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핵심 : 자기 부정
(탈속과 자기 부정의 기독교 철학 :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1-3)
1.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속하였다
인간 생활의 규율을 위하여 가장 잘 마련된 적절한 방법은 하나님의 율법이 제공한다. 그러나 하늘 교사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그 율법에 제시된 준칙과 부합하도록 더욱 명백한 계획에 따라서 인도하는 것을 좋게 보셨다. 그 계획의 출발점은 신자의 의무에 대한 개념인데, 그 의무는 "그들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께 드릴 합당한 예배라는 것이다(롬 12:1). 이것을 근거로 하여,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권면이 나온다(롬 12:2).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일은 이제부터 우리가 하나님에게 성별되며 바치어져, 금후로는 그의 영광만을 위해서 생각하고 말하며 명상하며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거룩한 것을 속되게 사용하면 반드시 하나님께 현저한 손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고(고전 6:19 참조) 주의 것이라면 우리가 멀리 피해야 할 오류가 무엇이며, 일생의 모든 행동을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는 분명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이나 의지가 우리의 계획과 행동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을 따라 우리의 유익을 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전소유를 잊어버리라.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위해 살고 그를 위해 죽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지혜와 그의 뜻이 우리의 모든 행동을 주관하게 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그를 우리의 유일하고 합당한 목표로 삼고 생활의 모든 부분이 그를 향하여 경주하도록 노력하라(롬 14:8, 고전 6:19 참조). 자기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님을 배우고 자기의 이성에서 지배권을 빼앗아 하나님께 드린 사람은 참으로 얼마나 큰 유익을 얻겠는가! 우리의 사욕을 도모하는 것이 우리를 가장 효과적으로 멸망시키는 해독이듯이 유일하고 안전한 피난처는 아무것도 아는 체하지 않으며 아무 일도 자기 힘으로 행하려 하지 않고 주의 인도만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모든 능력을 바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자기를 떠나는 것이 것을 제일보로 삼으라,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 뿐만 아니라, 모든 육적인 생각을 버린 빈 마음을 하나님의 영이 명하시는 쪽으로 완전히 돌아서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생명으로 들어가는 첫 문이건만, 철학자들은 이 변화를 몰랐다. 바울은 이것을 "심령으로 새롭게 됨"이라고 불렀다(엡 4:23). 저들은 이성만을 사람 안에 있는 지배 원리로 설정하고 이성의 소리만을 따르라고 한다. 한 마디로 그들은 인생행로를 이성에게만 맡긴다. 그러나 기독교 철학은 이성에게 성령에 양보하며 항복하며 복종하라고 명령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제부터는 사람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살며 지배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게 한다(갈 2:20).
2. 하나님께 헌신함으로써 자기를 부정함
여기서부터 두 번째 요점이 나온다. 즉, 우리는 우리의 것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을 구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을 거의 잊어버리고 자신에 대한 걱정은 물론 경시하면서 우리의 열성을 하나님과 그의 계명에 신실히 바치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은 위대한 전진을 했다는 증거가 된다. 자신에 대한 근심 걱정을 버리라고 명령할 때에, 성경은 소유욕과 권세욕과 명예욕을 우리의 마음에서 씻어버릴 뿐 아니라, 인간적인 영광에 대한 야심과 갈망 그리고 그 밖의 더 깊이 숨어 있는 해독을 송두리째 뽑아버린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일생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고 충심으로 느낄 만큼 마음의 자세를 확정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그의 것을 모두 하나님의 결정과 판단에 맡길 뿐 아니라, 하고자 하는 것까지도 양심적으로 온통 하나님께 맡길 것이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항상 하나님을 우러러 볼 줄 아는 사람은 동시에 모든 허탄한 생각을 피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자기부정 곧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섬기려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사역의 출발점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구하시는 자기 부정이다(마 16:24 참조)
이 자기 부정이 일단 제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나면, 그것은 우선 자만이나 교만이나 허식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는다. 다음에는 탐욕이나 욕망이나 방탕이나 나약함이나 그밖에 우리의 이기심이 빚어내는 죄악들을 전연 허용하지 않는다(딤후 3:2-5 참조). 이와 반대로 자기 부정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는 때에는 가장 추악한 죄악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횡행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보기에는 선한 것이 있다고 해도 타락한 명예욕으로 더럽혀진다. 주의 계명에 따라 자기를 부정하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순수하게 친절을 베푸는 예가 있으면, 그런 사람을 내게 보이라. 자기 부정의 심정이 강력하지 않은 사람들은 선한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적어도 칭찬을 받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덕은 덕 자체를 위해서 추구돼야 된다고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철학자들은 모두 안하무인격으로 거만하여 그들이 덕을 추구한 것은 자랑할 기회를 얻으려는 생각이었고 그밖에 다른 이유가 없었다는 것을 나타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속 풍조에 아부하는 사람과 이런 교만한 사람들을 모두 아주 불쾌히 여기시고,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상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며(마 6:2,5,16), 창녀와 세리들이 그들보다 천국에 더 가깝다고 하셨다(마 21:31). 그러나 사람이 자기를 부정하지 않는 한 그를 바른 길로 가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물이 얼마나 많으며 얼마나 큰가를 우리는 아직 분명히 설명하지 않았다.
"사람의 영혼 속에는 무수한 죄악이 숨어 있다."고 한 옛말은 옳다. 그리고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치료 방법은 하나뿐이다. 즉, 자신을 부정하며, 자신에 대한 걱정을 버리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일을 추구하며, 다만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그 일들을 전심전력으로 추구하는 것이 유일한 치료법이다.
3. 디도서 2장에 나타난 자기 부정
잘 정돈된 생활의 각 부분에 대해서 바울은 다른 곳에서 간단하나마 더 분명하게 설명을 한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1-14). 바울은 우리의 용기를 북돋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제시했다. 다음에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는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우리를 가장 방해하는 두 가지 장애물을 제거했다. 첫째는 불경건인데, 우리의 천성은 이쪽으로 너무나 많이 기울어져 있다. 둘째는 세상 욕심인데, 이것이 미치는 범위는 더욱 크다. 불경건이란 것은 미신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성실한 두려움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세상 욕심은 육의 정욕과 같은 것이다(요일 2:16, 엡 2:3, 벧후 2:18, 갈 5:16, 기타 참조). 이와 같이 율법의 두 돌판에 관련해서 바울은 우리의 본성을 버리며, 우리의 이성과 의지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거부하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그는 인생의 모든 행동을 세 부분으로 묶어 둔다. 즉,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이다. 이 가운데서 근신은 정절과 절제뿐만 아니라, 세상 재물을 순결하고 검소하게 사용하며 빈곤을 참는 것도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다. 의로움은 모든 사람에게 그가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공정성의 모든 의무를 포함한다(롬 13:7 참조). 다음으로, 경건은 세상의 불법에서 분리된 우리를 하나님과 결합시켜 참으로 거룩하게 만든다. 이런 일들이 서로 결합되어 서로 분리시킬 수 없는 끈으로 묶이게 될 때 완전무결한 상태가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가 육의 이성과 작별하고 우리의 정욕을 제어하며아니, 버린 후일지라도 하나님과 우리의 형제들에게 우리 자신을 바치며, 세상의 더러움 속에서 천사의 생활을 명상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의 마음을 모든 올무에서 풀어내기 위해서 복스러운 영생을 우리에게 환기시키며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살전 3:5 참조). 우리 구주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나타나셨던 것같이 세상 종말에 오실 것이며 그 때에 그가 행하신 구원의 결과를 보이실 것이다. 이렇게 바울은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하는 것, 전력을 다해 하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유혹을 일소한다. 참으로 그는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 있는 우리의 천국 기업이 없어지지 않도록 이 세상을 나그네같이 살라고 가르친다.
(우리와 이웃과의 관계자에서의 자기 부정의 원칙. 4-7)
4. 자기 부정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르게 한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을 때에 우리는 자기 부정이 일부는 사람과 관계되고 다른 부분, 즉, 그 중요 부분은 하나님과 관계된 자는 것을 깨닫게 된다.
대인 관계의 행동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빌 2:3), 전심으로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고(롬 12:10 참조)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서 본성의 감정을 우선 버리지 않으면, 우리는 이런 명령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 인간은 모두 자기를 맹목적으로 사랑한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며 자기와 비교해서 남은 모두 멸시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부끄럽지 않은 것을 주시면, 우리는 그것을 믿고 곧 마음이 부풀어 올라 그 자만심으로 거의 터질 정도가 된다. 우리는 우리를 침범하는 죄악들을 사람들 앞에서 숨기려고 애쓰며, 한편으로는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다는 구실로 자기만족에 빠지거나 심지어는 선한 일이라고 착각하는 때도 있다. 우리가 감탄하는 재능이나 우리보다 우수한 재능을 다른 사람이 발휘할 때, 우리는 그것을 경시하며 배척해서 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려고 하지 않는다. 만일 누군가에게 과실이 있다면 우리는 엄하고 신랄하게 비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추악하게 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교만하여 자신은 평범한 운명에서 제외됐다는 듯이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기를 원하며 모든 인생을 거만한 태도로 욕하거나 적어도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보며 멸시한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에게, 평민은 귀족에게, 하인은 주인에게, 배우지 못한 사람은 유식자에게 양보한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는 자기가 더 낫다고 하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각각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며 그 가슴속에 일종의 왕국을 가지고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의 인격과 도덕 생활을 비난한다. 그러나 이런 태도가 충돌 점에 이르게 되면 독을 뿜는다. 모든 일에 명랑하고 유쾌한 동안에는 분명히 온화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괴롭히고 성가시게 굴 때에도 여전히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이 투쟁욕과 이기심은 가장 무서운 전염병이다. 이것을 우리의 가장 깊은 마음속으로부터 뽑아버리는 것밖에 다른 치료법이 없다.
성결의 교훈은 이 전염병을 일소해버린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은 우리 자신의 소유가 아니고 거저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란 것을 잊지 말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자기의 재능을 자랑하는 사람은 그의 배은망덕을 폭로한다. 바울은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7)라고 묻는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의 허물을 돌아보며 겸손한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우리를 오만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 속에 남지 않을 것이지만 낙심하게 만드는 일은 많을 것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재능을 받은 것을 보면, 그 재능을 높이며 그 사람들을 존경하라는 것이 우리가 받은 명령이다. 주께서 그들에게 영예를 주셨는데, 우리가 그 영예를 그들에게서 빼앗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큰 죄악일 것이다. 그들의 허물에 대해서는 물론 좋은 말로 칭찬할 것이 아니나 관대히 보아주라고 우리는 배웠다. 결점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마땅히 호의와 존경으로 대할 사람들을 비난하고 공격하지 말라고 하셨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이대로 한다면, 우리는 관대하고 겸손하게 대할 뿐 아니라 다정하게 그리고 한 친구로서 대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친절을 체득하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진심으로 자기를 낮추고 남을 공경하는 것이다.
5. 자기 부정은 이웃을 돕는 태도를 바르게 한다
그런데 이웃의 유익을 구하려고 할 때 자기의 의무를 다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신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말하자면 자기를 벗어버리지 않고서는, 그 방면에서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자기를 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를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는다면 바울이 사랑의 일이라고 가르친 그것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라고 말하였다(고전 13:4-5). 우리에 대한 요구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라는 한 가지뿐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상당히 가혹하게 다루어야 될 것이다. 우리는 원래 시기만을 위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유익을 도모해서 우리 자신과 재산을 무시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가 당연히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을 기꺼이 내놓고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다는 것은 우리의 천성으로 보아서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이러한 경지로 인도하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은혜는 모두 일정한 조건 아래 위탁된 것이라고 경고한다. 받은 은혜를 교회의 공익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것이 그 조건이다. 그러므로 모든 은혜를 합당하게 사용하려면, 다른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친절하게 나누어주어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은사 전체는 우리의 이웃들의 유익을 위해서 분배하라는 조건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 위탁하신 것이라고 우리는 배웠다(벧전 4:10 참조). 이보다 더 확실한 규칙이나, 이 규칙을 지키기 위한 더 타당한 권고를 생각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성경은 일보 전진해서 우리의 은사를 신체 기관들의 능력에 비교한다(고전 12:12이하). 어느 기관도 자신을 위해서 그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며, 자신의 사사로운 필요만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는다. 각 기관은 다른 기관들을 위해서 그 능력을 쏟아놓는다. 온 몸에 공통적으로 유익하게 된 때에 비로소 각 기관은 자체 능력의 혜택을 받는다. 그와 같이 경건한 사람도 그가 가진 능력이 무엇이든 간에 그들을 위해서 일할 줄 알아야 하며, 교회의 전체적인 성장을 위해서 전심전력하는 이외에 어떤 다른 방법으로 자기를 돌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관용과 자선에 대한 우리의 규칙은 이것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웃을 도울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이며, 우리의 청지기 직책에 관해 하나님께 보고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올바른 청지기의 유일한 자격은 사랑을 표준으로 알아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남의 이익에 대한 열심과 자신의 이익에 대한 관심을 결합할 뿐 아니라, 자기의 일보다 남의 일을 더 중요시하게 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사를 올바르게 관리하기 위해서 이런 규칙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도록 상고 시대에 그가 주신 가장 작은 선물들에까지 이 규칙을 적용하셨다. 곧 처음 익은 열매를 하나님 앞에 가져오라고 명령하시고 주시는 혜택을 우선 하나님에게 드리지 않고서 받아쓰는 것은 불법이란 것을 백성들이 증거하도록 하셨다(출 23:1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사가 우리의 손으로 창조주에게 바친 때에만 거룩하게 된다면, 바치지 않고 쓰는 것은 분명히 부패한 남용이다. 그러나 자기의 소유를 나눔으로써 하나님을 풍부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은 무익한 짓이다. 인간의 관용은 하나님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므로 예언자의 말과 같이 세상에서 성도들에게 그것을 실행해야 한다(시 16:2-3). 그리고 율법의 규정에 해당하는 일을 현재도 행하기 위해서, 남에게 나눠주는 것을 거룩한 제사에 비교하였다(히 13:16).
6. 이웃에 대한 사랑은 사람의 종류에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만을 우러러본다
그뿐 아니라 선을 행하다가 곧 낙심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것을 막기 위해서(갈 6:9) 우리는 마땅히 바울이 말한 다른 생각을 더 첨가해야 한다. 그는 "사랑은 오래 참고…성내지 아니하며"라고 했다(고전 13:4-5). 주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선을 행하라"고 명령하신다(히 13:16). 그러나 사람은 그 자신의 공로로 판단한다면, 대부분이 심히 무가치하다. 그러나 이 점에서 성경은 최선의 방법으로 우리를 돕는다. 성경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사람 자체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며, 그 형상에 대해서 경의와 사랑을 표시하라고 한다.
그러나 특히 믿음의 식구들 사이에서(갈 6:10), 그리스도의 영을 통하여 중생하고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보도록 더욱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을 만날 때에 그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우리에게는 그를 돕지 않을 이유가 없다. 예를 들면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자.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표를 그에게 주셨다. 주께서는 우리 자신의 골육을 멸시하지 말라고 하셨다(사 58:7). 가령 "그가 비루하고 무가치하다"고 하자. 그러나 높으신 주께서는 낮은 그에게 자기의 아름다운 형상을 주셨다. 그 사람에게 봉사할 아무런 의무도 우리에게 없다고 말하자. 그러나 우리에게 크고 많은 은혜를 주시고 자신에 대한 의무를 지우신 주께서는, 이를테면 그를 자신의 자리에 두시고 그를 향해서 우리가 받은 은혜들을 인정하라고 하신다. 그에게는 우리가 그를 위해서 조금도 수고해 줄 가치가 없다고 말할 것인가? 그러나 그를 우리에게 추천하신 하나님의 형상에는 그대 자신과 그대의 전소유를 바칠 가치가 있다. 또 그는 우리의 호의를 받을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불의한 행동이나 저주로 그대의 감정을 상했다고 하자. 그러나 이것까지도 우리가 그를 사랑으로 포옹하며 그를 위해서 사랑의 의무를 다하는 것을 중단하는 정당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마 6:14, 18:35, 눅 17:3). "그는 당연히 나와는 아주 다른 취급을 받아야 한다."고 우리는 말하리라. 그러나 주께서 당하신 일은 과연 당연했는가? 주께서는 이 사람이 우리에게 지은 죄를 모두 용서하라고 명령하실 때에, 자신이 그 죄를 맡겠다고 하시었다.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며, 우리에게 악한 일을 한 사람을 유익하게 해주며,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에게 축복으로 대한다는 것은(마 5:44) 어려운 일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전혀 반대되는 일이다. 이런 일을 할 수 있으려면, 확실히 한 가지 길밖에 없다. 우리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악의를 생각하지 않고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주시하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그 길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그들의 죄를 말소하며 삭제할 뿐 아니라, 그 아름다움과 위엄으로 우리의 마음을 끌어 그들을 사랑하며 껴안게 만든다.
7. 보이는 사랑만으로는 부족하고, 중요한 것은 의향이다
이런 자기 부정은 우리가 사랑의 의무를 수행할 때에 한해서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사랑의 의무를 다 실행하고 하나도 빠뜨린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완전히 수행했다고 할 수 없으며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사람이라야 그것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외면적으로는 모든 의무를 완전히 이행하면서도 진정한 의무 이행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후덕한 체하면서도 반드시 자랑하는 얼굴이나 심지어 거만한 말로 물건을 주어서 도리어 비난을 받는다. 또 이 비참하고 불행한 시대에, 사람들은 구제품을 나눠줄 때에 대개는 멸시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교도들 사이에서도 이런 흉악한 짓은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명랑한 얼굴이나 다정한 말로 유쾌하게 의무를 다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 있어야 한다. 우선 그들은 자기가 도울 필요가 있다고 보는 사람의 처지에다 자기를 두고 그의 불행을 자기가 당하며 견디는 것같이 동정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비와 인자의 정에 이끌려 자신을 돕는 것같이 남을 돕게 되어야 한다.
이런 심정으로 형제를 도우려고 나서는 사람은 교만이나 비난으로 자기의 의무를 더럽히지 않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곤란한 형제에게 도움을 줄 때에 그를 멸시하거나 자기에게 빚을 진 노예같이 만들지 않을 것이다. 이런 짓은 온 몸이 재생시키려고 애쓰는 병든 기관을 비난하거나 갚아줄 수 없으리만큼 많은 도움을 다른 기관들에게서 받았다고 해서 병든 기관에게 특별한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는 불합리한 생각일 것이다. 그런데 기관들 사이에 배당된 일은 거저 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 법칙에 따라서 보답하여야 할 것, 거부하면 흉악한 결과가 될 그런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보아야 한다. 또 한 가지 일을 수행한 사람은 자기에게 다른 의무는 없다고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예를 든다면 부자들은 자기 소유에서 얼마를 내어준 다음에는 다른 부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내맡기고 자기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각 사람은 자기가 아무리 위대할지라도 이웃들에 대해서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할 것이며, 이웃에 대해서 친절한 일을 할 때에 자기의 재력이 미치는 데까지 계속할 것이다. 재물을 베푸는 범위가 넓은 때라도 사랑의 법에 따라서 한계를 정할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의 인간의 자기 부정의 원칙. 8-9)
8. 하나님께 대한 자기 부정은 그의 뜻에 대한 헌신이다
자기 부정의 가장 중요한 부분, 곧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향한 부분을 더 자세히 반복하겠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말한 것이 많으므로 그것을 반복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 부분이 우리의 마음을 동정하고 관대하게 만드는 경로를 알리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선 우리가 현세 생활에서 평안과 평온을 얻으려면,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소유를 주의 뜻에 맡기며, 우리 마음의 소원을 그에게 일임해서 길들이며 복종시키도록 하라고 성경은 권고한다. 재산과 명예를 탐하며, 권력을 추구하며, 재물을 쌓으며, 호화롭고 사치한 생활에 도움이 되는 듯한 일에 광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우리의 욕망은 날뛰며 중단될 줄 모른다. 그와 반대로 가난한 살림과 낮은 가문과 이름 없는 처지를 우리는 경탄하리만큼 무서워하고 미워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런 상태에서 빠져나가도록 우리는 자극을 받는다. 따라서 자신의 계획에 따라 생활을 정리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얼마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들은 야심이나 탐욕의 목표에 도달하며 한편으로는 빈곤과 비천을 피하려고 교묘하게 노력해서 지칠 정도에 이른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경건한 사람들이 취할 길이 하나 있다. 첫째로 주께서 주시는 복을 받지 않고서 어떤 다른 방법으로 번영하겠다는 욕망이나 희망이나 계획을 가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안심과 확신을 품고 주께서 주시는 복에 몸을 맡기며 거기서 안식을 얻으라. 육은 자체의 노력이나 근면에 의해서 또는 사람들의 호의에 의해서 부귀를 구할 때에, 아무리 자체만으로 충분한 듯하더라도 이 모든 것은 확실히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재주나 노고도 주께서 도우시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주의 축복이 있기만 하면, 모든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이 우리에게 유리하고 기쁜 결과가 될 것이다. 주의 복이 전연 없어도 우리는 어느 정도의 영광과 재산을 얻을 수 있다(사악한 자가 굉장한 재산과 명예를 쌓아 올리는 것을 우리는 매일 본다). 그러나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은 티끌만한 행복도 맛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니면 우리가 얻는 것은 모두 우리의 불행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결코 사람을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것을 얻으려는 욕망을 품어서는 안 된다.
9. 하나님이 주시는 복만을 의지하라
그러므로 일이 잘 되며 좋은 결과가 나타나려면, 그것을 위한 모든 수단은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복만을 토대로 삼아야 한다. 이 복이 없으면 각종 불행과 재난이 우리를 괴롭힌다. 만일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민첩한 두뇌와 근면이나 사람들의 호의나 공상적인 행운을 믿고 부귀를 탐내어 애쓸 것이 아니라, 항상 주를 우러러보며 주의 지도를 받아, 주께서 정하신 우리의 처지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한다면 우선 우리는 사악한 행동, 책략, 간계 그리고 탐욕 등의 수단으로 재물을 움켜잡으며 지위를 강탈하려고 날뛰어 이웃을 해하는 일이 없게 되고 우리의 순진성을 버리게 하지 않는 사업만을 하게 될 것이다.
사기와 강탈과 그 밖의 악한 술책을 쓰는 곳에 누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도움이 임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순결한 생각과 올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만 오며, 그것을 구하는 사람을 왜곡된 생각과 악한 행동에서 돌아서게 한다. 그리고 우리를 억제해서 재산을 모으려는 지나친 욕망의 불길이나 명예를 얻으려는 야심적인 갈망을 없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것들을 바라면서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얼마나 파렴치한 짓인가? 하나님께서 친히 저주하신 일을 복 주심으로 도우시리란 생각은 버려야 한다. 끝으로, 일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초조하지 말아야 하며 자기의 더러운 처지를 혐오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런 일이 하나님께 대한 불평이며 빈부와 귀천은 일체 하나님의 뜻으로 배정되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요컨대 여기서 설명한 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만 의지하는 사람은 일반 사람들이 미친 듯이 구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악한 술책을 쓰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은 자기에게 무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 일이 잘 될 때에 그것을 자기의 공로나 자기의 근면, 노력, 행운 등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여겨 하나님의 공로로 돌릴 것이다. 비록 다른 사람들은 사업이 번창하고 자기 일은 진척이 미미하거나 심지어 후퇴하더라도 그는 평온과 겸손한 마음으로 이 부진한 상태를 참고 견딜 것이다. 자기가 얻은 보통 정도의 성공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세속적인 사람이 경칩하는 심리에 비하면, 그의 마음은 더 평화로울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는 최고의 부귀보다 더 위대한 안식과 평화를 주는 위로가 있기 때문이다. 이 위로는 나의 구원이 될 것이므로 그는 자기의 사업도 하나님의 섭리하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윗의 태도가 이러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따르며 자기를 하나님의 인도에 일임하면서 자기는 젖뗀 아이가 어미의 품에 안긴 듯하며, 그의 힘이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에 힘쓰지 아니한다고 증거하였다(시 131:1-2).
10. 자기 부정은 역경을 견디는 힘을 준다
우리가 말한 신자의 평화와 인내는 여기에서 한정될 것이 아니라, 현세 생활에서 당하는 모든일에 미쳐야 한다. 자신을 주께 전적으로 드리고 생활의 모든 부분을 남김없이 하나님의 뜻에 맡긴 사람만이, 자신을 온전히 부정했다고 하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어떤 일이 있더라도 태연한 사람은 자기를 불행하다고 생각하거나, 자기의 처지에 대해 하나님에게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심경이 얼마나 필요한가는 우리가 불의에 당하는 일들을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병이 우리를 거듭 괴롭힌다. 혹은 전염병이 만연하기도 하며, 전쟁의 참화를 입기도 한다. 얼음과 우박이 일년 추수를 전멸시켜 흉년이 들며 우리를 가난에 빠지게도 한다. 처자와 이웃을 죽음에 빼앗기며 집이 불에 타서 없어지기도 한다. 이런 재난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저주하며, 난 날을 미워하며, 하늘과 태양을 싫어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며, 모독적인 구변이 있는 자는 하나님이 공정하지 않고 잔인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당할 때에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진정한 아버지의 사랑을 우러러 보아야 한다. 따라서 설사 일가친척이 떠나고 집안이 적적하게 되더라도 그는 여전히 주를 찬양하며 내 집에 계신 주의 은혜는 내 집을 황량한 채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리라는 생각에 주의를 돌릴 것이다. 추수한 것이 서리나 우박을 맞으며, 혹은 얼어서 전멸하여 굶어 죽을 위험이 있을 때에도 그는 절망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여전히 굳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 할 것이다(시 78:47 참조).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 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로"(시 79:13)전할 것이다. 그러므로 추수의 성과가 극도로 나쁜 때라도 주께서 식량을 주실 것이다. 병고에 시달릴 때에도 심한 고통에 용기가 꺾이거나 불안하고 초조하여 하나님에게 간언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징계는 공정하며 인자하심을 생각하며 참고 견디게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는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임을 알기 때문에 평온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견디며, 하나님의 명령에 항거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가 자신과 모든 소유를 하나님의 권한에 영원히 양도했기 때문이다.
특히 저 이교도들이 생각한 위안이란 것은 우매하고 가련하기 짝이 없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은 배격해야 한다. 견고한 마음으로 역경에 대항하기 위해서 그들은 역경을 운명에 돌렸다. 운명은 소경이며 사려 분별이 없기 때문에, 허물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에게 동시에 상처를 입힌다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경건 생활의 입장은 선악간 운명을 정하고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뿐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은 무책임한 힘으로 경솔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행복과 불행을 가장 정연하고 공정하게 배정하신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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