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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 4권. 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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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장 성례

 

("성례"란 말의 뜻 : 성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표. 1-6)

 

1. 정의

 

우리의 믿음을 돕는 또 다른 수단은 성례이며 이것은 복음 선포와 관련되었다. 성례가 만들어진 목적과 현재의 시행 목적을 알기 위해서는 거기에 대한 분명한 교리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먼저 우리는 성례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간단하고도 적절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성례는 우리의 약한 믿음을 받쳐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그의 선하신 뜻의 약속을 우리의 양심에 인치시는 외형적인 표식이고, 우리 편에서는 그 표식에 의해서 주와 주의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주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더 간략하게 정의하면, 성례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외형적인 표식으로 확인하는 증거이며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쪽 정의를 택하든지 간에 어거스틴이 내린 정의와 뜻은 차이가 없다. 그는 성례를 "신성한 것의 보이는 표" 또는 "보이지 않는 은혜의 형태"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의 정의가 내용을 더 분명하게 잘 설명한다. 어거스틴의 정의는 너무 간단해서 애매모호한 곳이 있다. 교육이 부족한 사람은 많이 속기 때문에, 나는 아무 의심도 생기지 않도록 말을 더 많이 사용해서 내용이 더 충실한 표현을 만들기로 했다.

 

2. "성례"라는 말

 

성례란 말을 고대인들이 이런 뜻으로 사용한 까닭은 잘 알 수 있다.

당시의 번역자가 희랍어의 musthvrion(뮈스테리온, 비밀, 신비)를 라틴어로 번역했을 때에, 특히 신성한 사물을 의미할 때에는 반드시 "성례"라고 번역했다. 예컨대, 에베소서에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1:9)라고 되어 있다. ,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3:2-3)이라고도 되어 있다. 골로새서에는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1:26-27)고 되어 있다. 디모데 전서에는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딤전 3:16)라고 되어 있다. 그는 "비밀(secret)"이란 말을 쓰면 위대한 일을 낮추게 되는 듯해서 그 말을 피하려고 신성한 일에 관계된 "비밀""sacrament"라고 번역했다. 이 말은 이런 뜻으로 교부들의 글에도 자주 나타난다. 또 라틴 사람들이 "sacraments"라고 한 것을 헬라 사람들은 "mysteries"라고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두 말의 뜻이 꼭 같다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숭고하고 영적인 사물을 경건하게 나타내는 표징들에도 이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어거스틴도 어디선가 이 점을 말한다. "신성한 사물에 적용되는 여러 가지 표징을 'sacraments'라고 부르는데, 그런 표징들에 대해서 논쟁을 하는 것은 지루한 일일 것이다."

 

3. 말씀과 표징

 

그래서 내가 제시한 정의를 보아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성례 제는 반드시 선행하는 약속이 있으며 성례는 이 약속에 붙인 부록과 같다. 그 목적은 그 약속을 확인하고 인치며 우리에게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하며 말하자면 비준하는 것이다. 성례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우선은 우리의 무지와 우둔함에, 다음에는 우리의 연약함에 대비하신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한다면 성례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확인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기 보다는 그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하나님의 진리는 그 자체만으로 확고부동하며, 자체 이외에서 더 훌륭한 확인을 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연약해서, 각종 수단을 사용하여 사방으로 붙들어 주고 받쳐 주지 않으면 떨리고 흔들리며 비틀거리다가 결국은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우리의 자비하신 주께서는 그 무한하신 자비로 우리의 능력에 자신을 적응시키시며, 우리가 항상 땅에 붙어 기어 다니고 육에 붙어 떨어지지 않으며 영적인 일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상상조차 하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셔서 이런 땅에 붙은 것까지 이용해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인도하시며 육에 있는 우리 앞에 영적인 복의 거울을 두신다. 크리소스톰이 말한 것과 같이 우리가 무형의 존재라면 하나님께서는 이 영적인 복을 무형한 벌거숭이인 채로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은 신체에 접붙여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것을 눈에 보이는 것 속에 넣어 주신다. 성례에서 우리에게 제공되는 은사에 물질의 성질을 입히신다는 뜻이 아니고 이런 표시 방법으로 그 은사에 표시를 하신다는 것이다.

 

4. 말씀은 표징을 설명해야 한다

 

우리의 논적들은 성례를 구성하는 것은 말씀과 외형적인 표징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한다. 여기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의미나 믿음이 없이 속삭이는 것, 소리에 불과한 것, 마술사의 주문같이 성례에 사용되는 물질을 성별하는 힘이 있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 말씀을 선포할 때 보이는 표징의 뜻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 독재 아래에서 행해진 일은 이 신비들에 대한 무서운 모독 행위였다. 그들은 신부가 축성경(the formula of consecration)을 중얼거리는 동안 신자들은 아무 뜻도 몰라도 멍하니 보고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들은 신자들이 말씀에서 교리에 관한 것을 조금도 얻지 못하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하며, 배우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모든 것을 라틴어로 말했다. 후케는 미신이 팽창해서, 그들은 잘 들리지도 않는 목쉰 소리로 속삭여야만 축성이 잘된다고 믿게 되었다.

성례의 말씀에 대한 어거스틴의 가르침은 훨씬 다르다. "성례에 사용되는 물질에 말씀을 첨가하라. 그러면 성물이 되리라, 말씀의 힘이 아니면, 물이 몸에 닿아 마음을 깨끗이 씻는다는 그 위대한 힘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말씀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을 믿기 때문이다. 말씀 자체의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소리와 뒤에 남는 힘은 서로 다르다.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사도는 말한다(10:8). 따라서 사도행전에는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라고 하였으며(15:9), 사도 베드로는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한다(벧전 3:21).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10:8), 이 믿음의 말씀에 의해서 세례가 성별되고, 깨끗케 하는 힘이 세례에 있게 되는 것임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성례에는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서 복음 선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증명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 우리에게 하도록 명령하신 일, 사도들이 따라서 행한 일 그리고 비교적 순결하던 교회가 지킨 일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세상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거룩한 족장들에게 어떤 표징을 주실 때에 그 표징과 교훈은 서로 분리시킬 수 없게 연결되어 있었고, 이 교훈이 없으면 우리의 감각 기관은 단순히 표징만을 볼뿐이어서 어리둥절해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례의 말씀을 들을 때에, 목사가 분명한 음성으로 선포하는 그 약속이 신자들의 손을 잡고 표징이 가리키며 지시하는 곳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5. 인장과 같은 성례

 

단순하지 않은 미묘한 내용이 없는 딜레마로 우리와 싸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 그들은 성례에 선행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참 뜻인지를 우리가 알거나 또는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만일 안다면 우리는 그 뒤에 오는 성례에서 새로 배우는 것이 없게 되고, 알지 못한다면(성례의 힘은 전적으로 그 말씀에 있으므로) 성례전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여기 대한 우리의 대답은 간단할 것이다. 정부 문서나 그 밖의 공문서에 찍는 인장을 아무것도 쓰지 않은 종이에 찍었을 경우 그 날인은 아무가치도 없는 것이므로 인장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러나 문서에 찍으면 반드시 거기에 쓰인 내용을 확인한다. 반대자들은 이 비교를 우리가 만들어 냈다고 말할 수 없다. 바울 자신이 분명히 할례를 ""이라고(4:11) 부르기 때문이다.거기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칭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함을 받은 그 믿음의 언약에 날인하는 인으로 삼기 위해서였다고 명백하게 주장한다. 나는 성례는 이 약속에 인을 친다고 우리가 가르치는 것이 왜 나쁘냐고 묻는다. 약속들 자체를 보면 모두 서로 확인한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분명한 것일수록 믿음을 지탱하기에 적당하다. 성례는 가장 분명한 약속을 한다. 이 점에서 성례가 말씀보다 더 나은 것은 그것이 약속을 우리 앞에 사생화를 그리듯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성례와 문서에 찍는 인장은 다르다고 하는 반대론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두 가지가 다 이 세상 물질로 된 것이므로, 성례는 영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약속에 인을 찍어 확인하기에 불충분하며 인장은 보통 무상한 일에 관한 군주들의 법령에 찍어 확인하는 것이라고 반대론은 구별한다. 그러나 신자는 눈으로 성례를 볼 때에 눈에 보이는 물질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명상에 의해서(내가 비유적으로 암시한) 여러 단계를 밟아 성례 안에 감취어 있는 숭고한 신비를 향해서 올라간다.

 

6. 언약의 표징인 성례

 

주께서는 그의 약속을 "언약"(6:18, 9 :9, 17:2)이라고 부르시며 성례를 언약의 ""라고 부르신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 사이의 언약에서 비유를 얻을 수 있겠다. 돼지를 잡을 때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니 먼저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잡는 행위에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돼지는 아무 내면적 또는 고상한 신비가 없이 잡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싸움터에서 손을 서로 잡게 되는 때가 많은데, 바른손을 내민다는 것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먼저 생각하고 결정해서 말로 발표한 언약일지라도 말이 선행할 때에는 이런 언약의 표징에 의해서 그 언약의 법은 확인된다. 그러므로 성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더욱 확실하게 믿게 만드는 행사이다. 우리가 육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성례도 육에 속한 것으로 우리에게 제시된다. 선생이 어린아이들의 손을 잡아 인도하듯이 성례도 우리의 미련한 능력에 알맞도록 가르치려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성례를 "보이는 말씀"이라고 부른 것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그림에 그리듯이 분명한 형상으로 그려서 우리의 눈앞에 보여 주기 때문이다.

성례를 더 분명하게 알리기 위해서 빠른 비유를 쓸 수도 있다. 성례는 "우리의 믿음의 기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건물이 기초 위에 서 있지만 기둥으로 괴어야만 확고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것과 같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삼고 그 위에 서 있지만 성례를 첨가할 때에는 기둥으로 받친 것같이 더욱 튼튼하게 서 있게 된다. 또는 성례를 거울에 비교했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풍성하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 거울 속에서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둔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성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며 우리에게 대한 그의 선하신 뜻과 사랑을 말씀에 의한 것보다 더 명백하게 확인하시기 때문이다.

 

(성례는 성령의 도구에 불과하며 오직 말씀과 협력함으로써만이 믿음을 굳게 만든다 : 성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독특한 표지이다. 7-13)

 

7. 악인들이 성례에 참가하는 것이 그 중요성을 부정하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그들은 성례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고 옳지 못한 주장을 하는데, 그 이유는 성례가 악인들에게도 제공되지만 악인들은 그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중한 정죄를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똑같은 논법을 쓴다면,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고서도 그것을 배척하였으며 또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보고 그리스도인 줄 알았으면서도 그를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없었으므로 복음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문서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볼 수 있다. 공문서에 찍힌 인장이 군주의 것이며 그의 뜻을 확증하는 것인 줄 알면서도 진짜 인장을 우롱하며 비웃는 사람이 많다. 어떤 사람은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해서 무시하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저주하기까지 한다. 내가 위에서 한 비교는 이 두 가지에 다 해당되므로 더욱 찬성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의 말씀과 성례를 통해서 그의 자비와 은혜의 약속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확실한 믿음으로 말씀과 성례를 받는 사람만이 이 일을 깨닫는다. 마치,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에게 제시하시며 구원을 얻으라고 하시지만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이 뜻을 전달하면서 말씀의 효력이 성례에 나타나는 것은 말씀을 듣기 때문이 아니라 믿기 때문이라고 했다.

따라서 바울이 신자들에게 성례에 대한 말을 할 때에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도 성례에 포함시킨다. 예컨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3:27),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고전 12:12-13). 그러나 그가 성례를 악용하는데 대해서 말할 때에는 그것들을 허무하고 차디찬 그림자와 다름없이 간주한다. 바울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성례에서 역사하는 것을 불경건하고 패악한 위선자들이 사악하게 아무리 억압하며 애매모호하게 하고 감추려 할지라도 성례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에는 어디서나 또 언제나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참으로 증거하며, 하나님의 영 또한 성례가 약속하는 것을 여전히 계시하며 성취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례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증거라고 부르는 것은 옳으며 그것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확인하는 인장과 같다고 단정한다. 성례는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확증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지탱하고 자라게 하며 강화하고 증진시킨다.

이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항상 사용하는 논리는 너무나도 빈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믿음이 이미 좋은 것이라면 더 좋아질 수 없는데 이는 하나님의 자비를 굳게 또 꾸준히 믿어 동요 않는 것이 아니면 믿음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주께서 그들의 믿음을 더하여 주시기를 사도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이(17:5) 좋을 것이다. 그들은 완전한 믿음을 가진 듯이 확신에 찬 말을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서는 그런 믿음에 도달할 수 없다.

그들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한(9:24) 사람은 어떤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는가? 겨우 시작에 불과한 그들의 믿음은 좋은 믿음이었고 불신을 제거하면 더욱 좋아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양심이 어떤 논법보다도 그들을 더 잘 논박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죄인임을 자백한다면(좋든 싫든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것은 그들 자신의 믿음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라고 그들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8. 성례에 의해서 믿음이 굳게 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로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그들은 빌립이 내시에게 그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세례 받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고(8:37) 말한다. 믿음이 마음에 가득하다면 세례가 믿음을 굳게 할 여지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나는, 그들은 자기의 마음 한쪽 구석에 믿음이 없는 것을 느끼지 못하며 매일 믿음이 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고 묻고자 한다. 어떤 명사의 말에 자기는 배우면서 늙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아무 진전 없이 늙는다면 우리는 심히 불쌍한 그리스도인이다. 우리의 믿음은 인생의 모든 시기를 통하여 항상 성장해서 마침내는 완전히 성숙해져야 하기 때문이다(4:13). 그러므로 사도행전 837절의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이란 것은 그리스도를 완전히 믿는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를 진정과 성실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배가 부른 것이 아니라 주리고 목마른 것같이 열렬한 애정으로 그리스도를 사모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무슨 일을 성의와 진심으로 하는 것을 "마음을 온전히 하여"라고 표현하는 것이 보통이다. 예컨대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119:10), "내가‥‥‥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111:1, 138:1) 등등이다. 그러나 거짓되고 부정직한 사람들을 책망하실 때에는 보통 "두 마음으로 말하는 도다"라고 책망하신다(12:2).

여기서 그들은, 만일 성례가 믿음을 증진시킨다면 성령을 주신 것은 헛수고였으며 성령이야말로 믿음을 일으키고 유지하며 완성하는 힘이 있으며 또 그 일을 한다고 첨가하여 말한다. 나는 물론 믿음이 전적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고유한 일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자비의 보고를 알게 되고, 성령의 광명이 없으면 우리의 마음의 눈이 어두워 아무것도 볼 수 없으며, 감각이 둔해서 영적인 것을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한 가지만 말하는데 비해서 우리는 세 가지를 인정한다. 첫째, 주께서는 우리를 말씀으로 가르치시며 지시하신다. 둘째, 말씀을 성례로 확인하신다. 끝으로, 우리의 지성을 성령의 빛으로 비추시며 우리의 마음을 여셔서 말씀과 성례가 들어오게 하신다.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면 말씀과 성례는 귀를 울리고 눈앞에 나타날 뿐이며 우리의 마음속에는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할 것이다.

 

9. 성례에 역사하시는 성령

 

그러므로 믿음을 강화하며 증진시키는 일에 관해서는(이미 분명한 말로 설명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이 특수 임무를 성례에 돌리는 것을 독자들은 생각해 내기를 바란다. 성례에 어떤 비밀한 힘이 영구히 내재해서 그 자체만으로서 믿음을 증진하거나 강화한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주께서 그것을 만드신 목적이 믿음을 확립하고 증진하는 데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례가 그 임무를 올바르게 수행하려면 반드시 저 내적 교사인 성령께서 오셔야 한다. 성령의 힘이 아니면 마음속에 침투하고 감정을 움직이며 우리의 영혼을 열어서 성례가 들어오게 할 수 없다. 성령이 없으면 먼눈에 비치는 태양의 빛이나 막힌 귀에 울리는 음성과 같이 성례는 아무 성과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성령과 성례를 구별해서, 역사하는 힘은 전자에 있고 후자에는 그 임무만을 남긴다. 이 임무는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내용이 없고 빈약한 것이 되지만 성령이 그 속에서 역사하며 힘을 나타내실 때에는 위대한 효력을 발휘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경건한 마음이 성례에 의해서 믿음으로 강화되는 까닭이 분명해진다. 눈은 햇빛에 의해 보게 되고 귀는 음성의 소리에 의해 듣게 되지만 눈에 빛이 비칠 수 있는 예리한 시력이 처음부터 없었다면 눈은 빛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며, 귀가 듣기에 적당하도록 창조되지 않았다면 결코 소리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빛을 보는 데 있어서 시력이 하는 일과 우리의 귀가 소리를 듣는 데 있어서 청력이 하는 일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는 일, , 믿음을 잉태하고 유지하며 자라게 하고 또 확립하는 일과 비슷하다고 가정하자(이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그럴 경우 두 가지 일이 결과로 나타난다. , 성령의 힘이 없으면 성례는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며, 이 교사의 가르침을 이미 받은 마음속에서 성례가 믿음을 강화하며 증진시키는 것을 아무것도 막을 수 없다. 차이는 오직 하나뿐이다. , 우리의 눈과 귀는 날 때에 듣고 보는 능력을 받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본래의 분량 이상의 특별한 은혜로 같은 일을 하신다.

 

10. 사람이 설득될 때와 같다

 

이렇게 볼 때에 일부 사람들을 괴롭히는 반대론도 곧 사라지게 된다. 믿음을 증진시키거나 강화하는 일을 피조물에게 돌린다면, 믿음의 유일한 근원으로 인정해야 하는 하나님께 부당한 처사가 된다는 반대론이 있다. 우리는 믿음을 강화 증진시키는 일을 하나님에게서 빼앗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의 내적 조명으로 우리의 마음을 성례가 제공하는 강화 작용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시며 바로 이 때문에 믿음이 증진 강화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직도 표현이 애매모호하다고 한다면 아주 명백하게 해 줄 비유를 첨가하겠다. 어떤 일을 하도록 어떤 사람을 말로 설득하려고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우리의 의견에 기울어지게 하며, 어느 정도 우리의 충고에 따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 만한 모든 논법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 사람 편에 우리의 이론의 가치를 헤아릴 만한 예리한 판단력이 없다면 우리는 헛수고를 하게 될 것이다. 또 그에게 배우겠다는 마음과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의도가 없거나 우리의 성실과 지혜를 신용해서 우리의 의견을 채용할 만한 경향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소득이 없을 것이다. 이론으로는 도저히 굴복시킬 수 없는 완고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또 진실성을 의심하거나 권위를 멸시하는 곳에서는 가르침을 잘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설득도 별 진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런 좋은 특성이 모두 있을 때 우리의 충고를 듣는 사람은 곧 순종하게 되며 비웃는 일이 없을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서 이와 똑같은 일을 하신다. 우리들이 귀에는 말씀과 눈에 보이는 성례가 헛되지 않도록, 성령께서는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알려 주시며 완고한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당연히 순종해야 할 주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준비시키신다. 끝으로, 성령께서는 저 외적인 말씀과 성례를 우리의 귀로부터 영혼에 전달한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례가 우리에게 관한 하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우리의 눈앞에 제시할 때 그것들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한다. ,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의 믿음이 굳게 서며 더욱 강하게 된다. 성령께서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시는 것은 우리 마음에 그 확인을 새김으로써 효력이 나타나게 하실 때이다. 동시에, 빛들의 아버지께서(1:17) 태양 광선으로 우리 몸의 눈을 비추시는 것같이 성례를 통해서 일종의 중간적인 광명으로 우리의 마음을 비추시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11.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데는 말씀과 성례가 동등하게 역사한다

 

우리 주께서는 이 성질이 외적인 그의 말씀에 있다는 것을 비유로 가르치시면서 말씀을 ""라고 부르셨다(13:3-23, 8:5-15). 황폐해지고 버려두었던 땅에 씨가 떨어지면 죽어 버리지만 잘 가꾼 땅에 심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도 완고한 사람들에게 떨어지면 모래 위에 떨어진 씨와 같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할 것이며 성령의 손이 잘 가꾼 영혼 위에 떨어지면 결실이 많을 것이다. 씨에서 곡식이 나서 자라며 결실하는 것같이 씨와 말씀에 같은 생각이 적용된다면, 말씀에서 믿음이 생기고 또 그것이 자라며 완성된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은 이 두 가지를 여러 구절에서 훌륭하게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역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용하시는가를(고전 2:4)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다시 생각하게 만들려고 자기는 성령의 일꾼으로서 일하노라고 자랑한다(고후 3:6). 마치 불가분의 유대로 성령의 능력이 그의 전도에 결합되어 사람의 마음을 내면적으로 조명하시고 감동시키는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그는 사역자를 농부에 비교하는데, 이는 사람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는가를 말씀하려고 함이다. 농부들은 땅을 애써 가꾼 다음에는 더 할 일이 없다고 한다(고전 3:6-9).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준다고 하더라도 심은 씨가 하늘의 복으로 자라게 되지 않는다면 그 수고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바울은 결론을 내린다.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 이와 같이 사도들은 그 전도에 있어서 성령의 능력을 나타낸다. , 하나님께서 그의 영적 은혜를 나타내시기 위해서 친히 임명하신 도구들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든지 구별해서,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일과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

 

12. 성례의 요소들은 하나님의 도구로서만 가치가 있다

 

성례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더 강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주께서는 어떤 때에는 성례로 약속하신 일을 우리가 믿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성례 자체를 우리에게서 빼앗으신다. 아담에게서 영생의 은사를 빼앗고 주지 않으셨을 때에 주께서는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고 하셨다(3:22). 이것은 무슨 뜻인가? 아담이 잃어버린 불멸성을 그 과실이 회복할 수 있었을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이 말씀을 다른 말로 옮긴다면, "나의 약속의 상징에 집착해서 헛된 확신을 즐기지 못하도록 불멸에 대한 소망을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을 그에게서 빼앗으리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가 에베소 교회 신자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2:12)였음을 기억하라고 권하면서 그들은 할례에 참가하지 못했다고 말했다(2:11). 여기서 사도는 약속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약속 자체에서 제외된다는 것을 환유법으로 나타낸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피조물에 내려오며 그 피조물들에 많은 능력을 주기 때문에 그만큼 능력이 감소된다고 항의한다. 우리는 피조물에게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것뿐이다. ,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주요 심판자이시며 따라서 그분은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수단과 도구를 사용하셔서 만물이 그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신다. 우리의 육신에 빵과 또 다른 음식을 주시며 태양으로 세계를 비추시고 열로 따뜻하게 하신다. 그러나 빵과 해와 불도 주께서 이런 도구들로써 그의 복을 우리들에게 나눠주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성례로써 믿음을 영적으로 자라게 하신다. 성례의 한 가지 기능은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의 눈앞에 놓고 우리가 볼 수 있게 하는 것, 아니 우리에게 약속의 담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관대하심과 자비로 우리가 사용하도록 마련해 주신 다른 피조물들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그 풍성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유용하시는 일꾼이다. 피조물을 우리의 유익의 원인이라고 찬양하며 선포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와 같이 우리는 성례 자체를 믿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성례에 옮겨서는 안 된다. 우리의 믿음과 고백은 모든 것을 제쳐놓고 성례와 만물의 근원이신 분을 향해서 비약해야 한다.

 

13. sacramentum의 단어

 

어떤 사람들은 sacramentum이란 말에서 논거를 끄집어내지만 그들의 주장에는 설득력이 없다. 그들은 이름난 문필가들이 사크라맨툼이란 말을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했지만 "표징"에 해당하는 뜻은 한 가지 뿐이라고 말한다. , 이 말은 군인이 입대할 때에 사령관 앞에서 행하는 엄숙한 선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신병들이 이 군대의 선서로 사령관에 대한 충성심을 약속하며 군대 복무를 고백한 것같이, 우리는 우리의 표징으로 우리의 사령관이신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그의 군기 아래서 복무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다른 비교를 덧붙임으로써 그 뜻을 보다 분명하게 한다. 로마 사람은 토가(겉옷의 일종)를 입고 희랍 사람은 팔리움(겉옷의 일종)을 입었으며 로마에서 각 계급에 독특한 표지가 있었던 것같이(원로원 계급을 기사 계급과 구별한 자색 옷과 초승달 모양의 신, 기사 계급을 평민과 구별한 반지), 우리는 우리를 불신자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우리의 상징들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으로 보아, 고대인들은 "사크라맨툼"이란 말을 표징에 적용했을 때 라틴 문인들이 사용한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들의 편의에 따라 새로운 뜻을 만들어 내서 거룩한 표징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더 깊이 연구해 보면, 고대인들이 이 말을 현재와 같은 뜻으로 옮긴 것은 "믿음(faith)"이란 말을 사용할 때에 나타난 것과 같은 유추법을 따른 것이다. 믿음은 약속을 지키는 성실성을 의미하는 말인데 그들은 그것을 사람이 진리에 대하여 지니는 확신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그와 같이 "사크라맨툼(sacramentum)"은 군인이 자기의 사령관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행동이었는데, 고대인들은 사령관이 군인들을 입대시키는 행동으로 만들었다. , 주께서는 "사크라맨타(sacramentum의 복수)"에 의해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리라고 약속하신다(고후 6:16, 37:27).

그러나 나는 이런 자세한 점은 말하지 않겠다. 나는 이미 분명한 논거로써, 고대인들이 "사크라맨툼"이란 말을 사용했을 때에는 오직 거룩하고 영적인 사물의 표징이라는 것을 의미했을 뿐이라는 것을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반대자들이 외적인 표징에서 이끌어 낸 비교들은 인정하지만 그들이 성례의 이차적인 점을 일차적인 것 내지는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다. 성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 일차적인 점이다. 그 다음에 성례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을 확인해야 한다. 이 둘째 점에 적용한다면 이 비교들은 타당하다. 그러나 일차적인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미 본 바와 같이,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성례를 제정하신 용도와 목적대로 우리의 믿음을 도우며 우리의 교리를 보충하지 않는다면 이 신비들은 죽은 것이 될 것이다.

 

(성례 자체는 은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함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14-17)

 

14. 성례를 마술같이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성례의 힘을 약화하며 그 효력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는데, 그들과는 반대로 성례에 일종의 신비한 힘이 있다고 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런 힘을 성례에 주셨다는 것은 성경의 어디를 읽어도 찾아볼 수 없다. 이 위험한 오류에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들은 속는다. 그들을 가르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사를 얻을 수 없는 데서 찾으라고 하며 하나님에게서 그들을 점점 분리시켜 하나님의 진리를 생각하지 않고 허망한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새로운 율법의 성례는(, 현재 그리스도 교회에서 사용하는 것) 우리가 죽을죄로 장벽을 쌓지만 않는다면 의로우며 은혜를 준다고 궤변가들의 각 파는 이구동성으로 가르친다. 이런 생각이 얼마나 치명적이며 유해한가는 말로 형언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과거 수백 년 동안 넓은 지역에 이 생각이 만연해서 교회에 큰 손실을 입혔다. 확실히 그것은 마귀적인 생각이다. 믿음과 관계없는 의를 약속함으로써 이 관념은 영혼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둘째, 성례를 의의 원인이라고 함으로써 원래 땅에 붙고자 하는 경향이 심한 사람의 가련한 마음을 이 미신에 옭아매어, 하나님 자신보다 물질적인 것의 외형을 믿고 안심하게 만든다. 차라리 이 두 가지에 대한 긴 증거를 제시할 필요가 없도록 우리가 그 악한 것들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과 관계없이 받아들인 성례는 교회를 가장 확실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약속과의 관련이 없이는 성례에서 아무것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 약속은 믿는 자에게 은혜를 제시하는 동시에 불신자에게는 진노가 있을 것을 경고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고 사람이 진정한 믿음으로 받는 것 이상의 것을 성례를 통해서 얻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속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또 다른 결론이 나온다. 마치 성례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처럼, 성례에 참가해야만 구원의 보장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다. 칭의는 그리스도에게만 맡겨져 있으며, 그것은 성례라는 인으로 말미암음과 같이 복음 선포에 의해서도 우리에게 전달되고, 성례가 없어도 완전히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 표징이 없어도 보이지 않는 성화가 있을 수 있으며 보이는 표징이 있어도 진정한 성화가 없을 수 있다고 한 어거스틴의 말은 옳다. 그의 다른 글에도 있는 것처럼, 사람은 그리스도를 옷 입고 성례를 받는 데까지 이를 때도 있으며 성화의 생활에까지 이르는 때도 있기 때문이다. 처음 상태는 선인과 악인에게 공통적으로 있을 수 있으나 둘째 상태는 선하고 경건한 사람들에게만 있을 수 있다.

 

15. 본체와 표징은 구별해야 한다

 

이 점을 바르게 이해할 때에 어거스틴이 자주 말한 것과 같이 성례와 성례의 본체와의 구별이 생긴다. 이 구별의 의미는 진상과 외형이 성례전에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두 가지가 긴밀하게 결합되어 서로 분리할 수 없으며, 결합되었다고 하더라도 항상 본체를 표징과 구별해서, 한 쪽에 속한 것을 다른 쪽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거스틴이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성례는 그 의미하는 결과를 나타낼 수 있다" 한 것은 두 가지가 분리되는 데 대해서 말한 것이다. 또 유대 사람들에게 대해서 쓴 것도 같은 의미에서이다. "성례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이나 은혜 곧 성례의 힘은 공통적이 아니다. 그와 같이 중생의 씻음 곧 세례는(3:5) 지금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이지만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그 머리와 함께 중생하게 되는 은혜 자체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 아니다." 그는 또 다른 곳에서 주의 만찬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는 오늘 눈에 보이는 음식을 받지만 성례와 성례의 힘은 서로 다르다. 성단에서 받아먹고 죽으며 또 받음으로써 죽는 사람이 많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주의 떡 조각이 유다에게 독이 된 것은 고가 악한 것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악한 사람이 악한 마음으로 선한 것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금 뒤에, "이 본체로 이루어지는 성례 곧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성례가 어떤 곳에서는 매일 거행되고 또 어떤 곳에서는 며칠에 한 번씩 거행되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받아먹고 생명을 얻으며 어떤 사람은 죽음을 얻는다. 성례의 본체는 그것을 받는 모든 사람들을 생명에 이르게 할뿐 아무도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고 하면서 또 첨부한다. "먹은 사람은 죽지 않을 것이다. , 보이는 성례가 아니라 성례의 힘에 도달하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내적으로 먹는 사람이지 외적으로 먹는 사람이 아니다. 이로 씹는 사람이 아닌 마음으로 먹는 사람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각처에서 받는 사람의 무자격에 의해서 성례가 그 실체에서 분리되며 허망하고 무용한 형태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실체가 없는 표징이 아니라 본체와 표징을 겸해서 가지기 위해서는 거기에 포함된 말씀을 믿음을 가지고 이해해야 한다. 성례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나눠 가짐으로써 우리는 유익을 얻으며 따라서 그만큼 성례에서 유익을 얻는 것이다.

 

16.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성례는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

 

만일 이것이 간단해서 그 뜻이 다소 애매모호하다면 나는 좀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모든 성례의 본체 또는 실체는 그리스도라고 나는 주장한다. 성례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견고성을 지니며 그를 떠나서는 성례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의와 구원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성례를 의와 구원의 원인이라고 유식한 주장을 하는 피터 롬바르드의 오류는 더욱 용인할 수 없다. 우리는 사람이 교묘하게 만들어 내는 모든 원인을 버리고 이 한 가지 원인만을 굳게 잡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례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배양, 강화, 증진시키며, 그를 더욱 완전히 소유하고 그의 풍부한 은혜를 즐기게 되는 것과 정비례해서 성례가 우리들 사이에서 효과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우리는 성례가 제시하는 것을 진정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혹자는 그렇다면 악인들은 배은망덕해서 하나님의 규정을 쓸모없게 만들고 폐기하느냐고 혹 물을 것이다. 내 말은 성례의 힘과 진실성이 그것을 받는 사람의 상태와 선택에 의존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아무리 변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여전히 견고하며 그 본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제시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주의 말씀에 의해서 성별된 상징이 실지로 그 이름같이 되며, 그 자체의 힘을 유지하는 것을 아무것도 방해할 수 없다. 그러나 악하고 불경건한 사람은 여기서 유익을 받지 못한다. 어거스틴은 이 문제를 몇 마디로 잘 해결했다. "만일 우리가 육적으로 받는다면 그것은 여전히 영적이지만 그것이 우리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위에서 인용한 구절들에서 어거스틴이 성례를 그 진상에서 분리한다면 무가치한 것이 된다고 말한 것과 같이, 다른 곳에서는 이 두 가지를 결합할 때에도 양자를 동시에 구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외적인 표징에 너무 긴밀히 매달리게 된다고 경고한다. 그의 말을 인용한다면, "문자를 따라 그리고 표징을 본체처럼 받는 것이 노예적인 연약함의 특색인 것과 같이 표징에 무익한 해석을 붙이는 것은 바른 길을 떠난 오류의 특색이다." 그는 여기서 피해야 할 두 가지 과오를 지적한다. 첫째 과오는, 표징을 받을 때 그것을 주신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는 태도를 취하며, 우리의 반대로 그 비밀한 뜻을 소멸시키거나 약화시킴으로써 표징이 우리에게 대해서 전혀 결실이 없게 만드는 것이다. 둘째 과오는, 우리의 마음을 보이는 표징보다 더 높이 비약시키지 않고,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유익을 표징에서 오는 것 인양 돌려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유익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며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게 만드신다. 외적인 표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유인해 간다면 그 도움으로 우리는 유익을 얻지만, 표징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돌린다면 그 가치는 부끄럽게도 완전히 말살되는 것이다.

 

17. 성례의 진정한 임무

 

그러므로 성례는 하나님 말씀과 같은 직책, ,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제시하며 그의 안에서 하늘 은혜의 보고를 제시하는 직책을 가졌다는 것을 확정된 원칙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성례는 믿음으로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포도주나 기름이나 다른 액체들은 그것을 받을 그릇의 뚜껑이 열려 있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부어도 흘러 없어질 뿐이다. 그릇 밖에는 온통 묻을지언정 그릇 속은 텅 빌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고대인들이 성례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서 조금 과장해서 기록한 것에 있어서 비슷한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 성례에는 숨은 힘이 결합되어 있어서, 잔에 포도주를 따르듯이 그 힘으로 성령의 은혜를 우리에게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례에 부여하신 기능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확증하며 확인해 주는 것이다. 또 성령께서 동반하시지 않으면 성례는 더 이상의 유익이 없게 된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 이 증거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또 여기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가 찬란하게 빛난다. 이미 시사한 바와 같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자나 언약의 비준을 전하는 담보물이 사람들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처럼 성례는 하나님에게서 우리에게로 온 사자 또는 담보물이다. 그 자체로는 아무 은혜도 주지 않고, 다만 부요하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우리에게 알리며(성례는 담보물과 표이므로) 그 은혜를 우리에게 확증한다. 성례가 모든 사람에게 무분별하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자기 백성에게만 특히 주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져오며 성례가 우리 사이에서 자리를 얻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례에 하나님의 영의 능력의 임재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 하신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례를 집행할 때에 결실이 없고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내적인 은혜와 외적인 집행을 구별해서 따로 생각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표징으로 약속하며 표현하시는 것을 성실하게 실행하신다. 표징은 그 창시자이신 분의 진실성과 성실성을 증명하는 자체의 효력을 가졌다. 여기서의 유일한 문제는, 하나님께서는(그들이 말하는) 그의 고유한 능력으로 행동하시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의 일을 외적인 상징들에 맡겨 버리시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도구를 사용하시든, 그 도구가 그의 최초의 활동에 아무런 손상도 끼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성례에 대한 이 교리가 가르쳐질 때에 성례의 위엄이 높이 칭찬을 받고 그 효과가 분명하게 알려지며 그 가치가 풍성하게 선포된다. 또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중용을 지켜서 성례에 돌리지 않을 것을 돌리거나 성례에 속한 것을 빼앗는 일이 없게 된다. 동시에 칭의의 원인과 성령의 능력이 그릇이나 수레 안에 있듯이 물질 속에 들어 있다고 하는 저 그릇된 교리가 제거되고, 어떤 사람들이 간과하는 저 최고의 능력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또 하나 있다. , 목사가 설명하며 외적인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속에 성취하시며 또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을 보잘것없는 인생에게 넘기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거스틴도 이 점을 현명하게 경고한다. "어떻게 모세와 하나님이 함께 성결하게 하는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모세가 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는 그의 사역을 통하여 눈에 보이는 성례로 그렇게 하며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은혜로 하신다. 또한 거기에는 보이는 성례의 모든 결실이 있다. 보이지 않는 은혜에 의한 성화가 없이는 이 보이는 성례들에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

 

(성경에 있는 사건들에 널리 이 용어를 적용하는 것과 교회의 보통 성례에 국한시키는 것. 18-20)

 

18. 광의의 성례

 

성례(sacrament)라는 말은 우리가 이미 그 성격을 논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의 신실성을 사람이 더욱 확실하게 믿도록 만드시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명하신 모든 표징을 포함한다. 어떤 때에는 자연물로 표징을 삼으시고 어떤 때에는 기적으로 나타내신다.

첫째 종류의 예를 든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영생의 보증으로서 생명나무를 주시고 그 열매를 먹는 동안은 영생을 확신할 수 있게 하셨다(2:9, 3:22). 또 노아 그 후손들을 위해서 무지개를 두시고 홍수로 땅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는 표를 삼으셨다(9:13-16) 아담과 노아는 이런 것을 성물로 생각했다. 그 자체로서는 영생을 줄 수 없는 생명나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었다는 것이 아니며, 반대쪽에 있는 구름에 반사된 태양 광선에 불과한 무지개가 홍수를 막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생명나무와 무지개에 표징을 새겨 두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의 증명과 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전에도 생명나무는 나무였고 무지개는 무지개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표가 새겨진 후에는 새로운 형태가 생겼고 전과 다른 것이 되기 시작했다. 이런 말을 허망 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지금도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언약을 우리에게 증거한다. 우리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약속 곧 땅이 홍수로 인하여 멸망치는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읽는다. 그러므로 어떤 이론가가 우리의 믿음의 단순성을 우롱하려고 저렇게 많은 색깔은 맞은편 구름에 반사된 태양 광선에서 저절로 생긴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렇다고 인정하겠지만 동시에 자연의 주인이며 주재자이신 하나님 곧 자기의 뜻대로 자기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도록 모든 자연의 요소들을 이용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는 그 우매함을 우리는 비웃는다. 하나님께서 해와 별과 땅과 돌에 이런 기념의 뜻을 인치신다면 이 모든 자연물은 우리에게 성물이 될 것이다. 은 덩어리와 은전은 똑같은 금속이라도 가치가 다른데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은 덩어리는 자연 상태에 있을 뿐이지만 관인이 찍힐 때에 은전이 되며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물건에 말씀으로 표를 하셔서 단순한 자연물이던 것이 성물이 되게 하실 수는 없겠는가?

둘째 종류의 예를 든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연기 나는 풀무 속에 있는 빛을 보이셨다(15:17). 기드온에게 승리를 약속하셨을 때, 양털은 이슬에 젖게 하시고 땅은 마르게 하시며 또 그와 반대로 땅에는 이슬이 내리게 하시고 양털은 마르게 하셨다(6:37-40). 히스기야에게 회복을 약속하셨을 때에, 일영표에 있는 해 그림자를 뒤로 10도 물러가게 하셨다(왕하 20:9-11, 38:8). 이런 일들은 그들의 미약한 믿음을 지탱하며 강화하시기 위해서 하신 것이므로 역시 성례였다.

 

19. 교회의 정규적인 성례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의도하는 것은 주께서 그의 교회에서 항상 행하라고 하신 성례들을 논하는 것이다. 주께서 이 성례들을 제정하신 것은 주를 경배하는 종들이 한 믿음을 가지며 한 믿음을 고백하도록 장려하시려는 것이었다. 어거스틴의 말을 빌리면, "참 종교이든 아니면 거짓 종교이든 사람들을 한 종교로 연합하게 하려면 반드시 표징이나 보이는 성례에 함께 참가하게 함으로써 서로 결합시켜야 한다." 우리의 지극히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이 필요성을 아셨기 때문에 맨 처음에 종들을 위해서 경건을 위한 일정한 행사를 제정하셨다. 그 후에 사탄이 이 행사를 악하고 미신적인 예배 행위로 변질시켜 여러 가지 모양으로 타락시켰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여러 가지 비밀 종교에 입교시키는 의식과 그 밖의 타락한 의식들이 생겼다. 이런 의식들은 오류와 미신이 가득한 것이었지만 사람이 종교를 고백할 때에는 외형적인 표징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그런 의식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모든 표징이 나타내야 할 진리와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회고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신성한 상징들 곧 진정한 경건을 위한 보조 수단으로서의 그 근본 목적에서 어긋나지 않는 상징들을 말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이 신성한 상징들은 무지개나 나무와 같이 단순한 표징이 아닌 의식이다. 혹은 여기서 주어진 표징은 의식이라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이 표징들은, 우리가 위에서 주께서 오는 은혜와 구원의 증거라고 말한 것과 같이 우리 쪽에는 고백의 표, ,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공개적으로 서약하며 하나님께 충성하겠다는 의무를 지는 표지이다. 그러므로 크리소스톰은 이 의식들을 "언약들"이라고 부르며, 이 언약들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맹을 맺으시고 우리는 순결하고 성결한 생활을 하겠다는 약속을 한다고 했다. 여기에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상호 협약이 개재하기 때문이다. , 이 의식들을 통하여 주께서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책임과 벌을 일체 말소하겠다고 약속하시며 독생자 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는 것과 같이, 우리 편에서는 이 고백에 의해서 경건하고 순결한 생활을 하겠다는 의무를 하나님께 대하여 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성례를 의식이라고 부르며, 그 의식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훈련시키고자 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 우선은 그들 안에 믿음이 배양되고 고무되며 강화되도록 하시고 그 다음에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종교를 증거하도록 훈련시키신다고 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20. 구약의 성례들은 그리스도를 약속했다

 

주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고자 하시는 그 경륜에 따라 성례는 각 시대에 맞도록 다양하였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는 할례를 명하셨다(17:10). 후에 모세의 율법에서 결례와(11-15) 희생과 다른 의식들이(1-10) 첨가되었다.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유대인들의 성례였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것들이 폐지되고 세례와 성만찬이라는 두 가지 성례가 제정되어 현재 그리스도의 교회가 사용하고 있다(28:19, 26:26-28). 나는 교회 전체가 쓰도록 제정된 것에 관해 말하고 있다. 나는 교회의 목사들을 취임시킬 때 안수하는 것을 성례라고 부르는데 반대하지는 않으나 또한 그것을 정규적인 성례에 포함시키지도 않는다. 보통 성례라고 생각하는 다른 행사들의 지위에 대해서는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저 고대의 성례들은 현대의 성례전들과 똑같은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고, 손을 잡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거나 또는 형상으로써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우리는 이미 성례는 하나님의 약속에 인치는 일이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주신 약속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것이 분명하다(고후 1:20).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가르치기 위해서는 성례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한다. 산상에서 모세 앞에 제시된 율법대로의 회막과 예배의 하늘 모형(25:9,40, 25:30)도 여기에 속한다. 다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고대의 성례들은 그리스도를 아직 기다리고 있었을 동안에 어렴풋이 그를 예시했고, 현재의 성례는 이미 임재 하셨던 그리스도를 확증한다는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성례들은 서로 긴밀한 관계가 있으며 구약의 성례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현현을 예시한다. 21-26)

 

21. 할례와 결례와 희생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 일들은 하나씩 설명함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무엇이든지 사람에게서 오는 것, , 인류의 본성 전체는 부패했으며 끊어 버릴 필요가 있다고 경고하는 상징이었다. 그뿐 아니라 할례는 아브라함이 복된 후손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받은 것을 그들에게 회상시키며 확인하는 표였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하셨으며(22:18), 그 후손에게서 유대인들도 복을 얻으리라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구원하는 후손은 바울이 가르치는 대로 그리스도였고(3:16),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아담으로 인해서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게 된다고 그들은 믿었다. 따라서 할례와 아브라함과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 바울이 가르친 일이 유대인들의 경우에도 해당되었다. , 할례는 믿음의 의를 알리는 한 표징이었다(4:11). 바꿔 말하면, 그 후손을 기다리는 그들의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의로 여기신다는 것을 그들에게 더욱 확실하게 보증하시는 일종의 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적당한 기회에 할례와 세례를 더 자세하게 비교하겠다.

세례와 결례는 그들의 본성이 자신의 부정과 추악함과 오염으로 더럽혀졌다는 것을 밝힌다. 그러나 이 의식들은 그들의 추악을 씻어 없애 버릴 다른 씻음을 약속했다(9:10,14). 이 씻음은 그리스도였다. 우리는 그의 피로 씻음을 받으며(요일 1:7, 1:5), 하나님 앞에 그의 순결하심을 가지고 가서 우리의 추악함을 덮는다.

희생은 그들의 불의를 깨닫게 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어떤 보속을 해야 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쳤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인 대제사장이 있어서 피를 흘리며 죄의 용서를 위해서 충분한 희생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보속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쳤다. 이 대제사장은 그리스도였다(4:14, 5:5, 9:11). 그는 자기의 피를 흘리셨다. 그는 친히 희생 제물이 되셨다. 그는 하나님께 자기를 드려 죽음에 이르기까지 복종하셨다(2:8).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게 한 인류의 불순종을 그의 순종으로 말소하셨다(5:19).

 

22.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성례에서 보다 완전하게 나타난다

 

우리의 성례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더욱 완전하게 계시 될수록 성례는 더욱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이미 약속하신 대로 그리스도를 참으로 계시하신 때부터 그렇게 되었다. 세례는 우리가 깨끗하게 씻음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증하며 성만찬은 우리가 구속을 얻었다는 것을 확증한다. 물은 씻음을, 피는 보속을 나타낸다. 이 두 가지는 그리스도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의 말과 같이 "물과 피로" 임하셨다(요일 5:6). 곧 씻으며 구속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영도 이 일을 증거하신다. 참으로,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8) 물과 피는 깨끗하게 하며 구속하는 증거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증거인 성령은 이런 증거를 우리가 확신하게 만드신다. 이 숭고한 신비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흘러나온 때에(19:34)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훌륭하게 제시되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십자가를 우리의 성례의 원천이 라고 불렀다.

우리는 아직도 이 점을 좀더 자세하게 논해야 하겠다. 확실히 성령의 은혜도시대의 전후를 비교할 때에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여러 구절에서 특히 요한복음 7장에서(7:8-9,38-39) 추론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성령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나라의 영광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율법 하에서는 그림자가 있었고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한 말도(2:17) 이런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사도의 의도는 고대에 있었던 은혜의 증거에서 효력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현재 세례와 성만찬으로 우리에게 자신의 신실성을 증명하려고 하시는 것과 같이 고대에는 은혜의 증거로 족장들에게 증명하려고 하셨다. 바울의 의도는 양자를 비교함으로써 우리가 받은 것을 찬양하며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 율법 하의 의식들이 폐지된 것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23. 옛 성례와 새 성례의 유사점과 차이점

 

그러나 우리는 옛 율법과 새 율법의 성례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하는 스콜라 학파의 교리를 완전히 배척해야 한다.(이 교리는 내친 김에 언급할 뿐이지만) 그들은 옛 율법의 성례는 하나님의 은혜를 예시할 뿐이고 새 율법의 성례는 하나님의 은총을 현재의 실재로서 준다는 듯이 구별한다. 참으로 사도는 조상들이 우리와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었다고 가르치며, 그 식물은 그리스도라고 설명했을 때에(고전 10:3) 신약의 성례에 대한 것과 똑같이 구약의 성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말했다.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교통을 계시한 것을 누가 감히 헛된 표징이라고 인정할 것인가? 또 바울이 다룬 일의 성격상 그의 주장은 분명히 우리 편을 지지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빈약한 지식과 기독교의 무의미한 칭호와 외적인 표를 믿고 감히 하나님의 판단을 무시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보이신 엄격한 태도를 예를 들어 분명히 하였다. 이것은 만일 우리가 유대인들과 같은 죄악에 빠진다면 그들이 받은 벌이 우리에게도 있으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각성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비교가 적당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거짓 자랑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그가 금한 은혜에 있어서 그들과 우리 사이에 다름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우선 성례에서 그 은혜가 같다고 했다. 영혼이 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만한 특권이 우리에게 전혀 없다고 했다. 또 그가 다른 곳에서 믿음의 의를 인치는 인이라고 부른 할례에(4:11) 돌린 것보다 더 큰 가치를 우리의 세례에 돌리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현재 성례가 우리에게 보이는 것을 옛날 유대인들은 그들의 성례에서 받았다. , 그리스도와 그의 풍성한 은혜를 받은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성례에서 느끼는 것과 똑같은 힘을 그들은 그들의 성례에서 느꼈다. , 성례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인치는 도장이었으며 영원한 구원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우리의 반대자들이 히브리서를 잘 해석했다면 그들은 이렇게 속지 않았을 것이다. 율법의 의식들에 의해서는 죄는 속죄되지 않으며 그 옛 그림자들은 의를 위해서 중요하지 않았다고(10:1) 하는 말씀을 읽었을 때, 그들은 거기서 논의되는 비교를 무시하고 율법이 그 자체만으로는 지키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점만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의식들은 아무 실속 없는 그림자에 불과했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사도의 의도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는 율법의 의식들은 아무것도 아니며 그 효력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의존한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었다.

 

24. 할례의 가치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그들은 항의하는 방법으로, 바울의 글에서 "의문에 속한 할례"(2:29) 관한 말을 인용할 것이다. 의문(儀文)에 속한 할례는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하고 아무것도 주지 못하며 무의미한 것이라고 하는 바울의 언명은 할례를 세례보다 훨씬 낮게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2:25- 29, 5:6, 6:15, 고전 7:19 참조). 그러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똑같은 말을 세례에 대해서 해도 잘못이 없을 것이다. 사실 바울 자신이 먼저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믿음에 들어왔을 때 받은 외면적인 씻음은, 만일 마음까지 내면적으로 깨끗하게 되지 않고 또 끝까지 순결을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전혀 무시하신다고 말했다(고전 10:5 참조). 그 다음에 베드로는, 세례의 실상은 외면적인 씻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맑은 양심의 증거에 있다고 했다(벧전 3:21).

그러나 그들은, 다른 곳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할례와 비교했을 때 손으로 행한 할례를 완전히 멸시하는 것 같다고(2:11-12) 말할 것이다. 나는 이 구절에서 할례의 위엄은 조금도 낮아지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여기서 바울은 이미 폐지된 할례를 필요한 것이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을 반박한다. 그러므로 그는 옛 그림자를 버리고 실체 안에 굳게 서 있으라고 신자들에게 충고한다. 이 교사들은 당신에게 몸에 할례를 받으라고 가르치지만, 당신은 이미 몸과 영혼에 영적으로 할례를 받았으므로 당신은 실체의 계시를 받았으며 이것은 그림자보다 훨씬 나은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러나 혹자는, 우리는 실체를 가졌다고 해서 그 모형을 멸시해서는 안 되며, 조상들 중에서도 바울이 말하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일이 있었지만 외면적인 할례가 그들에게 무익한 것은 아니었다고 반대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이런 반대를 막기 위해서, 골로새 교회 신자들은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다고 즉시 부연하여 말한다(2:12). 이것은 고대인들을 위해서 할례가 한 일을 지금은 세례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하는 것은 곧 세례에 대한 부당한 처사가 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25. 신약성경은 왜 유대인들의 의식들을 경시하는가

 

그러나 그 다음에 있는 것, , 유대인들의 의식은 모두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요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한 것은(2:17) 설명하기가 더 어렵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 말씀은 우리가 최근에 언급한 일이 있다. 참으로 가장 어려운 것은 히브리서의 여러 장에서 논의된 문제들이다. 동물의 피는 양심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하고(9:12이하),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이지 참 형상이 아니라고 하였으며(8:4-5, 10:1), 예배하는 사람들은 모세의 의식들에서 완전한 것을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고 했으며(7:19, 9:9, 10:1), 그 외에도 이 비슷한 말씀들이 있다. 나는 이미 간단하게 말한 것을 반복한다. , 바울이 의식들을 그림자라고 한 것은 실상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의식들의 성취가 그리스도가 나타나시는 때까지 보류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나는, 이것은 효력에 대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표시하는 방법에 대한 말로 해석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권능과 임재를 신자들의 마음속에 느끼게 만드셨지만, 그가 육신으로 나타나시기까지는 모든 표징이 그가 계시지 않은 것같이 그를 예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 이 모든 구절에서 바울은 단순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논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의식만으로 경건이 성립된다고 가르친 거짓 사도들을 상대로 바울은 싸우며, 그들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의식들 자체에 어떤 가치가 있느냐 하는 문제만을 말하면 충분했던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도 같은 목적을 추구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의식들은 그 진정한 본연의 의미로 인정되지 않고 사악하고 거짓된 해석으로 왜곡되었다. 그 합당한 사용이 아니라 미신적인 악용이 문제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끊어진 의식은 모든 힘을 빼앗긴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의미하는 본체가 제거될 때에는 표징이 가진 것도 일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만나를 몸을 위한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말씀하실 때에 자기의 말씀을 그들의 유치한 생각에 맞추셔서, 영혼에 영생의 소망을 불어넣어 주시는 그분께서 더 좋은 음식을 나눠준다고 말씀하셨다(6:27).

그러나 반대론에 대한 더 명확한 대답을 원한다면, 문제 전체의 귀착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모세의 율법에 있는 모든 화려한 의식들은 그리스도를 지향하지 않는 한 헛되고 무가치한 것이다. 둘째, 그 의식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본 것이기 때문에 그가 드디어 육신으로 나타나셨을 때에 의식들은 성취되었다. 끝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의식들이 폐지된 것은 그림자가 태양의 밝은 빛 가운데서 사라지는 것과 같이 합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이 이상의 논의는 세례와 할례를 비교하기로 결정한 곳으로 미룰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간단히 말할 뿐이다.

 

26. 유사점과 차이점 : 어거스틴의 구별

 

현대의 가련한 궤변가들은 우리의 표징들에 관한 고대인들의 글에서 성례에 대한 과도한 찬양을 읽고 속은 것 같다. 어거스틴의 발언도 그 중의 하나이다. "옛 율법의 성례들은 구주를 약속했을 뿐이나 우리의 성례는 구원을 준다." 여기 있는 표현과 이와 비슷한 다른 표현들이 과장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궤변가들은 자기들의 과장된 교리까지 발표했으나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고대인들의 글과 상반되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한 말의 뜻은 그가 다른 곳에서 한 말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의 율법에 있는 성례들은 그리스도를 예고했지만 우리의 성례는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파우스트에 대한 반박문에서도 "그들의 것은 앞으로 이루어질 일들에 대한 약속이었고 우리의 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을 나타내는 표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그들의 것은 그를 아직 기다리고 있었을 때에 그를 대표했으나 우리의 것은 이미 오신 그를 임재하시는 것같이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어거스틴은 표시하는 방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다른 곳에서 말했다. "율법과 예언자들에게는 장차 있을 일을 예고하는 성례들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성례들은 옛날 성례들이 장래의 사건이라고 선포한 것이 이미 나타났다고 증거한다." 그러나 성례의 본질과 그 효력에 대한 생각을 그는 여러 곳에서 설명했다. 예컨대, 유대인들의 성례는 표징은 달랐으나 그 표시하는 뜻은 같았으며 보이는 외형은 달랐으나 영적 능력은 같았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표징에 동일한 믿음이 있다. , 서로 다른 표징은 서로 다른 말과 같은데 이는 말은 때에 따라 그 소리가 달라지며 표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조상들은 우리와 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으나 그 음료의 물질은 달랐다. 그러므로 표징은 변해도 믿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반석이었으나(고전 10:4)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제단 위에 안치되셨다. 그들은 반석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성물로 믿고 마셨다. 우리가 무엇을 마시는지는 신자들이 안다. 외적으로 볼 때에는 그들이 마신 것은 다르다 그러나 내면적인 의미를 보면 그들은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다." 또 다른 구절에서, "이 신비에서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음식을 먹었는데 그것은 외형에 있어서가 아니라 의미에 있어서이다. 이는 그들에게는 반석으로 대표되었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점에서도 다소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하나님의 부성적인 자비와 성령의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된다고 증거하는 점에서는 양쪽이 다 같다. 그러나 우리의 성례는 더 분명하고 더 빛나는 증거를 한다. 양쪽이 다 그리스도를 나타내지만 우리 것은 더욱 풍부하고 완전하게 나타내 주며, 그것은 우리가 위에서 논한 신구약간의 차이에 부합한다.(우리가 고대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최고의 증인으로 생각해서 자주 인용하는) 어거스틴도 이런 뜻으로 가르쳤다. , 그리스도께서 계시되셨을 때에 그 수는 더 적으며 의미는 더 숭고하고, 능력이 더 훌륭한 성례가 제정되었다는 것이다.

독자들이 간단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곧 궤변가들이 소위 opus operatum(행한 행위)에 대해서 무엇을 상상하든지 그것은 거짓일 뿐 이며 성례의 본질에 배치된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례를 제정하실 때, 모든 것을 빼앗긴 가련한 신자들이 아무것도 성례에 가지고 오지 말고 오직 간구하는 태도만을 가지라고 하셨다. 따라서 성례를 받음에 있어서 신자들에게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며 이 받는 행동조차(그들은 순전히 피동적으로 할 뿐이므로) 그들의 공로로 돌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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