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기독교강요 : 4권. 8장

본문

반응형

8 장 신조에 대한 교회의 권위 : 교황 제도 하에서 교회 임의로 교리의 순수성을 완전히 더럽혔다

 

(교회의 권한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제한된다. 1-9)

 

1. 교리에 관한 교회의 권위 : 그 임무와 한계

 

이제부터 제 3 , , 교회의 권한에 대해서 논하겠다. 교회의 권한의 일부는 개개인의 감독들에게 속하고 일부는 지방 회의에 또는 총회의에 속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영적 권위이며 이것이 교회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권한이다. 그리고 이 권한은 교리에 대한 권한과 재판권 그리고 입법에 대한 권한으로 나뉜다. 교리 방면에는 신조를 제정하는 권한과 신조를 설명하는 두 부분의 권한이 있다.

자세한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교회의 권한에 대한 주장을 들을 때에 그 권한을 주신 목적에 대해서 바울이 한 말을 기억하라고 경건한 독자들에게 경고하고자 한다. 권세를 주신 것은 파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고후 10:8, 13:10). 이 권한을 합당하게 행사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그리스도의 종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의 종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의 종이라고 생각한다(고전 4:1). 그런데 교회를 세우는 유일한 방법은 사역자들이 그리스도께서 그 권위를 유지하실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않아야 한다. , 그뿐만이 교회의 선생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아니고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저의 말을 들으라"고 성경이 말했기 때문이다(17: 5).

그러므로 교회의 권한은 마지못해 억지로 행사할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한도를 지켜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의 변덕에 끌려 이리저리 탈선하는 일이 없게 된다. 그래서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이 권한을 어떻게 묘사했는가를 고찰하는 것이 특히 유익한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권한을 허락한다면 곧 독제로 타락할 것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며, 이 전제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멀리 추방되어야 한다.

 

2. 교리에 관한 모세와 제사장들의 권위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서 성령이 권위와 위엄을 제사장이나 예언자나 사도들의 사도나 후계자들에게 주실 때에 개인에게 주시지 않고 그들이 임명되는 그 직분에 주셨다는 것을 여기서 기억해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그들이 선포하도록 위탁을 받은 그 말씀에 주신 것이다. 그들 모두를 차례로 검토해 보면 그들은 주의 이름과 주의 말씀에 따라서만 가르치며 대답하는 권위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직분을 맡도록 부르심을 받을 때에는 동시에 자기의 것을 모두 버리고 오직 주의 입에서만 나오는 말씀만 말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리고 주께서는 그들을 백성 앞에 내세워 말을 선포하기 전에 반드시 그들이 할 말을 가르치신다. 그들은 주의 말씀 외의 어느 것도 말해서는 안 된다.

예언자들 중에서도 으뜸가는 예언자인 모세의 말을 다른 예언자들의 말 이상으로 들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는 미리 명령을 받았으며 주께서 받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선포할 수 없었다(3:4이하). 그러므로 백성이 그의 교훈을 받아들이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고 한다.(14:31).

제사장들의 권위도 멸시를 받지 않도록 가장 엄중한 벌칙을 첨부해서 마련하셨다(17:9-13). 그러나 그와 동시에, 주께서는 레위와 언약을 세워 그의 입에 진리의 법이 있게 하셨다고(2:4,6) 말씀하심으로써 어떤 조건하에서 제사장들의 말을 들을 것이냐 하는 점을 밝히신다. "대저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어늘"(2:7). 그러므로 제사장이 자기의 말을 사람들이 듣기를 원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자인 것을 보여야 한다. , 주에게서 받은 명령을 충실히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듣는 편에서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 대답해야 한다고 명백하게 규정되었다(17:10-11).

 

3. 교리에 관한 예언자들의 권위

 

예언자의 권한에 대해서 그 일반적 특징을 아주 적절하게 묘사한 말씀이 에스겔서에 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3:17). 주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으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은 자기의 말을 만들어 내지 말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는가? 주에게서 주신 소식을 전한다는 것은 말씀이라고 감히 확신있게 자랑하듯 말한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똑같은 생각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23:28). 그는 확실히 모든 선지자들이 지켜야 할 법을 말한다. 그뿐 아니라, 그 법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명령하신 것에 그 무엇을 덧붙여 가르치는 것을 아무에게도 허락하지 않으신다. 하나님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면 모두 ""라고 하신다(23:2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지 않으면 어떤 예언자도 입을 열지 못했다. 예언서에 "여호와의 말씀", "여호와의 경고", "여호와의 말씀에",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등의 표현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또 그것은 당연하다. 이사야는 자기의 입술이 부정하다고 한탄했고(6:5) 예레미야는 자기는 아이가 되어 말할 줄을 모른다고 자백했다(1:6). 이사야와 예레미야가 자기 생각으로 말을 한다면 더러운 입과 미련한 말 외에 무엇이 나오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성령의 도구가 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입술은 거룩했고 순결했다. 예언자들이 자기가 받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는 이 경외심의 구속을 받을 때 그들은 비상한 권능과 훌륭한 이름으로 장식되었다. 주께서는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를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고(1:10), 주께서 주의 말씀을 그 입에 두셨기 때문이라고(1:9) 즉시 그 이유를 첨가하셨다.

 

4. 교리에 관한 사도들의 권위

 

사도들을 보면 참으로 훌륭한 칭호를 많이 받았다. 그들은 "세상의 빛"이요 "세상의 소금"이다(5:13-14).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하며(10:16) 그들이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라(16:19, 18:18, 20:23 참조)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을 보면 그들이 그 직분에서 얼마만큼 허락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 그들은 "사도"이므로, 마음대로 지껄일 것이 아니라 보내신 이의 명령만을 충실하게 전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사명을 정하신 말씀은 분명하다. , 그가 명령하신 모든 것을 천하 만민에게 가서 가르치라고 명령하셨다(28:19-20). 그러나 그 자신도 이 법칙을 받으셨고 자신에게 적용하면서, 누구든지 이 법칙을 거절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하셨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 , 아버지의 것이라고 하신다(7:16).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유일하고 영원하신 교사였고 아버지께서는 그를 만물의 주로 임명하셨다. 그러나 그는 가르치는 일을 하셨기 때문에, 이 모범에 의하여 모든 일꾼들이 가르칠 때에 따라야 할 법칙을 명하셨다. 그러므로 교회의 권한은 무한한 것이 아니며 주의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 이를테면 주의 말씀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5. 계시의 단일성과 다양성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에게서 배우지 않은 것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이 원칙이 처음부터 교회를 지배했고 또 지금도 지배해야 하지만 그들은 시대가 다름에 따라 배우는 방법도 다르다. 현재의 질서는 이전에 있던 것과는 매우 다르다.

우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11:27)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옳다면,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항상 저 영원한 지혜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아버지의 비밀을 홀로 계시 받으신 분에게서 배우지 않고서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의 신비를 마음으로 이해하거나 입으로 발표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옛날 거룩한 분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거울로 삼아 그의 안에서 하나님을 봄으로써 하나님을 알았다(고후 3:18 참조).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유일한 지혜와 빛과 진리이신 아들을 통하시지 않고는 어떤 방법으로도 사람들에게 자기를 계시하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아담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 밖의 사람들이 하늘 교훈에 대해서 얻은 것은 모두 이 원천에서 마신 것이다. 예언자들이 발표한 하늘의 말씀도 모두 꼭 같은 원천에서 퍼낸 것이다.

이 지혜는 항상 한 가지 방법으로만 자기를 나타내신 것은 아니다. 옛 족장들에게 대해서 하나님께서는2a)비밀한 계시를 사용하셨고, 동시에 그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이적을 첨가하셔서 그들에게 말하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의심할 수 없도록 만드셨다. 족장들은 받은 것을 후손에게 물려주었다. 주께서 그들이 그와 같이 전한다는 조건으로 그들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자녀들과 그 자녀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들을 때에 그것이 땅에서 오지 않고 하늘에서 왔다는 것을 알았다.

 

6.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말씀의 성경적인 기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교회를 세우기를 기뻐하셔서, 말씀을 글로 기록하게 하시고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가르칠 교훈을 거기서 얻도록 하고 가르치는 교리가 모두 그 표준에 일치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율법이 선포된 후에, 제사장들은 "주의 입에서" 말씀을 얻어 백성을 가르치라는 명령을 받았다(2:7).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율법에 포함시키신 교리에 없는 이질적인 것은 결코 가르치지 말라는 뜻이다. 참으로 율법에 가감을 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하셨다(4:2, 13:1).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율법에 새로운 말씀을 첨가하셨는데, 그것은 전혀 새로운 말씀이 아니고 율법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예언자들이 가르친 교리는 율법에 대한 해석에 불과했으며, 앞일을 폭언한 것을 제하면 새로 첨가한 것은 없었다. 예언을 제하면 그들은 율법을 순수하게 설명했을 뿐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약한 양심들이 만족할 만한 더 분명하고 더 풍부한 교훈을 나타내시고자, 예언들도 기록하여 말씀의 일부로 간주하도록 명령하셨다. 동시에 역시 예언자들이 성령의 말씀을 받아 기록한 역사를 말씀에 첨가하셨다. 나는 시편도, 예언서에 포함시키는데, 이는 우리가 예언서에 돌리는 것이 시편에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과 역사들로 구성된 문서는 그 전체가 고대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교사들과 제사장들은 그리스도에서 오시기까지 이 표준에 일치한 교훈만을 가르쳐야 했다. 그들의 직책은 하나님의 입에서 받은 말씀으로 백성에게 대답하는 것뿐이었으므로 그들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것은 불법이었다(5:32). 이것은 말라기에 있는 유명한 구절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복음이 선포되는 날까지 율법을 기억하며 존중하라고 명령하신다(4:4). 이와 같이, 주께서는 그들을 이상한 교리로부터 보호하시며 모세가 그들에게 충실하게 보여준 일에서 추호도 떠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다. 다윗이 율법의 우수성을 웅변적으로 선언하고 또 여러 가지 율법을 찬양한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19:7이하). , 모든 완전성이 율법에 내포되어 있으므로 유대 사람들은 다른 것을 갈망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7.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그러나 드디어 하나님의 지혜가 육신으로 나타나셨을 때, 그는 하늘 아버지에 대해서 사람의 마음이 이해할 수 있는 일과 심사숙고해야 할 일을 모두 우리에게 밝히 말씀하셨다. 전에는 희미한 빛이 있었을 뿐이나 이제 의의 태양을 비추셨으므로 지금 우리에게는 정오의 밝은 빛과 같은 하나님의 진리의 완전한 빛이 있다. 참으로, 사도가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1:1-2) 했을 때 그는 평범한 말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 곧 그가 명백하게 선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말씀하시는 방법이 이전과는 다를 것이라는 것이다. 간혹 이 사람 저 사람을 통해서 또는 예언에 예언을, 계시에 계시를 첨가하면서 말씀하시려 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가르치는 활동을 그 아들 안에서 성취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일을 하나님에게서 나온 궁극적이고 영원한 증거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선포와 더불어 우리에게 나타나신 때로부터 심판에 이르기까지의 신약 시대를 전체적으로 "마지막 때"(요일 2:18), "이 말세"(딤전 4:1, 벧전 1:20),"말세"(2:17, 딤후 3:1, 벧후 3:3)라고 부른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훈 꼭 완전성을 만족하게 생각함으로써 그 이상의 것을 스스로 만들어 내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이 조작한 것을 인정하지도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특별한 특권으로 아들을 우리의 교사로 임명하시고 그의 말씀만을 들으라고 명령하신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참으로 아버지께서는 "저의 말을 들으라"(17:5) 간단한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교사로 추천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에는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무게와 힘이 있다. 그것은 우리를 모든 사람들의 교리에서 끌어내어 아들에게만 데려가시며, 구원에 대한 모든 교훈을 오직 아들에게서만 구하고 그분만을 의지하며 그분에게 붙어 떨어지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것과 같다. 요컨대(그 말씀에 있는 것과 같이) 아들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라는 뜻이다. 또 생명의 말씀이 자신을 우리에게 친밀하고 명백하게 계시하셨은 즉, 우리는 무엇을 사람에게서 기대하고 또 바랄 것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말씀하셨으니 사람은 모두 입을 다물어야 한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아들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감추어 두셨으며(2:3), 참으로 아들께서는 하나님의 지혜와(완전무결한 지혜, 요일 19:23), 메시아에(만사를 계시하리라고 기대된, 4:25) 합당한 말씀을 하셨다. ,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뒤에 다른 사람들이 할 말을 전혀 남겨두시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8.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것을 가르칠 권한을 사도들은 받았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원칙을 확고하게 지켜야 한다. , 우선은 율법과 예언서에 다음에는 사도들의 글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거나 교회 내에서 자리를 내줘서는 안되며, 교회 안에서 인정된 교수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지시와 표준을 따르는 것뿐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들에게 허락된 것은 옛날 예언서들에 있는 것뿐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도들은 고대에 기록된 성경을 해설하며 또 거기서 가르친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명을 받았다. 그러나 이 일을 할 때에도 주의 지도를 받아야 했으니, 곧 그리스도의 영이 선도자가 되어 그들이 할 말을 어느 정도 불러 주신 것이다. 그들이 생각 없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것을 가르치라고 사도들에게 명령하셨을 때에(28:19-20)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조건으로 그들의 사명을 제한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곳에서 더욱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곧 그리스도니라"(23:8,10). 그 다음에, 그들의 마음에 더 깊은 인상을 주시기 위해서 같은 곳에서 같은 말씀을 두 번 되풀이하신다(23:9-10). 그리고 그들이 무지해서 주의 입에서 듣고 배운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진리와 영을 그들에게 약속하시며 모든 일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그들을 인도하게 하셨다(16:13). 그리스도께서 입으로 가르치신 것을 제자들에게 생각나게 하는 일을 성령에게 맡기셨으니(14:26) 우리는 이 한계에 깊이 주의해야 한다.

 

9. 사도들도 말씀을 능가할 자유가 없었다 : 그들의 후계자들은 더욱 없었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주님에게서 잘 배운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교리를 그대로 전달하는 것 이외의 일을 자기와 다른 사람들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라"고 그는 말한다(벧전 4:11). , 양심에 가책을 받는 사람들처럼 주저하거나 떨면서 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확실한 명령을 받은 종답게 굳은 신념을 가지고 말하라는 것이다. 이것은(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든) 사람이 생각해 낸 것을 전적으로 배척하고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신자들의 교회에서 가르치며 배우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은 그 지위 여하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의 규정이나 그들의 조작물을 제거함으로써 하나님의 명령만이 효력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은 "견고한 성이라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강한 무기", , 영적 무기이며, 하나님의 충실한 병사들은 이 무기로 "모든 전략을 파괴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한다(고후 10:4-5). 이제, 여기에 교회의 목사들이(이름은 무엇이든 간에) 받아야 할 최고의 권한이 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모든 일을 담대하게 할 수 있으며, 모든 세상 권력과 영광과 지혜와 교만을 굴복시켜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의 힘을 받아 가장 높은 자로부터 가장 낮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명령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가족을 세우고 사탄의 가족을 넘어뜨릴 수 있으며, 양들을 먹이고 이리들을 쫓아낼 수 있고, 배우고자 하는 자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며 또 반항하며 완고한 자들을 나무라고 책망하며 굴복시킬 수 있고, 매기도 하고 풀 수도 있다. 끝으로, 필요한 때에는 청천벽력과 번갯불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사도들은 성령의 말씀을 틀림없이 받아썼고 따라서 그들의 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후계자들은 성경에 봉인돼 있는 것을 가르치는 직분만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실한 사역자들을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서는 안되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복종하도록 하신 그 교리를 단단히 붙잡아야 할뿐이라고 가르친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개인과 교회 전체에 허락된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개인에 관해서는, 주께서 바울을 고린도 교회 신자들의 사도로 임명하신 것이 확실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믿음을 지배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고후 1:24). 바울에게도 지배할 권한이 없다고 그가 말했는데 누가 감히 그런 권한이 있다고 주장할 것인가? 목자에게는 그가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신자들이 의심 없이 믿으며 지지하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하는 방자한 태도를 바울이 인정했다면, 그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두세 사람이 예언할 때에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고 하는(고전 14:29-30) 규정을 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아무도 남겨 두지 않고 모든 사람의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의 판단에 굴복시켰다.

그러나 보편 교회의 문제는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의 대답은, 바울은 이런 의문을 예상하고 다음 구절에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 이렇게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존한다면,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며 거기서만 단식을 얻는다면, 온 세계가 하는 말을 위해서 어떤 자리가 남아 있을까? 믿음이 무엇인가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믿음은 사탄과 지옥의 모든 간계와 전세계에 대항했을 때 굴복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을 만큼 굳게 설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견고성은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유의해야 할 보편적 법칙이 있다. 곧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서 새로운 교리를 제창할 능력을 박탈하시는데 이는 거짓말이나 속이는 말을 하실 수 없는 진실하신 하나님만이(3:4) 영적 교리에 있어서 우리의 선생이 되고자 하신다는 것이다. 이 법칙은 개개의 신자들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에 대해서 또 적용된다.

 

(말씀에 의거하지 않은 교리적 무과실성을 주장하는 것은 불가하다. 10-16)

 

10. 카톨릭 교회의 주장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교회의 권한과 과거 수백 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스스로 감독과 종교 지도자로 사칭한 저 영적인 폭군들의 권한을 비교한다면, 거기에는 그리스도와 벨리알(Belial) 사이에 있는 것과 같은 차이가 있다(고후 6:15). 나는 그들이 어떻게 또 어떤 부끄러운 방법으로 압제했는가를 설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 단지 그들의 교리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들은 지금 그들의 교리를 우선은 문서로 옹호하고 다음에는 칼과 불로 지지한다.

그들은 전체 회의가 교회의 진정한 현상이라고 하는 생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 원칙을 용인한 다음에, 그들은 곧 이런 회의들은 성령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으며 따라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서슴지 않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이 회의들을 지배하고 구성하는 것은 이런 사람들이므로, 그들은 실질적으로는 전체 회의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것을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결정에 의해서 우리의 믿음의 성패가 결정된다고 본다. 그래서 그들이 어느 쪽으로 결정하든지 그것은 우리들의 믿음에 굳게 확립되며 그들이 시인한 것이 우리에게 아무 의심 없이 시인되고 그들이 정죄한 것은 우리에게도 정죄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자기들의 기분에 따라 교리를 만들어 내며, 후에 이 표준에 따라 신조를 믿으라고 요구한다. 그들이 긍정하든 아니면 부정하든 그들의 모든 교리에 확고하게 찬성하지 않는 사람을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지적인 신앙이 아니면 적어도 맹신으로 찬동하라고 한다. 이것은 새로운 신조를 만들어 낼 권한이 교회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11. 교회 내에 그리스도가 계실지라도 교회는 여전히 말씀에 매여 있다

 

우선 그들이 어떤 이론으로 교회가 이 권위를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가를 듣기로 하자. 그 다음에 그들이 교회에 대해서 주장하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보겠다.

그들은, 교회는 결코 그 남편인 그리스도에게서 버림을 받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를 받을 것이라는(16:13 참조) 훌륭한 약속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상습적으로 말하는 그 약속 중에는 교회 전체를 상대하는 동시에 신자 개인들을 상대로 한 것이 많다. 그리스도께서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14:26-17) 열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약속은 사도를 전부에게 하신 것인 동시에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하신 것이며 또 그리스도께서 이미 받아들이신 제자들 뿐 아니라 앞으로 가입될 다른 제자들에게까지도 하신 약속이다. 그러나 그들은 큰 위로가 가득한 이런 약속을 신자 개인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만 주신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것은 신자들에게 확신과 용기를 주어 근원에서 모든 신자들을 끊어버릴 뿐이 아닌가? 나는 신자들의 공동체가 각양각색의 은혜를 받으며, 전체적으로 볼 때 신자 개인에 비해서 하늘 지혜를 더 완전하고 풍부하게 받았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또 모든 신자에게 공통적으로 약속하셨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지혜와 총명의 영을(11:2 참조) 평등하게 받았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성경의 말씀을 왜곡해서 그들의 악한 입장을 옹호하기 위한 이질적인 의미로 정화시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것을 말하지 않고, 주께서는 항상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시며 그의 영으로 그들을 지배하신다는 참된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이 영은 오류와 무지와 허위와 암흑의 영이 아니라 확실한 계시와 지혜와 진리와 광명의 영이시며, 이 영에게서 그들은 그 받은 것에 대한 진상을 배우게 된다(고전 2:12). 곧 그들이 받은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하나님의 기업의 풍성이 무엇인지를(1:18) 배우게 된다. 그러나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까지도 육신으로 살 동안에는 성령의 처음 열매를 받으며 그것을 약간 맛볼 뿐이다.(8:23) 따라서 그들은 자기의 무력을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정한 한도 내에 신중하게 머무를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만일 제멋대로 멀리 방황한다면 진리와 허위의 구별을 가르쳐 주시는 유일한 교사인 성령이 그들 안에 계시지 않겠기에, 바른 길을 완전히 떠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신자가 바울과 함께 자기들을 아직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3:12). 그러므로 그들은 완전하다고 자랑하지 않고 매일 전진하려고 노력을 계속한다.

 

12. 교회는 무오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한 성도에게 부분적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면 교회 자체에는 완전히 속한다고 항의할 것이다. 이런 주장에는 진리가 있는 듯 하지만 나는 그것이 옳은 주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각 지체의 분량에 따라 성령의 은사를 나눠주시므로(4:7), 그 은사들을 종합하면 교회 전체로서는 중요한 은사가 하나도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교회는 우리의 논적들이 자랑하는 것과 같은 완전무결하게 풍성한 상태와는 항상 거리가 멀다. 이것은 교회가 어떤 점에서나 부족하여 그 가진 것이 불충분하다는 뜻이 아니다. 교회에 필요한 것은 주께서는 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교회가 겸손하고 경건한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지도록 하시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이상은 교회에 주시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여기에 대해서 통상적으로 반대하는 말을 알고 있다. 주께서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하셨으며(5:26-27), 따라서 다른 곳에서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딤전 3:15) 부른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앞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성취하신 일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매일 교회 내에서 하시는 일을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 매일 그의 모든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며 깨끗하게 씻기시고 닦으시며 그 얼룩을 씻어 버리신다면, 분명히 그들에게는 아직도 결점과 오점이 있으며 성화에 어떤 결함이 있는 것이다. 교회의 모든 신자가 흠이 있으며 불결한 점이 있는데 교회가 모든 점에서 완전히 거룩하며 흠이 없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 이야기인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성결하게 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성화의 시초가 보일 뿐이며, 그 최종적인 완성은 지성소이신(9-10)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 거룩하심으로 교회를 완전히 충만하게 하실 때에 나타날 것이다. 교회의 티와 주름 잡힌 것이 씻겨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매일 계속되는 과정이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든 남은 것을 완전히 제거하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만일 이 해석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펠라기우스파와 함께, 신자들의 의는 이 세상에서 완성된다고 주장해야 될 것이다. 또 가타리파나 도나투스파와 함께, 교회 안에 있는 약점을 일체 용서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둘째 구절은, 이미 다른 곳에서 본 바와 같이 그들이 말하는 것과는 전혀 그 뜻이 다르다. 바울은 디모데를 진정한 감독이 되도록 가르치고 훈련시킨 다음에, 그렇게 한 목적은 디모데로 하여금 교회에서 처신하는 법을 알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디모데가 이 일을 위해서 더욱 경건한 열설을 내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은 교회 자체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첨가한다(딤전 3:15).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에 의해서 교회 안에 보존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가르친다. "그가 혹은 사도로……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4:11),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4:14) 또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4:13) 그러므로 진리는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안전하게 보존되어 있는데 그것은 교회가 진리를 충실히 보관하기 때문이며 교회의 활동과 직무에 의해서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의 보관이 이와 같이 예언자적 및 사도적 직무에 있다면, 진리의 보존은 주의 말씀이 순수하게 또 충실하게 보존되느냐 보존되지 않느냐 하는 데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13. 말씀과 성령은 분리될 수 없다

 

이 문제의 핵심은 독자들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나는 논적들이 요구하는 것과 우리가 반대하는 점을 간단히 설명하겠다. 교회는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그들의 발언이 이 점에 관련되어 있고, 그들은 그 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교회는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으므로 말씀이 없어도 안전하게 전진할 수 있고 어디를 가더라도 교회는 진리만을 생각하며 말할 수 있으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 또는 그 말씀과 별도로 무슨 일을 제정하더라도 이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구원을 위해 필요한 일에 있어서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하는 처음 말한 점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모든 자기의 지혜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경우에 한해서만 그 발언이 옳다고 하는 뜻이다. 따라서 그들과 우리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논적들은 교회의 권위를 하나님의 말씀 밖에 둔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의 권위는 말씀에 속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말씀에서 분리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 그리스도의 신부요 제자인 교회가 그 남편과 선생에게 복종해서 그의 말씀에 항상 깊이 유의한다는 것은 이상한일이 아니다. 바르게 정돈된 가정에서는 아내가 남편의 권위에 순종하며, 질서가 잡힌 학교에서는 선생의 가르침만을 듣는다. 그러므로 교회도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며 자기 생각대로 무엇을 생각해 내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치신 곳을 자기의 지혜의 한계로 여겨야 한다.

이와 같이 교회는 자기의 이성이 고안해 낸 것을 일체 믿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말씀을 근거로 한 일에서는 어떤 불신이나 의심으로 흔들리지 않고 확신과 확고부동한일관성을 가질 수 있다. 또 교회는 그 받은 약속들을 전적으로 확신함으로써 신앙을 지탱하는 훌륭한 수단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교회는 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 가장 훌륭한 인도자인 성령이 자기와 항상 함께 계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성령으로부터 어떤 유익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기억할 것이다. 그는 "보혜사……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16:7),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말씀하신다(16:13)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는 "성령 그가……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겠기"때문 이라고(14:26)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그의 영에게서 기대할 것은 그가 가르치는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의 마음을 비춰주시는 것뿐이라고 언급하신다. 따라서 크리소스톰의 다음 말은 가장 적합하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자랑하지만, 자기 생각을 말하는 사람이 성령을 운운하는 것은 거짓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과 예언자를 따라 말씀하시기 때문에(12:50) 자의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신 것과 같이(12 :49, 14:10), 우리도 복음과는 관계없이 성령의 이름만으로 제시되는 것은 일체 믿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율법과 예언자의 완성이심과 같이(10:4), 성령은 복음의 완성이시다. 이것이 크리소스톰의 말이다.

이제 우리는 논적들이 성령을 자랑하는 것이 잘못인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없는 이상한 교리를 추천하기 위해서 성령의 이름을 사용할 뿐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끊을 수 없는 유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결합되기를 원하시며, 그리스도께서도 교회에 성령을 약속하실 때에 이 점을 확언하셨다. 이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주께서는 교회에 근신할 것을 명령하셨고(벧전 1:13, 4:7, 5:8, 기타 참조), 교회가 항상 이 신중한 태도를 계속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주의 말씀에 무엇을 가감하는 것은 금하셨다(4:2, 22:18-19 참조). 하나님과 성령이 주신 이 신성불가침의 명령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의 원수들은 말씀과는 별도로 성령이 교회를 지배하시는 것같이 말한다.

 

14. 전승은 성경보다 낮다

 

여기서 그들은 또 다시, 교회는 사도들의 글에 몇 가지를 첨가할 필요가 있었다느니, 사도들은 자신이 분명히 가르치지 못한 것을 차후에 말로 보충했다느니 하고 중얼거린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도 사도들에게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고 하셨다(16:12). 그들은 이것을 성경에는 없으나 관습에 의해서 받은 명령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파렴치한 일인가? 주께서 이 말씀을 들었을 때의 제자들은 아직 유치했고 거의 가르칠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의 교리를 문자로 기록했을 때에도 그들은 무지몽매해서 기록에 빠뜨린 것을 나중에 구전으로 보충할 필요가 있었다는 말인가? 그들이 진리의 영에 의해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받아(16:13) 글을 남긴 것이라고 하면, 그들이 복음의 교훈에 대한 완전하고 분명한 지식을 온통 기록에 남기지 못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러나 혹 우리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허락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기록된 것 이외에 어떤 것이 계시되었는지를 지적해야 한다. 그들이 감히 지적하려고 한다면 나는 어거스틴이 한 말을 내놓을 것이다. "주께서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는데 우리 가운데서 누가 감히 '이 일들이라, 저 일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감히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어떤 증거를 제공할 수 있는가?" 그러나, 말하자면 이자들이 헐뜯어 쓸모없게 만들려고 애쓰는 사도 문서에는 주께서 그때 사도들에게 약속하신 계시의 열매가 담겨 있다는 것을 어린 학생들도 다 알고 있는데 내가 왜 쓸데없는 일을 가지고 싸우는지 모르겠다.

 

15. 교회의 교리적 천명에는 모순이 있다

 

교회가 가르치는 것과 명령하는 것에 감히 반대하는 자는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18: 17)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셨는데 이것은 교회의 모든 교리와 명령은 논쟁할 필요가 없다고 하신 말씀이 아니냐고 그들은 말한다. 첫째도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교리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고 다만 교회가 책으로 죄악을 시정하는 권위를 주장하시며 충고와 책망을 받은 사람들은 교회의 판단에 항거하지 말라고 하실 뿐이다. 그러나 이 점을 말하지 않더라도 이 악한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몰염치하게 미친 듯이 날뛰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들의 최종적인 결론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만을 근거로 한 교회의 합의를 아무도 멸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사람들이 교회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누가 이것을 부인하는가? 귀를 기울이는 까닭은, 교회는 주의 말씀에 없는 말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지상의 것을 그들이 요구한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 말씀이 그들을 전연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회는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내어서는 안 된다. , 주의 말씀에 계시되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치며 주장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강경하게 주장한다고 해서 나를 논쟁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사람들에게 이런 권위를 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식자들은 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이 결정한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해야 된다고 말할 경우, 불경하고 사악한 무리의 궤변이 대대적으로 밀려들어오리란 것도 식자들은 안다.

게다가 그리스도께서는 당시의 사정에 따라 산헤드린 공회에 교회라는 이름을 주셨는데(5:22), 이것은 제자들이 후에 교회의 성회들을 공경할 줄 알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럴 경우에 각 도시와 각 촌락이 교리를 만들어 낼 동등한 권리를 가지게 될 것이다.

 

16. 반대자들의 예는 빈약하다

 

우리의 반대자들이 드는 예도 그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유아세례가 성경의 명령보다 교회의 결정에 의해서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유아세례를 옹호하기 위해서 교회의 권위에 피하지 않을 수 없다면 그것은 매우 가련한 피난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훨씬 다르다는 것을 다른 곳에서 충분하게 밝히겠다. 같은 식으로, 그들은 니케아 회의가 아들과 아버지는 한 본질이라고 선언한 것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항의한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들은 아리우스를 정죄한 교부들이 근거 없는 짓을 한 것같이 그들에 대해서 중대한 오해를 한다. 아리우스는 예언서와 사도 문서에 포함된 교훈 전체를 믿으라고 했지만 니케아 교부들이 하는 말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나는 "한 본질"이라는 말이 성경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성경에 한 하나님이 계시다는 주장이 자주 반복되며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하나인 참된 영원한 하나님이라고 자주 부르는 것을 볼 때에, 니케아 교부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한 본질이라고 선언한 것은 단순히 성경이 본래의 뜻을 설명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데오도레트가 기록한 바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는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서론으로 진술했다. 거룩한 문제들에 대한 토론에는 성령이 정하신 교훈이 있으며, 복음서와 사도 서신은 예언서와 함께 하나님의 뜻을24a)충분히 우리들에게 알려준다. 따라서 우리는 불화를 버리고 성령의 말씀에는 문제의 설명을 얻기로 하자 그때 이 거룩한 충고에 반대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교회가 자기의 것을 첨가할 수 있다고 항의하는 사람도 없었다. 성령은 사도들에게 모든 일을 계시하지 않았다든지, 적어도 사도들의 후계자들에게 모든 일을 말하지 않았다든지, 그밖에 이와 비슷한 항의를 하는 사람도 없었다. 우리의 논적들이 하는 생각이 바르다면 첫째,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의 권한을 빼앗는 악행을 했으며 둘째, 교회의 권한을 옹호하려고 일어선 감독들이 하나도 없었으니 그들의 이 침묵은 배신 행위였다. 그들은 이런 행동으로 교회의 권리를 팔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오도레트가 그들은 황제가 한 말을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말했기 때문에 이 새 교의를 당시 사람들은 전혀 몰랐던 것이 확실하다.

반응형

'신학...공부 > 존칼빈 기독교강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강요 : 4권. 10장  (0) 2017.06.01
기독교강요 : 4권. 9장  (0) 2017.06.01
기독교강요 : 4권. 7장  (0) 2017.06.01
기독교강요 : 4권 6장  (0) 2017.06.01
기독교강요 : 4권. 5장  (0) 2017.06.01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