 목적이 드러나지 못했습니다. 이런 경우 이들 부부에게서는 가장의 권위가 바르게 표현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비성경적인 머리됨은 사실상 강도나 다름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내에게 소유하기를 바라시는 은혜를 아는 지식을 가장이 아내로부터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내에게 주신 남편이 아내를 한없이 작게 만든다면 아내가 하나님께 대해 가지고 있는 그녀의 가치를 알거나 반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에게서 영광을 탈취한다면, 아내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광채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용서의 복음이 우리 가정에서 분명하게 부각되는 소리가 되도록 해야합니다. 이것은 먼저 성경의 메시지가 개인적인 대화에서나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것과 가정예배를 통해 가정에서 날마다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용서하는 것처럼 남편 또한 아내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보다 긍휼을 덜 받아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내는 허물이 있지만 남편으로부터 소중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결과적으로 용서는 배우자의 소중함을 전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한 배우자들이 서로에 대해 매력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야 그들의 육체적 결합이 마음의 결속력으로 강하게 될 수 잇씁니다. 마음의 결속력을 강하게 하고 배우자를 세워주는 한 가지 방법은 우리가 그 배우자 속에 있는 육체적인 아름다움과 인격적인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남편 된 우리는 이 아름다움을 우리의 사랑스런 말로 그리고 아내에게 바라는 것을 우리가 먼저아내에게 보여줌으로써 표시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남편은 성경의 명령에 순복하고 가족과의 여느 관계보다도 아내와 자신을 하나로 생각하는 것을 행함으로써 아내의 가치를 부여합니다. 이것은 심지어 자신의 부모님보다도 아내를 먼저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교훈은 우리가 평생 부모님을 존경해야 한다는 의무를 저버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결혼관계의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관계가 결혼관계보다 우선이 될 때 거기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성경이 결혼 관계에 대해 그것이 부모나 자녀들을 결혼 관계보다 뒤에 놓아야 할 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분명한 교훈은 남편과 아내의 하나 됨을 방해하는 어떤 관계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명령대로 남편이 아내를 보물과 같이 여길 때 어떤 관계도 결혼 서약으로 맺어진 하나됨의 우선권 위에 오지 못할 것입니다.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베푸는 돌봄의 정도에 따라 자기 배우자의 가치를 얼마나 높이 평가하는지가 나타납니다. 바울은 남편이 자기 몸을 사랑하듯이 아내를 사랑하고 돌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돌봄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들은 따뜻한 관계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공급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배우자를 귀중하게 여긴다는 말에는 우리가 기족에 가졌던 여러 관계들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이기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배제한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과 재산들이 배우자를 보호하고 양육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고 명령하셨습니다. 성경은 남편이 자기 몸을 사랑하듯이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지혜롭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남편이 그렇게 할 때에 아내의 행복은 곧 자신의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아내에 대한 사랑은 남자가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성경의 유비는 남편의 마음에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전히 우리와 맺으신 관계의 결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어떤 아름다움이나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섬김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이 무조건적으로 순수하게 아내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배우자에게 잘 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단순히 하나님 앞에서 함께 세운 결혼 관계 때문에 아내를 소중히 여기는 남편은 하나님과 그의 아내를 다 존경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머리됨은 아내를 영화롭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남편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모든 것을 구비한 사람으로 만드는 구원의 목적을 위해서도 의도된 것입니다.
남편을 온전케 하기 위해
하나님은 남자를 완성하시고 보완하기 위해 아내를 창조하셨습니다. 남자는 결혼생활에서 그의 아내의 사역이 없다면, 불완전한 존재이고 이 세상에서의 삶 속에서 그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하신 가능성을 인식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결혼한 두 사람은 한 사람이 되기 때문에 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상대방을 타락시키거나 가볍게 여기는 일이 있다면 어느 한 사람도 완전하게 전인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에게 아내를 세워줄 마음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다는 것은 고려하지 않고 그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는 자신을 속이며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남편과 아내는 마음과 영혼과 몸이 하나가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인격을 하나로 만드시며 그들이 서로를 돌보기를 기대하십니다. 남자의 머리됨의 목적은 교회를 위해 행하신 그리스도의 구원활동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의 경로요 방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그가 가지고 있는 개성과 은사들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하신 것처럼 바른 머리됨은 아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아내를 세워줍니다. 남편은 아내의 지지와 영향을 필요로 합니다. 아내가 유능할수록 돕는 자로서 아내의 역할은 더 강하고 더 적합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발전을 위해 의도하신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는 남자는 아내를 세워주는 일을 즐겨합니다. 그래야 아내가 자기를 더욱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아내에게 보이는 관심이 자신을 규정하고 계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진정한 남자는 여자를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남편의 머리됨이 미치는 영향력은 남자가 그의 권위를 표현하는 방법에 대한 영적인 암시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머리됨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더 많이 그리고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은 아내가 배우자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 그의 영적인 건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반성하는 데서 흘러나옵니다. 더 깊은 뜻은 아내가 남편이 자신을 발견하는 것을 도울 뿐만 아니라 남편이 그의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차원을 발견하는 것을 돕기도 합니다. 이것은 친밀한 사람이 초월적인 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는 것을 돕기 위해 마련하신 부부관계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있는 구원자의 임재와 돌보심과 평안을 더 많이 발견합니다. 남편의 권위가 아내를 성숙시키기 위해 사용될 때 자신의 영적인 건강이 향상되며 그는 성취를 경험합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에 이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 묻혀있습니다. 자기 아내를 소중히 여기고 존경하는 남자는 전형적으로 온전한 사람이라고 인정받게 됩니다. 반대로 자기의 머리됨을 자기의 아내의 존엄을 떨어뜨리고 무시하는 데 사용하고 머리됨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종종 감정적으로 또 이성적으로 건강하지 못하여 다른 사람들과 충돌하는 남편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성경은 한 남자가 경건하게 성장하는 수단이 바로 그의 가족의 선두에서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라고 가르침으로써 이러한 기대에 대해 경고합니다. 남자가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위해 위임한 것을 존경하기 위해 자신을 바치지 않는다면, 그의 영혼이 성숙해야 할 토양은 고갈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남편을 지지해주라고 계획하신 아내를 남자가 약하게 한다면 결혼생활에서 두 사람 모두의 인격적 그리고 영적인 잠재력이 위태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더 좋은 계획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과 아내 두 사람 모두를 강하게 하고 두 사람 모두에게 복이 되는 경건한 머리됨을 명하십니다.
제 3부 희생적인 부부 사랑을 나누기
제7장 부모로서의 부부
자녀들의 요구를 묵인하지 말고 그들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대로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도록 노력하는 것, 이것이 성경적인 가정교육의 본질입니다. 성경적인 가정교육은 훈련과 격려와 훈계를 비롯하여 부모의 편리나 부모가 좋아하는 것 또는 그들의 관심사보다는 자녀의 영적인 관심사에 도움을 주는 것을 추구합니다. 자녀 양육의 책임은 하나님에 대한 부모 고유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적인 자녀 양육의 상황과 기초를 형성하는 관계들에 대한 명확한 기대를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 – 첫 번째 기초석
맨 처음에 제시된 이 기초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성경적인 자녀교육이 교회라는 상황에서 행해지기를 기대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크리스천 부모의 첫 번째의 우선순위와 가장 중요한 의무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친자식처럼 사랑하시는 지를 이해함으로써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배웁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사랑하는 방식의 패턴이 됩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성경적인 자녀교육에 필수불가결한 기초석이 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부모에게 모델이 필요하다는 것과 관련이 있고, 두 번째 이유는 우리 자신의 안전의 필요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모든 크리스천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라는 진리가 우리를 과거로부터 해방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은 물론이고 또 다른 부모의 모델을 제공하십니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하나님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아버지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분과의 관계를 갖고 우리가 되고 싶어 하는 부모의 모습을 갖게 합니다. 우리가 부모로서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은 전형적으로 우리에게 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불안이 부모인 우리 모든 사람들의 행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바심이 있는 부모는 좋은 부모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크리스천 부모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며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다는 확신을 줌으로써 우리의 염려의 원천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의 확신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은 부모들에게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자녀들의 유익을 위한 자유를 줄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자녀들에게서 확신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확신을 그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 확신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배우자와의 사랑의 관계 – 두 번째 기초석
남편과 아내 사이의 건강한 관계가 자녀를 위한 사랑 안에서 훈계의 기초가 되는 영적인 면을 제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통해 자녀들을 향한 그분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녀 양육에 필요한 두 번째 기초석은 부모들이 서로 나누는 사랑입니다. 성경적인 가정교육의 선행조건은 남편과 아내의 건강한 관계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의 권위에 순복하고, 남편이 자기 아내의 필요를 위해 특권을 희생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결혼생활에서 실현하는 데 있습니다. 부모의 관계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족으로 들어오는 통로이기 때문에 직장 일로 불필요한 경제적인 이익을 얻으려 하거나 심지어 사역을 핑계로 자기의 배우자에 대해 등한히 여기는 부모 중 한 사람은 결국 자녀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안기게 됩니다. 자녀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배우자 각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보다 선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와 배우자와의 사랑의 관계는 성경적인 가정교육의 기초가 됩니다. 우리가 성경적인 가정교육에 대해 책임을 느낀다면 자신을 이 진리의 결과들에 복종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녀들을 위하여 하나님과 배우자를 존경하는 데 헌신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바는 부모의 품행을 엄밀하게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판단하는 것보다 크리스천으로서 사는 일상생활이 자녀교육에 있어 가장 능력 있는 도구라는 사실입니다. 부모도 자녀교육에 실패하여 절망가운데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을 누리는 부모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무조건적이고 영원한 사랑으로, 순간적인 판단의 실수로 인해 우리 아이들이 망치게 되거나 아이와 부모의 관계가 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이 은혜로 크리스천들은 가정교육을 하는 데 있어서도 자유 함을 얻었습니다.
자녀의 책임 – 세 번째 기초석
하나님의 말씀은 부모와 자녀의 행동에 지침이 되는 책임들을 묘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순종을 기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녀에게 그의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또한 자녀의 순종은 부모가 요구하는 것을 막연히 행하는 것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순종을 해야 하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첫째, 자녀들은 이것이 옳기 때문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우리의 사랑과 우리 자신에 대한 불안정으로 우리가 쉽게 갈등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분은 은혜롭게도 우리에게 대단히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자녀들에게 자기 부모에게 순종하는 두 번째 이류를 제시 할 때 그는 우리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 그들을 훈계하는 것 사이에 관계가 있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자녀들이 순종하는 것은 옳은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그들에게 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순종하는 자녀는 세상에서 거추장스러운 존재이며 자신에게도 위험한 인물입니다.
부모의 책임 – 네 번째 기초석
자녀를 양육하는 데 있어 기초가 되는 마지막 기초석은 하나님께서 부모의 순종에 대해 가지고 계신 기대들로 형성됩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부모가 자기 자녀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자녀 양육의 당사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성경은 암시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정교육에 대한 교훈을 받은 당사자는 아버지와 어머니이지 할머니나 할아버지도 아니고, 직업적으로 애 봐주는 사람도 아니며, 보모나 가정 밖의 어떤 기관도 아닙니다. 사도는 가정의 영적인 머리를 직접 언급함으로써 성경적인 부모의 역할의 영적인 도전과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자녀교육에 있어 책임자를 가정의 영적인 머리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 일은 명백한 영적 우선권이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녀 키우는 책임의 대표자로 있는 동안은 자녀를 양육하는 모든 결정과 양육하는 일 그 자체를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자녀의 양육에 성경적인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아버지의 머리됨을 통해 부모를 가정으로 돌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구체적인 말씀과 가족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에 따르면, 가정교육은 부모 모두 등한히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영적으로 매우 높은 우선순위에 있는 것입니다.
부모가 해서는 안 되는 것 – 다선 번째 기초석
성경적인 가정교육의 본질은 부모인 우리가 자녀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주어 자라게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우리가 아이들을 대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웁니다. 특히 좌절의 시기와 자만심에 빠져 있는 순간에 이런 교훈을 얻습니다. 성경적인 가정교육은 우리 주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에게 부여하신 개인적인 은사들을 존중히 여김으로써 그들을 만드신 독특한 방법과 그들을 사용하시려는 계획을 존경하는 훈계의 방법들을 발견하는 책임이 내 자신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적인 가정교육은 자녀들의 각각 다른 점들의 존엄을 존경하고 나의 권위를 헌신적으로 사용하고 내 자신을 과장하려 하지 않고 그들의 가치를 턴명하기를 요구합니다.
부모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것 – 여섯 번째 기초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모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크리스천 부모에게 이렇게 지시합니다.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존칼빈은 양육하라는 어구의 의미를 애정을 가지고 자녀들을 소중히 대해라라고 변역했습니다. 이 해석은 이 양육 용어가 성경 다른 곳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부모들의 생명이 자녀들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몸을 돌보는 것처럼 자녀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우리는 생명의 본질로서 자녀들을 양육해야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크리스천들에게 부여하신 신체적, 영적인 생명력이 자녀들을 희생적으로 돌보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가정교육의 목적은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존경하고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인 우리가 우리의 말과 우리의 태도와 우리의 올바른 행동과 우리의 가정환경이 과연 주님을 알고 이해하는 것들인지를 끊임없이 살펴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은혜에 의한 가정교육
자녀의 유익을 위해 우리 자신을 드림으로써 우리의 가장 고귀한 목적들과 신의 성품에 가장 가깝게 나아가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희생하면 자녀들은 그들을 향한 우리 주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주님께로 올려줌으로써 우리는 주님처럼 되며, 그래서 부모의 마음에서 우리를 그의 희생으로 천국까지 들어 올려주신 주님의 사랑을 헤아리고 그 사랑에 놀라ᅟᅳᆫ 또 다른 수단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8장 사회인으로서의 부부
우리는 과연 우리의 삶이 다른 사람들의 삶과 영원한 것들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충분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을 우리의 가정에만 제한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더불어 사는 것을 배우는 방법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형성되고, 우리가 그들을 대하고 그들 앞서 사는 삶에 의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줍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의무
우리의 문화 속에서 정부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자격이나 인간성에 대한 평가가 어떠하든지 간에 크리스천들은 반드시 더 높은 권위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도자로 하여금 통치하게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크리스천들은 자기들이 사람의 법 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크리스천은 비록 천국의 법에 궁극적으로 충성을 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세상의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크리스천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범하라고 요구하지 않는 모든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세상의 시련으로부터 영원한 구원을 준다는 소식을 알리는 하나님의 높은 목적은 정부가 사람들을 서로 결속하여 질서를 유지할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세상적인 규칙에 따라 게임을 할 때 이기는 것보다는 오히려 지는 편을 선택한다면 하나님을 더 강력하게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옳다고 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악에 연루되는 것보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말미암아 잘못된 일을 바르게 하기 위해 기꺼이 손해를 입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모든 상황에서 성실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크리스천 공동체에서 발견되는 태도들이 밖으로 발산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회에서 그리고 우리 마음에서 그리스도의 목적을 위해 이와 같은 담대한 열심을 내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사회에서 모든 사람에게 그에게 알맞은 존경을 보임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결혼생활, 가족, 교회 그리고 더 광범위한 관계에 기독교적인 기초를 부여하는 태도를 굳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과 고용자의 신분으로 학대를 받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계를 좌지우지 하고 있는 사람에게서 아주 불쾌한 대우를 받았을 때 제일 어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태도와 행동으로 이런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상황이 어떻게 펼쳐지든 상관없이 내가 겪었던 고통은 아주 적은데도 오래 전에 당했던 작은 일 때문에 지금도 분노를 느끼고 있다면, 가정과 직업과 미래까지 상처를 주는 그런 고용주에게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대해준다는 것은 마음으로 애써 노력하고 결심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섬기라고 우리를 부르신 모든 곳은 우리의 인격을 다듬어 가는 데 도움이 되며, 이것은 우리가 다른 곳에서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쓸지에 영향을 줍니다.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는 사람이야말로 가정에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 살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가정에서 희생을 배운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이기심이 없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아픔도 결코 악과 목욕을 복으로 갚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산다는 것은 반드시 희생이 필요하며, 때로는 희생으로 인한 고통이 무척 큰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무
크리스천이 가정과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이유는 우리가 접하고 있는 사람들의 성품 때문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강조하고 넓히고 깊게 하였을 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책임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그 어떤 세상적인 변명으로도 이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두 가지입니다. 우리는 흔들려서는 안 되고 또한 정착해서도 안 됩니다.
성취해야 할 의무들
예수님은 우리가 충족시킬 수 없는 표준을 우리를 위하여 이미 충족시키셨습니다. 비록 그분은 죄를 범치 않으셨지만, 우리가 이행할 수 없는 모든 정당한 의무를 다 이행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돌봄을 받을 자격이 없지만, 그분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변함없이 그분의 신실하심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신실하셨을 뿐 아니라 이 모든 의무를 이행함으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신실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순종의 짐을 몸소 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거룩함을 요구하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공급하기도 하십니다.
사함을 얻은 죄의 형벌
주님께서는 자신을 온전하게 주기 위해 우리의 의무를 완성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실패에 대해서도 무언가 마련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행해야 할 의무를 완수하셨다는 사실이 곧 우리의 죄의 결과를 무효로 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의로운 의무를 완성하신 바로 그 순종으로 인해 그분은 형벌을 감당하기에 합당한 분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예수님은 이런 벌을 받으셨으며, 우리를 죄의 결과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를 대신한 수동적인 고난에 불과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더욱 큰 영광이 하늘에서 흘러나오며, 우리 마음속에서 더욱 큰 감사가 넘칩니다. 다른 사람의 복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희생하는 사람들의 예에 비추어 우리의 죄를 위해 자원하여 그 형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의 척도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우리의 잘못과 연약함과 하나님에 대한 고의적인 불순종으로 인한 지옥 같은 고통을 우리를 대신하여 받으셨습니다. 비록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우리가 그분의 원수처럼 행했으나, 주님은 그의 희생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처럼 대하셨습니다. 이것은 크리스천의 믿음에 있어 가장 위대한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완전한 의로써 우리의 가장 악한 죄의 값을 완벽하게 지불하셨습니다.
새로운 지위
우리를 대신한 그리스도의 행위로 인해 우리는 새로운 영적인 지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키심에는 더 많은 죄의 결과에서 우리의 영혼을 보호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삶의 표준과 지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지침들을 따르려는 시도가 우리의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지침들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과 그분의 영광을 진척시키기 위해 계획하신 길을 알려줍니다. 그분은 우리의 순종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의 사랑 안에서 피난처를 찾으라고 알려주셨습니다. 각 사람의 삶이 서로를 위한 것이 될 때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대해 가지고 계신 사랑을 나누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지고 계신 더욱 큰 사랑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의 희생적인 사랑이 가정 밖으로 퍼지기를 원하십니다. 부부 간의 사랑은 자녀들에게, 교회의 지체들에게, 사회의 여러 사람들에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영혼들에게 감동을 주게 됩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에게 그의 보살핌은 모든 사람들을 포함한다는 메시지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그분의 계획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이보다 더 귀중하고 긴급한 성경적인 진리는 없습니다.
제9장 영원히 함께 할 부부
사랑에 성공한 사람들은 행동이 작용한 것이지 말 때문인 아니었습니다. 인간관계에 대해 사도요한이 주신 말씀의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말이 갖는 문제점
말은 결혼을 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영원히’는 진짜로 긴 시간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말은 우리의 애정이 사라질 때까지를 의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병들 때나 건강할 때나’ 두 사람이 하나가 되겠다는 약속은 상대방이 나를 너무 오랫동안 비참하게 만들지 않기만 하면, 혹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상대방의 과오가 아닌 한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말만으로는 결코 사랑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하는 말이나 심지어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감정에 대해 우리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도 영원히 지속될 사랑을 보증할 수 없습니다.
행동의 필요성
요한은 사랑을 희생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는 예수께서 당신과 나를 위해 모든 영광과 권위를 기꺼이 버리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그 탁월한 예로 제시합니다. 여러 인간관계들 가운데 가장 친밀한 관계를 보장하는 사랑 역시 희생적이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매일 서로를 위해 육체적으로 죽기를 기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 자아에 대해서는 죽어야 합니다. 위대한 사랑은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로 생각할 때 시작되어집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약점을 악용하지 않을 때, 상대방의 두려움이나 어리석음을 인내를 갖고 견뎌줄 때, 각자의 책임감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도울 때, 다른 사람이 가진 꿈을 복 돋아 줄 때, 다른 사람의 슬픔을 위로할 때, 서로의 필요를 이해하고 행동할 때, 그리고 서로를 용서할 때 이 비밀은 더 구체적인 형태를 띠는 것입니다.
중요한 진리
우리에게는 용서하는 것이 어렵기도 하지만, 용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하나의 싸움이라는 것을 발견하다는 사실은 곧 각 사람의 마음에 영적인 연약함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에게 투자한 사랑에 대한 대가로 무엇이든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행하는 순수한 사랑과 기꺼이 행하는 희생에는 그 속에 자아에 대한 비중이 무겁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생자를 희생시키는 것으로 우리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상기시키는 것 속에는 우리가 과연 어떤 존재인지를 폭로하려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내어주심으로써 그의 자녀들을 복 주시려는 그분의 희생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죄의 진리를 발견하고 나누는 것은 놀라운 일이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누리는 복의 끝은 아닙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또한 우리 주님의 사죄의 실제를 아는 지식이 깊어갈 때 자연히 주님을 공경하려는 우리의 바람은 증가하게 되어있습니다.
결혼을 지켜보시는 그리스도
우리가 결혼을 하면서 충실하겠다고 하는 약속은 단지 두 사람 사이의 동의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나누는 사랑을 능동적으로 새롭게 하고 싶게 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관계에 또 다른 당사자이십니다. 이 사실은 크리스천의 결혼을 더 확실하게 해줍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다고 맹세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지어 두 사람 사이에 나누는 말과 감정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결혼을 유지하지 못한 경우에도 결혼 관계가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영원히 충실하고 상대방을 끝까지 사랑하겠다고 하는 약속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한 약속입니다. 크리스천 부부를 하나가 되게 하는 행위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영원한 헌신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결혼은 처음의 열정이 식은 후에는 도피하려고 하는 함정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새롭게 펼쳐 가는 사랑의 항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결혼식 날 상대방에게 반지를 끼워줍니다. 우리가 하는 말과 반지를 상대방에게 끼워주는 행동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내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에 맡겨야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이 진실 된 사람을 만들며 영원한 사랑이 되게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그분을 사랑하는 데로 끌어 주심으로써 우리의 삶을 하늘에 계신 분이 원하시는 멋진 삶이 되게 하십니다.
강해설교의 원리 :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0) | 2017.06.02 |
---|---|
성경 : 신약개론 (0) | 2017.06.02 |
성경 : 구약개론 (0) | 2017.06.02 |
성경 : 신약,구약 66권 요약 (0) | 2017.06.02 |
기독교 세계관 이야기 : 니고데모의 안경 (0) | 2017.06.02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