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믿음에 의한 우리의 중생 : 회개
(믿음의 결과는 회개이다. 이 점에 관한 몇 가지 오류를 논평함. 1-4)
1. 믿음의 결과로서의 회개
믿음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소유하는가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어떻게 그의 은혜를 받아 즐기는가를 우리는 부분적으로 가르쳤을 지라도, 우리가 느끼는 결과에 대해서 설명을 첨가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주장은 여전히 분명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회개와 죄의 용서가 복음의 전체라고 하는 데는(눅 24:47, 행 5:31)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믿음에 대한 논의가 이 두 가지 논제를 누락시킨다면, 아무런 효과가 없고 불완전하며 거의 쓸모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회개와 죄의 용서는 곧 새로운 생활과 거저 얻는 화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며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그것을 얻는다. 따라서 이치로 보나 가르치는 순서로 보나 여기서 이 두 가지를 다 논해야 된다. 그러나 우리가 곧 할 일은 믿음에서 회개로 변이되는 것이다. 이 제목을 올바르게 이해하면, 사람이 믿음으로만 그리고 단순히 용서에 의해서만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경우가 더욱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실제생활은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일에서 분리될 수 없다. 그런데 회개가 항상 믿음을 따를 뿐 아니라 또한 믿음에서 생긴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복음을 전하여 죄가 용서됨을 알리는 목적은 죄인들이 사탄의 압박과 죄의 멍에와 타락한 생활의 속박에서 풀려 하나님 나라로 옮겨가게 하려는 것이므로 이 복음의 은혜를 받아들인 사람은 반드시 과거 생활의 과오를 버리고 바른 길로 돌아서며 회개를 실천하는데 전력을 다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믿음보다 회개가 선행한다고 하며, 회개가 믿음을 따르거나, 나무의 열매같이 믿음에서 생긴다는 것을 부정한다. 이런 사람들은 회개의 능력을 깨달은 일이 없고 사소한 이유로 이런 생각을 한다.
2. 회개의 근거는 복음에 있으며, 믿음은 복음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와 요한이 전도할 때에 먼저 백성에게 회개하라고 역설하고 다음에 천국이 가깝다는 것을 첨부하였으며(마 3:2, 4:17), 사도들이 받은 전도 명령의 내용도 똑 같았다고 누가가 전하는 바와 같이(행 20:21) 바울도 이런 순서를 따랐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글자의 순서를 미신적으로 고집하면서 그 말들을 함께 연결하는 의미를 무시한다. 주 그리스도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고 전도할 때에 그들은 은혜 자체와 구원의 약속에서 회개에 대한 이유를 이끌어 내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그들의 말은 "하늘나라가 가까왔으므로 회개하라."는 것과 똑같은 뜻이다.
마태는 요한이 전도한 말을 전한 다음에 이사야의 예언이 그에게서 성취된 것이라고 하며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한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마 3:3, 사 40:3). 그러나 예언서에서는 그 소리가 우선 위로의 말과 기쁜 소식으로 시작할 것을 명령한다(사 40:1-2). 그렇지만 회개의 근원이 믿음에 있다고 할 때에, 우리는 회개를 하게 만들기까지에 어떤 시간의 공간적 사이가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뜻은 자기가 하나님의 것임을 알지 못하면 사람은 진심으로 회개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려는데 있다. 그러나 우선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는 자기가 하나님의 것임을 참으로 믿을 수도 없다. 이런 문제는 앞으로 더 명백하게 논하겠다. 은혜를 깊이 알게 되기 전에, 또는 은혜를 맛보기도 전에, 양심의 가책에 눌리게 되거나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고 속은 사람들도 혹 있을 것이다. 또 이 시초의 공포심을 어떤 사람들은 미덕으로 인정한다.
이는 그것이 진정하고 올바른 복종에 가깝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끄시는가 또는 경건 생활을 위하여 그들을 준비시키시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성령이 지배하시지 않는 곳에 올바른 생활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할 뿐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받으셔서 그의 지체들에게 전달하는 그 영이 지배하셔야 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라는 시편의 말씀과 같이(시 130:4),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호의를 가지셨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고 나는 말한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복종을 기뻐하신다고 믿지 않으면, 아무도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죄를 관대히 용서해 주시는 이 자비심이야말로 아버지 같은 하나님의 호의를 알리는 표지이다.
호세아의 권고는 이 점을 알려준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용서를 받으리라는 소망을 비극의 수단으로 덧 붙여서, 사람들이 죄 가운데 편안하게 자리 잡아서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회개로부터 시작하려는 자들의 미친 짓에는 하등의 이유도 없다. 그들은 새로 개심한 사람들에게 며칠 동안 참회하라고 명령하고 이 기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그들이 복음의 은혜에 참가하는 것을 허락한다. 이런 사람들이 재세례파에 대단히 많고 특히 영적이라는 세상사람들의 말을 굉장히 기뻐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그들의 동반자인 예수회 회원들과 그들과 비슷하다는 사람들도 그렇다. 분명히 그들은 경박한 생각으로 회개를 겨우 며칠 동안으로 제한하나 그리스도인은 일평생 회개를 계속해야 한다.
3. 죽임과 살림
그러나 회개에 대해서 잘 아는 어떤 사람들이 훨씬 전에 성경의 표준에 따라 단순하고 진지하게 말한 것이 있다. 그들은 회개는 죽임(mortification)과 살림(vivification)의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고 하였다. "죽임"에 대해서 그들은 죄를 인식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된 영혼이 슬퍼하며 무서워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누구든지 죄를 진정으로 알게 된 때에는 죄를 미워하기 시작하며, 다음에 진정으로 자신을 싫어하며, 자신이 가련한 자, 멸망할 자인 것을 인정하며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그뿐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되면(여기서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으므로), 그는 심리적으로 큰 충격과 타격을 받게 된다. 교만이 꺾이고 낙담하여 떨며 용기를 잃고 절망 상태에 빠진다. 이것이 회개의 시초요 보통 이것을 "통회"(contrition)라고 부른다. "살림"은 믿음에서 생기는 위안이라고 해석된다. 바꿔 말하자면 죄의식으로 좌절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에 싸였던 사람이 후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고, 즉, 그리스도를 통한 그의 자비와 은혜와 구원을 깨닫고 일어나며 정신을 차리며 용기를 회복하고, 말하자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그런데 "죽임"과 "살림"이라는 말을 바르게 해석한다면 회개의 힘을 충분히 설명한다. 그러나 "살림"을 기쁨(laetitia)이라고 혼란과 공포에 빠졌던 마음이 진정된 후에 받는 행복감이라고 해석한다면,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살림"이라고 한 부분은 거룩하고 헌신적으로 살겠다는 소원을, 곧 중생에서 생기는 소원을 의미한다. 마치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서 살기 시작하고 자기에게 대해서는 죽는다고 하는 것과 같다.
4. 율법하의 회개와 복음하의 회개
다른 사람들은 회개란 말의 뜻이 성경에서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회개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몇 가지 특징으로 그것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하나는 "율법의 회개"라고 부른다. 죄인은 이 회개에 의해서 죄의 가책으로 상처를 받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여 떨며 그 불안한 상태에 붙잡힌 채 빠져나오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복음의 회개"라고 한다. 이 회개에 의해서 죄인은 큰 고통을 받지만 고통을 이기고 일어서며,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자기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약과 공포심에 대한 위로와 불행에 대한 피난처로 삼는다. "율법의 회개"에 대한 실례로서 그들은 가인과(창 4:13), 사울과(삼상 15:30), 유다를(마 27:4) 든다. 이 사람들의 회개에 대한 성경의 기사를 보면, 이들은 자기들의 죄가 중대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했지만, 하나님을 처벌자와 심판자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 생각에 압도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생에서 이미 지옥에 들어간 사람, 하나님의 존엄하신 진노 앞에 벌을 받기 시작한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회개는 지옥으로 향하는 관문에 지나지 않았다. "복음의 회개"의 예는 죄의 가시에 찔려 통증을 느끼면서도 하나님의 자비를 믿고 생기를 얻어 다시 일어나 주께로 돌아선 사람들이다. 히스기야는 죽으리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에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그는 울면서 기도했으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고 확신을 얻었다(왕하 20:2, 사 38:2). 니느웨(Ninevetes) 사람들은 멸망하리라는 무서운 위협을 듣고 마음이 괴로웠지만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아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그 무서운 진노를 그치시고 자기들 쪽으로 돌아서시기를 바라고 기다렸다(욘 3:5,9). 다윗은 인구 조사를 한 것이 큰 죄였다고 고백하고 이어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삼하 24:10). 나단(Nathan)의 책망을 듣고 다윗은 자기의 간음죄를 인정하고 주의 앞에 엎드렸고, 또한 용서를 기다렸다(삼하 12:13,16).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린 사람들의 회개도 이런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이렇게 물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베드로 자신의 회개도 이런 것이었다. 그는 몹시 울었으나(마 26:75, 눅 22:62), 소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회개를 정의함 : 그 요소들인 육의 죽임과 영을 살림을 설명함. 5-9)
5. 정의
이런 이야기는 다 사실일지라도, 내가 성경에서 배울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보면, "회개"란 말의 뜻은 이와 다르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음을 회개에 포함시키는 것은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하는 말과 일치하지 않는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행 20:21). 여기서 그는 회개와 믿음을 서로 다른 것으로 여긴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진정한 회개는 믿음을 떠나서 이루어질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그러나 서로 분리할 수는 없을지라도 구별은 해야 한다. 믿음 안에 소망이 없는 것이 아니나 믿음과 소망이 서로 다른 것과 같이, 회개와 믿음도 영구적인 줄로 묶여 있지만, 서로 결합할 필요는 있어도 혼동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향한 회심을 전체적으로 "회개"란 말로 이해하며, 믿음이 이 회심의 중요 부분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하는지는 회개의 능력과 본질을 설명하면 곧 밝혀질 것이다. "회개"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은 전환 또는 귀환이라는 뜻에서 왔다. 헬라말은 마음 또는 의도를 바꾼다는 뜻에서 왔다. 그리고 내용도 이 두 가지 어원에 밀접히 대응된다. 그 뜻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떠나서 하나님께로 향하며, 우리의 이전의 마음을 벗어버리고 새 마음을 입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회개의 좋은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다. 곧 회개는 우리의 생활을 하나님 쪽으로 전향하는 일이며, 그를 순수하게 또 진지하게 두려워하기 때문에 생기는 전향이다. 그리고 회개의 요소는 옛 사람과 육을 죽이는 것과 성령에 의한 삶으로서 성립된다.
옛날 예언자들과 그 후의 사도들이 당시 사람들에게 권고하며 설교한 회개의 뜻을 우리는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 설교자들이 얻으려고 노력한 것은 한 가지 뿐이었다. 자기들의 죄를 알고 당황하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가슴을 찔린 사람들이, 자기들이 노여우시게 한 분 앞에 꿇어 엎드려 겸손한 태도를 가지며, 진정한 회개로 바른 길에 다시 들어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주께로 돌아서라 또는 돌아가라", "바른 정신을 차리라", 또는 "회개하라"(마 3:2)등의 말은 같은 뜻으로 서로 바꿔 쓰인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역사를 보면, 하나님을 무시하고 정욕대로 방종하게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시작하며, 그들의 지도자가 부르는 곳으로 언제든지 갈 생각을 하게 됐을 때에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회개"했다고 한다(삼상 7:2 참조). 또 요한과 바울은 모든 행동에서 이런 회개를 보이며 증거하는 생활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한다(눅 3:8, 행 26:20, 롬 6:4 참조).
6.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
그러나 더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우리가 결론한 정의를 좀더 분명히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우리는 회개를 세 가지 제목으로 나누어 검토해야 한다. 첫째로, 회개는 "하나님께로 생활을 전향하는 것"이라고 할 때에, 그것은 외면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영혼 자체가 변모할 것을 요구한다. 영혼은 그 옛 성질을 벗어버려야만 비로소 새로운 갱신과 조화되는 행위를 낳을 수 있다. 이 변화를 표현하고자 선지자는 회개하라고 권하는 사람들에게 새 믿음을 가지라고 한다(겔 18:31). 그러므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올바르게 돌아갈 수 있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라."고 자주 가르친다(신 6:5, 10:12, 30:2, 6, 10). 이 말은 예언서에서 자주 반복되었다(렘 24:7). 또 모세는 회개를 "마음의 할례"라고 불러서 가장 깊은 감정까지 검토한다(신 10:16, 30:6).
그러나 회개의 진상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예레미야 4장에 있는 말씀이다.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 오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렘 4:1, 3-4) 여기서 그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가장 깊은 마음속에서 사악한 생각을 때어버리지 않으면, 의를 행하려 하여도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리라고 주께서 단정하시는 것을 보라. 또 그들의 마음을 철저히 움직이시려고 그들이 대하고 있는 분은 술책이 통하지 않는 하나님이시란 것을 경고하신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두 마음을 가지는 것을 미워하시기 때문이다(약 1:8 참조). 그러므로 위선자들이 여러 가지 의식으로 가시적으로는 회개하는 척하면서 자기들이 압박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불법의 무거운 짐을 풀어 주려고 하지 않는 그 서투른 노력을 이사야는 야유한다(사 58:6). 거기서 그는 또 어떤 의무를 다하면 진지하고 올바른 회개가 되는가를 훌륭하게 밝혀 준다.
7. 회개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에 생긴다
둘째로, 우리는 회개는 하나님을 진지하게 두려워하는데서 생긴다고 말했다. 이는 죄인의 마음이 회개를 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고 정신을 차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심판대에 오르셔서 모든 말과 행동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시는 날이 오리라는 잘못된 생각이 마음속 깊이 철저하게 박힐 때에, 가련한 죄인은 일순간도 평안하지 못하고 심지어 호흡까지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며, 생각하는 것은 오직 어떻게 생활 방식을 고쳐야 심판대 앞에 떳떳이 설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회개를 전할 때에는 심판에 관해서 언급하는 때가 많다. 예레미야의 예언서에는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느니라."고 하는 말씀이 있다(렘 4:4). 바울이 아덴 사람들을 책망할 때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라고 하였다(행 17:30-31). 그밖에도 여러 구절이 있다.
성경은 간혹 과거에 받은 벌을 가리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만일 죄인들이 속히 회개하지 않으면 더 큰벌이 내릴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하려는 것이다. 신명기 29장(19절 이하)에 이런 예가 있다. 죄를 무서워하는 것과 죄를 미워하는 생각이 회심의 시초가 되기 때문에, 사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회개의 원인이라고 한다(고후 7:10). 우리가 벌을 싫어할 뿐 아니라 죄 자체를 미워할 때에,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이라고 부른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를 싫어하시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당연한 생각이다. 우리가 날카롭게 찔리지 않으면, 우리의 육의 태만은 고쳐지지 않는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지팡이로 더 깊이 찌르지 않으셨다면 이러한 찔림은 목석같이 둔한 우리의 육에 아무런 효과가 없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쇠망치로 때려눕히듯 해야 되는 고집도 있다. 우리의 본성이 부패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협하실 때에 더욱 엄격하게 하지 않으실 수가 없다. 잠든 자들을 조용하게 달래는 것은 효과가 없을 것이다. 이에 관해서 우리가 성경에서 자주 알게 되는 말씀들을 나는 열거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회개의 시작이 되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사람의 생활이 모든 덕으로 가득 찼다고 하더라도 만일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다면, 그런 생활은 세상의 칭찬은 받겠지만 하늘에서는 가증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에게 그의 권리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지배하에 복종하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리와 영광을 도적질하는 불경 행위이기 때문이다.
8. 죽임과 살림은 회개의 구성 부분이다
셋째로, 회개는 육을 죽이고 영을 살린다는 두 부분으로 성립된다는 말을 설명해야겠다. 이점에 대한 선지자들의 말은 육적인 사람들의 받아들이는 능력에 맞도록 단순하고 무뚝뚝하지만, 그 뜻은 분명하다. 그들은 "행악을 그치고 선을 행하라"고 한다(시 37:3, 8, 27의 융합). 마찬가지로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사 1:16-17)라고 하였다. 그들이 사람들을 향하여 악을 떠나라고 호소할 때 요구하는 것은 악과 패역함이 가득한 육을 전멸시키라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벗어버리며 우리가 타고난 성질에서 떠난다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다. 또 우리 자신에서 나온 것을 무엇이든지 일소하지 않으면, 우리의 육을 완전히 말살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육의 감정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므로(롬 8:7 참조),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첫걸음은 우리의 본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선지자들은 변화된 상태를 회개의 열매 곧 의와 공의와 자비라고 부른다. 마음이 의와 공의와 자비로 완전히 기울어지지 않으면 이런 의무들을 때때로 이행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거룩하신 성령이 우리의 영혼을 감화시키시며, 우리의 영혼이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감정으로 그의 거룩함에 깊이 잠길 때 우리의 영혼이 참으로 새로워졌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우리는 본래 하나님을 등지고 돌아서 있으므로 자기 부정이 선행되지 않으면 결코 바른 길에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주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세상과 육을 포기하며 우리의 악한 욕심과 작별하고 심령으로 새로워지라는 명령을 받는다(엡 4:22-23). 참으로 "죽임"이란 말 자체가 우리의 이전 성질을 잊어버리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우리에게 경고한다. "죽임"이라고 했으니, 우리는 만일 하나님의 검이 우리를 쳐 죽이시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경건 생활의 초보를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의 자녀 가운데 들어가려면 우리에게 공통된 본성이 죽어야 한다고 선언하시는 것과 같다.
9.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남
이 두 가지 일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동참할 때에 이루어진다. 이는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다면,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롬 6:6) 부패한 본성이 마음대로 힘을 쓸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의 부활에 참가한다면 우리는 그 부활의 힘으로 부활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으며 하나님의 의에 감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회개를 한 마디로 중생이라고 해석하는데 회개의 유일한 목적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일그러지고 거의 말살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회복시키는 것이다. 사도가 가르친 것도 바로 이것이다. 곧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했으며 같은 뜻으로 다른 구절에서는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3, 24),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형상을 쫓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 참조)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입은 중생에 의해서 아담 때문에 잃었던 하나님의 의를 회복하게 된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생명의 기업을 받도록 양자로 삼으신 모든 사람을 완전히 회복시키기를 기뻐하신다. 그리고 이 회복은 한순간이나 하루나 한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평생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어떤 때에는 느린 걸음으로, 선택받은 사람들 속에서 육의 부패를 씻어버리며, 그들의 죄책을 깨끗이 없애며, 그들을 성전으로 주께 바치게 하신다. 그리고 그들의 온 마음을 새롭게 하여 진정한 순결에 이르게 하시며, 그들이 평생을 통하여 회개를 실천하며 이 싸움은 죽음이 와야만 끝난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바울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을(고후 4:4) "의와 진리의 거룩함"이라고(엡 4:24 참조) 해석하는 것을 공격하여 이것은 현세 생활의 상태와 하늘 영광을 혼동하는 것이라고 떠들어대는 논쟁가이며 배반자인 스타필루스(Staphylus)의 패역은 더욱 극심한 것이다. 그의 태도는 마치 우리가 어떤 일을 정의할 때에 그 완전무결한 상태를 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성장의 여지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에 가까워질수록 하나님의 형상은 그의 안에서 더욱 빛난다. 신자들이 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회개의 경주를 하게 하시며, 평생을 두고 달리도록 하신다.
(신자들은 성화를 체험하지만 현세 생활에서는 죄 없는 완전성을 체험하지 못한다. 10-15)
10. 신자들은 여전히 죄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와 같이 중생을 통해서 죄의 결박에서 풀려난다. 그러나 그들은 육의 괴롭힘을 전혀 느끼지 않으리만큼 완전한 자유를 소유하게 된 것은 아니다. 그들 안에는 싸워야 할 요소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훈련이 계속된다. 그들은 훈련을 받을 뿐 아니라, 자기의 무력을 더욱 깨닫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의 일치된 의견은 중생한 사람 안에는 악을 촉발시키는 불씨가 남아 있어서 끊임없이 정욕의 불길이 튀어나와서 죄를 짓게 되며 자극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 성도들이 육욕(concupiscence)의 병에 잡혀 있어서 가끔 정욕이나 탐욕이나 야심이나 그 밖의 죄악을 저지르도록 하는 충동이나 자극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고대 저술가들의 생각을 많이 연구할 필요도 없이 어거스틴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의 의견을 부지런히 충실하게 수집했기 때문에 독자들이 고대인들의 의견에 관해서 확실히 알고 싶으면 그에게서 얻기를 바란다.
그러나 어거스틴과 우리 사이에는 의견의 차이가 있다. 어거스틴은 신자들이 죽을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육욕에 매여 있기 때문에 육욕을 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 병을 "죄"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연약"이란 말로 부르는 것으로 만족하고 이 "연약"함을 느끼는 일이나 그에 대한 불안 때문에 어떤 행동이나 동의가 이어질 때, 즉, 처음으로 나타난 강력한 경향에 의지가 굴복할 때에 한해서 그것이 죄가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법에 반대되는 욕망의 충동을 느끼기만 해도 그것을 죄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 안에 이런 종류의 욕망이 생기게 하는 패악성 자체를 "죄"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들이 죽을 몸을 벗어버리기까지 항상 그들 안에 죄가 있다고 가르친다. 이는 그들의 육 속에 의와 싸우는 패악성, 곧 육욕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또 어거스틴이 "죄"라는 말을 항상 피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그는 이렇게 말한다. "바울는 모든 죄들이 어떤 원천을 통해서 육적인 욕망 속에 나타나게 되는데 바로 그 원천을 '죄'라고 부른다. 성도들에게 관한 한, 죄는 땅에서 지배력을 잃고 하늘에서 소멸된다." 이런 말로 그는 신자들이 육의 욕망에 굴하는 동안은 죄를 짓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11. 신자들 속에서 죄는 지배력을 잃었으나 여전히 살아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약속하시며, 선택하신 사람들에게 그 구원을 실현하심으로써 교회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한다(엡 5:26-27). 우리는 이 말씀이 죄의 본체보다도 죄의 행실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중생시킴으로써 이 일을 참으로 실현하시며, 그래서 죄의 지배는 소멸된다.
이는 신자들이 성령의 주시는 힘을 받아 죄에 대하여 우세하게 되며 드디어 싸움에서 이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는 지배력을 잃을 뿐이지 그것이 신자들 안에서 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롬 6:6), 죄의 법이(롬 8:2 참조)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서 폐지되었지만, 약간의 흔적은 남아 있다고 말한다. 그 흔적은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무기력을 의식하게 하여 겸손하게 만든다. 이런 흔적에 대해서는 마치 그것이 아주 없는 것같이 책임을 추궁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일이며 따라서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죄책이 있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 죄책에서 해방된다. 이 사실에 대한 명백한 증거들이 성경에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견해를 확인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한 말보다 더 명백한 어떤 증언이 필요한가? 우선거기에서 바울은 거듭난 사람으로서 말한다(롬 7:6). 이 점을 우리는 다른 곳에서 밝혔고 어거스틴도 반박할 여지가 없는 논리로 이 점을 증명한다. 그가 "악"과 "죄"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우리를 반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 말들을 억지로 흠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에 반대되는 것이 악이란 것을 누가 부정할 것인가? 의를 방해하는 것이 죄란 것을 누가 부정할 것인가? 간단히 말해서 정신적 불행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죄책이 관련되었다는 것을 누가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이 병에 대한 이런 사실들은 바울이 모두 공포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 문제 전체에 대해서 간단히 다룰 수 있는 믿을 만한 지시를 율법에서 받는다. 율법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했다(신 6:5, 마 22:37). 우리 영혼의 모든 능력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충만해야 된다고 하였으므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떠나서 허망한 것으로 끌려가려는 경향이나 생각을 조금이라도 마음속에 가지고 있거나 들여올 수 있는 사람은 이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어떤 감정이 갑자기 움직이는 것, 감각으로 지각하는 것,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 이런 것들이 영혼의 능력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런 능력들이 허망하고 패악한 생각에 굴할 때에 거기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그만큼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육의 모든 욕망이 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저 육욕의 병을 "불이 잘 붙는 물건"(tinder)이라고 부르며 죄의 원천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율법을 범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필연적으로 부정할 것이다.
12. "타고난 부패"란 무슨 뜻인가
사람의 본성에 따라서 느끼는 욕망은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 자신이 주신 것인데, 그것을 모두 완전히 정죄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을 때에 사람의 성격에 새기신 경향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경향들을 없애려면 인간성 자체를 없애야 할 것인데, 우리가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배에 반항하는 대담하고도 불손한 충동들뿐이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이 부패하였으므로 인간의 모든 능력은 오염되고 부패하여 그의 모든 행동이 항상 무질서와 무절제에 빠질 경향이 크다. 이는 이런 경향들이 자제력의 결핍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경향들을 악하다고 주장한다. 더 간단한 요약을 원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모든 욕망이 악하며 죄라고 가르친다. 욕망은 우리가 타고난 그 욕망 때문이 아니고 무질서한 것이기 때문에 죄이다. 그뿐 아니라 욕망이 무질서한 것은 부패하고 오염된 본성에서 순결하거나 진지한 것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주장은 얼른 보기에는 어거스틴의 생각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는 펠라기우스파가 자기에게 씌우려는 오명을 너무 무서워해서 "죄"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은 때도 있었다. 그러나 죄의 법은 성도들 속에 여전히 남아 있고, 죄책만이 제거된다고 기록했다. 이것을 보면 그가 우리 생각과 다지 다르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13. 신자들이 여전히 죄인인데 대한 어거스틴의 증언
그의 생각을 더 잘 나타내는 다른 말들을 소개하겠다. 율리아누스를 논박함(Aginst Julian)이라는 논문집의 제2편에 이런 말이 있다. "죄의 법은 영적 중생에 의하여 사함을 받는 동시에, 여전히 죽을 육신 안에 남아 있다. 신자들을 중생시키는 성례전에서 죄책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사함을 받는다. 그러나 신자들이 대적해 싸우는 상대인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에 그것은 남아 있다." 다른 구절에서 "그러므로 저 위대한 사도 자신의 지체 안에도 있는 죄의 법은 세례에서 사함을 받으나 제거되지는 않는다."라고 하였고, 또 다른 구절에서 "암브로시우스(Ambrose)는 죄의 법을 '불법'이라고 부르며, 이 불법에 대한 죄책은 세례에서 제거되나 불법 자체는 남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육체의 소욕으로 성령을 거스리는(갈 5:17) 것은 불법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또 다른 구절에서 "죄책으로 우리를 잡고 있던 죄는 죄책과 함께 죽었다. 그리고 매장이 완결되어 완전히 제거되기까지 죄는 비록 죽었으나 여전히 반항한다."라고 했다. 제 5 편에 있는 구절은 더욱 분명하다. "마음의 눈이 어둡다는 것은 동시에 죄며 죄에 대한 벌이며 죄의 원인이다. 그것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죄인 것이다. 그 때문에 교만한 심령이 마땅한 벌을 받으니 죄에 대한 벌이다. 그리고 눈이 어두운 심령의 잘못 때문에 어떤 죄를 지을 때에 그는 죄의 원인이다. 마찬가지로 선량한 정신이 열망하는 것을 반대하는 육의 소욕은 동시에 죄요 죄에 대한 벌이요 죄의 원인이다. 마음이 지배하는데 대한 불복종이 육욕에 내재하니 육욕은 죄이다."
순종하지 않는 자의 행실에 대한 댓가이니, 그것은 죄에 대한 벌이다. 반역함으로써 동의하는 자 또는 전염으로 난 자에게서는 그것은 죄의 원인이다. 여기서 그는 조금도 모호한 점이 없이 그것을 죄라고 부른다. 오류가 굴복하고 진리가 강화된 때 그는 중상을 덜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같은 식으로 요한복음에 대한 제 41 설교에서 그는 논쟁을 떠나서 자기가 이해하는 대로 이렇게 말한다. "만일 여러분이 육으로 죄의 법을 섬긴다면, 사도 자신이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라고 한 말대로(롬 6:12) 행하라. 그는 죄를 없애라고 하지 않고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고 한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죄는 반드시 여러 분의 지체 속에 있다. 적어도 그 지배권을 빼앗아라. 죄가 명령하는 것을 행하지 말라." 육욕이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야고보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약 1:15)라고 한 말을 들어 반대한다. 그러나 이것을 반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가 악한 행위 혹 실제로 나타난 죄들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라고 해석하지 않는다면, 악한 의도까지도 죄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부끄러운 행동과 악한 행위를 "무절제한 욕망의 후손"이라고 부르며, "죄"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보면, 여기서 무절제한 욕망은 악한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14. 완전성이라는 환상에 반대함
오늘날의 어떤 재세례파 사람들은 영적 중생 대신 어떤 광적인 무절제를 불러일으킨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하나님의 자녀들은 순결한 상태로 회복되었으니, 육의 정욕을 제어하는데 걱정할 필요가 없고 지도자인 성령을 따라야 하며, 그의 인도를 받으면 결코 빗나갈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이 이런 사상을 공개적으로 교만하게 떠벌리지 않았다면, 사람의 정신이 이렇게까지 미쳐 버린다고 믿지 못했을 것이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그러나 감히 하나님의 진리를 허위로 만드는 자들이 그 모독적인 철면피로 인해서 이런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부정직과 정직, 의와 불의, 선과 악, 덕과 죄의 구별을 완전히 없애야 할 것인가? 그들은 말하기를 "이런 구별은 옛 아담이 받은 저주에서 생긴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저주에서 해방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음행과 정절, 성실과 간사, 진실과 허위, 공평한 거래와 강탈 사이에 아무 구별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재세례파 사람들의 말을 빌린다면, 그들은 "쓸데없는 공포심은 내버리라. 성령이 시키는 대로 믿고 대담하게 복종하면, 성령은 악한 일을 명령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 이런 해괴한 말에 누가 놀라지 않을 것인가? 그래도 맹목적인 정욕에 눈이 어두워 상식을 내버린 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사상이 환영을 받고 있다.
그러나 나는 묻는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서 어떤 그리스도를 조작해 내려는가? 그들은 어떤 영을 내뿜는가? 우리는 한 그리스도와 한 성령을 인정한다. 이 영에 대해서는 선지자들이 천거했으며, 우리에게 계시된 대로 복음이 선포한다. 우리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영에 대해서 전혀 듣지 못했다. 이 성령은 살인, 음행, 술에 취함, 자만, 투쟁, 탐욕, 사기 등의 수호자도 아니요 도리어 사랑, 겸손, 절주, 온화, 평화, 절제, 진실 등의 창시자가 되신다. 성령은 선악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없고 분별도 없이 돌진하는 경박한 영이 아니며, 반대로 지혜가 가득하고 공정과 부정을 바르게 구별하는 총명이 가득하신 분이다. 성령은 사람을 선동하여 허랑방탕한 정욕으로 몰아 보내지 않고, 도리어 옳은 일과 옳지 않은 일을 분간하여 사람들에게 한도와 절제를 지키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우리는 이 야수적인 미친 태도를 논박하려고 더 애쓸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성령은 혼란을 일으키는 유령이 아니다. 그들은 이 운명을 꿈에서 만들어 냈거나 다른 사람들이 만든 것을 받아들였다. 그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에 대한 지식을 성경에서 진지하게 찾는다. 성경에서 우리는 성령에 대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로, 성령은 우리를 성화시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파견되셨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부정과 불결을 씻어버리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의에 복종시키신다. 이와 같은 순종이 성립되려면, 저 사람들이 고비를 늦추려고 하는 그 육욕을 먼저 누르고 굴복시켜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성령에 의하여 정화되지만, 육신을 쓰고 있는 동안은 많은 죄와 무기력에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완전과는 아주 먼 우리는 꾸준히 계속해서 전진해야 하며, 죄 속에 얽혀 있으나 매일 그 죄와 싸워야한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우리가 태만과 부주의를 떨어버리고 정신을 집중하여, 우리의 육의 전술에 부지불식간에 빠지지 않도록 감시해야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사도보다 더 많이 전진했다는 자신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다. 사도는 사탄의 사자 때문에 여전히 괴로움을 당했으며(고후 12:7), 이 일로 인하여 그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고후 12:9)졌으며, 그 자신의 육안에 있는 영육의 분열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였다(롬 7:6이하 참조).
15. 고린도후서 7장 11절에 있는 회개
사도가 회개를 설명하기 위하여 일곱 가지 원인과 결과 또는 부분을 열거한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간절 또는 신중, 변명, 의분, 두려움, 사모, 열심, 징벌의 일곱 가지이다(고후 7:11). 내가 이것들이 원인인지 또는 결과인지를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것은 아니다. 또 이 일곱 가지는 회개와 연결된 경향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제쳐놓고도 바울이 말하는 뜻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단순한 설명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서(고후 7:10) 신중함이 생긴다고 한다. 하나님께 대해서 죄를 지은 자신에 대해서 강렬한 불만을 느끼는 사람은 동시에 부지런하며 주의하게 되어 마귀의 올무에 빠지지 않으며, 마귀의 간계에 대해서 더 훌륭한 예비 조치를 취하며, 성령의 지배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또는 안도감에 취하지 않도록 주의하게 된다.
다음은 "변명"이다.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죄인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자기의 죄를 부인하거나 자기의 허물을 적게 만들려고 하는 변명이 아니다. 여기서 변명은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보다 용서를 비는데 치중하는 정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고집이 세지 않은 아이들이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며 고백하며 용서를 빌고 또 용서를 받기 위하여 부모에 대한 공경을 조금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온갖 방법으로 증명하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간단히 말하면, 그들은 자기가 의로우며 무지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용서를 받으려고 변명한다. 다음에 죄인이 마음속으로 애통하며 자신을 비난하여 자신에 대하여 노하며 자신의 패역성과 하나님께 대한 배반을 인정할 때에 그는 의분을 느끼게 된다.
바울이 "두려움"이란 말을 사용한 때에 그 말의 의미는 우리가 자기의 마땅히 받아야할 것과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엄하고 무서운가를 생각할 때에 느끼는 그 떨리는 마음이다. 그런 때에 우리는 비상한 불안으로 고통하며, 이 고통으로 인해서 겸손을 배우며 앞으로 더욱 조심하게 된다. 그러나 전에 말한 신중함이 두려움에서 생긴다면, 이 두 가지 심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모"란 말을 쓴 것은 의무를 이행하는 열심과 기꺼이 순종하는 태도를 표현하려는 뜻인 듯하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 특히 순종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직접 여기에 연결시키는 열심도 관련된다. 이 말은 우리가 나는 무슨 짓을 했으며 또 하나님의 자비가 나를 구출하지 않았다면 나는 어디로 빠져들었을까를 생각할 때에 자극되어 일어나는 열심을 의미한다.
끝으로 "징벌"이 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엄격하며 자신의 죄를 예리하게 검토할수록 하나님께서 더욱더 우리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푸시기를 바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바라는 대로 되려면 하나님의 심판을 무서워하게 된 영혼이 처벌자의 일을 맡아 그 자신을 벌해야 한다. 참으로 종교적인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확실히 알게 된 때에 느끼게 되는 부끄러움과 당혹함과 번민과 자기혐오와 그 밖의 죄에 대한 생생한 인식에서 일어나는 다른 감정들을 체험한다. 그러나 우리는 슬픔에 자신이 삼켜지지 않도록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 공포에 싸인 양심은 무엇보다도 절망 상태에 빠지기 쉽다. 또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에 압도된 사람을 볼 때에 사탄은 이 절망이란 전술을 사용하여 그를 점점 더 깊은 슬픔의 소용돌이에 밀어 넣어 다시 솟아나지 못하게 만들려고 한다. 겸손의 결과를 낳으며, 용서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는 두려움은 얼마든지 무방할 것이다. 그렇지만 죄인은 사도의 명령에 따라 자기 불만과 과도한 공포에 눌려 지쳐버리는 일이 없도록(히 12:3) 항상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지치면 회개를 통해서 우리를 자신 앞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에게서 도망하기 때문이다. 이일에 대한 베르나르드의 충고도 유익하다. "죄에 대한 슬픔은 그것이 계속되지 않는다면, 필요한 것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부탁한다. "여러분이 한 일을 생각하고 불안해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자리를 가끔 떠나서, 하나님에게서 받은 은혜들을 생각하는 상쾌한 고원 지대로 올라가라. 쓴 쑥에 꿀을 섞어 보라. 달게 해서 마시면 쓴 것이 약이 된다. 여러분이 겸손하게 자기를 반성한다면, 그와 같이 자비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라."
(회개의 열매 : 거룩한 생활, 죄의 고백과 용서, 평생 계속하는 회개. 16-20)
16. 외면적인 회개와 내면적인 회개
이제 우리는 회개에서 생기는 열매의 성격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건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생활 전체의 성화와 거룩이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표준으로 삼아서 자기의 생활을 진지하게 판단하면 할수록, 그가 보여 주는 회개의 징조는 더욱 더 확실하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우리의 회개를 재촉하실 때에, 자주 율법 개개의 교훈이나 둘째 돌판에 있는 의무들을 우리에게 상기시키신다. 그러나 다른 구절에서는 성령은 먼저 우리의 속마음의 원천이 불결한 것을 정죄하시고 그 다음에 진지한 회개의 표지인 외면적인 증거에 대해 언급하신다. 나는 조금 후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묘사할 때에 이 일에 관한 일람표를 독자들 앞에 제시하겠다. 나는 예언서에서 증거를 수집하지 않을 것이다. 예언자들은 여러 가지 의식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풀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미련함을 가끔 멸시하면서 그들이 웃음거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한다. 또한 그들은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시므로 외면적인 정직한 생활이 회개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가르친다. 성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상대로 할 때에는 마음의 내면적인 태도에서 시작하지 않고서는 아무 소득이 없다는 것을, 다른 사람의 경고를 받을 것 없이 스스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 일에 대해서는 요엘서에 있는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라는 말씀이(욜 2:13) 이해에 적지 않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충고를 야고보는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는 말로(약 4:8) 간결하게 표현한다. 여기서는 처음 문장에 첨가된 것이 있으나 다음에 근원과 원인을 밝힌다. 곧 사람이 마음속에 하나님의 제단을 쌓으려면, 은밀한 더러움을 씻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자기를 낮추며 육을 길들이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외면적인 훈련 방법이 있고 공적으로는 이 방법을 회개의 증거로 사용한다(고후 7:11). 또 이런 훈련은 바울이 말하는 "징벌"에서 생긴다(고후 7:11). 고통하는 마음의 특색들을 든다면, 누추한데서 신음하고 통곡하며 찬란한 것이나 모든 장식을 회피하며 모든 오락에서 떠나는 것이다. 다음에 육의 반역이 얼마나 큰 사악한가를 느끼는 사람은 그것을 억제할 모든 방법을 구한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에 반대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잘못인가를 잘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겸손하게 영광을 돌리기까지는 편안할 수 없다.
회개의 열매를 논할 때에 옛날 저술가들은 이런 훈련을 자주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의 힘을 훈련에 포함시키지 않았지만, 이런 훈련에 너무 치중한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독자들은 나의 솔직한 발언을 용서하리라). 이 문제를 현명하게 고려하는 사람은 그들이 두 가지 점에서 적당한 한도를 넘었다고 보는 나의 의견에 동의하리라고 믿는다. 그들은 육체의 훈련을 강력하게 권장하며 지나치게 칭찬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욱 열심히 그것을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시해야 할 일은 다소 희미하게 만들었다. 둘째로, 징벌을 가할 때에 그 징벌들은 교회의 온유함이 필요로 하는 것 이상으로 더 엄격한 것들이었다. 이 점은 다른 곳에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17. 회개의 외면적 실천이 주된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여러 구절에서 특히 요엘서에서(욜 2:12) 통곡하며 금식하며 재를 쓴다는 것을 읽고 회개는 주로 금식이나 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오해는 풀어야 한다. 요엘서에서 말한 주께로 마음을 완전히 돌리는 것과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는 것은 참으로 회개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나 통곡하며 금식하는 것은 회개에 항상, 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결과가 아니고 특별한 경우에 한한다. 요엘은 유대인들에게 큰 재앙이 오리라고 예언했으므로 회개할 뿐 아니라 자기들의 슬픔을 외부에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예방하도록 그들을 권고하였다. 범죄한 사람이 재판관 앞에 나타날 때에 그의 자비심을 일으키기 위해 긴 수염, 엉킨 머리, 상복을 입고 애걸하는 것과 같이,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았을 때에 그의 엄격한 심판을 면하게 해달라고 가련한 모습으로 비는 것이 마땅했던 것이다. 굵은 베와 재는 옛날에 더 적합한 듯하나, 주께서 우리를 파멸이나 재앙으로 위협하시는 듯한 때에는 언제든지 울며 금식하는 것이 매우 합당할 것이다. 주께서는 어떤 위험한 일을 나타내시려고 할 때에, 징벌을 내릴 준비와 무장이 다 되었다고 선포하신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백성에게 울며 금식하라고 권고하는 것이 좋다. 바꿔 말하면, 주의 심판대 앞에 설 사람들에게 슬퍼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선지자가 그들의 악행이 심판을 받게 됐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현대의 교회 목사들도 자기 백성들 위에 파멸이 임박한 것을 볼 때에, 속히 금식하며 통곡하라고 경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중요한 조건이 있다. 그것은 곧 목사들이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욜 2:13) 더욱더 주의와 노력을 다해서 항상 경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금식이 반드시 회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금식은 특히 재앙이 있는 때를 위한 것이다.
따라서 주께서는 그가 떠나셔서 제자들이 슬픔에 잠기게 될 때까지는 그들이 금식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면서(마 9:15) 금식과 애통을 연결시킨다. 나는 공적인 금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신자의 생활은 검소와 절제로 조절되어, 평생이 일종의 항구적인 금식 같아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는 교회의 규율 문제를 논할 때에 다시 연구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비교적 간략하게 언급할 따름이다.
18.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에 대하여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이 점을 삽입하고자 한다. 즉, 외면적인 고백을 "회개"라고 부를 때에, 내가 설명한 회개의 진정한 의미에서 탈선하게 된다는 것이다. 회개는 죄책에 대한 고백이라기보다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며, 동시에 벌과 심판대 앞에서는 일을 피할 수 있도록 하나님에게 간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옷을 입고 재에" 앉는다는 것은(마 11:21, 눅 10:13),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대 범행 때문에 우리에 대해서 노하실 때에 우리의 자기혐오를 표시하는 증거에 불과하다. 이런 고백은 공적이며, 천사들과 세상 앞에서 우리 자신을 정죄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예상하는 것이다. 자기의 죄에 대해서 관대한 사람들의 태만을 책망하기 위해서 바울은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하나님에 의해서)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라고 한다(고전 11:31). 우리의 회개에 대해서 사람들을 의식적이며 공개적인 증인으로 세우는 것이 항상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에게 개인적으로 고백하는 것은 진정한 고백의 일부이며, 이것을 게을리 할 수는 없다. 우리 자신을 자랑하는 죄, 탄로되지 않도록 가식적으로 숨기는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면 그런 불합리한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매일 짓는 죄를 고백하는 것이 마땅할 뿐 아니라 큰 죄에 대해서는 오래 전에 잊은 것이라도 회상해서 고백해야 한다. 다윗은 좋은 예를 보여준다. 최근에 지은 죄를 부끄러워하면서, 그는 모태에 있었을 때까지 돌아가서 자기를 검토한다. 그리고 그 때에도 자기는 육의 더러움에 감염되어 있었고 부패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시 51:3-5). 또한 그는 자기의 죄책을 경감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군중 속에 숨으며 다른 사람들을 끌어넣음으로써 벌을 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다윗의 행동은 훨씬 다르다. 자기는 바로 유아 시대부터 부패했었고 지금까지 계속해서 악행에 악행을 거듭했노라고 고백하며, 자기의 죄책을 공공연하게 확대한다. 다른 곳에서는 자기의 과거 생활을 회상하면서, 젊었을 때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였다(시 25:7).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의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하며 우리의 악행을 통곡하면서 하나님에게 사죄를 간구한다면, 그 때에 비로소 우리는 영적인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끊임없이 실천하도록 명령을 받은 회개와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 같은 사람들의 회개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수치스럽게도 타락을 했거나, 제멋대로 방종한 생활에 뛰어들어 죄를 지었거나, 일종의 반역을 감행해서 하나님의 지배를 벗어났던 자들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회개를 권고할 때에, 이를테면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소생을 의미하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한 백성이 "회개"했다고 할 때에, 그들은 우상 숭배와 그 밖의 중대한 죄악에서 돌아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하는"(고후 12:21) 죄인들 때문에 슬퍼 울리라고 선언한다. 이 구별에 주의하지 않는다면 회개하라는 호소를 받는 사람이 적다는 말을 들을 때에, 우리가 부주의하게 될 염려가 있다. 곧, 육을 죽이는 일이 우리와는 관계가 없다는 오해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비열한 욕망은 항상 우리를 괴롭히며 악습은 자꾸만 싹이 트므로 우리는 육을 죽이는데 대한 관심을 늦출 수 없다.
그러므로 마귀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리에서 떼내어 죽음의 올가미에 걸어 넣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요구되는 특별한 회개가 있다고 해서 일상적인 회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본성은 부패했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을 두고 이런 회개에 계속해서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19. 회개와 용서는 서로 관련되어 있다
복음이 회개와 죄의 용서라는 두 제목으로 완전히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또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주께서 자기의 백성을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것은 동시에 자신의 영에 의한 성화를 통해서 그들을 진정한 의에 복구시키려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파견된 사자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선포하였다(마 3:2, 4:17). 회개하라고 권고함으로써 요한은 그들이 스스로 죄인인 것과 그들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죄를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충고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인정함으로써 그들이 육을 죽이며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기를 진심으로 원하게 되기를 바란 것이다. 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으로써 그들이 믿음을 가지도록 호소하였다. 그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을 때에, 하나님 나라란 것은 죄의 용서와 구원과 생명과 그 밖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모든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다른 복음서를 보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고 하였다(막 1:4, 눅 3:3). 이것은 죄의 짐에 눌려 지친 그들로 하여금 주께로 돌아서며 용서와 구원에 대한 소망을 품으라고 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도 오셔서 "때가 찼고 하나님 가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전파하셨다(막 1:15). 우선 그는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자비의 보고가 열렸다고 선언하셨다. 다음에 회개를 요구하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복음 전체를 간략하게 요약하려고 하셨을 때에, 자신이 "고난을 받고…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전파될 것"이라고 하셨다(눅 24:26, 46-47). 그리고 그가 부활하신 후에 사도들은 "예수를…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라고 전파하였다(행 5:30-31). 복음의 가르침을 통해서 사람들이 자기들의 생각과 성향과 노력은 모두 부패하고 악하다는 말을 들을 때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가 선포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된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한 구속과 의와 구원과 생명이 되셨다는(고전 1:30) 말씀을 들을 때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값없이 의롭고 무죄한 자로 인정을 받는다는 말을 들을 때에 거기서 죄의 용서가 선포된다. 내가 다른 곳에서 증명한 것과 같이, 이 두 가지 은혜는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믿음의 바른 대상은 하나님의 자비이며, 이 자비에 의해서 죄가 용서되는 것이므로 믿음과 회개는 매우 조심스럽게 구별하는 것이 유익하다.
20. 어떤 의미에서 회개는 용서의 선행 조건인가
죄에 대한 증오심이 회개의 시초이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우리를 처음으로 접근하게 만든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상대자들은 가련하고 고통 받는 죄인들뿐이며, 신음하고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주리며 목마르고 슬픔과 불행에 시달리는 사람들뿐이다(사 61:1-3, 마 11:5, 28, 눅 4:18).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있으려면 회개를 목표로 노력하며, 일생을 통해서 회개에 몸을 바치며, 끝까지 회개를 추구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나부르시는 목적은 회개시키려는 것이었다(마 9:13 참조). 그는 무가치한 자들에게 파견되셨으나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각각 사악에서 돌아서게 하려는 것이었다(행 3:26, 5:31 참조). 성경에는 이런 증언이 가득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겠다고 하실 때에, 우리들에게 회개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보통이다. 거기에는 그의 자비가 사람들이 회개하는 원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포함되었다.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다."라고 그는 말씀하신다(사 56:1). 또,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사 59:20). 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사 55:6-7). 마찬가지로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고 한다(행 3:19). 그러나 이런 조건은 우리의 회개가 근거가 되어 우리가 죄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생긴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주께서는 회개시키고자 하시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결정하시고 만일 그들이 은혜를 얻고 싶으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되는지를 알리신다. 따라서 이 육신의 감옥에서 살고 있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부패한 본성의 결점과 아니 우리의 타고난 영혼 그 자체와 싸워야 한다. 플라톤은 죽음을 명상하는 것이 철학자의 생활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진실한 말을 할 수 있다. 즉, 육을 죽이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며 훈련하여, 드디어 육을 완전히 죽이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주관하시게 되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일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자기를 심히 싫어할 줄 아는 사람은 많은 유익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자기를 싫어하되 진흙 구덩이에 박혀서 전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속히 가며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생(生)과 사(死)에 접붙임을 받아 계속적인 회개에 유의하게 되기 위해서이다. 참으로 죄를 진심으로 미워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이는 먼저 의에 대한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면 결코 죄를 미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생각은 가장 순수한 것인 동시에 성경의 진리와 가장 일치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회개와 용서를 받을 수도 없는 죄들. 21-25)
21. 회개는 값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더 나아가, 회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다. 이 점은 위에서 말한 것으로 분명하며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이 은혜를 찬양하며,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신 것을 보고 놀랐다(행 11:18, 고후 7:10). 바울은 디모데에게 불신자들을 부드럽고 관대하게 대하라고 명령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하는 마음을 주셔서 그들은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딤후 2:25-26).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회심을 원하신다고 선포하시며,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권고를 보내신다. 그러나 권고의 효과는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에 달렸다. 이는 우리가 사람을 창조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자기 능력으로 더 훌륭한 본성을 입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생의 전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고 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에서 구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으로 살리신다. 엄밀히 말한다면, 회개가 구원의 원인이 아니지만 그것을 믿음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에서 분리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사야도 증거한 대로 이미 밝혀졌다.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사 59:20).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왕성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성령이 역사 하셨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사야서를 보면, 신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호소하고 슬퍼하면서, 버림을 받았다는 일종의 표지로서 자기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신 것을 가리킨다(사 63:17). 배교자들을 구원의 소망에서 제외하려고 한 사도는 그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라고 그 이유를 제시한다(히 6:4-6).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멸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 사람에게 아버지 같은 그의 은혜를 보이시며 이를테면 그의 고요하고 기쁜 얼굴로 그들을 그에게로 이끄신다. 그러나 불경하여 용서하실 수 없는 자들은 버림을 받은 자들의 마음은 강퍅하게 만드시며 그들에 대해서는 진노를 나타내신다.
의식적으로 배교하는 자들에 대해서 사도는 이런 벌이 있으리라고 위협한다. 이것은 복음에 대한 믿음을 버리며, 하나님을 조롱하며, 그의 은혜를 멸시하며, 그리스도의 피를 모독하며 짓밟으며(히 10:29), 참으로 힘을 다해서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이다(히 6:6). 어떤 엄격한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듯이, 바울은 모든 의식적인 죄에 대해서 용서받을 희망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배교만은 용서를 받을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모욕하는 모독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용서의 여지없이 엄격한 벌을 내리시는 것은 당연하다고 가르친다. 그의 말을 인용한다면,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4-6)고 하였다. 다른 구절에서도 그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만 있으리라."(히 10:26-27)고 하였다.
옛날 노바티아누스파(Novatianists)가 미친 듯이 날뛴 것은 이런 구절들을 오해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선량한 사람들은 이 구절들에 나타난 냉엄한 태도에 반감을 가지고 이 서한에는 사도적 정신이 그 모든 부분에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거짓된 작품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서한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상대로 논의하는 것이므로 이 말씀들이 그들의 오류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증명할 수 있다. 첫째로, 사도는 그의 주님이 하신 말씀과 같은 말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다(마 12:31-32, 막 3:28-29, 눅 12:10).
다시 말하거니와 만일 우리가 사도를 그리스도의 은혜에 반대된 자로 만들려고 하지 아니한다면, 사도가 이런 예외에 대해서 만족하게 생각한 것이 확실하다. 이에 따라서 결론은 어떤 죄에 대해서도 용서를 받지 못할 일이 없으나, 한 가지 죄만은 예외라고 할 수 있다. 이 죄는 절망적인 광기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연약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없으며, 그 사람이 마귀에게 사로잡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22. 용서할 수 없는 죄
그러나 이 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마땅히 결코 용서를 받지 못할 이 가증한 죄의 성격을 규명해야 한다. 어거스틴은 이 죄를 정의하기를, 용서를 믿지 않고 죽을 때까지 계속 고집을 부리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정의는 그리스도께서 이 죄는 이 세상에서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과(마 12:31-32)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헛된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이 세상에서 범할 수 있거나, 두 가지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어거스틴의 정의가 옳다면, 죽을 때까지 계속되지 않으면 그런 죄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형제에게 내려진 은혜를 시기하는 사람은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다고 한다. 그들이 어디서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의 도움을 받아서 자연히 모든 다른 정의를 쉽게 능가할 수 있는 진정한 정의를 이제 제시하겠다. 하나님의 진리의 조명을 받아 무지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으면서도 악한 의도로 하나님의 진리에 항거하는 사람들은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것이다. 이런 항거만이 그들의 죄가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하신 말씀에 대한 설명으로서,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즉시 부언하셨기 때문이다(마 12:32, 눅 12:10, 막 3:29 참조). 그리고 마태는 "성령을 거스르는 훼방" 대신에 "훼방의 영"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비난을 던지면서 어떻게 동시에 성령을 비난하게 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진리를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공격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무지해서 그리스도를 저주하는 사람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가 계시되기만 하면 그 진리를 소멸시키려는 의식적인 의도는 없는 사람들, 그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임을 알고 그에 대해서 한 마디라도 중상하는 말을 하지 않을 사람들, 즉, 이런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서 죄를 짓는다. 복음의 가르침을 극악한 말로 저주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것이 복음에서 온 것인 줄 안다면 기꺼이 진심으로 공경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논박하며 반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을 확신하면서도 그 양심이 여전히 반대를 계속한다. 이런 사람들은 성령의 사역인 조명에 반항하기 때문에 이러한 것은 성령을 거슬려 훼방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유대인들 중에 그런 자들이 있었는데, 스데반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에 대적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항하였다(행 6:10). 그들 가운데는 율법에 대한 열성으로 부득이 그런 행동을 취한 사람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사악하고 불결한 생각으로 하나님 자신에 대항해서 미친 듯이 날뛰는 자들도 있는 것 같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에게서 온 교훈인 줄을 알면서도 그 교훈에 항거한다. 주께서 책망하신 바리새파 사람들도 그런 자들이었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바알세불(Beelzbud)"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중상하였다(마 9:34, 12:24). 그러므로 이것이 훼방의 영이다. 즉, 인간이 대담해져 하나님의 이름을 의식적으로 비난한 것이다. 바울이 자신이 불신 앞에서 모르고 그런 일들을 저질렀기 때문에 용서를 받았다고 주장할 때에(딤전 1:13), 그는 이 점을 암시하는 듯하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주의 은혜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무지와 불신앙이 합해서 바울이 용서를 얻게 했다면, 지식과 불신앙이 합한 경우에는 용서를 받을 여지가 없다는 추론이 나온다.
23. "두 번째 회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세히 주의해 보면, 사도가 말하는 것은 한두 번 하는 타락이 아니고, 버림받은 자가 구원을 버리는 그 보편적인 반역임을 이해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이 그의 서한에서, 선택받은 자들 사이에서 나가기는 했으나 선택받은 자들에게 속하지 않았다고(요일 2:19)한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결코 화해하시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요한이 여기서 반대하는 사람들은 일단 그리스도교에서 떠났으면서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런 잘못되고 악한 생각을 하지 않도록 그들에게 권하면서 그는 큰 진리를 말한다. 즉,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의식적으로 또 고의로 배척한 자들에 대해서는 다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배척한다는 뜻은 방탕, 무절제한 생활로 단순히 주의 말씀을 어긴다는 것이 아니고 주의 가르침 전체를 고의로 또 의식적으로 배척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만성이 "타락"과 "죄를 지음"이란 말들에 있다(히 6:6, 10 :26). 그래서 노바티아누스파는 "타락"을 해석할 때 그것은 주의 율법에서 도둑질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고 배웠으면서도 절도 행위나 음행을 버리지 않는 사람의 행동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주장한다. 여기는 암시적인 대조법이 있어서 전에 말한 것과 반대되는 모든 것을 요약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것은 어떤 특수한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을 등지고 완전히 돌아서는 것, 이를테면 전인이 배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도가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후에 타락한 자들에 대해서 말할 때에(히6:4-5), 그것은 성령의 조명을 의식적인 불경건으로 없애고 하늘의 은사의 맛을 뱉어 버리는 자들은 성령에 의한 성화에서 스스로 단절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유린하리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고의적이며 계획적인 불경건이란 뜻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해서 사도는 뒤에 있는 다른 구절에서 "고의로" 이라는 말을 첨가한다. 진리에 대한 지식을 얻은 후에 의식적으로 죄를 짓는 자들을 위해서는 속죄의 제사가 다시없을 것이라고(히 10:26) 사도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죄를 위한 계속적인 속죄의 제물이심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서신의 거의 전체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설명하면서 이 점을 선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회생을 거부하면 다른 희생은 없다고 사도는 말한다. 그뿐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명백하게 부정할 때에 사람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거부한다.
24. 용서받을 수 없는 자들은 회개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자비를 빌면서 피난처를 구하는 사람들이 전혀 용서를 받을 기회가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도 냉혹하며 주의 자비와는 이질적인 생각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이에 대해서 대답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께로 돌아가는 사람에게 대해서 용서를 거부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으로 영원히 눈이 어두웠고, 그 결과로 회개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에서의 경우에도 이 점에 반대되는 것은 조금도 없다. 사도는 후에 에서의 예를 이 점에 적용하여, 에서가 잃어버린 상속권을 회복하려고 눈물과 통곡으로 구했으나 헛수고였다고 말한다(히 12:16-17). 이것은 예언자가 한 경고에 버금가는 진리이다. 예언서에는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고 한다(슥 7:13). 이런 말들은 진정한 회심이나 하나님께 대한 호소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불경건한 사람들이 궁지에 빠졌을 때에 느끼는 불안을 표시할 뿐이다. 그들이 전에 태연하게 무시하던 일, 곧 그들의 모든 행복은 주의 도움에 달렸다는 사실을 궁지에 빠진 다음에야 불안한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의 도움이 그들에게서 떠난 것을 괴로워하는 것이지 도움을 간구하는 것이 아니다. 예언자의 "부른다"(슥 7:13)는 말과 사도의 "눈물"(히 12:17)이란 말은 절망 상태에 빠진 악인들을 괴롭히는 저 무서운 고통을 의미할 뿐이다.
여기에 깊이 유의해야 할 사실이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악인이 회개하기만 하면 곧 자비를 베푸시겠다고 예언자를 통해서 선포하신(겔 18:21-22) 하나님께 자기 분열이 생기는 결과가 초래 될 것이다. 그리고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면, 사람의 마음은 개선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또 구하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은 결코 속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버림받은 자들이 재난을 당해서 그 해결점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아야 되겠다고 깨달으면서도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시면 여전히 도망하여 마음이 산란하고 맹목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회심"이니 "기도"니 하고 부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25. 가짜 회개와 진짜 회개
그러나 문제가 있다. 사도는 가짜 회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아합이 용서를 받고 그에게 내리게 되어 있었던 벌을 피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의 만년의 행동을 보면, 그가 다만 갑작스런 공포심에서 떨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왕상 21:28- 29). 그는 굵은 베를 몸에 두르고 재를 쓰고 땅에 누웠으며(왕상 21:27), 그에 대한 증거로 보면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여전히 완고하고 악의를 품고 있었던 이상 옷을 찢었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셨다.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위선자들은 이와 같이 얼마 동안 용서를 받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항상 그들 위에 머물러 있다. 이것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경계로 삼기 위한 것이다. 아합에 대한 벌은 경감되었으나 그것은 단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느끼지 않았다는 것뿐이지 그에게 어떤 유익이 되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저주는 비록 은밀했으나 그의 집에 머물렀고 그는 영원히 멸망하고 말았다.
에서에게도 같은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는 거절을 당했으나, 그의 눈물로 인하여 현세의 축복은 허락되었다(창 27:40).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는 영적 상속은 두 형제 중에 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에서가 무시되고 야곱이 선택됐을 때에 에서는 하나님의 자비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동물적인 인간으로서의 위안은 남아 있었다. 즉, 땅의 기름짐과 하늘의 이슬로 기름지게 되리라는 것이었다(창 27:28).
내가 방금 말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경계로 삼아서, 우리는 진지한 회개를 하도록 더욱 마음을 다하여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실하게 또 충심으로 회심할 때, 무가치한 자들이 조금이라도 자신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면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꺼이 용서하시리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수단으로 강퍅한 자들 위에는 어떤 무서운 심판이 내릴 것인가를 배운다. 지금도 강퍅한 자들은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얼굴과 완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경고를 멸시하며 무시하는 것을 하나의 재미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울음이 거짓이며 마음이 부정직한 것을 아시면서도, 자주 손을 내밀어 그들의 재난을 완화하셨다(시 78:36-37 참조). 그들이 곧 자기의 본성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시편에서 하나님께서 한탄하신 바와 같다(57절). 이와 같이 지극히 인자한 처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진지한 회심으로 인도하려 하셨고 또한 그들을 변명할 여지가 없게 만들려고 하셨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일시 징벌을 중지하심으로써 항구적인 법으로 자신을 속박하시는 것이 아니고 때때로 위선자들에 대해서 더욱 엄격한 태도를 취하시며 벌을 배가하셔서, 그들의 거짓을 불쾌하게 생각하심을 알리신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용서하신다는 선례를 보이셔서, 경건한 사람들은 생활을 고칠 용기를 얻게 하시고 완고하게 핍박을 아는 교만한 자들은 더욱 엄한 정죄를 받게 만드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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