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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 3권.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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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 믿음 : 믿음의 정의와 특성에 대한 설명

 

(믿음의 목표는 그리스도이시다. 1)

 

1. 그러나 이 모든 일은 믿음에 관한 정의를 보다 명확히 제시한 후에야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독자들은 믿음의 힘과 성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전에 설명한 것을 회고하는 것이 좋겠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율법으로 정하셨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그 어느 부분이라도 지키지 않으면 율법에 있는 영원한 죽음의 무서운 선언이 우리 위에 내릴 것이다.

둘째로, 율법을 글자 그대로 이르기까지 지킨다는 것은 어려울 뿐 아니라,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요,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보며 우리가 당해야 할 처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좋은 희망이라고 하는 것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것이며,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영원한 죽음을 당할 처지임을 알게 될 것이다.

셋째로, 이런 비참한 재난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해방의 수단은 다만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구속자, , 해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것이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무한한 선하심과 자비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리스도의 손을 통하여 우리를 도우시기로 하셨다. 다만 한 조건은 우리가 견고한 믿음으로 이러한 자비를 받아들이며 꾸준한 희망으로 그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검토해야겠다. 하나님께서 자녀로 삼기로 정하신 사람들은 이 믿음에 의해서 하늘나라를 소유하게 되는데, 이런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의견이나 신념일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점에서 현재 위험한 착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의 진정한 성격을 더욱 주도면밀하게 검토하고 더욱 열성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실제로 믿음이란 말을 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음서에 있는 이야기에 보통으로 찬성한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그보다 더 깊은 무엇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사실 여러 학파들이 믿음을 논할 때에는 단순히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이라고 하며, 우리가 다른 곳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허무한 공상을 통해 가련한 영혼들을 확정된 목표로 이끌지를 못하고 도리어 다른 곳으로 끌어간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므로"(딤전 6:16),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되셔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세상의 빛"(8:12)이라고 하시고 다른데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하신다(14:6).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로(36:9) 가는 길은 그리스도밖에 없다(14:6). 왜냐하면 그리스도만이 아버지를 아시며, 그 다음에 그분이 당신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는 신자들에게만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10:22). 이 일을 근거로 바울은 그리스도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 만한 가치가 없다고 단언한다(고전 2:2).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은그리스도께 대한 믿음"(21) 증거했노라고 말하였다. 또 다른 구절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전했다.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26:17-18).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에게 나타나 보인다고 증언한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빛나며 그 지식이 우리에게 비친다고 하였다(고후 4:6).

믿음이 한 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임은 사실이지만 여기 첨가해야 할 것이 있다. ,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17:3)이 있다. 그리스도의 광채가 우리 위에 비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까지나 멀리 숨어 계실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계시하시려는 모든 것을 독생자 그리스도에게 맡기시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은혜를 전달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진정한 형상을 표현하게 하셨다(1:3 참조).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으려고 분발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셔야 한다는 것은 이미 말한바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볼 수 없는 아버지를 오직 그 형상에서만 찾아야 한다는 경고를 받는다. 어거스틴은 이 문제에 대해서 훌륭한 말을 했다. 그는 믿음의 목표를 논할 때에 우리는 가려는 곳과 가는 길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곧 이어 모든 과오에 대해서 가장 견고한 방비를 갖춘 길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신 그분이라고 한다. , 그는 하나님으로서 우리가 가려는 목적지가 되며, 사람으로서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 되신다. 목적지와 길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 발견될 뿐이다. 그러나 바울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선포하는 것은 그가 믿음의 안정성은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한 그 믿음에 대해서 자기가 그렇게 자꾸 역설한 점을 뒤엎으려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벧전 1:21)하면서 양쪽을 가장 효과적으로 결합한다.

 

(믿음은 지식을 내포한다. 참된 교리를 맹신이라는 스콜라의 사고는 흐리게 한다. 2-5)

 

2. 믿음은 방자한 무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에 있다

 

이 해독에 대한 책임은 다른 무수한 해독의 경우처럼 스콜라 신학자들에게 돌려야 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베일을 씌워 그를 숨겼다. 만일 우리는 그리스도를 직시하지 않으면 끝없는 미로를 헤맬 것이다.

그들은 모호한 정의로 믿음의 힘을 쇠약하게 만들며 거의 말살할 뿐 아니라 "맹신"이라는 허구를 만들어냈다. 비할 데 없이 엄청난 유치한 무지를 이러한 허구로 장식함으로써 그들은 가련한 사람들을 속여 멸망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문제의 진상을 솔직하게 말한다면, 이 허구는 진정한 믿음을 파묻을 뿐 아니라 완전히 파멸시킨다. 우리의 감정을 공손하게 교회에 복종시키기만 한다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것이 이른바 믿는다는 것인가? 믿음의 근거는 무지가 아니고 지식(knowledge)이다. 그리고 이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그의 뜻까지 아는 지식이다. 우리는 교회가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진리로 받아들일 용의가 있기 때문에, 또는 질문하고 알아내는 일을 교회에 일임했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화목이 성립됐기 때문에(고후 5:18-19),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비로운 아버지시며 그리스도를 의와 성결과 생명으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 때에 우리는 구원을 얻는다. 이 지식에 의해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지 우리의 감정을 교회에 굴복시킴으로써가 아니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할 때에(10:10), 사도가 말하는 뜻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나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 것을 맹신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직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사도는 우리의 의의 근거인 하나님의 선하심을 명백하게 인정하라고(explicit recognition; 이해에 입각한 신앙) 요구한다.

 

3. 로마 교회의 "맹신"이라는 교리는 근본적으로 잘못됐다

 

우리는 무지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우리가 지금 안다는 것은 대개 함축적인 것이며, 우리가 육()의 짐을 벗고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갈 때까지 그대로 혼돈하리라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이런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판단을 보류하고 교회와의 단결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그러나 이것을 구실로 삼아서 소위 겸손한 태도를 가진 무지를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지(17:3), 교회에 대한 존경이 아니다. 그들이 "맹신"이란 것으로 어떤 미로를 만들어 냈는가를 우리는 안다. 무엇이든지 가장 무서운 오류까지도"교리"라는 딱지를 붙여서 속여 넘기면, 무지한 사람들은 무분별하게 신령한 것으로 받든다. 이런 경솔한 맹신이 파멸 일보 직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변명하며, "이것이 교회에 대한 믿음이다"라는 조건만 붙으면 무엇이든지 확실한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자기들이 가진 오류를 진리인 것처럼, 암흑을 광명인 것처럼, 무지를 바른 지식인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논박하는데 시간을 더 보내지 않고, 그들의 교리와 우리의 교리를 비교하도록 독자에게 권고할 뿐이다. 진리 자체는 명백하므로 자연히 그들을 충분히 또 쉽게 논박할 것이다. 그들은 무지의 많은 잔재에 믿음이 둘러싸여 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무지한 사람들을 올바른 신자라고 부른다. , 자기의 무지로 마비된 사람을 심지어 자기의 무지를 자랑하는 사람들이라도 자기가 모르는 일들에 대해서 교회의 권위와 판단에 찬성하기만 하면 올바른 신자라고 정의한다. 이것은 믿음에는 이해가 따른다는 성경의 한결같은 교훈을 모르는 생각이다.

 

4. 올바른 믿음조차도 항상 오류와 불신앙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그네로서 살고 있는 동안에 맹신이란 것이 있음을 우리는 인정한다. 이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일과 가리워진 것들이 많을 뿐 아니라, 그런 것들이 오류의 구름에 둘러싸여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가장 완전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일은 고요히 또 겸손하게 계속 노력하여 더욱 전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도 신자들에게 하는 권고에서 어떤 일에 대해서 서로 생각이 다를 때에는 계시를 기다리라고 한다(3:15). 육신을 벗어버리기까지는 원하는 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가 체험적으로 분명히 배우는 교훈이다. 평소에 매일 성경을 읽을 때에 우리는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 많아서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 굴레로 우리를 일정한 한도 내에 제어하시며, 각 사람에게 "믿음의 분량"을 정하셔서(12:3), 가장 훌륭한 교사라도 항상 배우겠다는 태도를 가지도록 하신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직 완전히 깨닫지 못했을 때에 그들은 이와 같은 맹신의 분명한 본보기였다. 그들은 사소한 일에도 머뭇거리며, 가장 초보적인 진리조차 맛보기 어려웠다. 또한 주의 말씀을 따라 가면서도 이해하는 점에서는 거의 진보가 없었다. 사실 여인들의 말을 듣고 무덤까지 달려갔지만, 주의 부활이 꿈같이 느껴질 뿐이었다(24:11- 12, 20:8 참조). 그리스도께서 예전에 그들에게 믿음이 있다고 증거하셨으므로 이때에 그들에게 믿음이 전혀 없었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참으로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면, 그들의 열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죽은 사람, 살아날 희망이 전혀 없는 사람의 시체에 향료를 바르도록 여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미신이 아니었다. 진실하신 분으로 믿은 이의 말씀을 여인들은 믿기는 했으나, 무지가 아직도 그들의 마음을 점령하고 그들의 믿음을 암흑으로 둘러쌌기 때문에 그들은 거의 아연실색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보고 그의 말씀이 참말인 것을 스스로 발견한 후에 드디어 믿었다고 했다.

그때에 처음으로 믿기 시작했다는 뜻이 아니다. 숨은 믿음의 씨가 죽은 듯이 그들의 마음속에 있던 씨가 그때에 새로운 힘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유일한 스승으로 존경하며 마음속에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진정한 신앙이, 그러나 아직 맹목적인 신앙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받아 그분께서 자기들의 구주되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오셔서 아버지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의 제자들을 하늘로 인도하려 하신다는 것을 믿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더 자세한 증명을 구해서는 안 된다. 누구를 막론하고 신앙에는 항상 불신앙이 섞여 있다는 것으로 증명은 충분하다.

 

5. 믿음의 필수적 선행으로 "맹신"

 

엄격하게 말해서 아직 신앙의 준비 상태에 불과한 믿음도 맹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 복음서를 보면 복음의 교훈을 조금도 깨닫지 못하면서도 기적에만 놀라서 그리스도를 약속된 메시아라고 믿은 사람이 많았다. 이런 공경하는 태도가 있었으므로 그들은 그리스도께 기꺼이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이 공경하는 태도를 "신앙"이라는 훌륭한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시초에 불과했다. 그래서 자기 아들의 병을 고쳐 주시겠다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은 왕의 신하는(4:50) 집에 돌아가서 다시 믿었다고 복음서 기자는 증거한다(4:53). 처음에 그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하여 교훈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그가 교훈을 잘 받는 사람, 언제든지 배우겠다는 생각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처음 구절에서 그가 믿노라고 한 것은 어떤 특정한 일에 대한 믿음이었으나, 둘째 구절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지도하에 들어간 제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요한복음에 있는 비슷한 예를 보면 사마리아 여인의 말을 믿고 그리스도를 보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에게 모여들었던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들은 후에 여인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4:42). 이런 예들을 보면 아직 초보적 지식은 없을지라도 듣겠다는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신자"라고 불리웠다. 물론 정확한 의미는 아니나 이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 경건한 마음 자세에 이런 위대한 영예를 주시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받으려는 이 태도와 배우려는 이 욕망은 교환주의자들이 조작한 "맹신"으로 만족하는 저 나태한 사람들이 안주하고 있는 그 전적 무지와는 거리가 멀다. 바울은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 사람들을(딤후 3:7) 엄중히 책망하는데, 하물며 완전한 무지를 계획적으로 택하는 자들은 얼마나 더 큰 수치를 당해야 할 것인가 !

 

(말씀에 대한 믿음의 관계와 믿음의 간단한 정의. 6-7)

 

6.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아버지께서 제시하시는 그리스도, , 자신의 복음으로 옷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이것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믿음이 도착할 목표를 지정하신 것같이 복음이 우리를 앞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에게로 가는 바른 길을 걸을 수 없다. 그리고 거기서는 확실히 은혜의 보고가 우리 앞에 열려 있다. 만일 그 은총의 보고가 닫혀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과 가르침을 불가분리의 동반자로 서로 결합시키며,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채우지 아니 하였느니라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라고 말한다(4:20-21).

그러나 믿음을 복음에 제한할 때에 복음을 구성하기에 충분한 요소들을 모세와 예언자들이 전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에서 그리스도가 더욱 완전하게 계시되었기 때문에 바울은 복음을 "믿음의 가르침"이라는 적절한 말로 부른다(딤전 4:6 참조).

이런 이유로 그는 다른 구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말한다(10:4, 3:25 참조). 그가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새롭고 특별한 가르침이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선생이 되신 후에, 아버지의 자비를 더욱 분명하게 알려주시며 우리의 구원을 더욱 확실히 증거하셨다.

그러나 일반적인 것으로부터 특수한 것으로 점점 내려가는 것이 더 쉽고 더 적당한 방법일 것이다. 우선 우리는 믿음과 말씀 사이에 영속적인 관련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 둘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은 태양에서 나오는 광선을 태양에서 분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에서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고 선포하신다(55:3). 요한은 이와 같은 믿음의 원천을 보여주려고,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믿게 하려 함이요"(20:31)라고 말했다. 예언자도 백성이 믿도록 충고하기 위해서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95:7)고 한다. "듣는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믿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간단히 말해서 이사야서에는 하나님께서 교회의 자녀들과 외부 사람들을 구별하시는 표지가 있다. ,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자녀들을 가르치셔서(54:13, 6:45)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배우도록(6:45 참조) 하시리라는 것이다. 이 말씀에는 이유가 있다. 만일 은혜를 무분별하게 주신다면 왜 그분께서는 말씀을 소수 사람들에게 보내셨을까? 이 사실과 부합하는 것은 복음서 기자들이 보통 "신자""제자"라는 말을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특히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그렇게 사용하며 936절에서는 한 여인에게까지 이 칭호를 적용한다(6:1-2, 7, 9:1,10,19,25-26,38, 11:26,29, 13:52, 14:20,28, 15:10,16-21).

그러므로 만일 믿음이 목표로 삼아야 할 이 목표로부터 조금이라도 방향이 달라진다면 그 믿음은 본성을 지키지 못한다. 그것은 불안하고 경박한 믿음과 막연히 오류를 믿는 심리 상태가 된다. 믿음을 지탱하며 유지하는 근거는 말씀이며 말씀에서 떠난 믿음은 넘어진다. 그러므로 말씀을 제거하면 믿음은 조금도 남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에서 믿음이 배태되게 하는데 말씀을 심는 사람의 봉사가 필요한가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논할 것이다. 그러나 말씀 자체는 어떻게 우리에게 오든 간에 거울과 같고 이 거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도움을 사용하시든지 또는 자신의 힘만으로 하시든지 간에 자신에게로 이끄시고자 하시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을 복음에 대한 순종이라고 정의하며(1:5), 빌립보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충성한 것을 칭찬한다(1:3-5, 살전 2:13 참조). 믿음의 뜻을 이해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도 특히 이 점이문제이다.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본성이 어떠하신가 하는데 있지 않고 우리에 대해서 어떤 분이 되고자 하시는가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며, 이 지식은 그의 말씀에서 얻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지식의 근거는 하나님의 진실성을 먼저 확신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분열되어 자체 내에서 분쟁이 있으면 말씀의 권위는 의심스러운 것이 되며 약하거나 전혀 없게 된다. 또한 하나님은 진실하시며(3:3 참조),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고(1:2 참조)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신성불가침의 진리라고 확신해야 한다.

 

7.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약속에서 우러나온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말씀이 모두다 인간의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므로 엄격하게 말해서 우리는 그때 믿음이 말씀 안에서 무엇을 지향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말씀은 "정녕 죽으리라"는 것이었다(2:17).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하신 말씀은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는 것이었다(4:10).

그러나 이런 말씀들은 결코 믿음을 세우지 못하고 그 자체만으로는 믿음을 흔들리게 할 뿐이다. 우선 믿음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 어떻게, 무엇을 말하든지 하나님의 진실성을 지지하는데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묻는 것은 믿음은 주의 말씀에서 무엇을 발견하여 거기 의존하며 안주하는가 라는 것이다. 우리의 양심이 진노와 징벌만을 깨닫는다면, 믿음은 어떻게 떨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또는 그 두려워하는 하나님을 피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을 피해서는 안되고,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아직 믿음에 대한 완전한 정의를 얻지 못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조금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아직 믿음이라고 간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뜻 대신에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이나 자비를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소식은 종종 슬프며 그 뜻이 선포될 때에 놀라는 일이 많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믿음의 본질에 더 가까이 접근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이유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우리는 그를 찾는 일에 관심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시며 염려하신다고 말씀하실 때에 이 사실이 우리에게 확증된다. 따라서 우리는 아버지께서 자비하시다고 우리에게 증언할 수 있는 약속 곧 은혜의 약속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으며, 인간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 이외에서는 안식처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근거로 삼아서 시편에서는 대개 자비와 진실을 서로 관련된 것같이 짝을 짓는다(89:14, 24, 92:2, 98:3, 100:5, 108:4, 115:1 ).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알더라도 그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끌지 않으신다면 그 진실하심은 우리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겠다고 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힘으로는 그의 자비를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40:1011),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36:5),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25:10),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117:2, 라틴 역 116:2), "내가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138:2).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시며 약속을 지키신다는 예언서의 말씀들은 인용하지 않겠다.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증거하시며 우리를 먼저 부르셔서 그의 뜻이 의심스럽거나 모호하지 않게 하시지 않는다면, 우리 편에서 그는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신다고 단정하는 것은 경솔한 짓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유일한 보증은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미움과 진노의 표징이 각처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그 선하심을 의지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크게 중요시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의심이 섞인 이해는 제거해야 한다. 그런 이해는 자체 내에 조화가 없고 자신과 싸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성은 어두워져 하나님의 뜻을 간파하거나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도 계속해서 주저함으로 흔들려서 확신 안에 안주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른 방법으로 우리의 지성을 조명하며 우리의 마음을 강화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완전한 믿음을 얻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믿음에 대한 바른 정의를 할 수 있겠다. 믿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또 확실하게 아는 지식이며,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진실성을 근거로 두고 것이며,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며 우리의 마음에 인친 바가 된다.

 

("믿음"이란 용어에 대한 여러 가지 납득할 수 없는 정의들. 8-13)

 

8. "형식을 갖춘" 신앙과 "형식을 갖추지 않은" 신앙

 

더 나아가기 전에 독자들에게 방해물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난제를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우선 우리는 소위 학파들이 문제 삼는 형성된 신앙과 미형성된 신앙이라는 무가치한 구별을 논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조금도 두려워할 줄 모르며 경건한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들도 구원에 관해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을 모두 믿을 수 있다고 상상한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깨우쳐 믿음을 일으키심으로써 우리의 양자됨을 증거하신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조차도 없는 자들의 신념을 감히 "신앙"이란 이름으로 장식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해서는 성경 전체가 반대한다. 우리는 이 이상 더 그들의 정의를 논박할 필요가 없고, 우리가 할 일은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나 있는 대로 신앙의 성격을 설명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하면 그들이 신앙에 대해서 말한다기 보다 무지하고 미련하게 떠들고만 있다는 것이 아주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나는 이미 부분적으로는 말했고, 남은 부분에 대해서는 후에 적당한 곳에서 말하겠다. 내가 지금 말하려는 것은 그들이 만들어낸 허구같이 어리석은 것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신앙과 동의를 동일시하며, 하나님을 경멸하는 자들도 성경이 제시하는 것을 동의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알아야 할 일을 모르고 있다. , 사람이 자기의 노력으로 신앙을 얻는 것인지, 혹은 성령께서 신앙을 통해서 사람이 양자가 된 것을 증거하시는 것인지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앙에 어떤 속성이 첨가될 때에 그것이 같은 신앙인지, 또는 새것이며 다른 것인지를 물으면서 유치하게 떠든다. 그들이 이렇게 떠드는 것을 보면, 확실히 성령의 독특한 선물에 대해서는 전연 생각해 보지 않은 것 같다. 믿음은 그 시초에서 화해를 내포하는 것이며 이 화해에 의해서 사람은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간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10:10)라고 한 바울의 말을 숙고한다면 그들은 신앙에 대해서 냉담한 성격을 만들어내지 않을 것이다.

이 논쟁을 종결시키는 데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내가 이미 암시했고 앞으로 더 자세히 되풀이하려는 그 한 가지 이유는 이것이다. , 문제된 찬동 그 자체는 두뇌에 속했다기보다 마음에 속했으며, 지성보다 감성에 속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믿어 순종"하는 것으로 불리우며(1:5), 주께서도 이 이외의 복종은 원하시지 않으셨다. 자신의 진실성을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이러한 태도는 당연하다. 세례 요한이 증언한 것같이(3:33), 신자들은 그들이 마치 서명 날인하듯 이 진리에 인()을 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므로 경건한 성향이 동의하는 것에 첨가될 때 신앙이 "형성"된다고 하는 그들의 말이 우매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한 마디로 단정한다. 동의하는 것까지도 이런 경건한 성향을 근거로 삼는다. 적어도 성경에 계시된 동의함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명백한 논거가 있다. 믿음은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므로(6:29 참조)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의와 죄의 용서와 화평을 위해 우리에게 보내지셨을 뿐 아니라 성결을 위해서(고전 1:30 참조), 그리고 생명수의 원천으로서(7:38, 4:14 참조)보내지셨으므로 동시에 성령으로 말미암은 성화까지 이해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리스도를 충분히 알 수 없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좀더 쉽게 표현을 한다면 믿음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기초로 삼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성화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믿음을 경건한 성향에서 분리한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9. 고린도전서 13:2 - 형성된 신앙과 미형성된 신앙의 차이를 증명한다

 

그들은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 13:2) 바울의 말을 자주 인용하고 역설한다. 그들은 믿음에서 사랑을 제거함으로써 믿음을 기형으로 만들며 이 구절에서 바울이 "믿음"을 무슨 뜻으로 쓰는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앞장에서 성령의 각종 은사를 방언과 능력과 예언 등을(고전 12:4-10)논하고 고린도 교인들에 게 그들이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여 교회 전체에 더 큰 유익을 주라고 권고한 다음에 이어 "제일 좋은 길을" 보여주겠다고 한다(고전 12:31). 이런 모든 은사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리 훌륭할지라도 사랑에 기초를 세우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야 한다. 그 은사들의 목적은 원래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었으므로 이 일에 이바지하지 못할 때에는 은사의 힘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앞에서 열거한 은혜의 은사들을 다른 이름으로 반복 열거하면서 설명을 덧붙인다. 그뿐 아니라 그는 "능력""믿음"이란 말을 같은 뜻으로, , 기적을 행할 수 있는 힘이란 뜻으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이 능력 또는 믿음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이며, 방언과 예언과 기타 은혜들과 같이 불경건한 사람이 이 믿음의 은사를 자랑하거나 악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이 사랑에서 분리된다고 해도 그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오류에 빠진 근본 원인은 "믿음"의 뜻이 여러 가지라는 데 있다. 그들은 믿음이 의미하는 것의 차이를 보려 하지 않고 이 말이 마치 어디서나 같은 뜻으로 해석되는 것으로 논하였다. 그들이 똑같은 오류를 지지하기 위해서 인용하는 야고보서의 구절에(2:21)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논의 할 것이다.

우리는 교육적 목적을 위하여 믿음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불신자들 사이에 하나님께 대한 어떤 종류의 지식이 있는가를 밝혀 보여주려 한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믿음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선언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으며, 복음서의 이야기와 성경의 다른 부분을 진리로 생각한다. 이런 판단은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일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나 우리가 직접 목격한 일에 대해서 우리가 보통 가지는 판단과 그 성질이 동일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정도를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논의할 여지가 없는 신의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교훈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경고와 약속에 다소의 충격을 느낀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노골적인 불경한 태도로 공격하거나 거부하거나 경멸하지 않고 복종하는 체하는 일종의 연극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믿음이 있다고 말 하지만 이것은 그 말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10. 형식을 갖추지 않은 신앙은 오직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서 믿음의 그림자나 외형에 불과하며 믿음이라고 부를 가치가 없다. 이런 그림자와 믿음의 견고한 실재와는 서로 거리가 얼마나 먼가 하는 것은 더 충분히 밝혀지겠지만, 여기서 간단히 지적하는 것도 무방하겠다. 마술사 시몬도 믿었다고 하지만(8:13), 그는 조금 후에 불신앙을 드러냈다(8:18). 그가 믿었다고 할 때에 우리는 이 말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해석한다. 그들은 시몬이 마음에 없는 믿음을 말로만 믿는다고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시몬은 복음의 존엄성에 압도되어 일종의 믿음을 보이며, 그리스도를 생명과 구원의 원천으로 친정하여 기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누가복음에는 잠시 동안 믿다가(8:13), 말씀의 씨가 열매를 맺기 전에 기운이 막혀버리거나, 심지어는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즉시 시들어 죽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8:6-7).

이런 사람들은 말씀을 약간 맛보고는 더욱 욕심이 나서 말씀을 움켜 붙잡으며 그 거룩한 힘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뿐 아니라 자기 생각에도 믿는것 같은 잘못된 인상을 준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보이는 존경이 곧 경건이라고 믿으며, 하나님 말씀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거나 경멸하지 않는다면 전혀 불경건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동의는 어떤 종류이든 간에 마음속까지 침투하지 못하며 정착하지 못한다. 뿌리를 내리는 것같이 보이는 때도 있으나 그것은 살아있는 뿌리가 아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허영심이 숨을 틈이 많으며 거짓이 잠복할 공간이 많다. 그것은 거짓의 위선으로 장식되어 스스로 기만하는 때도 많다. 그러나 이런 믿음의 그림자를 자랑하는 사람들은 이 점에서 마귀들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은 마귀들도 믿고 떠는 일들을(2:19) 듣고 이해한다고 하나 우둔하여서 마귀들보다도 훨씬 열등하다. 또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느끼든 간에 결국은 공포와 절망에 빠지고 만다는 점에서 마귀들과 같다.

 

11. 타락한 사람들에게도 "믿음"이 있는가?

 

바울은 믿음을 선택의 결과라고 했는데(살전 1:4-5), 버림받은 사람들에게도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믿기 어려운 것을 나도 안다. 그러나 이 어려움은 쉽게 해결될 수 있다.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들만 믿음의 광명을 받으며 복음의 힘을 느끼지만 버림받은 사람들도 때로는 선택된 사람들과 거의 같은 감동을 가지며, 그들 자신의 생각으로는 선택된 사람들과 전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 수 있다(13:48 참조). 그러므로 사도가 버림받은 자들도 하늘의 은사를 맛본다고 한 것이나(6:4-6), 그리스도께서 그들도 일시적으로 믿는다고 하신 것은(8:13) 조금도 불합리하지 않다. 이것은 그들이 영적인 은혜의 힘과 믿음의 확실한빛을 굳게 잡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께서 그들의 죄를 더욱 명백하게 하며 변명할 여지를 주시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마음에 잠입하여 양자로 삼는 영은 받지 못하더라도 주의 선하심을 맛보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자들이 양자가 된다는 확신을 가질 근거가 없지 않느냐고 어떤 사람이 항의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과 일시적인 믿음을 받은 사람들은 서로 유사점이 많지만, 선택받은 사람들에게서만 바울이 칭송한 확신, , 높은 소리로 아바 아버지라고(4:6, 8:15 참조) 부르는 확신이 풍성하게 자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택된 사람들만을 썩지 않을 씨로 거듭나게 하시며(벧전 1:23), 그 마음에 심으신 생명의 씨가 결코 죽지 않게 하시며, 이렇게 하심으로써 양자로 삼으시는 선물을 그 마음에 확실하게 인치시고 항상 또 확실히 존속하게 하신다.

그러나 성령께서 버림받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보다 낮은 정도의 작용을 하시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신자들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고도 겸손하게 자기반성을 하며, 육의 확신이 들어와서 믿음의 확신을 밀어내지 못하도록 하라고 가르치신다. 이뿐만 아니라 버림받은 사람들은 은혜에 대한 인식이 언제나 혼돈된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그것의 견고한 실체보다 그림자를 파악할 뿐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성령께서는 선택된 사람들에 한하여 그들의 마음속에 죄의 용서를 확인시켜 주시며 이 사람들이 특별한 믿음으로 그 용서를 잘 활용 할 수 있게 하신다. 그러나 버림받은 사람들이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이는 그들도 비록 혼란하며 불분명하면서도 화해의 선물을 받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더불어 동일하게 믿음이나 중생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위선의 가면을 쓰고 동일한 믿음의 시초를 가진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혜를 인식할 만한 광명을 그들의 마음에 주신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인식과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증거를 서로 구별하시므로 그들에게서는 그 인식이 완전한 결실에 이르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지만 그들을 참으로 죽음에서 구출해 그의 보호 하에 두시지는 않고, 다만 임시로 자비를 보이실 뿐이다.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믿음의 산 뿌리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기셔서 그들이 끝까지 견딜 수 있게 해 주신다(24:13). 그러므로 반대주장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만일 하나님께서 참으로 은혜를 보이신다면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그의 은혜에 대한 일시적인 인식을 후에 사라지고 마는 인식으로 조명하시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12. 참 믿음과 거짓된 믿음

 

또 믿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아는 지식과 그 자비의 진실성에 대한 확실한 신념이지만, 하나님의사랑에 대한 인식이 세속적인 일들 때문에 소멸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인식은 믿음에 비슷하지만 거기에는 큰 차이가 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이 변하지 않으며, 그 분의 진실하심에는 언제나 자기모순이 전혀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성경이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허락하는 비밀의 계시에 관해서는 버림받은 사람들이 그 계시를 통찰하고 마침내 그것에 도달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변함없는 뜻을 그대로 이해한다거나 그 뜻의 진실성을 꾸준히 믿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그들에게는 오직 일시적인 인식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살아있는 뿌리를 내릴 정도로 깊이 심지 못한 나무에 비할 수 있는데, 그런 나무는 몇 해 동안 꽃과 잎 뿐 아니라 열매까지도 열릴 수 있으나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시들어버린다. 요약하면 첫 사람의 반역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그의 마음과 영혼에서 말살된 것같이 하나님께서 사악한 사람들을 은총의 빛으로 비추시다가 후에 빛이 소멸되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복음을 아는 지식으로 어떤 사람들의 마음을 가볍게 감동시키시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지식이 마음에 깊이 스며들게 하시는 것을 무엇으로도 막을 방법이 없다. 동시에 우리는 이 점을 잘 알아야 한다. 곧 선택된 사람들의 믿음이 아무리 부족하고 약하더라도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위해 그들이 양자가 되었다고 하는 확실한 보증과 날인을 해주심으로써(1:14, 고후 1:22 참조) 그분이 새겨두신 표징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결코 말소되지 않지만 사악한 사람들 위에 비치는 빛은 후에 사라지는 성질의 것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씨에 대해서는 선택된 사람들의 경우와 달라서 성령께서 생명을 주시지 않으며 그 씨를 영원히 썩지 않게 만들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렇다고 성령을 거짓되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그뿐 아니라, 사악한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는 때가 있지만 그들의 마음에 서로 사랑하겠다는 감동을 일으킬 필요가 있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일상 경험으로 분명히 알 수 있다. 사울은 하나님을 사랑하겠다는 경건한 충동이 왕성한 때가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 같으신 분으로 알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즐거워하고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삼상 9-11). 그러나 버림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에 대한 신념이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아들로서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완전히 보답하는 것이 아니라 고용인처럼 행동한다. 사랑의 영은 그리스도께만 주어졌고, 그 조건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에게 그 사랑의 영을 불어넣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울이 한 말은 확실히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만 해당한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5). 다시 말해서,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릴 수 있는 확신(4:6 참조), 곧 위에서 말한 그 확신을 일으키는 사랑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여전히 사랑하시면서도 그들에 대해서 이상하게도 분노하신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워하시는 마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느낌으로써 놀라서 육적인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며, 나태를 버리고 분발하여 회개하도록 만드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나 그들의 죄에 대해서 노하시며, 동시에 자비를 베푸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고 기도하며, 동시에 고요한 확신을 가지고 피난처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에게로 피한다. 이런 증거를 보면 어떤 사람들은 진정한 믿음이 없기도 하거니와 믿음이 있는 체도 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갑자기 충동적인 열성에 휩쓸려 그릇된 의견을 품게 되며 자신을 속인다. 확실히 이런 사람들은 심히 태만하여 올바르게 자기의 마음을 검토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 하셨다"(2:24-25)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한 말일 것이다(일시적인 신앙과 살아 있는 영구적인 신앙 사이에 유사점이 많으므로 나는 그것을 "공통" 신앙이라고 부른다). 만일 그런 공통 신앙에서 낙오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1-32)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향해서 믿음 안에서 전진하라고 권면하시며, 나태함으로 인해서 이미 받은 빛을 꺼지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바울은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믿음이 있다고 하였으며(1:1), 사라진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들이 산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뜻으로 말하였다. 그리스도께서도 마태복음에서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15:13)라고 같은 뜻으로 말씀하신다.

하나님과 사람을 조롱하고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거짓말은 더욱 야비한 것이다. 기만적인 구실로 믿음을 모독하는 이런 종류의 불경한 사람들을 야고보는 맹렬히 공격한다(2:14-16) 자기에게 없는 것을 담대하게 자랑하며, 공허한 겉치레로 남과 자기까지 속이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면,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거짓이 없는 믿음"을 요구하지 않았을 것이다(딤전 1:5). 그러므로 그는 선한 양심을 믿음을 보관하는 상자에 비교한다. 이는 선한 양심을 버렸으므로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딤전 1:19, 3:9 참조).

 

13. 성경에서 "믿음"이란 말은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믿음"이란 말의 뜻이 애매모호함을 알아야 한다. 믿음은 앞에 인용한 구절에서와 같이 경건에 대한 건전한 교훈만을 의미하는 때가 많다. 같은 편지에서 바울은 집사들이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딤전 3:9) 가지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같은 뜻으로 그는 믿음에서 떠나는 사람들이 있으리라고 하였다(딤전 4:1).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디모데가 "믿음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으리라"(딤전 4:6 참조)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그는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이 많은 사람들을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원인이라 하고(딤전 6:20-21, 딤후 2:16 참조), 다른 곳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라고 불렀다(딤후 3:8). 그가 디도에게 그들을 꾸짖어(1:13) 온전한 믿음을 가지게 하라고 명령할 때에(2:2 참조), "온전"이란 말은 단순히 순수한 교훈을 의미하며, 이 교훈이 경박한 인간성에 의해 쉽게 부패하고 타락된다고 한다. 바꿔 말하면 믿음은 그리스도를 보유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2:3) 있으므로 믿음을 거룩한 교훈의 전체에 확대하는 것은 옳으며, 믿음을 거룩한 교훈에서 분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믿음을 어떤 특별한 대상에 국한시키는 때가 있다. 예컨대 마태에 의하면 기와지붕을 뜯어 중풍병자를 달아 내린 사람들의 믿음을 그리스도께서 보셨다고 한다(9:2). 또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도 백부장의 믿음만한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감탄하셨다(8:10). 그러나 그 백부장은 아들이 낫기를 간절히 바라고(4:47이하 참조), 아들을 고쳐야겠다는 생각 밖에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승낙과 대답만을 얻고도 만족했고, 친히 와 달라고 간청하지는 않았다. 이 사정을 보시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셨다.

조금 전에 우리는 바울이 "믿음"을 기적을 행하는 은사로 본다는 것을 지적했다. 이 은사를 가진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영으로 중생 되지 않았고 하나님을 열렬하게 경배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 다른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믿음을 확립하는 교훈과 믿음을 동일시한다. 믿음이 사라질 것이라고(고전 13:10, 4:14 참조) 기록할 때에 그는 확실히 교회의 사역에 대해서 현재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이 사역이 필요하다고 언급하였다. 이런 표현법에는 비슷한 예가 담겨져 있다. 거짓된 고백이나 거짓된 표시를 "믿음"이란 말로 부르는 것은 타당하지 않으나 이 그릇된 적용이 악하고 타락한 종교를 "하나님을 경외함"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예컨대 사마리아와 부근 지역에 이주시킨 이방 민족들이 거짓 신들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함께 경외했다는 말씀이 성경에 자주 나온다(왕하 17:24-41). 이것은 그들이 하늘과 땅을 혼합했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묻는 것은 불신자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별하는 믿음에 관한 것이다. 이 믿음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기도하며,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며, 영원한 구원과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한다. 나는 믿음의 성격과 힘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고 믿는다.

 

(7 절에 있는 믿음의 정의에 무엇을 암시하는가에 대한 상세한 검토 : 지식의 요소. 14-15)

 

14. 믿음은 보다 차원 높은 지식이다

 

이제 우리는 믿음에 대한 정의의 각 부분들을 다시 검토하기로 하자. 그 정의를 자세히 검토하고 나면 아무 의심도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믿음을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보통 우리가 인간의 감각적인 지각으로 아는 사물들에 관해서 말하는 지식이나 이해와는 다르다. 믿음은 감각을 훨씬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믿음에 도달하려면 사람의 마음은 그 자체를 초월해야 한다. 마음은 믿음에 도달한 때라도 그 느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믿을 때에는 그 신념이 확실하기 때문에 어떤 인간적인 것을 자체의 능력으로 지각한 때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는" 힘이라고 바울은 아름답게 묘사한다(3:18-19 참조). 그가 말하는 뜻은 우리의 마음이 믿음에 의해서 얻는 것은 어느 면으로 보든지 무한하며, 이런 종류의 지식은 모든 이해력을 훨씬 초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 뜻의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주께서는 그 비밀을 성도들에게 나타내셨다(1:26, 2:2 참조). 그러므로 믿음을 자주 "인식"이라고 부르며(1:17, 4:13, 1:9, 3:10, 딤전 2:4, 1:1, 1: 6, 벧후 2:21), 요한은 믿음을 "지식"이라고 부르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요한은 신자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안다고 언급한다(요일 3:2). 또 그들은 확실히 이 일을 안다. 그러나 그들은 합리적인 논증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는다기보다 하나님의 진리에 의해 더욱더 강화된다. 바울의 말도 이 점을 밝힌다. "우리가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 5:6-7). 이런 말로 바울은 우리가 믿음을 통해서 아는 일들은 우리 앞에 있지 않고 눈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믿음의 지식은 이해가 아니고 확신이라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다.

 

15. 믿음은 확신을 내포한다

 

우리는 확신의 더욱 견실한 항구성을 표현하기 위해 "확실하고 견실한"이라는 말을 첨가한다. 믿음은 의심스럽고 변하기 쉬운 견해로 만족하지 않으며, 모호하고 혼돈된 관념으로도 만족하지 않는다.

믿음은 완전하고 확정된 확실성을 요구한다. 이런 확실성은우리가 어떤 일을 체험했을 때와 증명했을 때에도 경험한다. 우리의 마음에는 불신앙이 깊이 뿌리를 박고 있으며 우리는 불신앙으로 많이 기울어지고 있기 때문에, 각각 어려운 투쟁을 겪지 않고는 하나님이 신실하시다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을 마음으로 확신할 수 없다. 특히 현실생활과 부딪힐 때에 사람은 모두 흔들리며 그 숨은 약점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뛰어난 칭호를 사용하여 그 권위를 높이시는 것은 당연하다. 성령의 의도는 내가 언급한 병을 고치며,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완전히 믿게 하시려는 것이다. 다윗은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12:6)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18:30)라고 하였다.

더 나아가 솔로몬도 바로 이 생각을 거의 같은 말로 확인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30:5). 그러나 시편 119편은 거의 전체가 이 점을 증명하므로 다른 구절들을 열거할 필요가 없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우리에게 권하실 때마다 간접적으로 우리의 불신앙을 책망하신다. 우리의 심정에서 사악한 의혹을 일체 근절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이다.

또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하면서도 거의 아무런 위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완전히 확신하는 듯하면서도 그 선하심을 너무도 좁은 범위 내에 국한시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인지를 의심하며, 비참한 불안에 눌려 지낸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가 위대하며 풍성한 것과 많은 사람이 그 자비를 받은 것과 모든 사람이 언제든지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한다. 그러나 그 자비가 자기들에게도 임할까 또는 자기들이 그 자비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이 추리를 도중에서 그치면 그것은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사람의 정신에 힘과 확고한 평안을 주지 못하고 불안한 의심으로 괴롭힌다.

그러나 이와 훨씬 다른 완전한 확신을 느낄 수 있는데 성경에서는 이런 확신은 항상 신앙에서 기인된다고 한다. 우리들을 위하여 명백하게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할 여지가 없게 만드는 것은 이 믿음이다(2:2, 살전 1:5, 6:11, 10:22 참조).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의 감미로움을 우리가 참으로 느끼며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는 확신이 생길 수 없다. 그래서 사도는 믿음에서 확신이 나온다고 하며, 확신에서 담력이 생긴다고 한다. 그는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3:12)고 하였다. 이런 말로 그는 우리가 평온한 마음으로 감히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한다면 거기는 바른 믿음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 담력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구원을 확신하는 데서만 생길 수 있다. 이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에 "믿음"이란 말은 확신이란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믿음의 확실성과 두려움과의 관계. 16-28)

 

16. 믿음의 확실성

 

사실 믿음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점은 다음과 같다. ,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자비의 약속은 우리의 외부에서만 타당하고 우리의 내부에서는 전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고서, 오히려 그 약속을 진심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화평"이라고 부르는 확신이 드디어 생긴다(5:1). 혹은 화평을 확신에서 온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화평은 일종의 확신이며, 이 확신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양심을 평온하며 평화롭게 만든다. 이 확신이 없으면 양심은 늘 놀라며, 그 혼란과 고통으로 인해서 거의 사분오열의 상태에 빠진다. 하나님과 자기를 잊어버리고 잠시 잠이 드는 때만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참으로 일시적인 망각이며, 이 가련한 망각도 얼마 가지 못하여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생각이 되살아나서 양심을 찢으며 고통을 가한다. 요약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에 대해서 인자하시며 호의를 가지신 아버지시며 그 분의 관용을 근거로 삼아 모든 일을 약속하신다는 것을 굳게 확신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신자이다. 그는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신 약속들을 신뢰하며 의심 없이 구원을 굳게 바란다. 사도는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3:7)이라는 말로 이 점을 밝힌다. 그래서 사도의 생각으로는 천국의 유업을 확신 있게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주를 올바르게 신뢰한다고 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구원받은 것을 굳게 믿고 의지하면서 마귀와 사망을 자신 있게 굴복시키는 사람이 아니면 신자가 아니다. 바울의 간략하고 능숙한 요약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다. , 그는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고백하였다(8:38-39). 그러므로 같은 방식으로 사도는 부름 받은 우리가 얻을 영원한 기업의 소망이 어떤 것인지를 분간하지 못한다면 우리 마음의 눈이 올바로 조명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1:18). 바울은 어디서나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암시를 가르친다. ,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그것에 대한 큰 확신을 얻지 못한다면 그 이외의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잘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17. 시험에 맞서 투쟁하는 믿음

 

그럼에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신자들의 경험은 매우 다르다.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면서도 그들은 자주 임하는 불안으로 시련을 받을 뿐 아니라 극심한 공포에 흔들리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들의 마음을 괴롭히는 시험은 너무도 강렬하여 믿음의 확실성과는 조화되지 않는 것같이 보인다." 따라서 우리가위에서 말한 주장을 지지하려면 이 난제를 해결해야겠다. 확실히 우리는 한편으로 믿음은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면서도 의심의 기미가 없는 확증이나 불안의 습격을 받지 않는 확신을 상상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신자들이 자기의 불신앙과 부단히 싸운다는 것을 말한다. 참으로 우리는 신자들의 양심이 아무런 동요도 없는 평화로운 안식을 누린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다시 한 번 그들이 어떤 시련을 당할 때,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얻은 그 확실한 신념에서 떨어지거나 떠나게 된다는 것을 부인한다.

성경에는 다윗의 믿음보다 더 뛰어나거나 또는 기억에 남는 예를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우리가 그의 생애 전체를 바라볼 때 그러한 인상을 받는다. 다윗은 자기의 마음이 항상 불안했다는 탄식을 무수히 말했는데 그런 탄식의 예를 몇 개만 들겠다. 그는 감정이 불안해하는 자기의 영혼을 향해서 비난할 때에 자기의 불신앙에 대해서 어찌 분노하지 않았는가?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42:5, 11, 43:5). 확실히 놀라며 당황한다는 것은 불신앙의 명백한 징조요,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른데서 우리는 더 완전한 고백을 읽는다. "내가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31:22). 다른 구절에서 그는 불안하고 비참한 혼란 중에서 자기 자신과 논쟁을 하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까지 언쟁을 시작한다.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77:9, 7). 그 다음에 있는 말은 더욱 심하다.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77:10). 그는 절망에 빠져 자신이 죽어 마땅한 자로 인정하며 자기가 회의로 고통하는 것을 고백할 뿐 아니라 마치 투쟁에서 쓰러진 것같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버리시고 한때 자기를 도와주시던 그의 손을 돌려 자기를 멸망시키려 하신다. 그래서 그는 심한 풍랑에 시달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자기의 영혼을 향하여 그 평안으로 돌아가라고 권한다(116:7).

그러나 이것이 놀라운 일이다 이 모든 공격을 받으면서도 믿음은 신자들의 마음을 지켜주며, 그 효력에 있어서는 참으로 종려나무와 같다(92:12). 종려나무는 모든 짐과 싸우면서도 머리를 들고 일어선다. 그래서 다윗은 압도된 듯이 보일 때 자신을 비난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서 일어섰다. 자신의 무력과 싸우며 불안한 순간에도 믿음을 잡으려고 매진하는 사람은 이미 총체적으로 승리를 얻었다. 이런 추리를 할 수 있는 근거가 될 말씀은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27:14)라는 것이다. 다윗은 이 말씀에서 겁이 많은 자신을 드러내며, 같은 생각을 두 번 반복함으로써 여러 가지 불안스런 감정에 자주 붙잡힌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약점들에 불안을 느낄 뿐 아니라 그 결점을 고치려고 정성껏 노력한다.

만일 다윗과 아하스를 공평하게 비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큰 차이를 발견할 것이다. 이 악하고 위선적인 왕에게 이사야가 파견되어 그의 불안을 고치려 하였다. 이사야는 왕을 향하여 "삼가며 종용하라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고 말했다(7:4). 아람(Ahaz) 왕은 어떠하다고 했는가? 그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았다는 말이 위에 기록되었다(7:2). 그래서 그는 약속을 듣고도 여전히 떨고 있다. 그러므로 불신앙에 대한 벌을 여기서 볼 수 있다. 사람이 믿음으로 자기가 들어갈 문을 열지 않는다면, 그는 계속 떨다가 드디어 하나님을 저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무거운 시험에 눌리며 거의 뭉개질 정도가 되더라도 끊임없이 일어선다. 거기에 어려움과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의 마음이 약한 것을 알기 때문에 예언자와 함께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119:43). 이런 말씀에서 우리는 마치 그들의 믿음이 쓰러진 것처럼 그들은 간혹 말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낙심하거나 돌아서지 않고 싸움을 계속한다. 그리고 기도로 나태한 자신을 채찍질하여 해이한 생활로 무감각한 상태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한다.

 

18. 믿는 자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갈등

 

이 점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다른 곳에서 언급한 영과 육의 분열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이 분열은 여기서 가장 분명히 나타난다. 경건한 사람은 속마음에 분열을 느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느낌으로 감미로운 느낌이 일부에 스며들었으나 다른 한편에서는 재난의 쓴맛을 알고 슬퍼한다. 한편에서는 복음의 약속을 믿고 안심하면서 다른 편에서는 자기의 죄를 알고 공포에 떤다. 한편으로는 생명을 소망하여 기뻐하는데, 또 한편으로는 죽음을 직시하고 전율한다. 이런 변동은 믿음이 불완전한 데서 생긴다. 현세 생활에서는 불신앙의 병을 완전히 치료하고 신앙으로 충만하게 채우며 차지하는 행운을 볼 수 없다. 따라서 여러 가지 갈등이 생긴다. 육의 잔재 속에 안주하는 불신앙이 마음 안에 배태된 신앙을 공격한다.

만일 신자의 마음에 확신과 의심이 섞여 있다면 우리가 돌아가는 결론은 언제나 이것이 아닌가? , 믿음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근거로 한다고 하더라도 그 지식은 확실하고 분명한 것이 아니라 막연하고 혼란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여러 가지 생각에 끌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믿음에서 완전히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불신앙의 책동으로 사면초가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불신앙의 밑 없는 수렁에 빠져버리지는 않는다. 우리는 얻어맞지만 우리의 입장에서 전락하는 것이 아니다. 갈등의 결말은 언제나 같다. 곤란한 문제들에 포위되어 위기에 처한 듯하던 믿음이 결국은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된다.

 

19. 약한 믿음도 진실한 믿음이다

 

요컨대 처음에 지극히 작은 믿음일지라도 그것이 우리 마음속에 스며들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 곧 평화롭고 평온하고 우리에 대하여 은혜로우신 얼굴을 보기 시작한다. 우리는 먼데서 하나님을 보다 분명히 볼 수 있어서 우리가 결코 속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전진해야 하므로 더욱 꾸준하게 전진한다. 전진할수록 하나님을 더 가까이서 그리고 더 확실히 보게 된다. 그리고 계속 전진하는 동안에 하나님을 더욱 잘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조명될 때에 처음에는 많은 무지에 둘러싸여 있지만, 이 무지는 점점 없어진다. 그러나 어떤 일들을 모른다고 해서 또는 아는 것이 모호하다고 해서 사람의 마음이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아는 데에 방해를 받지는 않는다. 이는 마음이 깨닫는 것은 믿음의 가장 기본적이며 으뜸이 되는 부분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마치 옥중에 갇혀서 반쯤 희미해진 햇빛이 좁은 창으로 비스듬히 비치는 것을 보는 사람과 같다. 그가 태양을 완전히 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의 눈은 꾸준히 비치는 그 빛을 보며 그 은혜를 받는다. 이와 같이 아무리 짙은 암흑 속에 갇혀 있을지라도 육신의 쇠사슬에 매인 우리도 변하지 않는 확신을 가지기에 필요한 빛을 얻는다. 그것은 바로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는 하나님께서 그 찬란한 빛을 조금이라도 비추어 주시기 때문이다.

 

20. 신앙의 약점과 장점

 

사도는 여러 구절에서 이 두 가지 점을 다 좋게 가르친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고전 13:9,12)라고 하며,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라고(고전 13:12)하면서 바울은 참으로 거룩한 지혜가 현세에 있는 우리에게는 얼마나 조금 밖에 부여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을 시사한다. 이 말씀들의 뜻은 우리가 육신의 짐을 지고 신음하는 동안은 믿음이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불완전하므로 더욱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 무한한 것은 우리의 부족한 척도로 측량할 수 없으며 우리의 좁은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무언중에 가르친다. 바울은 교회 전체에 관해서도 이 점을 밝혀 말한다. 우리 각 사람은 자기의 무지가 장애와 방해물이 되어 그만큼 가까이 접근해야 할 곳까지 가지 못한다.

그러나 다른 구절에서 같은 바울은 아주 적은 믿음이라도 그 순수한 맛을 확실히 맛볼 수 있게 한다고 가르친다. ,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노출된 얼굴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 결과로 변화하여 주의 형상과 같이 된다고(고후 3:18) 바울은 언급한다. 우리의 마음은 본능적으로 특히 불신앙으로 기울어지기 때문에 극도의 회의와 공포는 반드시 이런 무지에 둘러싸이게 된다. 그뿐 아니라 무수한 각종 시험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맹렬한 공격을 가한다. 그러나 특히 우리의 양심이 죄의 짐에 눌려 혹은 불평하고 신음하며, 혹은 자책하며, 혹은 비밀히 중얼거리며, 혹은 노골적으로 소동을 일으킨다. 그래서 역경이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든지, 오는 양심이 스스로 자체 내에서 진노의 증명과 근거를 발견하든지 간에 불신앙은 여기서 무기와 계략을 삼아 신앙을 전복시키려고 한다. 공격하는 목적은 언제나 같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신다는 생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우리의 불구대천의 원수이신 것같이 무서워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21.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의 방패이다

 

믿음은 이런 공격을 견디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무장하며 방위 태세를 강화한다. 어떤 종류의 시험이 우리를 공격하며, 우리를 돌보지 않는 하나님은 우리의 원수라고 우리를 생각하게 할 때에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괴로움을 주시지만 그의 고통은 진노가 아니라 사랑에서 오는 것이므로 그는 또한 자비로우시다고 대답한다. 하나님은 불의를 벌하시는 분이라는 생각으로 우리가 충격을 받을 때에 믿음은 여기에 대항해서 죄인이 주의 자비를 얻으려고 나아가기만 하면 주께서는 언제나 모든 불의를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제시한다. 따라서 신자의 마음이 아무리 이상하게 번뇌와 괴로움을 당할지라도 결국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믿는 확신을 결코 빼앗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시험하며 괴롭히는 모든 싸움은 이 확신을 굳게 만드는 결과가 된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징벌로 심각한 압박을 받는 듯한 때에도 하나님 앞에 자기들의 불평을 토로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전혀 들어주시지 않을 듯한 때에도 그들은 하나님에게 간구한다. 만일 그에게서 도와주실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기도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사실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기도할 생각을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적다고 그리스도의 꾸지람을 들은 제자들은 여전히 그의 도움을 간청하였다(8:25-26). 실로 그리스도께서도 그들의 믿음이 적은 것을 책망하실 때에 그들을 제자의 대열에서 축출하거나 불신자와 동일시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에게 그 결점을 털어 버리라고 역설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한 말을 반복한다. 믿음의 뿌리는 신자의 가슴에서 결코 뽑히는 법이 없고 가장 깊은 속에 굳게 박혀 있어서 믿음이 아무리 흔들리고 전후좌우로 구부러지는 것 같아도 그 빛은 결코 꺼지지 않으며, 이를테면 적어도 잿더미 아래서도 잔존한다. 또 이 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결코 썩지 않는 씨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과 똑같은 열매를 맺으며, 씨의 번식력은 결코 완전히 소멸되거나 죽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성도가 낙망하게 되는 궁극적 원인은 목전의 사태로 보아서 그들이 파멸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손에 의한 것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욥은 그의 희망은 원대하여 비록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신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할 것이라고 언급했다(13:15). 실상은 이러하다. 불신앙은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지배력을 얻지 못하고 밖에서 공격을 가할 뿐이다. 불신앙의 무기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지 못하고 다만 괴롭힐 뿐이며 혹은 상처를 입히더라도 그것은 치료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교훈과 같이 믿음은 우리의 방패이다(6:16). 이 방패를 들면 그것은 원수의 무기의 힘과 대항해서 완전히 물리치든지,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그 공격력을 약하게 만들며 우리의 급소를 찌르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믿음이 흔들린다는 것은 굳센 용사가 맹렬한 창의 공격을 받아 뒷걸음질 치며 물러서는 것과 같다. 그리고 믿음 자체가 상처를 입을 때 그것은 용사의 방패가 창에 맞아 터진 곳이 있지만 창에 꿰뚫리지 않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신자의 마음은 항상 일어서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23:4)고 다윗과 같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사망의 음침한 곳을 다니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아무리 굳센 신자라도 무서워하며 겁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곁에 계셔서 그들을 안전하게 돌보아 주신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기 때문에 두려움은 곧 사라지고 확신이 나타난다. 어거스틴의 말과 같이 악마가 아무리 위대한 계략으로 우리를 공격할지라도 믿음이 거하는 우리의 속마음에 자리를 잡지 못한 이상 결국 물러나고 만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판단한다면 신자들은 모든 전투에서 무사히 돌아오며 새로운 힘을 얻은 후에는 곧 다시 전쟁터로 나아간다. 그뿐 아니라 요한이 편지에서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라고 한 말이 실현된다. 그리고 요한은 우리의 믿음은 한두 번 정도 전투에서만 또는 어떤 특수한 공격에 대해서만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일천 번 공격을 당할지라도 전세계를 이길 것이라고 단정한다.

 

22. 옳은 두려움

 

"두렵고 떨림"에는(2:12) 다른 종류도 있다. 이것은 믿음의 확실성을 감소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확고하게 만든다. 경건치 못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내린 예를 보고 신자들이 그것을 자기들에 대한 경고로 생각하며 같은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할 때에 신자들은 이런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을 가진다. 또는 자신의 가련한 상태를 반성하여 전적으로 주를 의지할 줄 알게 되고, 주를 떠난 자신들은 어떤 바람보다도 불안정하며 덧없는 존재인 것을 깨닫는 때에 신자들은 두렵고 떨림을 경험한다. 사도가 하나님께서 옛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신 징벌을 일일이 묘사하는 이유는 고린도 신자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일으켜 그들이 같은 악행에 걸려들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고전 10:11). 사도는 이런 방법으로 그들의 확신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육신의 태만을 일깨울 뿐이다. 대개 육신의 태만으로 믿음은 강화되기보다는 파괴되는 편이 더 많다. 바울이 유대인들의 실패를 근거로 삼아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11:20)고 권고할 때에 그는 우리가 자신의 확고함에 자신이 없는 듯이 흔들리라고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의 의도는 우리의 교만을 없애며 우리가 자신의 힘을 경솔하게 과찬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뿐이다. 유대인들이 버림을 받은 후에 그들 대신에 받아들여진 이방인들이 기뻐 뛰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자들만을 상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외관만을 자랑하는 위선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또한 개인들에게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비교하여 유대인들이 버림을 받은 것은 불신앙과 배은망덕에 대한 당연한 벌이었다는 것을 밝힌다. 다음은 이방인들을 향해서 유대인들을 대신하여 최근에 양자가 된 은혜를 교만이나 허영으로 잃어버리지 말라고 충고한다. 유대인들이 버림을 받았을 때에 양자의 계약을 저버리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 남은 것 같이 이방인들 사이에는 진정한 믿음이 없는 자들이 나타나 이 미련한 육적인 자신으로 부풀어 자멸에 이르며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악용하리라고 한다. 그러나 사도의 이 말을 선택된 신자들에게 적용하더라도 겁낼 것은 없다. 자부심을 억제하는 목적은 육의 잔재에서 쳐지나 간혹 성도의 마음속에 잠입하는 이 교만이 헛된 확신으로 방자하게 날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과 양심의 정기를 잃는 것과는 문제가 아주 다르다. 공포심을 불어넣어 양심의 기운을 잃으면 양심은 하나님의 자비를 확신하지 못하여 평안을 잃어버린다.

 

23. "두려움과 떨림"

 

그러므로 사도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고 가르칠 때에, 사도는 우리가 주의 권능을 높이며 자기를 아주 낮추는 것이 습관화 되도록 하라고 요구할 따름이다.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마음에 확신을 얻게 되려면, 우리 자신을 믿지 말 것과 자신의 파멸 상태를 인식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선지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 뜻을 깨달아야 한다.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경배하리이다"(5:7).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는 담대한 믿음과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경건한 두려움을 올바르게 결합시킨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엄하심 앞에 나아갈 때마다 두려움을 느끼며, 그 존엄하신 광채에 비추어 우리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가를 깨달아야 한다.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질 것이며 항상 두려워하는 사람은 복되다고(28:14)한 솔로몬의 말 역시 진리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우리를 괴롭히며 넘어지게 하는 두려움이 아니고 우리를 더욱 조심성 있게 만드는 두려움이다. 우리가 이런 두려움을 느낄 때 혼미한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회복하며 낙심했던 마음이 그의 안에서 되살아나며 절망에 빠졌던 마음이 그를 믿음으로써 새롭게 소생한다.

그러므로 신자가 무서워하는 동시에 확고한 위안을 얻는 것은 전혀 무방한 일이다. 눈을 자기의 허무성에 돌렸다가 하나님의 진실성을 생각하는 것이다. 어떻게 두려움과 믿음이 한 마음 속에 공존할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태만과 불안이 공존하는 것과 같다. 불경건한 사람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수고를 피하려고 아무 고통도 없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을 추궁하여 소원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무 거리낌 없이 자기 백성이 겸손하도록 훈련시키시며 그들이 역전 분투하는 동안에도 능히 자기를 억제하며 지배할 수 있도록 하신다. 문맥상 전후 관계로 보아서 사도가 말한 의도도 분명히 이것이었다. 그는 두려움과 떨림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 때문이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그의 백성에게 올바른 의욕과 그것을 용감하게 실천하는 능력을 주신다고 한다(2: 12-13).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언자가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3:5)고 한 말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낳을 뿐만 아니라 낙심한 사람에게 은혜가 임한 때에 그 은혜의 감미로움과 즐거움은 그 사람의 마음을 경외와 동시에 찬탄으로 가득하게 채워,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권능에 겸손히 복종하게 한다.

 

24. 확실성이 확고부동한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는 최근에 어떤 사이비 교황주의 신봉자들이 슬그머니 교묘하게 꾸며내기 시작한 유해한 철학을 용납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스콜라 철학자들이 전해온 유치한 회의적 사상을 옹호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공상에 도피처를 구하는 것이다. , 불신앙이 섞인 확신이란 것을 만들어내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볼 때마다 우리는 그에게서 완전한 소망의 근거를 발견한다는 것을 그들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모든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우리에게 항상 있지 않으므로 그들은 우리가 우리의 이 무가치함을 보고 동요하고 주저하기를 바란다. 간단히 말하면 그들은 양심을 소망과 공포 사이에 놓고 가끔 번갈아 가면서 이쪽저쪽으로 왕래하게 만든다. 그들이 말하는 소망과 공포의 관계는 소망이 높아지면 공포는 억압되고 공포가 다시 올라가면 소망은 다시 내려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탄은 믿음의 확실성을 깨뜨리기 위해서 지금까지 사용하던 노골적인 수단이 이제는 무효하게 된 것을 알고 은밀한 수단으로 믿음을 약화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가끔 절망에 빠지는 확신이란 어떤 확신인가? 그들은 그리스도를 보면 거기에는 확실한 구원이 있고 돌이켜 자신을 보면 거기에는 확실한 멸망이 있으므로 불신앙과 소망이 교대로 우리 마음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이런 말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계신 것 같이 생각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그리스도께로부터 구원을 기대하는 것은 그가 멀리 나타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그의 몸에 접붙이셔서 그의 모든 은혜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받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이 이론을 그들에게 향하여 말하려 한다. 자신을 돌아보면 그대들에게는 확실한 멸망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모든 은혜와 함께 자신을 그대들에게 나눠주셨으므로 그의 것은 모두 그대들의 것이 되며, 그대들은 그의 일부분이 된다. 참으로 그와 하나가 되며, 그의 의는 그대들의 죄를 눌러버리며 그의 구원은 그대들이 받을 정죄를 말소하시며, 그의 높은 가치로 인해서 그대들의 무가치함이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지 않도록 중재하신다. 이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에게서 분리하거나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분리해서는 안 된다. 그와 반대로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우리를 하나로 묶으신 그 친교의 유대를 우리는 용감하게 두 손으로 굳게 잡고 있어야 한다.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려 산 것이니라."(8:10)고 가르친다. 이 사람들의 쓸데없는 생각대로 한다면,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죄인이므로 여전히 사망과 정죄를 면할 수 없다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실제로 한 말은 훨씬 다르다. 그는 우리는 당연히 정죄를 받아야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이 그 정죄를 삼켜 버렸다고 가르친다.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는 내가 앞에서 말한 이유를 든다.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밖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끊을 수 없는 교제의 유대로 우리와 꼭 결합해서 계실 뿐 아니라 놀라운 영적 교통에 의해서 날이 갈수록 더욱더 우리와 한 몸이 되시며, 마침내 완전한 일체가 되신다. 그러나 나는 위에서 믿음이 연약하여 좌우로 맹렬한 공격을 받아 중단되는 일이 있으며, 시험의 짙은 암흑 속에서 그 빛이 꺼지는 일이 있다고 한 말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믿음은 영원히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

 

25. 믿음의 두 가지 면에 대하여 베르나르드가 한 말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드(Bernard)는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논할 때에 비슷한 추론을 한다. 그의 교회 봉헌에 관한 제 5 설교에 이런 말이 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끔 나의 영혼을 반성합니다. 그런 때에 나는 영혼에서, 말하자면 두 가지 상반되는 국면을 발견하는 것 같이 생각합니다. 나의 영혼을 그대로 보면 그것은 무로 돌아간다고(72:22 불가타 역) 하는 것이 가장 진실한 말입니다. 영혼이 가진 가련상을 일일이 들어 말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죄의 짐을 지고 암흑에 둘러싸였으며, 쾌락의 노예가 되어 육정과 정욕이 끓어오르며, 망상이 가득하여 항상 악에 쏠리며, 각종 죄악에 끌리는 영혼한 마디로 말해서 수치와 혼미가 가득한 영혼입니다. 확실히 우리의 의로운 행실들을 진리의 빛에 비추어 검토한다면, 그것은 모두 월경 중인 여인의 더러운 옷과 같음을(64:6)발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불의한 행실들은 무엇에 비교할 것입니까?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6:23). 그러면 무엇이라고 해야겠습니까? 틀림없이 '사람은 헛것' 같을 뿐입니다(144:4). 사람은 무로 돌아갑니다.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크게 보시는 사람이 어떻게 전혀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어떻게 무가 될 수 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용기를 냅시다. 우리 자신의 마음속을 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필경 우리의 무엇인가가 하나님의 마음속에 숨어 있을 것입니다. '자비의 아버지!'(고후 1:3) 오 가련한 자들의 아버지 ! 어찌하여 당신은 우리에게 마음을 두십니까?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6:21). 그러나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어떻게 당신의 보물이 되겠나이까?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40:17). 참으로 당신 앞에서 그러하나이다. 그러나 당신 안에서는 그렇지 않나이다. 당신의 진리가 판단하면 그러하오나 당신의 진실하신 의도에서는 그렇지 않나이다. 당신께서는 참으로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4:17). 그러므로 당신께서는 없는 것을 부르시므로 그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그들을 부르셨으므로 그들은 있습니다. 그들 자신만으로는 없으나 당신이 함께 계셔주시므로 그들은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말하는 것같이, 그들의 의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은 것입니다(9:11). 그리고 그는 이 두 가지 생각 사이의 연결은 경탄할 만하다고 말합니다. 서로 연결된 것은 확실히 서로 파멸시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그는 이 점을 더욱 명백하게 말한다. "이제 우리가 무엇인지를 이 두 가지 점에서 자세히 검토한다면, , 한편으로 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요 다른 편으로 보면 크게 여김을 받는다는 것을 검토해 본다면우리의 자랑은 적어 보이겠지만 이전에 비해서 아마 더 크고 근거도 더 훌륭할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자랑하리라고 믿습니다"(고후 10:17).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우리는 곧 자유를 얻으리라(17:14 참조)고 우리가 생각한다면 우리는 용기를 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높은 망대에 올라 하나님의 도성을 찾으며, 그의 성전을 찾으며, 그의 집을 찾으며, 그의 신부를 찾도록 합시다. 나는 잊지 않았습니다두려움과 공경하는 마음으로 나는 말합니다. 우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존귀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겨주시기 때문입니다.

 

26.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과 하나님에 대한 공경함

 

그런데 "여호와를 경외함"에 대해서는 모든 성도가 증언하며, 어떤 곳에서는 이것을 "지혜의 근본"이라 하고(111:10, 1:7), 다른 곳에서는 "지혜" 자체라고 한다(15:33, 28:28). "여호와를 경외함"은 하나이지만 그 근본 의미는 이중적이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와 주인으로서의 경배를 받으실 고유의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올바르게 경배하려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해서 순종하는 아들로서 그리고 동시에 충성된 종으로서 처신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주를 아버지로서 순종하는 것을 주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공경"이라 부르시고 주인으로서 섬기는 것을 "경외" 또는 "두려움"이라고 부르신다.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1:6)라고 말씀 하신다. 여기서는 두 말을 구별하시면서도 서로 융합시켰다. 그러므로 주께 대한 우리의 경외는 공경과 두려움이 섞인 것이 되어야 한다. 한 마음이 이 두 가지 마음을 함께 가진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대해서 어떤 분이신가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비록 지옥이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것은 죽음보다도 더 무서워해야 할 이유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러나 거리낌 없이 죄를 짓고자 하는 육의 욕망은 불손한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억제하려면 우리를 자기 능력 아래 두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불의를 미워하신다는 것을 즉시 생각해야 된다. 그리고 악한 생활을 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키는 사람들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27. 자녀와 종의 두려움

 

더욱이 요한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요일 4:18)고 말한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한 말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말하는 두려움은 불신앙에서 생기는 공포심이며, 신자의 두려움과는 아주 다르다. 악한 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니다. 벌만 피할 수 있다면 그들은 태연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벌을 주시는 권능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그의 진노에 대해서 말만 들어도 무서워 떤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그렇게까지 무서워하는 것은 자기들 위에 그 진노가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언제든지 자기들의 머리 위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것을 벌보다 더 두려워하며, 마치 벌이 목덜미 위에 얹혀 있는 듯이 벌에 대한 공포심을 느끼는 일은 없다.

그러나 그들은 벌 받을 일을 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한다. 그래서 사도는 신자들을 향해서 "누구든지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5:6)라고 말한다. 사도는 하나님의 진노가 신자들에게 임하리라고 위협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방금 열거한 악한 행위들을 하는 불경건한 무리에게 임할 진노를 생각하라고 경고하여 신자들이 그런 행위를 할 욕망을 갖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악한 자들은 위협만으로는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허락을 내리시면, 우둔하고 나태한 그들은 마음이 굳어 더욱더 고집을 부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한번 얻어맞으면 싫든 좋든 간에 그들은 두려워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두려움은 보통 "종의" 또는 "비굴한" 두려움이라고 불려지며 자녀들에게 합당한 자유롭고 자발적인 두려움과 대조된다. 어떤 사람들은 세밀한 구별을 해서 중간적인 두려움을 끼어 넣는다. 이것은 비굴하고 강요된 공포심이 때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굴복시키므로 하나님께 대하여 기꺼이 올바른 두려움을 품게 되기 때문이다.

 

28. 신앙의 보증하는 것은 지상의 번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런데 믿음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는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써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시는 한 아무 선도 부족할 수 없다고 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약하실 때 우리는 구원을 충분히 확신하게 된다. "주의 얼굴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80:3)라고 예언자는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성경이 요약하여 말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되는 것을 해소시키고 은혜로 우리를 받아들이신다고 한다(2:14).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목케 되실 때 우리를 위해서 모든 일이 잘 되는 것을 막는 위험은 일소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파악한 믿음은 금세와 내세에 대한 약속을 얻었으며(딤전 4:8), 모든 좋은 일에 대한 확고한 보장을 얻었다. 그러나 좋다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깨달을 수 있는 종류의 일들이다. 믿음은 물론 이 세상에서의 장수나 부귀를 기대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이런 것들을 우리를 위하여 예정하시지 않으셨다. 믿음은 한 가지 확신만 있으면 만족한다. 곧 현세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이 그렇게 많이 우리에게 없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확신이다. 그뿐 아니라 믿음이 가진 가장 중요한 확신은 내세의 생명을 기대하는데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내세의 생명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단정한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포옹하신 사람들은 어떤 불행과 재난이 닥쳐오더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완전한 행복으로 느끼는 데는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행운을 요약해서 말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우리의 모든 좋은 일이 이 근원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성경에서 영원한 구원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어떤 좋은 일을 말할 때마다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며, 경건한 마음은 하나님의 인자를 생명보다도 더 감미로우며 귀한 것으로 느낀다고 한다(63:3).

요컨대 모든 일이 우리의 소원대로 잘 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이나 증오하심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우리의 행복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따라서 불행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에게 아버지의 얼굴같이 비친다면, 우리의 불행은 우리의 구원을 돕는 수단이 될 것이므로 불행이 곧 행복이 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 가지 불행을 열거하면서 그런 불행에 의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고 자랑한다(8:35, 39 참조). 그리고 기도할 때에는 항상 모든 번영의 근원인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말한다. 마찬가지로 다윗도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공포심에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내세운다. 그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23:4)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으로 만족하며, 은혜 안에서 평화를 찾지 않으면, 또한 저 시편에 있는 말씀을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33:12). 우리 마음속에 깊이 새기지 않으면, 항상 마음의 동요를 느낀다.

 

(신앙의 기초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값없이 주신다는 약속인데, 이 약속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29-32)

 

29. 하나님의 약속이 믿음을 지탱한다

 

믿음은 원래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약속 위에 선 것이므로 우리는 그 약속을 믿음의 기초로 본다. 믿음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명령과 금지 약속과 경고 등 모든 일에 참되시다는 것을 확신한다. 또한 하나님의 계명들을 공손히 받아들이며 금지 사항들을 지키며 경고하신 것에 유의한다. 그러나 믿음은 원래 약속에서 출발하며 약속에 안주하며 약속에서 끝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구하는 것이므로 이 생명은 징벌에 대한 선언이나 계명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약속하는 값없이 주신 약속에서만 얻을 수 있다. 조건부의 약속은 우리 자신의 행위를 조건으로 삼는 약속은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서 생명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생명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떨며 흔들리지 않게 하려면, 구원의 약속으로 그것을 강화해야 하며, 이 약속은 우리의 공적이 아니라 우리의 가련함을 보면서 주께서 기꺼이 또 값없이 주시는 것이라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을 "믿음의 말씀"이라고(10:8) 증언한다. 그는 복음과 율법의 교훈을 구별하며 약속도 구별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너그럽게 사신들을 보내어 세상을 자신과 화목케 하지 않으신다면(고후 5:19-20 참조) 믿음을 확립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는 자주 믿음과 복음을 서로 관련시킨다. 자기가 복음 전파의 직분을 받은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어 순종케"(1:5) 하려는 것이라고 하며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가르친다(1:16-17). 이것은 당연한 말이다. 복음은 "화목하게 하는 직책"이므로(고후 5:18)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완전히 확고한 증언은 믿음이 알고자하는 복음 이외에는 없다.

그러므로 믿음은 값없이 주신 약속을 근거로 삼아야 한다고 말할 때에 우리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자비를 주시겠다는 약속이야말로 믿음의 고유한 목표라는 것을 지적한다. 한편으로는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악행을 심판하시며 징벌하시는 것을 인정해야 되는 동시에, 다른 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올바르게 응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신 분"이며(86:5 참조), "자비로우시며"(103:8),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며"(103:8), "만유에 친절하시며"(144:9),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신다"(145:9)고 묘사하기 때문이다.

 

30. 믿음이 은혜에 대한 약속만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이유

 

나는 피기우스(Pighius)나 그와 같은 개들이 짖는 것을 상대로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겠다. 그들은 이 제한성을 공격하여 믿음을 산산조각을 낸 다음에 한 조각만 붙잡을 생각인 것 같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시든지 은혜의 소망을 주시든지 하나님의 성실성이 믿음의 공통된 대상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나도 이 점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세상의 멸망이 아직 눈에 보이지 않을 때에 노아가 그것을 두려워한 사실을 사도는 믿음으로 돌린다(11:7). 만일 절박한 징벌을 두려워서 믿음이 나온 것이라면, 믿음을 정의할 때에 경고를 제외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옳은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은 마치 우리가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부분을 고려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같이 부당한 비난을 한다. 우리의 의도는 다음 두 가지 점을 역설하려는 것이다. 첫째로, 값없이 주신 약속에 도달하기까지는 믿음이 견고하게 설 수 없다. 둘째로,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결하지 않으면 믿음은 우리와 하나님을 결코 화해시키지 못한다. 이 두 가지 점은 다 유의할 가치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악한 자들과 구별하며 신자를 불신자와 구별하는 믿음을 추구한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명령은 모두 정당하며, 그의 경고는 참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다고 해서 그를 신자라고 부를 것인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를 근거로 하지 않는다면, 믿음이 성립될 견고한 조건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무슨 목적으로 믿음을 논하는가? 구원의 길을 파악하려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구원하는 믿음이 될 수 있는가? 따라서 우리가 믿음을 정의할 때에 이 특별한 효과를 역설하며, 신자와 불신자를 분리하는 표지로서 각자의 특색을 말하는 것은 조금도 불합리한 일이 아니다. 요컨대 악의를 가진 자들이 이 주장을 헐뜯으려면 그들은 반드시 바울까지 비난하게 될 것이다. 바울이 복음을 "믿음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다(10:8).

 

31. 신앙에 대한 말씀의 의미

 

이 점을 근거로 하여 우리는 전에 나무의 열매를 위해서 산 뿌리가 필요한 것과 같이, 믿음을 위해서는 말씀이 필요하다고 설명한 것을 다시 한 번 추론한다. 이는 다윗이 증거하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그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9:10).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의 상상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인자하심을 증거하실 때에 생긴다. 이 점을 예언자는 다른 곳, "주의 말씀대로주의 구원"(119:41)에서 확인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주의 말씀을 의뢰"하오니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한다(119:42 ,40 ,94). 여기서 우리는 우선 믿음과 말씀의 관계를 다음에는 그 결과인 구원을 주목해야겠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을 제외하지 않는다. 이 권능에 대해서 확고한 믿음이 서있지 않으면 하나님을 합당하게 공경할 수 없다. 바울은 아브라함에 대해서 평범한 말을 한 것같이 볼 수도 있다. , 축복받은 아들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아브라함은 능력이 있으신 분으로 믿었다고 바울은 말한다(4:21).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도 자신에 관해서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한다고 한다(딤후 1:12).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의심이 얼마나 자주 마음속에 잠입하는가를 반성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능력에 당연한 찬양을 드리는 사람들은 그 신앙이 적지 않게 진보했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원하시는 일을 무엇이든지 하실 능력이 있으시다고 우리는 모두 고백할 것이다. 그러나 사소한 시험을 당하여도 무서워 쓰러지며 혼비백산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절감시키고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에 반대하여 우리를 위협하는 사탄을 더 크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사야는 백성의 마음에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깊이 심어 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무한한 권능을 당당하게 논한다(40:25이하, 40-45장에서도 빈번히). 이사야가 용서와 화해의 소망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할 때에는 먼저 다른 이야기를 하며 불필요한 긴 미로를 헤매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때가 많다. 그러나 이때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자연 법칙으로 온 우주 전체를 얼마나 놀랍게 주관하시는가를 상고한다. 그러나 여기에 현 사태를 위해서 필요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이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우리의 귀는 말씀을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그 진가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유력한 능력을 선언하는 것은 다른데서 말한 바와 같이 경건한 사람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권능을 활용하여 곤란에 대처하기 때문이며, 특히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아버지이신 것을 증명하실 때에 행하신 업적들을 회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구속에 관하여 자주 언급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한번 자기들을 구해주신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그 구원을 지켜주시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또 다윗의 예를 보면, 하나님께서 각 개인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그들이 앞으로도 하나님을 굳게 믿도록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으로 우리가 버림을 받은 듯이 보여질 때에 우리는 시야를 넓혀 하나님의 이전의 은혜를 회상함으로써 원기를 회복해야 한다. 시편에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며"(143:5)라고 한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 하리이다"(77:11)라고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행하신 일들에 대한 생각은 말씀이 없으면 곧 사라진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의 증거로 조명해 주시지 않는다면 어떤 믿음도 있을 수 없다고 우리는 단정한다. 이 단정에는 합당한 근거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래와 리브가를 어떻게 생각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다. 이 두 사람은 열렬한 신앙이 불타는 듯했으며, 말씀의 한계를 넘어선 듯 보이기 때문이다. 사래는 약속받은 후손을 얻으려는 열망으로 여종을 남편에게 주었다(16:2, 5). 사래가 여러 가지로 죄를 지은 것을 우리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가 열성으로 흥분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내에 머물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욕망이 신앙에서 나왔다는 것은 확실하다. 리브가는 아들 야곱을 택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히 믿고 약은 속임수로 아들에게 축복을 얻어 주었다(27:9). 그녀는 남편 곧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며 전달하는 사람을 속이고 아들에게 억지로 거짓말을 시킨다. 여러 가지 간계와 기만으로 하나님의 진실을 더럽힌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우롱함으로써 그가 할 수 있는데 까지 그 약속을 깨뜨렸다(27).

그러나 이 행위는 비록 실패로 돌아갔고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었지만 신앙이 없는 행위가 아니었다. 리브가는 지상적인 유익을 얻을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큰 곤란과 위험이 넘치는 일을 성취하려고 분투노력하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사소한 장애물을 극복할 필요가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족장 이삭에 대해서도 비록 둘째 아들에게 영예가 옮겨진 것에 관해서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침을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맏아들 에서에게 마음이 기울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에게 신앙이 전혀 없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예들을 보면 신앙에는 확실히 과오가 섞이는 일이 많다. 그러나 그런 때에도 진정한 신앙은 항상 이기는 법이다. 리브가의 특별한 과오가 축복을 무효로 만들지 않은 것과 같이 그녀의 믿음도 말살되지 않았다. 이 믿음은 대체로 그녀의 마음을 지배하였고 문제의 행동도 신앙이 발단과 원인이 있던 것이다. 그러나 리브가는 이점에서 인간적인 심리를 드러내 보이는데 사람의 마음은 조금이라도 단속을 완화하면, 아주 재빨리 곁길로 들어서 버린다. 그러나 사람의 태만과 무력은 신앙을 흐리게 할지라도 소멸시키지는 못한다. 동시에 이 예들은 우리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가를 경고하며 우리가 이미 가르친 것을 확인한다. 곧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지를 얻지 않으면 소멸한다는 것이다. 사래와 이삭과 리브가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비밀히 속박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에 꾸준히 순종하도록 만들지 않으셨다면, 정도를 벗어난 술책을 쓰다가 제정신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32. 믿음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다

 

또 우리가 모든 약속을 그리스도안에 포함시키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사도는 복음 전체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포함시킨다(1:17 참조). 다른 곳에서 그는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라고 가르친다(고후 1:20). 이 사실에 대한 이유는 알기 쉽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약속하실 때 그 약속을 통해서 자신의 선하심을 증거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약속은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한다.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자주 받고 또 받으면서도 도리어 더 큰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해서 이 사실에 또 다른 점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은혜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인정하는 때에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마음속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알 수 없고 짐승들이 그 형편에 따라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를 받으면서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다.

자기들을 위해서 주신 약속을 상습적으로 거부하는 그들은 필연적으로 더욱 무거운 형벌을 받게 된다. 약속은 우리 마음에 신앙을 일으킬 때에 처음으로 그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우리의 배신 때문에 약속의 힘과 특성이 소멸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통해서 사람들이 그의 선하신 은혜를 받을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라고 재촉하신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한 사랑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약속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한다는 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데 이점은 논의의 여지가 없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3:17, 17:5), 아버지의 사랑이 그의 안에 거하고 머문다. 그리고 그로부터 그 사랑이 우리들 위에 쏟아진다. 이는 바울이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1:16).우리가 은혜를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중재하실 때 은총은 반드시 우리에게까지 도달한다. 따라서 사도는 그를 "우리의 화평"이라고 부르며(2:14), 다른 곳에서는 진실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우리와 연결시키는 띠이신 그리스도를 제시한다(8:3 이하 참조). 따라서 우리는 어떤 약속이 우리에게 제시될 때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확증되며 실현된다고 당당하게 가르친다(15:8).

어떤 예는 이와 일치하지 않는다. 예컨대 수리아 사람 나아만(Naman)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경배하는 방법에 대해서 예언자에게 물었을 때에 중보자에 대한 교훈을 받은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경건하다고 칭찬을 받았다(왕하 5:1-14, 4:27). 이방인이요 로마 사람인 고넬료가 유대인들이 그것도 그 일부 사람들이 겨우 희미하게 알고 있던 일을 분명하게 알 수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의 구제와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다(10:31). 그리고 나아만의 제물은 예언자의 대답에 의해서 인정되었다(왕하 5:17-19). 신앙이 없이는 이 두 사건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빌립이 만난 내시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 그에게 다소의 신앙이 없었다면 그는 예배하기 위해서 수고를 하며 비용을 들이면서 어려운 길을 오지 않았을 것이다(8:27). 그러나 빌립이 울었을 때에 그가 중보자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사실이 나타났다(8:31). 나는 그들의 신앙이 어떤 점에서는 그리스도의 위()라고 뿐만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권한과 직분에 대해서까지도 함축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동시에 그들은 비록 조금일지라도 그리스도를 맛볼 수 있을 정도로 원리를 가르침 받은 것이 확실하다. 이 점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시가 모르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먼 예루살렘까지 왔을 리가 없다. 고넬료는 유대교를 믿게 되자 확실히 오래되지 않아서 참 교리의 기초를 알게 되었다. 나아만에 대해서는 엘리사가 그에게 사소한 일들을 가르쳐주면서 가장 중요한 점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대한 지식이 그들에게 애매모호했다고 하더라도 전혀 없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율법에 정한 제사를 실천했으며, 그 제사의 목표는 그리스도였기 때문에 그들의 율법의 제사는 이방인들의 거짓 제사와 구별하는 것이 당연하다.

 

(믿음은 성령에 의하여 우리의 마음에 계시된다. 33-37)

 

33. 말씀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에 효과를 나타낸다

 

우리의 마음이 어둡고 사악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이 외부적인 증명만으로도 우리의 믿음을 불러일으키는데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헛된 것에 기울어져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에 결코 이를 수 없으며, 우둔하여 항상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한다. 따라서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이것으로 보아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인간의 이해력을 훨씬 초월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화되고 지원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지성이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조명을 받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 문제에 대한 스콜라 철학자들의 생각은 완전히 잘못되었다. 그들은 지식에서 생기는 단순한 동의를 믿음과 동일시하고 심령의 확신과 확실성을 무시해 버린다. 그러므로 믿음은 두 방면으로 하나님의 특이한 선물이다. 사람의 지성은 정화되어 하나님의 진리를 맛볼 수 있게 되며, 마음은 그 진리를 확신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은 믿음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점차적으로 성장하게 하여, 드디어 우리를 믿음으로 인하여 천국에 도달하도록 인도하신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 1:14)고 바울은 말한다. 우리는 사도가 듣고 믿음으로써 성령을 받는다고(3:2) 한 말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성령의 선물이 하나뿐이었다면, 바울이 성령을 "믿음의 결과"라고 한 것은 불합리한 말이었을 것이다. 성령은 믿음의 근원이며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여러 가지 은사를 주셔서 그것으로 교회를 장식하시며 끊임없이 믿음을 더하심으로써 교회를 완전하게 만드신다고 하면서 그 여러 가지 은사를 열거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런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해 주는 일들을 바울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믿음을 받지 못하면 아무도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고(6:65) 하는 것은 대단히 모순된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사람들이 하늘의 지혜가 얼마나 은밀하고 고상한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거나, 또는 사람이 얼마나 우둔하여 하나님의 비밀을 지각하지 못하는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부분적으로는 사람들이 믿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확고 불변한 마음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34. 성령만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다

 

바울이 가르치는 것과 같이,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고전 2:11) 아무도 사람의 뜻을 알 수 없다면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알 사람이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가 현재 눈으로 보는 사물에서도 하나님의 진실성을 잘 믿지 못하면서 하물며 눈으로 볼 수 없고 이해력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일을(고전 2:9 참조) 하나님께서 약속하실 때에 어떻게 하나님의 진실성이 확고부동할 수 있을까? 그러나 여기서 사람의 통찰력은 완전히 압도되어 무력하게 되므로 주의 학교에서 전진하는 첫걸음은 자기의 통찰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베일같이 우리를 덮고 "어린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11:25, 10:21) 하나님의 비밀에 우리가 도달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16:17),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교훈이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령의 지원이 필요하며 더 적절하게 말한다면 성령의 권능만이 여기에서 성공할 수 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11:34). 그러나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고전 2:16)을 알게 되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 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6:44),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6:45)라고 말씀하신다. 일찍이 아버지를 본 사람이 없으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만이 그를 보았다(1:18과 요 5:37의 융합).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갈 수 없는 것과 같이 일단 끌려가면 우리의 지성과 마음은 높이 들려 우리의 이해력은 초월한 경지에 이른다. 그때에 우리의 영혼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 이를테면 새로 날카로운 시력을 얻어 이전에 눈을 멀게 했던 그 찬란한 하늘의 비밀을 보게 된다. 또 인간적인 이해력도 이같이 성령의 빛으로 조명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일들을 드디어 참으로 맛보기 시작하며, 이전에 심히 어리석고 미각이 둔하던 것과는 달라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두 제자에게 그의 나라의 비밀을 밝히 설명하려고 하셨으나(24:27)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24:45) 하시기까지는 아무런 발전이 없었다. 비록 사도들은 이렇게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배웠지만 그들이 귀로들은 바와 같은 교훈을 그들의 마음속에 부어 주기 위해서는 진리의 영이 그들에게 오실필요가 있었다(16:13).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태양과 같이 말씀이 선포된 모든 사람에게 비치지만, 눈먼 사람들에게는 아무 효과가 없다. 그런데 이 점에서 우리는 원래 모두 눈이 멀었다. 따라서 성령이 내면적 교사가 되셔서 우리의 마음을 비추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 길을 마련하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침투할 수 없다.

 

35. 인간은 성령이 없이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

 

다른 장소에서 자연의 부패상을 논할 때에 우리는 사람이 믿음을 가지기에 부적당하다는 것을 자세히 밝혔다. 따라서 여기서 같은 말을 반복하여 독자들을 지루하게 하지 않고 바울의 말만을 회상하려고 한다.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 우리에게는 원래 없는 믿음 그 자체를 바울은 "믿음의 마음"(고후 4:13)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그는 데살로니가 신자들 안에서 "하나님이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기를 기도한다(살후 1:11). 여기서 바울은 믿음을 "하나님의 역사"라고 부르며, 그것을 형용사로서 구별하는 대신 "선을 기뻐함"이라는 적절한 말로 부른다. 이와 같이 그는 사람 자신이 믿음을 일으킨다는 것을 부인하며, 이것으로도 만족하지 않고,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라고 첨가한다. 고린도서에서 그는 믿음은 사람의 지혜를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근거로 삼는다고 말한다(고전 2:4-5). 그는 사실 외부적인 기적에 대한 말도 한다. 그러나 악한 자들이 눈이 어두워 이 기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다른 곳에서 말한 인치심을 포함시킨다(1:13, 4:30).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영광스러운 선물로 그의 크고 풍성하신 은혜를 더 완전히 나타내시기 위하여, 그 선물을 무차별하게 모든 사람에게 주시지 않고 원하시는 사람들에게만 특권으로서 주신다. 이에 대한 증거들을 우리는 위에서 인용하였다. 증거의 충실한 해석자인 어거스틴은 감탄하여 "우리 구주께서는 믿음이 공로로 인하여 오는 것이 아니고 선물로서 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6:44),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6:65), 두 사람이 듣는데 한 사람은 멸시받고 한 사람은 세움을 받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멸시받는 사람은 자기 때문인 줄로 여기고 세움을 입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같이 자랑하지 말라"고 말했다. 다른 구절에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무슨 이유로 한 사람에게만 주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는가? 나는 조금도 부끄러움 없이 이것이 십자가의 깊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판단의 어떤 깊은 곳에서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모두 나온다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안다. 어째서 할 수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나는 그 어째서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 이 사람과 저 사람이 다른가? 이 점을 나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밑 없는 구덩이며, 십자가의 깊이다. 나는 찬탄할 수는 있으나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요컨대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영의 힘으로 우리를 조명하셔서 믿음을 가지게 하실 때에 동시에 우리를 자신의 몸에 접붙이시므로 우리는 모든 좋은 것에 참여하게 된다.

 

36. 마음의 문제로서의 믿음

 

이제 남은 일은 지성이 흡수한 것을 마음속에 부어넣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려면, 그 말씀이 두뇌의 상층부에서 돌아다녀서는 안되고 마음의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렇게 될 때에 그것은 시험의 모든 전략을 막아낼 수 있는 난공불락의 방위선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의 조명이 지성에 진정한 이해력을 준다면, 마음에 확신을 주는 것 또한 성령의 능력임은 더욱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불신하는 마음은 우매한 마음보다 더욱 중대한 문제이다. 지성이 사상을 얻는 것보다 마음이 불신을 얻는 것은 더욱 어렵다. 따라서 성령이 날인하는 일을 맡으셔서, 이미 마음에 확실성을 심어준 그 약속들을 마음에 인치시며, 마음을 견고하게 확립하기 위하여 보증의 직책을 맡으신다. 사도는 "너희도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1:13-14) 되느니라고 단정한다. 바울이 이를테면 신자들의 마음에 성령께서 인을 치셨다고 가르치는 것을 보지 않는가? 우리 중에 복음을 확고하게 하신다고 해서 그는 성령을 "약속의 영"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같은 방식으로 고린도서에서도 그는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1-22)고 말한다.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바울은 소망의 확신과 담대함에 대해서 말하고 성령의 보증이 그 확신의 기초라고 한다(고후 5:5).

 

37. 의심은 믿음을 소멸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전에 말한 것을 잊지 않았으며, 경험에 의해서 자주 그것을 회상하게 되는데 곧 믿음은 여러가지 의심에 시달려 신자의 마음은 평안한 때가 거의 없으며, 적어도 항상 평화로운 상태를 즐기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공격 무기가 신자들의 마음을 흔들지라도 그들은 시험의 골짜기에서 일어서며 망대 위에 굳게 선다.

참으로 우리가 시편에 있는 말씀을 굳게 잡고 있으면 이 확신만이 믿음을 키워 주며 믿음을 보호한다. 시편의 말씀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46:1-3)라고 하였고 다른 시편도 이 아름다운 평안을 찬양한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3:5). 다윗이 항상 평온하며 행복한 생활을 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믿음의 정도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았고, 그 범위 내에서는 자기의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는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도리어 경멸한다고 장담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믿음을 격려하려는 목적으로 우리에게 잠잠하라고 명령한다. 이사야서에서 "너희가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이라고 했으며(30:15), 시편에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고 하였다(37:7). 이런 구절들에 해당하는 것으로 사도는 히브리서에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이라고 말한다(10:36).

 

(여기에 대한 스콜라 철학자의 항의를 논박함. 38-40)

 

38. 신앙의 확신에 관한 스콜라 철학자의 오류

 

그러므로 우리는 스콜라 철학자의 주장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판단 할 수 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각 사람이 스스로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여부에 따라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는 도덕적 판단으로 알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사실 우리의 행위를 근거로 삼아서 우리에 대한 주님의 생각을 판단해야 된다면, 우리는 추측으로 은혜에 전혀 도달할 수는 없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믿음은 단순하고 값없이 주시는 약속에 대응해야 되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만일 우리의 순결한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해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주장한다면, 대체로 우리는 어떤 신념으로 무장해야 하는가? 그러나 나는 이런 문제들을 다른 곳에서 논하기로 했으므로 여기서는 더 생각하지 않겠다. 이는 특히 믿음과 가장 반대되는 것은 의심과 유사한 모든 것이며, 추측도 그 하나님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전도서에 있는 증언을 항상 인용하여 그 뜻을 왜곡되게 해석하는 악행을 범한다. 그것은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사람이 알지"(9:1) 못한다고 한 말씀이다. 라틴어 성경의 번역이 잘못이라는 것은 묻지 않더라도 솔로몬이 이 말을 하는 뜻은 어린이들이라도 오해할 수가 없다. 현존 상태를 근거로 삼아서 하나님께서 누구를 미움으로 추궁하시며 누구를 사랑으로 안으시는가를 판단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헛수고를 하는 것이며 아무 유익도 없으리라는 것이 솔로몬의 의도이다. 또한 "의인과 악인이며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라 한다(9:6).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번창하게 하시는 사람에게 영원히 사랑을 보이시는 것이 아니며, 괴롭히시는 사람에게 항상 미움을 나타내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인간의 미련한 천성을 증명하시려고 이렇게 하시는 것이다. 반드시 알아야할 일에 대해서도 인간성은 심히 우둔하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조금 전에 사람과 짐승이 동일하게 죽기 때문에 사람의 영혼과 짐승의 혼과의 차이를 알 수 없다고 했다(3:19). 이 말을 읽는 사람이 영혼 불멸에 관한 우리의 견해가 추측을 근거로 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런 사람을 미쳤다고 하지 않을 것인가? 지금의 사태를 눈으로 보아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은혜도 전혀 확실하지 못하다고 추론하는 사람들이 바른 정신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가?

 

39.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내재함을 기뻐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잘 안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경솔한 추정이라고 주장한다. 만일 우리의 미약한 이해력을 표준으로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계획을 판단하려는 것이라면, 그런 경우에 한해서 나는 그들의 주장에 양보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바울과 함께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느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고 말하는데 그들이 성령을 모욕하지 않고서 어떻게 우리에게 대항하여 소리를 칠 수 있는가? 성령께서 주신 계시를 허위, 불확실, 모호 등의 말로 비난하는 것이 무서운 모독 행위라면, 그 확실성을 단정하는 우리는 무슨 죄를 짓는 것인가?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감히 그리스도의 영을 자랑하는 것도 대단히 무모한 짓이라고 큰 소리로 외친다. 세상의 선생으로 자칭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기초에 대해 이렇게 수치스러운 실수를 하며 이렇게 우둔한 짓을 하리라고 누가 생각할 것인가? 그들이 쓴 글이 남아 있어서 증명하지 않는다면 나는 믿지 못했을 것이다. 바울은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언명한다(8:14).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 정신으로 움직이며 하나님의 영을 가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가르치기를, 우리는 성령의 명령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성령만이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한다(8:16).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을 금하지는 않으나 올바른 기도를 인도하셔야 할 성령을 배제한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감동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바울은 주장한다(8:9 참조).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을 필요로 하지 않는 기독교를 조작한다. 바울은 우리가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복된 부활의 소망이 우리에게 없다고 한다(8:11). 그들은 이런 느낌이 없는 소망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혹 이렇게 대답하리라.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나 확신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 겸손한 태도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 반성하며, 그리스도를 소유했는지를 시험해 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는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계신다는 것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버림받은 것"이라고 하였다(고후 13:5).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요한은 말한다(요일 3:24, 4:13)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부어주시겠다고 확언하셨는데(44:3, 2:28 참조), 우리가 이 영을 받지 않고서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약속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면 믿음은 특히 성령의 특별한 사역인데 그 믿음을 성령에게서 분리시키려는 것은 성령을 해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런 점은 경건의 초보이므로 성령이 자기들과 함께 계심을 감히 자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교만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가장 가련한 장님의 표시이다. 이런 자랑이 없으면 기독교 자체가 성립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4:17).

 

40. 우리가 끝까지 인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불확실성

 

그들은 믿음의 확고부동성을 해하려고 한편으로만 애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른 쪽으로 공격한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의의 현재 상태에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에 관한 판단을 할 수는 있지만 끝까지 인내 하는데 대한 지식은 어디까지나 미결이라고 말한다. 도덕적 추측에 의해서 우리가 이 순간에는 은혜를 가졌다고 단정하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구원에 대한 훌륭한 확신이 남을 것인가 ! 사도가 하는 말은 훨씬 다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8-39). 그들은 사도가 특별한 계시를 받아서 그런 확신을 가졌던 것이라고 쓸데없는 해석을 지껄인다. 그러나 그들은 피할 수 없이 단단히 잡혔다. 바울이 논하는 것은 모든 신자가 공통적으로 믿음으로 얻는 은혜이며 그만이 체험한 일들이 아니다. 그런데 그는 다른 곳에서 우리의 약하고 흔들리는 마음에 대해서 말함으로써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사실 두렵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가 설명하듯이(벧전 5:6),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의 강하신 손아래 낮출 줄을 알게 하는 두려움이다.

그렇다면 믿음의 확실성을 어느 한 시점에 국한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 믿음의 본성은 현세 생활이 지나간 후에 있을 미래의 영생을 바라보는 것이다. 신자들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 믿음을 통하여 하늘의 생명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린다. 그러므로 이런 자랑은 교만과는 전혀 다르다. 만일 이 자랑을 고백하기를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행동은 겸손이나 순종을 증거한다기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정하는 악행으로서 도리어 그의 극심한 배은망덕을 폭로하는 것이다.

 

(믿음과 소망 및 사랑과의 관계. 41-43)

 

41. 히브리서 111절에 있는 믿음

 

믿음의 본질을 분명히 표현하려면, 믿음의 합당한 기초가 되는 소망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 제일 좋을 것이다. 따라서 그 소망을 제거한다면 믿음은 완전히 무너진다. 아니, 사라지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근거로 믿음을 정의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의 정의와 그가 믿음을 논할 때에 사용한 모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사도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니"라고 가르친다(11:1). 그런데 그가 사용한 실상(hypostais, 휘포스타시스)이란 말은 일종의 밑받침을 신자의 마음이 그 위에 의지하며 그 위에서 평안히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말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언약하신 것들을 확실하게 또 안전하게 소유한 것이 곧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실상의 뜻을 확신이라고 해석하고 싶은 사람이 없다는 가정에서 한 말인데, 나는 더 많이 통용되는 해석을 취하지만 이런 해석도 싫어하지 않는다. 동시에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은 마지막 날 "책들이 펴 놓일" 때까지(7:10) 우리의 구원에 속한 사물들은60a)너무도 고상하여 우리의 감각으로 알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을 것이며,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가 이 사물들을 소유하는 방법은 다만 우리의 감각의 모든 한계를 초월하며, 우리의 지각 능력을 모든 세상 물건의 저편으로 향하게 하는 것, 곧 우리 자신을 초월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렇게 확실히 소유했다고 믿는 것들은 소망 가운데 있는 것, 따라서 보이지 않는 것에 관한 것이라고 첨부한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8:24)라고 바울은 말했다. 그가 믿음을 "명시" 또는 "증거"라고 부를 때에 또는 어거스틴이 자주 번역한 것같이 "현재 없는 것들에 대한 확신"이라고 할 수 있다. "확신"이란 말은 헬라어는 "엘레그코스"(e[legco", 11:1)이다. 바울은 마치 믿음은 나타나지 않는 것들의 증거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봄이요, 모호한 것들의 명료함이요, 현재 없는 것들의 현존이요, 숨은 것들의 보임이라고 말하려는 것 같다. 하나님의 비밀들, 특히 우리의 구원에 속한 비밀들은 그대로는 또는 그 본성대로는 인식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일은 무엇이나 이미 실행된 것, 실현된 것으로 간주하리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다고 확신해야 한다.

 

(믿음과 사랑)

 

그러나 사람의 믿음이 깨우침을 받아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되면, 그것과 동시에 어떻게 하나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위하여 그가 간직하신 그 풍성한 행복을 알게 되면 우리는 동시에 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한번 감동을 받으면 사람은 그 행복감에 압도되며 끌려가게 된다. 그러므로 비틀어지고 사악한 마음이 이런 감정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감정으로 바로 하늘에까지 들려가고 비장된 하나님의 보고와 하나님 나라의 가장 신성한 경내에 들어간다. 여기는 불결한 마음이 들어가 더럽혀서는 안 되는 곳이다.

스콜라 철학자들이 사랑은 믿음과 소망보다 먼저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미친 말에 불과하다. 우리 속에 처음으로 자랑을 일으키는 것은 오직 믿음이다. 다음과 같은 베르나르드의 말은 훨씬 더 바르지 않은가? 바울이 신자들의 "자랑"(고후 1:12)이라고 부른 양심의 증거는 셋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선, 하나님의 자비를 떠나서는 죄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믿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선한 행위를 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값없이 주시지 않으면 영생도 행위의 공로로서는 얻을 수 없다. 조금 지나서 그는 부언한다. "이런 것들로써 충분한 것이 아니고 이것들은 아직 믿음의 시초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니면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믿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죄가 용서되려면 성령의 증거도, , 구원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되어 있다는 것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죄를 용서하시며 공로를 인정해 주시며 상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 초보 단계에서 굳게 설 수 없다는 것도 믿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적당한 곳에서 논하게 되겠고 지금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만으로 족하다.

 

42. 믿음과 소망은 서로 연결된다

 

그러나 이 믿음은 그것이 살아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영원한 구원에 대한 소망을 뗄 수 없는 동반자로서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한다.

더 적절하게 말한다면 믿음은 그 자체 내에서 소망을 일으키며 생산한다. 이 소망을 제거한다면, 아무리 웅변적으로 또 아름다운 말로 믿음을 논할지라도 믿음이 없다는 판단을 받아야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진실성을 확신하는 것이 믿음이다. 곧 그것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우리를 속이거나 빈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약속들을 그들이 반드시 진실하다고 하는 그 약속들을 실현하실 때가 오리라고 기대하며 의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간단하게 말하면 소망은 하나님께서 진실하게 약속하셨다고 믿는 일들에 대한 기대이다.

이와 같이 믿음은 하나님을 진실하시다고 믿으며, 소망은 하나님의 진실성이 밝히 나타내는 때를 기다린다. , 믿음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믿으며, 소망은 그가 우리에게 대해서 항상 아버지가 되시리라고 예상한다. 믿음은 우리가 영생을 받았다고 믿으며, 소망은 영생이 언젠가는 나타나리라고 예상한다. 믿음은 소망의 토대요 소망은 믿음에 영향을 주며 힘을 준다. 하나님의 약속들을 이미 믿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의 약한 믿음은 오래 참는 소망과 기대에 의해서 지지되고 조성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은 무력해지고 희미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이,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바른 말이다(8:24). 소망은 묵묵히 주를 기다리는 동시에 믿음이 너무 서두르다가 곤두박질하여 떨어지지 않도록 제어한다. 소망은 믿음에 힘을 주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거나, 그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도록 한다. 소망은 믿음의 생기를 회복시켜 지치지 않게 한다. 소망은 종점에 도착할 때까지 믿음을 지탱해 주어 도중에서, 심지어 출발점에서도 힘이 빠지지 않도록 한다. 간단히 말하면, 소망은 끊임없이 믿음을 갱신하고 회복함으로써 믿음에 견인하는 힘을 주는 것이다.

믿음을 굳세게 하기 위해서 소망의 지지가 얼마나 많이 필요한가를 더 잘 알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닥치는 시험의 형태가 얼마나 많은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첫째로 주께서는 약속하신 일을 연기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너무도 오랫동안 불안정한 상태에 두신다. 이런 때에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2:3)고 한 예언자의 명령을 실천하는 것이 소망의 기능이다. 어떤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치는 것을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분명히 노여움을 보이신다. 이런 때에 소망이 우리를 도와서 다른 예언자가 말한 대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8:17) 할 필요가 훨씬 더 절실하다. 또 베드로는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라고 말한다(벧후 3:3,4). 사실상 육과 세상은 똑같은 말들을 우리에게 속삭인다. 이런 때를 위해서 우리는 깊이 참는 소망으로 우리의 믿음을 보강해야 한다. 천년을 하루같이 여기리만큼(90:4, 벧후 3:8) 우리의 소망을 영원한 데에 두어야 한다.

 

43. 믿음과 소망은 하나님의 자비라는 동일한 기반 위에 섰다

 

이러한 관계와 유사점으로 인해서 성경은 간혹 "믿음""소망"이란 말을 서로 바꾸어 사용한다. 베드로가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고 가르칠 때에(벧전 1:5), 그는 소망에 해당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또 그것은 잘못이 아니다. 소망은 곧 믿음을 위한 자양분과 힘이라고 우리는 이미 가르쳤기 때문이다.

같은 편지에서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고 한 것과 같이(벧전 1:21) 믿음과 소망은 간혹 결합된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참고 소망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나타나기까지 우리 자신의 소원을 보류한다고 하여(1:20) 소망에서 기대가 나오는 것으로 보고 있다. 내가 이미 인용한 히브리 11(1)을 보면 이 모든 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다른 구절에서도 바울은 부정확하기는 하지만 같은 뜻을 말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쫓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5:5). 다시 말하면 값없이 주시는 사랑에 관한 복음의 증거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지금 소망 밑에 숨어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밝히 보여주실 때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가 하나님의 은혜와 행위의 공로를 소망의 두 가지 근원이라고 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이제 분명히 알 수 있다. 희망의 목표는 믿음의 목표와 다를 수 없다. 믿음의 유일한 목표는 하나님의 자비라는 것을 이미 분명히 설명하였다. 이를테면 이 목표를 두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롬바르드가 어떤 타당한 이유를 제시하는가를 듣는 것이 마땅하다. "공로 없이 무엇을 감히 소망한다는 것은 '소망'이 아니라, '참람'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라고 그는 말한다. 친애하는 독자여, 이는 하나님을 진실하시다고 믿는 사람을 경솔하고 참람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공언하는 것이니 누가 이런 짐승들을 마땅히 경멸하지 않을 것인가? 주의 자비에서 모든 것을 대망하라는 것이 주의 뜻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의 자비를 의지하고 안심하는 것은 불손한 짓이라고 한다. 참으로 훌륭한 선생이다. 저 미친 듯이 지껄여대는 논쟁가들의 학과에서 이 사람의 제자들이 배출된 것도 그럴 듯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인 우리가 구원의 소망을 가지라는 명령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받은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실성을 기꺼이 믿고 그의 자비만을 의지하며 행위에 대한 신뢰를 버리면서, 감히 견고한 소망을 품는다. 하나님께서는 속이지 않으실 것이다. 그 분께서는 "너희 믿음대로 되라"(9:29)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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