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장 행위의 의를 보상이란 말에서 추론하는 것은 잘못이다
(보상을 말하는 구절들은 행위를 구원의 원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1-4)
1. "행위에 따른 보상"의 뜻은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주실 것이라고(마 16:27) 하는 말씀들을 생각하겠다. 같은 종류의 구절을 인용한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우리가 다‥‥‥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롬 2:9,10),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마 25:34-35).
여기에 첨가할 것은 영생을 행위에 대한 보수라고 하는 발언들이다. 이런 종류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그 손의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잠 12:14, 사 3:11의 융합),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잠 13:13),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마 5:12),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눅 6:23),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오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8).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라고(롬 2:6)하는 말씀은 설명하기 어렵지 않다. 이는 이 표현이 원인보다 일의 순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다음과 같이 정해진 순서에 따라 완성하시는 것이 틀림없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심으로만이 자신의 생명 안에 받아들이신다. 그러나 그들이 생명을 소유하게 될 때까지는, 정하신 순서에 따라 그들 안에서 자신의 구원 사업을 완수하시기 위해서 선행의 경주를 통해서 그것을 얻도록 그들을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 행위에 따라 면류관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상한 말이 아니다. 그들은 행위에 의해서 영생의 면류관을 얻을 준비를 한다. 그러나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빌 2:12)한 말은 적절하며 그 때문에 그들은 선행에 몸을 바치는 동시에 영생을 명상한다. 이 말씀과 같은 다른 구절에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영생을 얻는 신자들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는 명령이 있다(요 6:27 참조). 그러나 곧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라는 말씀이 첨가된다(요 6:27). 이것을 보면 "일한다"는 말은 은혜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노력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신자들이 자신의 구원의 장본인이라든지, 구원은 그들의 행위에서 유래한다든지 하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될 것인가? 신자들이 복음에 대한 지식과 성령의 조명으로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참여하게 되면, 그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된다. 이렇게 하나님이 그들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으니 주 예수님의 날까지 그것을 또한 완성하실 것이다(빌 1:6).그러나 이 일이 완성되는 것은 그들이 의와 거룩함에 있어서 하늘 아버지와 같이 되며 참으로 자녀답게 되는 때이다.
2. 보상은 "기업"이다
"보상"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행위가 구원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첫째로 우리는 천국이 종이 받는 삯이 아니고 자녀들이 받는 기업이라는(엡 1:18) 것을 진실되게 믿어야 한다.
주께서 자녀로 삼으신 사람들만이 이 기업을 향유할 수 있으며(갈 4:7 참조), 그렇게 되는 데는 양자로 삼으신 것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다(엡 1:5-6 참조).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갈 4:30). 성령께서 영원한 영광을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약속하시는 구절에서도, 그것을 명백하게 "기업"이라고 부르심으로써 그것이 다른 원천에서 온다는 것을 밝히신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가지 행위를 열거하시고 그것을 실행한 선택된 사람들에게 하늘의 상급으로 갚으시며, 하늘을 차지하라고 부르신다(마 25:35-37).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상속권에 의해서 차지해야 한다고 첨부하신다(마 25:34). 바울은 노예들에게 충실히 자기의 의무를 다하면서 주께로부터 보상을 받을 것을 대망하라고 명령하지만 그 보상을 "유업의 상"이라고 한다(골 3:24). 이런 구절들에서 우리는 말하자면 규정된 용어로써 영원한 복락을 행위의 결과로 기인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양자로 삼아주신 데 돌려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경고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무슨 까닭에 행위를 동시에 말하는 것인가? 성경에 있는 예를 하나만 들면 이 문제는 밝혀진다. 이삭이 나기 전에 아브라함은 그의 자손으로 인해서 모든 나라 백성들이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의 자손은 번성해서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같으리라고 했다(창 15:5, 17:1이하, 18:18 참조). 여러 해 후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명령을 받은 대로 아들을 제단에 바칠 채비를 했다(창 22:3). 이렇게 순종했기 때문에 그는 이 약속을 받았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창 22:16-18). 우리가 여기서 듣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아브라함은 순종함으로써 복을 받았는가? 그 명령을 받기 전에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지 않았는가? 신자들의 어떤 행위도 그것이 고려되기 전에 주께서 주신 그 은혜, 즉, 하나님 자신의 자비 이외에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이유가 없는 때에 베푸신 은혜를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서 주셨다고 우리가 여기서 밝히는 점에는 애매모호한 데가 조금도 없다.
3. 은혜로서의 보상
그러나 행위가 있기 전에 값없이 주신 것을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서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은 우리를 속이거나 희롱하시는 것이 아니다. 약속하신 것들을 주실 것 혹은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우리가 명상하고, 우리에게 제시된 복된 소망을 하늘에서 얻으려고 행위를 통해서 노력하도록, 주께서는 선행을 통해서 우리를 훈련시키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약속의 열매가 성숙하는 데까지 우리를 데려가는 우리의 행위에 그 결실의 공을 돌리는 것은 마땅하다. 사도는 골로새 교회 신자들은 사랑의 의무를 열심히 이행했는데, 그것은 그들을 위해서 하늘에 간직되어 있는 소망 때문이었으며 그 소망은 복음이 전하는 진리의 말씀에서 들은 것이라고 말할 때 이 두 가지 생각을 아름답게 표현했다(골 1:4-5). 그들이 복음에서 그들의 소망이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함으로써, 사도는 그 소망을 지탱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뿐이라고 언급한다. 베드로의 발언도 이와 일치하여 경건한 사람들은 "때"가 오면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라고 하였다(벧전 1:5). 바울은 그들이 이 때문에 수고한다고 말하면서, 신자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일평생 달음질을 계속해야 한다는 뜻을 전한다.
주께서는 그가 약속하시는 보상을 우리가 공로로 생각하지 않도록 자신을 집주인에 비유하여 말씀하셨다. 이 비유에서 집주인은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그들을 포도원에 보내서 일을 시킨다. 제 일시(오전 7시)에도 보내고, 제 이시, 제 삼시(오전 9시)에도 보내고, 심지어 제 십일시(오후 5시)에도 보낸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을 때 모두에게 같은 삯을 준다(마 20:1이하). 이방인들을 부르심이라는 고대 저서는 암브로시우스가 쓴 것이라고 하나, 저자가 누구였든 간에, 그는 이 비유를 간단하고도 바르게 해석했으므로 나 자신의 말보다 그의 말을 사용하겠다. "주께서는 이 비유에서 그의 은혜는 하나뿐이지만, 부르심은 각양각색임을 밝혀 보이신다‥‥‥제 십일시에 포도원에 갔어도 온종일 일한 사람들과 똑같은 보수를 받게 된 사람들은 분명히‥‥‥날이 저물 때에, 즉, 일생이 끝날 때에, 하나님의 자비로 보수를 받는 사람들의 운명을 대표한다. 주께서는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의 은혜의 탁월성을 나타내려고 하신다. 그들의 노동의 대가를 치르시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신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위와는 별도로 풍성한 은혜를 부어 주신다. 많이 수고했으나 늦게 온 사람들 보다 더 많이 받지 못한 사람들도 이 처사를 보고 자기들이 받는 것은 일에 대한 보수가 아니라 은혜의 선물이란 것을 깨달아야 한다.
끝으로 유의해야 할 점이 하나 더 있다. 즉, 영생을 행위에 대한 보상이라고 하는 구절들에서 우리는 그것들을 단지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인애하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포용하실 때 이루어지는 복된 영생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가지는 하나님과의 교제라고 이해할 것이 아니라 주신 복을 소유하는 것 또는 그것을 소위 "즐기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도 "내세에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고(막 10:30) 또 다른 곳에서 "나아와‥‥‥나라를 상속하라"고 말씀하셨다(마 25:34) 그러므로 바울은 부활이 있을 때에 양자되는 일이 나타날 것을 "양자 됨"이라고 부르고(롬 8:18이하), 그 후에 그것을 "우리 몸의 구속"이라고 해석한다(롬 8:23).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것이 영원한 사망인 것같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받아들여져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며,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에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 이 일은 다만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 은혜로 인하여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여전히 행위에 대한 보상을 고집한다면, 우리는 믿음에 대한 보상은 영생이라고 하는(벧전 1:9) 베드로의 말을 그들에게 던질 수 있다.
4. 보상의 약속이 지니고 있는 목적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당연하게 보상을 받을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런 약속으로 그 가치를 인정하신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성경에 기록된 것에 의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높임을 받을 이유가 전연 없다. 오히려 반대로 성결의 목적은 오직 우리의 자랑을 억제하며, 우리를 낮추어 거꾸러뜨리며 완전히 부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기대에서 힘을 얻으며 이런 위로로 생기를 얻지 못한다면 즉시 쓰러지고 말 것이다. 이렇듯 약한 우리는 약속을 받음으로써 도움을 얻는다.
우선 우리는 각각 자기의 소유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버리고 포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제자에게, 즉, 모든 신자에게 초보로 가르치는 첫 단계이다. 그 다음에 십자가의 훈련으로 일평생 그들을 연단시키시며, 그들이 현세의 유익을 바라거나 의지하지 않게 하신다. 요컨대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이 세상에서는 어디를 보아도 절망에 부닥칠 수밖에 없도록 만드신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한다(고전 15:19). 주께서는 큰 고난 가운데도 신자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 머리를 높이 들어 먼 곳을 바라보라고 경고하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복을 자기 자신에게서 얻으라고 하신다.
주께서는 이 복을 "상", "보수" 또는 "보상"이라고 부르신다(마 5:12, 6:1이하, 기타 참조). 행위의 공로를 고려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받는 불행과 고난과 중상과 그 밖의 고통에 대한 보상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경의 선례를 따라(고후 6:13,히 10:35, 11:26 참조) 영생을 일종의 "보상"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는 주께서 영생에서 자신의 백성을 노고로부터 안식으로, 박해로부터 번영하며 즐거운 상태로, 슬픔으로부터 기쁨으로, 빈곤으로부터 부요로, 치욕으로부터 영광으로 받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들이 당한 모든 재앙을 변화시켜 더욱 큰 복으로 만드신다. 그러므로 거룩한 생활은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게 하는 길은 아니지만, 하나님께 선택된 사람들을 인도해서 천국을 엿보게 하는 길이라고 해도 잘못이 아닐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가 성결하게 하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롬 8:30).
다만 우리는 공로와 보상 사이에 관련이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궤변가들은 우리가 밝힌 목적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관련성을 고집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목적이 있는데, 우리가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선행에 대해서 보상을 약속하시는 목적은 다소의 위로로 육의 약함을 도우시려는 것이며, 우리의 마음을 허영으로 교만하게 만드시려는 것이 아님은 무엇보다도 명백하다. 그러므로 보상에서 행위의 공로를 결론짓거나, 행위와 보상을 서로 비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이러한 견해에 대한 반론들에 대한 답변. 5-10)
5. 보상의 근거는 용서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라고 할 때(딤후 4:8), 나는 어거스틴과 함께 대답한다. "자비하신 아버지께서 은혜를 베푸시지 않았다면 의로우신 재판장은 면류관을 상으로 주셨을까?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라고 하는 은혜가 앞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의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만일 당연히 받을 자격이 없는 것들이 미리 부여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런 것들이 당연히 받을 상으로서 주어질 것인가?" 또 나는 다른 말을 덧붙인다. 주의 자비가 우리의 행위에 있는 모든 불의를 덮어 주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는 우리의 행위에 의를 전가하실 수 있겠는가? 그의 무한하신 인자하심으로 우리의 행위에서 벌을 받아야 할 점을 삭제해 버리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을 보상을 받을 만하다고 판정하실 수 있겠는가? 어거스틴은 늘 영생을 은혜라고 부른다. 영생이 행위에 따라 주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교만을 더욱 키우는 동시에 우리의 용기를 돋운다. 그 외에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므로, 자기의 행위를 자랑하지 말라고 하는 동시에, 이들 행위가 추악한 찌꺼기로 더럽혀져 있어서 주의 심판의 표준대로 평가한다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가 실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행위는 다만 용서에 의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가르친다. 어거스틴이 다른 곳에서 하는 말은 우리와 조금 다르지만, 보니파키우스(Bonifacius)에게 보낸 세 번째 책에서 하는 말을 보면, 우리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서 그는 두 사람을 비교한다. 한 사람은 경탄하리 만큼 거룩하며 완전한 생활을 하고, 다른 사람은 정직하게 살며 건전한 생활 습관을 가졌지만, 아직도 불완전한 점이 많다.
끝에 가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둘째 사람은 물론 도덕 생활에서 처음 사람보다 못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믿음이 있다. 그는 그 믿음에 따라 살면서, 모든 잘못에 대해서는 자신을 책하며 선행을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치욕은 자기에게 그리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린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죄의 용서와 선행에 대한 사랑을 받는다. 이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날 때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할 수 있도록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가 이린 생활을 하는 것은 믿음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행위가 없으면 믿음은 아무도 구원하지 못하지만, 그의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기 때문에(갈 5:6 참조) 버림받은 믿음이 아니며,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기 때문에(합 2: 4) 그는 믿음으로 죄의 용서도 받는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으면 선행같이 보이는 것도 죄로 변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는 여기서 우리가 강경하게 주장하는 것, 즉, 선행의 의는 용서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승인 하신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다는 것을 명백하게 인정한다.
6. "하늘에 쌓는 보물"에 대하여
다음에 있는 구절들은 위에서 인용한 것과 뜻이 비슷하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눅 16:9).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며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17-19). 여기서 선행은 우리가 복된 영생에서 열락할 재물에 비교되고 있다. 나는 성령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목적을 주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그 진정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대답한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는(마 5:21) 그리스도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이 시대 사람들이 현세에서 즐길 물건들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과 같이 현세의 생명은 곧 꿈같이 사라질 것을 깨달은 신자들은 참으로 누리기를 원하는 것을 다른 곳으로, 즉, 영원히 살 수 있는 곳으로 옮기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영원히 거할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결정한 사람들을 본받아야 한다. 그들은 모든 재산을 미리 보내고, 일시 불편한 것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데 그것은 오래 살 곳으로 재산을 많이 보낼수록 더 기쁘기 때문이다. 우리도 하늘이 고국이라고 믿는다면, 우리의 재산을 여기에 두었다가 갑자기 옮겨지게 되어 손해를 보는 것보다 그리로 미리 이전해 놓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이전할 것인가? 그 방법은 확실히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그들에게 주는 것을 주께서는 모두 자신에게 준 것으로 간주하신다(마 25:40 참조). 여기에서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잠 19:17)라는 유명한 약속이 나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후 9:6). 그 이유는 우리가 사랑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형제들에게 바치는 것은 모두 주의 손에 저축되기 때문이다. 성실한 보관인이신 주께서는 때가 오면 많은 이자를 붙여서 갚아 주실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의무는 우리를 위해 주의 손에 감추어 두는 재산이라고 하리만큼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이 일은 성경이 아주 빈번하게 또 명백하게 증거하는 것이므로 누가 그렇다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순전한 자비에서부터 행위에 가치를 두는 쪽으로 비약하고 싫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오류를 확립하기 위해서 이 증거에서 아무런 도움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증거들에서 올바르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쪽으로 기울어지는 하나님의 순수한 자비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선행을 장려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돌아보실 가치도 없는 우리의 봉사가 그 어느 하나라도 무가치하게 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다.
7. 환난을 참으면 보상이 있는가?
그들은 사도의 말을 빌려 우리를 더욱 압박하고 있다. 그는 환난 중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자들을 위로하면서, 이런 환난은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보낸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가르친다(살후 1:5).
진정으로 사도는 "너희로 환난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하늘로부터‥‥‥나타나실 때에" 이 일이 이루어지리라고(살후 1:6-7) 말한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6:10)고 말한다.
첫째 구절에 대한 나의 대답은, 여기서는 공로의 가치를 의미하지 않았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녀로 택하신 우리를 맏아들인 그리스도와 같이 만드시고자 하시기 때문에(롬 8:29), 그리스도께서 우선 고난을 당하신 후에 드디어 예정된 영광에 들어가신 것과 같이(눅 24:26),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행 14:22).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환난을 받을 때, 이를테면 하나님께서 보통 그의 양들에게 찍으시는 표를 우리에게도 찍으신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들로 인정된다. 그것은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갈 6:17) 가지는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표이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의 발언들을 든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 언제나 그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 짊어진다(고후 4:10) 우리는 그가 고난을 받으신 그 모양대로 고난을 받음으로써 죽은 자의 부활에도 함께 참여하게 된다(빌 3:10-11).
바울이 첨가하는 이유도, 행위에 어떤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이 뜻을 바꿔 말한다면, "여러분을 괴롭힌 원수들에게 그 괴롭힌 데 대한 벌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과 일치하는 것과 같이, 여러분이 수고를 그치고 쉬며 평화를 누리는 것도 하나님의 심판과 일치합니다"라는 것이다. 둘째 구절은(히 6:10)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의 봉사를 잊어버리시지 않는 것은 그의 공의에 합당한 일이라고 가르치며, 만일 잊으신다면 그것은 공정치 못한 처사가 되리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게으른 우리를 격려하시기 위하여, 우리가 그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감당한 수고는 헛되지 않으리라는 확실한 약속을 주셨다는 뜻이다. 이 약속도 다른 모든 약속과 같이,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자비의 언약이 선행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아무 효과를 나타내지 못 하리란 것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기의 언약만이 우리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우리는 이 근거 위에 서서, 우리의 봉사가 아무리 무가치할지라도 너그러우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상해주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이 기대를 강화하기 위해서, 사도는 하나님께서는 불공평하지 않으시며 한번 하신 약속은 지키시리라고 확언한다. 그러므로 이 공정성은 당연히 줄 것을 준다는 공정성보다도 하나님의 약속의 성실성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어거스틴이 한 말은 유명하다. 이 거룩한 분이 그 말을 기억 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서 자주 반복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므로, 나도 그 말을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 새겨두는 것을 무가치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 인용하겠다. "신실하신 주께서는 스스로 우리의 채무자가 되셨다. 우리에게서 무엇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8. 사랑에 의한 칭의
그들은 자기들의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서 바울의 말들을 인용한다. "내가‥‥‥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 13:2),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 3:14).
이 두 구절을 근거로 삼아 이들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믿음보다 사랑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으며, 물론 사랑의 힘은 더 크다고 한다. 그러나 이 궤변도 아무런 문제없이 반박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처음 구절에 있는 말은 진정한 믿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설명했다. 둘째 구절도 우리는 진정한 믿음의 입장에서 설명한다. 바울이 사랑을 믿음보다 더 크다고 하는 것은, 사랑에 더 많은 공로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이 비효과적이며, 영향력이 많으며, 더 많이 봉사하며, 영원히 찬성하지만, 믿음은 얼마 동안만 유용하기 때문이다(고전 13:2이하 참조). 만일 우열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당연히 첫 자리를 차지할 것이지만, 바울의 발언과는 관계가 없다. 참으로 그가 역설하는 점은, 우리는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함으로써 서로 덕을 세워야 한다는 한 가지뿐이다. 그러나 모든 점에서 사랑이 믿음보다 더 크다고 가정한다면, 건전한 판단력을 아니, 완전히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누가 이 가정을 근거로 사랑이 더 많이 의롭다 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인가? 믿음에 있는 의롭다하는 힘은 행위의 가치에 있지 않다. 우리의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존한다. 이러한 칭의를 믿음이 붙잡을 때에, 믿음이 의롭다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반대자들에게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사랑이 의롭게 한다고 주장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사랑의 의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므로, 선하신 하나님의 용납을 받는 그 공로에 의해서 우리에게 의가 전가되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점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그들의 논법은 훌륭하게 전개된다. 우리가 믿음이 의롭게 한다고 말하는 것은, 믿음에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당연한 보상으로서 의를 얻어 우리에게 준다는 뜻이 아니다. 믿음은 한 도구에 불과 하다. 이 도구를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값없이 얻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무시하며, 의의 전체를 가지신 그리스도를 무시하면서, 사랑이 믿음보다 나으므로 우리는 사랑의 덕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마치 왕은 구두 직공보다 무한히 훌륭하기 때문에 구두도 더 잘 만들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논법이다. 이 한 가지 삼단 논법만으로도 소르본느 학파 사람들 사이에는 믿음에 의한 칭의를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충분히 증명된다.
만일 어떤 궤변가가 여기에 뛰어들어, 바울이 사용하는 "믿음"이란 말을 이렇게 짧은 시간에 여러 가지로 해석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단히 훌륭하고도 든든한 이유를 말할 수 있다.
바울은 여기서 열거하는 은사가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관련되기 때문에, 요약하는 의미에서 그것을 모두 "믿음"과 "소망"에 포함시킨다. 그의 뜻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예언과 방언, 해석하는 재능, 그리고 지식은 모두 하나님을 알도록 인도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현세에서 우리는 다만 소망과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믿음과 소망을 말할 때에 동시에 이 모든 것을 포함시킨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고전 13:13상반절), 즉, 은사의 종류는 아무리 많을지라도 모두 이 셋에 연결되는 것인데"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하반절).
셋째 구절에서 그들은 만일 사랑이 "온전하게 매는 띠"라면(골 3:14), 이야말로 완전한 것이므로, 사랑은 의의 띠일 것이라고 추론한다. 우선 바울이 완전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르게 조직된 교회가 서로 잘 단결된 때를 의미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우리는 묻지 않겠다. 또 사랑이 우리를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하게 만든다는 것을 인정하겠다. 그렇더라도 그들은 이런 추론으로 어떤 새로운 생각을 제시하는가? 나는 우리가 사랑의 의무들을 모두 이행하지 않으면 결코 이 완전성을 얻지 못하리라고 언제든지 그들을 반대하는 대답을 할 것이다. 이 사실을 근거로 하는 사람은 모두 사랑을 이루는 경지에서는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완전성을 실현할 희망도 전연 없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9. 마태복음 19장 17절
미련한 현대 소르본느 학파는 아무 근거도 없이 닥치는 대로 성경 구절들을 들어서 우리에게 던진다. 나는 그것을 일일이 상대하고 싶지 않다. 그들이 하는 어떤 말은 너무도 엉뚱하여 나는 그것에 대하여 말함으로써 내 자신이 어리석은 사람으로 인정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제를 끝내기 전에, 먼저 그들이 매우 좋아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설명하겠다. 구원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냐고 묻는 율법사에게 그리스도께서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대답하신다(마 19:17).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라고 은혜의 주님께서 명령하셨으니, 우리에게 무엇이 더 필요하냐고 그들은 묻는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상대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를 아시고 그 사람들에게 알맞도록 대답하신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모르는 생각이다. 여기서는 율법사가 주께 와서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는다.
그뿐 아니라, 무슨 일을 해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 묻는 사람의 인품과 질문 자체가 이와 같은 주의대답을 유발시킨다. 율법의 의를 굳게 믿는 습성이 몸에 밴 율법사는 행위에 대한 확신 때문에 눈이 어두웠다. 그는 구원을 얻게 하는 의의 행위가 무엇인가 하는 것만을 알고자 한다. 그러므로 의의 완전한 거울이 있는 율법으로 그를 돌려보내시는 것은 당연한 처사이다.
우리도 행위에서 생명을 구하는 사람은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똑똑히 선언한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교리를 알아야 한다. 그들이 생명의 길을 떠나 사망의 구렁으로 떨어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께로 피할 수 있겠는가? 우선 생명의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얼마나 생명의 길에서 벗어났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율법을 받아들임으로써 성립되는 하나님의 의와 자기들의 생활이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가를 식별할 수 있어야만, 구원을 회복하려면 그리스도 안으로 피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요약하면, 우리가 행위에서 구원을 찾는다면 계명들을 지켜야 하는데 우리는 그 계명에 의해서 완전한 의를 배운다. 그러나 도중에서 실패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여기에서 중단해서는 안 된다. 이는 우리가 아무도 계명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율법에 의한 의를 얻을 수 없으므로 다른 도움을 구해야 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주께서는 율법사가 행위에 대한 허망한 자신감을 가지고 교만한 것을 마시고, 그가 영원한 사망의 무서운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임을 자각하도록, 그에게 율법을 돌아보게 하신다. 그와 같이, 다른 곳에서 주님께서는 이미 이 일을 알고 겸손하게 된 사람들에게 율법은 전연 말씀하시지 않고 은혜의 약속으로 그들을 위로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8-29).
10. 의와 불의는 같은 척도로 서로 비교할 수 없다
성경을 잘못 이용하려고 하다가 지쳐버린 그들은 드디어 교묘한 궤변을 말하게 되었다. 성경에서 믿음을 "일"이라고(요 6:29) 한 사실에 관해서 그들은 트집을 잡는다. 이 사실을 근거로 그들은 우리가 믿음과 행위를 대립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추론한다. 그들은 마치 믿음이 하나님 뜻에 순종함으로써 그 자체의 가치에 의해서 우리에게 의를 얻어 주는 것같이 생각한다. 그렇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마음속에 인치며, 이것은 복음선포서인 우리에게 제시되는 자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내가 여기서 시간을 들여 이 어리석은 말들을 분쇄하지 않는 것을 독자들은 용서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말은 외부의 압력이 없더라도, 그 자체의 약점에 의해서 충분히 부서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반론은 참된 듯해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괴롭힐 수 있으므로, 말이 나온 김에 이것을 처리하려 한다. 서로 반대되는 것에는 같은 척도를 적용하는 것이 상식이며, 죄는 그 하나하나가 우리의 불의로 인정되는 것이므로, 선행에 대해서도 그 하나하나를 의로서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사람이 정죄를 받는 것은 원래 불신앙에만 기인하는 것이고, 개개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대답하지만, 나는 이에 만족할 수 없다. 불신앙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물론 그들과 생각을 같이한다. 불신앙이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지는 헛걸음이고, 그 후에 개개의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의와 불의를 잴 때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에 똑같은 척도를 적용하는 듯해서, 이 점에서 나는 동의할 수 없다. 행위에 의한 의는 율법에 대한 완전한 복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테면 이 직선을 일평생 어김없이 따라가지 않는다면, 행위에 의해서 의롭게 될 수 없다. 이 직선에서 벗어나는 순간에 우리는 불의에 빠진다. 이것을 보면 의는 한 가지 또는 몇 가지 행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에 복종하여 조금도 흔들리거나 싫증나는 일이 없어야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불의를 판정하는 척도는 아주 다르다. 음행하는 자나 도적은 하나님의 존엄성을 거스린 자이므로 한 가지의 범행으로도 죽음에 해당한다. 이들 궤변가들은 야고보의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약 2:10- 11)이라고 한 말에 주의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른다. 그러므로 각 개의 죄에 대해서 공정한 벌이 죽음이라고 우리가 말하는 것을 불합리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모든 죄는 그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공정한 진노와 처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되는 결론을 내리는 사람, 즉, 많은 죄를 지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경우에도 선한 행위 하나를 하면 하나님과 화목 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이론가라고 하겠다.
기독교강요 : 3권. 20장 (0) | 2017.06.01 |
---|---|
기독교강요 : 3권. 19장 (0) | 2017.06.01 |
기독교강요 : 3권. 17장 (0) | 2017.06.01 |
기독교강요 : 3권. 16장 (0) | 2017.06.01 |
기독교강요 : 3권. 15장 (0) | 2017.06.01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