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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 4권. 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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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장 카톨릭의 미사는 성만찬을 더럽힐 뿐 아니라 그것을 소멸하는 모독 행위이다

 

(미사는 모독적이며 성만찬을 말살한다. 1-7)

 

1. 로마 교회의 교리

 

사탄은 이런 여러 가지 간계로 그리스도의 성만찬을 짙은 어두움으로 덮어 희미하게 만들고 더럽히려고 애썼다-적어도 교회 내에 그 순수성이 유지되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마귀가 한 표징을 들어 올려 성만찬을 희미하게 하고 타락하게 만들 뿐 아니라 완전히 소멸해서 인류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만들려고 했을 때에 무서운 가증한 일은 극치의 절정에 달했다. 마귀가 극악한 오류로 거의 전세계의 눈을 멀게 한 때에 이 일이 있었는데, 곧 미사는 죄의 용서를 얻기 위한 제물과 예물이라는 신념을 그가 퍼뜨린 것이다.

나는 비교적 건전한 스콜라 학파들이 처음에 이 교리를 어떻게 용인하였는가를 묻고자 하지 않는다. 그들의 난해하고 교묘한 주장을 우리는 물리친다. 그런 주장을 아무리 궤변으로 변호하더라도 그것들은 성찬의 찬란한 빛을 흐리게 만들 뿐이므로 모든 선한 사람들은 배척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들을 버리고 로마의 적그리스도와 그의 예언자들이 전세계에 감염시킨 견해를 상대로 싸우려 한다는 것을 독자들은 알기를 바란다. , 그들은 그리스도를 드리는 사제와 그 봉헌에 참여하는 신도들이 미사라는 행위를 행함으로써 그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또한 미사는 속죄의 희생 제물이며 이 제물에 의해서 하나님을 자기들과 화해시킨다고 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관념으로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그 행위 자체의 조직이 일종의 유화 수단으로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속죄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보속을 드리기 위해 날조되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사도 이 관념을 표현한다. 그들이 매일 미사를 드리는 뜻은 다른 데 있다고 할 수 없다. 나는 이 악폐가 얼마나 깊이 뿌리를 박았으며, 외형적인 선 밑에 악폐가 얼마나 많이 숨어 있고, 얼마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과시하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사"라는 말한 마디에 믿음의 전체가 포함되었다고 믿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아무리 찬란하게 장식할지라도 미사는 그리스도에게 큰 모욕을 가하고, 그의 십자가를 매장하고 은폐하며. 그의 죽으심을 사람들이 잊어버리게 만들고, 그 죽으심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를 빼앗으며,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기억을 우리에게 전하는 성찬의 힘을 약화시키며 소멸시킨다. 이 사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명하게 증명한다면, 이 가장 무거운 도끼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끊어서 파헤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뿌리가 있겠는가? 이 빛이 그 밑에 숨은 악을 폭로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의 눈을 현혹하는 덮개가 있겠는가?

 

2. 미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모독

 

그러면 제일 처음에 한 말, , 미사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참을 수 없는 모독과 모욕을 가한다는 점을 밝히겠다. 구약성경에는 제사장들이 일정 기간 임명을 받는다고 했으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 의해 제사장으로서 성별을 받으신 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죽을 사람들이었으므로 그 제사장직도 영원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죽은 사람을 계승할 후계자들이 언제든지 필요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영생하시는 분이므로 뒤를 계승할 대리가 필요하지 않다. 따라서 아버지께서는 그를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으로 임명하면서 영원히 제사장직을 수행하게 하셨다(5:6,10, 7:17,21, 9:11, 10:21, 110:4, 14:18). 이 신비는 오래 전에 멜기세덱에게서 예시되었다. 성경이 그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한 번 소개한 후에 다시는 그에 대한 말이 없는 것은 그의 생명에 끝이 없다는 뜻이다. 이 유사점 때문에 그리스도를 그의 계열을 따른 제사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지금 매일 제사를 드리는 자들은 그 예물을 드릴 제사장을 지정해야 하며, 그들은 후계자와 대리로서 그리스도를 대신한다. 이런 대신하는 방식으로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영예와 특권을 빼앗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우편에서 그를 쫓아내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제사장이 아니라면 그 자리에 영원히 앉아 계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제들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직을 보좌할 뿐이며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직은 여전히 존속한다고 그들로 하여금 말하지 못하게 하라. 사도의 말이 그들을 붙잡고 도망하지 못하게 한다. 제사장들은 죽음으로 인해서 그 직무를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많은 제사장들이 생겨난다고 한다(7:23). 그러므로 죽음의 장애를 받으시지 않는 그리스도께서는 유일한 제사장이며 동료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타락하고, 멜기세덱의 선례로 무장하여 그들의 불경건을 옹호하려고 한다. 그가 떡과 포도주를 가져왔다고 했으므로(14:18) 이것은 그들의 미사를 미리 보인 것이라고 그들은 추론한다. 떡과 포도주를 주는 점에서 멜기세덱과 그리스도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너무도 천박하고 미련한 생각이어서 논박할 필요조차 없다. 멜기세덱은 행군과 전투로 지친 아브라함과 동행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어 그들의 기운을 북돋우려고 했다. 이 행위와 제사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모세는 저 거룩한 왕의 친절을 칭찬한다(14:18). 이 사람들은 성경에 아무 말도 없는 신비를 조작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과오에 다른 색을 칠한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는 말씀이 곧 뒤따르기 때문이다(14:18). 그들은 사도가 축복과 관련시켜 한 말을 왜곡해서는 떡과 포도주에 적응한다고 나는 대답한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축복했다(14:19). 여기서 사도는(그보다 더 훌륭한 해석자가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다) 그의 탁월한 지위를 추론한다. 축복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서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7:7). 만일 멜기세덱이 음식을 준 것이 미사의 제물을 예시하는 것이었다면, 가장 사소한 일까지도 가려내는 사도가 그런 중대한 일을 잊었을까? 무엇이라고 떠들어도 그들은 사도 자신이 제시하는 논법을 격파할 수 없을 것이다. 영원하신 그리스도께서 유일하고 영원한 제사장이 되셨으므로 죽을 성질의 인간들이 제사장이 될 권리와 영예는 없어졌다고 사도는 주장한다(7:17-19).

 

3. 미사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은폐한다

 

나는 미사에는 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수난을 은폐하며 매장하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제단을 쌓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즉시 전복시키는 것은 아주 확실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영원히 성결하게 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희생 제물로 바치셨다면(9:12) 이 희생의 힘과 효력이 무한히 계속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율법 하에서 희생 제물이 되는 소가 송아지 이상의 존경을 그리스도에 대해서 느끼지 않을 것이다. 소나 송아지의 희생의 효력과 힘이 약했다는 것은 그것이 자주 반복되었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상에서 행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에 영원히 깨끗하게 하는 힘이 없다고 고백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한 번 행하신 희생은 모든 시대를 위한 것이라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사도가 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 대제사장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고 한다(9:26).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10:10).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10:14). 이런 말들에 사도는 다시 첨가해서, 우리는 단 한번 죄를 용서받았으므로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주목할 만한 말을 한다(10:18,26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운명하실 때에 "다 이루었다"는 최후의 말씀으로(19:30) 이 뜻을 표시하셨다. 우리는 사람이 운명할 때에 하는 말을 예언이라고 생각한다. 운명하시려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 그의 한 희생에 의해서 모두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확언하신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렇게 분명하게 자신의 희생을 완전하다고 말씀하시는데도 우리는 마치 그것이 불완전한 것인 양 그리스도의 이 희생 위에 매일 수많은 조각을 잡아매도 좋을 것인가? 이 희생은 단 한 번 행한 것이며 그 힘은 전적으로 영원히 계속된다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확언할 뿐만 아니라 높이 외치며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다른 희생을 요구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불완전하며 무력하다고 고발하지 않는가?

매일 수십만 번씩 희생을 드리도록 마련된 미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유일한 희생으로서 아버지 앞에 드리신 그 수난을 묻어 버리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렇게 명백하고 공개된 진리와 싸우려고 한 것은 대담한 사탄이었다는 것을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이라면 보지 못할 리가 없다. 거짓말의 조상이 자기의 기만행위를 숨기기 위해서 사용하는 간계를 나는 모르지 않는다. 이것은 여러 가지 희생이나 또는 다른 희생이 아니라 같은 희생을 반복하는 것뿐이라고 마귀는 말한다. 그러나 이런 연막은 쉽게 사라져 버린다. 사도는 이 문제를 논할 때에 항상 다른 제사는 없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이 한 제사는 단 한 번 드려졌고 절대로 반복되지 않는다고 한다. 영리한 사람들은 더 비밀의 틈새로 빠져나간다. , 미사는 반복이 아니라 적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궤변도 간단하게 반박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한 번 제물로 바치신 것은, 그의 희생을 매일 새로운 예물로 확인하라는 조건이 아니라 그의 희생의 혜택을 복음 선포와 성찬 집행에 의해서 우리에게 분배하라는 조건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 말하고(고전 5:7) 우리에게 명절을 지키라고 명령한다(고전 5:8). 십자가상의 제물이 우리에게 충분히 분여되어 우리가 향유하며 진정한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 그것이 곧 이 희생을 우리에게 적당하게 적용하는 방법이라고 나는 말한다.

 

4. 말라기 1:11에 의한 주장

 

미사의 희생을 옹호하기 위해서 그들은 이 이상의 어떤 근거를 말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말라기의 예언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그 예언에서 주께서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세계 각지에서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는 때가 오리라고 약속하신다(1:11). 그러나 이방 민족들이 부르심을 받으리라는 문제를 말할 때에, 예언자들이(그들에게 권하고자 하는) 하나님께 대한 영적 경배를 묘사하기 위해서 율법의 외형적인 의식을 사용한 것은 새삼스럽거나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 예언자들은 이런 방법으로 이방 사람들이 진정한 종교를 믿게 되리라는 것을 당시 사람들에게 더 똑똑하게 알렸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항상 자기 시대의 예표를 통하여 복음에 계시된 진리를 묘사했다.

예컨대 주께로 향하는 것을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고 하며(2:2-3, 4:1-2),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각양각색의 예물을 드리는 것이라고 하고(68:29, 72:10-11, 60:6이하),(그리스도의 나라에서 모든 신자가 받게 될) 하나님께 대한 더 풍부한 지식을 꿈과 이상이라고 표현한다(2:28). 그러므로 그들이 말라기에서 인용하는 것은 이사야에 있는 다른 예언과 같다. 이사야는 앗수르와(19:23) 애굽과(19:19,23 참조) 유다에(19:24) 각각 제단이 있으리라고 예언한다. 그러므로 나는, 우선 이 예언이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성취된 것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지를 묻는다. 둘째, 지금 그 제단들이 어디 있으며 언제 쌓은 것이냐고 묻는다. 셋째, 그들은 이 나라들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것과 같은 제단이 각각 배정되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이런 일들을 깊이 생각한다면, 이사야는 하나님께 대한 영적 경배가 전세계에 퍼지리라는 것을 자기 시대의 적합한 예표를 통하여 예언한 것이라는 것을 그들도 인정하리라고 믿는다. 그러면 이것이 그들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다. 우리는 이런 예를 자주 보기 때문에 더 열거하려고 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들은 미사 이외의 다른 제사를 인정하지 않는 점에서도 가련하게 속고 있다. 신자들은 지금 주께 진정한 제사와 깨끗한 예물을 드리고 있으며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곧 말하겠다.

 

5.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나는 이제 미사의 셋째 기능에 대해서,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단 한번, 참으로 죽으신 사실을 소멸하여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한다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인간 사회에서 유언자가 죽어야만 유언이 확정되는 것과 같이, 우리 주께서도 우리에게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유언을 자신의 죽음으로 확인하셨다(9:15-17). 이 유언을 감히 변경하거나 거기에 새로운 무엇을 첨가하는 자들은 주의 죽으심을 부정하며 무시하는 자들이다. 미사는 새로운 전혀 다른 유언이 아니고 무엇인가? 미사는 드릴 때마다 죄의 새로운 용서와 의의 새로운 획득을 약속하며 따라서 지금은 미사의 수만큼 유언도 많아지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셔서 이 새로운 유언을 확인하셔야 할 것이다. 아니, 수많은 죽음으로 이 수많은 미사의 유언을 확인하셔야 할 것이다. 그러면 내가 처음에 미사는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 진실로 죽으신 사실을 말살한다고 말한 것은 옳지 않은가? 미사는 직접 그리스도를 다시 죽이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이런 일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왜냐하면 유언이 있으면 유언자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사도가 말하기 때문이다(9:16). 미사는 그리스도의 새 유언을 전시한다. 그러므로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요구한다. 그뿐 아니라 제물은 반드시 죽여서 바쳐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미사 때마다 제물이 되신다면 그는 순간마다 수많은 곳에서 잔인한 죽음을 당하셔야 될 것이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사도의 말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자주 자신을 바쳐야 했다면 그는 천지 창조 이후로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셨을 것이라고 한다(9:25-26). 나는 그들이 곧 대답하며 우리를 중상모략자라고 비난하는 것을 안다. 그들은 자기들이 생각한 일이 없고 지금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을 우리가 비난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과 사가 그들의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며 그들이 그리스도를 죽이려 하는지에 대해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불경하고 사악한 교리의 어리석은 결과를 밝히려고 할뿐이다. 나는 사도 자신의 말로 이 점을 증명한다. 비록 그들이 이 희생은 피를 흘리는 것이 아니라고 백 번 항변할지라도 나는 사람의 변덕에 따라 희생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생각을 부정한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의 신성불가침의 제도가 붕괴되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한다는 사도의 확고한 원칙이 여기서 나온다(9:22).

 

6.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오는 유익을 우리에게서 박탈한다

 

이제 나는 미사의 넷째 기능, ,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서 우리에게 오는 유익을 우리가 인정하거나 생각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 유익을 우리에게서 박탈하는 점을 논해야 한다. 미사에서 새로운 구속을 본 사람이 어찌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자기가 구속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용서를 깨달은 사람이 어찌 자기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 죄의 용서를 가져다주었다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우리는 미사에서 죄의 용서를 얻는 것이라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해결이 아니다.

이런 주장은 우리가 자신을 구속한다는 조건으로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되었다고 호언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사탄의 사자들은 이미 이런 교리를 퍼뜨리며 현재 이 교리를 선전과 칼과 불로 옹호하고 있다. , 우리가 미사에서 그리스도를 아버지에게 바칠 때, 우리는 예물을 바치는 이 행위에 의해서 죄의 용서를 얻으며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게 된다고 그들은 가르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구속의 한 예로 보며 그것을 봄으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구속자인 것을 깨닫는다는 생각이 아닌가? 그러면 그리스도의 수난에서는 무엇이 남는가? 그리스도께서는 만찬에서 용서의 확약에 인을 치실 때에, 제자들을 이 행위에서 머물라고 하시지 않고 그의 죽음의 희생으로 그들을 보내시면서, 성찬은 회상하게 하는 것(이른바) 기념행사라는 것을 보이신다. , 이 행사에 의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화해시키는 속죄 제물이 단 한 번 바쳐져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희생 제물이라는 것을 이해하더라도, 희생은 단 한번뿐이라는 것을 첨부해서 우리의 믿음이 십자가에 묶지 않는다면 그 이해만으로는 아직 불충분하다.

 

7. 미사는 성만찬을 폐기한다

 

이제 마지막이다. ,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고난을 우리의 머리 속에 깊이 새겨 기억하게 하신 장면인 성찬은 미사에 의해서 제거되고 파괴되며 폐지된다는 점에 도달했다. 참으로 성찬 자체는 하나님의 한 선물이며 감사히 받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미사의 희생은 하나님에게 치르는 값이라고 설명하며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보속으로서 받으신다고 한다. 이 희생과 성찬의 신비가 서로 다른 것은 주는 것과 받는 것이 서로 다른 것과 같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여기서 오히려 하나님이 자기에게 빚을 졌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배은망덕 중에서도 가장 파렴치한 배은망덕이 아니고 무엇인가? 성찬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우리의 구원의 모든 부분이 완전히 성취되었으므로 우리는 생명이 회복되었을 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소생된다는 것을 약속한다. 미사의 희생은 아주 다른 것을 말한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시려면 매일 희생이 되셔야 한다고 한다. 성찬은 교회의 공적 집회에서 분배되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하나로 뭉치는 그 교제를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제정된 것이다. 미사의 희생은 이 공동체를 해체시키며 분열시킨다. 마치 성찬이 사제들에게 이양되었다는 듯이 신자들을 대신해서 제물을 드려 주는 사제가 있어야 한다는 그릇된 생각이 지배하게 된 후로, 성찬은 주의 명령대로 신자들의 교회에 나눠주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적 미사가 잠입할 문이 열렸고, 이것은 주께서 제정하신 영적 교제라기보다는 일종의 수찬 정지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제물을 먹으려는 사제들이 모든 신도에게서 자기를 격리시키기 때문이다.(아무도 오해하지 않도록 설명하거니와) 아무리 많은 군중이 참석했을지라도 신자들이 주의 성찬에 참여하지 않는 때에는 나는 그것을 개인적 미사라고 부른다.

 

(초기의 관습과 오해의 발생. 8-11)

 

8. 사적 미사는 친교의 부정

 

나는 "미사"라는 말의 출처를 확정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에는 드린 예물들에서 온 것 같다. 그래서 고대 저술가들은 대개 복수형을 썼다. 그러나 나는 용어 문제의 논쟁을 피하고, 개인적 미사에 대해서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정 정신에 정반대되며 따라서 성만찬에 대한 불경한 모독이라고 말한다. 주께서 우리들에게 명령하신 것은 무엇인가? 성찬을 받아서 우리끼리 나누라는 것이 아닌가?(22:17) 바울은 이 명령을 어떻게 지키라고 가르치는가? 떡을 떼는 것, ,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가?(고전 10:16) 그러므로 한 사람이 받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지 않을 때 거기에는 어떤 유사점이 있는가? 그러나 그들은 그 한 사람은 교회 전체의 이름으로 받아먹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어떤 명령에 의한 것인가? 여러 사람들이 서로 나눠야 할 것을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점령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희롱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리스도와 바울의 말씀이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자들에게 나누기 위해서 떡을 떼지 않는 곳에는 주의 만찬이 없으며 변태적이요 거짓된 모방뿐이라고 간단하게 결론을 말한다.

그러나 거짓된 모방은 곧 타락이다. 그뿐 아니라 이런 위대한 신비를 타락시키는 것에는 반드시 사악한 결과가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사적미사에는 사악한 남용이 있다.(종교에서는 한 가지 잘못은 다른 잘못을 반복 생산하기 때문에) 제물을 나누지 않는 관습이 일단 잠입한 후에, 그들은 교회의 어느 구석도 빼놓지 않고 수많은 미사를 행하며 신자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자들을 한 곳에 모아 서로 하나가 되는 신비를 깨닫게 하였다. 그러면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미사에 그리스도를 경배하지 않고 떡을 제시해서 그것을 경배하게 하는 것이 우상 숭배가 아니라고 선전하게 하라.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다고 호언하는 것은 무익한 짓이다. 이 약속을 어떻게 해석하든 간에 약속을 주신 뜻은 결코 불결하고 부정한 자들이 언제든지 또 어떤 악한 목적을 위해서든지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어 내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신자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주의 명령에 따라 성찬을 지킴으로써 참으로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기쁨을 소유하라는 뜻이다.

 

9. 미사는 성경에 없으며 원시 교회에도 없었다

 

이외에도 이런 타락은 비교적 순결하던 교회에는 없었다. 우리의 논적들 중에서 특히 파렴치한 자들은 이 사실을 숨기려고 애쓰지만, 우리가 다른 문제에 관련해서 이미 밝힌 것과 같이 고대 교회가 전적으로 그들에게 반대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또 고대 저술가들의 글을 열심히 읽는다면 이 점을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강론을 끝내기 전에 우리의 미사 박사들에게 묻고자 한다. ,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여러 가지 제사보다 더 힘이 있으며 또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그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을 요구하시는 줄을(삼상 15:22) 그들도 알기 때문에 나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이런 방식으로 제물을 드리는 데 대해서 그들은 명령을 받은 일이 없고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말씀이 성경에 한 마디도 없다는 것을 아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제사를 기뻐하신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그뿐 아니라 아무나 제사장직의 영예를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자만이 얻으며, 참으로 그리스도 자신도 스스로 제사장직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소명에 순종하셨다고 사도가 말하는 것을(5:4-5) 그들도 듣는다. 그러면 그들은 그들의 사제직에 대해서, 그것을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영예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지 않은 그들 자신이 악하고 경솔한 생각으로 뛰어든 것이라고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제직을 옹호하는 성경 말씀을 그들은 일점일획도 찾아 낼 수 없다. 그렇다면 사제가 없이는 드릴 수 없다는 그들의 제사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10. 교부들은 미사를 제사로 간주했는가?

 

만일 고대 저술가들의 저서 여기저기에서 문장을 떼어다가 그것을 권위로 삼고서, 성찬에서 드리는 제사는 우리가 설명한 것과는 다르게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로마 카톨릭 교회가 고안한 가짜 제사를 시인하느냐에 관한 문제일 경우 고대 저술가들은 이런 모독 행위를 절대로 옹호하지 않는다고 나는 간단하게 대답한다. 물론 그들은 "제사"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어디서나 선언하듯이 그들은 우리의 유일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드리신 유일하고 진정한 제사에 대한 기념이라는 뜻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동물을 제물로 바치면서 그리스도께서 바치실 미래의 희생 제물에 대한 예언을 찬양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가장 거룩하게 바치며 또 그 몸에 참여함으로써 이미 바친 희생에 성대한 기념을 축하한다." 여기서 그가 가르치는 것과 똑같은 뜻을 집사 베드로에게 보내는(이 글의 필자가 누군지를 나는 묻지 않지만) 신앙론(Con- cerning Faith to Peter the Deacon)은 더욱 자세하게 설명한다. "우리를 위해서 육신이 되신 독생자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자신을 하나님에게 향기로운 희생 제물로 바치셨다는 것을 굳게 믿고 의심하지 말라. 그에게 그리고 아버지와 성령에게 구약 시대에는 동물을 제물로 바쳤다. 지금은 그에게(그와 한 신성을 가지신)아버지와 성령에게 전세계의 거룩한 교회가 떡과 포도주를 끊임없이 드린다. 저 육적인 제물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드리실 그리스도의 살을 예시했으며 죄의 용서를 위해서 흘리실 그의 피를 예시했다. 그뿐 아니라 이 제사에는 우리를 위해서 바치신 그리스도의 살과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회상하며 감사하는 뜻이 포함되었다."

따라서 어거스틴 자신도 여러 구절에서 이 제사는 찬양의 제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끝으로, 우리가 주의 만찬을 제사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바치신 특이하며 진정하고 유일한 제사에 대한 기념과 형상과 증언이라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을 그의 글에서 자주 발견할 것이다. 삼위일체론(On the Trinity) 424장에도 잊을 수 없는 구절이 있다. 거기에서 그는 저 특이한 제사를 논한 후에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제사에 대해서는 네 가지 점을 생각해야 한다. , 누구에게, 누가, 무엇을, 누구를 위해서 바치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목제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 그 유일하고 진정한 중보자는 그가 희생을 드린 분과 여전히 하나이며, 그가 위해서 희생을 바치신 사람들을 자신 안에서 하나로 만드시며, 희생을 바친 이와 희생으로 바친 것도 하나이다." 크리소스톰도 같은 뜻을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영예를 강경하게 주장한다. 그래서, 주교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라고 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음성일 것이라고 어거스틴은 말한다.

 

11. 교부들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정신에서 이탈했다

 

우리는 고대 저술가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광경이 거의 우리 눈앞에 보일 정도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여 주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는 사도가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에게 십자가를 전했을 때,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눈앞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3:1). 그러나 나는 고대 저술가들이 이 기념행사에 대해서, 주의 제정 정신과 맞지 않게 오해도 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성찬론에는 희생이 반복된다는 적어도 새롭게 된다는 듯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순수하고 단순한 명령을 의지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성찬은 하나님의 만찬이라고도 하며 성찬에서는 하나님의 권위만이 지배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고대 저술가들에게 불경건이 있었다고 정죄할 수 없다. 이것은, 나는 그들이 이 신비 전체에 대해서 경건하고 정통적인 생각을 가졌다는 것을 알며, 주의 특이한 희생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떨어뜨리려는 생각을 그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에 다소의 허물이 있었던 것을 변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정 정신이나 복음의 성격이 허락하는 정도를 넘어서 유대인들의 제사 제도를 엄격하게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 괴팍한 신비로운 해석만은 그 책임을 그들에게 돌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단순하고 순수한 제정으로 만족하지 않고 율법의 그림자 쪽으로 너무 많이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성만찬에 있는 제물 관념 : "제물"이라는 말의 성경적 의미 : 미사는 신성 모독이다. 12-18)

 

12. 구약의 예물과 주의 만찬

 

만일 부지런히 깊이 생각하기만 하면, 누구라도 모세의 제사와 우리의 성찬 사이의 차이는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확립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모세의 제사는 오늘날 성찬에서 우리에게 보이는 것과 같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과를 유대인들에게 보여 주었지만(1:5) 그 보여 주는 방법이 달랐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희생을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레위족의 제사장들이 명령을 받아 예시했으며 그리스도 대신에 희생 동물이 제시되었고 제물을 드릴 제단이 있었다. 요컨대 앞으로 하나님 앞에 속죄의 제물을 드릴 희생의 모양이 사람들의 눈앞에 보이도록 모든 일을 행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후에 주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방법을 제정해 주셨다. , 아들이 그에게 드리신 희생의 유익을 믿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하셨다. 그러므로 제물을 바치는 제단 대신에 잔치상을 우리에게 주셨으며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들 대신에 성직자들을 성별하셔서 거룩한 잔치를 분배하게 하셨다. 신비가 숭고하고 신성할수록 더욱 경건하고 경외하는 태도로 대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들은 인간적인 지성의 모든 외람된 생각을 버리고 성경의 교훈만을 굳게 지키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또 성찬은 주의 것이지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생각할 경우, 우리는 사람의 권위나 오랜 규정으로 인하여 주의 성찬에서 털끝만큼도 어긋나게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이미 잠입한 모든 과오를 일소하려고 할 때에,(가장 빠른 방법으로서) 그들을 저 유일한 제정 정신으로 돌아가게 하며 이 원천에서 영원한 원칙을 구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전 11:20이하).

 

13. 희생의 성격

 

sacrifice(희생, 제물, 제사)Priest(제사장, 사제)라는 말에 대해서 우리와 언쟁을 벌이는 일이 없도록, 내가 이 논의에서 이 말들을 사용한 뜻을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나는 모든 거룩한 의식과 종교적 행동을 "제물"이라는 말로 표시하는 사람들이 어떤 근거로 그렇게 하는지를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성경의 일관된 용법에 의하면 희랍 사람들이 , 혹은 , 혹은 라고 부른 것을 제물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안다. 일반적인 해석으로는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 모두 이 말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의 율법에 있는 희생과 구별해야 한다. , 신비적 해석을 허용할 수 있는 구별이어야 한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있는 그림자를 가지고 제물의 보편적인 진리를 그의 백성에게 보이려고 하셨다. 제물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었지만 전부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어떤 제물은 보속의 의미로 죄를 위해서 드리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죄책이 면제되었다. 또 어떤 제물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상징과 경건의 증거였다. 이런 제물은 어떤 때에는 간구의 형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빌고, 어떤 때에는 감사의 형식으로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증거하며, 또 어떤 때에는 단순히 경건의 표시로서 새로 언약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 둘째 종류에 속하는 것이 번제와 전제와 예물과 첫 이삭과 화목제였다.

따라서 우리의 제물도 두 가지로 구별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교육적 의미로 하나는 "찬양과 경외의 제물"이라고 부르겠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당연히 드려야 하고 또 드리는 경배와 예배를 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원한다면 "감사의 제물"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무수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만이 그 은혜를 보답하는 의미에서 자기의 몸과 행동을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종류의 제물은 "화목의 또는 속죄의 제물"이라고 부르겠다.

속죄의 제물을 드리는 목적은, 하나님의 진노를 풀며 심판에 대한 보속을 행하고 죄를 씻어 깨끗이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죄를 씻음으로써, 모든 불결이 제거되고 순수한 의가 회복된 죄인이 하나님의 은총을 다시 받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율법 하에서 속죄하기 위해서 바친 동물을 희생 제물이라고(29:36) 부른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하거나 죄를 씻어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진정한 희생을 예표 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희생은 실제로 그리스도만이 최종적으로 성취하셨는데 이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성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희생은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희생의 효력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친히 확인하셨다(19:30). ,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하며 죄의 용서와 의와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필요한 일은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독특한 희생에 의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완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후에 어떤 다른 희생을 바칠 필요가 전혀 없다.

 

14. 미사를 판매한다

 

그러므로 나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반복함으로써 죄의 용서를 얻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며 의를 얻는다고 상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또 그가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그 희생에 대해서 극악한 치욕과 참을 수 없는 모독을 가한다고 단정한다. 새로 예물을 드리는 공로에 의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 미사를 드리는 목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뿐 아니라 그들의 광태는 한정 없이 확대되어, 그들의 미사는 그들이 마음대로 어느 한 사람에게 적용된다고 특히 지정하지 않는 한 교회 전체를 위해서 공통적으로 평등하게 드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그들은 사소한 일같이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돈을 내고 이 상품을 사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든지 그들의 미사가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유다가 받은 값을 받을 수는 없었으나 조상과 어떤 유사점을 유지하기 위해서 숫자를 같게 했다. 유다는 그리스도를 은 30개에 팔았으나(26:15) 이 사람들은 프랑스의 계산 방법에 따라 그리스도를 동전 30개로 판다. 유다는 한 번 팔았으나 이자들은 몇 번이든지 판다.

헌물을 바침으로써 사제들이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중재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푼 후에 속죄를 받았다는 의미에서 그들이 제사장이라는 것을 우리는 또한 부인한다. 신약의 제사장은 그리스도뿐이기 때문이다(9). 그리스도에게 모든 제사장직이 옮겨졌으며,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는 모든 제사장직이 종결되고 폐지되었다. 성경에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직에 관한 말씀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옛날 제도를 폐지하시고 새 제도를 만드시지 않았으므로 사도의 주장은 도저히 반박할 수 없다.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5:4). 그러면 스스로 그리스도를 도살하는 자라고 호언하는 이 모독자들은 어떤 철면피를 쓰고 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제사장을 자칭하는 것인가?

 

15. 유사한 허식과 망상에 대한 플라톤의 발언

 

플라톤의 국가론(Republic) 2 권에 훌륭한 구절이 있다. 거기서 그는 옛날의 속죄제를 논하면서, 악한 사람들이 이런 제물에 의해서 자기의 비행이 가려져서 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된다고 생각하며 마치 신들과 계약을 한 듯이 더욱 마음을 놓고 방탕하게 생활하는 그 우매함을 비웃는다. 플라톤은 여기서 현대의 미사가 행하는 속죄의 관습을 언급하는 것같이 보인다. 불공평한 거래로 과부들을 괴롭히고, 고아들의 물건을 강탈하며, 빈민을 괴롭히며, 협잡으로 남의 물건을 빼앗으며, 위증과 사기로 남의 소유를 점령하며, 폭력과 공갈로 남을 압박하는 것이 악한 짓이란 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한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감히 이 모든 일을 반복하고 이런 짓들을 하고도 벌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진실로 이 문제를 잘 검토한다면, 이 사람들을 가장 격려하는 신념이 있는데 곧 그들은 값을 치르는 것같이 미사의 제물을 드려서 하나님의 마음을 푼다고 또는 적어도 이것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쉬운 방법이라고 믿는 것이다.

플라톤은 계속해서, 이런 속죄제를 드리면 지옥에서 받을 형벌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짐승같이 미련한 사람들을 비웃는다. 그런데 현대 미사의 대부분과 매년 행하는 기념행사는 악한 자들을 일평생 가장 잔혹한 폭군이었던 자들과 가장 욕심 많은 강도였던 자들과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은 자들을 연옥의 불에서 빼내기 위해서 값을 치른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16. 그리스도의 교회의 "감사 제물"

 

우리가 "감사의 제물"이라고 부르는 둘째 종류의 희생에는 사랑의 의무가 모두 포함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를 통해서 그리스도 자신을 존귀하게 한다. 또 이 둘째 종류에는 우리의 기도와 찬양과 감사와 우리가 하나님에게 드리는 모든 예배행위가 포함된다. 이 모든 일은 결국 저 더 큰 제사 곧 우리의 영혼과 몸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성별하는 제사에 의존한다(고전 3:16 기타). 외형적인 행동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선은 우리 자신을, 다음에는 우리의 모든 소유를 성별해서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바지하며 그 영광을 더욱 나타내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이런 제사는 하나님의 진노를 풀거나 죄의 용서를 얻거나 공로로 의를 얻는 문제와는 아무 상관도 없고 다만 하나님을 찬양하며 높이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제사는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자신과 화해시키신 사람들이 죄의 용서를 받은 후 하나님께서 죄책이 면제를 받은 후에 드리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에게 기꺼이 열납 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되는 꼭 필요한 제사이다. 그러므로 이미 예언자의 말에서 안 바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한 이 제사는 계속될 것이다. 예언자의 말은 이런 의미로 해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 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1:11). 우리는 결코 이 제사를 폐지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피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명령한다(12:1, 벧전 2:5-6 참조). 여기서 "영적 예배"라는 말을 첨가한 것은 의미가 있다. 사도는 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의미하며, 무언중에 모세의 율법에 있는 육적인 제사와 대립시킨다. 선을 행하며 서로 나눠주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라고 한다(13:16). 그래서 빈궁한 바울을 도운 빌립보 교회 신자들의 관용은 향기로운 제물이며 신자들의 모든 선행은 영적 제사인 것이다.

 

17. 찬양의 제물을 설명하는 성경 말씀

 

나는 왜 증거를 많이 찾아내려고 하는가? 이 표현은 성경에 자주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직 율법의 외형적인 지도하에 있을 때에도 그리스도 교회와 유대 민족에게 공통된 진리가 육적인 제물의 기초가 되었다고 예언자들이 분명하게 선포했다. 다윗은 그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향과 같이 올려지기를 기원했다(141:2) 호세아는 감사를 드리는 것을 "입술로 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는 것"이라고 하며(14:2-3), 다윗은 "영화롭게 하는 제사"라고 부른다(50:23, 51:19). 사도도 그를 따라 감사를 "찬미의 제사"라고 부르고 그것은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설명한다(13:15). 주의 만찬에는 이런 종류의 제물이 없을 수 없다. 성찬에서 우리가 주의 죽으심을 선포하며(고전 11:26) 감사를 드릴 때 우리는 곧 찬미의 제사를 드린다. 이렇게 제사를 드리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을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부르는데(벧전 2:9), 이는 사도가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부르는 찬미의 제사를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드리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들고 나타날 때에는 반드시 중재자가 계신다. 우리를 위한 중보자는 그리스도이시므로 그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고유를 아버지께 드린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성소(9:24)에 들어가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며 우리가 들어갈 길을 열어 주신다(10:20). 그리스도는 우리가 예물을 드리는 제단이시며(13:10 참조), 우리가 하려는 일은 무엇이든지 그의 안에서 행하게 하신다. 나는 아버지를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은 그리스도시라고(1:6) 말한다.

 

18. 미사는 오염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신성 모독이다

 

미사라는 이 가증한 것에 대해서 아직도 소경이 볼 수 있고 귀머거리가 들을 수 있고 어린이들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무엇이 남아 있는가? 금잔에 넣어 드리는 미사는 세상의 모든 왕과 백성을 가장 높은 자로부터 가장 낮든 자에 이르기까지 취하게 만들며 졸음과 현기증에 붙잡히게 만들었다. 그 결과 짐승들보다도 더 둔감해진 그들은 구원의 배를 조종해서 전적으로 이 죽음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다. 확실히 사탄이 그리스도의 나라를 포위하고 함락시키기 위해서 이 이상 더 강력한 무기를 만든 적이 없다. 진리의 원수들이 현재 미친 듯이 잔악한 수법으로 싸우는 것은 바로 이 헬렌이라는 음녀를 위한 것이다. 그들은 헬렌과 같은 음녀를 상대로, 영적 음행이라는 가장 가증한 행위로 몸을 더럽히고 있다. 그들은 거룩한 미사의 순결이 더럽혀진 것에 대한 구실로서 여러 가지 야비한 악폐를 제시하지만 나는 여기서 그것들에 새끼손가락 하마도 대지 않는다. 미사를 이용한 그들의 비열한 장사와 불결한 이익, 한정 없는 탐욕 등에도 나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미사의 가장 거룩한 것 자체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단순한 몇 마디 말로 간단하게 지적할 뿐이다. 이 거룩한 점이 있기 때문에 미사는 수백 년 동안 존경과 존중을 받을 만한 것으로 인정되어 왔다. 이 지극히 위대한 신비를 그 존귀성에 합당하도록 설명하는 것은 큰 일일 것이다. 또 나는 지금 사람이 볼 수 있는 추악한 부패상을 이 신비들과 혼합하고 싶지 않다. 미사가 주장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형태를 아무 부속물이 없는 상태를 보더라도, 거기에는 철두철미하게 온갖 불경과 훼방과 우상 숭배와 신성 모독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17장과 18장에 대한 결론 : 기독교의 성례는 둘뿐이다. 19-20)

 

19. 세례와 주의 만찬만이 성례이다

 

신약 시대의 초기부터 세상 끝날까지 기독교 교회에 전해지는 두 가지 성례에 대해서 내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거의 전부를 이제 독자들은 간단히 알게 되었다. 세례는 이를테면 교회에 들어가는 문이며 신앙생활의 입문이다. 그러나 성찬은 일종의 계속되는 양식이며 이것을 그리스도께서는 신자인 가족들에게 영적으로 먹이신다. 그러므로 한 하나님과 한 믿음과 한 그리스도와 또 그리스도의 몸인 한 교회가 있는 것과 같이 세례도 하나뿐이며(4:4-6) 이는 자꾸 되풀이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찬은 반복해서 분배되어 일단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이 항상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 두 가지 성례 이외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성례는 없으므로 신자의 교회는 다른 것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성례를 제정하는 것은 사람이 선택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에서 분명하게 설명한 것을 기억한다면 이 점을 곧 이해할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속에 관해서 우리들에게 알리시며 우리들에 대한 자신의 선하신 뜻을 확인하시기 위해서 성례를 제정하셨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의 모사가 된 일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40:13, 11:34) 이 점을 이해할 것이다. , 아무도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확실한 약속을 할 수 없다는 것과, 또 우리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태도를 취하시고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며 무엇을 거절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다짐하며 믿게 만들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어떤 표징을 내놓고 하나님의 의도나 약속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곧 알 수 있다. 표징을 주셔서 우리들 사이에서 자신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게 하신 이는 하나님뿐이시다. 더 간단하게 또 더 강력하게 그러면서도 더 분명히 말한다면, 결코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 성례는 있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이 한 곳에 모이더라도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는 아무 약속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자기의 힘으로 성례를 제정할 수 없다.

 

20. 성례를 첨가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두 가지 성례로 만족해야 한다. 교회는 지금 셋째 성례를 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 끝까지도 원하거나 기대해서는 안 된다.

유대인들에게는 보통 성례 이외에 시대 상황이 변하는 데 따라서 여러 가지 성례를 주셨다. 예컨대 만나와(16:13, 고전 10:3), 반석에서 흐르는 물과(17:6, 고전 10:4), 놋뱀과(21:8, 3:14), 그밖에도 비슷한 것이 있었다. 이런 변천에 의해서 유대인들은 이런 무상한 형태에서 머물지 말고 더 좋은 것, 폐하거나 끝나지 않는 영원한 것을 기다리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계시된 후로 우리는 사정이 훨씬 달라졌다.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 있기" 때문이다(2:3). 한없이 풍부한 이 보화에 어떤 새로운 것이 첨가되기를 바라거나 기대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만을 갈망하고 바라보며 배우고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나라의 영광을 완전하게 나타내시며(고전 15:24) 우리에게 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시는(요일 3:2) 날이 밝아올 때까지 우리는 그만을 구하며 배우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시대를 성경에서는 "마지막 때"(요일 2:18), "모든 날 마지막"(1:2) "말세"(벧전 1:20)라고 부르며, 공연히 새로운 교리나 계시를 기대해서 속는 사람이 없도록 한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1:1-2), 아들만 아버지를 계시할 수 있으며(10:22), 우리는 지금 거울로 보는 것 같으나(고전 13:12)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범위 내에서 아버지를 참으로 충분히 나타내셨다.

그런데 교회 안에 새로운 성례를 만드는 권한을 사람에게 주시지 않은 것과 같이, 될 수 있으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례에도 사람이 조작한 것을 섞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물을 넣으면 포도주가 변질되고 묽어진다. 누룩을 뿌리면 반죽한 덩어리 전체가 시어진다. 그와 같이 사람이 자기 생각을 첨가할 때 하나님의 신비는 더럽혀질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집행되는 성례들이 그 시초의 순결성에서 많이 타락한 것을 본다. 어디를 보아도 행렬과 의식과 무언극이 너무 많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성례가 성립할 수 없는데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려나 언급이 없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들은 무수한 의식에 짓밟혀 머리를 들 수 없게 되었다. 세례에서는(우리가 이미 당연한 비난을 한 것같이) 빛나며 주시를 받아야 할 유일한 것, , 세례 자체를 볼 수 없지 않은가? 성찬은 미사로 변모된 후에 완전히 매장되었으며, 이런 것 외에는 일 년에 한 번 보이는 찢기고 잘린 반조각의 성찬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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