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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 4권. 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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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장 유아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신 제도와 표적의 본질에 가장 잘 일치된다

 

(유아세례는 그 의미로 보아서 할례에 해당하며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인정되었다. 1-6)

 

1. 유아세례에 대한 공격

 

그러나 현재 일부의 열광적인 사람들이 유아세례 문제로 교회를 소란하게 하며 선동을 계속해서 그치지 않아서 나는 그들의 광태를 억제하기 위하여 여기 부록을 첨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너무 길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는 교리의 순수성과 교회의 평화를 중시하며 또 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너무 까다롭게 시비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생각하기 바란다. 그뿐 아니라 나는 이 강화가 세례의 비밀을 보다 명백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체계화할 것이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공격할 때에 그럴 듯한 논거를 든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외람된 생각과 타락한 호기심이 끌어들인 것이며, 결국에는 우매한 자기만족감으로 경솔하게 관습화된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그 위에 확고하게 확립된 성례가 아니면 가느다란 실에 달린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올바르게 깊이 생각할 때에, 만일 주의 거룩한 규례에 대한 이런 중대한 비난이 잘못되고 부당하다는 것이 판명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 규례의 근원을 조사해야 한다. 만일 경솔한 사람들이 생각해낸 것이 드러날 경우에는 그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만을 표준으로 세례의 진정한 준수를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확실한 권위가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규례를 폐지함으로써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오만불손한 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2. 세례의 의미를 결정한다

 

표징을 올바르게 고찰하는 것은 그 외형적인 의식에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식을 제정하실 때 의식이 표시하도록 하신 그 약속과 영적 비밀에 달려 있다는 것은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잘 알고 또 인정하는 교리이다. 그러므로 세례의 가치와 목적, , 그 본질을 완전히 알고자 하는 사람은 그 물질과 물질적인 외형에 구애될 것이 아니라 세례에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하나님의 약속과 세례가 표현하는 내면적 신비를 생각해야 한다. 이 일들을 이해하는 사람은 세례의 견고한 진상 이를테면 그 본체를 파악했다고 하겠다. 이렇게 될 때에 그는 외형적으로 물을 뿌리는 이유와 가치도 깨닫게 될 것이다. 그와 반대로 이 일들을 멸시하고 무시하면서 관심을 전적으로 보이는 의식에 집중하는 사람은 세례의 힘이나 성격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고 물의 의미나 가치까지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 발언은 성경의 여러 구절이 분명하게 확증하기 때문에 여기서 이 이상 더 부연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앞으로 할 일은 세례가 주는 약속을 근거로 하여 세례의 효력과 본질을 연구하는 것이다.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에 의하면, 세례는 우선 우리의 죄가 깨끗이 씻긴다는 것을 가리키며 이 일은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진다. 다음에, 세례는 우리의 육을 죽인다는 것을 가리키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가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이것으로 인하여 신자들은 중생하여 새로운 생명과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간다고 한다. 세례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모두 여기에 요약되어 있다. 한 가지 첨가시키면 세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증거하는 상징이 된다.

 

3. 세례와 할례

 

그러나 세례가 제정되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할례가 있었으므로 이제 우리는 이 두 가지 표징이 어떻게 서로 다르며 어떤 점에서 서로 같은가를 검토하기로 하자. 이렇게 검토한다면 둘 사이의 비슷한 관계가 나타날 것이다. 주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시기 전에 그와 그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말씀하셨다(17:7,10). 그리고 모든 것을 풍부하고 충족하게 가질 것이라고 하셨다(17:1,6,8).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손을 모든 복의 원천으로 생각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 말씀에는 영생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고 그리스도께서는 해석하시고, 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신자들의 영생과 부활을 증명하셨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셨다(20:38, 22:32). 그러므로 바울도 에베소 교회 신자들에게 주께서 어떤 멸망의 상태에서 그들을 구출하셨는가를 가르칠 때에, 그들이 할례의 언약에 참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삼아,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었고 그리스도가 없었고 소망이 없었고 약속의 언약에 대해서 외인이었다고 추론했다(2:12). 이 모든 것은 언약 자체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접근하며 영생에 들어가는 첫 단계는 죄 사함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가 깨끗하게 씻음을 받으리라고 하는 세례의 약속에 해당한다. 후에 주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결백한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는 언약을 아브라함과 맺으신다(17:1). 이것은 육을 죽이는 것 또는 중생에 해당한다. 그리고 아무도 의심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모세는 다른 곳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한다. ,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위해서 마음의 포피를 베어 버리라고 권고함으로써(10:16) 할례는 육을 죽이는 표징이라고 설명하며, 이 때문에 땅에 있는 모든 백성 가운데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것이라고 한다(10:15).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자기 백성으로 택하실 때에 할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신 것과 같이, 모세는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육신에 받는 할례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한다(30:6). 또 아무도 자기 힘으로 진정한 할례를 얻으려고 애쓰는 일이 없도록 모세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라고 가르친다. 이 모든 일은 예언자들도 자주 반복하여 말했기 때문에 여기서 그 많은 a??다 열거할 필요는 없다(4:4, 16:30). 그러므로 우리가 세례에서 받는 것과 같은 영적 약속을 조상들은 할례에서 받았다. 할례는 그들에게 죄 사함을 받음과 육을 죽이는 것을 나타내 보였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두 가지를 겸비하신 그리스도께서 세례의 기초라고 한 우리의 가르침과 같이 그가 할례의 기초가 되신 것도 명백하다.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고 그로 인해서 모든 족속이 복을 얻으리라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12:2-3). 이 은혜에 인을 치기 위해서 할례의 표징이 첨가된 것이다.

 

4. 차이는 오직 외적인 것에 있다

 

이제 우리는 이 두 표징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쉽게 알 수 있다.(두 표징의 힘은 약속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밝혔는데) 그 약속은 두 표징에서 똑같다. , 하나님의 인자하신 은혜와 사죄와 영생이 약속되었다. 다음에 표현된 것 중생도 같다. 두 표징의 기초, , 이런 일들을 실현시키는 기초도 같다. 그러므로 성례의 힘과 성격을 평가하는 표준이 되는 내적 신비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 다만 차이는 외형전인 의식에 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약속과 거기에 표현된 의미이기 때문에 이 외형적인의식은 다수 경미한 구성 요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는 의식이 다르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할례에 속한 것이 모두 세례에도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믿음의 분량에 따라 모든 성경 해석을 검토하라고 가르친(12:3,6) 사도의 원칙에 따라 우리는 어떤 유사한 관계와 비교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이 일은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거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과 같다. 유대인들에게는 할례를 받는 것이 곧 교회에 처음으로 가입하는 것이었다. 할례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가족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확신하는 표현이었으며, 그들로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무리에 참가하겠다고 고백하는 표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하나님에게 성별되어 그의 백성으로 인정되며 우리 편에서도 그에 대한 충성을 서약한다. 이렇게 볼 때에, 세례는 할례를 대신하며 할례가 한 일을 세례가 우리 사이에서 수행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5. 유아들도 언약에 참가한다

 

그런데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를 검토하기로 한다면, 물이라는 요소와 외형적인 관례에 그치고 그 영적인 신비에 마음을 돌리지 못하는 사람은 무의미한 말을 하며 심지어 정신이 나간 말을 한다고 할 것이 아닌가? 이 영적 신비를 설명한다면, 세례를 유아들에게 주는 것은 옳은 일이며 그들에 대한 하나의 의무라는 것이 분명하게 될 것이다. 처음에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할례를 베풀게 하셨을 때에는 반드시 할례가 의미하는 모든 것에 그들도 참여하게 하셨다(17:12 참조). 그렇지 않고 그들에게 무의미한 상징을 베푸셨다면 그것은 자기 백성에 대한 우롱이었을 것이며 이것은 듣기만 해도 무서운 일이다. 여호와께서는 조그마한 유아들에게 행하는 할례가 언약의 약속을 확인하는 인을 대신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이 언약이 지금도 확고부동하게 유효하다면 구약 시대 유대인의 유아들과 똑같이 현대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표징이 의미하는 일에 그들이 참가한다면 표징을 그들에게 거부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진상을 안다면 왜 그들을 외형에서 쫓아 보낼 것인가? 외형적인 표징은 성례의 말씀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분리시킬 수 없다. 다만 표징을 말씀과 따로 고려한다면 어느 편을 더 중요시해야 할까? 우리는 표징이 말씀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표징은 말씀 아래 있으며 말씀보다 낮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으로서의 "세례"가 유아들에게 해당되는데 말씀의 부속물인 표징을 거부할 까닭이 무엇인가? 다른 이유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모든 반대론자들을 충분하게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할례에는 일정한 날이 있었다고 하는 반대론은 도피 수단에 불과하다. 우리는 지금 유대인들같이 날짜에 매이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주께서 날짜를 정하시지 않으면서 엄숙한 의식으로 유아들을 자신과의 언약에 받아들이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선언하시니 우리는 이 이상 무엇을 더 요구할 것인가?

 

6. 차이는 확인의 방법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진리에 대한 더 확실한 지식을 열어 준다. 참으로 여호와께서 옛날에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17:14 참조) 옛날 유대인과 동일하게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해서도 유효하며, 이 말씀이 유대인들에게 관계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관계된다는 것은 분명하게 명백하다. 그리스도가 와서 아버지의 은혜를 축소시키셨다고 하는 흉악하고 모독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유대인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자가 되어 불신자의 자녀들과 구별되었으므로 거룩한 자손이라고 불렀다(9:2, 6:13). 그와 같은 이유로,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은 거룩하다고 인정되며 한쪽 어버이만이 신자일지라도 거기서 난 자녀는 우상 숭배자들의 불결한 자손과 다르다고 사도는 확언한다(고전 7:14). 그런데 주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직후에 외적인 성례로 유아들에게 그 언약을 인치라고 명령하셨다(17:12). 그런데도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녀들에게 그 언약을 확인하는 인을 치지 않겠다는 구실은 무엇인가?

그리고 할례 이외의 상징으로 여호와의 언약을 확인하라는 명령은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 없으며 그 할례는 오래 전에 폐지되었다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여기 대해서는 곧 대답할 수 있다. 주께서 구약시대에는 그의 언약을 확인하는 방법으로서 할례를 제정하셨으나 할례가 폐지된 후에도(우리와 유대인 사이에 공통된)주의 언약을 확인해야 할 이유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공통점과 차이점을 잘 생각해야 한다. 언약은 공통되고, 언약을 확인해야 하는 이유도 공통적이다. 확인하는 방법만이 다르다. 그들을 위해서 할례를 행하던 우리를 위해서는 세례가 대신한다. 그렇지 않고 만일 유대인들이 후손의 구원을 확신하게 된 증거가 우리에게서 제거된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유대인들보다 우리에게 더 모호해지고 확실성이 적어질 것이다. 이런 말은 반드시 그리스도에 대한 크나큰 중상모략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의 무한한 인자하신 사랑이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더욱 명백하고 풍부하게 땅 위에 부어졌으며 사람들에게 선언되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적어도 율법의 어두운 그림자 아래 있던 때보다 이 은혜를 더 심한 악의로 은폐하거나 혹은 나타내더라도 더 무력한 증언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어린이들을 불러 축복하셨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세례의 표징과 은혜에서 제외해서는 안 된다. 7-9)

 

7. 예수님과 어린이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는, 자신이 오신 것은 아버지의 자비를 제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확대하기 위해서란 것을 세상에 알리시려고 자신에게 데려온 유아들을 다정하게 안으셨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제자들을 하늘나라의 주인공인 어린이들을 자기에게서 빼앗는 것이라고 책망하셨다(19:13-15).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어린이들을 안으신 것과 세례에 어떤 공통점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주셨다고 하지 않고 그들을 들어 안으시고 축복하셨다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면 유아들에게 세례를 줄 것이 아니라 기도로 보살펴 주자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들보다 더 그리스도의 행동을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19:14)고 이유를 말씀하시면서 유아들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신 사실을 우리는 경시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유아들을 안으시고 기도와 축복으로 그들을 하나님께 드리심으로써 그의 뜻을 행동으로 확증하셨다. 유아들을 그리스도에게 데려가는 것이 옳은 일이라면 왜 세례도 받게 하지 않는가? 세례는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교통과 친교의 상징이 아닌가? 천국이 유아들의 것이라면 왜 표징을 그들에게 주지 않는가? 표징은 그들에게 교회에 들어가는 문을 열어 주는 것이며 교회에 가입된 그들을 천국의 상속자들 가운데 가입되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로 부르시는 유아들을 우리가 쫓아낸다는 것은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은사로 장식하시는 유아들에게서 그 은사를 빼앗으며 그가 기꺼이 영접하시는 어린이들을 몰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세례와 그리스도의 이 행동은 아주 다르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유아들도 하나님의 언약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증거한다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받으시고 안으시며 안수하시고 기도하심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것이며 그들을 성별케 하셨음을 선언하신 그 행동보다 얼마나 더 귀중하게 여겨야 할 것인가?

이 구절의 권위를 떨어뜨리려고 다른 옹졸한 이유를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무지를 폭로할 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아이들이 내게 오게 하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아이들은 이미 어느 정도 자라서 혼자 올 수 있었다고 추론한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는 "버린 아기들과 어린아이들"이라고 부른다(18:15, 19:14, 10:13 참조). 이 두 마디의 희랍 말은 젖먹이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온다"라는 말은 "접근한다"라는 뜻으로 사용했을 뿐이다. 진리를 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은 결국 기만의 거미집을 만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이들의 것"이라고 하시지 않고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셨으므로, 천국은 유아들에게 준 것이 아니라 유아와 같은 사람들에게 주었다는 그들의 말에는 아무런 건전한 논점도 없다. 만일 이런 생각이 인정된다면, 왜 그리스도께서는 유아들이 나이 때문에 자신에게 외인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이려고 하셨을까? 유아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용납하라고 명령하셨을 때에 실제로 젖먹이들을 의미하신 것이 무엇보다도 분명하다. 사람들이 이 일을 어리석게 생각하지 않도록 그는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첨가하셨다(19:14). 유아들이 천국에 포함되어야 한다면 "이런 자"라는 말은 유아 자신들과 유아와 같은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할 것이다.

 

8. 유아세례에 관한 성경의 침묵

 

그러므로 유아세례는 성경의 확고한 승인을 받은 것이며 결코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님을 누구든지 알 수 있다. 사도들이 유아세례를 주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고 하는 그들의 미련한 항의는 들을 만한 가치가 없다. 비록 복음서 기자들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더라도 한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고 할 때에는 유아들을 빼놓는 것이 아니므로, 올바른 정신이 있는 사람으로서 어찌 이런 기사를 근거로 유아들이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추론할 수 있겠는가? 이런 논리가 옳다면, 사도시대에 여자들이 주의 성찬에 참여했다는 기사가 없으므로 주의 성찬에서 여자들은 제외해야 할 것이다(16:15,32).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믿음의 법칙으로 만족한다. 성찬의 제정 정신을 숙고할 때에 어떤 사람에게 성찬을 베풀 것인가 하는 것도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우리는 세례에서도 이 원칙을 지킨다. 참으로 세례의 제정목적에 주의만 하면 세례는 큰 사람들과 똑같이 유아들에게도 합당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유아들에게서 세례를 빼앗는 것은 곧 제정하신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다. 유아세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후 오랫동안 유아세례는 사람들이 몰랐던 일이 없다는 생각을 단순한 사람들 사이에 퍼뜨린다. 이 점에서 그들의 부정직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아무리 고대의 저술가라도 유아세례가 사도 시대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9. 유아세례에서 오는 은혜

 

유아세례를 무가치하며 무익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우리는 이 행사에서 오는 유익을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받게 하는 부모들과 세례를 받는 유아 자신들에게 오는 유익을 간단하게 알려 줄 필요가 있다. 만일 무익하다는 구실로 유아세례를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주께서 명령하신 할례를 조롱하는 것이 되는데, 그들이 유아세례에 반대하기 위해 제시하는 증거 중 할례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의 육적인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곧 정죄하는 사람들의 교만을 주께서는 벌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미련한 생각을 압도하는 다른 무기를 우리에게 주신다. 그의 이 거룩한 제도는 우리의 믿음에 특별한 위로를 주며 무익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날인과 같이 어린이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표징은 경건한 부모에게 주신 약속을 확인하며, 주께서는 부모들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에게도 하나님이 되실 것이고 그의 인애와 은총을 부모들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도 천 대에 이르기까지 주고자 하신다는 것이(20:6) 확인되었다고 선언한다.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 때문에 자기들의 후손까지 생각해 주시는 것을 볼 때에,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무한한 인자하심에 깊이 감동되어, 먼저는 주의 영광을 찬양하며 다음에는 비상한 행복감이 마음에 넘쳐 인애하신 아버지를 더욱 깊이 사랑하겠다는 충만함을 품는다.

주의 약속만으로도 우리의 자녀들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확신할 수 있다는 이 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이의를 무시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다르게 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고 이 문제에서 우리를 부드럽게 다루려고 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비가 자녀들에게 미치리라는 약속을 믿는 사람들은 자녀를 교회에 바쳐 자비의 상징으로 인침을 받게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더욱 확신을 얻도록 분발하는 것을 자기의 의무로 생각해야 한다. 주의 언약이 자녀들의 몸에 새겨지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보기 때문에 더욱 확신이 생긴다. 동시에 어린이들도 세례에서 유익을 얻는다. 교회에 접붙임을 받았으므로 교회의 다른 지체들에게 얼마만큼은 더 인정을 받게 된다. 그리고 장성해서는 하나님을 경배하겠다는 열의가 더욱 고무된다. 이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깨달을 나이가 되기 전에 엄숙한 상징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되어 영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자기 자식에게 언약의 상징으로 표를 하는 것을 멸시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벌을 주시겠다고 한 그 위협을 우리는 깊이 두려워해야 한다. 이렇게 멸시하는 자에게는 주시겠다고 한 은혜를 거부하시며 취소하시기 때문이다(17:14).

 

(세례와 할례를 관련시키지 말라는 재세례파의 이론에 대답한다. 10-16)

 

10. 차이 아닌 차이를 말한다

 

이제 우리는 미친 짐승 같은 자들이 하나님의 이 거룩한 제도를 끊임없이 공격하는 데 쓰는 논법들에 대하여 검토하겠다. 첫째, 그들은 세례와 할례의 유사성 때문에 너무도 구속과 제한을 당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이 두 표징을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분리시켜서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이게 하려고 애쓴다. 이 두 표징은 서로 의미가 다르고 각각 포함된 언약도 아주 다르며 어린이들에 대한 소명도 같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 첫째 점을 증명하려고 할 때에, 들은 할례는 육을 죽이는 모형이었으나 세례의 모형은 아니었다고 한다. 우리는 기꺼이 이 점을 그들에게 양보한다. 우리의 입장을 잘 지지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견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사용하는 근거는, 세례와 할례는 육을 죽이는 표징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출발해서, 우리는 세례는 할례를 대신하며 할례가 옛날 유대인들에게 가르쳐준 의미를 우리에게는 세례가 나타내 보인다고 추론한다.

언약이 서로 다르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 그들은 만용으로 성경을 남용하며 곡해한다. 그것도 한 구절만이 아니라 취급하지 않는 구절이 없다. 그들은 유대인들을 철저히 육적인 사람으로 묘사함으로써 사람이라기보다는 짐승같이 만든다. 그들과의 언약은 현세 생활을 넘지 못했으며 그들에게 준 약속은 현세의 물질적 유익이었다고 한다. 이런 주장이 승인된다면, 유대 민족은(우리 안에 있는 돼지들을 살찌우듯이) 하나님의 은혜로 일시 배부르다가는 영원한 멸망에 빠질 운명이라는 것 외에 무엇이 남겠는가? 할례와 첨가된 약속을 우리가 말하면, 할례는 문자 그대로 표징이었으며 그 약속은 육적인 것이었다고 그들은 곧 대답하기 때문이다.

 

11. 약속은 영적인 것이었다

 

분명히 할례가 문자 그대로 표징이었다면 우리는 세례도 그런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골로새서 2장을 보면 사도는 어느 한 쪽이 더 영적인 것이라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육에 거하는 죄의 몸을 벗어버렸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손으로 행하지 않은 할례를 받았다고 사도는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부른다(2:11). 후에 이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바 되었다고 첨부한다(2:12). 이런 말씀은, 세례의 실천과 진상은 곧 할례의 진상과 실천이며 둘은 똑같은 의무를 가졌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도들은 이전에 할례가 유대인들을 위해서 하던 일을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는 세례가 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 두 표징의 약속과 신비는 서로 일치한다는 것을 이미 분명하게 설명했으므로 이제 이 점에 대해서는 이 이상 더 시간을 할애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나는 신자들에게, 바로 영적인 하늘 일을 나타내는 표징을 땅에 붙은 것, 문자 그대로의 표징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 스스로 잘 생각하라고 경고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이 단순한 사람들의 생각을 어둡게 만들지 못하도록, 그들이 아주 파렴치한 거짓말을 숨기기 위해서 사용하는 한 가지 항의를 여기서 논박하겠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재가하셨을 때에 그 언약을 포함한 근본 약속이 영적이며 영생에 관한 것이었다는 것은 아주 확실하다. 또 그 약속을 받은 조상들도 그들이 열망한 영생에 대한 확약을 얻으려고 그 약속을 영적으로 받았다는 것은(마땅한 일이었으며) 확실한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한 호의를 지상적이며 물질적인 은혜로 증명하셨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방법으로 영적인 것을 주시겠다는 약속에 대한 소망이 강화되었다고 말한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그의 종 아브라함에게 영원한 복을 약속하셨을 때에, 이 은혜를 그의 눈앞에 분명하게 보이시기 위해서 가나안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다른 약속을 첨가하셨다(15:1,18). 유대 민족에게 주신 모든 지상적인 약속은 이런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 그런 약속들은 저 영적 약속을 원천으로 삼아야 하며 영적 약속이 항상 첫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이런 문제들은 신구약간의 차이를 논할 때에 이미 상당히 자세하게 논했으므로 여기서는 더 간단히 논한다.

 

12. 신체적 및 영적 유아들

 

그들은 "자녀들"이라는 말의 사용에 있어서, 구약 시대에는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난 사람들을 그의 자녀라고 불렀고 지금은 그의 믿음을 본받은 사람들을 같은 이름으로 부른다고 구별한다. 그러므로 할례에 의해서 저 언약의 공동체에 접붙임을 받은 신체적인 유아들은 신약 시대의 영적 유아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영생을 얻도록 중생한 사람들을 예시한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이런 말에는 희미하게 진리의 불꽃이 보인다. 그러나 이 경박한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우선 손에 닿는 것을 잡고서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고, 한 마디 말에 들러붙어서는 일체 여러 가지 일을 비교하려고 하지 않는 죄를 짓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계속해서 속을 수밖에 없다. 어떤 일에 대해서도 건전한 지식을 얻으려는 노력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아브라함의 혈통이 그의 영적 후손들의 믿음에 의해서 그에게 접붙임을 받은 사람들의 자리를 일시 차지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는 본래 그와 혈연이 없었지만 그의 자녀라고 불리기 때문이다(4:28, 4:12 참조). 그러나 하나님의 영적 복이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은 후손에게 약속된 일은 전혀 없다고 하는 그들의 말은 큰 오류이다. 우리는 성경의 확실한 인도를 받아 더 나은 목표를 향해야 한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후손이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시며 그 후손으로 인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신다(12:3). 동시에 그와 그의 자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확약하신다(17:7). 그리스도를 이 복의 근원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모두 이 약속을 계승하게 되며 따라서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는 것이다.

 

13.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사람의 조상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하나님 나라의 경계선은 모든 족속 사이로 널리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세계 각지에서 신자들이 모여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하늘 영광 가운데 앉으려는 것이었다(8:11). 그러나 그보다 수천 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유대 민족에게 그와 똑같은 위대한 자비를 베푸셨다. 다른 모든 민족들을 제쳐놓으시고 이 한 민족을 택하셔서 얼마동안 그의 은혜를 그들에게만 한정시켰기 때문에 그들을 자신의 소유와(19 :5) 자신의 사신 백성이라고(15:16) 부르셨다.

유대인들에 대한 이 은혜를 확증하는 할례를 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분임을 이 상징으로 가르치려 하셨다. 이 일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의 말씀은 영생을 바라볼 수 있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기로 일단 결정한 사람에게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그러므로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같은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도는 아직 할례를 받지 않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말한다. 후에 그는 믿음으로 인한 의를 확인하는 일인 할례를 표징으로 받아서 무할례자와 할례자, ,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 할례를 자랑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 시대에 가졌던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조상이 되었다(4:10-12). 이 두 종류의 사람들에게 동등한 영예를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간 동안 아브라함은 할례자들의 조상이었다. 사도가 말하듯이(2:14),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던 담이 허물어진 후로는 이방인들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허락을 받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의 조상이 되었다. 그들에게는 세례가 있으므로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경건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의식만을 자랑하는 자들의 교만을 꺾기 위해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자들만의 조상이란 생각을 명백하게 부정한다(4:12). 지금은 세례에서 물밖에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헛된 생각을 같은 식으로 논박할 수 있다.

 

14. 유대인들과의 언약은 무효가 되지 않는다

 

반대론자들은 또 사도의 다른 구절을 내놓을 것이다(9:7). 거기서 사도는 육신으로 난 자가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에 의하여 난 자만이 그의 후손으로 인정된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아브라함 의 혈통에 의한 후손에게 어느 정도의 지위를 주는 데 비해서 사도의 말은 그것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암시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가 여기서 논하는 문제점을 더 주의해 보아야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브라함의 후손에 한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참으로 이런 혈통 자체는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스마엘과 에서를 예로 든다(9:6-13). 외인과 같이 제거된 이 두 사람은 육신으로는 아브라함의 참다운 후손이었지만 축복은 이삭과 야곱에게로 갔다. 이 사실에서 사도가 후에 주장하는 결론이 나온다. ,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에 달린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신다(9:15-16) 그러나 언약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유대인들은 언약의 이름으로 자랑할 이유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혈통을 헛되이 믿는 것을 공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과 일단 맺으신 언약은 결코 수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로마서 11장에서, 아브라함의 피를 받은 후손이 그 위엄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논한다. 이 위엄에 의해서 유대인들은 복음의 첫째가는 자연적인 후계자였고, 비록 그들이 이 은혜를 깨닫지 못함으로 인하여 무가치한 자로 버림을 받았지만 하늘의 복이 이 민족에게서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라고 사도는 가르친다. 그러므로 그들이 완고하고 언약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거룩하다고 부른다(11:16). 사도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실 가치가 있다고 여기신 세대에 큰 영예를 주었다. 그러나(우리와 그들을 비교하는 듯이) 우리는 아브라함의 유복자 또는 조산아라고 부르며 적자가 아니라 양자라고 한다. 또 마치 가지를 꺾어서 다른 나무줄기에 접붙인 것 같다고 한다(11:17).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그 특권을 빼앗기지 않도록 우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들은 이를테면 하나님의 가정에서 맏아들과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예는 그들에게 제공되었고, 그들은 제공된 것을 거절하며 은혜를 잊었기 때문에 그것이 이방인에게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완고해서 복음에 반대하여 싸우고 있지만, 우리는 저 약속 때문에 하나님의 복이 여전히 그들 위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서, 그들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 참으로 사도는 그 복이 그들에게서 완전히 제거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확언하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11:29)

 

15. 약속은 비유적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실현된다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신 약속의 가치가 무엇이며 그 가치를 어떤 저울로 달아야 할 것인가를 알아본다. 하늘나라의 상속자와 서자나 외인들과의 구별은 물론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만이 결정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특히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며 그의 자비를 더욱 분명하게 증거하시기 위해서 할례로 인을 치셨다. 오늘날 기독교 교회의 형편이 이와 같다. 바울이 그 구절에서 유대인들은 그 부모에 의해서 성화된다고 논하는 것과 같이,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자녀는 그 부모에게서 동일한 성화를 받는 다고 가르친다(고전 7:14). 이 점을 근거로 그는 불결한 죄가 있는 사람들은(고전 7: 15)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게서 분리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면 우리의 반대론자들이 내린 결론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옛날에 할례를 받은 유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중생한 영적 유아시기를 예시한 것이라고 말한다. 사도는 "그리스도께서‥‥‥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라고 말했다(15:8). 사도가 이렇게 말한 것은 마치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 그의 후손에 적용되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아버지께서 일단 약속하신 일을 이행하시려고 유대 민족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한 것처럼 알기 어려운 이론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언약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에게 비유적으로만이 아니라 문자적으로도 실현되어야 한다고 사도가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와 같은 뜻으로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향하여(2:39) 언약을 받은 그들과 그들의 후손은 당연히 복음의 은혜를 받을 것이라고 언명하며, 다음 장에서는(3:25) 그들을 "언약의 자손", , 상속자라고 부른다. 위에서 인용한 사도의 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거기서 사도는 유아들에게 새겨진 할례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친교를 가졌다는 증거라고 해석한다(2:11-13).

만일 우리가 그들의 너절한 말을 듣는다면, 주께서 율법의 둘째 계명에서 그의 종들의 후손들에게 천 대까지도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맹세하신 그 약속은 어떻게 되겠는가?(20:6) 우리는 여기서 비유로 회피할 것인가? 그것은 너무도 경박한 핑계가 될 것이다. 그 약속은 폐기되었다고 말할 것인가?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율법이 폐기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영원히 유익한 것이 되게 하시려고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오셨다(5:17).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대해서 선하시고 인자하시며, 그들을 위해서 그들이 낳은 자녀들까지도 자신의 백성으로 여겨 주신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믿어야 한다.

 

16. 세례와 할례의 다른 차이점들

 

더욱이 그들이 내세운 세례와 할례의 차이점은 우습고 조리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서로가 모순된다. 세례는 영적 전투의 첫날에 속하지만 할례는 육을 죽이는 일이 끝난 제 8일에 속한다고 그들은 말한 다음, 즉시 이 말을 잊어버리고는 논조를 바꾸어 할례는 육을 죽이는 일의 모형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세례는 매장이라고 부르며 이미 죽은 자가 아니면 매장할 수 없다고 한다. 미친 사람의 정신없는 말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조리가 없을까? 처음 언급한 대로한다면 세례가 할례보다 먼저 있어야 할 것이요 둘째 언급에서는 할례보다 뒤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들이 공상을 한 것을 모두 하나님의 가장 확실한 말씀이라고 숭배할 때, 그들의 생각이 이렇게 오락가락 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말한 차이점이 공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만일 그들이 제 8일에 대해서 비유를 말하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방법으로 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고대 저술가들에 의하면 여덟이라는 수는(8일에 있은) 부활에 관련시키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새로운 생명이 부활에 달렸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바이다. 혹은 현세 생활의 전과정에 관련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현세 생활에서는 육을 죽이는 일은 생명이 끝나고 그 일이 완성될 때까지 계속해서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할례를 제 8일까지 미루신 목적은 아직 연약한 유아들을 생각하신 것으로서 이는 갓 난 핏덩어리 같은 아기에게 할례의 상처가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미 죽은 우리가 세례에 의해서 매장된다고 하는 말은 훨씬 힘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죽어 장사지낸바 된다고 하지만 그 조건으로서 우리는 죽은 후에 육을 죽이는 일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6:4) 확실하게 주장한다.

그들은 비슷한 속임수로서, 세례가 할례와 같아야 한다면 여성들은 세례를 받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트집을 잡는다. 이스라엘 자손의 성결이 할례의 표징으로 확인된 것이 확실하다면, 이 표징으로 남녀가 다 같이 거룩하게 되도록 의도하신 것이 분명하다. 남자의 몸은 본래 할례로 인칠 수 있도록 태어났기 때문에 남자에게만 할례를 행하였으나 이런 방법으로 그들을 통해서 여자들도 할례의 동반자와 협력자가 되게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이런 미련한 말들을 물리치고 세례와 할례와의 유사점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이 두 가지는 그 내적인 신비, , 약속과 가치와 효력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유아들은 믿을 능력이 없다는 이론에 대하여 답변한다. 17-20)

 

17. 어린이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주어서는 안 되는 중대한 이유를 말하는데, 곧 어린이들은 그 나이로 인하여 세례가 의미하는 신비, , 영적 중생을 이해할 수 없으며 아주 갓난아기는 영적으로 중생 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반대론자들은 어린이들이 거듭나기에 적합한 연령이 될 때까지는 단순히 아담의 후손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는 도처에서 이 모든 이론에 반대한다. 어린이들이 아담의 후손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아담 안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으므로(5:12이하) 어린이들은 죽음 가운데 버려지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자기에게 데려오라고 명령하신다(19:14). 무슨 까닭인가? 그는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린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에게 참가하게 하신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에게 추방과 죽음을 선고한다.

만일 그들이 이런 선고를 주저하면서 어린이들은 아담의 후손으로 인정되어도 멸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들의 오류는 성경의 증거에 의해 충분히 반박된다. 성경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다고 선언하므로(고전 15:22),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생명을 얻을 소망이 없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므로 생명을 이어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친교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또 다른 구절에, 우리는 본질상 진노를 받아야 하며(2:3) 죄 중에 잉태되어(51:5) 항상 정죄 아래 있다고 하므로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앞에 열리려면 우리는 먼저 우리의 본성을 떠나야 한다. 또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차지할 수 없다는 말씀보다 더 명백하게 표현될 수 있는가?(고전 15:50)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것은 모조리 없애버려라(이것은 중생이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 요컨대 나는 생명이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선언이 진리라면(11:25, 14:6) 우리는 죽음의 사슬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선악에 대한 지식이 없는 유아들이 어떻게 중생하느냐고 묻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수포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구원을 받을 유아들을(어떤 유아들은 확실히 구원을 받으므로) 주께서 먼저 중생시키신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모태에서부터 타고난 부패가 그들에게 있다면, 오염된 것이나 부패한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21:27) 유아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그 오염된 것을 깨끗이 제거해야 한다. 다윗과 바울이 주장하듯이, 유아들이 나면서부터 죄인이라면(2:3, 51:5) 그들은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미움을 받고 불쾌하게 여기시는 대상이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의롭다함을 받아야 한다. 심판자 자신께서 하늘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은 오직 다시 난 사람들에게만 열린다고 분명히 선언하시는데(3:3) 우리는 또 무엇을 구할 것인가?

이런 반대론자들을 침묵시키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으로 한 증거를 삼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모태에서 거룩하게 만드셨으며(1:15) 다른 태아들에게도 같은 일을 하실 수 있다. 여기서도 그들은 우롱하면서 핑계를 말하지만 아무 소득도 없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그것은 한 번만 있었던 일이며 이 한 가지 예를 근거로 주께서 유아들을 매양 이렇게 다루신다는 직접적인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고 우롱한다. 그러나 우리도 이런 논리로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목적은, 제한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하나님의 힘을 좁은 범위 내에 가지려고 하는 그들의 악한 불법 행위를 폭로하려는 것뿐이다. 그들의 다른 궤변도 역시 무가치하다. 그들은 "모세로부터"라는 말은 성경의 일반적인 표현 방법에 의해서 "어렸을 때부터"라는 말과 같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천사가 사가랴에게 이 말을 했을 때에는, 요한은 나기 전부터 성령이 충만하리란 것을 의미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게 어떤 법칙을 강요해서, 원하시는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것을 막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힘은 적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에 이 아이도 원하시는 대로 거룩하게 만드셨다.

 

18. 그리스도의 유아기를 보아서

 

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아주 갓 난 유아기부터 거룩하게 함을 받으셨다. 그것은 연령의 구별 없이 그의 선민들을 자신 안에서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육으로 범한 불복종의죄를 씻어버리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육을 입으셨다. 육으로 우리를 위해서 또 우리를 대신해서 완전한 순종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은 육을 취하시며 성령의 거룩함으로 충만하셔서 그 거룩함을 우리들에게 주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주시는 모든 은혜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완전하게 얻는다면 이 점에서도 그리스도는 유아 시기가 성화에 전적으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는 증명이 되실 것이다.

그러나 선택된 사람이 현세에서 불려가기 전에 반드시 먼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성화되고 거듭난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인정한다. 반대론자들은 성경에서 성령은 썩지 않을 씨, ,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지 않은 중생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항의한다(벧전1:23). 그들은 이 점에서 베드로의 발언을 오해하였다. 베드로는 복음을 듣고 배운 신자들에 대해서만 언급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영적 중생의 유일한 씨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근거로, 유아들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중생 할 수 없다고 하는 추론에 반대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유아들을 중생시키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일,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하나님으로서는 언제든지 하실 수 있는 쉬운 일이다. 그뿐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든지 마음대로 유아들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권능을 하나님에게서 빼앗으려는 것은 불완전한 논법일 것이다.

 

19. 유아들은 설교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반대론

 

그러나 믿음은 듣는 데서 생기는데(10:17), 유아들은 아직 듣지 못하며, 그들은 선악을 모른다고 모세가 말한 것과 같이(1:39) 하나님을 알 수도 없다고 반대론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도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도가 들음을 믿음의 출발점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실 때에 보통 사용하시는 순서와 방법을 묘사한 것에 불과하지 결코 하나님에게 일정 불변의 법칙을 지정하며 다른 방법을 사용하시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그런 다른 방법으로 여러 사람을 부르셨으며 내적인 방법으로, , 설교와는 별도로 성령으로 마음속을 비추심으로써 그들에게 자신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주셨다. 그러나 모세가 선악을 분별하지 못한다고 한 유아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을 그들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하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묻고자 한다.

유아들이 조금 후에 완전히 즐길 은혜의 일부분을 지금 받는다고 말하는 것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가? 충실한 삶이 하나님을 완전히 아는 데 있다면, 어떤 어린이들이 아주 갓난아이 때에 죽어 영원한 생명으로 옮아 갈 때에 확실히 그들은 하나님 앞에 영접되어 하나님을 바라볼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미래에 그의 빛의 완전한 광채로 비추시려는 유아들을 지금 작은 불꽃으로 비추시기를 기쁘게 여기신다면, 그것을 불가하다고 할 이유는 무엇인가? 특히 그들을 이 육신의 감옥에서 구출하시기 전에 그들의 무지를 제거하시지 않은 경우에는 더욱더 그러하다. 나는 그들도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같은 믿음을 받는다든지 또는 믿음에 대해서 우리와 똑같은 지식을 가졌다고 경솔하게 단정하지 않고 결정하지 않은 채 남겨 두기로 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제멋대로 큰 소리로 부정하거나 주장하는 사람들의 우둔한 교만을 나는 조금이라도 억제하려고 한다.

 

20. 유아들은 회개하거나 믿을 능력이 없다는 반대론

 

그러나 이 점을 더욱 강경하게 주장하기 위해서 그들은 세례를 회개와 믿음의 성례라고 덧붙인다. 갓난 유아기에는 회개나 믿음이 생길 수 없으므로, 우리는 세례의 의미가 허무한 것이 되지 않도록 유아들에게 세례를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창은 우리를 향한다기보다 하나님을 향해서 던지는 것이다. 성경의 여러 증거를 보아서 할례 또한 회개의 표란 것은 아주 분명하다(4:4, 9:25, 10:16, 30:6 참조). 그리고 바울은 할례를 믿음으로 인한 의의 인이라고 부른다(4:11). 그러므로 왜 하나님께서 유아들의 몸에 할례의 인을 치셨는지는 하나님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세례와 할례는 경우가 같으므로, 우리의 반대론자들은 한쪽에 주는 것을 다른 쪽에 거부할 수 없다. 만일 그들이 유아 시기는 영적 유아들을 상징한 것이라는 상투 수단으로 도망하려 한다면 이 길은 이미 막혀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회개와 믿음의 성례로서 유아들에게 할례를 주셨으므로, 지금 유아들을 세례에 참가시키더라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제정하신 일에 노골적으로 반항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리석은 일같이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그런 것과 같이, 이 일에서도 불경건한 자들의 훼방을 충분히 물리칠만한 지혜와 의가 빛난다. 유아들은 비록 할례를 받는 순간에는 그 표징의 뜻을 그들의 지적 능력으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들은 부패하고 오염된 본성을 죽이는 할례를 참으로 받았으며, 이 죽이는 일은 장성한 후에 실행할 것이다. 요컨대 이 반대론은 쉽게 해결될 수 있다.

, 유아들은 장래의 회개와 믿음을 위해서 세례를 받으며, 아직은 회개와 믿음이 그들 안에 생기지 않았지만 성령의 은밀한 역사에 의해서 그 씨가 그들 안에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세례의 의미를 곡해해서 우리에게 반대하는 것은 이 대답에 의해서 모두 결정적으로 반박된다. 바울이 세례를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함이라고 부를 때에(3:5) 그는 세례에 이런 부전을 붙였다. 그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세례는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야 한다고 추론한다. 그러나 우리는 할례도 중생을 의미했으므로 중생한 사람이 아니면 할례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얼마든지 그들의 추론을 반박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일이 우리에 의해 정죄를 받게 된다. 따라서(이미 여러 번 시사한 바와 같이) 할례를 흔드는 경향이 있는 어떤 논법도 세례를 공격할 힘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확실한 권위에 근거한 일은 아무 이유가 없을 지라도 확고부동하지만, 하나님의 명확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권하신 것이 아닌 유아세례나 그 밖의 비슷한 일들에는 그런 경의를 표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해도 일단 이 딜레마에 빠진 이상 그들은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다. 유아 할례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이 합당하며 등한시할 수 없는 것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비난을 받아야 하든 지의 둘 중의 하나이다. 그 명령에 불합리한 것이나 어리석은 점이 없었다면 유아세례를 행하는 일에서도 불합리한 점을 발견할 수 없다.

 

(세례를 받은 어린이들 안에서 성령께서는 역사하신다. 21-22)

 

21. 어린이는 자라서 세례 받은 뜻을 깨닫는다

 

그들은 이 논제에 대해서 불합리하다는 낙인을 찍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을 씻어버리는 주장이 있다. , 주께서 선택하시기로 의도하신 유아들이 중생의 표징을 받았으나 장성하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난다면, 주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성령의 힘으로, 주만이 유익하리라고 예견하실 수 있는 방법으로 그들을 새롭게 하신다. 만일 그들이 장성해서 세례의 진리를 배울 수 있는 나이가 된다면, 갓 태어났을 때 그들에게 중생의 표를 주어 일평생 그 뜻을 명상하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그들에게 새로워지겠다는 열의가 불일 듯 일게 될 것이다.

바울이 두 구절에서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바 된다고 가르치는 것도(6:4, 2:12) 같은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바울의 말은 세례를 받을 사람은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바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세례의 근본 교리를 선언하려는 것뿐이다. 또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도 그와 같이 선언한다. 그러므로 미친 사람이라고 해도 이 구절을 근거로 해서 세례 전에 매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같은 취지로, 모세와(10:16) 예언자들도(4:4) 유아시기에 할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할례의 의미를 생각나게 했다.

동일한 취지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에게 그들이 세례를 받았을 때에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편지하였다(3:27). 어떤 의도로 그렇게 했는가? 이전에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지 않았으므로 앞으로는 그를 위해서 살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장성한 사람은 이 신비의 뜻을 이해한 다음에 표징을 받아야 하지만 유아들은 다른 순서를 밟는 것으로 생각해야 된다는 것을 곧 설명하겠다.

그들은 베드로가 말한 구절이 그들을 강력하게 지지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구절도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세례는 몸의 오염을 없애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선한 양심이 고백하는 증거라고 베드로는 말한다(벧전 3:21). 사실 이 구절에서 그들은 유아세례를 위해서는 공허한 허풍밖에 남는 것이 없다고 한다. ,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밖에 남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실상이 표징보다 시간적으로 앞서야 한다는 틀린 생각을 되풀이한다. 이는 할례의 진상도 선한 양심의 동일한 증거에 있었기 때문이다. 진상이 반드시 먼저 있어야 했다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유아들에게 할례를 주라고 명령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한 양심의 증거가 할례의 진상의 기초가 된다고 가르치면서 동시에 유아들에게 할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 경우에 할례는 장래를 위해서 부여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리신다. 따라서 유아 세례에 있어서 주께서 그들과 세우신 언약을 확인하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현재적인 효과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이 성례의 나머지 의미는 후에 하나님께서 예견하신 때에 나타날 것이다.

 

22. 세례는 어린이들에게 위로가 되므로 그들에게서 빼앗아서는 안 된다

 

이런 종류의 논법은 모두 성경을 반대로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와 비슷한 나머지 논법들을 간단하게 추궁하겠다. 그들은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해서 받는 것이라는 이의를 제시한다. 이 점을 인정할 때에 우리의 견해는 큰 지지를 받게 된다. 우리는 태어날 때에 이미 죄인이므로 모태에 있을 때부터 용서를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린이들에게서 자비의 소망을 빼앗으시지 않고 오히려 확실하게 만드신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실제보다 훨씬 낮은 표징을 그들에게서 빼앗으려 하는가? 따라서 그들이 우리에게 던지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그들에게 다시 던진다. , 유아들은 죄 사함을 받으므로 그 유아들에게서 그 표징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주께서 물로 씻어 생명의 말씀으로 교회를 깨끗하게 하셨다는 에베소서의 말씀을 인용한다(5:26). 그들 자신의 오류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 좋은 말씀을 인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쉬운 증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씻으실 때에 세례에 의한 확증을 원하신다면, 어린이들에게 이 증거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공평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어린이들을 천국의 상속자라고 부르셨으며(19:14) 그들은 당연히 교회의 일부로 인정된다. 그리고 바울이 교회는 물로 씻음으로써 깨끗하게 된다고 말할 때에 그는 보편 교회를 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가 다른 곳에서(고전 12:13)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았다고 한 말도 우리는 같은 식으로 해석하며,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지체로 인정하시는 유아들이 그의 몸에서 분리되지 않도록 그들에게 세례를 주어야 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 우리의 믿음의 요새에 가하는 그들의 공격은 맹렬하기만 하며 사용하는 무기 또한 많기도 하다.

 

(초대 교회의 유아세례. 23-24)

 

23. 어른들에 대한 성경의 말씀은 다른 증거가 없는 한 어린이들에게 그대로 적용시키지 말라

 

이제 그들은 사도 시대의 관습을 보고, 그 때에는 믿음을 고백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세례를 주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한다. 회개할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을 때, 베드로는 먼저 회개하고 다음에 세례를 받아 죄 사함을 받으라고 권고했다(2:37-38). 마찬가지로, 빌립에게 내시가 세례를 받겠다고 청했을 때 빌립은 그가 진심으로 믿는다면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8:37). 이런 기사를 읽고 그들은 먼저 믿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세례를 허락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주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논법을 인정한다면 처음 구절은 믿음에 대한 말이 없기 때문에 회개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증명이 될 것이며, 둘째 구절은 회개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증명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이 이 두 구절은 서로 보충하고 따라서 서로 연결시켜야 된다고 대답하리라고 믿는다. 나는 이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다른 구절들도 이 두 구절과 비교해야 된다고 말한다. 성경에는 문맥에 따라서 뜻을 해석해야 할 구절이 많다. 여기에 인용된 구절이 그 예다. 베드로와 빌립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회개를 생각하며 믿음을 이해할 만한 나이였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은 적어도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회개하고 믿는다는 것이 보이지 않으면 세례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강경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유아들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고대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에 들어오려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할례의 표를 받기 전에 먼저 여호와의 언약과 율법을 배워야 했다. 할례에 의해서 확인된 언약을 받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었고 그는 민족적으로 외인이었기 때문이다.

 

24. 아브라함과 이삭은 어른과 유아의 차이를 대표한다

 

여호와께서도 역시 아브라함을 택하셨을 때에, 우선 할례를 주시면서 그 표징의 의미를 감추시려 하지 않고 먼저 그와 맺으시려는 언약이 무엇인가를 언명하셨다(15:1).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믿은 후에 그를 성례에 참가하게 하셨다(17:11).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성례가 믿음 다음에 있었고 그의 아들 이삭의 경우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할 때에 먼저 있었던 것은 무슨 까닭인가? 왜냐하면, 그때까지 언약에 대해서 외인이었던 장성한 아브라함을 이제는 언약의 공동체에 받아들이려고 했으므로 먼저 언약의 조건들을 알게 하셨다는 것은 공정한 행위였지만 그의 갓난 아들은 사정이 달랐기 때문이다. 아들은 약속의 내용에 따라 상속권에 의해서 이미 모태에서부터 언약에 포함되어 있었다. 또는(문제를 더 간단명료하게 표명하기 위해서) 신자들의 자녀들이 이해력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언약에 참가하면, 언약의 조건에 대한 서약을 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표징을 거부해야 할 까닭은 무엇인가? 확실히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간혹 이스라엘의 어린이들을 자기를 위해서 낳은 자녀라고 부르신다(16:20, 23:27). 그 후손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17:7 참조) 사람들의 어린이들을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녀로 인정하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불경건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불신자는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과 연결되기 전에는 언약의 공동체에 대해서 외인으로 인정된다. 그러므로 표징의 의미가 그에게 잘못 이해되고 또 이해되지 않을 때에 그가 표징에 참가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바울도 이런 뜻으로, 이방인들이 우상 숭배에 빠져있었을 때에는 언약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2:12). 내가 오해하지만 않았다면 이 간단한 발언이 문제 전체를 분명하게 밝힐 수 있다. 장성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언약에 대해서 외인이었으므로, 언약 사회에 들어가게 하는 유일한 길이 되는 믿음과 회개가 있기까지는 그들에게 세례를 휘장으로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서 난 유아들은 직접 언약의 상속자로서 태어났으며 하나님께 용납하였으므로 세례를 주어야 한다. 죄를 고백한 사람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복음서 기자가 한 말도(3:6) 이것과 관련시켜야 한다. 우리는 지금도 이것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회교도가 세례를 받겠다고 하더라도 교회가 만족할 만한 신앙 고백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에게 쉽게 세례를 줄 수 없겠기 때문이다.

 

(유아세례를 반대하기 위해서 인용하는 구절들을 해석한다 : 세례를 받지 않은 유아들이라고 해서 다 멸망하는 것은 아니다. 25-30)

 

25.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

 

더욱이 그들은 요한복음 3장에 있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3:5) 주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세례에는 현재의 중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주께서 친히 세례를 중생이라고 부르시지 않느냐고 한다. 유아들에게 중생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잘 아는 사실인데, 우리는 무슨 구실로 중생이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세례를 그들에게 허락하느냐고 한다.

우선 그들은, ""이란 말이 있다고 해서 이 구절은 세례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곡해를 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인간의 본성이 부패했다는 것을 설명하시며 사람은 거듭나야 한다고 가르치신 후에, 니고데모가 육으로 거듭나는 것을 상상하기 때문에 여기서 하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우리를 중생시키시는 방법을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의 말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성령, , 믿는 자의 영혼을 깨끗이 씻는 데 있어서 물과 같은 일을 하는 성령에 의해서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간단하게 "물과 성령""물인 성령"이라고 해석한다. 또 이것은 신기한 표현이 아니다. 이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말씀이 마태복음 3장에 있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3:11, 3:16, 1:26,33 참조) 그러므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는 것이 성령을 주는 것이며, 성령은 중생시키는 일에서 불의 기능과 성격을 가진 것과 같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이며, 성령은 물이 몸에 대해서 하는 일을 영혼에 대해서 수행한다. 나는 다른 분들이 다른 해석을 한다는 것을 알지만 이것이 참뜻이라고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천국을 구하는 사람은 모두 그 본성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처럼 우리도 불쾌하고 너절한 비난을 하기로 작정한다면(그들이 원하는 것을 인정한 다음에) 세례가 믿음과 회개보다 앞선다고 그들을 반박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보면 물이 성령보다 앞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성령은 영적 은사를 의미하는 것이 확실하다. 영적 은사가 세례 후에 오는 것이라면 나는 바른 주장을 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런 너절한 반대론은 일체 버리고, 우리는 내가 제창한 단순한 해석을 고수해야 한다. , 생명수인 성령으로 새로워지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26.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다 멸망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을 영원한 죽음에 보내는 자들의 공상을 전적으로 배척해야 한다. 그들의 가정에 따라서 세례는 어른에게만 주는 것이라고 상상한다면, 경건에 대한 초보 지식을 올바르게 배우고 세례를 받을 날이 가까운 어린이가 모든 사람의 기대를 어기고 돌연히 죽을 경우에 그 어린이는 어떻게 될 것이라고 그들은 말할 것인가? 주의 약속은 분명하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셨다(5:24).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멸망할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어느 기록에도 없다.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세례는 멸시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그렇게 멸시한다면 주의 언약을 어기는 것이 될 것이며 나는 결코 그런 생각을 용인하지 않는다). 그런 기록이 없다는 사실은 세례를 받을 능력을 빼앗긴 사람은 멸망한 것으로 곧 인정해야 할 만큼 세례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충분하게 증명할 뿐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들의 공상에 찬성한다면, 그리스도 자신을 소유할 만큼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어떤 사정으로 세례를 받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들을 예외 없이 정죄해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구원을 위해서는 세례가 필요하다고 하기 때문에, 세례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모든 유아들에게 그들은 영원한 죽음을 선고한다. 그렇다면 유아들에게 천국을 주신(19:14)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들의 의견이 얼마나 잘 부합하는가는 그들 스스로 판단하게 하라. 이 구절에 대한 해석에 관계된 일을 우리가 다 인정한다 해도 그들에게는 아무 소득이 없을 것이다. 소득이 있으려면 우리가 이미 확립한 교리를 그들은 우선 논박해야 할 것이다.

 

27. 세례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

 

그러나 우리의 대적들은 세례의 제정 자체가 그들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견고한 보루가 된다고 자랑한다. 마태복음의 맨 끝장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을 모든 민족에게 보내시면서 먼저 그들을 가르치라고 명령하시고 다음에 세례를 주라는 둘째 명령을 하셨다고 한다(28:19). 그리고 그들은 마가복음의 맨 끝장에 있는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는 말씀을 첨가한다(16:16). 세례를 주기 전에 가르치고, 세례에는 믿음 다음가는 둘째 자리를 주어야 한다고 주의 음성이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그 이상 무엇을 더 구하느냐고 그들은 말한다. 또 주 예수께서는 서른이 되시기까지 세례를 받으시지 않음으로써 친히 이 순서의 모범을 보이셨다고 한다(3:13, 3:21-22).

기막힌 이야기다! 이 사람들이 자승자박하고 그 무지를 폭로하는 방법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스도께서는 전도를 시작하신 때부터 제자들에게 명령하셔서 세례를 주게 하셨는데, 그들이 인용하는 구절에서 처음으로 세례를 제정하셨다고 하는 것은 유치하다고만 할 수는 없는 잘못이다. 그러므로 세례가 마치 이 두 구절에서 처음으로 제정된 것같이, 거기서 세례에 관한 법칙을 연역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그들의 이 오류를 묵인한다고 가정하더라도, 도대체 이 논법은 얼마나 효과가 있는가? 만일 우리가 그것을 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은밀한 곳이 아닌 넓은 들판으로 밖에 도망할 수가 없다. 그들은 "다니며‥‥‥전파하라‥‥‥세례를 받는"(16:15) 또는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16:16)이라고 한 말씀의 순서에 집착해서 세례를 주기 전에 전파해야 하며 세례를 받으려고 하기 전에 믿어야 한다고 추론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지키라고 명령하신 일들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세례부터 주어야 한다고 우리가 그들에게 반대하지 못할 것도 없다. 주께서는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28:19-20).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중생하는 것에 관해서, 위에서 인용한 그리스도의 말씀에서도 같은 사실을 고찰하였다(3:5). 그들이 고집하는 대로 해석한다면, 여기서 세례를 먼저 말씀하셨으므로 영적 중생보다 세례가 먼저라고 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과 물로" 거듭나라고 하시지 않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28. 마가복음 16:16에는 유아들에 대한 말씀이 없다

 

그들이 논박할 수 없는 것이라고 믿는 이 근거도 이제 얼마만큼 흔들린 것 같다. 그러나 진리는 단순한 말로 풍성하게 변호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이런 점잖지 못한 방법으로 회피하려 하지 않고 그들에게 내용이 충실한 대답을 하겠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가장 중요한 명령은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이다. 세례를 주는 것은 한 부록으로 첨가하시면서 세례를 주는 일은 가르치는 일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천하 만민에게 보내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신 목적은 그들이 구원을 가르침으로써 잃어버렸던 사람들을 각지에서 그의 나라로 모으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이며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물론 교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말씀하셨다. 그 후에, 이런 사람들이 배운 다음에 세례를 주라고 첨부하시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부언하셨다(16:16). 이때 하신 설교에 유아들에 대한 말씀이 한 마디라도 있었는가? 그러면 그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어떤 형식의 논법인가? 장성한 사람들은 세례를 받기 전에 믿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유아들에게까지 세례를 주는 것은 불법이라는 논법을 쓴다. 이것은 인정할 수 없다. 그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세례를 주기 전에 먼저 복음을 가르치라는 말씀밖에 이 구절에서 더 얻어낼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근거로 유아세례를 막는 장벽을 쌓을 수 있으면, 어디 쌓아 보라.

 

29. 예수님은 성년자의 세례의 원형이시다

 

그러나 그들의 속임수를 장님이라도 볼 수 있도록 나는 명백한 비교를 사용하여 그것을 폭로하겠다. 일하는 사람만 먹을 수 있다고 사도가 말한 것을 구실로 삼아(살후 3:10), 유아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알기 어려운 이론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모든 사람이 그에게 침을 뱉어도 당연하지 않은가? 왜 일정한 종류와 일정한 연령층의 사람들에 대해서 한 말을 모든 사람에게 무분별하게 적용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경우에서 우리의 논적들의 논법이 더 능숙하다고 할 수 없다. 어른들에게만 해당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일을 그들은 유아들에게 적용해서, 성숙한 사람들을 위해서만 정한 원칙에 이 연령층을 포함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예도 그들의 입장을 전혀 돕지 않는다. 그가 세례를 받으신 것은 서른 이후였다(3:23, 3:13). 이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가르침으로 세례에 든든한 기초를 주려고 하셨다. 요한이 앞서 놓은 기초를 확고하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교훈으로 세례를 확립하려고 하셨을 때, 그 제정하시는 일에 더욱 큰 권위를 주시기 위해서 자기의 몸으로 그 제도를 거룩하게 만드셨다. 그리고 적당한 시기에, , 자기가 가르치기 시작하신 때에 실천하셨다. 요컨대 그들은 이 구절에서 세례는 복음 선포에서 처음 생겨났다는 것밖에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서른 살로 정하는 것이 좋다면, 그들은 왜 이대로 행하지 않고 그들이 보기에 적당한 나이라고 생각되는 때에 세례를 받는가?

이 나이를 고집한 그들의 한 교사인 세르베투스까지도 스물 한 살이 되기 전에 벌써 예언자라고 자랑하기 시작했다. 마치 교회의 일원이 되기도 전에 교회의 교사로서의 지위를 요구하는 사람을 신용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태도이다.

 

30. 세례와 성만찬

 

더욱이 그들의 항의는 계속된다. 유아들에게 성만찬을 허락하지 않은즉 세례를 허락할 이유도 없다고 한다. 마치 이 점에 대해서 성경이 큰 차이점을 가르치지 않은 듯이 말이다. 사실 고대 교회에서는 유아들에게 성만찬을 허락하는 것이 보통이었다는 것은 키프리아누스와 어거스틴의 글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그러나 다행히 이 관습은 폐지되었다. 세례의 특성을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확실히 교회에 들어가는 문이며 일종의 입문식이다. 세례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참여하게 된다. 세례는 우리가 영적으로 중생한다는 표징이며 중생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다. 그러나 성만찬은 유아기를 지나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는 것이다.

이 구별은 성경에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세례에 대해서는 주께서 일정한 연령을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성만찬은 모든 사람에게 제공하시지 않고, 다만 주의 몸과 피를 분간하며 자기의 양심을 검토하고 주의 죽으심을 선포하며 그 힘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제공하신다. 각각 자기를 검토하고 반성한 마음에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시라고 한 바울의 교훈보다 더 분명한 말이 필요한가?(고전 11:28) 그러므로 우선 자기반성이 있어야 하며, 이것은 유아들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 했다(고전 11:29). 그리스도의 몸의 거룩하심을 바르게 분변할 줄 아는 사람들만이 합당하게 참여할 수 있다면, 왜 우리는 유아들에게 영양분 있는 음식을 주지 않고 독을 주려고 하겠는가?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주의 명령은 무슨 뜻인가?(22:19, 고전 11:25)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사도가 주의 말씀에 의해서 명령한 것은 무슨 뜻인가?(고전 11:26) 유아들이 이해하지 못한 때 이 일을 기억하라고 우리는 어찌 그들에게 요구할 수 있는가? 유아들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힘과 유익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십자가를 선포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세례에 대해서는 이런 일이 하나도 지시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두 가지 표징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구약에 있는 비슷한 표징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런 차이를 보았다. 세례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진 할례는 유아들에게 행하라고 하셨다(17:12). 그러나 성만찬으로 대체된 유월절에는 아무 손님이나 무분별하게 참가시키지 않고, 그 뜻을 물을 만한 나이가 된 사람들만이 합당하게 먹을 수 있었다(12:26). 이 사람들에게 건전한 지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렇게 분명한 일을 보지 못하겠는가?

 

(세르베투스의 주장에 대한 대답과 결론. 31-32)

 

31. 세르베투스의 여러 가지 항의

 

사소한 이야기를 가지고 끊임없이 독자들을 괴롭히는 것을 나 역시 괴롭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베투스가 주장하는 이유들을 간단히 처리할 필요가 있는데 이 사람은 재세례파 중에서 가장 작은 자가 아닌 실로 그 족속의 가장 큰 자랑거리로서 그가 전투태세를 갖추고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가짜 이론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1.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상징들은 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한 사람들을 또는 완전하게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요구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대답하기가 쉽다. 세례는 죽는 날까지 계속되는 것인데 세례의 완전성을 어느 한 시점에 국한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그뿐 아니라 세례는 우리가 일생 동안 한 걸음씩 계속적으로 전진해서 마침내 완전성에 도달할 것을 요망하는데, 첫날에 사람에게서 완전성을 찾는 것은 미련한 생각이다.

2. 그는 그리스도의 상징들을 기념하기 위해서 제정된 것이며 모든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다는 것을 기념하라는 것이라는 이의를 제기한다. 자기의 머리로 생각해낸 것은 논박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이다. 그가 세례에 적용하는 말은, 각각 "자기를 살피라"고 한 바울의 말이(고전 11:28) 알려 주는 것과 같이 성만찬에 관련시켜야만 정당하다. 세례에 대해서는 어디에도 이런 말씀이 없다. 그러므로 아직 어려서 자기반성을 할 수 없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어도 좋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린다.

3. 그는 셋째 항의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모두 여전히 죽음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3:36), 믿을 힘이 없는 유아들은 자기가 받은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구절에서 아담의 후손 전체가 빠져 있는 전반적인 죄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고, 복음을 멸시하고 자기들에게 제시된 은혜를 교만하고 완강하게 거절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경고하신다는 것이 나의 답변이다. 그러나 이것은 유아들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다. 동시에 나는 그리스도께서 축복하시는 사람은 모두 아담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에서 해방된다는 반대 논법을 제출한다. 따라서 유아들이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은 것은 다 아는 사실이므로(19:15, 10:16) 그들은 죽음에서 해방되었다는 결론이 된다. 세르베투스는 "성령으로 나는 자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3:8 참조) 성경에 있지도 않은 말을 인용한다. 그러나 이런 말이 성경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신자들이 성령께서 그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데 따라 복종하게 된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에 대해서 한 말씀을 전체에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불합리한 짓이다.

4. 그의 넷째 항의는, 물질적인 것이 먼저 오기 때문에(고전 15:46) 영적인 세례를 위해서는 더 나이를 먹은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육으로 난아담의 후손이 모두 모태에서부터 정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즉시 대책을 마련하시지 못하셨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새로운 영적 생명의 시작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여러 해를 지정하셨다는 생각을 세르베투스도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바울이 확언하는 것과 같이, 신자의 자녀도 본성대로 한다면 혹 멸망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초자연적인 은혜에 의해서 거룩하다(고전 7:14).

5. 다음 세르베투스의 비유에서, 다윗이 시온 성에 올라갈 때에 장님과 절뚝발이들이 아닌 강건한 군인들을 데리고 갔다고(삼하 5:8) 한다. 여기에 대해서 내가 하나님께서 소경들과 저는 사람들을 하늘잔치에 초대하셨다는 비유를 인용한다면(14:21) 세르베투스는 이 난문을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또 나는 절뚝발이들과 불구자들이 이전에 다윗과 함께 일한 일이 없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독자들은 구약성경을 읽으면 곧 알 수 있기 때문에, 순전한 거짓말로 꾸며낸 이 논리를 더 이상 이야기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6. 그는 또 다른 비유를 말한다. 사도들은 사람들을 낚는 어부였지(4:19) 유아들을 낚는 어부가 아니었다고 한다. 나는 복음의 그물에는 각종 물고기가 가득하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무슨 뜻이냐고(13:47) 반문한다. 그러나 나는 비유 놀이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사도들이 가르치는 사명을 받았을 때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지 말라는 명령은 결코 받은 일이 없다고 대답한다. 또 나는 아직도 알고 싶은 일이 있다. 복음서 기자는 그들을(인간)이라고 부르는데(4:19, 이 말은 예외 없이 인류 전체를 포함한다), 왜 세르베투스는 유아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가?

7. 그의 일곱째 항의는,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과 일치하기 때문에(고전 2:13-14) 영적이 아닌 유아들은 세례를 받기에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바울의 말을 사악하게 곡해한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바울은 교리에 대해서 말한다.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자기들의 허망한 지혜를 너무도 자랑하므로 바울은 아직도 하늘 교리의 초보를 배워야 하는 그들의 우매함을 책망한다. 누가 이 말을 근거로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결론을 내릴 것인가? 육에서 난 유아들을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선택하셔서 자신에게 성별하시지 않는가?

8. 그는 그들이 새로운 사람이라면 그들에게는 영적인 음식을 먹여야 한다고 반박하는데 여기에 대한대답은 어렵지 않다. , 유아들은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양떼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단단한 음식을 받을 수 있는 어른이 될 때까지는 선택되었다는 상징만 있으면 그에게는 충분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만찬에 관해서 명백하게 요구하신 자기 성찰을 그들이 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9. 후에 그는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모든 백성을 성찬에 초대하신다고 항의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죽으심을 기념하며 기념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만을 허락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가 안아 주시기까지 한 유아들은 장성할 때까지 특이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외인이 아니라는 결론이 된다. 세르베투스는 사람이 나서 먹지 않는다는 것은 해괴한 일이라고 항의한다. 나는 대답한다. 영혼은 성찬을 외형적으로 먹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음식을 받으며, 따라서 유아들은 상징을 받지 않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음식이 되신다. 그러나 세례는 경우가 다르다. 세례에 의해서는 교회에 들어가는 문이 그들 앞에 열릴 뿐이다.

10. 세르베투스는 다시, 착한 관리인은 적합한 때에 집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눠준다고(24:45) 항의한다. 나는 이 점을 기꺼이 인정하지만, 그는 어떤 표준으로 우리가 세례 받을 때를 결정하며 유아기는 세례 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것인가? 그뿐 아니라 그는 주께서 밭이 희어지는 동안에 속히 추수하라고 사도들에게 명령하셨다고 첨가한다(4:35).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의 뜻은 사도들이 자기들이 수고한 목전의 결실을 보고 더욱 분발해서 전도하라고 하신 것뿐이다. 누가 이 말씀에서 추수 때만이 세례에 적합하다고 결론을 내릴 것인가?

11. 그의 열한 번째 논거는 초대 교회에서는 제자와 그리스도인이 동일 인물이었다는 것이다(11:26).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가 부분에서 전체를 추론하는 서툰 논법을 보았다. 제자라고 한 사람들은 성인으로서, 이미 가르침을 받고 그리스도께 소속된 사람들이었다. 율법 아래에서 유대인들이 모세의 제자가 된 것과 같다. 그러나 올바른 논법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이 사실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자기 가족이라고 확언하신 유아들을 외인이라고 추측하지 않을 것이다.

12. 세르베투스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형제들이지만 유아들은 성찬에 참가하지 못하므로 우리의 형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의 지체들만 천국의 상속자가 된다는 원칙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유아들을 안으셨다는 것은(19:13-15, 10:13-16, 18:15-17) 그들을 택하셨다는 진정한 표였다. 이 선택에 의해서 유아들은 어른들과 연합되었으며, 일시 성찬에 참가하지 않는다고 해서 교회라는 몸에 속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십자가상에서 회개한 도적은(23:40-43) 성찬에 참가한 일이 없었지만 경건한 사람들의 형제가 될 수 있었다.

13. 다음에 그는 양자의 영에(8:15) 의하지 않고는 아무도 우리의 형제가 될 수 없으며, 양자의 영은 오직 듣고 믿음으로써 받는 것이라고(3:2) 첨가한다. 나는 대답한다. 그는 항상 그릇된 논법으로 돌아간다. 여기서도 어른들에 대해서만 한 말을 유아들에게 적용해서 전후를 전도한다. 거기서(10:17, 3:5)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시는 보통 방법은 자기가택하신 사람들을 위해서 성실한 교사들을 일으키시고 그들의 직무와 수고를 통해서 자신의 손을 뻗치심으로써 택하신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신다고 가르친다. 이 말씀을 논거로 한 법칙을 세워, 하나님께서 다른 비밀한 방법으로 유아들을 그리스도에게 접붙이시는 것을 감히 금하려는 자는 누구인가?

14. 그는 고넬료가 성령을 받은 후에 세례를 받았다고 항의한다(10:44-48).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예로 일반적 원칙을 연역해 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내시와 사마리아 사람의 예를 보면(8:27-28, 8:12), 주께서는 다른 순서에 따라 세례가 성령의 은사들보다 선행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15. 열다섯째 이유는 어리석다는 정도를 넘는다. 그는, 우리는 중생에 의해서 신들이 되지만 신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며(10:34-35, 82:6 참조) 이것은 유아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신자들에게 신성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그의 한 가지 망상이지만 여기는 그것을 검토할 곳이 못 된다. 그러나 시편의 한 절을 곡해해서 이런 이질적인 뜻으로 바꾼다는 것은 극히 파렴치한 행동이다. 예언자가 왕들과 집권자들을 "신들" 이라고 부른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직책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 능숙한 해석가는 특수한 통치 명령에 관해서 일부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복음의 교리에 적용해서는 유아들을 교회에서 추방하려 한다.

16. 또 그는 유아들은 말씀에 의해서 나지 않았으므로 새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미 여러 번 말한 것을 여기서 되풀이한다. 복음의 교리는, 만일 우리가 그것을 받기에 참으로 적합하다면 우리를 중생케 하는 썩지 않는 씨이지만(벧전 1:23), 우리가 아직 배울 나이가 아닌 때에는 하나님께서는 독자적인 중생 예정표에 따르신다.

17. 후에 세르베투스는 다시 비유로 돌아가서, 율법에서 갓 난 양과 갓 난 암염소는 희생으로 바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을 비유적인 해석에 적용하고자 한다면 나는 곧 반박할 수 있다. , 초태생은 모두 성별해서 하나님께 드렸고(13:2) 양이나 염소나 일 년 된 어린 수컷을 희생물로 사용했다(12:5). 이것을 보면, 우리는 결코 강건한 성인 시기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최근에 태어난 아직 어린것을 희생으로 택하신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18. 그뿐 아니라 요한이 준비한 사람들만 그리스도에게 올 수 있었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것은 요한의 직무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나 이 점은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안아 주시고 축복하신 어린이들은(19:13-15, 10:13-16, 18:15-17) 요한에게서 준비 교육을 받은 일이 없다. , 이제 세르베투스와 그의 그릇된 원칙은 물러가도록 하라!

19. 드디어 그는 트리스메기스투스와 여자 점장이들에게 호소해서, 거룩한 씻음은 어른들에게만 적합하다는 증거를 구한다. 그리스도의 세례를 이교도들의 모독적인 의식에 일치시키려 하며 트리스메기스투스의 뜻에 따라서만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세르베투스는 그리스도의 세례를 얼마나 존경하는가?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를 더 존중한다. 하나님께서는 유아들을 자기에게 성별하시며, 비록 어린 나이로 인해 그 효력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거룩한 상징에 의해 그들을 받아들이신다. 그리고 이교도들의 속죄 의식에서 무엇을 빌려다가 우리의 세례에 적용함으로써 할례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영원불변의 법칙을 변경하는 것을 우리는 합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20. 끝으로, 그는 만일 이해력이 없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줄 수 있다면 놀이를 하는 어린이들이 한 웃음거리로 세례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가 이 문제에 관해서 하나님과 논쟁을 하도록 내버려 두라.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아직 이해력이 없는 유아들이 보통 할례를 받았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이들을 위한 할례를 우롱거리로 집행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제도를 파괴할 수 있었는가? 그러나 버림받은 자들이 마치 발광한 듯이 가장 우매하고 어리석은 생각들을 끌어다가 자기들의 오류를 변호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교만과 고집을 이런 불합리한 생각으로 처벌하신다. 나는 세르베투스가 그의 재세례파 아우들을 지지하는 힘이 약했다는 것을 밝혔다고 믿는다.

 

32. 우리의 어린이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유아세례 문제에 대한 언쟁과 논쟁으로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그들의 행위가 얼마나 경솔한 짓인가를 이제 신중한 독자들은 의심하지 않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탄이 이런 심히 미묘한 수단으로 무엇을 의도하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유아세례에서 얻을 수 있는 확신과 영적 기쁨을 우리에게서 빼앗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인애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감소시키려는 것이 사탄의 의도이다. 경건한 자들로서는, 하늘 아버지께서 자기들에게 큰 은혜를 주셔서 자기들의 자녀까지도 돌보아 주신다는 것을 말씀으로 들을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고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우리가 죽은 후에도 우리의 후손을 돌보아 주셔서 우리에 대해 계속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가장 선견지명이 있는 아버지시라는 것을 우리는 이 일에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윗을 본받아, 전심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이처럼 인애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받들어야 할 것이 아닌가?(48:10) 사탄이 이렇게 큰 군대를 동원해서 유아세례를 공격하는 목적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 증거를 우리에게서 빼앗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눈앞에 놓인 약속도 결과적으로 점점 사라지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 감사할 줄 모르는 불경건한 태도뿐만 아니라 우리의 어린이들에게 경건을 가르치지 않는 나태함이 생겨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녀들이 태어나는 즉시 자신의 자녀로 인정하신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깊이 두려워하며 율법을 지키는 길을 가르치겠다는 강력한 자극을 느낀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애를 흐리게 하려는 악의가 우리에게 있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의 유아들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유아들을 자기의 권속, , 교회의 일원으로 가입시키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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