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기독교강요 : 4권 6장

본문

반응형

6 장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

 

(베드로의 수위권에 관한 가설들을 반박한다. 1-7)

 

1. 카톨릭 교회에 복종하라는 요구

 

지금까지 우리는 고대 교회 제도에 있었던 여러 가지 계급들이 후대에 부패하고 점점 더욱 악용되어, 현재의 카톨릭 교회에서는 그 이름만이 남아 있고 실제로는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찰했다. 우리가 이렇게 한 뜻은 경건한 독자가 전후를 비교함으로써 카톨릭교에 어떤 교회가 있는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그런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왔다고 함으로써 분파의 죄를 우리에게 씌우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구조 전체의 갓돌(capstone)에 대해서, , 로마 교황청의 권위 권에 대해서는 아직 논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전세계의 교회가 그들의 독점물이란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이 수위권을 우리가 이야기하지 않은 까닭은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도 아니며 고대 교회가 사실상 인정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우리가 이미 논한 제도들과 다르다. 그 계급들은 먼 고대에 만들어져서 시대가 흐르는 동안에 완전히 부패하고 마침내 완전히 다른 형태가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교회의 통일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거의 유일한 유대는 우리가 로마 교황청에서 분리되지 않고 여전히 복종하는 것이라 또 세상 사람들을 설득시키려 한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교회를 빼앗고 자기들만이 독점하려고 할 때에 특히 의지하는 논점은 하나인데, , 자기들에게는 머리가 있고 교회의 단결은 그 머리에 달렸으며 그 머리가 없으면 교회가 산산조각이 난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론은 로마 교황청을 머리로 여겨, 거기에 복종하지 않으면 교회는 목이 잘린 불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성직 제도를 논할 때에 언제든지 출발점으로 삼는 원칙도 이것이다. , 로마 교황은(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대리로서) 그리스도 대신해서 모든 교회를 주관하며 로마 교구가 모든 다른 교구들 위에 수위권을 유지하지 않으면 교회가 잘 조직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수위권의 정체도 검토해야 한다. 그래야만 교회를 올바르게 다스리는 데 필요한 것을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을 수 있다.

 

2. 교황의 수위권을 증명하기 위해서 구약의 대제사장직을 근거로 삼을 수 없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가를 밝히겠다. 그들이 말하는 성직제도, , 교회 조직의 진정한 형태를 위해서 어느 한 교구의 위신과 권한이 모든 다른 교구들을 능가하며 전체의 머리가 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이 그 문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이런 필요성을 교회에 강요한다면 그것은 교회를 부당한 법에 굴복시키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적대자들은, 그 주장을 증명하려면 먼저 이런 제도는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이 점에 관해서 그들은 율법에 있는 대제사장직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설치하신 최고 재판소를 언급한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대답은 쉬우며, 그들이 한 가지 대답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면 여러 가지 대답을 할 수도 있다. 우선 한 민족에게 유익한 일을 온 세계에 확대해야 된다는 이유는 없다. 한 민족의 근본법과 전세계의 근본법은 훨씬 더 다르다. 유대인들은 주위가 온통 우상 숭배 민족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여러 가지 종교에 마음이 유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처소를 세계의 중심지에 두셨다. 그들의 단결을 더잘 유지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대제사장 한 사람을 임명하시고 모든 사람이 그를 쳐다보게 하셨다. 그러나 지금같이 진정한 종교가 전 세계에 퍼진 때에 동서의 지배권을 한 사람에게 준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임을 어느 누가 간파하지 못하겠는가?

이것은 한 지방을 한 사람이 다스리므로 세계도 한 사람이 다스려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러나 다른 이유로도 이런 모방은 불가하다. 대제사장이 그리스도의 한 예표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제사장직이 옮겨졌을 때에 권리도 옮겨졌다(7:12). 누구에게 옮겨졌는가? 교황은 자기가 교황이 된 때에 그 권리를 이양 받았다고 감히 파렴치한 주장을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이양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대리자나 후계자를 필요로 하지 않고 홀로 친히 그 권리를 지키시며, 따라서 아무에게도 이양하시지 않는다. 이 제사장직은 가르치는 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푸는 일도 하는 것인데,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죽음에 의해서 또 현재 아버지 앞에서 하시는 중보 기도에 의해서 하나님의 노염을 푸시기 때문이다.

 

3. 베드로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교회에 대한 이 지배권을 수립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 예를 영원한 법으로 삼아서 우리를 속박하려고 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짓이다. 우리는 그것이 일시적인 예에 불과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자기의 견해를 확인할 만한 것을 신약성경에서 한 사람에게 말했던 것밖에 찾을 수 없다. 그것은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신 말씀이다(16:18). 또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내 어린양을 먹이라"(21:15)고 하신 말씀도 그들은 인용한다.

그러나 그들의 증명에 충분한 근거가 있으려면, 그들은 우선 양을 먹이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은 사람에게 모든 교회에 대한 지배권이 위임되었다는 것과 매는 것과 푸는 일은 곧 전세계를 지배하는 일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찬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가 주께서 명령을 받은 것과 같이 다른 모든 장로들에게도 교회를 먹이라고 권고한다(벧전 5:2). 이 점을 보아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러한 말씀이 베드로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무엇을 준 것이 아니라고 추론할 수 있으며 또한 베드로는 받은 것을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나누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익한 언쟁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다른 말씀을 보겠다.

다른 구절에서, 매며 푼다는 것은 죄를 그대로 두거나 또는 용서한다는 뜻이라고(20:23)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게 설명하셨다. 매며 푸는 방법에 대해서는 성경 전체에 반복 설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이 가장 훌륭한 설명을 한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꾼들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며 동시에 이 은혜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고후 5:18, 10:6).

 

4. 열쇠에 대한 왜곡된 권리 주장

 

매는 것과 푸는 데 관한 구절을 그들이 얼마나 망측하게 왜곡하는가 하는 것을 앞에서 간단히 지적했지만 나중에 더 자세하게 설명하기로 하고, 지금은 베드로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대답에서 그들이 어떤 결론을 얻으려고 하는가를 보는 것이 좋겠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가 땅에서 매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늘에서도 매이리라고 하셨다(16:19). 만일 "열쇠"라는 말과 매는 방법에 대해서 의견이 일치한다면 모든 논쟁이 곧 끝날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에게 명령하신 일은 노고와 곤란이 많은 것이므로 교황은 그것을 무시하려고 하는데, 그런 일은 그에게 아무 이익도 주지 않고 도리어 그의 쾌락만 빼앗을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교훈이 우리 앞에 하늘을 열어 주는 것이므로 "열쇠"라는 말은 적절한 은유가 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매이며 풀린다는 것은, 어떤 사람은 신앙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화해를 얻으며 어떤 사람은 불신앙으로 인해서 더욱 속박을 받는다는 뜻에 불과하다. 교황이 이 일만을 자기 일이라고 주장한다면 아무도 그를 시기하거나 싸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계승하면 수고만 많고 이익은 적겠기 때문에 교황은 싫어한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논쟁이 시작된다. 나는 이 약속 자체에는 사도의 직분이 존귀하다는 뜻밖에 없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사도직과 수고는 분리할 수 없다. 내가 제시한 이 정의를 거부한다는 것은 파렴치한 짓일 것이며, 만일 이 정의를 인정한다면 여기서 베드로에게 주신 것은 그의 동료들에게 주신 것과 공통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인격에 타격을 줄뿐만 아니라 교리의 권위 자체가 손상될 것이다.

그들의 항의는 참으로 떠들썩하다. 그러나 나는, 이 바위를 향해서 돌진한들 그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들이 증명하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겠기 때문이다. , 같은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이 모든 사도에게 주어진 것과 같이, 매고 푸는 권한도 모든 사도가 공통하게 받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을 때 베드로를 온 교회의 통치자로 임명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때에 약속하신 것을 다른 곳에서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동시에 부여하신다. 이를테면 그들의 손에 쥐어 주셨다(18:18, 20:23). 한 사도에게 약속하신 것과 똑같은 권리를 모든 사도들에게 허락하셨은즉 어떤 점에서 베드로가 동료들보다 우월한가? 그들은 그가 단독으로 또 공동으로 받았고 다른 사람들은 공동으로만 받았으므로 우월하다고 말한다. 내가 키프리아누스나 어거스틴과 함께, 그리스도께서는 한 사람을 다른 사람들보다 높이시지 않고 교회의 일치단결을 명령하시는 뜻으로 하신 것이라고 대답한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키프리아누스는 말한다. "한 사람에게 열쇠를 주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이며 모든 사람이하나인 것을 알리신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베드로와 똑 같았고 영예와 권한을 동등하게 나눠 받았다. 그러나 하나에서 출발한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인 것을 보이시려는 뜻이었다." 어거스틴은 다음처럼 말한다.

"만일 교회의 신비가 베드로에게 없었다면 주께서는 '열쇠를 네게 주리니'(16:19)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이 말씀을 베드로에게만 하신 것이라면 교회에는 열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열쇠를 가지고 있다면 베드로가 열쇠를 받았을 때에 그것은 온 교회를 상징한 것이다." 또 다른 구절에서, "모든 사람이 질문을 받은 후에 베드로만이 '주는 그리스도시요'(16:16)라고 대답했고 열쇠를 네게 주리니"라는 말씀을 받았다. 이것은 그만이 매고 푸는 권한을 받은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는 한 사람이었지만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대답했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받음으로써 연합을 몸소 상징했다. 따라서 연합이 모든 사람 안에 있으므로 한사람은 모든 사람을 대표한다.

 

5. 베드로가 받은 것은 영예였지 권력이 아니었다

 

그러나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말씀은(16:18) 어느 다른 사람에게는 하신 일이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 신자에 대해서 바울과 베드로 자신이 한말과는 다른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 대해서 하셨다고 하는 것과 같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라고 한다(2:20-21). 베드로는 우리에게 산 돌이 되라고 명령하며, 저 택하심을 받은 보배로운 돌 위에 놓여(벧전 2:5-6) 각각 우리의 하나님과 연결됨으로써 또한 서로 연합하라고 한다(4:16, 2:19참조). 그들은 그가 특히 그 이름을 가졌으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앞선다고 말한다. 나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제일인자들 중의 한사람이라는 영예나 지위를 물론 베드로에게 기꺼이 돌린다. 만일 그들이 원하면 모든 사도들 중의 첫 자리를 주어도 좋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가 다른 사람들 위에 수위권을 가진다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 대체 이런 연역법은 어떤 종류의 것인가? 그는 열성과 교리와 용기에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출중했고 그러므로 그에게 지배권이 있다는 식으로 한다면 우리는 안드레가 베드로보다 지위가 높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시간적으로 앞섰었고 베드로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했기 때문이다(1:40,42). 그러나 나는 이 점을 말하지 않겠다. 그러므로 베드로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자리를 주어라. 그러나 지위의 영예는 권력과는 아주 다르다. 우리는 사도들이 대개 베드로에게 이 영예를 준 것을 안다. 그는 집회에서 발언하며 토론과 권고와 충고를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했다(2:14이하, 4:8이하, 15:7이하). 그러나 권력에 대한 말은 한 마디도 읽어볼 수 없다.

 

6. 기초는 하나뿐이다

 

우리는 아직 이 논쟁을 제기하지 않았으나 우선 여기서는 한 가지만 주장하겠다. , 그들이 베드로라는 이름 하나를 기초로 하여 교회 전체에 대한 주권을 확립하려고 하는 것은 심히 무력한 논법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이 사기를 시작했을 때에 내세운 어리석은 주장은 논박은커녕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16:18)라고 하셨으므로 교회는 베드로 위에 세운 것이라고 그들은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석한 몇몇 교부들도 있었다고 그들은 아직도 말한다. 그러나 성경 전체가 이런 생각에 반대하고 있다. 왜 교부들의 권위를 내세워서 하나님에게 반대하는가? 진실로, 왜 우리는 이 말씀의 뜻에 대해서 논쟁하는가? 그것은 어떤 애매모호한 점이 없고 가장 명백하고 분명한 말씀이다. 베드로는 자신과 교우들을 대표해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선언했다(16:16). 그리스도께서는 이 반석 위에 그의 교회를 세우셨다. 바울의 말과 같이 기초는 하나뿐이며 그 이외의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3:11). 또 나는 여기서 교부들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는다. 내 말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의 증언을 인용하려고 하더라도 나는 거부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이렇게 명백한 문제에 대해서 논쟁을 함으로써 독자에게 무용한 고통을 주고 싶지 않다. 특히 이 문제는 우리 쪽의 대표적인 지지자들이 오래 전에 많이 논술하며 설명했기 때문이다.

 

7. 사도들 사이에서 베드로가 차지한 지위에 대한 성경의 기록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누구도 성경 자체보다 더 훌륭한 해결을 할 수는 없다. 베드로는 사도들 사이에서 어떤 직책과 권한을 가졌으며 또 어떻게 행동했고 다른 사도들은 그를 어떻게 대접했는가에 대해서 가르치는 구절들이 성경에 있다. 이 기록들을 전부 읽어 보라. 그렇게 하면 베드로는 12사도 중의 한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들과 동등했으며 그들의 동료였으나 주인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모두 회의에 제출하며 해야 할 일에 대한 충고를 했다. 그러나 그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그들에게 의견 발표를 허락할 뿐만 아니라 결정도 그들에게 맡기고는, 그들이 결정하면 그대로 따르며 복종했다(15:5-12). 목자에게 편지를 쓸 때에는 상관의 권위로써 명령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동료로 보며 동료들 사이의 관례대로 다정하게 권고했다(벧전 5:1이하). 그가 이방인과 가까이 하였다는 비난을 받았을 때, 그것은 부당한 비난이었지만 답변하고 과실이 없는 것을 밝혔다(11:3-18). 그는 요한과 함께 사마리아로 가라고 동료들이 명령했을 때 거절하지 않았다(8:14). 그를 보냄으로써 사도들은 그를 상관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했고, 명령에 복종하여 사명을 다함으로써 그는 그들 위에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니라 그들과 동료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런 구절들이 전혀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갈라디아서 하나만을 보면 우리는 곧 모든 의심을 버릴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은 거의 두 장에 걸쳐 자기는 사도로서 베드로와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과거에 그가 베드로를 찾아간 것은 그에 대한 복종을 표명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 앞에서 요리상으로 서로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고, 베드로도 그런 일은 전혀 요구하지 않고 주님의 포도원에서 함께 일하기 위한 동료로서의 악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방인 사이에서 그가 받은 은총은 베드로가 유대인 사이에서 받은 은총보다 적지 않았다고 한다(1:18, 2:8). 끝으로, 베드로의 행동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 있었을 때에 바울이 시정했고 베드로도 그 책망에 순종했다고 한다(2:11-14). 이 모든 기록을 보면 바울과 베드로는 동등했거나 적어도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 사이에는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지배하는 권한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바울은 분명하게 베드로와 요한은 자기의 동료이지 상전이 아니므로 아무도 사도직에서 그들을 자기보다 앞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교회 내의 단독 통치권은 그리스도만이 가지고 있다. 8-10)

 

8. 사람이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베드로에 대해서 그가 사도들 중의 제일인자였고 다른 사도들보다 탁월한 위신을 가졌다고 하는 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특수한 예를 일반적인 법칙으로 만들며, 한 번 있었던 아주 다른 일을 영구화할 이유는 없다. 사도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우두머리이었다. 그들은 소수였기 때문이다. 열두 명 위에 한 명이 서 있었다고 해서 십만 명 위에도 한 사람을 세워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는가? 열두 명이 한 명을 세워 자기들을 통솔하게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자연이 이것을 허락하며, 인간의 자연법도 집회에서는 비록 모든 사람의 권한이 같을지라도 한 사람은 사회자가 되고 다른 사람들은 그의 지도를 받을 것을 요구한다.(로마 시대에) 집정관이 없이는 원로원 회의가 없었고 재판장이나 검사가 없이는 법정이 열리지 않았다. 의장이 없는 위원회나 회장이 없는 협회는 없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베드로를 이런 사람으로 생각해서 그에게 수위권을 주었다고 우리가 인정하더라도 불합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소수 사이에 있는 일을 직접 세계 전체에 적용할 수는 없다. 아무도 단독으로 전세계를 지배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의 일부뿐 아니라 전체에서도 유일한 최고수령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두루미들과 벌들은 언제든지 하나의 지도자만 택할 뿐 여럿을 택하지 않는다는 예를 들어서 자기들의 주장을 증명한다. 물론 나는 그들이 제출한 예를 인정한다. 그러다 벌들은 한 통치자를 선거하기 위해서 전세계에서 모이는가? 모든 여왕벌은 각각 자기 집 만으로 만족한다. 그와 같이 두루미들도 떼마다 지배자가 있다. 이 사실을 근거로 그들이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개교회마다 자체의 감독이 있어야 한다는 것뿐이 아닌가? 다음에 그들은 정치 관계의 예를 든다. "다수 지배는 좋지 않다"라고 한 호머의 말을 인용하며, 군주 정치를 칭찬한 세속 문인들의 발언도 같은 뜻으로 해석한다. 대답은 쉽다. 호머의 율리시즈나 다른 사람들은 그런 의미에서 군주 정치를 칭찬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말한 뜻은 한 사람이 전 세계를 지배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한 나라에 두 왕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말과 같이 권력은 동료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9.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위는 양도할 수 없다

 

전 세계가 한 군주의 지배 아래에 포섭되는 것이 유익하다는 전혀 어리석은 카톨릭 교회의 생각을 옳다고 가정하더라도, 교회 조직에서도 같은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하지 않겠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머리이시며, 우리는 모두 그의 지배 아래에서 그가 제정하신 질서와 조직에 따라 서로 연합된다. 교회에 머리가 없을 수 없다는 구실로 세계 교회 위에 한 사람을 앉히려고 하는 그들은 그리스도를 현저히 모욕한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4:16). 우리는 바울이 모든 사람을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고 한 몸에 포함시키면서도 머리라는 영예와 이름은 그리스도에게만 남겨 두는 것을 알지 않는가? 바울이 각 지체에 일정한 분량과 일정한 제한된 기능을 배정하여 완전한 은총과 최고의 지배권이 그리스도에게만 있게 하는 것을 알지 않는가?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권위와 이름으로 지배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유일한 머리라고 부르는 것은 참으로 정당하다고 항의할 때에, 여기 대해서 그들이 의례히 쓰는 궤변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들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상에 있는 그의 대리자로서 그의 밑에 한 행정 수반이 있지 못할 것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선 이런 직위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다는 증명을 하지 않는다면 이 궤변은 그들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 바울이 가르치는 것을 보면, 공급되는 힘은 전적으로 각 지체에 보급되며 그 힘은 하늘에 계시는 유일한 머리에서부터 흘러온다고 한다(4:16). 그들이 더 분명한 설명을 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머리이시며 이 영예는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것이라고 성경에 확언하였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기의 대리로 임명하신 사람이 아니면 아무에게도 이 영예를 양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임명이 있었다는 것은 어느 곳에서도 읽을 수 없고 오히려 그런 생각을 충분히 반박할 만한 구절만 많다(1:22, 4:15, 5:23, 1:18, 2:10).

 

10. 인간 왕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가 될 수 있다

 

바울은 여러 번 교회의 산 모습을 그려 보인다. 그러나 하나인 머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이 없다. 오히려 그의 묘사를 통해서, 한 머리라는 생각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는 추론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심으로써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게 되었지만(1:9) 만물을 충만케 하시기 위해서 승천하셨다(4:10). 그러므로 지금 교회에는 여전히 그리스도가 계시고 앞으로도 항상 계실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리고자 할 때,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봉사의 직분을 상기시킨다. 바울은 주께서는 각 지체에 베푸신 은혜의 분량에 따라 우리 모든 사람 안에 계신다고 말한다(4:7). 그러므로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라고 운운한다(4:11). 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 위에 자신의 대행자를 세우셨다고 하지 않았는가? 만일 그렇게 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여기에는 특히 그 말을 해야 할 이유가 있었고 따라서 결코 빠뜨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말한다. 어떻게? 교회를 다스리도록 세우신 사람들의 봉사에 의해서라고 한다. 왜 그의 기능을 위임하신 사역자의 머리에 의해서라고 하지 않는가? 바울은 하나가 되는 문제를 말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라고 한다. 바울은 각 사람에게 특수한 방법을 배정하면서도 모두에게 공통된 일을 배정한다. 그는 연합을 권장할 때,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라고(4:4- 5) 말한 다음에 왜 교회의 연합을 유지하기 위한 최고의 제사장을 첨가하지 않았는가? 그런 사람이 임명된 것이 사실이라면 여기서 그 말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적절했을 것이다. 그 구절을 잘 생각해 보라. 확실히, 바울이 교회의 신성하고 영적인 통치를 그리려고 깊이 생각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의 후계자들은 이를 "성직자 계급 제도"라고 불렀다. 그는 목사들 사이의 단독 지배 제도를 규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런 것이 없다고 지적한다. 확실히 바울은 신자들이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결합되는 방법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사역자들의 머리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각각 받은 은혜의 분량에 따라(4:7) 각 지체에게 독특한 기능을 부여한다(4:16). 우리의 반대자들은 하늘의 성직자 계급 제도와 땅의 성직자 계급 제도를 비교해서 알기 어려운 이론을 말할 필요도 없다. 하늘 제도에 대해서 분수에 넘게 지혜로운 체하는 것은 안전하지 못하며, 땅에 있는 제도를 세울 때에는 주께서 친히 자신의 말씀에서 그 개략을 진술해 보이신 형태 이외의 것을 따라서는 안 된다.

 

(베드로가 로마 감독이었다고 하더라도 로마가 영원한 수위권을 소유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11-13)

 

11. 베드로에게 수위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로마가 그것을 주장할 수는 없다

 

교회 내에서의 수위권이 베드로에게 확정되었으므로 그것은 끊임없이 계승되어야 한다고 하는 그들의 이 주장을 정신이 올바른 사람들은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점을 그들에게 양보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베드로의 교구가 로마에 설정되어 로마 시의 감독이 되는 사람은 누구든지 온 세계를 주관하게 되었다는 그들의 주장을 어떻게 증명하려는가? 그들은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아니하는 이 높은 영예를 어떤 권리에 의해서 한 장소에 결부시키는가? 그들은 베드로가 로마에서 살았고 또 죽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 자신은 어떻게 하셨는가? 그는 예루살렘에 계셨고 거기서 감독직을 다하셨고 죽음으로써 그의 제사장직을 완성하시지 않았는가? 목자장, 최고의 감독, 교회의 머리이신 그도 한 장소에 대하여 영예를 얻으실 수 없었는데 그보다 훨씬 열등한 베드로가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수위권을 베드로에게 주셨고 베드로는 로마에 정좌했으며 따라서 베드로가 수위권자의 교구를 거기에 설치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유치하다는 정도를 넘은 미련한 이야기가 아닌가? 이런 논리를 쓴다면,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최고의 교사요 예언자 중의 으뜸 되는 모세가 그의 사명을 다하고 또 죽은 그 광야에(34:5) 수위권의 자리를 설치해야만 했을 것이다.

 

12. 안디옥의 수위권을 옮겨 받았다는 주장

 

그러면 그들이 얼마나 유쾌한 논법을 쓰는가를 보기로 하자. 베드로는 사도들 가운데서 수위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가 감독좌를 가지고 있는 교회는 특권으로써 그 수위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베드로의 처음 감독좌는 어디 있었는가? 그들은 안디옥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안디옥 교회는 당연히 수위권을 주장할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안디옥은 첫째인 때가 있었다고 그들은 인정하지만 베드로가 그곳을 떠나서 로마로 이주함으로써 그 영예까지도 옮겨 온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교황 마르켈루스가 안디옥 장로들에게 보냈다는 편지가 남아 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다.

"베드로의 감독좌는 처음에 당신들과 함께 있었습니다만 후에 주의 말씀에 따라 이곳으로 감독좌를 옮겼습니다. 이와 같이 첫째인 때도 있었던 안디옥 교회는 로마 감독좌에 양보했습니다" 그러나 묻노니, 저 어진 사람이 주께서 그런 명령을 하셨다는 것을 하나님의 어떤 말씀에서 계시를 받았는가? 이 문제를 법적으로 결정해야 한다면, 그들은 이 특권이 인적인 것인지 또는 물적인 것인지 아니면 혼합된 것인지를 대답해야 한다. 이 세 가지 중의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그것은 인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그 특권은 장소에 소속된 것이 아니다. 만일 물적인 것이라면 일단 한 장소에 준 다음에는 사람이 죽거나 떠나거나 하더라도 그 장소에서 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혼합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얼다. 그러나 그런 때에는 장소만을 고려할 수 없고 해당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들이 어떤 대답을 택하든 간에 로마는 결코 자기의 수위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곧 또 쉽게 추론하며 증명할 것이다.

 

13. 다른 총감독들의 서열

 

그들이 상상하는 대로 수위권이 안디옥으로부터 로마로 이전되었다 고 가정하자. 그러면 왜 안디옥은 둘째 자리를 유지하지 못했는가? 베드로가 죽을 때까지 로마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가 수위권을 차지한다면 둘째 자리는 그가 처음에 감독좌를 설치했던 곳에 줘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면 어떻게 알렉산드리아가 안디옥보다 우선권을 가지게 되었는가? 일개 제자에 불과한 사람의 교회가 베드로의 감독좌보다 더 높았다는 것이 어떻게 합당한 일인가? 각 교회의 영예가 그 설립자의 위엄에 따라서 결정된다면 나머지 교회들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바울은 세 제자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의 이름을 말하고 이 사람들은 기둥과 같다고 한다(2:9). 만일 베드로에 대한 경의로 로마 교황청에 첫 자리를 배정한다면 요한과 야고보가 살았던 에베소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들은 당연히 둘째 자리와 셋째 자리를 받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고대 총감독좌 가운데서 예루살렘은 맨 끝자리를 차지했었고 에베소는 맨 끝 구석 자리에도 붙을 수 없었다. 바울이 세운 교회들과 다른 사도들이 주관한 교회들과 그 밖의 교회들은 서열에서 전연 무시되었다. 제자에 불과했던 마가의 감독좌는 영예를 받았다. 그들은 저 순서는 상하가 바뀐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각 교회의 영예의 정도는 그 설립자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원칙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고 고백해야 한다.

 

(바울이 로마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나 베드로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14-15)

 

14. 베드로의 로마 체류에 대해서

 

그리나 나는 베드로가 로마에 있는 교회를 주관했다는 그들의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를 알 수 없다. 유세비우스가 베드로는 로마교회를 25년간 다스렸다고 한 것은 쉽게 논박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1장과 2장을 보면,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약 20년 동안 예루살렘에 있었고(1:18, 2:1이하) 그 후에 안디옥에 온 것이 분명하다(2: 11). 여기서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레고리우스는 7, 유세비우스는 25년이라고 계산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베드로를 죽였다고 그들이 말하는 네로의 통치 끝까지는, 37년밖에 되지 않는다. 주께서 수난을 당하신 것은 티베리우스의 재위 제 18년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말대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있었던 20년을 감한다면 겨우 17년이 남고 이것을 두 감독구에 나눠야 한다. 만일 그가 안디옥에 오래 머물렀다면 로마에는 잠깐 있었을 것이다. 이 점은 보다 명백하게 설명할 수 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로마서를 썼고(15:25) 예루살렘에서 잡혀 로마로 호송되었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그가 로마에 도착하기 4년 전에 썼을 가능성이 있다. 이때에 베드로가 로마 교회를 주관하고 있었다면 그의 이름을 빠뜨렸을 리가 없는데 로마서에는 그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리고 끝으로, 바울이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며 아는 사람은 모두 말하는데(16:3-16) 베드로에 대해서는 전혀 말이 없다. 건전한 판단력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점에 대해서 길고 난해한 증명을 할 필요가 없다. 일 자체와 로마서의 논법 전체가, 베드로가 로마에 있었다면 그를 무시했을 리가 없다고 높이 외친다.

 

15. 빈약하고 막연한 증거

 

그 후에 바울은 한 죄수로서 로마에 호송되어 왔다(28:16). 누가는 그가 교우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말한다(28:15). 베드로에 대해서 누가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로마에서 바울은 여러교회에 편지를 썼다. 어떤 편지에서는 교우들의 이름으로 문안을 보냈다. 그러나 베드로가 그 때에 거기 있다는 말은 한 마디도 없다. 만일 베드로가 있었다면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뿐 아니라 빌립보서를 보면 그의 곁에는 디모데 같이 주의 일을 충실하게 돌보는 사람이 없다고 하며 모두 자기 일만을 생각한다고 불만을 말한다(2:20- 21). 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그가 처음 변명했을 때에 아무도 곁에 없었고 모두 그를 버렸다고 더욱 심하게 불만을 말한다(딤수 4:16). 그러므로 그 때에 베드로는 어디 있었는가? 그가 로마에 있었다고 그들이 말한다면 그가 복음을 버렸다고 바울의 비난을 받는 것은 얼마나 큰 수치인가? 바울은 여기서 신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는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고 부언했기 때문이다(딤후 4:16). 그러면 베드로는 얼마나 오랫동안 또 언제 로마의 감독좌를 차지하고 있었는가? 적어도 그는 죽을 때까지 그곳 교회를 주관했다고 하는 점에서 저술가들의 의견이 일치한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대답한다. 그 저술가들은 누가 베드로의 후임이었느냐 하는 점에서 의견이 다르다. 혹은 리누스라 하며 혹은 클레멘트라고도 한다. 또 그들은 베드로와 마술사 시몬이 논쟁했다는 어리석은 이야기를 많이 한다. 어거스틴도 미신에 대해서 논할 때에, 베드로가 마술사 시몬을 이긴 날에 금식을 하지 않는 로마의 습관은 경솔한 의견에서 생긴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끝으로, 그 당시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의견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덮어놓고 기록을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저술가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것을 보아서 베드로가 로마에서 죽었다는 생각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그곳 감독이었다는 것, 특히 오랫동안 감독이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다. 또 이 문제에 내가 시간을 많이 할애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베드로의 사도직은 유대인을 위한 것인 반면에 그의 사도직은 우리 이방인을 위한 것이라고(2:7-8) 바울이 확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서로 언약한 협력 관계가(2:9) 우리 사이에서 유효하기 위해서, 아니 성령께서 하신 임명이 우리 사이에서 확고하게 유지되기 위해서 우리는 베드로의 사도직보다도 바울의 사도직에 더욱 유의하는 것이 마땅하다. 참으로 성령께서는 그들의 책임을 나누셔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바울은 우리들에게 보내셨다. , 이제 카톨릭 교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어느 곳에서 그들의 수위권을 찾도록 하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근거는 지극히 빈약하다.

 

(로마 교회에 대한 존경은 하나로 통합하는 머리였기 때문이 아니다. 16-17)

 

16. 로마 교회가 가장 초기에 가졌던 중요성

 

우리의 논적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옹호를 받지 못하는 것과 같이 고대 교회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이제부터 고대 교회를 살펴보겠다. 그들은 한 공리처럼 자랑하는 것이 있다. , 교회의 단결을 유지할 수 있으려면 땅 위에 최고의 머리가 있어서 모든 지체가 그 머리에 복종해야 하며, 따라서 주께서는 수위권을 베드로에게 주셨고 다음에는 계승권에 의해서 로마 교황청에 주셨으며 세상 끝까지 거기에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생각을 자랑할 때에 이 관습은 맨 처음부터 항상 지킨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가지 증거들을 악의로 왜곡하기 때문에 나는 우선 다음과 같이 말하려 한다. , 로마의 교회에 대해서 고대 저술가들이 큰 경의를 표명하며 경건하게 언급한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된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베드로의 전도로 로마의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생각이 어디서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당시에는 유력했기 때문에 이 생각이 로마 교회에 호감과 권위가 돌아가게 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므로 서방에서는 로마 교회를 존경하는 뜻으로 "사도의 교구"라고 불렀다.

둘째, 로마는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아마도 그곳 사람들은 교리와 지혜와 수완과 풍부한 경험 등에서 다른 곳 사람들보다 훌륭했을 것이다. 이 사실을 잘 참작해서 로마 시의 명예와 하나님에게서 받은 더 훌륭한 재능들이 멸시를 당하지 않도록 했다.

셋째, 동방과 희랍과 아프리카에서까지도 교회들이 의견 차이로 많이 흔들렸을 때 로마는 그들보다 고요했고 문제가 적었다. 그래서 지위를 빼앗긴 경건하고 거룩한 감독들이 로마에 가서 피난처를 얻은 예가 많다. 서방 사람들은 아시아나 아프리카 사람들보다 두뇌가 예민하지 못하고 느린 편이었기 때문에 새것에 끌리는 점도 적었다. 저 불안한 시대의 다른 교회들보다 로마 교회가 문제가 적었고, 한번 받은 교리를 더욱 굳게 지켰다는 사실은 그 권위를 많이 높였다. 우리는 이 점을 좀더 설명하겠다. 이 세 가지 이유로, 나는 고대 저술가들의 증언에서 로마 교회는 적지 않은 존경과 칭찬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17. 초대 교회의 생각으로는 교회의 연합을 위해서 보편적 감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점을 근거로 삼아서 우리의 논적들이 다른 교회들에 대한 수위권과 최고 권력을 로마에 주고자 한다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은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을 밝히기 위해서 나는 먼저 그들이 그렇게 역설하는 연합에 대해서 고대 저술가들은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간단히 보여주고자 한다. 네포티아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롬은 연합의 여러 가지 예를 말한 후에 끝으로 교회의 성직 계급 제도를 언급한다. 각 교회에는 그 자체의 감독과 수석 장로와 부감독이 있으며 교회의 질서는 모두 그 치리자들에 달렸다고 그는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그는 로마 교회의 장로인데 그는 교회 질서에서 연합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왜 그는 한 머리가 모든 교회를 연합시키는 유대라고 말하지 않는가? 당면한 논증에 이보다 더 큰 도움은 없었을 것이다. 그가 잊어버리고 빠뜨린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만 허락한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이것을 기꺼이 썼을 것이다. 그러므로 연합의 진정한 기초는 키프리아누스가 뛰어난 말로 묘사한 것임을 제롬은 알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키프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감독직은 하나요, '전체'의 한 부분을 각 감독이 차지한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요, 결실이 늘어남에 따라 교회는 많은 수로 널리 퍼져 나간다. 태양의 광선은 많으나 빛은 하나이며, 나무에 가지는 많으나 굳센 줄기 하나가 땅 속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있으며, 한 샘에서 많은 시내가 흘러 각각 자체의 풍부한 데서 넘쳐흐르는 것 같지만 근원은 하나이고 갈라지지 않은 것처럼 교회도 주의 빛을 풍부하게 받아 많은 광선을 온 세상에 발한다. 그러나 하나의 빛이 각처에 확산되는 것이다. 몸의 연합은 깨뜨려지지 않고 교회의 가지들은 온 지구 위에 뻗어 나가며 넘치는 시내들을 쏟아 보낸다. 그러나 머리와 근원은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음녀가 될 수 없다. 그는 하나의 집을 알며 정절과 정숙으로 결혼의 신성함을 지킨다." 이 말들에서 키프리아누스는 그리스도만이 교회 전체를 거느리는 보편적 감독이라고 한다. 이 머리 아래에서 감독직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이 전체의 부분들을 차지한다고 한다. 완전한 감독직이 그리스도의 수중에만 있고 각 감독은 그 일부분을 가진다면 로마 교황청의 수위권은 어디 있는가?

이런 말들을 인용한 목적은 카톨릭 교도들이 일반적으로 인정을 받고 의심을 받지 않는다는 원리, , 지상의 한 머리 아래에서 성직 계급 제도의 통일이 된다는 생각을 고대 교부들이 전연 몰랐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알리려는 것이다.

 

반응형

'신학...공부 > 존칼빈 기독교강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강요 : 4권. 8장  (0) 2017.06.01
기독교강요 : 4권. 7장  (0) 2017.06.01
기독교강요 : 4권. 5장  (0) 2017.06.01
기독교강요 : 4권. 4장  (0) 2017.06.01
기독교강요 : 4권. 3장  (0) 2017.06.01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