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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 4권.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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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장 세례

 

(세례는 우리가 용서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축복에 참가한다는 징표이다. 1-6)

 

1. 세례의 의미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 하나님의 한 자녀로 인정되기 위해서 교회라는 공동체에 가입되는 입문의 표징을 세례라고 한다. 세례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그 목적은 첫째,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에 도움이 되고 둘째,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나는 이런 목적은 모든 성례에 공통된 것이라고 이미 가르쳤다). 세례의 이 두 가지에 대해서 그 이유를 차례로 논하겠다. 세례는 우리의 믿음에 세 가지 것을 가져다주는데 이제 그것을 하나씩 논하고자 한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정하신 첫째 것은, 세례는 우리가 깨끗하게 되었다는 표와 증명이 된다는 것이다. 또는(내가 의도하는 바를 좀더 설명하자면) 세례는 우리의 모든 죄가 도말되고 용서되고 소멸되어, 하나님 앞에 나타나거나 회상되거나 그 때문에 우리를 고발하는 일이 결코 없으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하는 인을 친문서와 같다고 하겠다. 믿는 자는 모두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28:19, 2:38).

따라서 세례는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데 사용하는 하나의 표와 표식에 불과하며 군인이 그 직업의 표지로서 사령관의 휘장을 달고 다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례에 가장 중요한 점이 무엇인지를 심사숙고하지 않은 사람이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는(16:16) 약속과 함께 세례를 받는 것이 세례의 가장 중요한 점이다.

 

2. 세례의 효력은 말씀 없이 물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다음 말도 이런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다(5:26). "우리를 구원하시되‥‥‥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3:5). 그리고 베드로에 의하면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벧전 3:21)고 했다.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물이 우리를 깨끗하게 씻으며 구원한다거나 물 자체에 깨끗하게 하며 중생하게 하며 새롭게 하는 힘이 있거나 여기에 구원의 원인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 성례에서 이런 은혜에 대한 지식과 확신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점은 바울의 말 자체가 아주 분명하게 설명한다. 그의 말은 마치 생명의 말씀과 물로 주는 세례를 결합해서, 마치 "우리의 정결케 됨과 성화에 대한 소식이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여지고 이런 세례를 통해서 그 소식이 인치 듯 확인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곧 이어 베드로는, 이 세례는 육에서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서 믿음에서 온 선한 양심이라고 한다(벧전 3:21). 실로 세례가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뿌림으로써 얻는 정결이지 결코 그 이외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깨끗하게 씻는다는 점에서는 유사하기 때문에 피를 물로 대신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씻는 진정한 물두멍이라고 확증하는 이 물에 대해서, 물이 우리를 깨끗이 한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이 모든 것을 물의 힘에 돌리는 사람들의 자기기만을 논박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세례의 의미에서 가장 확실한 논거를 얻을 수 있으며,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요소와 그 밖의 모든 수단들이 떠나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3. 일평생 깨끗함을 받는다는 표

 

그러나 세례는 과거를 위해서만 받은 것이며, 세례를 받은 후에 우리가 지은 죄를 위해서는 마치 전에 받은 세례의 힘이 소진한 것처럼 어떤 다른 성례에서 새로운 속죄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초기에는 이런 오류 때문에, 생명이 위급하거나 임종시가 아니면 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게 받아야만 일생 동안 지은 죄의 용서를 얻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대 감독들의 글에는 이런 어리석은 경계심을 공격하는 말이 많다. 언제 세례를 받든지 간에 우리는 일생 동안 씻음을 받고 깨끗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넘어질 때마다 세례 받은 것을 회고하며 마음을 굳게 해서 항상 사죄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세례는 한 번 받은 것이며 지나간 것같이 생각되지만, 그 후에 지은 죄로 인하여 무효가 되지는 않는다. 세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결하심을 얻었다. 그의 순결은 영원히 풍성하고, 어떤 오점으로도 더럽혀지지 않으며, 도리어 우리의 모든 더러운 것을 묻어 버리며 깨끗하게 씻어 버린다.

그러나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앞으로는 마음대로 죄를 짓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 사실은 그런 대담한 짓을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이 교훈은 오직 자기의 죄에 지치고 눌려 있는 신음하는 죄인들에게 주는 것이며, 그들을 일으키며 위로할 것이 있도록 그들이 혼란과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셨다고 했다(3:25). 바울의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다만 가련한 죄인들 곧 양심의 가책으로 상처받아서 의사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주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죄를 지을 기회와 방종을 추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야기시킬 뿐이다.

 

4. 세례와 회개의 관계

 

나는 세례에 대한 또 다른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을 안다. , 그것은 우리가 처음으로 중생했을 때에 세례만으로 받은 사죄를 세례 후에는 회개와 열쇠의 덕택으로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만들어 낸 사람들은, 그들이 말하는 열쇠의 권한도 세례에 의존되어 있으므로 세례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점에서 잘못을 범하고 있다. 죄인은 교회의 활동, , 복음 선포에 의해서 용서를 받는다. 그러나 이 선포의 성격은 어떤 것인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죄의 씻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씻음을 나타내는 표징과 증거는 곧 세례가 아닌가? 그러므로 죄의 사면은 세례와 관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오류는 저 고해 성사라는 허구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이 문제는 전에 언급했고 앞으로 적당한 곳에서 그 논의를 완결하겠다. 본성이 야비해서 외형적인 사물에 지나치게 애착을 갖는 인간이 하나님의 순수한 교훈으로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보조 수단을 고안해서 이 결점을 폭로했다는 것은 조금도 기이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세례 그 자체가 고해 성사가 아닌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일평생 고해하라고 권고한다면 세례의 힘도 똑같은 한도까지 확대해야 한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은 일생 동안 자기의 죄과를 알고 괴로울 때마다 단호하게 세례 받은 것을 회고하며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유일하고 영원한 죄의 씻음을 받았다는 확신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5.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새로워진다는 표이다

 

세례는 또 다른 유익을 준다. ,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죽는 것과 그의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 것을 알려 준다. 참으로 사도가 말한 바와 같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함이니라"(6:4). 사도는 이런 말로 우리가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우리의 욕망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아 의로운 생활을 하도록 분발하라는 경고를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말로 사도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경고할 뿐 아니라 훨씬 더 높은 것을 파악한다. ,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그의 죽음에 동참하게 하셔서 우리를 그 죽음에 접붙이려 하신다는 것이다(6:5).

가지가 그 접붙인 뿌리에서 수분과 영양을 취하듯이, 바른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그들의 육을 죽이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효과적으로 역사하는 것을 참으로 느끼며, 성령이 생명을 주시는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하는 것을 느낀다(6:8). 이것을 근거로 삼아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아야 한다고(6:11) 권고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도 이와 같은 논법을 사용했는데,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 장사된 후에 할례를 받아 옛 사람을 벗어 버렸다는(2:11-12)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내가 이미 인용한 구절과 같은 의미에서 세례를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함이라고 부른다(3:5). 이와 같이 먼저 죄의 용서와 의의 전가가 우리에게 약속되고 그 다음에 우리를 개조해서 새로운 생명을 가지게 하는 성령의 은혜가 약속된다.

 

6.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다는 표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믿음이 세례에서 받는 유익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에 접붙임이 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과 밀접하게 연합되어 그의 모든 축복을 나누게 된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그는 자기를 낮추셔서 우리와 연합하시고 친교를 맺으시고자 하시는 그 연합과 친교의 가장 견고한 유대로서 세례를 공통분모로 삼으시기 위하여 자기의 몸으로 세례를 성별하셨다(3:3).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로 옷 입혀진다는 사실을 근거로 삼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한다(3:26-27) 이와 같이 우리는 세례의 완성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 그리스도를 세례의 고유한 목적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사도들이 아버지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28:19)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고 기록된 것은(8:16, 19:5)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는 세례에서 제시되는 하나님의 모든 은사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주는 사람이 아버지와 성령의 이름도 같이 불러야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씻음을 받는 것은, 자비하신 아버지께서 그의 비할 데 없는 인애에 따라 우리를 은혜 안에 받아들이시려고 그의 앞에서 우리가 은혜를 얻도록 우리사이에 이 중보자를 두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 중생하게 되려면 반드시 성령에 의해서 성화되고 새로운 영적 본성이 주입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정결과 중생을 위해서, 이를테면 아버지에게서는 원인을, 아들에게서는 질료(質料)를 그리고 성령에게서는 효력을 얻으며 또 분명하게 분별한다. 그래서 요한이 처음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주었고 후에 사도들도 그러한 세례를 주었다(3:6,11, 3:16, 3:23, 4:1, 2:38,41). 여기서 "회개"라는 말은 이런 중생을 의미했고 "죄의 용서"는 깨끗하게 하는 것을 의미했다.

 

(요한의 세례와 사도들의 세례는 다르지 않다 : 그 뜻은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났다. 7-9)

 

7. 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세례

 

이 점을 보아서 우리는 요한의 사명과 후에 사도들에게 맡겨진 사명이 똑같은 것이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세례를 주는 사람이 다르다고 해서 세례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교훈이므로 같은 세례임을 알 수 있다. 요한과 사도들은 한 가지 교훈을 가르쳤고 그 점에서 서로 일치했다. , 다 같이 회개를 위해서, 죄의 용서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으며, 그리스도에게서 회개와 죄 사함을 얻는다고 가르쳤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했다(1:29). 요한의 이 말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희생 제물이며 의로우신 화해자며 구원을 주시는 분이라고 가르친 것이다. 사도들은 이 고백에 무엇을 덧붙여 말 할 수 있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양자를 구별하려고 애쓴 고대 저술가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권위를 너무 존중해서 성경의 확실성이 흔들리게 해서는 안 된다. 세례 요한이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고 주장한 누가의 말은(3:3) 듣지 않고, 요한의 세례에는 죄의 용서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 크리소스톰의 말에 귀를 기울일 사람이 있겠는가? 어거스틴도 요한의 세례에는 죄를 용서받을 소망이 있었고 그리스도의 세례에서는 실제적으로 용서되었다고 미묘한 구별을 했지만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누가가 요한은 그의 세례에서 죄의 용서를 약속했다고 분명히 증거하는데 왜 이 표현을 약화해야 하는가? 꼭 그렇게 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 간의 차이점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차이는 한 가지뿐이다. , 요한은 장차 오실 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고 사도들은 이미 나타나신 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3:16, 19:4)는 것이다.

 

8. 세례는 같으나 사람이 다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은 후에 성령의 은혜가 더욱 풍성하게 내렸다는 사실은 세례에 차이가 있다는 주장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지상 사역을 하실 때에 사도들이 행한 세례도 그리스도의 세례라고 했다. 그러나 그 세례도 요한의 세례보다 성령이 더욱 풍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안수하도록 파송되기 이전의 신자들보다 더 많은 성령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8:14, 17).

나는 요한의 세례는 그리스도의 세례를 위한 준비에 불과했다고 초대 저술가들이 말한 것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바울에게서 다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19:3,6) 읽고 오해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들이 오해했다는 것은 다음의 적당한 곳에서 아주 분명하게 설명하겠다.

그러면, 요한이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리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이었는가?(3:11, 3:16) 이것은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요한은 세례의 종류를 구별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와 그리스도의 인격을 비교한 것이다.

,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성령을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 권능은 사도들에게 성령을 불의 혀와 같이 보내신 날에 눈에 보이는 이적으로 나타났다(2:3). 사도들은 이이상의 무엇을 자랑할 수 있었는가? 지금 세례를 주는 사람들은 무엇을 자랑할 수 있는가? 그들은 외적인 표징을 집행하는 것에 불과하고, 내면적인 은혜를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시다. 이 점은 고대 저술가들도 각처에서 가르치며, 특히 어거스틴은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에서, 누가 세례를 주든 간에 그리스도만이 주재하신다는 것을 가장 중요한 논거로 삼았다.

 

9. 구약에 있는 세례의 원형

 

우리가 이야기한 육을 죽이는 일과 깨끗이 씻는 일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예시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그들이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했다(고전 10:2). 주께서 자기 백성을 바로의 지배와 잔인한 속박에서 구출하셔서 홍해에 그들이 건너갈 길을 만드신 후에(14:21) 그들의 뒤를 바싹 따라온 바로와 애굽 군대를 바다에 빠지게 하신 것은(14:26-28) 몸을 죽이는 일을 상징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이 주께서는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 죄의 노예 상태에서 구출하셨으며, 우리의 바로인 마귀는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며 지치게 만들지만 그는 이미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을 세례는 우리에게 약속하며 상징한다. 그러나 애굽 사람의 시체가 바다 속에 잠기지 않고 바닷가에 있어서 그 무서운 모습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놀라게 했지만 그들을 해칠 수는 없었던 것과 같이(14:30-3l), 우리의 이 원수도 여전히 위협하고 무기를 휘두르며 그 존재를 느끼게 하지만 정복할 힘은 없다.

구름에는(9:15, 13:21) 깨끗이 씻는 일의 상징이 있었다. 주께서 그들을 구름으로 덮어 서늘하게 해 주셔서 무자비한 태양열로 인하여 기진맥진하게 되지 않도록 하신 것과 같이, 우리는 세례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덮이며 보호를 받는 것을 깨닫는다. 이렇게 덮임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엄격하심이 참으로 견딜 수 없는 불꽃의 엄습을 받지 않게 된다.

그 때에는 이 신비의 뜻이 애매모호해서 아는 사람이 적었지만, 이 두 가지 은혜 외에는 구원을 얻는 길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후사로 택하신 고대 조상들에게서 두 은혜의 표징으로 빼앗으려고 하시지 않았다.

 

(우리는 세례식에 의해서 원죄로부터 풀려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 앞에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10-13)

 

10. 세례와 원죄와 새로운 의

 

그런데 세례에 대해서 일부 사람들이 오랫동안 선전했고 지금도 어떤 사람들이 고집하는 생각이 있다. 그들은 세례에 의해서 우리가 원죄에서 벗어나게 되고 원죄가 없어지게 되며 아담으로부터 모든 후손에게 유전된 부패를 면하게 되고, 아담이 창조된 대로 바르게 살았다면 얻을 수 있었을 그 의롭고 순결한 본성을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회복한다고 가르친다. 이 생각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이런 교사들은 원죄나 원래의 의나 세례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일이 전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주장한 것과 같이 원죄는 우리의 본성이 타락하고 부패한 것을 가리키며, 그 부패로 인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고, 다음에는 성경에서 "육체의 일"이라고 부른 것이(5:19)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 점에 신중하게 유의해야 한다.

우리의 본성은 모든 부분이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오직 그 이유만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와 유죄 선고를 받은 자로 인정된다. 의와 결백과 순결이 아니면 아무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아들까지도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저주를 지고 있다. 그들은 자기가 죄를 짓지는 않았으나 죄의 씨가 속에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들의 모든 본성은 죄의 씨이며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신자들은 세례에 의해서 이 저주가 그들에게서 제거되었고 취소되었다는 확약을 받는다.(이미 말한 바와 같이) 주께서는 이 표징에 의해서 우리의 죄가 완전히 용서되었고 또 우리가 받아야 할 죄책과 그 죄책으로 인해서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 다 완전히 용서되었다고 약속하시기 때문이다. 또 신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의를 얻는데 오직 전가에 의해서만 의를 얻는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의롭고 결백하다고 간주해 주시기 때문이다.

 

11. 우리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죄를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두 가지 점 중의 또 하나는, 이 비뚤어진 성질이 우리에게서 없어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새로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곧 앞에서 "육체의 일"이라고(5:19) 한 것을 만들어 낸다. 마치 뜨거운 용광로가 끊임없이 불꽃과 불똥을 내뿜으며, 샘에서 쉬지 않고 물이 솟아나는 것과 같다. 사람이 죽음으로써 그 죽음의 몸에서 해방되며 자기를 완전히 벗어버릴 때까지는 사람의 정욕은 결코 죽지 않으며 소멸되지도 않는다. 물론 세례는 우리의 바로의 군대가 물에 빠져 죽으며(14:28) 우리의 죄가 죽는다고 약속하지만, 그것은 죄가 죽는다고 해서 없어지거나 우리를 더 괴롭히지 않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정복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육체라는 이 감옥에 갇혀서 사는 동안 죄의 흔적은 항상 우리 안에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우리가 충실히 붙잡고만 있으면 죄의 흔적은 지배적인 세력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죄가 우리 안에 항상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에 자기기만에 빠지거나 자기의 죄악 생활을 변명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죄를 짓기 쉬운 사람들이 안심하고 죄악 속에서 잠자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육의 가시에 찔려 고민하는 사람들이 기진맥진하거나 실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아직 전진하는 중에 있음을 생각하여 매일 정욕이 조금이라도 약해지면 그것을 훌륭하게 전진한 것으로 믿어야 하며,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곧 이 세상에서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인 육신의 죽음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 그 때까지 끊임없이 씩씩하게 싸우며 전진하겠다는 용기를 가지고 완전한 승리를 향해서 매진해야 한다.

오랫동안 노력을 했는데도 아직 적지 않은 곤란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노력을 더욱 강화해야겠다는 분발심을 일으키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세례를 받은 목적은 우리의 육을 죽이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이 죽이는 일은 우리의 세례와 똑같이 시작해서 우리가 매일 추구해야 하며,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주에게로 옮겨갈 때에 완성될 것이다.

 

12. 바울의 내적 투쟁 : 로마서 7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아주 분명하게 설명한 것과 같은 말이다. 그는 값없이 주시는 의를 논한 다음에, 불경건한 사람들이 이 점을 논거로 삼아 우리는 행위의 공로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므로 우리 마음대로 살아야 한다고 추론하기 때문에(6:1,15)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 모든 사람들은 동시에 성령에 의해서 거듭났으며 우리는 이 중생의 약속을 세례에서 받는다고(6:3이하) 첨부한다. 따라서 죄가 그 지체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신자들에게 권고한다(6:12). 바울은 신자에게 항상 약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때문에 실망하지 않도록, 그들은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고 위로의 말을 첨가한다(6:14). 그러나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불손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바울은 율법 폐지의 성질을 논하고(7:1-6) 동시에 지금까지 두 번 연기해온 이 문제, , 율법의 용도에 대해서 논한다(2:12-24, 7:7-13). 그 요점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굳게 결합되기 위해서 엄격한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기능은우리가 자신의 부패를 깨닫고 자신의 무력함과 가련함을 고백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저 부패한 본성은 세속 사람들에게서 곧 나타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욕망대로 산다) 바울은 중생한 사람, , 자기를 예로 든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자기의 육의 흔적과 싸우며 비참한 노예 상태에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려 해도 전적으로 헌신할 수 없다고 한다(7:18-23). 그래서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하면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7 :24).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일평생 감옥 생활을 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위험한 상태를 생각하고 심히 불안해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이 공포심을 극복하기 위해서 위로의 말을 첨부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8:1) 하였다. 바울은 주께서 일단 은혜로 안으로 받아들이시고 그의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접붙이시고 세례에 의해서 교회의 공동체에 가입시키신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속하는 동안은(비록 죄에 포위를 당하고 자기 속에 죄를 가지고 다닐지라도)죄책과 정죄에서 해방되었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바울의 단순하고 바른 해석이라면 아무도 우리가 이상한 생각을 가르친다는 인상을 가질 이유가 없다.

 

13. 세례는 고백의 표

 

또 세례는 사람들 앞에서의 우리의 고백이 된다. 참으로 세례라는 표지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고 싶다는 소원을 공포하며, 세례에 의해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함께 같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같은 종교를 믿는다는 것을 증거한다. 끝으로, 우리는 세례라는 표지에 의해서 우리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혀와 우리의 모든 지체가 모든 방법으로 하나님을 높이 찬양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모든 능력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어져야 하며 다른 사람들도 우리가 하는 것을 본받아 같은 노력을 하도록 격려를 받게 된다. 바울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느냐고 물었다(고전 1:13). 그가 암시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들은 그에게 몸을 바치며 그의 이름에 충성을 맹세하고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충성하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은 세례 때에 한 고백을 취소할 생각이 없다면 앞으로는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이름을 고백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례는 그 상징된 약속을 믿고 받아야 하며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14-18)

 

14. 표징과 실상

 

이미 주께서 세례를 제정하신 목적을 설명했으므로 이제 우리는 그 세례를 어떻게 사용하며 또 어떻게 받아야 하는가를 판단하기가 쉬울 것이다. 세례는 우리의 믿음을 일으키고 자라게 하며 강화하기 위해서 주시는 것이므로 만드신 분의 손에서 직접 받는 것같이 받아야 한다.

이 표징을 통해서 말하는 이는 주님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확실하고 증명이 된 일로 생각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죄를 씻어 깨끗이 하며 죄에 대한 기억을 없애 주시는 이도 주님이시며, 우리를 그의 죽음에 참여하게 하고 사탄에게서 그 지배력을 박탈하며 우리의 정욕의 힘을 약하게 만드는 이도 주님이시며, 참으로 우리와 연합하시며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고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게 하시는 이도 그리스도이시다. 나는 그가 이 여러 가지 일을 우리 안에서 우리 영혼을 위해서 역사하시는 것은, 우리의 몸이 물로써 외적으로 깨끗해지고 물에 잠기며 물에 둘러싸이는 것을 우리가 아는 것처럼 참되고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성례의 가장 확실한 원칙은 이 유사점에 있다. , 우리는 물질에서 영적인 것을 마치 눈앞에 있는 듯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주께서 영적인 것을 이런 형상으로 나타내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은혜가 성례 안에 포함되어 있어서 그 자체의 힘으로 우리에게 부여된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주께서 이 표를 이용해서 우리에 대한 주의 뜻을, , 이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풍성하게 주시려고 하신다는 것을 확증하시기 때문이다. 또 주께서는 우리의 눈에 단순한 외형만을 보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임재 하는 실재에 인도하시며 외형이 상징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실행하신다.

 

15. 믿음을 확고하게 하는 세례

 

여기에 대한 증명으로서 우리는 백부장 고넬료의 예를 들기로 한다. 그는 이미 사죄와 성령의 보이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지만 역시 세례를 받았다(10:48). 그는 세례에 의해서 사죄를 더 많이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이 더욱 확실하게 단련되었다. 참으로 보증을 얻어 확신이 더욱 강화된 것이었다. 만일 세례 자체의 힘으로 죄가 씻기는 것이 아니라면, 왜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세례를 받고 죄를 씻으라고 했느냐고(22:16, 9:17-18 참조) 더러는 항의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는 주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을 우리의 믿음이 자각하는 데 따라 받아 얻게 되며 이 점은 주께서 처음으로 그것을 증거하실 때나 혹은 이 확증하신 것을 더욱 충분하게 또 더욱 확실하게 확인하실 때나 마찬가지라고 대답한다. 아나니아의 말은‥‥"바울이여, 당신의 죄가 용서된 것을 확신할 수 있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시오, 주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죄의 용서를 약속하십니다. 세례를 받고 확신을 얻으시오"라는 것이었다.

내가 표징과 실체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은 세례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외형적인 방법으로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다른 성례와 같이 우리는 세례에서도 믿음으로 받는 정도만큼만 얻을 뿐이다. 믿음이 없으면 이것은 배은망덕의 증거요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책망을 받아야 한다. 세례에서 주신 약속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례가 우리의 고백의 상징인 이상,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확신한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얻게 된 죄의 용서는 순결하다는 것을 세례를 통해서 증거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 가입해서 모든 신자들과 함께 믿음과 사랑의 완전한 일치 속에서 화목한 생활을 한다는 것을 증거해야 한다. 이 마지막 점을 가르치기 위해서 "우리가‥‥‥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라고 바울은 말했다(고전 12:13).

 

16. 세례는 집례 하는 사람의 공로에 달린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가 단정한 것, , 성례는 집례 하는 사람을 보고 판단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서 받는 것같이 생각해야 된다는 것이 옳다고 하자 성례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은 확실한 사실이며, 이점에서 우리는 성례를 집례 하는 사람의 가치는 성례에 아무것도 가감하지 못한다고 추론할 수 있다. 편지가 전해질 때 필적과 서명만 충분히 인정되면 전한 사람이 누구이든 또는 어떤 종류의 인간이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와 같이 성례에서도 전하는 사람이 누구이든 간에 우리 주의 필적과 인을 인정할 수만 있으면 우리는 충분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 논법은 목사의 가치에 의해서 성례의 힘과 가치를 측정한 도나투스파의 오류를 깨끗하게 반박한다. 지금 재세례파는 우리가 교황제도 아래에서 불경건한 우상 숭배자들에게서 세례를 받았으므로 올바르게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격렬하게 재세례를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받았으며(28:19) 누가 집례하든지 세례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사람들의 미련한 생각에 대항할 강력한 이론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세례를 준 사람들이 하나님을 몰랐고 심지어 하나님을 멸시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우리를 그들의 무지와 신성 모독에 참가하도록 세례를 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세례를 준 것이었다. 그들은 자기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지 다른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세례였다면 거기에는 확실히 죄를 사하고 육을 죽이며 영을 다시 살리고 그리스도께 참가하게 하신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불결하고 배교한 제사장에게서 할례를 받아도 무방했으며, 그런 표징이 무효하다고 해서 반복할 필요도 없었고, 오히려 그것은 그 진정한 원천으로 돌아가기에 충분한 수단이 되었다.

그들은 세례가 경건한 사람들의 모임에서 거행되어야 된다고 항의한다. 그러나 이 항의도, 부분적으로 결점이 있다고 해서 전체의 효력을 무효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아무 오점도 없는 순결한 세례가 되기 위해서 구비해야 할 조건을 우리는 가르치지만 우상 숭배자들이 더럽혔다고 해서 하나님의 규정을 폐기하지는 않는다. 고대에도 여러 가지 미신 때문에 할례가 부패했지만 여전히 은혜의 상징으로 인정되었다. 요시야와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버린 자들을 전국에서 불러냈을 때(왕하 18, 22, 23), 그들에게 두 번째 할례를 명령하지는 않았다.

 

17. 회개가 늦어도 세례는 유효하다

 

그런데 우리의 반대론자들은 우리가 세례를 받은 후 몇 해 동안에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는다. 이런 질문의 의도는,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세례는 우리에게 신성한 것이 되지 못하므로 우리가 받은 세례는 무효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가 눈이 멀고 믿음이 없어 세례에서 받은 약속을 오랫동안 깨닫지 못한 것은 사실이나 그 약속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항상 확고하며 믿을 만했다고 대답한다.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이고 믿을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믿을 만 하시다(3:3) 모든 사람이 멸망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구원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때에는 세례가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례에서 받은 약속을 무시했고 약속이 없으면 세례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기 시작하며 하나님의 위대한 선하심에 대해서 오랫동안 감사할 줄 모른 우리의 맹목과 완고함을 자책한다. 그러나 우리는 약속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세례에 의해서 우리에게 죄의 용서를 약속하시며 의심의 여지없이 그 약속을 모든 신자에게 실행하신다고 생각한다. 이 약속을 세례에서 우리에게 주셨으니 우리는 믿음으로 그 약속을 받아들이도록 하자. 참으로 우리의 불신으로 인하여 약속은 우리 안에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이자.

그러므로 주께서 유대 백성을 회개하라고 부르실 때,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은 불경건하고 모독적인 인간들에게서 할례를 받았으며 오랫동안 똑같이 불경건한 생활을 한 사람들이었지만 주께서는 그들에게 두 번째 할례를 명령하시지 않고 다만 마음을 돌이키라고 권고하셨을 뿐이다. 그들이 아무리 언약을 깨뜨렸을지라도 그 언약의 상징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견고하게 남아 있었고 침범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할례로 그들과 맺으신 언약은 다시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언약을 깨뜨리는 제사장의 손에서 그 언약을 받았으며, 그 후에는 그 언약을 더럽히며 무효화시키려고 전력을 다했다.

 

18. 바울은 다시 세례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바울이 다시 세례를 주었다고(19:2-7) 주장함으로써 우리에게 불붙은 창을 던진다고 상상한다. 요한의 세례와 우리가 지금 받는 세례가 똑같은 것이라는 우리의 주장이 옳다고 한다면, 그릇된 교훈을 받았던 사람들이 바른 믿음을 배운 후에 그 바른 믿음으로 다시 세례를 받았으니 바른 교리가 없는 세례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인정하며 또 우리는 지금 처음으로 맛보게 된 진정한 종교로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의 제자 중의 그릇된 열성분자가 헛된 미신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런 추측을 하는 근거를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성령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고 고백한 사실에 두고, 요한이 이렇게 무식한 제자들을 파송했을 리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유대 사람이라면 세례를 받지 않았더라도 성령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을 리가 없다. 성경에는 성령을 찬양하는 구절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성령이 있는 줄도 몰랐다고 한 그들의 대답은, 바울이 묻는 성령의 은혜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부여된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나는 그들이 받은 것은 요한의 참 세례였으며 그리스도의 세례와 똑같은 것이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부정한다. 그러면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들은 바울에게서 진정한 교리를 배웠다는 뜻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더 단순하게 해석해서 성령의 세례라고 생각한다. 바꿔 말하면, 안수함으로써 성령의 보이는 은혜를 받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은혜를 "세례"라는 말로 표시하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오순절 날에 사도들은 불과 성령의 세례에 대한 주의 말씀을(1:5) 회상했다고 한다. 베드로도 고넬료와 그 가족과 친척에게 이 은혜가 부어지는 것을 보았을 때 같은 말씀이 생각났다고 했다(11:16).

또 이것은 그 다음에 첨가된 말과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라고 했다(19:6). 누가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 사람들이 잘 쓰던 화술에 따른 것이다. , 우선은 사실의 요점을 말하고 그 다음에 더 자세히 설명하였다. 글의 전후를 보면 누구든지 이 점을 깨달을 수 있다. 누가는 그들이 이런 일들을 들었을 때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했을 때 성령이 그들 위에 내리셨다고 한다. 이 둘째 표현은 세례의 성격을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무지가 처음 세례를 타락시켰기 때문에 두 번째 세례로 시정 해야 된다면 가장 먼저 사도들부터 세례를 다시 받아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세례를 받고도 3년 동안이나 더욱 순수한 교리를 조금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들 사이에서는 주의 자비로 우리의 무지가 매일 교정되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모두 다시 침례를 받는다면 얼마나 많은 강이 있어야 충분할까?

 

(필요 이상의 의식과 여성에 의한 세례에 반대한다. 19-22)

 

19. 그릇된 세례식과 바른 세례식

 

이 신비의 힘과 가치와 유용성과 목적은 이제 충분히 명백해진 것으로 나는 믿는다. 외형적인 상징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 행해서 사람들의 무모한 짓을 억제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의 교훈에 따라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이 비천한 일인 듯이, 축복 기도라기보다는 주문이라고 할 것을 고안해서는 물을 참으로 성별하는 것을 더럽혔다. 그 후에 촛불과 성유를 첨가했다. 그러나 숨을 내쉬는 것이 세례의 문을 여는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이질적인 잡동사니의 유래가 오래 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모든 경건한 사람들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에 사람들이 감히 무엇이든지 첨가하는 것을 배척할 권리가 있다. 사탄은 복음이 시작될 때 처음부터 미련하고 속기 쉬운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사기를 쉽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더욱 야비하게 우롱을 했다. 그래서 침과 그 밖의 값싼 허식을 노골적으로 함부로 끌어들여 세례를 부끄러운 것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권위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가장 거룩하고 좋으며 안전하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단순한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고 그 마음을 죽이는 화려한 연극을 세례에서 일체 제거한다면 세례가 얼마나 개선될 것인가? 세례 받을 사람이 있을 때마다 우선 그를 회중 앞에 소개하고, 온 교회가 증인이 되어 그를 주시하며 위해서 기도하면서 그를 하나님께 드린다. 학습 교인이 배워야 할 신앙고백 문을 낭송하며 세례에서 받을 약속을 열거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학습 교인에게 세례를 준다(28:19). 그리고 끝으로 기도와 감사로 그를 자기 자리로 돌아가게 한다. 이렇게 할 때에 본질적인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이 이상한 오염에 파묻힘이 없이 그 완전한 광채를 나타낼 것이다.

세례받는 사람을 완전히 물에 잠그느냐, 세 번 잠그느냐, 한 번만 잠그느냐 또는 물을 부어 뿌리기만 하느냐 하는 이런 세밀한 점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라가 다른 사정에 따라 교회가 자유로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세례를 주다"라는 말은 잠근다는 뜻이며 고대 교회에서는 침례를 행한 것이 분명하다.

 

20. "긴급한" 세례에 반대한다

 

사사로운 개인이 세례를 집례 하는 것은 잘못이란 것도 여기서 말해 두어야 하는데, 세례와 성만찬을 집례 하는 것은 사역자들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여자들이나 모든 남자들에게 명령하시지 않고 그가 임명하신 사도들에게만 이 일을 명령하셨다. 그는 친히 합법적인 관리인의 직책을 다하시고(22:19), 그것을 본 제자들에게 그대로 성만찬을 집례 하라고 명령하셨을 때에 분명히 그들이 자기의 본을 따르기를 원하셨다.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하여 있고 당장에 성직자가 없을 때에는 평신도가 세례를 주는 것이 거의 교회의 초기부터 오랫동안 행한 관습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지지할 만한 건전한 이론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이 관습을 따랐거나 묵인한 고대 저술가들도 이것이 옳다는 확신이 없었다. 어거스틴의 말에도 이 의문이 나타나 있다. "평신도가 부득이한 경우에 세례를 준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반복해야 된다고 경건한 입장에서 말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부득이한 형편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직책을 빼앗는 것이 된다. 만일 부득이하다면 그것은 죄가 되지 않거나 소죄밖에 되지 않는다." 여자들에 관해서는, 카르타고 회의에서 여자는 일체 세례를 줄 생각을 하지 말라고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결정을 했다.

그러나 병자가 세례를 받지 않고 죽으면 중생의 은혜를 받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그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택하신다고 언급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며 우리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17:7) 이런 뜻이다. 어린아이들의 구원은 이 말씀에 포함되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은 그 자체만으로서 충분한 효력이 있다는 것을 감히 부정할 만큼 그렇게 불손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구원을 위해서는 세례가 필요하다는 잘못 설명된 교리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주는지를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결과 사람들은 조심성이 적어졌다. 물로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모두 멸망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인 우리의 형편은 하나님의 옛 백성들보다 더 나쁘다. 마치 하나님의 은혜가 율법 아래에서보다 지금은 더 제한된 듯하다. 이는 그 때에는 난지 8일 이전에 구원을 줄 만한 효력이 있던 약속이(17:7, 12절 참조) 지금은 어떤 표징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효력이 없으리라고 하니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는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약속을 폐지하러 오셨다고(5:17 참조)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1. 여성들이 세례를 주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어거스틴이 태어나기 이전의 관습은 우선 터툴리안의 글에서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으며 가르치거나 세례를 주거나 성찬을 집례 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여자가 남자의 직책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더욱이 사제의 직책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여자들이 세례를 주는 것을 허락한 마르키온을 에피파니우스는 책망했는데, 그도 이 문제에 대한 믿을 만한 증인이다.

나는 생각이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대답을 잘 안다. 정녕 부득이한 때의 비상 대책과 보통 관습과는 아주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에피파니우스가 여자들에게 세례를 집례할 권리를 주는 것은 웃음거리라고 선언하면서 예외를 인정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는 이 부패한 관습을 어떤 구실 아래에서도 용서할 수 없다고 정죄한 것이 분명하다. 3 편에서 그는, 성모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다고 가르치면서 전혀 보류 조건을 첨가하지 않는다.

 

22. 십보라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 것은 여성에 의한 세례의 선례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십보라가 한 일을 인용하여 옳지 못한 주장을 한다(4:25). 십보라가 돌을 집어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 후에 하나님의 천사가 노염을 풀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그의 행동을 가납하셨다고 그들은 추론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그렇지 않다면 앗수르에서 온 이주민들이 시작한 할례 법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왕하 17:32-33).

그러나 저 미련한 여인이 한 일을 모방한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은 다른 타당한 이유들로 증명할 수 있다. 이것은 선례로 삼아서는 안 되는 드문 일이었으며(할례를 집행하라는 분명한 명령을 제사장들에게 하셨다는 기록은 어느 곳에도 없으므로) 또 할례와 세례는 문제가 다르다고 내가 말한다면 이 주장에 대한 충분한 반박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하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가르치며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28:19). 그리스도께서 동일한 사람들을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 세례를 행하는 사람으로 임명하셨으므로,(사도가 증언하는 것과 같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아론과 같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5:4) 아무도 그 영예를 스스로 취하지 않는다. 합법적인 소명을 받지 않고 세례를 베푸는 사람은 타인의 직책 을 빼앗는 것이 된다(벧전 4:15 참조).

먹고 마시는 것과 같은 극히 사소한 일도 양심에 의심을 갖고 행하면 죄가 된다고 바울은 분명하게 말한다(14:23). 여성이 세례를 집례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규칙을 범하는 것이 분명하므로 훨씬 더 중대한 죄가 된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나누는 것은 불법이란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19:6, 10:3).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것을 더 말하지 않겠다. 독자들은 십보라에게는 하나님께 어떤 봉사를 드리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점에 유의하기를 바란다. 모세가 위험한 것을 보고 십보라는 불평하면서 노하여 아들의 포피를 땅에 던지며 남편을 나무랐기 때문에 남편까지도 하나님께 대하여 노하게 되었다. 요컨대 이 사건은 순전히 십보라의 성급함으로 일어났다. 그녀는 아들의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하나님과 남편에게 불평을 말했다. 그뿐 아니라 그가 모든 다른 점에서는 올바른 행동을 했다고 가정하더라도, 남편이 있었는데 자기가 할례를 행했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무모한 짓이었다. 그의 남편은 사사로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으뜸가는 예언자 모세였으며, 이보다 더 큰 예언자는 이스라엘에 나타난 일이 없었다. 십보라의 할례 거행이 그 때에 허락되지 않은 것도 지금 감독 앞에서 여성들이 세례를 집행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논쟁을 쉽게 즉각적으로 해결할 원칙이 있다. , 유아들이 침례를 받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난다고 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의 언약이 그 자체만으로는 무력하다는 듯이 우리가 그 언약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중대한 불법 행위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이 세례나 어떤 첨가물 때문에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후에 이 성례에 일종의 인을 첨부하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그 자체만으로는 무효이기라도 하듯 그 약속에 효력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그 약속을 확증시하려는 것뿐이었다. 따라서 신자들의 자녀가 세례를 받는 목적은, 교회에 대해서 지금까지 외인이었다가 지금 처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약속의 복을 받아 이미 그리스도의 몸에 속했으므로 이 엄숙한 표징에 의해서 교회에 가입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표징이 생략될 때에, 그 원인이 나태나 멸시나 부주의가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위험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규정을 존경하는 편이, , 주께서 임명하신 사람들에게서만 성례를 구하는 편이 훨씬 더 거룩한 일이다. 교회에서 받을 수 없을 때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성례에 결부된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주의 말씀에서 믿음으로 그 은혜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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