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그리스도인의 생활 : 첫째로 성경은 어떤 논거로 우리에게 이 생활을 주장하는가?
1. 논설의 의도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중생의 목적은 신자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의와 신자의 순종 사이에 조화와 일치를 나타내며, 그렇게 함으로써 이미 받은 자녀로서의 자격을 더욱 확고하게 하려는 데 있다(갈 4:5, 벧후 1:10 참조).
하나님의 율법에는 우리 안에 그분의 형상을 회복시킬 수 있는 신선한 힘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둔하여 많은 자극과 도움이 필요하므로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들의 열성이 그릇된 길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성경 구절을 토대로 생활을 설계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어떻게 규제할 것이냐를 서술함에 있어서 나는 문제의 내용이 복잡 다양한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 중대성으로 보아서, 만일 자세히 논하려면 방대한 저서가 될 것이다.
한 가지 덕목에 대한 훈계를 기술하는 데도 옛날 교부들은 무수한 말을 한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한 마디도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한 가지 덕목에 대해서 권장하려고 해도 재료가 풍부하기 때문에 자세히 논하지 않을 수 없고 말을 많이 하지 않으면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 것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이제 생활지침을 제시하려고 하지만 개개의 덕목을 상술하거나 여러 가지 충고를 하는 등의 탈선을 할 생각은 없다. 이런 것은 다른 분들의 글에서, 특히 교부들의 설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정리된 생활로 인도될 수 있는가를 경건한 사람에게 보여주며, 그의 각종 의무를 결정할 어떤 보편적인 준칙을 간략하게 규정하는 것으로 나는 만족하겠다. 열변을 토할 기회가 있을는지 모르나, 내게 적당하지 않은 일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 나는 원래 간결한 것을 좋아하며 더 많이 말한다고 해도 성공하지 못할는지 모른다. 더 길게 가르치는 것이 많은 환영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그뿐 아니라, 이 저서의 계획으로 보아서, 교리의 단순한 개요를 가급적 간단하게 제시해야 한다.
철학자들은 바른 것과 고상한 것의 한계를 정하고, 거기서부터 개개인의 의무와 수다한 덕목을 끌어낸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경에는 이 문제에 대한 고유의 질서가 있으며, 그 처리 방법이 지극히 아름답고 모든 철학적 방법보다 훨씬 확실하다. 유일한 차이점은, 철학자들은 명예욕이 강했기 때문에 자기의 민첩한 두뇌를 자랑하기 위해서 논술이 지극히 정연하고 명료하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솔직하게 가르치셨기 때문에, 어떤 조직적 방법을 정확히 또는 부단히 따르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규정하실 때 그는 우리가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암시하신다.
2. 그리스도인 생활의 동기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성경의 교훈에는 두 가지 중요한 양상이 있다. 첫째는, 우리의 본성에는 의에 대한 사랑이 전연 없지만, 그것이 우리 마음속에 주입되고 확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의에 대한 열의를 가지게 된 우리가 정처 없이 방황하지 않도록 준칙을 정하라는 것이다.
성경에는 의를 권장하는 심히 많고도 훌륭한 비유가 있다. 그 중에서 얼마는 이미 다른 곳에서 보았고 여기서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겠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므로 우리는 거룩해야 한다는 경고의 말씀이 있다(레 19:2, 벧전 1:15-16). 의의 기초로서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이 있는가? 참으로 우리는 길을 잃은 양들같이 흩어져서 이 세상의 미로를 헤매고 다녔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모으셔서 자신과 만나게 하셨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우리는 거룩함이 그 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친교에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우선 우리는 하나님에게 굳게 결합되어야 하며, 그 결과로 그의 거룩하심이 우리에게 주입되어 그가 부르시는 곳으로 우리가 따라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악이나 불결과는 아무 접촉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그의 영광의 가장 특이한 점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목표는 이것이라고 가르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고자 하면 우리는 항상 이 목표를 주시해야 한다고 한다(사 35:8, 기타). 세상의 사악과 부패에 잠겨있던 우리가 구원을 받은 후에도 평생 거기서 주저앉아 있다면, 구원의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그뿐 아니라 성경에는 주의 백성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사람은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거해야 한다는 충고가 있다(시 116:19, 122:2-9 참조). 주께서 이 도성을 자신의 것으로 성별하셨으므로 주민의 불결로 그것이 더럽혀지는 것은 부당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장막에 유할 자는 흠이 없고 의를 구하는 자라고 하였다(시 15:1-2, 24:3-4). 이는 그가 거하시는 성소가 마구간 같이 오물이 가득하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가장 강렬한 동기를 그리스도 인격과 그의 구속 행위에서 얻는다
성경은 우리를 더욱 효과적으로 일깨우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셨을 때에(고후 5:18 참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형상을 인치시고(히 1:3 참조), 우리가 그 형상과 같이 되도록 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면 도덕 철학을 철학자들만이 충분히 또 조직적으로 진술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철학자들 사이에서 이보다 더 훌륭한 처리방법을 찾아보라고 하자. 철학자들은 우리에게 특히 덕에 대한 교훈을 할 때에, 본성대로 살라고 할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진정한 근원으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낸다. 또한 우리의 생명의 창조자이시며 우리의 생명을 좌우하시는 하나님에게 우리의 생명을 맡기라고 명령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창조 당시의 본연의 상태에서 타락했다는 것을 가르친 후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받게 된 우리 앞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세우셨고 우리는 그 모범을 우리의 생활에서 실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한 가지일보다 더 효과적인 어떤 것을 요망할 수 있는가? 아니, 이 한 가지 일 이외에 또 무엇이 필요한가? 주께서 우리를 양자로 삼으실 때의 조건은 하나뿐이었다. 즉, 우리의 양자 관계의 유대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활에서 나타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의에 몸을 바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이에게 반역하는 사악한 배신행위를 할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주 자신을 배척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열거하고 그 은혜와 우리의 구원의 각 부분에 대해서 일일이 충고할 계기를 제공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아버지로서 나타내셨으므로 만일 우리가 자녀다운 생활을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감사하지 않는 이유를 입증해야 한다(말 1: 6, 엡 5:1, 요일 3:1). 그리스도께서 그 피로 우리를 씻어 정결하게 하셨고 세례를 통하여 그 정결을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또다시 타락으로 우리 자신을 더럽히는 것은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엡 5:26, 히 10:10, 고전 6:11, 벧전 1:15,19).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의 몸에 접붙이셨으므로 우리는 그의 지체인 우리 자신에 오점이나 결점을 만들어 아름다움을 손상시키는 일이 없도록 특히 주의해야 한다(엡 5:23-33, 고전 6:15, 요 15:3-6).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승천하셨으므로 우리는 세속적 욕망을 버리고 진심으로 하늘을 동결해야 한다(골 3:1이하). 성령께서 우리를 성전으로서 하나님께 바치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통해서 빛나도록 주의하며, 추악한 죄로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전 3:16, 6:19, 고후 6:16). 우리의 영혼과 몸은 하늘의 불멸과 퇴색하지 않는 면류관을 받기로 정해졌으므로(벧전 5:4), 우리는 우리의 영과 육을 주의 날까지 순결하고 흠 없이 보존하도록 힘 있게 노력해야 한다(살전 5:23, 빌 1:10 참조). 이런 충고들은 우리의 생활을 건설하는 기초로서 가장 복된 것이다. 철학자들에게 가서 이와 같은 것을 구하려고 해도 무익할 것이다. 그들은 덕을 권장할 때에, 기껏 고상한 생각을 한다는 것이 인간 본래의 존엄성이란 생각을 결코 넘지 못한다.
4.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혀의 문제가 아니고, 가장 깊은 마음의 문제이다
그리스도의 이름과 휘장 외에는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 자칭하고 싶은 사람들을 여기서 책망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겠다. 그들은 그의 신성한 이름을 얼마나 염치없이 자랑하고 있는가? 참으로, 복음의 말씀으로부터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체득한 사람이 아니면, 그와의 친교를 가질 수 없다. 사도는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입으라는 교훈을 받지 않은 사람은 그를 올바르게 알지 못한다고 한다.
이는 그들은 욕망에 속아 썩어가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엡 4:22,24). 그러므로 그들이 복음에 대해서 넓은 지식과 유창한 말주변으로 무엇이라고 지껄이든 간에, 그리스도를 아는 체하는 그들의 태도는 거짓이며 공정하지도 않다는 것이 증명된다. 복음은 혀의 교리가 아니고 생명의 교리이기 때문이다. 다른 연구 분야에서는 오성과 기억력만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복음은 그렇지 않다.
복음을 해득하려면 복음이 영혼을 전적으로 점령하고 속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그 곳에서 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아니면서 그런 체하며 자랑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그 모독 행위를 못하게 하고 교사인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처신하라. 우리는 종교 생활의 근원이 되는 교리에 첫 자리를 주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이 그 교리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리는 우리의 속마음에 들어가며, 다음에 일상생활이 되며, 우리를 개조하고 동화시킴으로써 복음의 결과가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 철학자들은 철학을 인생의 스승으로 믿기에, 그것을 궤변술로 타락시키는 자칭 철학자들을 볼 때에 격분하여 그들을 철학계에서 축출한다. 당연한 조치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혀끝에서 복음을 굴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이 천박한 궤변가들을 우리가 미워하는 것은 훨씬 더 당연하지 않은가? 복음의 효력은 마음속 가장 깊은 감정에까지 침투해서 영혼 안에 자리를 잡고 인간 전체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 철학자들이 하는 충고보다 백 배나 더 심각한 영향을 주어야 한다.
5.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불완전과 노력
나는 그리스도인의 도덕 생활에서는 복음만을 호흡하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이것을 원해야 하고 이것을 목표로 삼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고 내가 복음적 완전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정도로 복음적 완전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완전에서 멀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모두 교회에서 몰아내야 할 것이다. 목표에 조금은 접근한 사람들이 많은데, 이 사람들을 버린다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진심으로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을 눈앞에 세우라. 우리가 분투노력해서 도달해야 할 목표를 정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명령한 일들을 일부분은 실행하고 일부분은 우리의 생각대로 버리는 식으로 그 일들을 하나님과 우리가 나눈다는 것은 합당치 않기 때문이다. 첫째로, 그는 어디서나 그에 대한 경배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성실을 요구하신다(창 17:1, 시 41:12 기타). 이 말은 마음의 진실한 단순성, 아무런 간사함이나 가장이 없는 마음, 두 마음과 반대되는 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올바른 생활의 출발점은 영적인 것이라고 하는 말과 같다. 이 영적인 생활에서는 거룩함과 의로움을 함양하고 체득하기 위해서 마음의 깊은 감정을 진심으로 하나님께 바친다.
그러나 지상 감옥인 육체를 쓰고 있는 동안은 아무도 그것을 밀고 나갈 충분한 힘이나 충분한 열의가 없다. 신자의 대부분은 심히 약해서 그들은 비틀거리며 절름거리며 심지어 기어갈 뿐, 그 움직이는 속도가 아주 느리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 자기의 미미한 능력의 정도에 따라서 전진할 생각으로 우리가 시작한 여행을 떠나도록 하자. 비록 아주 짧은 거리일지라도 매일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그런 출발은 상서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길에서 다소라도 끊임없이 전진하도록 우리의 노력을 중단치 말아야 한다. 우리의 성공이 사소한 때에도 낙심하지 말라. 원하는 데까지 미치지 못하더라도 어제보다 오늘이 나으면 무익한 노력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진실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우리의 목표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자기만족에 빠지거나 자신의 악행을 변명하지 말고 종점을 향해서 계속 분투노력하라. 우리의 목적은 선한 일에서 평소보다 조금씩 나아 져 드디어 선 자체에 도달하는 것이다. 우리의 전생애를 통해서 추구하고 따라가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육신의 연약을 벗어버리고 그분과의 완전한 친교에 들어가게 될 때에 만 우리는 거기 도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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