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그 복음의 순수성과 거리가 먼 스콜라 궤변가들의 회개론, 고해와 만족설(보속설)을 논함
(고백과 통회에 관한 스콜라 교리와 그 성경적 근거를 검토함. 1-6)
1. 스콜라학파의 회개에 관한 교리
이제부터 회개에 대한 스콜라학파의 궤변가들의 주장을 검토하겠다. 나는 이 책을 간단한 교과서로 만들려고 부심하기 때문에, 모든 문제를 추구함으로써 책의 체제가 깨뜨려지지 않도록 여기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말을 적게 하고 지나가려고 한다. 별로 복잡하지 않은 이 문제에 대해 그들은 무수한 책을 써서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미혹에 조금이라도 빠지면 좀처럼 빠져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우선 그들의 정의에 의하면, 그들은 회개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고대 저술가들의 책에서 상투적인 말들을 인용하여 쓰지만 그런 말들은 회개의 힘을 전혀 나타내지 못한다. 예컨대, 회개는 이전의 죄를 뉘우치고 우는 것이며, 울어야 할 죄를 다시 짓지 않는 것이며 그리고 과거의 악행에 대해 통곡하는 것이고 통곡할 행위를 다시는 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슬퍼하는, 즉, 과거 행동에 대하여 슬픔으로 자기를 벌하는 것이며, 자기가 하였거나 찬성한 악행에 대한 심령의 슬픔과 영혼의 괴로움인것이다. 교부들의 이런 말들에 대해서 논쟁가들은 부인하겠지만, 우리는 그것이 합당한 말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교부들이 이런 말을 한 것은 회개를 정의하려는 뜻이 아니었고, 구원을 받기 전에 짓던 죄에 다시 빠지지 않도록 듣는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궤변가들이 이런 종류의 말들을 정의로 바꾸고 싶다면, 첨가할 만한 그에 못지않게 훌륭한 말들이 달리 있다. 예를 들면 크리소스톰(Chrysostom)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그 중의 하나이다. 즉, 그는 "회개는 죄를 씻어버리는 약이며, 하늘에서 온 선물이며, 놀라운 힘이며, 율법의 힘을 능가하는 은총이다."라고 말했다.
그뿐 아니라, 후기 스콜라 학자들이 가르친 교리는 이 교부들의 정의보다 더 졸렬하다. 그들은 외면적인 훈련을 너무 고집하기 때문에, 그들의 방대한 책들을 읽어도 회개란 일종의 고행이라는 것, 즉, 조금은 육(肉)도 길들이며 허물도 징벌하는 것이라는 인상밖에 받는 것이 없다. 그들은 말씀의 내면적 변화와 거기 따르는 생활의 진정한 개선에 대해서는 탄복하리만큼 입을 다물고 있다. 그들은 통회(contrition)와 성찰(attrition)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한다. 또한 사람의 영혼을 여러 가지 근심으로 괴롭히며, 불안과 고뇌와 번민의 바다에 집어넣는다. 사람의 심령에 깊은 상처를 입히고 나서는 약간의 가벼운 의식을 행함으로써 그 모든 고통을 치료한다.
그들은 회개를 교묘하게 정의하여 심령으로 하는 통회와, 입으로 하는 고백과 행위로 하는 보속으로 나눈다. 그들은 삼단 논법을 구성하는 데 한평생을 보낸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구분법은 그들의 정의보다 더 논리적이라고 할 수 없다. 가령 논리학자들의 논법에 따라 이 스콜라 학자들의 정의를 출발점으로 삼아서 추리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이 자기의 입으로 고백하지 않더라도 이전에 지은 죄 때문에 울 수 있고 울어야 할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으며, 과거의 악행을 통곡할 수 있고 통곡할 행위를 다시는 하지 않을 수 있으며, 슬퍼하는 과거 행동을 다시 벌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자기의 구분법을 유지하겠는가? 이는 그가 진심으로 참회하면서도 고백은 하지 않는다면, 고백 없이도 회개가 역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답변하기를, 이 구분법은 회개를 한 성례전으로 생각할 때, 또는 회개의 전체 완성에 관한 것으로 이해할 때 고해에 적용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해석을 그들은 정의에 포함시키지 않고, 그들은 나를 비난할 까닭이 없다. 좀더 정확하고 분명한 정의를 하지 않은 자신들을 비난해야 한다. 나는 미련해서 어떤 문제에 대해서 논쟁이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을 그 정의 자체로 환원시킨다. 논쟁 전체의 요점과 기초는 이 정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그 교사들의 임의에 맡겨두고 우리는 다만 여러 가지 부분을 순서대로 관찰하기로 하자. 사소한 문제들에 대해서 그들은 진지한 태도로 신비한 비밀이라고 선전하지만, 나는 그대로 넘어갈 생각이다. 이것은 부지중에 하는 일은 아니다. 그들이 교묘하고 세밀하게 논한다고 자부하는 모든 것을 검토하는 것이 내게는 그다지 힘이 들지 않을 것이나, 내가 그렇게 꼼꼼하게 하는 것은 아무 유익도 없는 사소한 문제로 독자들을 피로하게 만들뿐이다. 그들을 흥분시키는 문제들, 그리고 가련하게 그들이 번민하도록 만드는 문제들을 보면,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일에 대해 떠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다른 죄에 대한 고집은 그냥 있는데 한 가지 죄만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냐, 또는 하나님께서 내린 벌이 보속이 될 수 있느냐, 또는 큰 죄에 대하여 자주 회개를 반복해도 좋으냐 하는 문제들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들은 사람은 가벼운 죄에 대해서만 매일 회개한다고 추악하고도 불경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제롬(Jerome)이 한 말을 기초로 하여 회개는 "파선 후의 두 번째 판자"라고 하는 심한 오류로 큰 고통을 받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동물적인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자기의 과오를 그 천 분의 일내지 그 이하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이런 일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2. 스콜라학파의 회개의 교리는 양심을 괴롭힌다
그러나 이것이 당나귀의 그늘에 관한 싸움이 아니고 가장 중대한 일, 즉, 죄 사함 받는 일이 논의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기를 바란다. 그들은 회개의 세 가지, 즉, 심령의 통회와 입으로 하는 고백과 행위로 하는 보속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동시에 이 세 가지는 죄 사함을 얻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만일 신앙의 전분야에서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죄 사함을 받는 문제이다. 즉, 무엇 때문에, 어떤 법으로, 어떤 조건하에, 얼마나 쉽게 또는 어렵게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가장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 지식이 분명하고 확실하지 않으면 양심은 평안할 수 없으며 하나님과 화평할 수 없으며, 확신이나 안정을 얻을 수 없다. 도리어 양심은 끊임없이 떨며, 흔들리며, 불안하며, 고민하며, 동요하며, 증오하며, 하나님을 피해 도망한다.
그러나 죄 사함이 그들이 붙이는 조건에 달렸다면, 우리들에게 그보다 더 불행하고 비통한 일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통회와 용서를 얻기 위한 첫 단계라고 하면서, 그것은 충분한 통회, 즉, 바르고 완전한 통회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러나 동시에 언제 사람이 자기의 통회가 바르게 실천되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모든 사람이 자기의 죄 때문에 통곡하며 죄를 더욱 싫어하며 미워하도록 조심스럽게 또 날카롭게 격려해야 한다.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낳는 슬픔은 후회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고후 7:10). 그러나 큰 죄에는 거기 해당하는 큰 슬픔이 있어야 하며, 그것은 사죄의 확실성과 서로 균형이 맞아야 한다고 요구할 때에, 참으로 통회하는 양심은 색다른 방법으로 고통을 받으며, 죄에 대한 충분한 통회를 하라고 하는 것을 보고 고민하게 된다. 자기가 진 빛의 분량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빚을 갚았는지 분간할 수 없다. 스콜라 학자들은 우리의 힘이 닿는 대로하라고 말하나 우리는 항상 같은 자리에 돌아올 뿐이다. 누가 능히 자기의 죄 때문에 통곡하는 데 전력을 다했노라고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양심은 오랫동안 자기와 씨름하며 오랫동안 싸우기 위해 힘쓰고도 쉴만한 피난처를 여전히 찾지 못한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안심하기 위해서 억지로 슬퍼하며 억지로 눈물을 짜냄으로써 통회를 실행하려고 한다.
3. 죄인의 통회가 아니라, 주의 자비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나의 비난을 잘못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들에게 이런 통회론 때문에 절망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나, 진실하지 않은 거짓된 슬픔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을 보여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회개하지 않고서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으며, 그 이유로서 죄를 깨닫고 고통과 상처를 받은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자비를 진심으로 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회개는 죄 사함을 받는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첨가한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양심을 괴롭히는 것을 우리의 한 의무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일을 폐지하였다. 죄인은 자기의 통회나 눈물을 문제 삼지 않고 두 눈으로 주의 자비만을 주시한다고 가르쳤다.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전과하며, 갇힌 자를 놓아주며, 슬픈 자를 위로하시기 위해서(사 61:1, 눅 4:18) 오셨을 때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마 11:28) 사람들을 부르셨다는 것을 죄인들에게 회상시켰을 뿐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의에 배가 불러 자기의 빈곤을 인식하지 못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하나님의 진노를 잊어버리고 자신의 악에 대한 치료법을 구하지 않는 교만한 자들은 일체 제외된다. 이런 사람들은 수고도 하지 않으며, 무거운 짐도 지지 않았으며, 마음도 상하지 않았으며, 포로 되거나 그 몸이 갇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죄인이 결코 실행할 수 없는 공정하고 완전한 통회란 것을 하면, 그 공로로 죄의 용서를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과 죄인이 자기의 불행과 동요와 피로와 포로된 상태를 인정하며, 새로운 원기 회복과 안식과 자유를 얻을 곳이 어딘가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비를 주리고 목마른 자같이 구하라고 죄인에게 명령하는 것, 결국은 겸손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가르치는 것과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4. 고백은 명령이 아니다 : 깨끗함을 받은 나환자들에 대한 스콜라파의 은유적 추리를 반박함
지금까지 교회법 학자들과 스콜라 신학자들 사이에는 고백 문제에 대해서 항상 큰 분쟁이 있었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교훈이 고백을 명령한다고 주장하고 법학자들은 교회법이 명령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논쟁에서 신학자들의 파렴치함이 뚜렷하고 명백하게 나타났다. 그들은 논쟁을 위해서 성경의 구절들을 인용하나 모두 잘못 인용하며 그 뜻을 몹시 왜곡하였다. 이렇게까지 하고서도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것을 알자, 남보다 더욱 민첩하게 보이고 싶은 자들은 핑계를 만들어, 고백이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법에서 나왔지만, 그 형식은 실정법에서 얻었다고 한다. 물론 가장 무능한 보잘 것 없는 법률가라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라고 부르신 것을 하나님의 법에 관련시킬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이의 제기도 마찬가지이다. 아담은 이의를 말하듯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운운하고 대답했기 때문이다(창 3:12). 그러나 이 두 경우에 있어서 형식은 민법에서 온 것이다. 그들이 어떤 증거에 의해서 형식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이 고백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증명하는가를 보기로 하자.
그들은 주께서 나환자들을 제사장들에게 보내셨다고 말한다(마 8:4, 막 1:44, 눅 5:14, 17:14). 무슨 뜻인가? 고백하라고 보내셨다는 말인가? 레위족의 제사장들이 고백을 듣기 위해서(신 17:8-9) 임명되었다는 말을 들은 사람이 있는가? 그러므로 그들은 은유에서 도피처를 찾는다. 즉, 모세의 율법에 제사장들이 나병의 진행 정도를 분간하라는 규정이 있고(레 14:2-3), 죄는 영적 나병이므로 이에 대해서 선고하는 것이 사제들의 의무라고 말한다.
나는 대답하기 전에 내친걸음에 다음과 같이 묻고자 한다. 이 구절이 그들을 영적 나병의 심사관으로 만든다면, 그들이 자연적, 육체적 나병을 심사하려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들의 추리는 성경을 조롱하는 것이다. 즉, 율법에는 나병을 심사하는 일을 레위족 제사장들에게 위임하였으니 우리가 이 일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하자. 죄는 영적 나병이므로 우리는 죄에 대해서도 법적 심사관이 되자고 하는 논법이다!
이제 나는 대답하겠다. "제사 직분이 변역한, 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히 7:12). 제사장들의 모든 직분은 그리스도께로 옮겨져서, 그에게서 완전히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의 모든 권리와 명예도 그에게 옮겨졌다. 만일 그들이 은유를 따르는 것이 그렇게 좋다면, 그리스도를 그들의 유일한 제사장으로 모시고 그의 심판 자리에 모든 일에 대한 무제한의 권한을 집중시키라. 우리는 이 일을 기꺼이 허용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은유로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민법을 예전과 하나로 인정하는 것이므로 적당하지 않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왜 나환자들을 제사장에게 보내셨는가? 제사장들이 그에게 율법을 어긴다는 비난을 하지 못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는 율법에는 병이 나은 나환자는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며 제물을 드려 속함을 받으라는 명령이 있기 때문이다. 깨끗하게 된 나환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이 명령하는 대로 행하라고 하신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눅 17:14).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마8:4). 참으로 이 기적은 제사장들을 위한 증명이었다. 그들은 이 사람들을 나환자라고 선언했었는데, 이제 그들은 나았다고 선언한다. 그들은 싫든 좋든 그리스도의 기적에 대한 증인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자기의 기적들을 검사하도록 허락하신다. 그들은 거부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핑계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 기적이 그들 앞에 증거가 된다. 그래서 다른 구절에는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라고 한다(마 24:14). 마찬가지로 "너희가…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하심이라"고 하신다(마 10:18). 다시 바꿔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더욱 강력한 유죄 선고를 받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스콜라 신학자들이 크리소스톰의 의견에 찬성하고 싶다 해도, 그 역시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 때문에, 즉, 율법을 어기는 사람으로 인정되지 않으시기 위해서 하신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명백한 문제에 대해서 사람의 지지를 구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법적 권리는 모두 제사장들에게 양도한다고 선언하실 때, 그들 가운데는 복음의 원수임을 공언한 자들도 있어서, 그 입을 막아 놓지 않으면 그들은 항상 복음을 반대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교황파의 사제들이 그러한 입장을 취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강제로라도 저주하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 편에 그들을 공공연히 가담하도록 하게 하자. 이것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일꾼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5. 나사로를 풀어준 것을 악용한다
그들은 마치 교리를 확립하기 위해서 은유가 매우 중요한 듯이, 둘째 논거를 동일한 근원, 즉, 은유에서 끌어낸다. 중요시하는 것은 버려두겠으나 나는 같은 은유를 그들 보다 더 그럴듯하게 인용해 보일 수 있다. 그들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부활한 나사로를 풀어주어 다니게 하라고 명령하셨다고 한다(요 11:44). 우선 이런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는 말은 아무 데도 없다. 오히려 유대인들에게 명령하셨다고 보는 편이 가능성이 더 많은 추측일 것이다(유대인들이 현장에 있었던 사실은 주의 기적을 사기라고 의심할 여지가 없도록 증명하며, 그의 큰 권능을 보여주시려는 뜻이었다). 그는 죽은 자에게 손을 대시지 않고 말씀만으로 살리셨다. 그래서 나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유대인들이 모든 사악한 의심을 버릴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모든 일을 하기를 원하셨다. 직접 돌을 굴려 젖히며, 썩는 냄새를 맡으며, 분명히 죽었다는 증거를 보며, 주의 말씀의 능력만으로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보며, 살아난 사람을 제일 먼저 만져보게 하신 것이다. 크리소스톰도 이렇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가령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다고 하면, 우리의 반대자들은 어떤 주장을 한 것인가? 주께서 제자들에게 풀어주는 권한을 주셨다고 할 것인가? 만일 이 사건을 은유적으로 해석한다면, 훨씬 더 적당하고 교묘한 처리 방법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자 하셨다. 즉, 그가 살리신 사람들을 풀어주라고 하셨다. 풀어주고 그들의 죄, 즉, 하나님 자신이 잊어버리신 죄를 기억하지 않도록 또 하나님 자신이 용서하신 죄인들을 지옥에 보내지 말도록, 하나님 자신이 너그럽게 보신 일들로 죄인들을 책망하지 말도록, 하나님 자신께서 자비를 베푸시며 용서하고자 하시는데 신자들이 벌을 주겠다고 냉혹한 태도로 허물을 캐는 일이 없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확실히 우리에게 용서할 마음을 제일 확실히 일으키는 것은 재판관의 비유이다. 그는 너무 엄격하고 몰인정한 자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경고하였다. 이제 그들을 보내서 그들의 은유적 해석을 퍼뜨리게 하자.
6. 성경적인 고백
그들은 성경에 있는 명백한 증거로 무장했다고 상상하고 접근전으로 다가온다. 곧 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온 사람들은 죄를 자복(自服)했으며(마 3:6), 야고보는 우리가 "죄를 서로 고하며"라고 하였다고 한다(약 5:16).
세례를 받고 싶은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고백한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요한이…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막 1:4)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회개하는 증표로서 물세례를 주었다. 그러므로 자기가 죄인인 것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가 세례를 주었을까? 세례는 죄 사함에 대한 상징이다. 죄인들과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고서 이 상징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러므로 그들은 세례를 받기 위해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였다.
야고보가 "죄를 서로 고하며"(약 5:16)라고 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바로 다음에 있는 말씀에 유의했다면, 이 구절도 그들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야고보는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서로 기도하라"고 하였다(약 5:16). 그는 상호 고백과 상호 기도를 결합하였다. 우리가 사제들에게만 고백해야 된다면 또한 그들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야고보의 말에서 사제들만 고백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 그가 우리에게 서로 고백할 것을 요구할 때에, 그는 서로 고백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만을 상대로 말한 것이다.그가 사용한 "알렐로이스(ajllhvloi")란 말은 "서로", "교대로", "번갈아", 혹은 그들이 원한다면 "상호간에"라는 뜻이다. 그러나 고백을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만 상호간에 고백을 실행할 수 있다. 그들은 이 특권을 사제들에게만 돌리기 때문에, 우리는 고백하는 일도 사제들에게만 위탁한다.
이런 하찮은 말들을 전부다 버리라. 우리는 사도의 견해를 취하자. 그것은 단순 명료한 생각이다. 즉, 우리의 약점을 서로 고백하여 서로 충고를 받으며 서로 동정하며 서로 위로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형제들의 약점을 알았으므로 그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고백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하는데, 그들은 왜 야고보의 말로 우리를 비난하는가? 그러나 아무도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먼저 고백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자비를 고백할 수 없다.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과 교회, 즉,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저주를 선언한다. 그것은 주께서는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기 때문이다(갈 3:22). 주의 뜻은 "모든 입을 막고"(롬 3:19),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롬 3:20, 고전 1:29 참조). 그러나 하나님만을 의로우시다고 하며(롬 3:4 참조)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으셔야 한다.
(비밀 고백의 후대 기원설의 증거. 7-8)
7. 고대 교회에는 의무적인 고백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반대자들이, 자기들이 말하는 고백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뻔뻔스러운 태도에 나는 놀란다. 물론 고백하는 관습이 대단히 오래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고대에는 자유로운 행동이었다는 것은 쉽게 증명할 수 있다. 그들의 기록을 보더라도, 이노센트 3세(Innocent III)이전에는 고백에 대한 법이 전혀 없었다. 더 오랜 법이 있었다면 그들은 그것을 들고 나섰을 것이 틀림없고, 겨우 라테란 종교회의(Lateran, 1215년)의 명령으로 만족하여 어린아이들에게까지 조롱거리가 되는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허위 교서의 조작을 주저하지 않고 만들어내어 그것들을 가장 오랜 교회 회의가 정한 것이라고 하며, 고대에 대한 존경심을 이용해서 단순한 사람들을 속인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그들이 이런 거짓말을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 자신이 증명하듯이, 이노센트 3세가 고백을 해야 된다는 함정을 파 놓은 것은 겨우 300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연대를 문제 삼지 않더라도 그 법이 조잡한 말을 쓴 것 자체가 법의 위신을 불신하게 만든다. 이 선량한 신부들은 남여 양성의 모든 사람들이 일 년에 한 번 자기의 사제 앞에서 모든 죄를 고백하라고 명령하였다. 어떤 익살꾼들이 농담으로 이의를 제기하여, 이 명령은 양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해당하고 양성체인 남성이나 여성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자기의 사제"란 말이 무슨 뜻인지를 설명할 수 없어서 그들의 제자들은 더욱 큰 부조리를 폭로한다.
교황의 이 삯군 논쟁가들이 무엇이라고 하든 간에, 우리는 사람들에게 모든 죄를 고백하라고 강요하는 이 법을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로부터 이런 법이 나올 때까지는 1200년이 경과했다. 경건과 교리가 소멸되고, 목회자의 망령에 불과한 자들이 모든 권한을 통틀어 떠맡은 후에 이런 횡포가 드디어 도입된 것이다.
그리고 역사 서적과 그 밖의 다른 고대 저술가들의 분명한 증언을 보면, 고백은 그리스도나 사도들이 정한 법이 아니고 감독들이 제정한 교회 행정상의 한 규율이었다고 한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될 만한 여러 증언 중에서 하나만 제시하겠다. 소조멘(Sozomen, 5세기 전반)은 감독들이 정한 이 법이 서방에서, 특히 로마에서 충실히 지켜졌다고 한다. 이것은 이 법이 모든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이 직무를 위해서 장로들 중의 한사람이 특히 지명되었다고 한다. 교황주의자들이 하늘 열쇠는 사제 계급 전체에 공통으로 맡겨져 이 일을 처리하게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철저히 논박한다. 참으로 그것은 사제들에게 공통된 직책이 아니라, 특히 이 일을 위해서 감독이 선택한 사제 한 사람만의 직책이었다. 이 사람은 지금도 대성당에서는 청죄 사제라고 해서 중대 범죄를 조사하고, 징계로서 견책할 사람을 자문하는 일을 하고 있다. 소조메누스는 부언하기를, 콘스탄티노플에 이 관습이 있었으나 어떤 부인이 고백을 가장하여 어떤 부제와 애정 관계를 가졌던 것이 발견되어, 거룩함과 학식으로 유명하던 감독 넥타리우스(Nectarius)가 이 사건을 이유로 고백의 행사를 폐지했다고 한다. 이 미련한 자들아 귀 기울여 들으라. 만일 비밀 고백이 하나님의 법이라면, 무슨 까닭에 넥타리우스가 감히 그것을 폐지했겠는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며, 모든 교부들이 칭송한 넥타리우스에게 그들은 이단설과 분파의 죄명을 씌우려는가? 그러나 이런 선고를 내린다면 그들은 동시에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비난하게 될 것이다. 소조메누스의 말에 의하면, 이 교회에서는 고백의 관습을 일시 등한시했을 뿐 아니라, 아주 없어지도록 내버려두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비난할 뿐 아니라 만일 정직하게 말한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명령한 불가침의 법을 등한시했다는 이유로 동방 교회 전체를 비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8.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 고백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그런데, 고백이 폐지된 것에 대해서 크리소스톰이 분명한 증언을 한 문구들은 심히 많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감독이었으므로 그들이 그와 반대되는 말을 감히 중얼거린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그가 한 말을 인용한다면 다음과 같다. "여러분의 죄를 고백해서 씻어 버리십시오. 여러분이 지은 죄를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창피하거든 자기의 영혼에게 매일 고하십시오. 여러분을 책망할는지 모르는 동료 하인에게 고백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고쳐 주실 하나님에게 고백하십시오. 침상에서 죄를 고백해서 양심이 매일 자기의 비행을 인정하게 하십시오." "그뿐 아니라, 증인 앞에서 고백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속에서 죄를 검토하십시오. 이 재판에서 증인을 세우지 말고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고백을 보시게 하십시오." "나는 여러분을 연단 위에 데려다가 동료 하인들 앞에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이 사람 앞에서 자기의 죄를 폭로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양심을 들고 가서 그의 앞에 펼쳐 놓으십시오. 가장 훌륭한 의사이신 주님께 여러분의 상처를 보이고 그에게서 약을 얻으십시오. 상처를 주님께 보이십시오. 주께서는 책망하시지 않고 인자하게 고쳐주십니다"
"물론 사람에게 말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여러분을 책망할는지 모릅니다. 동료에게는 아무것도 고백하지 마십시오. 그는 말을 퍼뜨릴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상처를 주님께 보이십시오. 주께서는 여러분을 돌보시는 친절한 의사이십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으로써 "나는 너희들이 강단 중앙에 올라와서 여러 증인들 앞에 서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죄를 나에게만 비밀히 말해서 나로 너희들의 아픈 상처를 고치게 하라"고 하였다. 그들을 얽매고 있는 그 구속에서 하나님의 법으로 양심을 풀어주려고 크리소스톰이 이런 글을 쓴 것이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할 것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명령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며, 감히 필요한 것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성경에 있는 죄의 고백 : 공적 및 사적 고백. 9-13)
9. 하나님 앞에서 고백함
그러나 문제 전체를 더 분명하고 쉽고 간단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어떤 종류의 고백을 배울 수 있는가를 충실히 이야기하려 한다. 그 다음에 그들이 만든 조작품들을 이야기하겠다. 물론 그 전부를 말할 수는 없다. 이렇게 큰 바다를 누가 능히 쏟아놓을 수 있겠는가? 다만 그들의 비밀 고백의 요점을 내포한 것만을 이야기하겠다.
부끄러운 일이나, 나는 옛날 번역가들이 "찬송한다"는 말을 "고백한다"는 말로 번역한 것을 회상한다는 것이 부끄럽다(시 7:17, 9:2, 95:2, 100:4, 117:1). 이것은 가장 무식한 평신도라도 잘 아는 일이다. 그러나 이 대담한 짓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데 관해서 쓴 것을 그들의 포악한 법으로 옮겨 놓은 것은 폭로하는 것이 좋다. 고백에는 마음을 명랑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은 시에 있는 "기쁨과 찬송의 소리"란 말을(시 42:4) 끌어넣는다. 만일 이런 수정이 정당한 일이라면 우리는 모든 것에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까지 뻔뻔하게 되었으니, 경건한 독자들은 그들의 담대한 것이 더욱 가중하게 되도록 하나님의 공정한 징벌에 의해서 그들이 버림받은 자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성경의 단순한 가르침을 의지할 생각이 우리에게 있다면, 이런 가장(假裝)에 속을 위험성은 없을 것이다.
이는 성경에는 이 일에 관하여 고백하는 한 가지 방법이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죄를 용서하며 잊어버리며 씻어버리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주께 죄를 고백하자. 주님은 의사이시므로 그에게 우리의 상처를 보이도록 하자. 우리의 죄 때문에 마음이 상하며 노하시는 이는 주님이시니, 우리는 주께 화해를 구하도록 하자. 마음속을 아시며 모든 생각을 아시는 이는 주님이시니(히 4:12 참조), 우리는 그의 앞으로 속히 가서 우리의 속마음을 쏟아 놓자. 끝으로 죄인들을 부르시는 이는 주님이시니 우리는 지체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자. 다윗은 말한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5). 다윗의 다른 고백도 같은 성질의 것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시 51:1) 다니엘이 한 말도 그런 것이다.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단 9:5). 성경에 자주 나오는 다른 고백들도 있고, 또 이것을 인용한다면 거의 책 한 권이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우리 죄를 사하시며"라고 요한은 말한다(요일 1: 9). 우리는 누구에게 고백할 것인가? 물론 하나님께 고백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괴로운 마음과 겸손한 마음으로 그의 앞에 엎드려 고백해야 한다. 그의 앞에서 진심으로 우리 자신을 비난하며 정죄하면서, 그의 선하심과 자비로 무죄 선고를 얻도록 힘써야 한다.
10.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함
이와 같은 고백을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는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선포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언제든지 입으로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속에 있는 비밀을 한 사람에게 한 번만 귓속말로 속삭이는 것이 아니라, 자주 공개적으로 온 세상 사람들이 듣는 데서 자기의 수치와 하나님의 큰 자비와 영예를 진실하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나단에게 책망을 들었을 때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하였다(삼하 12:13). 바꿔 말하면, 이제 나는 변명하지 않겠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죄인이라고 판정받는 것을 피하려 하지 않으며, 내가 하나님에게 감추려고 하던 일들까지도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비밀히 고백한 후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겸손을 위해서 필요한 때마다 사람들 앞에서 기꺼이 고백하게 된다. 그래서 주께서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규례를 정하셔서, 성전에서 제사장이 일정한 말을 낭송한 다음에 백성이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도록 하셨다(레 16:21 참조). 그것은 각 사람이 공정한 자기 평가를 하도록 지도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셨기 때문이다. 또 우리 자신의 가증스러움을 고백함으로써 우리 사이에서와 온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밝히 보이는 것은 합당한 것이다.
11. 온 회중이 죄를 고백함
이런 종류의 고백은 교회에서 평상시에도 실행해야 하며 사람들이 어떤 공통된 죄를 지었을 때에는 특별히 실천해야 한다. 모든 백성이 에스라(Ezra)와 느헤미야(Nehemiah)의 지도아래 행한 것은 이 특별한 고백의 실례였다(느 1:7, 9:1-2). 그것은 그들이 모든 백성의 공통된 반역죄로 형벌을 받아 오랫동안 포로 생활을 했으며, 수도와 성전이 파괴되었으며, 종교가 퇴폐하였기 때문에 우선 자기들의 죄를 깨닫지 못하면 해방의 은혜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회중 가운데는 소수의 죄없는 사람들이 있는 때도 있겠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약하고 병든 몸의 지체이므로 자기의 건강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그뿐 아니라 그들도 다소의 감염을 면할 수 없으며, 죄책의 일부를 담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전염병이나 전쟁이나 기근이나 그 밖의 재앙을 당할 때마다, 애통과 금식과 그 밖의 방법으로 우리의 죄지었음을 표시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면, 우리는 모든 다른 일의 근본이 되는 이 고백을 가장 중요시해야 한다.
평상시의 고백은 주께서 친히 권장하셨다는 사실 이외에, 고백의 유용성을 생각한다면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감히 그것을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거룩한 집회로 모일 때에, 우리는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 서 있는 것이므로 우선 우리 자신의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가장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혹은 그것은 모든 기도에서 하는 일이며 우리는 용서를 빌 때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한다고 말할 것이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기만족과 우둔과 태만이 얼마나 크고 심한가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공적 고백의 행사를 통해서 자기를 낮추는 습관을 가진다면, 그것이 유익한 규례가 될 것이라는 나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주께서 제정하신 의식은 율법의 교육적 임무의 일부였지만, 그 이면에 있는 실재는 어떤 모양으로든 우리에게도 관계된다. 또 사실 잘 지도되는 교회들이 이 관습을 지켜서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을 우리는 안다.
즉, 주일마다 목사가 자신과 교인들의 이름으로 고백문을 작성해서, 모든 사람의 사악함을 고발하며 주의 용서를 간구한다. 간단히 말하면, 이러한 열쇠로 기도의 문호를 개방하여 각 개인은 개인적으로, 온 회중은 공적으로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12. 영혼의 치료에 있어서 개인적 고백
성경은 개인적 고백의 두 가지 형식을 인정한다. 하나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니, 우리가 서로 자기의 죄를 고백해야 된다고 야고보가 말한 것은(약 5:16) 이 개인적 형식의 고백이다. 야고보가 말한 뜻은 우리가 자기의 약점들을 서로 알린 후에 서로 충고하며 위로함으로써 서로 돕는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형식은 이웃을 위한 고백이다.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서 그가 어떤 해를 받았을 때에, 그의 노여움을 풀고 그와의 화해를 위해서 사용하는 형식이다. 처음 종류의 고백에서 야고보는 누구를 상대로 고백할 것인지를 분명히 정하지 않고 교우 중에서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택하는 자유를 남겨 놓았지만 누구보다도 적당한 사람은 목사일 것이므로 우리는 목사들을 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목사들이 더 적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주께서 그들을 부르셔서 우리에게 죄를 이기며 교정하도록 말로 가르치며, 죄가 용서된다는 확신을 줌으로써 우리를 위로하도록 그 직책에 임명하셨기 때문이다(마 16:19, 18:18, 요 20:23). 상호 충고와 상호 견책의 의무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목사들은 특별한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를 확신하고 서로 위로하며 서로 그 확신을 확고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모두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목사들은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을 우리의 양심에 불어넣어 주는 증인과 보증인으로 임명된 사람들인 것을 우리는 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그들이 죄를 용서하고 영혼을 해방한다고까지 말한다. 이런 직책이 그들에게 있다고 들을 때에, 그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죄의식으로 혼자서 마음속에 불안과 고통을 느낄 때 그리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해방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주께서 제시하신 대책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죄에서 풀려나기 위해서 자기 교회의 목사에게 개인적으로 고백하며, 위로를 얻기 위해서 목사의 적극적인 도움을 청해야 한다. 왜냐하면 목사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복음의 교훈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는 것을 직무로 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사가 항상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즉, 하나님께서 분명히 명령하신 것이 없으면, 일정한 멍에로 사람의 양심을 속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고백은 자유 선택에 맡기며 모든 사람에게 요구할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권하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또 필요하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든 죄를 고백하라고 규정으로 강요하거나 술책으로 유도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도 된다. 고백하는 당사자들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고백하게 하여, 완전한 위로를 얻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직무에 충실한 목사들은 교회에 이 자유를 허용할 뿐 아니라, 이 자유를 수호하며 굳게 방위해야 한다. 그래야만 목사들의 횡포와 교인들의 미신을 피할 수 있다.
13. 원망을 제거하기 위한 사적 고백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에서 두번째 종류의 고백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이렇게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함으로써 우리의 죄과로 인해서 깨어진 사랑이 다시 회복된다.
교회 전체에 해를 입히게 된 사람들이 그 죄를 고백하는 것도 이런 종류에 포함된다. 그리스도께서는 한 사람에게 사적으로 지은 죄를 중대시하면서 무슨 모양으로든지 형제에게 죄를 지은 사람은 모두 먼저 공정한 배상으로 화해하기까지는 거룩한 예식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셨으니, 악한 행동으로 교회에 죄를 지은 사람이 자기의 죄를 인정함으로써 교회의 화해를 얻어야 할 이유는 더욱 크다. 이와 같이 고린도 교회 신자는 시정을 순순히 받아들였기 때문에 다시 교회의 친교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고후 2:6).
키프리안이 회상한 초대 교회의 고백 형식도 이런 것이었다. "그들은 일정한 기간 참회한 후에 고백하러 와서 감독과 교직자들의 안수로 친교의 특권을 받는다." 성경에는 이와 다른 형식의 고백은 전연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영혼을 속박하지 말라고 매우 엄격하게 금하셨으니, 새로운 올가미로 영혼을 얽매는 것은 우리의 의무가 아니다. 동시에 양들이 성만찬에 참가하기를 원할 때마다 목자 앞에 나가서 성만찬에 참가하는 것을 나는 반대하지 않고 도리어 각지에서 이 일을 행하는 것을 진심으로 바란다. 이렇게 하면 괴로운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혜택을 입으며, 견책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견책을 받을 마음의 준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압박과 미신은 항상 물리쳐야 한다.
(열쇠의 권한과 죄의 사면. 14-15)
14. 열쇠의 권한에 대한 그 성격과 가치
열쇠의 권한은 다음 세 가지 고백에서 적용될 수 있다. 즉, 교회 전체가 그 허물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용서를 간구할 때, 한 개인이 어떤 현저한 범행으로 일반적인 죄를 짓고 회개를 표명할 때, 또는 괴로운 양심 때문에 목사의 도움이 필요한 개인이 그에게 자기의 잘못된 점을 고할 때이다. 타인에 대한 죄를 제거해야 될 경우에는 방법이 다르다. 이런 때에는 양심의 평안도 고려되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은 증오심을 없애고 사람들의 마음을 평화의 줄로 묶어 주는 것이다(엡 4:3 참조).
그러나 우리가 더욱 자발적으로 마음으로 우리의 죄를 고백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내가 말한 은혜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온 교회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 것같이 그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자비에서 유일한 피난처를 구할 때에 화해의 명령을 받은 그리스도의 사신이 임석해서(고후 5:20 참조) 죄의 사면을 선언한다는 것은 평범하거나 사소한 위로가 아니다. 이미신이 그 임무를 공정하게, 바른 절차에 따라 그리고 경건하게 수행할 때에는 열쇠의 권한이 유익하다고 칭찬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약간 멀어진 사람이 용서를 받고 형제적 단결에 다시 참가하게 될 때, 그리스도께서 "너희가 뉘 죄든지 땅에서 사하면 하늘에서도 사하여질 것이요"라고 하신(요 20:23, 마 18:18의 융합) 그 사람들에게서 자기도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에게 큰 은혜가 되는 것이다. 또 자기의 죄를 특별한 치료법으로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사면을 받을 때에, 그 효과와 은혜는 공적 사면에 못지않게 크다. 이는 어떤 사람은 신자 전체에 주는 일반적인약속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약간의 의심이 남아 있고 아직도 용서를 받지 못한 것 같아서 여전히 마음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목사에게 심중의 비밀을 털어놓고,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는 복음의 말씀이 특히 자기를 향해서 목사의 입에서 들려올 때 그는 마음에 확신을 얻으며 지금까지 그를 괴롭히던 불안에서 해방될 것이다.
그러나 열쇠가 문제될 때에는 우리는 항상 주의해서 복음 선포와 관계없는 어떤 권한도 만들어 내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한다. 나는 교회 행정 관리 문제를 논할 때에 이 문제도 다시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부여하신 매고 푸는 권리는 말씀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점은 특히 열쇠를 사용하는 데 관해서 할 수 있는 말이다. 주께서 임명하신 사람들에 의해서 복음의 은혜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신자들의 마음속에 인쳐진다는 사실은 열쇠의 권한은 완전히 이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이 사실은 복음 선포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15. 고백에 대한 천주교 교리의 요점
그러나 천주교회의 신학자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들은 "양성"의 모든 사람은 분별 연령에 도달하는 즉시로 자기의 모든 죄를 적어도 일년에 한 번은 자기의 사제에게 고백해야 하며, 그들에게 죄를 고백하겠다는 확고한 의도가 없으면 죄는 용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기회가 제공될 때에 이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 낙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그들 앞에 닫힌다고 한다. 그들은 사제에게는 죄인을 매고 풀어주는 열쇠의 권한이 있으며 이는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운운하는(마 18:18) 그리스도의 말씀이 헛된 말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천주교회의 신학자들은 이 권한에 대해서 자기들끼리 맹렬히 싸운다. 어떤 학자는 열쇠는 본질적으로 하나뿐이라고, 즉, 매고 푸는 권한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열쇠를 잘 쓰기 위해서 지식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지식은 부속물일 뿐이고 본질적으로 권한과 결합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또 어떤 신학자들은 이것을 너무나 무제한적인 면허라고 보고 분별과 권한이라는 두 가지 열쇠를 주장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런 완화책이 사제들의 부패를 억제하는 것을 보고 다른 열쇠들을 만들었다. 분별하는 권위라는 열쇠는 선고를 내릴 때 사용하는 것이고 권한이라는 열쇠는 그 선고를 실행할 때에 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고문으로서의 지식을 첨가한다.
그러나 그들은 감히 매고 푸는 일을 단순히 죄를 용서하며 말소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지 못한다. 그것은 예언자를 통하여 "나 곧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나 곧 나는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사 43:11, 25)라고 하신 주의 말씀을 듣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누가 매이고 누가 풀릴 것이며, 누구의 죄가 용서를 받으며 누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는가를 선언하는 것이 사제의 직무라고 한다. 또 고백을 받고 죄를 용서하거나 남겨둘 때, 또는 파문이나 성사 참가의 허락을 선고할 때, 이런 선언을 한다고 한다.
끝으로 그들은 아직도 곤란한 문제를 제거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며 또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을 사제들이 혹은 매며 혹은 풀어 주는 일이 있으며,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하늘에서 매이거나 풀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항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하자. 그런 때에 그들이 최후로 도피하는 수단은 다음과 같은 대답이다. 즉, 열쇠의 권한을 위탁하는 데는 한 가지 제한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사제들의 선고가 그의 심판대 앞에서 시인되리라고 약속하셨으나, 그 선고는 매이거나 풀리는 사람의 공로에 따라서 공정하게 표명된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이 열쇠의 권한을 모든 사제에게 주셨고 사제들은 서품시에 주교의 손에서 받지만 그것을 자유로 쓰는 권리는 교회 직무를 행사하는 사람들의 수중에만 있으며, 파문을 당하거나 직권 정지를 당한 교직자들도 열쇠의 권한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그 열쇠들은 녹이 쓸고 묶여 있다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겸손하고 정신이 올바른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모루 위에서 새로운 열쇠들을 만들어내고 교회의 창고는 이런 열쇠로 잠겨졌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후에 적당한 곳에서 논할 것이다.
(천주교 교도들의 오류들을 그리고 고백과 보속에 관련된 유해한 관습을 서평함. 16-25)
16. 모든 죄를 열거하여 고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부터 문제점에 대해서 하나씩 간단히 대답하겠다. 여기서는 법으로 신자들의 영혼을 속박할 권리가 그들에게 있는가 또는 없는가 하는 문제는 말하지 않고 적당한 곳으로 미루겠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죄를 말해야 된다는 법을 만들며, 고백하겠다는 확실한 의도가 없으면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며, 고백하는 일을 게을리 하면 낙원으로 들어갈 길이 없다고 지껄이는 것은 결코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죄는 모두 고배해야 되는가? 다윗은 죄를 고백하는 문제에 대해서 많이 또 바르게 생각한 사람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는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9:12)라고 외쳤다. 다른 곳에서는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라고 하였다(시 38:4). 그는 우리의 죄의 구렁이 얼마나 깊은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죄에는 얼마나 많은 얼굴이 있으며, 이 히드라(hydra,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머리가 아홉인 뱀)에게는 얼마나 많은 머리가 있으며, 죄는 얼마나 긴 꼬리를 끌고 다니는가를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죄를 일일이 열거하지 않고 다만 자기의 악행의 깊은 구렁 밑에서 주를 향해서 나는 눌렸나이다, 묻혔나이다, 숨이 파히나이다,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시 18:5), 내가 "깊은 수렁에 빠지며"(시 69:2-3, 15-16), 원컨대 손을 내밀어 주소서, 나는 힘이 빠지고 죽어 가나이다 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면 다윗이 자기의 죄들을 낱낱이 세려고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누가 자기의 죄를 세려는 생각을 할 것인가?
17. 완전한 고백을 요구하는 것은 무한한 고통을 준다
하나님의 경외하심을 조금이라도 알게 된 사람들은 이 잔인한 행위로 인해서 영혼에 가장 참혹한 고통을 받는다. 그들은 처음에 자신을 검토하여, 그들의 양식에 따라 죄를 큰 가지와 작은 가지와 잎으로 나눴다. 그 다음에 죄의 성질과 분량과 환경을 고려하여, 문제는 다소 전진하였다. 그러나 더 전진하여 사방이 하늘과 바다가 되었을 때에는 항구나 정박지가 없었다. 가면 갈수록 눈앞에는 더욱 큰 덩어리가 나타났다. 참으로 갈수록 태산이었다. 먼 우회로를 돌았어도 탈출할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케단과 칼 사이에 끼이게 되었다. 드디어 결과는 절망뿐이었다.
여기서 이 도살자들은 자기들이 만든 상처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사람마다 힘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여, 치료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불안이 끼어들었다. 참으로 "나는 시간을 더 들였어야 할 것을 나는 정성이 부족했다. 나는 소홀해서 잊어버린 것이 많다. 내가 부주의해서 잊어버렸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짓이다."라고 하는 새로운 고통이 가망 없는 영혼들을 혹독하게 책망했다.
그들은 이런 고통을 감하려고 또 다른 약을 사용했다. 너의 태만함을 회개하여라. 완전한 부주의가 아니라면 용서를 받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하나도 상처를 감싸지 못하며, 고통을 덜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꿀을 탄 독약같이, 처음 맛보기에는 불쾌하지 않으나 모르는 사이에 깊이 침투한다. 그러므로 "너의 모든 죄를 고백하라."고 하는 무서운 소리가 항상 그를 압박하고 귓속에서 울린다. 확실한 위로가 아니고는 이 공포심을 진정시킬 수 없다.
여기서 독자들은 생각해 보라. 일 년 동안에 한 모든 행동을 어떻게 계산할 수 있으며, 매일 지은 죄를 어떻게 함께 모을 수 있겠는가? 하루에 한 실수만을 밤에 생각하더라도 기억이 희미할 것이다. 우리에게 밀려드는 죄의 수와 종류는 그렇게 많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비교적 중대한 죄를 서너 개 눈여겨보고는 이 고백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따위의 야만적이고 우둔한 위선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배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기를 검토해서 압박됨을 느끼며,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하나님일까 보냐"라고(요일 3:20)한 요한의 말까지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의 이해력을 훨씬 초월한 지식을 가지신 심판자를 보고 그들은 떤다.
18. 완전한 고백을 요구하는 데서 오는 악영향
더욱이 이런 무서운 독약에 아첨하는 말을 섞어 많은 사람들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그들은 그런 감언이설이 하나님을 만족시킨다거나 심지어 자기들까지도 참으로 만족시킨다고 믿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결과는 대양 한복판에서 닻을 내리고 일시 항해를 정지한 것이나 지쳐서 길가에 주저앉아 쉬는 것과 같았다. 나는 이 점을 증명하는 데 힘을 들이지 않는다. 누구든지 이 점에 대해서 자신이 스스로 증인이 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어떤 법인가를 요약해서 말하겠다. 첫째로, 그것은 전혀 실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멸망시키며 정죄하며 당황하게 만들며 파멸과 절망에 떨어뜨릴 뿐이다. 다음으로, 이 법은 죄인들에게서 자기의 죄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빼앗음으로써 그들을 하나님과 자기를 모르는 위선자로 만든다. 참으로 그들은 죄를 일일이 열거하는 데 온 정신이 팔려서, 자기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의 수렁과 비밀한 죄와 그 추악성을 잊어버린다. 이것을 알았다면 특히 자신의 비참함을 절실히 깨달을 것이다. 고백에 대한 확실한 지도 원리는 우리의 이해력이 우리의 죄의 심연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세리의 고백이 이 원칙에 따른 것임을 우리는 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눅 18:13). 그 말은 "저는 말할 수 없이 크고 큰 죄인입니다. 저는 전적으로 죄인입니다. 저의 죄들이 얼마나 큰지를 저의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고 입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자비의 심연으로 저의 죄의 심연을 삼켜버리소서"라는 것과 같다.
무슨 일인가 라고 물을 것이다. 죄는 하나도 고백하지 말라는 것인가?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는 간단한 말이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고백을 받으시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주의 앞에 우리의 온 마음을 쏟아 놓도록 주의해야 한다. 죄인이라는 한 마디로 우리가 죄인인 것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죄인인 것을 진심으로 진지하게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죄의 오점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종류가 많은가를 잘 알고 고백해야 한다. 우리가 불결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불결의 성질이 어떠하며, 정도와 종류가 얼마나 넓고 많은가를 고백해야 한다. 우리가 빚진 자라는 것뿐만 아니라 그 빛이 얼마나 크고 무거우며, 얼마나 많은 의무를 지고 있는가를 인정해야 한다. 상처가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심한 매를 맞았는가를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고백으로 하나님 앞에 온 마음을 쏟아 부은 때에도 아직 죄가 남아 있다는 것과 죄악의 깊은 속은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을 죄인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다윗과 함께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라고 외치는 것이 마땅하다(시 19:12).
그들은 고백하겠다는 생각이 확실한 때에만 죄가 용서되며, 고백할 기회가 제공됐을 때에 그것을 무시하는 사람에게는 낙원의 문이 닫힌다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그 주장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 죄의 용서는 과거나 현재나 다름이 없다. 그리스도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았다는 말씀을 읽을 때에, 거기에 어떤 고해 신부의 귀에 대고 고백했다는 말씀은 없다. 고백을 받을 신부나 고백제도 자체가 없었으니, 그들은 고백을 할 수도 없었다. 그 후 여러 시대를 지나는 동안 고백 제도는 없었으며, 이런 조건이 없이도 죄는 항상 용서를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의심스러운 일을 오랫동안 논쟁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며 영원히 서 있다.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겔 18:21-22). 이 말씀에 감히 무엇을 첨가하는 자는 죄를 결박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결박하는 자이다.
사건 내용을 듣지 않고서는 재판을 할 수 없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재판관으로 자처하는 자들이 이 직책을 맡은 것이 우선 경솔한 행동이었다는 것으로써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원칙들을 그들은 태연하게 조작하여 사람을 놀라게 한다. 그들은 매고 푸는 직권이 그들에게 위임되었다고 자랑한다. 마치 그 직권이란 것이 어떤 재판권과 수사권인 것같이 말을 한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의 교리 전체는 이런 권리가 사도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죄인이 사면을 받았는지를 확실히 아는 것은 사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사면해 달라는 간구를 받으시는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사람은 죄의 목록을 들어도 그것이 정화하며 완전한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판을 받을 사람의 말만 듣기로 하지 않는다면, 사면은 없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사면 처분 전체는 믿음과 회개에 달렸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점은 사람이 사람에게 선고를 내려야 할 때에, 사람이 알 수 없는 일들이다. 따라서 매고 푸는 일의 확실성은 지상의 재판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직무를 합당하게 수행할 때에, 그는 다만 조건부로 사면할 뿐이다. 그러나 죄인들을 위해서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하는 말씀을 하셔서(요 20:23),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으로 약속된 용서가 하늘에서도 인정될까 하는 의심이 그들의 마음에 없게 하셨다.
19. 비밀 고백을 비판함
그러므로 우리가 귓속말로 하는 고백을 공격하며 우리 사이에서 추방하기를 원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 악한 제도는 여러 가지로 교회에 해를 끼친다. 비록 이 제도가 그 자체로는 무해하다고 하더라도 실지로 그것은 무익하고 무효할 뿐 아니라, 많은 불경과 모독과 과오를 야기했으니, 누가 그것을 즉시 폐지하려고 하지 않을 것인가? 그들은 대단히 유효하다고 해서 어떤 이용 가치를 선전하지만, 그것은 거짓 가치거나 전혀 무가치한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특히 한 가지 이용 가치만을 중시한다. 즉, 고백하는 사람이 얼굴을 붉히는 것이 큰 벌이되어 죄인은 그 후에는 더욱 주의하게 되며, 스스로를 벌함으로써 하나님의 징벌을 피한다고 하는 것이다. 마치 각 사람이 최고의 하늘 심판대 앞에 나가서 하나님의 심사를 받으라고 할 때에, 그것은 사람에게 크게 수치를 주며 충분히 그를 겸손하게 하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한 사람 앞에서 수치를 당하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악한 양심에 대한 증인이 되실 때 부끄러워하지 않게 된다면 그 얼마나 이익이라고 할 것인가!
그러나 그들의 선전 자체가 전혀 거짓말이다. 이는 신부에게 고백한 사람들이 입을 닦고 "내가 악을 행치 아니하였다."(잠 30:20)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에, 그들은 아주 대담하게 죄를 짓게 되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일 년 내내 죄 지을 담력을 얻을 뿐 아니라 앞으로 일 년 동안은 고백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거나 정신을 차리는 일이 절대로 없으며 계속 죄에 죄를 거듭하면서 한 번에 모조리 뱉어버리겠다고 생각한다. 그 뿐만 아니라, 뱉어버린 때에는 짐을 벗은 것 같이 생각하며, 신부를 절친한 친구로 만들었으니 심판을 하나님에게서 신부에게 이양하고 하나님은 모든 일을 잊어버리시게 만든 것같이 생각한다. 참으로 어느 누가 고백하러 갈 날을 고대할 것이며, 어느 누가 기쁘고 간절한 마음으로 고백하러 갈 것인가? 감옥으로 끌려가는 사람같이,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닌가? 신부들은 아마 다를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악행을 재미있는 일화같이 서로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나는 귓속말 고백에 관련된 무수한 몸서리치는 이야기로 많은 지면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
다만 한 가지만 말하겠다. 저 거룩한 분이 음행에 관한 풍설 하나를 듣고 자기 교회에서 아니 자기 교구민의 기억에서 고백을 제거한 것이 현명한 처사였다면, 지금같이 수많은 매음과 간음과 근친상간과 음행 방조 사건이 있는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경고를 받는다.
20. 열쇠의 권한에 호소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고해 신부들은 이 목적을 위해 열쇠권이란 것을 주장하며, 그들의 왕국의 배를 전적으로 소위 "이물과 고물"을 그 능력에 의존시킨다. 이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면 열쇠를 주신 것은 아무 뜻도 없다는 말이냐고 그들은 묻는다.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신 말씀은(마 18:18) 아무 근거도 없다는 말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수포로 돌아가게 할 것인가? 라고 묻는다. 여기 대한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열쇠를 주신 데는 중대한 이유가 있었다. 이 점은 내가 최근에 설명했고 다시 파문론에서 특히 자세히 논하겠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들의 이런 요구의 구실을, 그들의 신부들은 사도들의 대리도 아니며 후계자도 아니라고 한 칼로 잘라 버린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이 점도 다른 데서 다루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방위 태세를 강화하려고 공성 병기를 가설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모든 장치를 파괴할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매고 푸는 권한을 사도들에게 주신 것은 성령을 주시기 전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선 성령을 받지 않은 자에게 열쇠의 권한이 있다는 것을 나는 부정한다. 우선 성령이 오셔서 가르치시며 무엇을 할 것인지를 지시하시지 않았다면, 그런 사람은 열쇠를 사용할 수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들은 성령을 가졌노라고 떠들어대지만 실지로는 그것을 부정하고 있다. 그들은 성령을 어떤 허무한 것, 아무 가치도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말은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또 이런 술책으로 그들은 완전히 패배를 당한다. 그들이 열쇠로 열 수 있다고 자랑하는 문이 어떤 문이든 간에 그들에 대해서는 항상 성령을 가졌느냐, 즉, 열쇠를 판단하며 보관하시는 성령을 가졌느냐고 질문해야 한다. 그들이 가졌다고 대답한다면, 다시 성령은 잘못된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 그들은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말은 하지만 감히 솔직한 대답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서 매라고 하신 것을 풀며, 주께서 풀라고 명령하신 것을 매는 일을 아무 분별없이 반복하는 신부 따위에게는 열쇠의 권한이 없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21. 사제가 매고 푸는 것은 불확실하다
해당되는 사람이나 해당되지 않는 사람을 분간하지 않고 매며 푼다는 극히 명백한 증거에 의해서 그들의 유죄가 드러나는 것을 볼 때, 그들은 지식이 없으면서도 권한을 남용한다. 권한을 선용하기 위해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감히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권한 자체는 악한 행사자들에게 부여되었다고 그들은 글에 쓴다. 그러나 그 권한은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것이다(마 16:19, 18:18). 그리스도의 약속이 거짓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 권한을 맡은 사람들이 올바르게 매며 풀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은 매이거나 풀릴 사람의 가치에 따라서 제한된다고 말하는 것으로써 문제를 회피할 수는 없다. 매이거나 풀리는 데 해당하는 사람들만이 매이거나 풀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도 인정한다. 그러나 복음 전도자들과 교회에는 이 해당 여부를 측정하기 위한 말씀이 있다. 이 말씀에 따라서 복음 전도자는 믿음을 통해서 모든 기독교신자에게 죄의 용서를 약속하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멸망을 선언할 수 있다. 이 말씀에 따라서 교회는 "음란 하는 자나…간음하는 자나…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고 선포할 수 있다. 교회가 이런 사람들을 맬 때에 확실한 신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역시 이 말씀으로 교회는 회개하는 사람들을 풀어주며 위로한다. 그러나 무엇을 매며 무엇을 풀어야 할는지를 모르는 이 권한, 알지 못하면 매지도 못하며 풀지도 못한다는 이 권한은 대체 무슨 권한인가? 불확실한 사면을 하면서, 자기들이 받은 권위에 의해서 사면하노라고 그들이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상상적인 권한이 쓸모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거나, 그렇지 않으면 너무도 불확실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해야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도 상당수의 사제들이 열쇠를 바르게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과 합당하게 쓰지 않으면 이 권한은 무효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나를 풀어주는 사람이 열쇠를 바르게 사용한다고 내게 믿게 할 사람은 누군가? 만일 그가 악한 사람이라면, 그는 허황된 사면을 하는 것이 아닌가? 즉, 그는 "그대에게서 무엇을 매거나 풀어야 할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열쇠를 공정하게 쓸 줄을 모른다. 그러나 그대에게 해당하는 일이 있다면, 나는 그대를 사면한다"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평신도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말을 차마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교도와 마귀라도 그만한 일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말은 풀어주는 데 대한 확실한 표준인 하나님의 말씀은 내게 없으나 그대에게 공로가 있으면 나는 그대를 사면할 권위를 받는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열쇠는 분간하는 권위요 실행하는 능력이라고 하며, 고문으로서, 즉, 고문으로서 이용하기 위해서 지식이 첨가된다고 설명했을 때에, 무슨 목적으로 그랬는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배제하고 자기들이 정욕대로 무례히 지배하기를 원한 것이다.
22. 열쇠의 권한을 그릇되게 쓰는 것과 바르게 쓰는 것과의 차이
만일 어떤 사람이 신앙에 의존하는 사면은 언제나 애매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정당한 사역자들도 그 의무 이행에 있어서 적지 않은 혼란을 느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죄인들의 신앙을 판단할 자격이 없는 사역자 자신이 그들의 사면에 대해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죄인들에게는 아무 위로도 아닌 위로까지도 없을 것이다. 만일 이렇게 항의한다고 해도 여기 대해서는 곧 대답할 수 있다. 그들은 사제가 죄에 대해서 들어 알기까지 죄는 용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그들의 말에 의하면, 용서는 사제의 판단에 달렸고 그가 용서받을 만한 사람을 현명하게 분간하지 못하면 그의 행동 전체는 아무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들이 말하는 권한은 조사와 결부된 재판권이며, 용서와 사면은 이 재판권에 한정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확고한 근거를 찾아 볼 수 없다. 사실 밑 빠진 수렁이 있다. 이는 고백이 완전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희망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둘째로, 죄인이 죄를 정직하게 말하는지 모르지만, 사제는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 끝으로 사제들은 너무나 무지하여 그들의 대부분은 구둣방 주인이 밭갈이하는 것만큼도 그 직무에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없다. 나머지도 거의 모두 당연히 자신을 의심해야 할 위인들이다. 이런 데서 교황의 사면에 관한 혼란과 주저가 생긴다. 그것은 그들이 사제라는 사람을 사면의 근거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사제가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보고와 조사와 증명을 거친 문제에 대해서만 판단을 내리려고 한다.
그런데 만일 누가 이 선량한 선생님들에게 묻기를, 죄를 용서받은 후에 죄인은 하나님과 화해가 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들이 어떤 대답을 할는지 알 수 없다. 아마 그들은 사제가 방금 낱낱이 들은 죄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선언하든 간에, 비난받을 다른 죄가 아직 남아있는 동안은 그 선언은 효과가 없다고 고백해야 될 것이다. 고백하는 사람의 편을 보면, 그들이 말하는 대로 그는 사제의 재량에 의지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그의 양심이 치명적인 불안에 매여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가르치는 교리는 이런 모든 모순이 전혀 없다. 사면은 죄인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을 신뢰하며,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희생 안에서 대속을 구하며, 그가 베풀어주신 은혜로 만족한다면, 그는 이런 신뢰감을 조건으로 용서를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령으로서 행동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받은 명령을 죄인에게 전하기 때문에 잘못을 범할 수 없다. 주께서는 친히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다(마 9:29, 마 8:13참조). 주님 자신의 이 일반적인 원칙을 교황청에서는 사악한 생각으로 멸시하지만 죄인은 이 원칙에 따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고 받기만 하면, 이 간단한 조건으로 확실하고 분명한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다.
23. 그릇된 주장을 폭로함
열쇠의 권한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게 뒤섞어 놓는가를 나는 다른 곳에서 논하겠다고 약속했다. 더욱이 적당한 곳은 교회 행정을 다루는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독자들에게 기억하기를 청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일부는 복음 전파에 관한 것이었고 일부는 파문에 관한 것이었는데(마 16:19, 18:15-18, 요 20:23), 그들은 이 말씀을 불합리하게 왜곡해서 비밀한 고백으로 만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제가 죄를 인정하며 용서함으로써 행사하는 사면권이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하지만, 분명히 이런 원칙은 거짓말이며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앙에 도움을 주는 사유는 용서에 대한 증언에 불과하며, 이 증언은 복음이 값없이 주는 약속에서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규율에 의존하는 다른 종류의 고백은 비밀한 죄와는 상관이 없고, 교회에 대한 공적 범행을 제거하기 위한 징계와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만 죄를 고백하거나 평신도들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은 사제가 조사관으로서 관여하지 않고서는 불충분하다고 하며,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여기저기서 증거를 수집한다. 그들의 근면은 가증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고대 교부들이 신자들에게 목자들 앞에 죄의 짐을 풀어놓으라고 충고한 것은 죄를 일일이 고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그런 관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에 롬바르드와 그의 동료들이 너무도 패악해서 왜곡되고 고의적으로 위서를 이용해서 단순한 사람들을 그들의 거짓으로 속이려 한 것 같다. 참으로 그들도 푸는 일은 항상 회개에 동반하는 것이므로 회개한 사람은 아직 고백하지 않았더라도 사실은 풀린 것이라고 바르게 인정한다. 그러므로 사제는 죄를 용서한다기 보다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선언한다.
그러나 그들은 교활하게 이 "선언"이란 말에 조잡한 오류를 도입해서 교훈을 예식으로 바꿔 버린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미 용서를 받은 사람은 교회가 보기에도 사면을 얻은 것이라고 첨부한다. 이렇게 그들은 공동 훈련을 목표로 제정된 일을 각 개인이 사용하는 쪽으로 끌어갔으나 원래는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중대하고 알려진 허물을 저지른 죄를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잠시 후 겸비한 태도에서 타락하고 부패해져서 새로운 용서 방법을 덧붙인다. 즉, 벌과 보속을 명령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께서 항상 단일체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그들의 희생물들이 분할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회개와 신앙을 요구하시므로 이 분할 또는 이의는 완전한 모독 행위이다. 이것은 마치 사제가 호민관의 행세를 하면서, 하나님을 상대로 개입하여 우선 호민관 앞에 엎드려 매를 맞지 않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순수한 자비심으로 은총을 베푸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과 같은 효력이 있기 때문이다.
24. 요약
이 문제 전체의 귀착점은 이것이다. 즉,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이 거짓 고백의 창시자로 만들려고 한다면, 그들의 무익한 노력은 논박을 받을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 그들이 여러 가지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들을 고의로 곡해한다는 것을 나는 증명했다. 이 법은 사람이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 명백하므로 나는 그것을 압제자의 악법인 동시에 하나님을 멸시하면서 공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양심을 그의 말씀에 붙들어 매시고 사람의 권력에서 풀어 놓으려고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애되지 않기를 원하신 일을 용서를 받을 필요가 있는 것으로 사람이 규정할 때에, 나는 그것을 절대로 용인할 수 없는 모독 행위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은 죄를 용서하는 데 있고 이 죄를 용서하는 일은 하나님의 가장 고유한 기능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포악한 제도는 세상이 가증한 야만 세력의 압박 아래에 있었을 때에 도입된 것임을 나는 밝혔다. 여기에 첨부하여 나는 이것이 유해한 악법인 이유를 말하였다. 이 법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현저한 곳에서는 양심에 가책을 받는 사람들을 절망적인 상태에 빠뜨리며, 관심이 없는 곳에서는 허무한 감언이설로 쓰다듬고 달래어 사람들의 태만을 조장한다. 끝으로 나는 그들이 제시하는 완화책은 모두 그들의 불경건한 행위를 위장하는 것이며, 순수한 교훈을 혼란하게 하고 모호하고 불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25. 천주교의 교리를 개탄하며 논박함
그들은 고해성사에서 셋째 자리를 보속 교리에 둔다. 우리는 이에 대한 그들의 모든 공허한 이야기를 한 마디로 뒤집을 수 있다. 그들은 회개하는 사람이 과거의 악행을 그치고 행실을 고치는 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고 하며, 그가 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 보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 우리의 죄를 구속하는 보조적인 방법에는 눈물과 금식과 예물과 자선 행위 등 여러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이런 방법들로 우리는 주의 노여움을 풀며, 하나님의 의에 대한 우리의 빚을 갚으며, 우리의 범행에 대한 보상을 치르며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죄책을 용서하셨으나, 공의의 법에 의하여 벌을 보류하신다. 보속에 의해서 속량되어야 하는 것은 이 형벌이라고 한다. 이 모든 말의 요점은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우리의 범행에 대한 용서를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행위의 공로가 그 사이에 끼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공로도 죄의 범죄에 대한 값을 치름으로써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보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거짓말에 대해서 나는 값없이 주시는 죄의 용서를 대립시킨다. 성경에는 이보다 더 분명한 말이 없다(사 52:3, 롬 3:24-25, 5:8, 골 2:13-14, 딤후 1:9, 딛 3:5). 첫째로, 용서는 순수한 관용에서 주는 선물이 아니고 무엇인가? 돈을 받고 영수증을 쓰는 채권자는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돈을 받지 않고도 친절한 마음으로 기꺼이 빚을 말소하는 사람이 용서하는 것이다. 보속이란 생각을 일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면 무엇 때문에 "거저"라는 말을 붙이는가? 그러면 그들은 어떤 신념으로 이렇듯 강력한 노호로 때려 부순 보속 교리를 여전히 일으켜 세우는가? 주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하실 때에(사 43:25), 용서의 원인과 근거는 그의 선하심에서만 찾아야 한다고 밝히 선언하시지 않는가? 또한 온 성경이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그의 이름으로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행10:43). 이것은 다른 모든 이름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용서를 "보속"이란 말로 해석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인가? 그들은 보속을 보조 수단으로 도입하는 듯하지만 용서를 보속의 결과라고 보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성경에 있는 것은 우리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으며 우리 자신의 것을 주장하지 않으며 다만 그리스도의 위임만 의지할 뿐이라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라고 바울이 선언한 것과 같다(고후 5:19). 그리고 바울은 곧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고후 5:21) 것이라고 하면서 그 방법과 이유를 첨부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죄에 대한 진정한 보속을 제공하며 양심에 평화를 준다. 26-27)
26. 그리스도는 완전한 보속을 제공하셨다
그러나 심히 패악한 그들은 죄의 용서와 화해는 우리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됐을 때에, 단 한 번 있는 일이며, 세례 받은 후에는 보속을 통해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는 교회의 열쇠에 의해서 나눠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한다. 나는 불확실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한두 명이 아니고 모든 스콜라 철학자들이 아주 분명히 글로써 자기들의 오점을 폭로하였다. 그들의 선생은 베드로의 교훈에 따라(벧전 2:24), 그리스도께서는 나무에 달려 우리의 죄에 대한 벌을 받으셨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 다음에 그 발언을 시정하는 예외를 덧붙인다. 곧 세례에서 죄에 대한 모든 현세적 징벌이 완화되지만 세례 후에는 회개의 도움으로 더욱 경감되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리의 회개가 협력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요한이 한 말은 훨씬 다르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요일 2: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요일 2:12). 그는 분명히 신자들을 상대로 말하고 있으며, 죄의 대속으로서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 만한 다른 보속이 없다는 것을 밝힌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대들과 단 한 번 화해하셨고, 지금은 그대들 스스로 다른 방법을 강구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영원한 변호자인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중재에 의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회복시켜 주시며,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는 영원한 화목 제물이라고 한다. 세례 요한이 한 말이 언제나 진리이기 때문이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1: 36 참조). 그리스도께서 죄를 없게 하시고 다른 사람이 없게 하는 것이 아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만이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므로 그는 죄를 위한 유일한 제물이시며 또한 유일한 화목의 제물이시며, 유일한 보속물이시다. 죄를 용서하는 권리와 권한은 아버지께 고유한 것이며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이 점에서 그는 아들과 구별되시지만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다른 정도에 둔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맡으시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죄책을 씻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이루신 속죄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데, 다만 자신의 보상으로 하나님과 화해하려고 하는 자들이 화해시키는 영예를 그리스도께로부터 빼앗지 않아야 한다.
27. 로마 교회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탈취하며, 양심으로부터 확신을 일소한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일을 고려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의 영광을 완전히 지켜 손상됨이 없도록 하며, 양심이 죄 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을 얻어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시고(사 53:6)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게 하셨다고 한다(사 53:5-6). 베드로는 이 뜻을 다른 말로 반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한다(벧전 2:24). 바울은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음이 되시고 하나님은 그의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고 한다(갈 3:1, 롬 8:3의 융합).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회생 제물이 되시고 그에게 우리의 죄 짐을 죄의 저주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과 죽음의 벌을 모두 지웠을 때에, 그의 육신에서 죄의 세력과 저주는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들의 거짓말이 하나도 없다.
예를 들면, 최초의 정화가 있은 후에 우리는 각각 회개에 의한 보속의 분량에 비례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효력을 느낀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가 타락할 때마다 다만 그리스도가 가르친 보속을 회상하라고 한다.
이제 그들의 어리석고 흉악한 주장들을 눈앞에 놓고 보라. 그들은 처음 죄를 용서받을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만 작용하나, 그 후에 우리가 타락하면 우리의 행위가 함께 작용해서 두 번째 용서를 얻는다고 한다.
이런 원칙들이 성립한다면, 전에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하던 기능은 손상됨 없이 여전히 그의 것으로 남아 있을까?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께 지우며 그를 통하여 보상을 치른다고 하는 것과 우리의 행위로 죄의 보상을 치른다고 하는 것과의 사이에는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의 제물이라는 것과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과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양심을 진정시키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죄는 보속으로도 속해 진다고 들을 때에 양심은 어떤 진정을 얻겠는가? 언제 사람은 보속의 분량에 대한 자신이 생길 것인가?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비하신 지를 항상 의심하며 항상 불안하며 항상 떨 것이다. 사소한 보속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멸시하며 죄의 큰 짐을 경시한다. 이 점은 다른 곳에서 말하겠다. 적당한 보속으로 어떤 죄를 속한다고 인정하더라도, 일 백 평생의 죄를 위한 보속을 바쳐도 부족하리 만큼 많은 죄에 압도될 때에는, 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성경의 말씀이 죄의 용서를 선언할 때에 그 상대는 세례 지망자들이 아니라 교회의 품안에서 오랫동안 양육을 받아 온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중생한 자녀들이다. 바울이 극찬한 사신의 임무, 즉, 나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는 이 말씀은 외부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중생한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보속과 작별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위탁한다. 그가 골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피로…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할 때에(골 1:20) 그는 교회가 우리를 받아들인 순간에 이 일을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통해서 계속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점은 글의 전후 문맥을 보아서 곧 알 수 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구속, 곧 죄 사함을 얻는다고 그는 말한다(골 1:14). 이와 같은 구절들이 자주 나오는데, 그것을 더 많이 인용할 필요는 없다.
(여러 가지 차이점과 반대 의견을 비관적으로 검토함. 28-39)
28. 소죄와 대죄
여기서 그들은 한 도피 수단으로서 어떤 죄는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즉, 소죄로, 어떤 죄는 죽을죄라는 대죄로 어리석은 구별을 한다. 대죄를 위해서는 무거운 보속이 필요하고 소죄는 더 쉬운 수단으로 주기도와 거룩한 물을 뿌리는 것과 미사에서 받는 사면으로 속할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우롱한다. 항상 소죄와 대죄를 말하면서도 마음속의 불경과 불결을 소죄라고 하는 것 외에는 죄의 경중을 분간하지 못한다. 그러나 의와 불의의 표준인 성경의 교훈에 따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겔 18:20), 신자들의 죄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죽을죄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이며(롬 8:1), 죄가 인정되지 않고 용서를 받아 말소되기 때문이다(시 32:1-2 참조).
그들은 우리의 이 주장을 중상모략하여, 죄들의 동등성에 관한 스토아파의 역설이라고 하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입으로 그들을 쉽게 반박할 수 있다. 그들이 대죄라고 하는 죄들 가운데는 비교적 가벼운 것이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나는 묻는다. 그렇다고 해서 대죄들은 동시에 다 같다는 결론이 곧 나오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율법에 대한 순종은 생명의 길이며(레 18:5, 겔 18:9, 20:11,13, 갈 3:12, 롬 10:5, 눅 10:28 참조) 법을 어기는 것은 죽음이라는(롬 6:23, 겔 18:4,20 참조) 정확한 언급이 있으므로 그들은 이 선고를 회피할 수 없다. 죄가 이렇게 많이 쌓여 있는데, 그들은 보속에서 어떤 결과를 얻을 것인가?
한 가지 죄를 보속하는 데 하루가 필요하다면, 이 일을 생각하는 동안에 더 많은 죄를 짓는다. 가장 의로운 사람도 여러 번 넘어지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다(잠 24:16 참조). 죄들을 보속하겠다고 허리띠를 졸라매는 동안에도 많은 죄를 무수히 많은 다른 죄를 짓는다. 이렇게 죄를 보속할 수 있다는 보증이 제거되었는데, 그들은 무엇 때문에 주저하는가? 어떻게 감히 보속을 하겠다고 여전히 생각하는가?
29. 죄의 용서는 벌의 면제가 포함된다
그들이 몸을 빼려고 애쓰나 널리 알려져 있듯이 "물은 떨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죄와 벌을 구별하고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죄책이 용서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의가 요구하는 벌은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보속은 원래 벌을 면제받는 것과 관계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얼마나 경박한 짓인가! 그들은 죄책의 용서는 값없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벗을 위해서는 기도와 눈물과 그 밖의 각종 준비를 해야 된다고 거듭 주장한다. 그러나 죄의 용서에 관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모두 이런 구별과 완전하게 반대된다.
나는 이미 이 점을 충분할 정도로 증명했다고 믿지만, 다른 증언들을 첨부해서 이 꿈틀거리는 뱀들이 다시는 꼬리도 사리지 못하도록 단단히 붙잡으려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시지 않겠다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다(렘 31:31, 34). 이 말씀의 의미를 다른 예언서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에서 배울 수 있다.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고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겔 18:?4),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겔 18:21-22, 27 참조). 그들의 의로운 행실을 기억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은 그들에게 상을 주기 위해서 그 행실들을 마음속에 새겨두는 일은 하시지 않겠다는 뜻과 사실상 같다. 그러므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은 죄에 대한 벌을 요구하시지 않겠다는 뜻이다. 같은 뜻을 표시하는 다른 말씀들도 있다. "등뒤에 던지셨나이다"(사 38:17),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도말 하였으니"(사 44:22),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9),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2). 우리가 이런 말들에 주의한다면, 거기에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설명하시려는 의미가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죄를 벌하신다면 그것을 우리의 책임으로 계산하신다. 벌을 주신다면 죄를 기억하고 계신다. 재판에 붙이신다면 숨기시지 않는다. 죄의 가볍고 중함을 고려하신다면 등뒤로 던지시지 않는다. 검토하신다면 구름같이 쓸어버리시지 않는다. 죄를 드러내신다면 깊은 바다에 던지시지 않는다. 어거스틴도 분명한 말로 이 점을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죄를 덮으셨다면 죄를 보시지 않으려고 하신 것이다. 죄에 주의하고자 하시지 않았다면 벌하지 않으시려고 한 것이다. 죄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무시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면 그분께서는 무엇 때문에 '죄를 덮었다'고 하시는가? 죄가 보이지 않게 만드시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보심은 벌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예언서의 다른 구절에서, 주께서는 어떤 법에 의해서 죄를 용서하시는가를 듣기로 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예레미야서에는 이런 말이 있다. "그날 그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발견치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나의 남긴 자를 사할 것임이니라"(렘 50:20). 이 말씀들의 뜻을 간단히 알아보고 싶은가? 한편으로 주께서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욥 14:17), 불의가 "봉함 되었고"(호13:12), 또 죄를 "금강석 끝 철필로…새겨 졌거늘"(렘 17:1)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라. 이런 어귀들은 벌을 내리시리라는 뜻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주께서 이와 반대되는 말씀들로 모든 벌을 용서하신다고 확언하신 것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나는 독자들이 내가 붙인 설명에 주의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유의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30. 그리스도의 특별 희생만이 벌과 죄책을 제거할 수 있다
나는 만일 우리의 죄에 대한 벌이 여전히 필요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느냐고 묻고자 한다. 그가 나무에 달려 우리의 모든 죄를 그의 몸에 지셨다고 말할 때에(벧전 2:24), 우리는 그가 우리 죄에 해당한 벌을 받으셨다는 의미로 말하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이 점을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사 53:5)라는 더욱 의미심장한 말로 표현하였다. "우리의 평화를 위한 징계"란 것은 하나님과 화해하기 전에 우리가 받았어야 할 벌이 아니고 무엇인가?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죄에 대한 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을 죄에서 구하시기 위하여 죄에 대한 벌을 당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또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이 이루어졌다고 할 때에 그것을 보통 구속(ajpoluvtrwsi")이라는 말로 부른다(롬 3:24, 고전 1:30, 엡 1:7, 골 1:14 참조). 바울은 단순히 보통으로 이해하는 그런 의미의 구속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속하기 위한 대가와 보속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가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속전으로서 자기를 바치셨다고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딤전 2:6). "주님 앞에서 화해란 것은 회생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회생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드리신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어거스틴은 묻는다.
그러나 죄의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서 모세의 율법에 확정된 것이 우선 우리에게 든든한 강력한 무기를 제공한다. 거기서 주께서는 이러 저러한 모양의 배상을 정하시지 않고 제물을 드려 완전한 대가를 치르라고 요구하신다. 그러나 다른 점에서는 모든 속죄의 의식을 극히 자세하게 또 엄격한 순서로 결정하신다(출 30:10, 레 4:1-7, 16, 민 15:22이하). 여호와께서는 전혀 죄에 대한 배상을 행위로 치르라고 명령하시지 않고 속죄의 제물만을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은 그의 심판을 무마하는 한 가지 보속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 백성이 드린 제물은 사람의 행위로 인정되지 않고 그 본질에 따라서, 즉, 그리스도의 특별한 회생에 따라서 판단되었다. 주께서 우리에게 어떤 배상을 요구하시는가를 호세아(Hosea)는 간단하게 웅변적으로 표현하였다.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라고 했으니, 이것은 죄의 용서를 의미한다.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라고 했으니(호 14:2), 이것은 참으로 보속을 의미한다.
그들이 더욱 교묘한 도피 수단을 강구해서 영원한 벌과 일시적 벌을 구별하는 것을 나는 안다. 그들은 일시적 벌을 해석하여 영원한 죽음을 제외한 모든 벌, 즉, 하나님께서 몸이나 영혼에 내리시는 모든 벌이라고 하지만, 이런 제한은 그들에게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인용한 구절들이 명백하게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책을 용서하심으로써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것을 면제하신다는 조건으로 우리를 그의 은혜로 받아들이신다는 것이다. 다윗과 다른 예언자들은 죄의 용서를 빌 때마다 동시에 벌을 제거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참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빌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그들은 주의 자비를 약속할 때에, 거의 항상 벌과 사면에 대해서 가르친다. 바빌론 포로 생활을 종결시키시겠다고 에스겔을 통해서 말씀하실 때에, 주께서는 그것이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하신다(겔 36:22, 32). 이 말씀은 확실히 두 가지를 다 값없이 주신다는 뜻이다. 끝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책을 면하게 된다면 죄책에서 생기는 벌도 반드시 없어질 것이다.
31. 그릇된 해석을 폭로함 : 하나님의 심판에는 형벌적인 것과 교정적인 것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성경에 있는 증언들로 무장하고서 어떤 논거를 제시 하는가를 보기로 하자. 그들은 다윗이 선지자 나단에게 간음과 살인에 대한 책망을 듣고 죄를 용서받았지만, 간음으로 인하여 태어난 아들이 죽음으로써 후에 벌을 받았다(삼하 12:13-14)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죄가 용서된 후에도 받지 않을 수 없는 벌에 대해서 보속으로써 배상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에게 자선사업으로 죄에 대한 배상을 하라고 권하였다(단 4:27). 솔로몬은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라고 기록하였고(잠 16:6), 다른데서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하였다(잠 10:12). 베드로도 이 견해를 인정한다(벧전 4:8). 누가복음에서 주께서는 죄인인 여인에 대해서 같은 뜻으로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눅 7:47)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그들의 판단은 항상 이렇게도 패악하며 완고하다. 하나님의 심판에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그들이 관찰했다면 또 이것은 무시해서는 안 될 일이다. 다윗에 대한 이 책망에 포함된 벌은 보복과는 훨씬 종류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책망하실 때에 사용하시는 징계의 목적을 깨닫기 위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징계가 하나님께서 불경한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을 진노로 추궁하시는 것과는 어떻게 다른가를 알고자 한다. 따라서 우리는 충분한 이유를 근거로 문제 전체를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는 보복의 심판, 또 하나는 징계의 심판이 라고 부르겠다.
보복의 심판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원수들에게 복수하신다. 즉, 그들에게 진노를 발하시며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시며 흩뜨리시며 좌절시키신다. 그러므로 이것은 보복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며 또한 하나님의 진노와 결합된 벌이다.
징계의 심판에서는 하나님의 엄하심은 노여움에 이르지 않으며, 멸망시키려고 벌하시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벌이나 보복이라기보다 교정이나 경고이다.
하나는 재판관의 행동이며, 또 하나는 아버지의 행동이다. 재판관이 악인을 벌할 때에는 그의 범행을 헤아려 범죄 자체에 벌을 가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을 엄격하게 징계할 때에는 복수나 학대하려는 것이 아니고 가르치며 더 조심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크리소스톰은 이와 조금 다른 비유를 사용하지만, 결국 같은 뜻을 말한다. "아들도 채찍으로 맞고 노예도 맞는다. 그러나 노예는 죄에 대한 벌을 받고, 아들은 훈계를 받아야 할 자유인과 아들로서 징계를 받는다. 아들에게는 교정이 시련과 개선이 되며, 노예에게는 응징과 벌이된다.
32. 하나님의 보복의 심판과 징계의 심판은 목적이 전연 다르다
이 문제 전체를 속히 요약하기 위해서 두 가지 차이점 중의 첫째 것을 들겠다. 벌이 보복인 때에는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가 나타나며, 신자들에 대해서는 그런 것을 결코 내리시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징계가 하나님의 축복이며, 그의 사랑을 증거한다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같다(욥 5:17, 잠 3:11-12, 히 12:5-6).
이 구별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통해서 충분히 지적되었다. 불경건한 사람들이 현세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은 이를테면 일종의 지옥의 통로를 우리에게 묘사해 보이며, 거기서 그들은 자기의 영원한 저주를 이미 멀리 바라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생활을 고치거나 유익을 얻는 것이 아니고, 이런 초보적인 경험이 도리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무서운 음부를 위한 준비가 된다.
주께서는 자기의 종들을 엄하게 징계하시지만 죽음에 내어주시지는 않는다(시 118:18). 그러므로 그들은 주의 채찍으로 맞은 것이 자기들에게 유익하였고 자기들의 진정한 교육을 촉진시켰다고 고백한다(시 119:71). 우리가 어디서나 읽을 수 있는 바와 같이, 성도들은 벌을 받을 때에 평온한 마음으로 임했으며, 항상 첫째 종류의 벌을 면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예레미야는 말한다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나로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렘 10:24-25). 그뿐 아니라, 다윗은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라고 한다(시 6:1, 38:2).
그리고 주께서 성도들의 죄를 징계하실 때에 그들에 대해서 노하신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때가 많다는 사실에는 모순이 없다. 이사야서에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그 노가 쉬었고 또 나를 안위하시오니"라고 하는 말씀이 그와 같다(사 12:1). 마찬가지로 하박국에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 3:2), 미가에는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그의 노를 당하려니와"(미 7:9)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정당한 벌을 받는 사람은 큰 소리로 불평을 말해도 무익하고, 신자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함으로써 슬픔을 이길 수 있다고 가르친다. 같은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업을 욕되게 하셨다고(사 47:6, 42:24 참조) 하지만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영원히 욕되게 하시지 않을 것이다. 또 이것은 벌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나 성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엄한 벌을 받는 사람이 느끼는 그 심한 고통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조금만 엄격하게 벌하며 찌르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상처를 입히시므로 그들 자신은 지옥의 벌과 거의 다름이 없는 것같이 느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들이 당연히 그의 진노를 받을 만하며 그래서 그들로서는 자기의 악행을 싫어하며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려고 더욱 조심하게 되어, 간절한 마음으로 속히 용서를 비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증거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에서 진노보다도 자비를 더욱 분명히 증거하신다. 하나님께서 신실한 솔로몬을 통해서 우리와 맺으신 계약은(삼하 7:12-13) 지금도 여전히 효력이 있다.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 이 계약의 효력은 말살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만일 그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치 아니하며 내 율례를 파하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책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시 89:30-3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자비를 더욱 확신하게 하시기 위해서 솔로몬의 후손들을 단련하실 때에는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을 사용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삼하 7:14). 하나님께서는 이런 말씀으로 온화하며 친절한 태도를 보여주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벌을 느끼는 사람들 편에서는 극심한 공포심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암시하신다. 예언서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이 관대한 징계를 중요시하신다는 것을 보이신다.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사 48:10). 은처럼 한다면 너희는 완전히 타버렸을 것이라는 말이다(사 43:2 참조). 주께서는 징계가 주의 백성을 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가르치시지만 백성이 과도하게 지치지 않도록 징계를 완화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대단히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 생활에 전심할수록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더욱 민감해지기 때문이다. 악인도 하나님의 채찍을 맞으면 신음하지만, 그는 이 일을 숙고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더욱 굳어진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하신 하나님께 대해서 불평을 말하며 반항하며 고함을 지르기 때문에, 그들은 격분과 정신 착란으로 마비 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신자들은 하나님의 채찍을 경고로 생각해서 즉시 자기의 죄를 깊이 반성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용서를 간절히 구하게 된다. 가련한 영혼들의 이와 같은 고민과 슬픔을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의 진노의 징조만 보이더라도 백 번이나 기절할 것이다.
33. 보복의 심판은 벌하기 위한 것이며 징계의 심판은 개선하기 위한 것이다
다음에는 둘째 차이점을 보기로 하자. 악인들은 하나님의 채찍을 맞을 때에,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이미 벌을 받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하나짐의 진노의 이런 증거를 무시한다고 해서 벌을 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벌을 받는 것은 바른 정신을 차리게 하시려는 뜻이 아니고, 큰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심판자시며 처벌자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자녀들이 지팡이로 맞는 것은 죄에 대한 벌을 하나님에게서 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회개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이 일들은 과거보다 미래에 관한 것이다. 나는 이 뜻을 내 자신의 말보다 크리소스톰의 말을 빌어 표현하려고 한다. "이렇기 때문에 그는 우리에게 벌을 내리신다. 과거의 죄를 벌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미래의 죄를 예방하기 위하여 우리를 교정시키시려는 것이다." 어거스틴도 "그대들이 받는 고통과 불평하는 일은 벌이 아니고 약이다. 정죄가 아니고 징계이다. 기업에서 배제되기를 원하지 않으면 채찍도 배제하지 말라."고 한다. 또한 "형제들이여, 온 세상이 불행에 신음하고 있으나, 인류의 모든 불행은 처벌 선고가 아니라, 의약에서 오는 고통이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들을 인용하기로 정한 것은 내가 이상한 말을 쓴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이 패악한 마음으로 모든 처벌을 멸시하기 때문에 그들의 배반 행위를 자주 책하시며 분노가 섞인 불만을 말씀하시는 뜻도 여기 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사 1:5-6). 예언서에는 이런 언급이 가득하므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벌하시는 목적이 오직 교회를 겸손하게 만들며 회개시키려는 데 있다는 것을 간단히 밝히면 족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나라를 빼앗았을 때에 그에게 보복의 벌을 내리셨다(삼상 15:23). 다윗의 어린 아들을 빼앗았을 때에(삼하 12:18), 그를 교정하시려고 질책하신 것이다. 바울의 말도 이런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바꿔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 아버지의 손으로 고통을 받는 일이 있지만, 이것은 우리를 궁지에 빠뜨리기 위한 형벌이 아니라, 가르치기 위한 징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어거스틴은 분명히 우리 편을 든다.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똑같이 받는 벌도 여러 가지로 생각해야 된다고 가르친다.
성도들에게는 죄의 용서를 받은 후에 벌이 분투와 노력의 기회가 되며, 악인들에게는 죄의 용서가 없으며 불의에 대한 처벌이 된다. 여기서 그는 다윗과 다른 경건한 사람들이 받은 벌을 열거한 다음에, 이 벌들은 그들의 자만을 꺾으며, 이 경험을 통해서 그들의 경건을 단련 내지 시험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이사야가 유대 백성은 하나님의 손에서 충분히 징계를 받았으므로 그 불의가 용서되었다고(사 40:2) 말한 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것이 벌을 치르는 데 달렸다는 뜻이 아니다. 그의 말을 바꿔 말한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너희는 이미 충분히 벌을 받았다. 그 벌이 무겁고 많았기 때문에 그리고 너희는 이미 오랫동안 슬픔에 지쳤기 때문에, 이제는 완전히 자비를 베푸신다는 기쁜 소식을 들을 때가 되었고, 너희 마음이 기뻐하며 나를 아버지로 느낄 때가 되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자리에 서시며, 그 자식에게 조금 가혹한 벌을 주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비록 그것이 정당하고 엄격한 처사였지만, 후회까지 하신다.
34.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신자는 낙망하지 말라
심한 고통을 받을 때에 신자는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마음을 무장해야 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렘 25:29),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벧전 4:17).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느끼는 심한 고통이 보복이라고 믿는다면, 그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의 손에 맞아 그를 처벌하는 자를 심판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의 진노와 적의로 밖에 볼 수 없으며, 하나님의 채찍을 저주와 영원한 정죄라고 해서 미워할 수밖에 없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은 아직도 자기를 벌하실 생각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채찍을 받아 결국 유익을 얻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에 대해 노하시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자비하시며 인자하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면 예언자가 자기의 경험에 대해서 불평을 말하는 것과 같은 일이 생길 것이다.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렵게 하심이 나를 끊었나이다"(시 88:16). 또 모세가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라고(시 90:7-9) 한 것과 같은 말을 하게 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다윗은 신자가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징계에 의해서 압박보다 도움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징계에 대한 노래를 부른다. "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에 벗어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시 94:12-13). 참으로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을 아끼시며 그들의 범죄를 무시하시면서, 자기 백성에게는 더욱 엄격하신 듯할 때에, 그것은 어려운 시련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위로를 받아야 할 이유를 첨부한다. 즉, 율법으로 훈계를 받는다고 한다. 이 훈계에 의해서 신자들이 바른 길로 돌아갈 때에는 그들의 구원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불경건한 자들이 제멋대로 과오에 돌입하는 결과는 지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고 한다. 그 벌이 영원한 것인지 또는 현세적인 것인지는 문제가 아니다.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과 질병이 악인들에 대한 주의 진노와 보복의 수단으로서 주어지게 될 때에는 영원한 죽음의 심판 자체에 못지않은 하나님의 저주이다.
35. 다윗이 받은 벌
하나님께서 다윗을 벌하신 목적을 이제 모든 사람이 다 안다고 나는 믿는다. 즉, 살인과 간음을 하나님이 노하신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하시는 충실한 종이 이런 죄를 지은 것에 대해 대단히 노하신다고 선언하심으로써 다윗이 감히 다시는 이런 범죄를 하지 못하도록 가르치고자 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에게 어떤 배상을 하도록 하기 위한 벌이 아니었다. 주께서 한 교정책으로서 무서운 전염병을 그의 백성에게 보내신 것도(삼하 24:15) 이렇게 보아야 한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인구 조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책을 거저 용서하셨지만, 이런 죄를 벌하는 것이 모든 시대에 본을 보이며 다윗의 교만을 깨기 위하여 합당한 처사라고 보셔서, 다윗을 채찍으로 심히 냉혹하게 징계 하셨다.
인류의 보편적인 저주에 대해서도(창 3:16-19 참조) 이러한 목적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가 은혜를 받은 후에도 우리의 처음 조상이 죄에 대한 벌로서 받게 된 그 모든 고통을 당할 때에, 우리는 이런 시련에 의해서 경고를 받는 것으로, 즉, 하나님께서 그의 법을 어기는 우리의 죄에 대해 얼마나 심히 노하시는가 하는 경고를 받는 것으로 느낀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가련한 처지를 생각하고 낙심하며 겸손하게 되어, 더욱 간절히 진정한 행복을 구한다. 현세에서 당하는 재난이 우리의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연 어리석은 짓이다. 크리소스톰도 이런 뜻으로 기록했다고 나는 본다.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는 목적이 악행을 계속하는 자들을 회개시키는데 있다면, 회개한 후에는 벌이 이미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성질에 따라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대로 어떤 사람은 더 엄하게 다루시고 어떤 사람은 더 친절하고 관대하게 다루신다. 따라서 얻어맞고도 죄를 그치지 않는 백성에 대해서는 그 굳고 완고한 마음을 책망하셔서(렘 5:3), 자기가 내리는 벌은 가혹하지 않다는 것을 알리려 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에브라임은 한쪽은 익고 한쪽은 익지 않은 번병과 같다고 책하신다(호 7:8). 교정이 그들의 마음속에까지 미치지 못했으므로 그 죄를 익혀내어 용서를 받을 수 있게 만드시겠다는 뜻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은 누구든지 회개하기만 하면 곧 관대하게 대하시리란 것을 보이신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엄격하게 징계하시는 것은 우리의 완고한 태도가 그에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우리가 자진해서 고치면 그 엄격한 처사는 없어질 것이지만 우리는 모두 마음이 굳고 무지하여 징계가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의 지극히 현명하신 아버지께서는 모든 사람을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한 공통된 채찍으로 일평생 훈련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보셨다.
그러나 그들이 다윗의 예만 보고 많은 다른 예에 대해서는 아무 감동도 느끼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값없이 죄의 용서를 받은 것을 그들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세리가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성전에서 내려갔다는 말씀이 성경에 있다(눅 18:14). 거기는 아무 벌도 따르지 않았다. 베드로도 용서받았다(눅 22:61). 암브로시구스가 말한 것과 같이, 그가 울었다는 말씀은 있어도 속죄물을 바쳤다는 말씀은 없다. 중풍병자는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으나(마 9:2) 벌은 받지 않았다. 성경에 기록된 사면은 모두 값없이 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법칙은 특별한 양상을 가진 한 가지 예에서 취할 것이 아니라 빈번히 나타나는 이런 예들에서 찾아야 한다.
36. 벌에 대한 보속으로서의 선행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간하여 공의를 행함으로써 죄를 속하고 빈민을 긍휼히 여김으로써 죄악을 속하도록 설득했을 때에(단 4:27), 그는 그 공의와 긍휼을 하나님께 대한 화해의 제물과 벌에 대한 배상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피 이외에 다른 몸값이 있다는 생각을 일체 버리라! 다니엘이 "속하라고" 한 것은 하나님에 관한 말이 아니고 사람에 관한 말이다. 그의 뜻을 바꿔 말한다면 "오 왕이여, 당신은 지금까지 부정을 하였으며 포악한 지배를 했으며, 낮은 사람들을 압박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강탈했으며, 백성을 가혹하고 부당하게 다루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불법 징수와 포악과 압박을 제거하고, 그 대신에 긍휼과 공의를 행하십시오."라는 것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솔로몬은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한다(잠 10:12).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이 절을 전부 인용한다면,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는 것이다(잠 10:12). 대조법을 상용한 그는 여기서도 미움에서 생기는 악한 일들과 사랑에서 생기는 결과들을 대조시킨다. 그의 뜻은,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은 서로 물고 빼앗고 비난하고 손해를 입히고 매사에 트집을 잡지만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많은 일을 숨겨주며 보지 않는 체하며 용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 허물을 옳게 본다는 뜻이 아니라 관대하게 보며 비난으로 악화시키지 않고 충고로 고쳐준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이 말씀을 인용하는 취지도 확실히 여기 있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 말씀의 품위를 저하시키며 뜻을 간교하게 곡해한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벧전 4:8 참조).
솔로몬이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라고 가르친 것은(잠 16:6), 하나님 앞에서 죄 값을 치른다든지, 또는 하나님께서 이런 보속으로 화해하시고 내리시려고 하던 벌을 용서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도리어 우리가 잘 아는 성경의 정신으로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죄악을 버리고 경건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에 대해서 자비를 베푸시리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죄가 그칠 때에 주의 진노도 진정되며 심판도 그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솔로몬은 용서의 원인을 묘사하는 것이 아치고 진정한 회심의 수단을 묘사한다. 하나님께서는 정직과 사랑의 실천을 기뻐하시는데, 위선자들은 회개하지 않고 아우 소용도 없는 거짓된 예식을 하나님 앞에서 강행하는 것을 예언자들이 자주 비난하는 것과 같다. 히브리서의 저자도 같은 식으로 친절과 인정을 찬양하여 이런 제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생각하게 한다(히 13:16). 그리스도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접시를 깨끗하게 하는 데만 유의하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일을 무시하는 것을 비웃으시며, 구제를 함으로써 모든 것을 순결하게 만들라고 가르치셨을 때에(눅 11:3941, 마 23:25 참조), 속죄를 하라고 역설하시는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오히려 주께서는 어떤 종류의 순결을 하나님께서 옳게 보시는가를 가르치고자 하신다. 우리는 이 말씀을 다른 곳에서도 논하였다.
37. 죄인이었던 여인
누가복음에 있는 구절에 관해서는(눅 7:36-50), 주께서 제시하신 비유를 건전한 정신으로 읽는 사람이라면, 여기 대해서 우리에게 싸움을 걸지 않을 것이다. 바리새인은 주께서 그 여인을 선뜻 용인하셨으나 누구인지는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어떤 죄인인지를 알았다면 용납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렇게까지 속는 그리스도는 예언자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주께서는 자신이 용서해주신 그 여인이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빚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이러므로…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눅 7:41-47). 이 말씀은 그 여인의 사랑이 사죄의 원인이 아니고 증거라고 하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은 오백 데나리온을 탕감받은 사람과 비교한 것이다. 그 사람이 탕감받은 것은 많이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많이 사랑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이 비교는 다음과 같이 적용 되어야한다. 즉, 너는 이 여인이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죄가 용서를 받았으니, 지금은 죄인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죄의 용서를 받고 그 고마움을 표시하는 저 여인의 사랑을 보고서 너는 당연히 그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귀납법인 증명, 즉, 결과적인 증거에 의해서 어떤 일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주께서는 그 여인이 어떻게 용서를 얻었는가에 대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분명히 증거하셨다(눅 7:50).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용서를 받는다. 그리고 사랑으로 주의 인자하심을 감사하며 증거한다.
38. 천주교회 교리는 교부들의 권위를 근거로 삼을 수 없다
고대 저술가들의 책에 널리 나타나 있는 보속설은 나의 생각을 움직이지 못한다. 사실 그 중의 어떤 사람들은 저술이 현재 남아있는 사람들은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으리만큼 이 점에서 타락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너무 날카롭고 귀에 거슬리는 말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새로운 보속설 변호론파들이 생각하는 것 같은 의미에서 글을 쓸 정도로 야만적이고 무지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기록했다. "자비를 간청하는 데서는 조사가 그친다. 자비를 탄원하는 곳에서는 심판이 진정된다. 자비를 구하는 곳에서는 벌은 용납되지 않는다. 자비가 있는 곳에는 심사가 없으며, 자비가 있는 곳에서 받는 대답은 용서된다." 이런 말은 아무리 곡해된다 해도 스콜라 학자들의 주장과는 결코 부합될 수 없다. 어거스틴이 저술한 교회의 교리(The Dogmas of the church)라는 책에는 이런 말이 있다. "회개를 통한 보속은 죄의 원인을 끊어버리며 그 원인들의 시사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 말을 보면 지은 죄에 대해서 갚는 것이 보속이라고 하는 주장은 고대에도 일반적으로 조소를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들이 그때에 보속을 후에 조심해서 죄를 짓지 않는 것과 항상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크리소스톰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앞에서 울면서 죄를 고백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시지 않는다고 한 말을 나는 인용하지 않겠다. 이런 말은 그의 글과 다른 사람들의 글에 빈번히 나오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어디선가 자선 사업은 "죄를 용서받는 방법"이라고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런 말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그는 다른 곳에서 이 항의에 대답한다. "그리스도의 육신은 우리의 죄를 위한 유일하고 진정한 회생이다. 세례에서 완전히 소멸된 죄뿐 아니라, 그 후에 우리의 약점을 통해서 잠입하는 죄까지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온 교회는 매일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호소한다(마 6:12). 그리고 저 유일한 회생을 통해서 죄는 용서된다."
39. 스콜라 학자들은 교부들의 교훈을 부패시킨다
그런데 그들은 대개 보속을 하나님에게 치르는 보상이라고 하지 않고 파문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다시 교회에 들어오고자 할 때에 행하는 일반적 증언이며 그 증언에 의해서 자기들의 회개를 교회에 확증하는 것이라고 했다. 고대에는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모종의 탄식과 그 밖의 의무를 지워서, 참으로 진심으로 이전 생활을 미워한다는 것을, 또 이전 행동을 완전히 잊어버리고자 한다는 것을증명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에게 대해서가 아니라, 교회에 대해서 보속을 치렀다고 했다. 어거스틴은 편람(便覽, Enchiridion)에서 라우렌티우스(Lauremtius)에게 이 점을 바로 이런 말로 표현했다. 이와 같은 고대 의식이 현재 사용되는 고백과 보속의 근원이다. 이 훌륭한 형식의 그림자도 남지 못하게 한 무리는 참으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겠다(마 3:7, 12:34 참조).
어떤 고대 저술가들이 때로 다소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한 것을 나는 안다. 또 내가 이미 말한 것과 같이 그들이 잘못한 것 같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몇 군데 오점이 있는 그들의 글을 이 사람들이 불결한 손으로 만질 때에는 전부가 더러워지고 만다. 또 교부들의 권위에 의해서 논쟁해야 된다면, 그들이 내세우는 것은 어떤 교부들인가? 그들의 지도자인 롬바르드가 그의 편찬을 만들기 위해서 인용한 저술가들의 대부분의 저술은 수도승들의 무의미한 광적인 발언을 모은 것이고 이런 발언들이 암브로시우스, 제롬, 어거스틴, 크리소스톰 등의 이름으로 유포되어 왔다. 지금 우리가 논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의 증거의 거의 전부를 어거스틴의 책 회개에 대하여(On Repentance)에서 취했다. 이것은 어떤 열광적인 문필가가 필자의 우열을 묻지 않고 되는대로 끌어 모아 서툴게 꿰매어 놓은 것이다. 저자를 어거스틴이라고 하지만, 다소의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그의 저술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스콜라 학자들의 미련한 행위를 명백하게 검토하지 않는 것을 독자들은 양해하기 바란다. 나는 독자의 짐을 덜고자 한다. 그들이 지금까지 신비스러운 비밀이라고 자랑한 것을 폭로해서 웃음거리로 만들며 그들에게 수치를 주는 것은 내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며 또 칭찬할 만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건설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므로 그냥 지나가겠다.
기독교강요 : 3권. 6장 (0) | 2017.06.01 |
---|---|
기독교강요 : 3권. 5장 (0) | 2017.06.01 |
기독교강요 : 3권. 3장 (0) | 2017.06.01 |
기독교강요 : 3권. 2장 (0) | 2017.06.01 |
기독교강요 : 3권. 1장 (0) | 2017.06.01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