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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 4권. 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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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장 다른 다섯 가지 의식을 비록 지금까지는 대개가 "성례"라고 인정했으나 그것을 "성례"라고 하는 것은 거짓되며 그것이 거짓된 이유와 그 의식들의 진상을 밝힌다

 

(다섯 가지 성사(성례)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정하지 않았고 초대 교회에는 없었다. 1-3)

 

1. "성사"라는 말의 문제만이 아니다

 

성례에 대해서 우리가 위에서 논한 것을 본다면, 교훈을 잘 받고 건전한 사람들은 호기심에 더 끌리거나 주께서 제정하신 두 가지 이외의 것, , 하나님의 말씀에 없는 것을 성례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충분히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곱 가지 성사라는 관념은 거의 모든 사람들의 입에 흔히 오르내리며 모든 학파와 설교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아직까지도 깊이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나는 남아 있는 다섯 가지의 소위 성사들을 낱낱이 엄격하게 검토해서 그 기만을 벗기고, 단순한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그 진상을 폭로하며, 지금까지 성사라고 한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밝힌다면 가치 있는 일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우선 모든 선량한 사람들에게, 이 이름에 대해서 논쟁을 시작하는 것은 싸우고 싶어서가 아니며 이 이름이 남용되는 것을 공격하는 데는 여러 가지 중대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단언한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말과 만물의 주인이며 따라서 마음대로 사물에 말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경건한 태도만 유지된다면 다소 부정확한 말을 쓰더라도 용인할 수 있다. 나는 사물이 말을 따르는 것보다 말이 사물을 따르는 것이 좋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성사란 말은 문제가 다르다. 일곱 성사를 말하는 사람들은 성사는 보이지 않는 은혜의 보이는 형태라는 정의를 일률적으로 적용한다. 일곱 가지를 모두 성령의 그릇, 의를 부여하는 기구, 은혜를 얻는 수단이라고 한다.

진실로 면제집(the Sentences)의 대가 롬바르드 자신도, 모세의 율법에 있는 성사들은 그것들이 예표하는 것을 줄 수 없었으므로 그것들이 성사라고 불려지는 것은 부적당하다고 말한다. 나는 주께서 친히 성별하시고 훌륭한 약속으로 장식하신 상징들을 성사라고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한 쪽으로는 사람이 제멋대로 고안하거나 적어도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이 없이 행하는 의식들에 이 영예를 돌리는 것을 용납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사라는 단어의 정의를 바꾸든지 아니면 그 단어 사용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어리석고 비합리적인 견해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들은 종부 성사는 성사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은혜의 형상과 원인이 된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이런 추론을 결코 인정할 수 없으므로, 이런 오류의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용어 자체를 문제로 삼아 그들에게 도전한다. 여기서도 그들은 이 의식에는 외형적인 표징과 말씀이 있다는 이유를 붙여 이것을 성사라고 인정한다. 명령도 없고 약속도 없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반대할 수밖에 아무런 대책이 없지 않은가?

 

2. 하나님만이 성례를 제정하실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용어에 대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문제 자체에 대해서 필요한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위에서 무적의 논리로 확인한 것, , 성례 제정권은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것을 강경하게 주장해야 한다. 진심으로 성사는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에 의해서 신자의 양심에 용기와 위안을 주어야 한다. 양심은 사람에게서는 결로 이 확신을 얻을 수 없다. 성례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증거해야 한다. 사람이나 천사가 이것을 증거할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사가 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40:13, 11:34)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자신에 대해서 우리에게 자신의 말과 합당한 권위로 증거하신다. 성사는 하나님의 언약 또는 약속에 날인하는 장이다. 그러나 물질과 이 세상의 원소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 목적을 위해서 형성되고 예정되지 않으면 약속에 날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성사를 만들 수 없다. 하나님의 이런 위대한 신비를 이런 비천한 물질 속에 숨긴다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의 적절한 말과 같이 성사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앞서야 한다.

그뿐 아니라, 여러 가지 어리석은 일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성사와 다른 의식들을 구별하는 것이 유익하다. 사도들은 무릎을 꿇고 기도했으므로(7:60, 9:40, 20:36, 21:5, 26:14) 신자들도 무릎을 꿇으면 곧 성사가 될 것이다. 제자들은 동쪽을 향해서 기도했다고 하므로 동쪽을 향하는 것이 우리의 성사가 될 것이다. 바울은 신자들이 각처에서 깨끗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며(딤전 2: 8) 거룩한 분들은 자주 두 손을 들고 기도했다고 하므로(63:4, 88:9, 141:2, 143:6) 두 손을 펴 드는 것도 성사가 될 것이다. 결국 성자들의 모든 몸짓이 성사로 변할 것이다. 나는 이런 일들이 더 곤란한 문제들과 관련이 없다면 여기에 시간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3. 성례가 일곱 가지란 것은 고대 교회가 몰랐다

 

만일 그들이 고대 교회의 권위를 가지고 우리를 공격한다면 나는 그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교회 저술가들 가운데서는 이 일곱이라는 숫자를 찾아볼 수 없으며, 이 숫자가 언제 잠입했는지도 확실치 않다. 나는 고대 저술가들이 "성례"라는 말을 아주 자유롭게 사용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뜻으로 사용했는가? 경건에 관한 모든 외형적인 의식과 행위를 의미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관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표징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세례와 성찬의 두 가지로 만족했다.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나는 어거스틴의 증언을 인용하겠다. 그는 야누아리우스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선 이 논의의 중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기를 바란다. 그것은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복음서에서 친히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우리에게 쉬운 멍에와 가벼운 짐을 지우셨다는 것이다(11:29-30). 따라서 새로운 백성의 사회를 단결시키는 수단으로서, 수가 아주 적고 지키기 쉬운 그러면서도 의미가 매우 깊은 성례를 정하셨다. 이것이 곧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성별하는 세례와 주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과 기타 정경에 시인된 것이다." 또 기독교 교리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께서 부활하신 후에 주 자신과 사도들이 몇 가지 표징을 지정하셨다. 그것은 수가 많지 않고 쉽게 행할 수 있으며, 뜻이 극히 숭고하고, 극히 깨끗하게 지킬 수 있다. 이것이 세례와 주의 몸과 피의 기념이다." 왜 어거스틴은 이 신성시되는 "일곱"을 말하지 않는가? 만일 당시의 교회에서 일곱이 확인되었다면 그가 빠뜨렸으리라고 생각하는가? 그는 다른 데서는 불필요할 정도로 숫자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참으로 세례와 성찬을 말하면서 다른 것을 전혀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는 이 두 가지 신비가 특히 존귀하고 다른 의식들은 지위가 낮다는 뜻을 무언중에 표시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나는 이 성사의 박사들에게는 주의 말씀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굉장한 거짓말로 자랑하는 고대 교회의 찬성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이제부터 소위 성사들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겠다.

 

(견진례는 성사가 아니다 : 교육한 후에 받아들이던 고대의 관습을 회복 하라. 4-13)

 

4. 고대 교회의 관습

 

고대의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은 장성하면 감독 앞에 서서 성인으로서 세례를 받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의무를 행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학습 교인이 된 어른들은 믿음의 신비를 올바르게 배워 감독과 회중 앞에서 자기의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렸다. 유아 세례를 받은 청년들은, 아직 교회 앞에서 신앙 고백을 하지 않았으므로 소년기의 마지막이나 청년기의 초기에 부모가 다시 한 번 감독 앞에 데려다가 당시에 사용된 일정한 교리 문답 형식에 따라 심사를 받았다. 이 행동 자체가 이미 중요하고 거룩한 일이었지만, 더욱 존중하는 의미에서 안수하는 의식을 첨가했다. 이와 같이 청년들은 믿음이 인정된 후에 엄숙한 축복을 받고 물러갔다.

고대 저술가들은 이 관습에 대해서 자주 언급한다. 교황 레오가 한 말이 있다. "이단에서 돌아온 사람은 다시 세례를 받게 하지 말고 그가 받은 세례에는 성령의 권능이 없었으므로 감독의 안수로 성령을 받게 하라." 여기서 우리의 반대자들은 성령을 받는 의식을 성사라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외칠 것이다. 그러나 레오 자신이 그가 한 말의 뜻을 다른 곳에서 설명한다. "이단자들에게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세례를 다시 받을 것이 아니라 성령을 부르는 안수례에 의해서 믿음을 굳게 하라. 그는 세례를 받았으나 성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롬도 루시퍼파에 대한 반대론에서 이 점을 말한다. 나는 제롬이 이 행사가 사도 시대에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란 것을 인정하지만, 그는 이 사람들의 어리석은 생각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또 그는 이 축복하는 행위가 감독들에게만 허락되었으나 법적 필연성보다도 감독직에 대한 경의에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완화 조건까지 첨부한다. 그러므로 나는 일종의 축복 형식에 불과하다는 안수례에 전심으로 찬성하며 지금 그 순수한 사용법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5. 로마 카톨릭교가 가르치는 완성된 견진례의 의미

 

그러나 후대에 와서 실체를 거의 소멸하고 일종의 가장된 견진을 하나님의 성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들은 세례에서 죄의 결백을 위해서 받은 성령을 주어 은혜를 더하게 하고, 세례를 통하여 중생해서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싸워 나갈 힘을 더해 주는 권능이 견진례에 있다고 말한다. 견진례를 행할 때에는 기름을 바르며 일정한 선언을 한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너에게 이 거룩한 십자가의 표를 치며 구원의 성유로 너를 견진하노라." 모두가 아름답고 매혹적인 행사이다. 그러나 성령의 임재를 약속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일점일획도 보여 줄 수 없다. 그들의 성유가 성령의 그릇이란 것을 그들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우리는 진하고 미끈미끈한 액체인 기름을 보지만 그것뿐이다. 어거스틴은 "물질에 말씀을 더하라, 그러면 물질은 성물이 될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우리에게 그 기름에서 기름 이외의 무엇을 보이기를 원한다면 나는 이 말씀을 내보이라고 하겠다. 만일 그들이 성물을 분배하는 일꾼임을 스스로 인정한다면 또 그것이 마땅하지만 나는 더 싸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일꾼이 지켜야 할 첫째 법칙은 명령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이 일을 하라고 한 명령을 보이라, 그러면 나는 한 마디도 더 말하지 않겠다. 만일 받은 명령이 없다면 그들은 그 대담한 보복 행위를 변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서 왔는지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서 왔는지를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셨다. 만일 그들이 "사람에게서"라고 대답했다면 그 세례가 무익 무가치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늘로서"라고 대답했다면 그들은 요한의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을 너무 중상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감히 사람에게서 왔다고 말하지 못했다(21:25-27). 그러므로 견진례가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면 그것은 무익, 무가치하다는 것이 증명된다. 만일 우리의 논적들이 그것을 하늘에서 왔다는 것을 우리에게 설복시키려면 먼저 그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6. 사도들의 안수에 호소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진실로 그들은 사도들의 선례를 들어서 자기들의 입장을 변호한다. 그들은 사도들이 아무 일도 경솔하게 하지 않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옳은 판단이며, 만일 그들이 사도들을 진실하게 따른다면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겠다. 그러나 사도들이 한 일은 무엇인가? 사도행전에서 누가가 전하는 것을 보면,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파견했다. 그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아직 성령은 받지 못했기 때문에 사도들은 그들이 성령을 받기를 기도했다.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했을 때 그들은 성령을 받았다(8:14-17). 누가는 이 안수하는 일을 자주 언급한다(6: 6, 8:17, 13:3, 19:6)

나는 사도들이 한 일 곧 그들이 받은 직책을 충실히 이행했다는 것을 듣는다. 주께서는 그 때에 자기 백성에게 성령의 놀라운 그리고 눈에 보이는 은사를 부어 주셨으며 사도들의 안수를 통해서 그 은사들을 나눠주시고자 하셨다. 나는 이 안수에 어떤 깊은 신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해석하는 바로는, 사도들이 이 의식을 행한 것은 안수를 받는 사람을 하나님께 천거하며 이를테면 바친다는 것을 이런 몸짓으로 알리려는 것이었다.

사도들이 그 때에 행한 직책이 교회에 남아 있었다면 안수하는 일도 보존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은혜를 주시는 일은 중단되었다. 그러니 안수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성령의 지도가 없으면 교회는 존속할 수 없으므로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성령은 확실히 계신다. 목마른 사람들은 자기에게로 와서 생수를 마시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원불변한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7:37, 55:1, 4:10, 7:38 참조). 그러나 사도 시대에 안수함으로써 주시던 기적적인 권능과 나타난 역사는 이미 중단되었다. 그런 일들이 한 때만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복음의 새로운 선포와 그리스도의 새로운 나라는 일찍이 들은 일이 없는 비상한 기적들에 의해서 조명을 받고 확대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주께서 기적을 그치셨을 때, 교회를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위대함과 하나님 말씀의 존귀성이 이미 충분히 나타났다고 선언하셨다. 그러면 이 배우들은 어떤 점에서 사도들을 추종하고 있는가? 성령의 분명한 권능이 즉시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은 안수로 그것을 실현해야 될 것이다. 그러면 왜 그들은 자기들에게 안수할 권리가 있다고 장담하는가? 사도들이 안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목적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7. 기름을 바르는 것은 가짜 성사다

 

이것은 주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신 것을(20:22) 성령을 받는 성사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은 이론이다. 그러나 주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주께서 사도들의 기도로 명백한 성령의 은혜를 나눠주시기를 기뻐하셨을 때 사도들이 안수한 목적은, 그 후손들이 원숭이들처럼 단순한 흉내로 아무 유익이 없이 냉담하고 공허한 가짜 표징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니었다.

안수하는 데 있어서 그들이 사도들을 따른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하더라도(그들의 변태적 열성을 제하면 사도들과의 유사점은 없지만), 그들이 "구원의 기름"이라고 부르는 그 기름은 어디서 유래된 것인가? 누가 그들에게 기름에서 구원을 구하라고 가르쳤는가? 누가 기름에 신앙을 굳게 하는 권능을 돌리라고 가르쳤는가? 바울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떠나라고(4:9) 가르치며 이런 유치한 행사에 구속받는 것을 무엇보다도 배척하지(2:20) 않았는가? 그러나 나는 내 말이 아니라 주의 말씀으로, 기름을 "구원의 기름"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자들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기름은 배를 위한 것이요 배는 기름을 위한 것이나 주께서는 두 가지를 다 폐하실 것이다(고전 6:13 참조) 사용하면 없어지는 이 모든 무력한 물질은 영적이고 결코 썩지 않을 하나님 나라와 아무 상관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그대는 세례에 사용하는 물이나 성찬에 사용하는 떡과 포도주에 대해서도 같은 척도로 판단하느냐"고 묻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가? 나의 대답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물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점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 하나는 우리 앞에 제시되는 물질의 본질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물질 위에 새기신 형상이며, 이 성물의 힘은 전적으로 이 형상에 있다고 대답한다. 그러므로 물질이 그 본질을 유지하는 데에는 성례에서 우리 눈앞에 놓이는 떡과 포도주와 물에 대해서는 바울이 한 말이 항상 적용된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저것 다 폐하시리라"(고전 6:13) 그것들은 이 세상 형적과 함께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7:31).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별되어 성물이 된 점에서 그 물질은 우리를 육신 안에 붙들어 놓지 않고, 참으로 또 영적으로 가르친다.

 

8. 견진례는 세례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름이 얼마나 많은 괴물들을 먹여 키우는가를 더 자세히 연구해야 한다. 이 기름을 바르는 자들은 세례에서는 죄의 결백을 위해서 견진례에서는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성령을 주시며, 또 세례에서 우리는 중생해서 생명을 얻고 견진례에서 우리는 전투 준비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견진례가 없으면 세례가 올바르게 완성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파렴치하다. 이 얼마나 악한 생각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세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그의 죽으심에 참여하지 않는가?(6:4-5) 그뿐 아니라,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에 동참하는 것을 바울은 우리의 육을 죽이며 영을 살리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 이유로서는 "우리로 또한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6:6)하며, "우리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혔기" 때문이라고 한다(6:5). 이것이 바로 전투 준비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은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면, 적어도 모든 점에서 그들이 잘 복종하는 체하는 교회는 왜 존경하지 않았는가? 그들의 교리에 대해서 밀레비스 회의의 결정보다 더 강력한 반대 이유를 제시할 수 있겠는가? 거기에는, "누구든지 세례는 다만 죄의 용서를 위해서 베푸는 것이지 은혜를 받는 수단으로서 베푸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런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인용한 구절에서, 누가는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8:16) 말한다. 누가의 이 말은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10:10). 누가는 성령을 받음으로써 나타난 힘과 보이는 은혜를 받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그래서 사도들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다고 한다(2:4).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보다 훨씬 전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10:20)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면 여기서 사탄의 악하고 위험한 기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탄은 조심성이 없는 사람들을 세례에서 몰래 떼기 위해서, 세례에서 진실로 받는 것을 그의 견진례에서 받는다고 거짓말을 한다. 이것이 사탄의 교리임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원래 세례에 속한 약속을 세례에서 분리해서 다른 데로 이전한다. 우리는 이제 이 훌륭한 기름 바르는 것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냈다고 나는 주장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한다(3:27). 기름을 바르는 자들은 "우리는 전투 준비를 하게 하는 약속은 세례에서 받지 않았다"고 말한다. 처음 것은 진리의 음성이요, 나중 것은 허위의 음성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이 견진례에 대해서 그들이 지금까지 한 것보다 더 바른 정의를 할 수 있다. , 견진례는 세례에 대한 노골적인 모욕이며, 세례의 기능을 엄폐하거나 내지 폐지한다. 견진례는 마귀의 거짓 약속이며 우리를 하나님의 진리에서 떠나게 한다. 또는 견진례는 마귀의 거짓으로 더럽혀진 기름이며 단순한 사람들을 속여 암흑 속에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해도 좋다.

 

9. 구원을 위해서 견진례가 필요하다는 교리는 어리석은 이야기이다

 

더 나아가, 그들이 말하기를 신자는 모두 세례를 받은 후에 안수에 의해서 성령을 받아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며, 주교의 견진례를 받아 성유를 바르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한 사람도 없도록 해야 된다고 첨가한다. 이것은 그들이 직접 하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에 속한 일은 모두 성경에 지시되고 포함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종교의 진정한 형태를 성경 이외의 다른 곳에서 찾아 배우라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와 하늘 진리와 그리스도의 교훈 전체는 그리스도인의 초보에 불과하고, 기름이 그들을 완성시킨다고 한다. 이 문장 하나로 성유를 받은 일이 없는 모든 사도와 많은 순교자들이 정죄를 받는다. 그 당시에는, 그들 위에 부어서 기독교의 모든 세밀한 점에서 그들을 완전하게 만들 기름, 아니 아직 불완전한 그리스도인을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기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침묵을 지키더라도 이 사람들 자신이 자기의 주장을 훌륭하게 논박한다. 그들은 어느 정도의 되는 신자들에게 세례 후에 기름을 바르는가? 그들의 양떼 가운데 있는 불완전한 그리스도인들을 쉽게 치료할 수 있는데도 왜 그대로 버려두는가? 빠뜨리면 반드시 중대한 죄를 쓰게 될 일을 신자들이 빠뜨리는 것을 왜 그렇게 비겁하고 나태하게 버려두는가? 갑자기 죽어서 기회가 없었던 사람 이외에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도 필요하고 필수적인 일을 그들은 왜 더 엄격하게 요구하지 않는가? 바꾸어 말하면, 그들은 견진례가 멸시받는 것을 그렇게 너그럽게 버려둠으로써 그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무언중에 고백하고 있다.

 

10. 카톨릭 교회는 견진례를 세례보다 중요시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이 거룩한 기름 바르는 일을 세례보다 더욱 존중해야 된다고 단정하고 그 이유로서 세례는 모든 사제들이 행할 수 있지만 견진례는 주교들의 손으로만 행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까닭은 자기들의 조작품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가장 거룩한 제도를 함부로 멸시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미쳤다고 할 수밖에 없다. , 모독적인 입이로다! 너는 너의 악취 나는 입김과 중얼거리는 주문으로 더럽혀진 기름을 감히 그리스도의 성례에 대립시키며 하나님의 말씀이 성별한 물과 비교하는가? 그러나 너의 무례함에는 이것들은 사소한 일이었고 너는 심지어 이것을 원했다. 이런 말들이 바로 거룩한 교황청의 대답이며 사도적 삼각좌의 신탁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도 이런 광증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다소 완화시키기 시작한다. 그들은 견진례를 더 존중해야 된다고 말하면서, 그것은 견진례가 더 큰 힘과 유익을 주기 때문은 아닐 것이고 더 훌륭한 사람들이 신체의 더 훌륭한 부분, , 앞이마에 행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또는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해서 더 유리하고 견진례는 덕을 더욱 증진시키기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 이유를 말함으로써 스스로 도나투스파임을 폭로하지 않는가? 그들은 성례의 가치를 집행자의 가치에 따라서 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주교의 손은 더욱 가치가 있으므로 견진례도 더욱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겠다. 그러나 주교의 이 대단히 위대한 특권의 근원에 관해서 누가 묻는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변덕 이외에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사도들만이 성령을 주었으므로 사도만이 그 권리를 사용했다고 그들은 말할 것이다. 주교들만이 사도인가? 대체로 주교들은 사도인가? 그러나 이 점도 우리는 양보하기로 한다. 그들은 왜 같은 논법으로 주교들만 성찬의 피에 손을 대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주께서 사도들에게만 피를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평신도에게는 주지 않는다고 왜 주장하지 않는가? 사도들에게만 주셨다면, 왜 주교들에게만 주셨다고 추론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는 사도들을 단순한 사제들로 만들고 여기서는 현기증이 나서 방향이 달라지고 갑자기 사도들을 주교라고 한다. 끝으로, 아나니아는 사도가 아니었으나 바울은 그에 의해서 시력을 회복하고 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9:17-19). 나는 이 한 가지를 첨가하겠다. 만일 이 직책이 하나님의 권한에 의해 주교들에게 속한다면, 왜 그들은 감히 그것을 일반 장로들에게 이전했는가? 그레고리우스의 서한에서 우리는 이 일을 읽을 수 있다.

 

11. 견진례를 세례보다 중시하는 이유는 경박하다

 

하나님의 세례보다 견진례를 더 중요하다고 하는 그들의 다른 이유들도 얼마나 경박하고 어리석은가? 견진례에서는 기름을 이마에 바르지만 세례에서는 머리 위에 바른다고 한다. 세례에서는 기름을 쓰고 물은 쓰지 않는다는 말인가? 이 악한들이 그들의 누룩으로 성례의 순수성을 더럽히려는 목적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냐는 데 대하여 나는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증인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 나는 이미 다른 곳에서 성례들은 인간의 수많은 조작품들에 끼여 있어서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 빛을 보일 틈이 없다고 말했다. 만일 그때 내 말을 믿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지금 그 자신의 선생들을 믿으라. 그들은 세례에서 물을 무시하고 전혀 무가치하게 생각하면서 기름만을 존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에서는 이마도 물에 적셔진다고 반박한다. 우리는 물과 비교할 때 그대들의 기름에는 세례에서 쓰든지 견진례에서 사용하든지 간에 일고의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다. 만일 누가 기름의 매매 가격이 더 비싸다고 주장한다면 그 더 많은 값으로 인하여 본래 거기에 있는 가치까지도 더럽혀진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철저하게 추악한 사기를 비밀리에 퍼뜨리는 것은 도저히 용인할 수 없다.

견진례는 세례보다 덕을 더 많이 증진시킨다고 지껄이는 그들의 셋째 이유는 그들의 불경건을 폭로한다. 사도들은 안수함으로써 성령이 보이는 은혜를 나눠주었다. 이 사람들의 기름은 어떤 점에서 유익을 주는가? 그러나 한 가지 모독 행위를 여러 가지 모독 행위로 감싸는 이 지도자들은 물러가도록 하라.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풀려고 애쓰기보다 끊어 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12. 고대 교회의 관습은 견진례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증명할 만한 논거를 빼앗긴 것을 알고서, 그들의 상습대로 견진례는 가장 오랜 관습이며 여러 시대의 찬성으로 확정된 것인 듯이 말한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안 될 것이다. 성례는 땅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오는 것이며 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정하신다. 견진례가 성례로 인정되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는 증명을 해야 한다.

그러나 고대 저술가들이 성례에 대해서 정확하게 논하고자 할 때 어디에서도 두 가지 성례밖에 인정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들은 견진례가 고대에 있었다고 주장하는가? 우리가 믿음의 피난처를 사람들에게서 구한다면, 이 자들이 성사라고 사칭하는 것을 고대인들이 결코 성사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난공불락의 요새가 된다. 고대인들은 안수에 대해서 말하는데 과연 그들은 그것을 성사라고 했는가? 어거스틴은 안수는 기도에 불과하다고 분명하게 단정한다. 이제 그들은, 그는 안수를 견진례라고 생각하지 않고 치유적인 것 또는 화해적인 것으로 생각했다고 추악한 구별을 하면서 나를 공격할 필요가 없다. 그의 책이 현존하며 사람들 사이에 유포되어 있다. 만일 어거스틴이 그 책에 쓴 의미를 왜곡한다면, 나는 그들이 나를 여전히 질욕하는 것을 버려 둘뿐만 아니라 내게 침을 뱉어도 달게 받아들이겠다. 그는 분파 행동을 버리고 교회의 연합에 돌아온 사람들에 대해서 말한다. 그들에게 다시 세례를 줄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주께서 평화의 유대에 의해서 그들에게 성령을 주시도록 안수하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한다. 그러나 세례를 반복하지 않고 안수를 반복하는 것은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는 그 차이점을 알려 준다. "안수는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그는 말한다. 이것이 안수의 의미란 것은 다른 구절을 보아도 분명하다. "사랑은 성령의 가장 위대한 은사이며, 사랑이 없으면 다른 거룩한 것이 있을지라도 구원을 위해서는 모두가 무가치하다. 그 사랑의 유대를 위해서 바르게 돌아선 이단자들에게 안수를 하는 것이다."

 

13. 진정한 견진

 

나는 성례의 기형적 유령이라고 할 이 견진례가 나타나기 전에 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었다고 말한 그 관습이 보존되기를 충심으로 원한다. 그들이 공상하는 견진례로서 남기자는 뜻이 아니다. 견진례를 말하면 반드시 세례를 멸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직 어린이들이나 청년기에 가까운 사람들이 교회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게 하는 교육 방법으로서 보존하자는 것이다. 최선의 교육 방법은 이 일을 위해서 지도서를 준비하는 것이며, 거기에는 모든 기독교회가 찬성하며 반대하지 않는 신조의 대부분을 단순하게 요약해서 포함시켜야 한다. 열 살 된 어린이가 교회 앞에 서서 신앙을 고백하며 신조마다 질문에 대답할 것이다. 어떤 점을 모르거나 이해가 불충분하면 가르쳐 줄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가 보는 데서 어린이는 하나의 진정하고 진지한 믿음을 신도들이 한 마음으로 한 하나님을 경배하는 믿음을 고백할 것이다.

이 규율이 지금 시행된다면, 자녀 교육은 자기의 관심사가 아니라고 등한시하는 게으른 부모들을 반드시 각성시킬 것이다. 자녀 교육을 무시하면 사회적으로 수치를 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신앙 문제에 관해서 견해가 더욱 일치하게 될 것이며 신앙에 대한 무지도 적어질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신기한 사상에 경솔하게 끌려가는 일도 없게 될 것이다. 요컨대 모든 사람이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조직적인 교육을 받게 될 것이다.

 

(고해도 성사의 정의에 맞지 않는다. 14-17)

 

14. 고대 교회내의 참회

 

다음 자리에 그들은 고해를 두고 어지럽고 무질서한 설명을 하기 때문에 그들의 교리에서 양심은 아무 확실한 것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이미 다른 곳에서 회개에 대한 성경의 교훈과 그들의 주장을 자세하게 말했다. 이제는 고해를 하나의 성사라고 하는, 지금까지 교회와 학교에서 지배적인 의견을 확립한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그렇게 했는가를 간단하게 논하면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고대 교회의 의식을 구실로 삼아서 그들의 조작품을 확립하려고 하므로 우선 그 고대 의식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하겠다. 고대인들이 공적인 회개에 있어서 준수한 의식은 지정된 보속을 이행한 사람들을 엄숙한 안수에 의해서 화해시키는 것이었다.

안수식은 죄를 용서한다는 표징이었고, 이 표징에 의해서 죄인 자신은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을 얻어 하나님 앞에서 일어섰으며, 교회는 그의 죄에 대한 기억을말소하고 친절하게 그를 받아들이라는 충고를 받았다. 키프리아누스는 안수를 자주 "평화의 수여식"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행위에 더욱 중요성을 부여하며 신자들의 존경을 얻게 하기 위해서, 항상 감독의 권위가 개입하도록 규정했다. 그래서 제 2 차 카르타고 회의에서 "회개하는 사람을 장로가 미사에서 공중 앞에 화해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결정했다. 또 오랑주 회의에서는 "참회 중에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화해의 안수 없이 성찬에 참여하게 하라. 만일 병이 나으면 참회자 중에 들어가고 때가 차면 감독에게서 화해의 안수를 받게 하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제 3 차 카르타고 회의는 "감독의 허락이 없으면 장로는 참회자를 화해시키지 말라"고 결정했다. 이 모든 발언은 이 문제에 대해서 그들이 유지하고자한 엄격성이 과도한 관용 때문에 해이해지는 일이 없도록 다짐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참회자를 더욱 신중하게 검토할 것으로 기대되는 감독이 심판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키프리아누스는 다른 구절에서, 감독뿐만 아니라 성직자 전체가 안수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적당한 기간을 참회한 다음에 성찬에 와서 감독과 성직자들의 안수에 의해서 성찬에 참가할 권리를 받는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이 일은 타락했고 마침내 공개적인 참회와는 별도로 사적인 사유에도 이 의식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라티아누스는 공적 화해와 사적 화해를 구별했다.

나는 키프리아누스가 말하는 고대의 관습은 거룩하고 교회를 위해서 유익하다고 판단하며 현대에도 회복되기를 바란다. 최근에 생긴 관례에 대해서 나는 감히 배척하거나 혹평하지는 않지만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여하간 참회에서 안수하는 것은 사람이 정한 의식일 뿐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 아니며, 이것은 무해 무익한 외형적인 행위라고 알고 있다. 물론 멸시할 것은 아니지만 주의 말씀에 의해서 우리에게 천거된 의식들보다 지위가 낮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15. 고해는 성례가 아니다

 

카톨릭 교회와 스콜라 학자들은(왜곡된 해석으로 모든 것을 타락시키는 상습자들이므로) 여기서 성례를 찾아내려고 고심한다. 갈대에서 옹이를 찾는 자들이므로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죽을힘을 다한 후에도 여러 가지 의견이 엇갈려서, 문제는 복잡하고 미결 상태이며 애매모호하고 혼란한 채 여전히 두통거리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외형적인 고해는 성사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내면적인 회개, 바꿔 말하면 통회의 표징일 것이다. 그러므로 통회가 이 성사의 본체일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외형적인 고해와 내면적인 회개가 합해서 한 상징일 것이다. 둘이 아니라 하나의 완전한 성사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외형적인 고해는 성사에 불과 하며 내면적인 회개는 성사의 본체 및 성사라고 말한다. 그뿐 아니라 죄의 용서는 본체일 뿐이지 성사가 아니라고 한다.

우리가 위에서 제출한 성례의 정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표준으로 해서 카톨릭 교회가 말하는 성사를 검토해 본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서 주께서 제정하신 외형적인 의식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나의 정의가 그들도 복종해야 하는 법칙이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그들이 가장 거룩한 분으로 생각한다는 어거스틴의 말을 들어 보라. "이는 성례들은 육적인 사람들을 위해서 제정되었다. 성례를 계단으로 삼아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올라가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들의 소위 "고해 성사"에서 그들은 이와 유사한 무엇을 보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여 줄 수 있는가? 어거스틴은 다른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을 성례라고 부르는 것은, 그 안에서 한 가지 일을 보고 다른 일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은 형태가 있고 이해되는 것은 영적 결실이 있다." 이 말과 그들의 소위 고해 성사와는 부합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영적 결실을 대표하는 외형적인 형태가 없기 때문이다.

 

16. 왜 사면을 성사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이 짐승들을 그들의 투기장에서 죽이기 위해서, 만일 여기서 성사를 구한다면 외면적 또는 내면적 고해보다 사제가 선언하는 사면(absolutio)을 성사라고 하는 것이 훨씬 그럴 듯한 자랑이 아니겠느냐고 제의한다. 이 사죄 선언은 죄를 용서받았다는 신념을 강화하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또 그들의 소위 열쇠의 약속, ,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신(18:10, 16:19 참조) 약속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교리에 의하면 새로운 율법의 성사들은 그 표현하는 것을 실현해야 한다고 하는데도, 사제의 사면을 받아도 이런 사면의 확신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혹 항변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리석은 항변이다. 그들은 성찬에서 이중의 먹음을 가정하여(선악간 모든 사람의)예전적인 먹음과(선한 사람들만의)영적인 먹음을 구별하는데, 왜 그들은 이중의 사면을 받는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는가? 그러나 나는 그들의 교리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지금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그 문제를 논했을 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와는 훨씬 다르다는 것을 설명했다. 다만 나는 여기서, 그런 의심 때문에 사제의 사면을 성사라고 부르지 못할 것은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할뿐이다. 그들은 어거스틴의 입을 빌려서, 보이는 성사가 없는 성화가 있으며 내면적 성화가 없는 보이는 성사가 있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 "선택받은 자들에게서만 성사는 그 표시하는 것을 실현한다"고도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성사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로 옷 입으나 다른 사람들은 성화됨으로써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 전자는 선인과 악인이 똑같이 그리스도로 옷 입지만 후자는 오직 선인들에게만 해당된다"라고 한다. 그들이 무척 애를 쓰면서도 누구나 볼 수 있는 이렇게 분명한 일을 깨닫지 못한 것은 어리석게도 속았을 뿐만 아니라 밝은 햇빛 속에서도 눈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17. 세례는 회개의 성사이다

 

그러나 그들이 성사라고 하는 근거가 무엇이든 간에, 나는 그들이 교만해지지 않도록 그것을 성사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단정한다. 첫째로는 그런 성사의 유일한 근거인 하나님의약속이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여기서 전개되는 의식은 사람이 조작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성사의 의식은 하나님만이 제정하실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증명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소위 고해 성사에 관해서 만들어 낸 것은 거짓이며 협잡이다.

그들은 이 가짜 성사를 "파선 후의 둘째 판자"라는 적당한 이름으로 장식했다. 세례에서 받은 결백의 옷을 죄로 더럽힌 사람은 고해에 의해서 그 결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제롬의 말이라고 한다. 그들이 설명하는 뜻대로 해석한다면, 이 말은 누가 했든지 간에 분명히 불경건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세례가 죄에 의해서 말소된다는 생각이다. 또 죄인이 죄의 용서를 얻으려고 할 때마다 자기가 세례를 받은 것을 회상해서 정신을 차리고 용기를 내며 세례에서 약속된 죄의 용서를 받으리라는 신념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제롬이 거칠고 부적당하게 말한 것, , 교회가 파문해야 할 정도로 세례에서 떠난 자들은 회개함으로써 세례를 회복한다고 한 말을 이 훌륭한 해석가들은 자기들의 불경건에 맞도록 고쳐 버렸다.

그러므로 세례를 고해 성사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매우 적절한 이름이 될 것이다. 이는 충심으로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보장의 인장으로서 주시는 것이 세례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의 공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이것은 성경의 말씀과 부합하는 해석일 뿐만 아니라 고대 교회에서는 분명히 이런 해석을 확정된 원칙으로 선포했다는 것을 말해 둔다. 어거스틴이 쓴 것으로 보이는 소책자 베드로에게 주는 신앙론(Concerning Faith to Peter)에서는 세례를 "믿음과 회개의 성사"라고 부른다. 우리는 왜 저자가 불분명한 책에서 피난처를 구하는가? 복음서 기자의 말보다 더 분명한 말이 필요한가? 그는 "요한이‥‥‥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고 말한다(1:4, 3:3).

 

(종부 성사는 야고보서 5:14-15을 오해한 것이며 성례가 아니다. 18-21)

 

18. 종부 성사에 관한 성경의 말씀이란 것을 거부한다

 

셋째 거짓 성사는 종부 성사이다. 이것은 주교가 성별한 기름으로 사제만이 사람의 임종시에 행하며 그때 다음과 같은 형식의 말을 한다. "이 거룩한 도유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그 가장 인애하신 자비로, 네가 봄으로써 들음으로써 맡음으로써 또는 맛봄으로써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실 지어다" 그들은 종부 성사에 두 가지 힘, , 죄를 용서하며 필요한 때에 병에서 구원하는 힘이 있다고 상상하며, 그렇지 않다면 영혼을 구원한다고 한다.

그들은 야고보가 이 성사를 제정했다고 한다. 야고보의 말은 이것이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5:14-l5) 이 도유는 우리가 위에서 안수에 대하여 설명한 것과 같은 것이다. , 그것은 하나의 연극에 불과하며, 사도들을 본받으려는 것이지만 이유도 없고 유익도 없다.

마가의 기사를 보면, 사도들이 주의 명령에 따라 처음으로 전도 여행을 했을 때 그들은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쫓아내며 문둥병자를 깨끗이 하고 병자를 고치며, 병자를 고칠 때에는 기름을 사용했다고 한다.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고 하였다(6:13). 야고보가 장로들을 청해서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라고 한 것은 이것과 관련된 말이다.

이런 외형적인 일에 있어서 주와 사도들이 아주 자유롭게 행동한 것을 아는 사람은 이런 의식에 깊은 신비가 있는 것이 아님을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려 하셨을 때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바르셨으며(9:6) 어떤 소경은 만져서 고치셨고(9:29) 어떤 소경은 말씀만으로 고치셨다(18:42). 마찬가지로, 사도들도 어떤 병은 말만으로 고쳤고(3:6, 14:9-10) 어떤 병은 만져서 고쳤으며(5:12,16) 또 어떤 병은 기름을 발라 고쳤다(19:12).

그러나 도유와 그 밖의 방법들은 무분별하게 사용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이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도유는 치료의 도구가 아니라, 교육이 없고 무지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상징을 보고 이런 위대한 권능의 근원을 깨닫게 하며 사도들의 권능으로 돌리지 않게 하려는 상징에 불과했다. 기름이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상징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상식이다(45:7).

그러나 병을 고치는 은사는 다른 기적들과 같이 주께서 한동안 나타내기를 원하셨지만, 그 치유의 은사는 새로운 복음 선포가 영원히 놀라운 일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사라졌다. 그러므로 나는 그 때에 사도들의 손으로 나눠주신 권능을 위해서는 도유가 하나의 성사였다는 것을 전적으로 인정하지만, 지금은 도유와 우리는 아무 상관도 없다. 우리에게는 이런 권능을 나눠주는 사명을 주시지 않았다.

 

19. 종부 성사는 성례가 아니다

 

그들은 도유를 성사로 만들었는데 그렇다면 성경에 있는 다른 상징들을 성사로 만들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왜 실로암 같은(9:7) 목욕하는 못을 지정해서 병자들이 일정한 시간에 몸을 잠그게 하지 않는가? 그것은 헛될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도유하는 것보다 더 무익하지는 않을 것이다. 바울이 죽은 청년 위에 엎드림으로써 그를 살렸는데(20:10), 왜 그들은 죽은 사람 위에 엎드리지 않는가? 왜 침과 먼지로 성물을 만들지 않는가? 그러나 그들은 다른 예들은 한 번씩 있었던 것이고 이것은 야고보가 명령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다시 말하면, 야고보는 교회가 아직도 하나님의 이런 복을 받던 시대를 대표해서 말한다고 한다. 사실 그들은 지금도 같은 힘이 그들의 도유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우리의 경험은 다르다. 그들이 이렇게 대담하게 사람들의 영혼을 우롱하는 것에 놀라지 말라. 그들은 사람의 영혼이 생명과 빛인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기게 되면 감각과 시력이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신체의 살아 있는 감각을 속이려고 할 정도로 파렴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치유의 은사를 받았노라고 말함으로써 스스로 웃음거리가 된다. 물론 주께서는 어느 시대든지 그의 백성과 함께 계셔서 옛날과 같이 필요할 때마다 그들의 약함을 고쳐 주신다. 그러나 사도들의손을 통하여 주시던 보이는 권능이나 기적은 나타내시지 않는다. 그것은 일시적인 은사였으며, 사람들의 배은망덕도 한 원인이 되어 일찍 소멸하고 말았다.

 

20. 도유에는 하나님의 인정이나 약속이 없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기름을 상징으로 삼아, 그들이 받은 치유의 은사는 그들 자신의 권능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이란 것을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증거했다. 따라서 아무 효력도 없는 썩은 기름을 성령의 권능이라고 하는 자들은 성령을 중상 모략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성경에서 기름을 성령의 권능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모든 기름을 그렇게 부르며,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났다고 해서(3:16, 1:32) 모든 비둘기를 성령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그들 자신이 생각하게 하고, 우리는 그저 그들의 도유는 성사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도 아니며 아무 약속도 받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정하면 된다. 참으로 우리가 성사에 대해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이란 것과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는 두 가지 점을 요구할 때에, 우리는 동시에 그 의식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그 약속이 우리에게 적용되기를 요구한다. 지금 할례를 기독교 교회의 한 성례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셨고 하나님의 약속이 첨부된 것이지만, 우리에게 명령하신 일이 없으며 거기에 관련된 약속도 같은 조건으로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종부 성사에 관해서 맹렬히 주장하는 약속을 우리가 받은 일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하게 증명했다. 또 그들 자신도 체험으로 그것을 밝힌다. 치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아니면 이 의식을 행하는 것은 잘못이다. 병을 고친다기보다는 죽이고 난도질하는 것이 더 능한 이 백정들이 이 의식을 행하는 것도 잘못이다.

 

21. 카톨릭 교회는 야고보가 "제정한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다

 

도유에 관해서 야고보가 지시한 일은 현대에도 적용된다는 그들의 주장은 도저히 득세할 가능성이 없지만, 그들이 이긴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들이 지금까지 실행한 도유가 옳다는 증명에는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야고보는 모든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기를 원하는데(5:14), 이자들은 병자가 아니라 이미 운명하려는 임종시의 시체 같은 사람에게만 기름을 바른다.

고통을 완화하는 강한 치유력이 또는 적어도 영혼에 위안을 주는 칠이 그들의 성사에 있다면, 기회를 놓치기 전에 치료하지 않는 그들은 잔인한 자들이다. 야고보는 교회의 장로들이 병자에게 도유하기를 바라는데 이 사람들은 젊은 사제만을 도유자로서 허락한다. 야고보서에 있는 "장로들"이란 말을 "사제들"이라고 해석하며 복수를 사용한 것을 한 장식이라고 하는 것도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당시의 교회에는 사제들의 큰 무리가 있어서 성유를 가마에50a)들고 긴 행렬을 지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는 야고보가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라고 단순하게 명령하는 것은 보통 기름을 바르라는 것으로 생각한다. 마가복음에도 다른 기름 이야기가 없다(6:13). 이 사람들은 주교가 성별한 기름이 아니면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 그것은 많은 입김으로 더워진 기름, 긴 주문을 중얼거리면서 아홉 번 무릎을 꿇어 인사한 기름이다. 세 번 무릎을 꿇으면서 "평안할지어다, 거룩한 기름이여" 하고 인사하며 다시 세 번은 "평안할지어다, 거룩한 성유여" 하고 그 다음 세 번은 "평안할지어다, 거룩한 향유여"라고 한다. 그들은 어디서 이런 푸닥거리를 배웠는가? 야고보는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해서 기도를 드릴 때, 만일 죄가 있으면 용서를 받으리라고(5:14-15), , 그의 죄책이 면제되고 벌을 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기름이 죄를 씻어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병석의 형제를 위해서 드리는 신자들의 기도가 무익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 사람들은 그들의 소위 "신성한", , 가증스러운 도유에 의해서 죄가 용서된다고 사악한 거짓말을 한다. 야고보의 증거를 제멋대로 함부로 악용한 그들이 얼마나 훌륭한 이익을 얻는가를 보라. 우리가 이 증명에 더 애를 쓰지 않도록 그들의 연대기까지도 우리의 곤란을 덜어 준다. 어거스틴과 같은 시대에 로마 교회를 주재한 교황 이노센트는, 장로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이나 후손들이 필요한 때에는 기름을 사용하라는 관례를 확립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한 사람은 연대기의 저자 시지베르이다.

 

(소위 신품 성사는 성직의 7계급 때문에 복잡하게 되었다 : 신품 예식과 그 기능을 비평한다. 22-33)

 

22. 한 성사인가 또는 일곱 성사인가

 

그들의 목록에서 넷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신품 성사인데, 이것은 다산적이어서 일곱 성사를 낳았다. 그러나 그들이 일곱 성사가 있다고 말하면서 정작 셀 때에는 열 셋을 세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이다. 또 모두 한 사제직을 향한 단계이므로 한 성사를 구성한다고 그들은 주장할 수 없다. 분명히 각각 다른 의식이 있고 또 그들도 각각 다른 은혜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을 인정한다면 일곱 성사라고 해야 한다는 것은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 또 그들 자신이 분명하고 똑똑하게 일곱 가지를 선언하는데 왜 우리는 의심스러운 점이 있는 것같이 논의하는가?

그러나 우리는 첫째, 그들이 신품을 성사라고 선전할 때 얼마나 많은 또 어떤 불쾌한 불합리를 우리들에게 덮어씌우려고 하는가를 우선 간단히 취급하겠다. 둘째, 교회들의 성직자 임명식을 대체로 성사라고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찰하겠다.

그들은 일곱 가지 신품, , 성직 계급을 말하며 그것을 "성사" 라고 부른다. 일곱 신품은 수문품과 강경품과 구마품과 시종품과 차부제품과 부제품과 사제품이다. 그들은 이 일곱 계급은 성령의 일곱 가지 은혜에 해당한다고 까지 말하며, 이 직위들에 승진되면 그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승진됨에 따라 은혜가 증대되며 더욱 풍부하게 쌓인다고 한다.

그런데 이 수효 자체는 성경을 왜곡한 데서 신성시하게 되었다. 이사야는(11:2) 여섯 가지만을 말하는데, 그들은 성령의 일곱 가지 권능에 대해서 읽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예언자는 여섯으로 국한하려고 하지 않았다. 다른 데서는 성령을 "생물의 신"(1:20), "성결의 영"(1:4), "양자의 영"(8:15)이라 하고, 이사야서에서는 "지혜와 총명, 모략과 재능,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라고 부른다.

비교적 총명한 자들은 개선교회의 모습을 따른다고 하면서 일곱 신품이 아닌 아홉 신품을 말한다. 그들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사람들은 성직자의 삭발을 첫 계급으로 그리고 주교직을 마지막 계급으로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은 삭발을 제거하고 대주교를 한 계급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시도루스의 구분은 다르다. 그는 성가 대원과 강경사를 구별해서, 성가 대원은 노래를 부르며 강경사는 신자들의 교육을 위해서 성경을 낭독한다고 한다. 교회법은 이 구분을 따른다.

이렇게 다양한 주장 가운데서 그들은 우리에게 어느 것을 따르고 어느 것을 피하라고 하는가? 우리는 일곱 신품이 있다고 할 것인가? 스콜라 학파의 대가 롬바르드는 그렇게 말하지만 가장 유식한 학자들은 다른 말을 한다. 그러나 그 학자들도 서로 생각이 다르다. 그뿐 아니라 가장 거룩한 교회법이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거룩한 일에 대한 논의를 할 때에는 이렇게도 의견이 일치한다.

 

23. 그리스도께서는 일곱 직분을 다 가지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각 계급에서 그리스도를 그들의 동료로 만들어 가장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 우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쫓아 내셨을 때(2:15, 21:12) 문지기의 직분을 다하셨다고 말한다. 그는 "나는 양의 문이라"(10:7) 하심으로써 자신이 문지기이심을 알리신다.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읽으심으로써(4:17) 강경사의 기능을 다하셨다. 귀먹은 벙어리의 두 귀에 손가락을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셔서 그를 다시 듣게 만드셨을 때에(7:32-33) 구마사의 직책을 다하셨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라고 하심으로써(8:12) 시종이심을 증거하셨다.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써(13:4-5) 차부제의 일을 하셨다. 만찬에서 몸과 피를 분배하셨을 때에 부제의 일을 하셨다(26:26). 십자가상에서 아버지께 자신을 제물로 드리심으로써(27:50, 5:2) 사제의 역할을 다하셨다. 이런 말을 들을 때에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말을 기록한 것이 사람이라면, 대체 어떻게 웃지도 않고 이런 내용을 기록했을까 해서 놀라울 뿐이다. 그들은 그들의 교활함을 가장 잘 발휘해서 "시종"이라는 칭호에 대해 깊은 사색을 하며 시종을 세촉 봉사자라고 부른다. 이것은 마술 용어라고 나는 추측하는데, 여하간 어떤 나라나 어떤 국어에도 없는 말이다. ajkovlouqo"(시종의 라틴어 acoluthus의 어원인)를 희랍 사람들은 "하인"이라는 뜻으로 사용했을 뿐이다. 그러나 내가 정색을 하고 이런 의견들을 논박하는 데 시간을 보낸다면 내 자신이 당연히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만큼 보잘 것 없는 어리석은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24. 낮은 계급은 직책을 전혀 이행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지한 여자들까지도 이런 말에 속지 않도록 그 허망한 정체를 폭로시키고 지나가야겠다. 그들은 굉장히 찬란하고 엄숙한 의식으로 강경사와 성가대원과 문지기와 시종들을 임명해서 각각 직책을 위임한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소년들이나 적어도 그들이 "평신도" 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시키고 있다. 촛불을 켜며 병에서 포도주와 물을 따르는 것은 그런 일로 살아가는 소년이나 가련한 평신도가 제일 많이 하지 않는가? 바로 그들이 노래를 부르지 않는가? 또 그들이 역시 교회 문을 열고 닫지 않는가? 시종이나 문지기가 교회에서 자기의 직분을 다하는 것을 누가 본 일이 있는가? 어려서 시종의 일을 하던 사람이 시종으로서 성직자가 되면 시종의 일을 하지 않으니, 결국 그들은 어떤 칭호를 가지게 되면 그 칭호에 해당하는 직책을 버리려고 신중하게 계획하는 것 같다. 그들이 성사에 의해서 성별되며 성령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까닭을 알 수 없다. 그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만들자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성직자들이 직책을 태만히 하고 돌보지 않는 것은 시대가 악하기 때문이라고 그들이 말한다면, 그들은 동시에 그들이 굉장히 치켜세우는 성직들이 현대 교회에서는 아무 가치나 유익이 없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그리고 시종으로 성별되지 않으면 초와 병에 손을 댈 수 없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소년들과 세속 사람들에게 그 일을 시키며 성별된 입술만 불러야 한다는 성가를 소년들에게 맡기고 있으니, 그들의 교회는 전적으로 저주로 가득하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또 그들은 무슨 목적으로 구마사들을 성별하는가? 나는 유대인들에게 구마사가 있었다는 말을 들으나 그들은 그런 일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졌다(19:13). 이 거짓 구마사들이 한 번이라도 그들의 공적 직무를 실행했다는 말을 들은 사람이 있는가? 그들은 정신병자와 학습 교인과 귀신 들린 사람들에게 안수할 권능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귀신을 이해시킬 수 없다. 귀신들은 그들의 명령을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들에게 명령한다. 그들 중에는 악령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이 십분의 일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급 성직에 대한 그들의 막연한 말은 무식하고 불쾌한 거짓말들을 꿰맨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교회 제도를 논할 때 옛날 시종과 문지기와 강경사들에 대해서 말했다. 여기서는 다만 성직의 일곱 계급이라는 이 최신식 발명에 반대하려는 것이 우리의 의도이다. 이 신발명에 대한 이야기는 무식한악덕 변호사들 곧 소르본느 신학파들과 교회법 학자들이 쓴 글에서만 읽을 수 있다.

 

25. 성별 의식, 특히 삭발식

 

이제부터 그들이 사용하는 예식들을 보기로 하겠다. 그들은 성직자로 채용하는 모든 사람에게 우선 공통된 상징을 준다. , 머리 꼭대기를 깎아서 왕적 위엄을 나타내게 한다. 성직자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지배할 왕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하였다(벧전 2:9). 그러나 모든 교회에 주신 것을 독점하며 신자들에게서 빼앗은 칭호를 자기들의 것이라고 교만하게 자랑한 그들은 신성모독의 죄를 지었다. 베드로는 교회 전체에 대해서 말하였으나 이자들은 그 말을 왜곡해서는 삭발한 소수에 대해서만 "거룩한자가 되라"고 한 것같이(벧전 1:15-16, 20:7, 19:2 참조), 그리스도의 피는 그들만을 산 것같이(벧전 1:18-19), 또 그들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라와 제사장이 된 것같이(벧전 2:5, 9) 주장한다. 그들은 다른 이유도 말한다. 머리 꼭대기를 노출시키는 것은 마음을 주에게 개방하여 "수건을 벗은 얼굴로"(고후 3:18)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는 것이라고 한다. 또는 입과 눈의 과오를 끊어 버려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려는 것이라고 한다. 또는 머리를 깎는 것은 세상 것을 버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머리에 남아 있는 털은 그들의 생활 유지를 위해서 보존하는 좋은 사물을 의미한다고 한다. 모든 일은 상징으로 표시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성소 휘장이" 아직 "찢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27:51). 그들은 이런 일들을 정수리로 상징했으므로 직책도잘 이행한 것으로 믿고 실제로는 전혀 직책을 이행하지 않는다. 도대체 그들은 이런 사기와 협잡으로 언제까지 우리들을 기만하려는 것인가? 약간의 머리털을 깎음으로써 성직자들은 풍성한 세상 물질을 포기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귀와 눈의 정욕을 죽였다는 것을 표시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욕심이 많고 미련하고 정욕적인 계급이 세상에 또 있는가? 왜 그들은 거룩하다는 허위의 표징을 외형적으로만 보이면서 진실로 거룩함은 드러내지 않는가?

 

26. 나실인들과 바울을 인용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가?

 

이제 성직자들의 삭발은 나실인들로부터 근원과 근거가 있다고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예전들은 유대 의식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아니 유대교에 불과하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그리고 바울까지도 서원이 있어서 성결하게 되기 위해서 머리를 깎았다고(18:18) 그들이 덧붙이는 것은 어리석은 무식만을 폭로할 뿐이다. 이 기록은 브리스길라에 대한 것이 아니며 아굴라에 대해서도 확실하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삭발은 바울과 아굴라의 어느 편에도 관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의 선례가 있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을 용인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 바울은 성화를 위해서 삭발한 일은 없고, 삭발한 것은 약한 형제들을 돕기 위한 것뿐이다. 나는 평소에 이런 서원을 경건의 서원이 아니라 사랑의 서원이라고 부른다. , 하나님께 대한 경배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약한 형제들의 무지를 온유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점은 바울 자신이 자기는 유대인에 대해서는 유대인같이 되며 운운하는 말로 밝혔다(고전 9:20).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들에게 임시로 순응하기 위해서 한 번만 단기간 동안 그렇게 했다. 이자들이 나실인들의 성결 행위를 본받으려고 무의미한 노력을 하는 것은 옛 유대교를(6:18, 6:5 참조) 계승하는 척하면서 다른 유대교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성직자들은 머리를 길러서는 안되고 공처럼 깎아야 한다는 교서는 이런 종교적인 의혹에서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기록된 것이다. 남자의 단정한 모습에 대해서 가르친(고전 11:4) 사도가 마치 성직자의 공같이 빡빡 깎은 머리 모양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그들은 생각한다. 독자들은 이것을 보고, 이런 출발점에서 시작한 다른 예전들의 효력과 가치에 대해서 판단하기를 바란다.

 

27. 삭발에 대한 역사적 해석

 

어거스틴을 인용하는 것만으로도 성직자의 삭발이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시대에는 여성적인 남자나 또는 남자답지 못한 매끈하고 우아한 맵시를 내려는 사람들만이 머리를 길렀기 때문에, 성직자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좋은 모범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성직자들은 머리를 자르든지 깎든지 해서 여성적인 장식을 한다는 인상을 주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삭발이 유행하게 되자 어떤 수도사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눈에 잘 띄는 모습으로 자기들의 거룩함을 자랑하려고 머리를 길렀다. 그러나 그 후에 다시 장발이 유행하게 되고 프랑스와 독일과 영국과 같이 항상 장발이던 민족들이 그리스도교를 믿게 되자, 성직자들은 머리를 장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표시로서 짝지어서 머리를 깎은 것 같다. 마침내 더 부패한 시대가 와서 모든 이전 풍속이 악용되었거나 또는 미신으로 타락했을 때, 성직자들의 삭발은 미련한 모방뿐이고 아무 이유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신비라고 설명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들의 성사를 인정하게 하려고 그 미신적인 신비를 우리에게 덮어씌우려고 한다. 문지기들은 성별될 때에 교회의 열쇠를 받음으로써 교회를 지키는 책임을 맡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강경사들은 성경을 받는다. 구마사들은 미친 사람들과 학습 교인들에게 사용할 주문을 받는다. 시종들은 초와 병을 받는다. 이런 의식들에는 비밀한 힘이 있으며 또 이런 물건들은 보이지 않는 은혜의 표와 표시가 될 뿐 아니라 원인이 된다고 한다. 그들은 이런 의식들을 성사로 인정하려고 하므로 성사의 정의에 따라서 그렇게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단하게 결론을 언급한다면, 나는 스콜라 학자들과 교회법 학자들이 이런 하급 계급들을 성사라고 주장하는 것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부른다. 이런 생각을 가르치는 사람들 자신이 이런 계급들은 원시교회에 없었고 여러 해 후에 고안된 것이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사는 하나님의 약속을 내포하므로, 하나님만이 제정하시는 것이니 천사나 사람이 제정해서는 안 된다. 약속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28. "사제""장로"

 

아직 남은 세 가지 계급을 그들은 "중요" 계급이라고 부른다. 이중에서 소위 차부제를 여기에 옮겨 온 것은 하급 계급이 생겨난 후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세 계급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특히 "성직"이라고 불러서 존경한다. 우리는 그들이 주의 규정을 부정직하게 남용해서 자기들의 구실로 삼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장로 또는 사제의 계급을 먼저 논하겠다. 그들은 이 두 가지 말이 같은 뜻이라고 하며, 장로나 사제의 임무는 성단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제물로 드리고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제들은, 서품식에서 하나님께 속죄 제물을 드리는(5:8 참조) 권한이 그들에게 부여되었다는 표로서 성체를 담은 성반을 받으며, 축성하는 권한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리는 표식으로서 두 손에 기름을 바른다. 그러나 의식에 대해서는 후에 말하겠다. 그들은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하지만 그런 말씀은 일점일획도 없으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도를 그들은 이 이상 더 사악하게 타락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카톨릭 교회의 미사를 논할 때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우선 속죄 제물을 드리는 사제를 자칭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해하는 자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임을 인정해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맹세로써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으로 지명하고 성별하셨으며(110:4, 5:6), 그리스도에게는 생명의 끝이나 후계자가 없게 하셨다(7:3). 그는 단번에 영원한 속죄와 화목의 제물을 드리셨으며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지금 우리를 위해서 중재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두 제사장이다(1:6, 벧전 2:9 참조). 그러나 우리가 할 일은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것, , 우리 자신과 소유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제물을 바쳐 하나님의 진노를 풀며 죄를 대속하는 것은 그리스도만이 받은 직책이었다. 이 사람들은 이 직책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하는데, 이런 그들의 사제직은 불경하며 신성 모독이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이 의식을 감히 성사라고 부르는 그들은 철저히 사악하다.

장로의 진정한 직책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들에게 천거하셨으며 나는 기꺼이 그것을 인정한다. 거기에는 의식이 있으며, 이것은 처음에 성경에서 취했고, 다음에 바울이 공허하거나 무익한 것이 아니라 영적 은사의 충실한 표라고 증거한다(딤전 4:14). 그러나 나는 이 의식을 셋째 성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신자에게 공통된 것이 아니고 특수한 직책을 위한 특별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예를 기독교의 사역자들에게 주셨다고 해서 카톨릭 교회의 사제들이 자랑할 이유는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복음과 성례를 맡는 관리인들을 임명하라고 명령하셨지 희생 제물을 드리는 사람들을 임명하라고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라(28:19, 16:15) 양떼를 먹이라고(21:15) 명령하셨으나 희생 제물을 드리라고는 하시지 않았다. 그가 성령의 은사를 약속하신 것은, 그들이 속죄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치리의 임무를 올바르게 맡아서 꾸준히 수행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었다(28:20 참조).

 

29. 사제의 임명식

 

의식들은 현실과 잘 일치한다. 복음을 전파하라고 제자들을 파송하셨을 때 주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숨을 내쉬셨다(20:22). 이 상징은 그들에게 주신 성령의 권능을 의미했다. 이 선한 사람들은 이 숨을 불어넣는 것을 보존하여 마치 그들의 목에서 성령을 불어 내는 것처럼, "성령을 받으라"(20:22)고 그들이 만들어 내는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 중얼거린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흉악하게 위조한다. 배우들의 몸짓은 어느 정도 예술적이며 뜻도 있지만, 그들은 무엇이든지 구별하지 않고 함부로 흉내 내는 원숭이와 같다. 그들은 주를 본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주께서 하신 모든 일이 다 우리가 본받으라는 뜻으로 하신 것은 아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셨다(11:43).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셨다(9:5, 5:8 참조). 왜 그들은 모든 죽은 사람과 중풍병자에게 같은 말을 하지 않는가? 주께서는 사도들에게 입김을 불어 그들을 성령의 은사로 가득 채워 주심으로써 그의 신적 능력의 증거를 보이셨다. 그들이 입김을 분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경쟁하는 것이며 거의 도전하는 것이 되지만 물론 효력도 없고 그 무능한 몸짓으로 그리스도를 희롱할 뿐이다. 참으로 그들은 감히 성령을 주노라고 주장할 정도로 후안무치하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사실인지는 경험이 증명한다. 그들이 사제로서 성별하는 사람들은 모두 말이 변해서 나귀가 되며 바보가 변해서 미치광이가 된다고 경험은 외친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점에 대해서 그들과 다투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의 의식에 반대할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특별한 이적의 상징으로서 하신 일을 그들이 본받는다는 것이 원래 잘못이다. 그리스도를 본받노라는 구실은 도저히 그들의 주장에 대한 올바른 변호가 될 수 없다.

 

30.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아론의 제사장직을 폐지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누구에게서 도유법을 배웠는가? 그들은 사제직의 근원인 아론의 아들들에게서 배웠다고 대답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경솔하게 사용하는 것이 자기들이 고안한 것이라는 것은 고백하지 않고 항상 나쁜 선례를 들어서 자기변명을 한다.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을 계승했다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침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고대의 모든 제사장직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 만을 예표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그 모든 제사장직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우리가 이미 여러 번 말했고 또 히브리서가 주석 없이도 분명히 증거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으로 인해서 그 모든 제사장직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그렇게까지 모세의 율법을 좋아한다면, 왜 수소와 송아지와 어린양을 제물로 바치지 않는가? 참 으로 그들에게는 고대의 장막과 유대교적 예배 전체의 상당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송아지나 수소를 제물로 드리지 않는 것은 그들의 종교의 결함이다. 이 도유식이 할례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것을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그들은 이 행위의 가치에 대한 바리새적 관념과 미신을 덧붙이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의의 근거로 믿었다. 이 사람들은 도유식에 영적 은사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레위 족을 본받으려고 갈망하는 그들은 그리스도를 버리고 목자의 직책을 포기한다.

 

31. 도유는 쇠퇴한 의식들에 속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씻을 수 없는 표지를 새기는 거룩한 기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기름은 먼지와 소금으로 씻어 버릴 수 있고(더 단단히 붙은 것이면) 비누로 닦아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표지는 영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기름이 영혼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그들은 어거스틴의 말을 흉내 내면서도 그가 한 말을 잊어버렸는가? "만일 물에서 말씀을 제거한다면 그것은 물에 불과할 것이다. 물을 성물로 만드는 것은 말씀이다." 그들은 기름에 동반할 어떤 말씀을 보이려는가? 모세는 아론의 아들들에게 기름을 바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할 것인가?(30:30, 28:41, 29:7 참조) 모세는 그밖에도 아론을 장식할 속옷과 에봇과 관과 거룩한 관에 대해서(8:7,9)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이 입을 속옷과 띠와 관에 대해서(8 :13) 명령을 받았다. 모세는 수송아지를 죽여 그 기름을 불사르는 일에 대해서(8:14-16), 수양을 죽여 불사르는 데 대해서(8:18-21), 다른 수양의 피로 그들의 귓부리와 옷을 성별하는 데 대해서(8:2224), 그밖에도 무수한 예식에 대해서 명령을 받았다. 그들이 이런 일들을 무시하면서 어떻게 기름 바르는 것만을 좋아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뿌려 받기를 원한다면, 왜 기름보다 피를 뿌려 받지 않는가? 확실히 그들은 영리한 일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교를 꿰매어서 한 종교를 만들려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바르는 기름은 소금, ,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악취가 난다.

남은 것은 안수례다. 나는 이것이 진정하고 영적인 임명식에서는 하나의 성사임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웃음거리 연극과 안수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지도 않으며 약속이 우리를 인도해 가야 할 그 목표를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이 표징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면, 그 원래의 목적인 진실된 일에 적용해야 한다.

 

32. 부제

 

또 사도 시대와 어느 정도 순수하던 교회에 있었던 집사직이 완전히 회복된다면 나는 거기에 해당한다는 부제직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대의 집사들과 이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부제들은 어디가 같은가? 나는 부제들의 인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람의 과실을 문제로 삼아 그 사람의 교리에 대해서 불공평한 판단을 하는 것도 아니므로 아무도 그런 불평을 할 필요는 없다. 나는 다만 로마 카톨릭 교회가 부제에 대해서 가르칠 때에 사도 교회가 집사로 임명한 사람들을 증거로 드는 것이 부정직하다는 점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사제를 돕는 것 곧 성사에 있어서의 모든 일이 세례와 성유와 성반과 성작의 일을 도우며, 예물을 가져다가 성단에 드리며, 성찬상을 준비해서 덮으며, 십자가를 들며, 신자들에게 복음서와 사도 서한을 읽어서 들려주는 일들이 부제의 직책이라고 말한다. 부제들의 진정한 직책에 대해서 한 마디라도 여기서 찾아볼 수 있는가?

이제 그들이 임명되는 절차를 보기로 하자. 부제가 임명될 때 주교만 안수한다. 주교는 피임명자의 왼쪽 어깨에 기도서와 영대를 얹어서 주의 가벼운 멍에를 받았다는 것을(11:30) 알게 하며 그의 왼쪽에 속한 것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바치도록 한다. 주교는 복음의 말씀을 주어 부제가 복음 선포자임을 인정하게 한다. 이 모든 일과 집사가 한 일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향을 태우고 성상의 먼지를 털며 교회를 청소하고 쥐를 잡으며 개를 쫓는 일을 시키기 위해서 임명한 사람을 마치 사도로 임명한 듯이 카톨릭 교회는 행동한다. 누가 이런 계급의 사람들을 사도라고 부르며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비교하는 것을 용인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다만 한 연극으로서 임명한 이 사람들을 그들은 앞으로 부제라는 거짓말로 부르지 말아야 한다. 참으로 그들이 사용하는 이름이 그 직책의 성격을 충분히 밝힌다. 그들은 부제들을 레위 족이라고 부르며 그들의 근본과 시조는 레위의 아들들이라고 한다. 그렇게 하는 것에 나는 반대하지 않지만, 그들은 후에 다른 사람들의 예복을 빌려 부제들에게 입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33. 차부제

 

차부제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하면 적당하겠는가? 옛날에는 빈민구제 사업을 맡았던 그들에게 카톨릭 교회는 하찮은 일, 예컨대 성작과 성반, 물이 든 병, 성단에서 쓰는 수건 등을 가져오는 일과 손 씻는 물을 붓는 일 등을 시킨다. 그들이 예물을 받아 온다고 할 때 그것은 그들이 탐식하고 저주를 받게 마련인 예물을 의미한다.

그들의 성별식은 이 직책에 아주 잘 일치한다. 차부제는 주교에게서 성반과 성작을 받으며 부주교에게서 물이 든 병과 기도서와 기타 폐물들을 받는다. 그들은 이런 쓰레기에 성령이 들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한다. 어떤 경건한 사람이 차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문제 전체에 대한 결론으로서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 한 것과 같은 말을 할 수 있으며, 위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한 것을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내가 가르치고자 하는 겸손하고 가르침을 잘 받는 사람들에게는 한 마디만 말하면 흥분할 것이다. , 약속과 연결된 의식이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을 때 또는 의식에서 약속이 보이지 않을 때 거기에는 하나님의 성례가 없다는 것이다. 이 의식에는 확실한 약속이 한마디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약속을 확인하는 의식을 찾는다는 것은 무익할 것이다. 또 그들이 사용하는 의식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성사가 있을 수 없다.

 

(에베소서 5:28과 기타 구절들을 오해한 데서 혼인 성사라는 그릇된 주장이 생겼다 : 결혼에 관련된 폐해. 34-37)

 

34. 결혼은 성사가 아니다

 

맨 마지막은 혼인 성사이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2:21-24, 19:4이하), 그레고리우스 시대까지 그것을 성사로서 집행하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또 건전한 사람이라면 누가 이렇게 생각할 것인가? 결혼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선하고 거룩한 규정이며, 농업과 건축업과 구두 수선과 이발업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합법적인 규정이지만 성례는 아니다. 성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약속을 확인하시는 외형적인 의식이 지정되어 있어야 한다. 결혼에 이런 것이 없다는 것은 어린아이들까지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은 신성한 일, ,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영적 연합의 표징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믿음을 더욱 확실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세우시는 상징을 "표징"이라고 해석한다면 그들은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다. "표징"은 비교하기 위해서 인용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해석한다면, 나는 그들의 논리가 얼마나 예리한 가를 밝히겠다. 바울은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라고 한다(고전 15:41-42), 여기에 성사가 하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은‥‥‥겨자씨 한 알 같으니"라고 하신다(13:31). 여기에도 성사가 하나 있다. "천국은‥‥‥누룩과 같으니라"(13:33). 이것은 셋째성사다. 이사야는 "보라 주 여호와께서‥‥‥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라고 한다(40:10-11). 넷째 성사다. 다른 곳에서 "여호와께서 용사같이 나가시며"라고 한다(42:13). 이것이 다섯째 성사다. 결국 어디서 끝이 나며 어디에 한계가 있을 것인가? 이런 논리대로 한다면 성사가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성경에 있는 비유와 직유의 수만큼 성사가 있을 것이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르리라"고 하였은즉(살전 5:2) 심지어 도둑질도 성사가 될 것이다. 이 궤변가들이 이렇게 무식하게 지껄이는 것을 누가 용인할 수 있겠는가?

포도나무를 볼 때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하시며(15:5)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고 하신(15:1) 그리스도의 말씀을 회상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다. 양떼를 거느린 목자를 만날 때마다 "나는 선한 목자라"(10:14),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10:27)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이런 비유들을 성사라고 하는 사람은 정신 병원으로 보내야 한다.

 

35. 그들은 에베소서 5:28을 잘못 적용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바울의 말로 우리를 공격하면서, 바울은 "성사"라는 말을 결혼에 적용했다고 주장한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5:28-32)

그러나 성경을 그렇게 다루는 것은 땅과 하늘을 혼합하는 것이다. 바울은 결혼한 남자들이 자기의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도록 권고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내세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신부로 정하신 교회에 애정을 쏟으시는 것같이 모든 사람이 자기의 아내를 사랑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라고 한다(5:28-29).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교회를 자신같이 사랑하셨으며 신부인 교회와 자신을 하나가 되게 하셨는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바울은 모세가 아담이 자신에 대해서 한 말이라고 한 것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한다. 자기의 갈빗대로 만들어진 하와가 눈앞에 나타난 것을 보고 아담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한다(2:23). 바울은 이 모든 일이 그리스도와 우리에게서 영적으로 실현되었다고 확언한다. ,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살과 뼈의 지체이며 그와 한 살이 되었다고 한다. 끝으로, 그는 요약해서 "이 비밀이 크도다"라고 첨부한다. 그리고 아무도 모호한 뜻에 속지 않도록, 자기는 남녀의 육체적 결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영적 혼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갈빗대 하나를 떼어서 우리를 만들게 하셨다는 것은 참으로 큰 비밀이다. , 그가 강하셨을 때에 우리가 그의 능력으로 강하게 되도록, 그는 약하게 되기를 원하셨다. 앞으로 우리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 안에서 사시기 위해서였다(2:20).

 

36. "비밀"이란 말의 번역과 그들의 혼인을 경시에서 이 혼란이 생겼다

 

그들은 "sacrament"란 말에 속았다. 그러나 그들의 무지에 대한 벌을 온 교회가 받는 것은 옳은가? 바울은 "mystery"라고 말했다. 이 말을 번역한 사람은 이것이 라틴 사람들의 귀에 생소하지 않은 말이므로, 그대로 두든지 그렇지 않으면 "비밀"(secret)이라고 번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sacrament"란 말을 사용했으나 바울이 사용한 "mystery"와 같은 뜻으로 사용했다. 이제 그들로 하여금 가서 어학에 재주 없음을 요란하고 한탄하게 하자. 어학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쉽고 분명한 일에서 오랫동안 가장 부끄럽게 속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왜 이 한 곳에 있는 "sacrament"란 말을 그렇게 고집하면서 다른 곳에서는 무시하는가? 디모데전서와(딤전 3:9) 에베소서에서도(1:9, 3:3,9) 라틴역 성경의 번역가는 "mystery"에 대해서 항상 "sacrament"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 실수는 용서하라. 거짓말쟁이들은 적어도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혼인을 성사라는 이름으로 장식하고 나서 그것을 부정과 부패와 육적인 추악이라고 부르니 이것은 대체 어떻게 된 경거망동인가? 사제들을 이 성사에서 제외하는 것은 얼마나 불합리한가? 그들은 사제들을 성사에서 제외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 결합의 정욕을 막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말로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성적 결합 자체도 이 성사의 일부라고 하며, 이것만이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자연에 합치하는 비유라고 가르친다. 남녀는 육체적 연합에 의해서만 한 몸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두 가지 성사를 발견했다. 하나는 하나님과 영혼과의 성사로서 신랑과 신부의 관계와 같으며, 또 하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성사로서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와 같다고 한다. 그러나 성적 결합을 여전히 성사라고 한즉 그리스도인에게 이 일을 금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성사는 서로 모순이 있어서 도저히 일치할 수 없다고 한다면 문제는 달라질 것이다. 그들의 교리에는 다른 불합리도 있다. 그들은 성사에서는 성령이 부여된다고 주장하며 성적 결합을 하나의 성사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은 결코 이 결합에 임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37. 카톨릭 교회의 교리의 결과는 폭압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일로만 교회를 우롱하지 않고 이 오류에 얼마나 많은 오류와 헛된 말과 사기와 비행을 첨가했는가? 이와 같이 그들은 혼인을 하나의 성사로 만듦으로써 가증한 일들의 소굴을 얻으려고 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혼인을 성사라고 일단 결정한 다음에 그들은 혼인 문제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혼인은 영적 문제이므로 세속 재판관에게 맡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법을 정해서 그들의 전제력을 강화했으나, 어떤 법은 노골적으로 불경건한 것이었고 어떤 법은 사람에 대해서 심히 불공평한 것이었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부모의 승낙 없이 미성년자들이 혼인한 것은 그대로 인정되어야 하며, 친척끼리의 결혼은 7촌끼리라도 불법이고 설사 결혼했다 해도 취소해야 된다고 한다. 그들은 모든 민족의 법과 모세의 규례에도(18:6이하) 반대되는 촌수를 만들어 낸다. 간음하는 아내를 버린 사람은 재혼할 수 없으며, 대리 부모는 서로 혼인할 수 없고 사순절전 제 3 일요일부터 부활절 후 8일까지, 요한의 탄생일 전의 3주간 그리고 강림절부터 예수 현현 대축일까지는 결혼할 수 없으며 이 밖에도 셀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규정이 있다.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오래 그들의 진흙 구덩이에 빠져 있었으므로 이제는 빠져나가야 하겠다. 그러나 나는 이 나귀들의 등에서 사자 가죽을 벗기는 데 조금은 성공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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