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도덕적 율법에 대한 설명(십계명)
(기록화된 도덕적 율법은 자연법을 말하는 것이다. 1-2)
1. 십계명은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가?
여기서 나는 율법에 있는 십계명에 간단한 설명을 붙이는 것은 부적당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내가 언급한 점이 더욱 분명 하게 될 것이다. 즉, 하나님이 맨 처음에 제정하신 공중 예배는 아직도 유효하다. 다음에 내가 말한 둘째 점, 즉, 유대인들은 율법에서 경건의 진정한 성격이 무엇인지를 배웠을 뿐 아니라, 자기들이 율법을 준수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심판이 무서워서 원하지 않으면서도 부득이 중보에게로 마음이 끌렸다는 점이 확인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요약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성을 생각하면 반드시 즉시 그의 존엄성과 직면하게 되며, 따라서 그를 경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가르쳤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을 논했을 때에 우리는 이 가장 중요한 점을 설명했다. 즉, 우리 자신의 덕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우리 자신의 의에 대한 신념을 일체 포기하고 참으로, 우리 자신의 완전한 빈곤상을 깨닫고 완전히 의기가 꺾여 우리는 순수한 겸손과 자기 낮추는 것을 배우게 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주께서는 율법에서 이 두 가지 일을 다 하신다. 첫째로, 합법적인 명령권이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하시며, 자기의 신성을 경외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며, 그 경외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지시하신다. 둘째로, 자기의 의의 표준을 발표하신 후에, 우리의 무력함과 불의함을 꾸짖으신다. 우리의 사악하고 비뚤어진 본성은 항상 그의 의에 반대하며, 선을 행하기에 너무도 미약한 우리의 능력은 그의 완전성에서 멀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에서 모든 사람의 마음에 내면적인 법이 기록되었다고 심지어 새겨졌다고 설명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저 두 판에서 배울 수 있는 것과 어떤 의미에서는 똑같은 주장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양심은 우리가 영구히 무감각한 잠을 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내면적으로 증언하며, 경고하며, 선과 악의 구별을 우리에게 보이며, 우리의 의무 태만을 비난한다. 그러나 사람은 오류의 암흑에 덮여 있어서, 이 자연법에 의해서는 어떤 경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를 깨닫지 못한다. 확실히 사람은 경배에 대한 참된 이해와는 거리가 매우 멀다. 그뿐 아니라, 만심과 야심이 가득하며 이기심에 눈이 어두워, 자기를 볼 줄 모르며, 이를테면 자기 속으로 내려갈 줄을 모른다. 따라서 자기를 겸손하게 낮추며 자기의 가련상을 인정하게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둔하고 또 거만한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보셔서, 우리에게 성문법을 주시고 자연법에서 너무도 모호했던 것을 더욱 분명히 증언하며, 무관심한 우리를 각성시키며, 우리의 지성과 기억에 더욱 강력한 감명을 주려고 하셨다.
2. 율법의 냉혹성
그런데 율법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곧 이해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므로, 우리를 향하여 권리상 아버지와 주님의 지위에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영과 존경과 사랑과 경외로 하나님을 대해야 한다. 참으로, 우리에게는 우리의 마음을 변덕대로 움직일 권리가 없으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가 기뻐하시는 일만을 지속히 행하여야 한다. 그는 의와 정직을 기뻐하시고 사악을 미워하시므로 악한 배은망덕으로 우리의 창조주를 등질 생각이 없다면, 우리는 평생토록 의를 존중해야 한다. 이 모든 일을 우리는 율법에서 배운다. 우리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그에게 마땅한 존경이라면, 그에게 마땅한 유일한 경배는 의와 성결과 순결을 지키는 것이라는 결론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무능을 빙자해서, 빈궁해진 채무자와 같이, 갚을 수 없노라고 핑계할 수 없다. 우리의 능력에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측정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우리는 어떻든 간에, 하나님은 항상 하나님이시다. 즉, 의의 친구요, 불의의 원수시다.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올바른 일만을 요구하실 수 있으므로) 무엇이든지 복종하는 것이 우리의 타고난 의무다. 행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허물이다. 만일 죄의 지배하에 있는 우리의 정욕이(참조, 롬 6:12) 우리를 속박해서 아버지에게 복종할 자유가 없어졌더라도, 우리에게는 불가피성을 구실로 변명할 근거가 없다. 필연성이라는 그 악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며 우리의 책임으로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며, 자비하시며, 성결하시며 인자하게 복종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도덕적 율법에서 배운다. 3-5)
3. 율법이 엄격함은 긍정적 목표를 가진다.
율법의 가르침에서 이 정도까지 도움을 입은 다음에, 우리는 그 가르침에 따라 자기 속으로 내려가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드디어 두 가지 일을 추론할 수 있다. 첫째로, 율법의 의로움을 우리의 생활을 비교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경지에서 거리가 얼마나 먼가를 깨닫는다. 따라서 하나님의 피조물 사이에 한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없으며, 그의 자녀로 인정될 자격은 더욱 없다. 둘째로, 우리의 능력을 생각할 때에, 그것이 율법을 완수하기에 너무도 악할 뿐 아니라, 힘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의덕성에 대한 불신이 생기며, 마음의 근심과 걱정이 따른다. 양심은 불의의 책임을 느끼면 불원에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 때문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느끼면 반드시 죽음이 무서워진다. 또 양심은 자기가 무력하다는 증거의 압력으로, 곧 자기의 능력에 대한 절망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감정들은 겸손과 자기 낮춤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인간은 자기의 불의 때문에 당연히 영원한 죽음을 당하리라는 것을 알고 철저히 놀라서, 드디어 하나님의 자비만을 구하며 그것을 유일한 안전한 피난처라고 믿는다. 이와 같이 사람은 율법에 대한 빚을 갚을 능력이 자기에게 없음을 깨닫고 자기에 대해서 실망하므로, 다른 방면에서 도움을 구하며 또 기다릴 생각을 하게 된다.
4. 약속과 위협
그러나 주께서는 자기의 의에 대한 존경을 받으신 것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의에 대한 사랑과 사악에 대한 증오를 우리 마음에 채우기 위해서 약속과 위협을 첨가하셨다. 우리의 마음은 눈이 어두워 선한 일의 아름다움만을 보고는 감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극히 자비하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그를 사랑하며 구하도록, 즐거운 보상으로 우리를 끌기로 작정하셨다. 이것은 그의 위대한 사랑의 발로인 것이다. 그러므로 덕행에 대한 상급을 많이 장만하셨으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수고가 헛되지 않으리라고 선포하신다. 그와 반대로, 불의를 미워하실 뿐 아니라, 불의는 그의 존엄성에 대한 멸시이므로 친히 처벌하실 것이며, 이 벌은 면할 수 없으리라고 선언하신다. 그리고 백방으로 우리를 격려하시려고, 계명을 공손히 준수하는 자들에게는 현세의 행복과 영원한 행복을 다 약속하신다. 계명을 어기는 자들에게는 징벌로서 현세의 재난과 함께 영원한 죽음이 있으리라고 위협하신다.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는(레 18:5) 약속과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는(갤 18:4,20) 그에 대응하는 위협은 확실히 미래의 무궁한 생명이나 죽음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仁慈)나 진노가 화제가 될 때마다, 인자에는 영원한 생명이 포함되며 진노에는 영원한 멸망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율법에는 현세의 축복과 저주가 되는 일들도 많이 열거되었다(레 26:3-39, 신 28장). 그리고 그 형벌에는 하나님의 최고의 순결성이 나타나 있으며, 이 순결성은 사악을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약속에서는 의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의에 대한 보상이 사취(詐取)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 그의 뜻뿐 아니라, 그의 놀랍게 후하신 마음도 증명되었다. 우리와 우리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존엄성에 대해서 거대한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빚으로서 요구하실 완전한 권리가 있다. 그러나 빚을 갚는 것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복종에 대해서 상급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은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복종은 기꺼이 하는 것도 아니며, 또 하지 않아도 될 것을 한 것도 아닌 것이다. 그 약속들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것이 무엇인가는 일부는 이미 말했고, 일부는 적당한 곳에서 더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이 율법 준수를 매우 기뻐하신다는 것을 더욱 밝히기 위해서, 율법에 있는 약속들은 의를 비상히 칭찬하며, 동시에 불의를 더욱 미워하도록 형벌이 제정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충분하다. 죄인이 죄악의 유혹에 깊이 빠져, 입법자이신 하나님의 심판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잊는 일이 없도록 형벌이 있는 것이다.
5. 율법의 완벽함
주께서는 완전한 의의 표준을 주실 때에, 그 모든 부분을 자기의 뜻에 관련시키심으로써 순종보다 더 기뻐하시는 것이 없다는 것을 밝히셨다. 사람이 경망한 생각으로 여러 가지 의식을 고안해서 하나님의 환심을 사려고 애쓸수록, 우리는 이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경건을 자랑하는 이 불경건은 인간성에 뿌리를 박은 것이기 때문에, 모든 시대에 나타났고 지금도 나타난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의를 얻는 방법을 고안하는 것을 항상 기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직으로 선행이라고 인정되는 것들 가운데서 율법의 계명들은 좁은 부분에 배당될 뿐이고, 무수한 인간적 교훈들이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 그러나 모세가 율법을 공포한 후에 백성에게 한 말은 이런 방자함을 억제하려는 목적이 아니고 무엇이었는가?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는 듣고 지키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선과 의를 행하면 너와 네 후손에게 영영히 복이 있으리라"(신 12:28).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 12:32). 모세는 이미 백성에게 주에게서 여러 가지 판단과 교훈과 의식들을 받은 것이 모든 다른 백성들 앞에서 이스라엘의 지혜와 총명이 된다고 증언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첨가했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두렵건대 네가 그 목도한 일을 잊어버릴까 하노라 두렵건대 네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날까 하노라"(신 4:9)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받은 후에 그것으로 안식하지 않고, 엄격히 억제하지 않으면 새로운 가르침들을 만들어 내리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예견하신 것이다. 이 율법에 완전한 의가 여기에 내포되었다고 하나님은 선언하신다. 이 말씀이 가장 강력한 속박 수단이 되어야 했었는데, 그들은 엄금된 생각의 무례를 삼가지 않았다.
우리는 어떤가? 물론, 같은 말씀이 우리를 속박한다. 의의 완전한 가르침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는 그 율법에 영구한 타당성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선행 위에 선행을 고안하려고 굉장히 수고한다. 이 과오를 고치는 최선책은, 우리에게 완전한 의를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다는 생각을 확고부동하게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다. 거기는 하나님의 뜻이 요구하는 바와 일치하는 것 이외에 다른 의를 가르치신 것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바른 경배는 순종뿐이며, 새로운 행동 방식으로 하나님의 호의를 얻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모두 허사다.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그 범위 밖에서 선행을 하려고 애쓰면서 헤매는 것은 하나님의 진정한 의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모독이다. 어거스틴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때로는 모든 미덕의 어머니와 수호자라고 부르며, 때로는 그 원천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당한 말이다.
(율법은 영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율법을 주신 분의 목적에 관련하여 해석되어야 한다. 6-10)
6. 율법은 하나님의 법령이므로, 이는 우리에게 절대적인 요구를 한다
그러나 주의 율법을 더 충분히 설명하려면, 율법의 기능과 용도에 대해서 내가 이미 설명한 것이 더 적절하고 유익하게 확인될 것이다. 다만 개개의 조항을 설명하기 전에 율법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가져야 한다. 우선, 율법에 의해서 인간의 생활이 외면적으로 정직하게 될 뿐 아니라, 내면적·정신적으로 바르게 된다는 의견에서 우리는 모두 일치해야 한다. 이 점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으나, 충분히 유의하는 사람은 아주 소수이다. 이것은 입법자이신 하나님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율법의 성격을 평가하려면, 그 입법자의 성격에 비춰 보아야한다. 만일 어떤 왕이 음행이나 살인이나 도둑질에 대한 금지령을 내린다면, 마음으로 음행이나 살인이나 도둑질을 원하더라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벌을 받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바꿔 말하면, 죽을 인간이 제정하는 법의 권한은 외면적인 사회 질서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며, 그의 법규는 실지로 범행을 하지 않으면 위반한 것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사를 역력히 보시며, 외관보다 내심의 순결에 더욱 유의하시므로, 음행이나 살인이나 도둑질을 금하실 때에 정욕, 분노, 미움, 남의 재산에 대한 탐심, 사기 등등을 금하신다. 하나님은 영적 입법자이시므로 육체뿐 아니라 영혼도 상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런데 영혼이 하는 살인은 분노와 미움이며, 도둑질은 악한 탐욕이며, 음행은 정욕인 것이다.
혹자는 인간의 법도 우연한 사건을 문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과 의도를 문제시한다고 말할 것이다. 나도 그 점을 일정하지만, 그 목적과 의도는 외면에 나타난 것이다. 인간의 법은 어떤 의도로 각 범행이 있었는가를 결정하지만, 비밀한 생각은 찾아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이 악행에 손을 대지만 않으면 인간의 법은 만족한다. 그와 반대로, 하늘 율법은 우리의 영혼을 상대로 내릴 것이기 때문에, 율법을 바르게 지키려면 우선 영혼을 억제해야 한다. 일반 사람들은 율법에 대한 멸시감을 굳게 숨기면서, 눈과 발과 손과 신체 각 부위는 어느 정도 율법을 지키는 모양을 한다. 그러나 그들의 내심은 전연 순종할 생각이 없고, 하나님 앞에서 하는 일을 사람의 눈에서 점잖게 감추기만 하면 원만히 무죄 방면이 된 줄로 생각한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씀을 듣고는 그들은 살인하려고 칼을 뽑거나, 창녀에게 가거나, 다른 사람의 재물에 손을 대거나 하지 않는다. 거기까지는 좋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속으로는 살기(殺氣)를 품으며, 정욕이 타오르며, 시기하는 눈으로 모든 사람의 재물을 보며, 그것을 모두 빼앗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율법의 가장 중요한 점이 없다. 나는 묻는다. 그들이 입법자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비위에 맞도록 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서 이런 유치하고 우둔한 짓이 생겼느냐고, 바울은 그들에게 강경히 항의하며 "율법은 신령하니라"(롬 7:14)고 역설한다. 사도의 뜻은, 율법은 영혼과 마음과 의지의 복종을 요구할 뿐 아니라, 천사 같은 순결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모든 육의 더러움을 씻어 버리고 오직 성령의 향기만을 풍기는 것이 천사 같은 순결이다.
7.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율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회복하셨다
이것을 율법의 의미라고 말할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새로운 해석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가장 훌륭한 해석자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바리새파는 악한 견해를 백성에게 감염시켰다. 율법에 거스리는 외면적인 행동을 하지 않은 사람은 율법을 완수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위험한 이 왜곡된 오류를 책망하시고, 부정한 눈으로 여인을 쳐다보기만 해도 간음이라고 언명하신다(마 5:28).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라고 단언하시며(요일 3:15), 마음속으로 노하기만 해도 "심판을 받게 되며", 중얼거리며 불평함으로써 성난 표시를 하는 사람은 "공회에 넘기울 자", 욕설과 저주로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가리라"고하신다(마 5:21-22 참조, 마 5:43이하). 이런 교훈들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모세와 같은 입법자라고 공상하며, 모세의 율법에 없는 것을 복음의 율법으로 보충하셨다고 했다. 그래서 복음의 율법은 완전하다느니, 옛 율법을 훨씬 초월하느니 하는 말이 돌아다니게 되었으나, 이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지극히 해로운 생각이다. 앞으로 모세의 교훈 전체를 볼 때에, 이런 견해가 하나님의 율법에 얼마나 부당한 악평을 가하는가를 모세의 말로 밝히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은 조상들의 성결은 위선과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며, 저 의의유일하고 영구한 규범은 버리도록 우리를 유혹한다. 이 오류를 반박하는 것은 아주 쉽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성실성을 회복하셨을 뿐인데, 그들은 율법에 무엇을 첨가하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리새파의 거짓말에 덮여 흐려지며 그들의 누룩으로 더럽혀진 율법을(참조, 마 16:6,11) 그리스도께서는 구출해서 깨끗하게 씻으신 것이다.
8. 올바른 의미에 도달하는 방법
우리의 둘째 의견은, 계명과 금지에는 말로 표현된 것 이상의 것이 항상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원칙을 조절해서 레스보스 섬의 잣대가 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 말씀을 함부로 곡해해서, 무슨 해석이든지 원하는 대로 하게 된다. 그들은 이렇게 함부로 처리함으로써 어떤 사람들 사이에서는 율법의 권위를 떨어뜨리며,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율법을 이해할 희망을 부수어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향해서 똑바르고 확실하게 걸어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해석이 어구(語句)의 범위를 어느 정도로 넘어가는 것이 옳은가를 탐구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율법에 사람이 설명을 덧붙인 해석이 되지 않고, 입법자의 순순하고 진정한 뜻을 충실히 나타낸 해석이 되게 해야 한다. 분명히 계명들은 거의 전부가 명백한 제유법(提喩法)이 사용되었으므로, 율법 해석을 언어의 좁은 범위 내에 국한하려는 사람은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건전한 율법 해석은 언어의 범위를 넘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나 어느 정도로 넘느냐 하는 것은 한도를 정하지 않으면 애매모호하다. 그런데 나는 계명의 이유(理由)에 주의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한다. 즉, 각 계명에 대해서 그 계명을 주신 까닭을 심사숙고하는 것이다. 예컨대, 교훈은 모두 명령하거나 금지한다. 그 이유 또는 목적을 생각하면, 그 명령이나 금지의 진상이 곧 알려진다. 다섯째 계명의 목적은 존경을 받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을 존경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의 요점은, 하나님이 어떤 특출한 점을 주신 사람들을 존경하는 것이 옳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들을 멸시하거나 복종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은 미워하신다는 것이다. 첫째 계명의 의도는 하나님만을 경배하라는 것이다(참조, 출 20:2-3, 신 6:4-5). 그러므로 이 교훈의 요점은, 진정한 경건, 즉, 하나님의 신성(神性)에 대한 경배를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불경건을 미워하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각 계명이 문제로 삼는 것을 탐구해서 그 목적을 찾아냄으로써 마침내 입법자이신 하나님이 기뻐하시거나 싫어하신다고 증언하시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끝으로, 우리는 이 같은 입장에서 반대쪽으로 추론해야 한다. 즉,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하신다면, 반대되는 것은 싫어하실 것이며, 이것을 싫어하신다면, 그 반대를 기뻐하실 것이며, 이것을 명령하시니 반대되는 것은 금지하실 것이며, 이것을 금지하시니 반대되는 것은 명령하신다는 식으로 추론해야 한다.
9. 계명과 금지
우리가 지금 모호하게 언급하는 것은 실지로 계명들을 해석할 때에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하겠으나, 마지막에 언급한 점에 대해서 다른 증거로 확인해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거나, 이해되더라도 처음에는 혹 어리석게 생각될는지 모른다. 선한 일을 명령할 때에는, 그와 충돌하는 악한 일은 금지한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는 없다. 이 점을 시인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악한 일을 금지할 때에는 그와 반대되는 의무를 명령한다는 것도 상식적 판단으로 기꺼이 용납될 것이다. 참으로, 서로 유덕한 일을 칭찬하면, 그 반대인 죄악은 비난받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상투어가 의미하는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세상에서는 죄악의 반대인 덕행을 죄를 짓지 않는 것이라고 흔히 생각한다. 우리는, 덕은 이 이상의 것, 죄악과 반대되는 의무와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해서, 인간의 상식은 남을 해하지 말라거나, 그런 욕망을 품지 말라는 것으로만 생각한다. 이것도 있지만, 이 이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이웃의 생명을 도우라는 요구가 포함되어 있다. 내가 하는 말이 무리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형제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형제에게 부당한 고통이나 상해를 입히는 것을 금지하신다. 그래서 동시에 형제의 생명을 보존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사랑의 의무들을 요구하신다. 이와 같이, 계명의 목적을 보면, 우리는 계명이 명령하거나 금지하는 일을 언제든지 밝히 알 수 있다.
10. 강력한 말을 사용함으로써 율법은 우리에게 자극을 주어 죄를 몹시 혐오하게 만든다.
그러나 무슨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이를테면 반쪽 계명을 주시며, 원하시는 점을 분명히 표현하시지 않고 제유법으로 암시하실 뿐이었는가? 흔히 다른 이유들을 말하지만, 내가 특히 좋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다. 즉, 죄악의 추악상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으면, 육은 항상 그것을 씻어버리고 그 위에 그럴 듯한 구실로 덮어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각종 죄악에 대한 더욱 강렬한 증오심을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 위해서, 모든 종류의 범행에 대해서 그 가장 무섭고 악한 요소를 본보기로서 치켜드시며, 우리가 그것을 듣고 떨게 하신다. 우리는 이 점에 속아서, 우리의 죄악을 평가할 때에 어느 정도로 숨겨진 것은 무시하게 되는 때가 대단히 많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를 이런 기만에서 해방하시려고, 우리의 사고방식을 훈련하신다. 수많은 죄악의 전체를 이 몇 가지로 나누어, 각 종류의 추악상을 가장 잘 대표하는 이것들을 연상하게 하신다. 예컨대, 분노와 미움이라는 이름만을 들으면 우리는 분노나 미움을 저주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살인"이라는 이름으로 분노와 증오심이 금지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것들이 얼마나 가증한가를 더 잘 깨닫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것들을 무서운 죄악의 수준에 두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판단에서 감동을 받아, 지금까지 경한 듯이 보이던 범행의 중대성을 더 잘 숙고하는 보다 더 익숙해진다.
(율법의 두 판과 그 각각에게 올바로 주어진 계명 11-12)
11. 두 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이 두 판으로 구분된 의미를 숙고해야 한다. 이 점에 대한 인상적인 언급이 여러 번 있고, 건전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거기 훌륭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모두 동의할 것이다. 또 이 점에 대해서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유도 알기 쉽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두 부분으로 나누시고 모든 의의 전체를 거기 포함시키시며, 처음 부분에는 특히 하나님의 존엄성에 대한 경배에 관계된 종교적 의무들을 배정하시고, 둘째 부분에는 인간을 상대로 한 사랑의 의무들을 배정하셨다.
확실히 의의 첫째 토대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다. 이것이 무너지면, 의의 모든 다른 부분도 넘어진 건물의 깨어진 조각들같이 산산이 흩어지고 만다. 한 편으로 하나님의 존엄성에서 그 영광을 빼앗는 불경한 모독 행위를 한다면, 도둑질이나 노략질로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것을 어떤 종류의 의라고 부르겠는가? 또는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한 이름을 모독적 언사로 더럽힌다면, 음행으로 자기 몸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 어떤 의가 되겠는가?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말살하려고 소멸하려고 애쓴다면,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의라고 하겠는가? 경건이 없는 의를 떠드는 것은 헛된 젓이다. 이것은 사지를 자르고 목을 벤 시체를 아름다운 것으로서 전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불합리한 비이성적인 짓이다. 종교는 전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일 뿐 아니라, 전체에 호흡과 건강을 주는 생명 그 자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사람은 상호간의 공정성과 사랑을 유지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의의 시초와 토대라고 부른다.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폐지하면, 사람들끼리 실천하는 공평과 금욕과 절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쓸데없고 무가치한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옳고 그름의 심판자로서 공경할 때에, 그러한 경배에서 그들은 서로 온화하게 또 해침 없이 살 줄을 알게 되는 것이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는 근원과 정신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첫 판에서 하나님께서는 경건과 올바른 종교적 의무들을 가르치시며, 거기 따라서 하나님의 존엄성을 경배하라고 하신다. 둘째 판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면서, 어떻게 인간 사회에서 거기 합당한 처신을 할 것인가를 가르친다. 그래서 우리 주께서는 율법 전체를 두 제목으로 요약하셨다고 복음서 기자들은 전한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우리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다(눅 10:27, 의역: 마 22:37,39). 주께서 율법을 구성하는 두 부분 중에서 하나는 하나님을 향하게 하시고 또 하나는 사람들에게 적용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2. 두 판에 담긴 계명의 분류
율법 전체는 두 제목 아래에 포함된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변명할 가능성을 제거하시기 위해서 십계명으로 자기에게 대한 공경과 두려움과 사랑에 관한 모든 것과, 사람에게 대한 사랑에 관한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며, 더욱 자세하고 분명하게 설명하기로 정하셨다. 계명의 구분법을 잘 알려고 애쓰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각 사람이 자유로 판단해야 할 일임을 기억해서, 의견이 다른 사람과 논쟁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부득이 이 점에 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우리가 제출하는 구분법을 최근에 고안된 신기한 것인 듯이 웃거나 놀라는 독자들이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
율법을 열 마디 말씀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점은 하나님 자신의 권위에 의해서 자주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 확실치 않은 점은 십계명의 수효가 아니라, 그 구분법이다. 처음 판에 계명 셋을 넣고 나머지 계명들을 둘째 판에 넣는 사람들은 우상에 관한 계명을 십계명에서 빼거나, 적어도 첫째 계명 속에 숨긴다. 주께서 그것을 독립된 계명으로 주신 것은 틀림이 없는데, 그들은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열째 계명을 어리석게 둘로 쪼갠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구분법은 비교적 순결했던 시대에는 몰랐던 일이다. 이 점은 앞으로 곧 알려질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와 같이 처음 판에 네 조항을 넣지만, 첫째 계명 대신에 계명이 없는 약속을 넣는다. 그러나 나는 아주 분명한 증거에 의해서 설복되기까지는 모세가 언급한 열 마디 말씀을 십계명이라고 인정한다. 그리고 이 열 마디는 가장 아름다운 순서로 배열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의견을 인정하더라도, 나는 더 가능성이 있는 듯한 것을 따르겠다. 즉, 그들이 첫째 계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율법 전채에 대한 서론의 위치에 두어야 한다. 그 다음에 십계명 중의 넷을 첫째 판에 두고, 여섯을 둘째 판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이 순서로 계명들을 논하겠다. 오리겐은 마치 이 구분법이 당시에 일반적으로 인정된 듯이, 아무 이의 없이 제시했다. 어거스틴도 보니파키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구분법을 지지하며, 계명들을 열거할 때에도 한 분 하나님을 경건한 복종으로 섬기라, 우상에게 경배하지 말라, 주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순서를 지킨다. 그는 이미 안식일 계명에 대해서, 그것은 영적인 참 안식일을 예시(豫示)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데서 그가 처음 구분법을 좋다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유가 대단히 빈약하다.(첫째 판에 계명 셋을 넣을 때에) 셋이라는 수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더욱 분명히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그곳에서, 다른 점들에서는 우리의 구분법을 더 좋아한다고 인정한다. 이 분들 이외에 마태복음에 대한 저 미완성 주석을 쓴 사람도 우리 편에 섰다. 요세푸스가 두 판에 각각 다섯 계명을 배당하는 것은 필연코 당시의 일반적 견해를 따른 것이리라. 이 구분법은 경건과 사랑을 혼동하는 점에서 불합리할 뿐 아니라, 주 예수의 권위에 의해서 반박된다. 마태에 의하면, 주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둘째 판의 규정 가운데 넣으신다(마 19:19). 그러면 이제부터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말씀을 듣기로 하겠다.
(각 계명에 대한 상세한 설명. 13-50)
첫째 계명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2-3)
13. 머리말("나는……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이 처음 문장을 첫째 계명의 일부분으로서 읽든지 또는 따로 분리하여 읽든지 간에, 그것이 율법 전체에 대한 일종의 서문이라는 점을 부정하지만 않는다면, 어느 쪽으로 해도 내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첫째로, 율법을 제정할 때에는 그 율법이 멸시를 받아 폐지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제정하시려는 율법의 존엄성이 멸시를 받는 일이 결코 없도록, 특히 조처를 취하신다. 이 일을 확보하시기 위해서 삼중적인 증명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권위에는 권능과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셔서, 선민이 그에게 복종할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그들을 억제하신다. 그들에게 은총을 약속하셔서, 은총의 즐거움으로 그들을 끌어 성결에 대한 열성을 일으키려 하신다. 유대 민족에게 주신 은혜들을 자세히 말씀하셔서, 자기의 친절에 응답하지 않으면 그들의 배은망덕을 책망하려 하신다. "여호와"라는 칭호는 하나님의 권위와 합법적 지배를 의미한다. 바울이 말하는 것과 같이(롬 11:36),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 안에 있는 것이라면, 만물을 주께로 돌리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이 말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의 멍에를 메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법인데, 그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는 것은 해괴망측한 짓이겠기 때문이다.
14. 서문("나는……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하나님께서는 먼저 자기에게는 명령할 권한이 있으며, 하나님께 마땅히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밝히신다. 그 다음에, 사람을 부득이한 필연성만으로 강요하시는 듯한 인상을 주시지 않기 위해서, 자기를 교회의 하나님이시라고도 선언하심으로써 즐거운 생각으로 그들을 다정하게 끌어당기신다. 이 말씀에는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는 약속에(렘 31:33) 포함된 상호 조화가 기초가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영생불사를 확인하실 때에, 주께서 자기를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언명하신 사실을 논거로 삼으셨다(마 22:32). 하나님의 뜻을 바꿔 말한다면, "내가 너희를 내 백성으로 택한 것은 너희에게 금생에서 은혜를 줄 뿐 아니라, 내생의 축복도 주기 위해서다"라고 될 것이다. 이 말씀의 목적은 율법의 여러 구절이 증언한다. 주께서 자비로 우리에게 자기 백성 가운데 있을 자격을 주셨으므로, 모세는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의 백성과 성민으로 택하셨으며, 우리는 그의 모든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신 7:6, 14:2, 26:18-19의 융합).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거룩하게 되라"고 권고하신다(레 11:44, 19:2). 이 두 발언에서 예언자의 엄연한 힐문이 나왔다.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사랑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말 1:6).
15.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다음에 그의 은혜를 회상하신다. 인간들 사이에서도 배은망덕은 타기할 큰 죄악인 만큼, 이 말씀은 우리에게 더욱 강렬한 감동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때에 바로 최근에 있은 은혜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상시키셨다. 그것은 영원히 기억할 만한 놀랍고 위대한 은혜였으므로, 자손들에게도 효력을 미칠 것이었다. 또 현재의 문제에 대해서도 매우 적절한 것이다. 그들이 가련한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것은 그 자유를 주신 이에게 복종과 기꺼운 섬김으로써 경배하기 위해서라고 주께서는 말씀하려 하신다. 그는 또 우리가 진정한 경배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항상 자기의 어떤 칭호를 사용하심으로써 자기의 거룩한 임재(臨在)와, 우상이나 조작된 신들과의 차이를 알리신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허망한 데로 기울어 질 뿐 아니라, 경솔·담대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으면 즉시 어떤 어리석은 공상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악한 경향을 막는 치유책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거룩함을 확실한 칭호로 장식함으로써 우리들을 이를테면 포위하시며, 우리가 전후좌우로 헤매거나 경솔하게 어떤 신(神)을 조작하지 못하게 하신다. 즉, 살아 계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세우지 못하게 하신다. 이렇기 때문에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올바르게 부르고자 할 때에는, 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기를 나타내신 때에 쓰신 표식들을 그에게 입히며, 이를테면 그 표식들 안에 국한한다.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출 3:6), 예루살렘 성전에서 좌정하게 될(암 1:2, 합 2:20), "그룹들 사이에" 계시다고 하며(시 80:1, 99:1, 사 37:16), 그 밖의 비슷한 표현들을 쓰는 것은 하나님을 어느 한 곳이나 한 백성에게만 얽매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이 규례에서 어긋나는 것은 결코 합당하지 않다는 뜻을 표시하신, 그 하나님을 경건한 사람들이 항상 생각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또 우리의 의견이 일치해야 할 점이 있다. 즉, 여기서 해방에 대해 언급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이라고 스스로 주장하실 권리가 있는 하나님께 그들이 더욱 열렬하게 헌신하도록 하시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이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 같이 생각해서는 안되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포로 생활하던 시대는 우리 모든 사람의 영적 노예 상태를 예표한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의 하늘 변호자께서 그 권능의 강한 팔로 우리를 해방하여 자유의 나라로 인도하시기까지 우리는 모두 영적 포로다. 옛날에 하나님께서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 자기 이름을 경배하게 만드실 의향으로, 바로의 견딜 수 없는 압박에서 그들을 해방하셨다. 그와 같이 지금 그는 자기 백성이라고 인정하시는 사람들을 모두 악마의 무서운 힘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이 악마의 힘을 저 육체적 노예 상태가 예표 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분기해서 가장 높으신 왕에게서 유래했다고 하는 그 율법에 유의해야 한다. 그가 만물의 근원이시므로 만물은 그를 궁극적 목표로 정하는 것이 당연하다. 참으로 모든 사람이 입법자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데 사로잡혀야 한다. 사람들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데서 특별한 기쁨을 느끼는 것을 배우며, 친절하신 그에게서 모든 풍성하고 선한 것과 함께 영생의 영광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과 자비에 의해서 인간은 자기가 죽음에서 해방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16. 첫째 계명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권위에 대해서 그 근거를 마련하시고 확립하신 후에, 첫째 계명을 말씀하신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하지 말지니라"(출 20:3). 이 계명의 목적은, 주께서는 자기만이 자기 백성 사이에서 최고의 지위를 가지시며, 그들에 대해서 완전한 권위를 행사하고자 하신다는 것이다. 이 일을 실현하시기 위해서, 그의 신성의 영광을 감하거나 흐리게 하는 불경건과 미신을 일소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같은 이유로, 우리에게 진실하고 열렬한 경건으로 자기를 경배하며 찬양하라고 명령하신다. 계명의 단순한 용어가 거의 이 뜻을 표현한다. 하나님을 "있게 하면" 반드시 그에게 속한 것도 동시에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신이 있게 하지 말라고 금지하시는 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다른 신에게로 옮겨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드려야 할 것이 수없이 많지만, 그 모든 것을 편의상 네 가지로, 즉, ⑴ 숭배(여기에 양심의 영적 복종이 부록같이 첨가된다), ⑵ 신뢰, ⑶ 기원(祈願), ⑷ 감사로 분류하는 것이 편리하겠다. ⑴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위대성에 머리를 숙여 공경과 경배를 드리는 것을 나는 "숭배"(adoration)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에 우리의 양심을 바치는 것을 숭배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다. ⑵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인정하고서 그를 굳게 믿고 안심하는 것을 "신뢰"라고 부른다. 그에게 모든 지혜와 의와 힘과 진리와 인애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와 연결될 때에만 우리에게 행복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⑶ 곤란한 일이 닥칠 때마다 하나님의 신실과 도움만을 우리의 의지할 것으로 믿어 구하는 마음의 습성을 나는 "기원"이라고 부른다. ⑷ 모든 선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태도를 "감사"라고 부른다. 주께서는 이런 일들이 조금이라도 다른 신에게 옮겨지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므로, 모든 것을 전적으로 자기에게 드리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신을 위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 종교를 멸시하는 악인들은 흔히 모든 종교를 통틀어 조롱하며 무시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경건이 가장 앞에 서서, 우리의 마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알고, 그 존엄성을 명상하며 경외하며 경배하며, 그의 축복에 참여하며, 항상 그의 도움을 구하며, 그의 역사(役事)의 위대성을 인정해서 찬양으로 축하하는 것을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활동의 유일한 목표로서 갈망해야 한다. 다음에 우리는 사악한 미신을 경계해야 한다. 미신은 우리의 마음을 진정한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며, 여러 가지 신들 사이를 방황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한 분 하나님으로 만족한다면, 우리가 전에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우리는 모든 날조된 신을 몰아내야 하며, 유일하신 하나님이 자기의 것으로 친히 요구하시는 경배를 부분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티끌만큼이라도 감축하는 것은 부당하며, 하나님에게 속한 것은 모두 항상 하나님에게 있어야 한다.
다음에 있는 "내 앞에"라는 어구는 계명 위반을 더욱 가증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하나님을 제쳐놓고 우리가 날조한 신으로 대신할 때에, 하나님의 질투심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파렴치한 여자가 자기 남편 앞에 정부를 끌어들여 더욱 그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권능과 은총으로 항상 자기의 택한 백성을 지켜 주신다고 증언하신 것은, 그들이 새 신을 끌어들이면 반드시 하나님이 그 모독행위를 보시리라고 경고하며, 그들의 반역죄를 더욱 효과적으로 막으시려는 뜻이다. 이런 대담한 행위에는 불경건한 짓이 많이 첨가된다. 즉,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려도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하며 무엇을 계획하며 무엇을 만들든 간에, 자기에게는 모두 보인다고 선언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경건이 하나님의 시인을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배교(背敎)에 대한 극히 은밀한 생각도 없는 맑은 양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자기의 신성(神性)의 영광이 외면적 고백에서 뿐 아니라, 그 자신의 목전에서 완전하며 부패하지 않기를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 마음의 가장 비밀한 구석까지도 보신다.
둘째 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4-5).
17. 볼 수 없는 하나님께 대한 영적 경배
앞의 계명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친히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시고, 자기 이외에 다른 신들을 상상하거나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이제 그는 우리가 자기에 대해서 어떤 세속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도록, 자기는 어떤 하나님이신가, 어떤 경배로 자기를 공경할 것인가를 더욱 밝히 선언하신다. 그러면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에게 합당한 경배가 미신적인 의식으로 모독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의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유치한 생각으로 조작하기 쉬운 너절하고 육적인 행사들을 일체 버리라고 하신다. 그리고 자기에 대한 합당한 경배를, 즉, 자기가 친히 제정하신 영적 경배를 따르게 하신다. 그뿐 아니라, 이 범행의 가장 큰 허물을 곧 외형적 우상 숭배를 극악한 잘못이라고 지적하신다.
이 계명에는 두 부분이 있다. 첫째 부분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감히 우리의 감각적 지각에 예속시키려는 바꿔 말하면, 그를 어떤 형상으로 나타내려고 하는 우리의 무엄한 짓을 억제한다. 둘째 부분은 종교의 이름으로 이런 형상을 경배하는 것을 일체 금한다. 여기서는 모독적이며 미신적인 사람들이 하나님을 표시하기 위해서 보통 만드는 모든 형상들을 간단히 열거하신다. 하늘에 있는 것은 해, 달, 기타의 광명체들을 의미하며, 또한 새도 의미한다. 신명기 4장에서는(17,19절) 그의 마음을 피력하시면서 새와 별에 대해 언급하신다. 어떤 사람들이 지각없이 이 표현을 천사들에게 적용하는 것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이 점을 말하지 알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머지 부분들은 저절로 알려지기 때문에 그대로 지나가겠다. 우리는 이미 제 1 권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이 만드는 보이는 형상은 모두 하나님의 본성과 완전히 반대가 되며 따라서 우상이 나타나면 즉시 진정한 경건이 부패하며 타락한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배웠다.
18. 둘째 계명의 위협적인 말
첨부된 경고는 우리의 태만을 버리게 하는 데 적지 않은 효력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신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하나님인즉(또는, '강대'한, 즉, 하나님의 이 이름은 '힘' 이라는 말에서 왔기 때문이다), "나는 질투하여 내 이름을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5-6)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게만 우리가 굳게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여기에까지 인도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권능을 알리시며, 그것을 멸시하거나 훼방하는 자는 벌을 면하지 못한다고 하신다. 여기서 "하나님"을 의미하는 "엘"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는데, "엘"은 "힘"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나는 내 뜻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해서 주저하지 않고 계명 본문에 그렇게 번역해 넣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어떠한 동참자도 용인할 수 없는 "질투하는" 신이라고 부르신다. 셋째로, 어떤 피조물이나 새겨 만든 형상에게 하나님의 존엄한 영광을 옮기는 자에 대항해서,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수호하시겠다고 선언하신다. 이것은 간단하고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조상의 불경건을 모방할 손자와 증손자들의 대에까지 미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먼 후손들에게까지 지속적인 자비와 친절을 나타내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대해서 남편의 품성에 서시는 때가 심히 많다. 참으로 우리를 교회의 품안에 받아들이심으로써 우리와 맺으시는 인연은 거룩한 혼인과 같으며, 이것은 상호간의 신의를 기초로 삼아야한다(엡 5:29-32). 하나님은 진실하고 성실한 남편의 모든 의무를 수행하시는 대신에, 우리에게서는 사랑과 정조를 배우자로서 요구하신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사탄과 정욕과 육의추한 욕망에 맡겨 더럽히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배교를 책망하실 때에, 그들은 체면을 버리고 간음으로 더러워졌다고 개탄하신다(렘 3장, 호 2:4이하, 참조, 사 62:4-5). 거룩하고 정결한 남편일수록 다른 남자에게 마음이 기울어지는 처를 더욱 분하게 여긴다. 마찬가지로, 진실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장가드신 주께서는(참조, 호 2:19-90) 우리가 그의 거룩한 혼인의 순결을 버리고 사악한 정욕으로 더러워질 때마다 불타는 듯한 질투를 나타내신다. 그가 특별히 질투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의 거룩한 존엄성을 경배하지 않고 다른 신을 경배하거나 미신으로 경배를 오염시킬 때 이를 더욱 느끼신다. 하나님께 대한 경배는 절대로 부패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신을 섬길 때에 우리는 혼인의 맹세를 어길 뿐 아니라, 간부들을 끌어들임으로써 혼인 침상을 더럽히는 자가 된다.
19.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이르게 하거니와"
하나님이 자기는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에 이르게" 하리라고 하시는 의미를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무죄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공정성에 없는 일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또 아비의 죄를 아들에게 강제로 담당하게 않겠다고 친히 선언하신다(겔 18:20). 그러나 조부의 죄가 후대에 미친다는 이 문장은 자주 반복된다. 모세는 자주 하나님을 향해서 "여호와여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시는 여호와여"하고 말했다(민 14:18, 출 34:6-7). 예레미야도 "주는 은혜를 천만인에게 베푸시며 아비의 죄악을 그후 자손의 품에 갚으시오니"라고 한다(렘 32 :18). 어떤 사람들은 이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면서, 이것은 이 세상에서 받는 벌로만 해석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벌은 자녀들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가하시는 때가 많으므로, 부모의 죄악 때문에 자녀들이 받아도 불합리하지 않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이것은 참으로 사실이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그의 죄 때문에 그의 자손들이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가 되어 끌려가리라고 선언한다(사 39:6-7). 바로와 아비멜렉의 가문들도 아브라함을 해한 죄로 재앙을 받았다(창 12:17, 20:3,18). 그러나 이 점을 들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해석이라기보다 도피가 된다. 여기서와 다른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현세에 국한된 벌보다 더 큰 벌을 선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의 의로운 저주는, 악인만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가족 전체를 괴롭힌다고 해석해야 한다. 저주가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영을 빼앗긴 아비에게서 가장 부끄러운 생활밖에 기대할 것이 없지 않은가? 또는 아비의 죄악 때문에 주에게 버림받은 아들은 같은 멸망의 길을 갈 것이 아닌가? 끝으로, 가증한 사람들의 저주받은 후손인 그 손자와 증손자들도 그들의 뒤를 따라 돌진할 것이 아닌가?
20. 조상의 죄에 대한 벌이 후손에게 미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모순되지 않는가?
우선 이런 벌이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하지 않는가를 검토하겠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은총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시지 않는 사람들의 모든 성품이 전적으로 정죄를 받아야 할 것이라면, 그들을 위해서 멸망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기의 죄악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고, 하나님 편에 어떤 불공정한 증오심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자기들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얻도록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해서 불평할 아무 근거가 없다. 추문이 자자한 자들과 사악한 자들이 자기의 죄악 때문에 벌을 받아, 그들의 가문이 여러 대에 걸쳐 하나님의 은총을 빼앗긴다고 해서, 이와 같은 공정한 천벌에 대하서 누가 하나님을 비난할 수 있는가? 그런데,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아비의 죄에 대한 벌이 아들에게 넘어가지 않으리라고 선언하신다(겔 18:20). 그러나 여기서 논의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오랫동안 계속적으로 여러 가지 불행을 겪은 이스라엘 백성은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라고 하는 속담을 중요시하기 시작했다(겔 18:2). 그들이 생각한 뜻은, 자기들은 의롭건만 조상들의 죄 때문에 애매한 벌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의 진노는 용서가 없고 은위의 병행도 없다는 것이었다. 선지자는 그렇지 않다고 그들에게 언명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죄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의로운 아들이 악한 아비의 벌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와 일치하지 않는다. 계명의 위협도 이런 뜻이 아니다. 주께서 악인들의 가문에서 자기의 은총과 진리의 광명과 그 밖의 구원 수단들을 제거하실 때에, 여기서 논의되는 벌이 실현되는 것이라면, 즉,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으며 눈이 어두워진 자손이 조상의 발자취를 따라간다면 그들은 조상의 악한 행실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세상 고통을 받으며 드디어 영원한 멸망에 빠진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의해서 형벌을 받는 것이며, 그 원인은 다른 사람의 죄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사악인 것이다.
21.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반면에 하나님의 자비를 천대까지 베푸시겠다는 약속이 있다. 이 말씀은 성경에 자주 나오며(신 5:10, 렘 32:18), 교회에 대해서 "내가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하신(창 17:7) 엄숙한 언약에도 삽입되어 있다. 여기에 대해서 솔로몬은 "의인이 죽은 후에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고 한다(잠 20:7, 의역). 이것은 그들이 거룩한 양육을 받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런 양육은 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은총이 경건자의 가문들을 영원히 떠나지 않으리라고 하신 언약에서 이 축복이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 신자들에 대한 특별한 위로가 있으며, 반대로 악인들에게는 큰 공포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 후에도 의와 악의 기억이 하나님 앞에서 중요시되어, 의에 대한 축복과 악에 대한 저주가 후손에게까지 미친다면, 의나 악을 행하는 당자들에게는 더욱 영향이 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악인의 후손이 개선되며 신자의 후손이 타락하는 때가 있다는 사실과 모순되지 않는다. 입법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자기의 선택을 방해할 수 있는 영구한 규정을 만들려고 하신 것이 아니다. 의인을 위로하며 악인을 위협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이 항상 유효하지 않더라도 공허하거나 무력한 경고가 아니기만 하면 충분하다. 몇몇 악인에 대한 생전의 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증언하며, 죽을 때까지 벌을 면하는 죄인들도 모두 앞으로 언젠가는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증언이 된다. 그래서 아비의 덕택으로 아들이 받는 하나님의 자비와 인애를 보이시기 위해서 이 축복의 한 예를 드심으로써, 자기를 경배하는 자들에 대한 끊임없고 영구한 은혜를 증명하신다. 아비의 죄악을 아들에게서 추궁하심으로써 모든 악인들은 자기의 범법 때문에 어떤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이 구절에서는 이 후자의 확실성에 특히 관심을 보이신다. 또 겸해서 자기의 자비가 크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신다. 벌은 사대(四代)에 국한하시고 자비는 천대(千代)에 미치게 하시기 때문이다.
셋째 계명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 20:7).
22. 계명의 해석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의 존엄성을 우리가 거룩히 받들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불순하거나 불경한 태도를 가짐으로써 모독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 금지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이름을 공경하며 경건하게 경외하도록 열성과 주의를 다하라는 명령이 따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신비들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말할 때에 항상 경외하며 조심하도록, 사고와 발언의 자세를 가져야한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논평할 때에도 그에게 영예가 되는 일만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을 열심히 준수해야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첫째로, 하나님에 대해서 마음으로 생각하며 입으로 말하는 것은 그의 탁월하심을 나타내며 그의 거룩한 이름의 존엄성에 일치하며 그의 위대성을 찬양하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야심이나 탐욕이나 재미를 위해서 그의 거룩한 말씀과 존귀한 신비들을 경솔하게 또는 패악하게 왜곡 남용해서는 안 되며, 그 말씀과 신비들에는 그의 존엄한 이름이 새겨져 있으므로 항상 존경하며 존중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가련한 인간들이 흔히 상습적으로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을 물리치고, 우리는 그의 행적 훼방하거나 비평하지 말아야 한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하시는 줄로 인정하는 일에 관해서는 그의 지혜와 의와 인애를 찬양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받든다는 뜻이다.
여기서 어긋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허망되고 악한 일에 남용하여 더럽히게 된다. 하나님의 이름은 합당하게 사용하게 되어 있으므로 합당하게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다른 결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그 존엄성이 사라지고 점점 멸시를 받게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기 쉬운 경솔한 태도도 심히 악하거든, 하물며 여러 가지 미신에 접신술과 무서운 저주와 불법한 제마술과 기타 악한 주문들에 악용하는 자들은 죄가 훨씬 더 크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계명은 특히 맹세와 관련이 있다. 맹세에서는 주의 이름을 가장 가증하게 악용하기 때문에, 우리가 신성 모독을 일체 하지 못하도록 맹세를 언급하신다(참조, 신 5:11). 이 계명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그의 이름에 대한 경외에 관해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며, 인간 사회에서 지켜야 하는 공정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 계명이 사랑의 의무에 대해서 가르친다면, 그것은 무용한 반복이 될 것이다. 사랑의 문제는 둘째 판에 미루었으며, 거기서 인간 사회를 해치는 위선과 위증을 비난하실 것이다. 율법의 구분법으로도 이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율법을 두 판에 배열하신 것은 이유가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보아서 이 계명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권리를 옹호하시며 자기의 이름의 거룩함을 보호하지만, 인간 상호간의 의무를 가르치시는 것은 아니라고 우리는 결론한다.
23. 하나님께 한 고백으로서의 맹세
우선, 맹세란 무엇인가를 말해야겠다. 우리가 하는 말의 진실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르는 것이 맹세다.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모욕이 포함된 저주는 맹세라고 하기에 적당하지 않다. 이런 확인법을 합당하게 쓰는 것을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경배라고 하는 구절이 성경에는 많다. 예를 들면, 앗수르 사람들과 애굽사람들을 불러 이스라엘과 언약 관계를 맺는 문제에 대해서 예언할 때에, 이사야는 "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리라"고 한다(사 19:18). 바꿔 말하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함으로써 그에 대한 경건을 고백하리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나라가 확장되는 데 대해서도,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라"고 한다(사 65:16). 예레미야는 "여호와 내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내 백성을 가르켜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 같이 하면 그들이 내 백성 중에 세움을 입으리라"고 말한다(렘 12:16). 또 우리가 증인으로서 주의 이름을 부를 때에, 우리는 우리의 경건을 증언한다고 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불변하는 진리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을 진실에 대한 가장 적합한 증인이실 뿐 아니라, 숨은 일을 드러내어 진실을 확인하는 유일한 증인이며, 마음의 뜻을 아는 분으로 인정한다(고전 4:5). 사람들의 증언이 무력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에게 달려가서 우리의 증인이 되어 주시기를 구한다. 특히 양심에 감추어 있는 일을 선언할 필요가 있을 때에 그렇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는 다른 신들로 맹세하는 자들에 대해서 심히 노하시며, 이런 맹세를 노골적인 반역으로 해석하신다. "네 자녀가 나를 버리고 신이 아닌 것들로 맹세하였다"(렘 5:7). 그리고 이 범과의 중대성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을‥‥‥나는 멸절하리라"고(습 1:5-4)하는 처벌의 위협 속에서 선언하신다.
24.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거짓 맹세
우리의 맹세에는 주의 이름에 대한 경배가 포함되기를 주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따라서 맹세에 경배가 아닌 거만이나 경멸이나 멸시가 내포되지 않도록 우리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된 맹세를 하는 것은 사소한 모욕이 아니다. 율법에는 이것을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레 19:12). 하나님에게서 진실성을 빼앗는다면, 남는 것이 무엇인가? 그렇게 되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실 것이다. 그러나 그를 허위의 옹호자와 승인자로 만드는 것은 그의 진실성을 박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아간에게 사실대로 고백하라고 할 때에, "내 아들아‥‥‥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수 7:19)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한다면 하나님께 대한 가장 중대한 불경이 된다는 뜻을 말한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 어떤 거짓으로 낙인을 쳐서는 안 된다는 것은 우리 때문이 아니다. 요한복음에서 바리새인들이 같은 식으로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른 것을 보면(요 9:24), 유대인들이 맹세를 시킬 때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보통이었음이 분명하다. 성경에 있는 표현들은 예컨대,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삼상 14:39),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삼상 14:44, 참조, 삼하 3:9, 왕하 6:31),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고후 1:23, 롬 1:9) 등 이런 조심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이 말씀들은, 우리가 하는 말에 대해서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를 때에는 반드시, 만일 우리가 속인다면 하나님이 그 거짓 맹세에 대해 처벌해 달라고 비는 것이 된다는 뜻을 암시한다.
25. 불필요한 맹세
진실할지라도 필요하지 않은 맹세에 하나님의 이름이 사용되면, 하나님의 이름은 저속한 것이 된다. 그런 때에도 헛되이 부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짓맹세를 하지 않는 동시에 맹세는 정욕이나 욕망을 위해서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필요한 때를 위해서 허락하여 제정하신 것임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거짓맹세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따라서 불필요한 일에 맹세를 적용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그런데, 경건이나 사랑을 위한 경우 이외에 어떤 다른 필요성을 빙자할 수 없다. 이 문제에서 오늘날 사람들은 제멋대로 죄를 지으며, 그것이 관습이 되어 더 이상 죄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확실히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경미한 범죄로 인정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한담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보통으로 또 닥치는 대로 욕되게 하고 있다. 이 중대한 타락 행위가 오랫동안 계속되어도 벌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담대하게 되며 한 습성이 되어, 이것을 악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의 계명은 변할 수 없으며, 경고는 확고부동하여, 언젠가는 효력을 나타낼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자들에게는 특별한 천벌이 선포되었다.
이 계명은 다른 방면에서도 어기고 있다. 우리가 맹세할 때에 하나님 대신에 그의 거룩한 종들을 쓰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을 사람들에게 옮기는 것이며(출 23:13) 분명히 악한 짓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자기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특별한 계명을 주시며(신 6:13, 10:20),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말라고 특별히 금지하신 데는(출 23:13) 타당한 이유가 있다. 사도도 이 일을 분명히 증거하여,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는"(히 6:16-17) 것이며,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보다 더 위대한 것이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셨다고 썼다.
26. 산상수훈은 이런 종류의 맹세를 금지하지 않는가
재세례파는 맹세에 대한 이 신중한 태도에 만족하지 않고, 모든 맹세를 예외 없이 배척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맹세 금지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고 하신 것같이 전반적인 것이라는 것이다(마 5:34,37, 참조, 약 5:12)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생각 없이 그리스도와 충돌하며, 마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명령을 폐지하려고 지상에 내려오신 듯이,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버지의 원수로 만든다. 그런데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맹세를 율법 아래에서 합법적인 것으로서 허가하실 뿐 아니라(이 점만으로 충분할 것이지만), 필요한 때에는 사용하라고 명령하신다(출 22:10-11). 또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선언하시며(요 10:30), 자기는 아버지가 명령하신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전하지 않으며(요 10:18), 자기의 교훈은 자기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요 7:16) 말씀하신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그들은 하나님이 일찍이 사람들에게 행하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시인하신 일을 후에 금지하며 비난하신다고 하여, 하나님을 자기모순에 빠뜨리려는 것인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에 다소의 난점이 있으므로, 우리는 그 문제에 시간을 조금 소비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도하신 바를 주시하며, 그가 이 구절에서 목적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주의하지 않는다면, 결코 진리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목적은 율법을 완만하게 하거나 강화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파가 거짓된 방법으로 매우 부패하게 만든 것을 다시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 점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맹세를 전적으로 배척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의 표준을 어긴 맹세만을 배척하셨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보면, 당시 사람들은 보통 위서만을 피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율법은 거짓맹세 뿐 아니라, 허망하고 무용한 맹세도 금한다. 그러므로 율법의 가장 확실한 해석자이신 주님은 거짓 맹세뿐 아니라 맹세 자체가 나쁘다고 경고하신다(마 5:34).
무슨 까닭에 맹세하는 것이 나쁜가? 분명히 주께서는 헛되이 맹세하는 것을 의미하신다. 그러나 율법에서 칭찬하는 맹세는 건드리시지 않는다. 우리의 논적들은 "도무지"라는 말을 완고하게 붙잡고 더 강력한 추론을 하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말은 "맹세"에 붙지 않고 그 다음에 있는 맹세의 형식에 붙는다. 그들이 하늘과 땅을 두고 맹세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에는 언급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도 잘못이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가장 중요한 방법의 예를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의 모든 구실을 제거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지 않으면 천지를 두고 맹세하는 것으로 도망할 수 있다는 그들의 생각을 막아버리신다. 우리가 겸해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으면서도, 간접적인 형태로 하나님을 두고 맹세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생명의 빛이나 먹는 빵이나 자기의 세례나 그밖의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표적을 두고 맹세한다. 어떤 사람들이 오해하듯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을 두고 맹세하는 것을 금하시는 구절에서(마 5:34-35) 미신을 시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이 함부로 간접적인 맹세를 해도 나쁘지 않다고 하는 자들의 간교한 궤변을 논박하시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쓰지 않는 듯이 말하지만, 그 이름은 하나님의 모든 은혜에 확실히 새겨져 있는 것이다. 어떤 살아 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천사의 이름을 하나님 대신에 쓰는 것도 문제다. 예컨대, 이교민족들은 왕에게 아첨하는 의미로 왕의 생명이나 수호신을 두고 맹세하는 악풍이 있었다. 이런 거짓된 신격화는 유일신의 영광을 흐리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써서 우리가 하는 말의 확인을 얻으려고만 할 때도, 비록 간접적이라 하더라도, 이런 모든 너절한 맹세는 하나님의 존엄성을 해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금지하심으로써 이런 방자한 행동의 헛된 구실을 빼앗으신다. 내가 인용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야고보도 같은 뜻으로 반복한다(약 5:12).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짓인데도 불구하고 이 경솔한 짓은 언제든지 세상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도무지"라는 말을 문제의 핵심에 관련시켜서, 맹세는 예외 없이 불가하다는 듯이 해석한다면, 거기 즉시 첨가된 "하늘로도 말라‥‥‥땅으로도 말라"고 하는 말씀은 어떻게 설명하려는가? 이 말씀을 보면,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허물을 경감해 준다고 생각한 그 궤변을 그리스도께서 반박하신 것이 분명하다.
27. 그러므로 재판 받지 않을 맹세는 필연적으로 용납될 수 있다.
주께서는 위의 구절에서, 율법이 금지한 맹세만을 비난하셨다는 것은 건전한 판단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자기가 가르친 완전성의 실례를 친히 보여 주신 그리스도께서는 필요한 경우에 맹세하는 것을 주저하시지 않았다. 또 모든 점에서 선생에게 복종한 것으로 믿을 수 있는 제자들도 같은 예를 따랐다. 만일 맹세가 전적으로 금지되었다면, 누가 감히 바울이 맹세했을 것이라고 말하겠는가? 그러나 사정상 필요한 때에 그는 서슴지 않고 맹세했으며, 어떤 때에는 저주까지 첨가했다(롬 1:9, 고후 1:23).
그러나 문제는 아직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공적 맹세만이 이 금지에서 제외된다고 믿는다. 예컨대, 관리가 시키는 맹세, 군왕들이 조약을 엄숙하게 비준할 때에 쓰는 것, 또 백성이 군왕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 군인의 입대(入隊) 선서 등이다. 바울이 복음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맹세도 그들은 이 부류에 넣는다. 사도들은 직무상 개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공적 사절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맹세들이 가장 안전한 것임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의 더 확실한 증언에 의해서 지지되기 때문이다. 의심스러운 문제에서 관리는 증인에게 맹세를 강요할 의무가 있으며, 증인은 선서 하에 대답할 의무가 있다. 사도는 인간의 분쟁은 이런 수단으로 해결된다고 말한다(히 6:16). 맹세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계명에서 확고한 승인을 받는다.
또 고대 이교도들이 엄숙한 공직 선서를 대단히 존경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하는 일반적 맹세는 하나님의 존엄성이 들어 있지 않다는 듯이, 거의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개인적 맹세일지라도 성결한 의도로 신중히 또 경건하게, 그리고 사정상 필요해서 한 것이라면, 그것을 배척하는 것은 너무도 위험할 것이다. 그런 맹세에는 그것을 지지하는 근거와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사인(私人)들이 중대하고 진지한 문제에 관련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심판자가 되어 주시기를 기원하는 것이 합당하다면(삼상 24:12),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우기를 원하는 것은 더욱 큰 근거가 있다. 그대의 형제가 그대를 배신자라고 비난할 때에, 그대는 사랑의 의무로서 해명하려고 할 것이다. 아무리 말해도 그는 만족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의 완강한 악의 때문에 그대의 명예가 위태롭게 된다면, 그대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적당한 때에 그대의 결백을 나타내 주시기를 기원하더라도 범과가 되지 않는다. "심판"과 "증언"이라는 말들을 비교하면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르는 문제는 작은 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르는 것을 불가하다고 하는 이유를 나는 알 수 없다. 여기에 대해서는 선례가 대단히 많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아비멜렉과 한 서약을 공적인 것이라고 한다면(창 21:24, 26:31), 야곱과 라반은 확실히 사사로운 개인들로서 서로 맹세함으로써 동맹을 확인했다(창 31:53-54). 보아스는 개인으로서 약속한 결혼을 같은 방법으로 룻에게 확인했다(룻 3:13). 오바댜는 개인으로서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는데, 엘리야를 설복하기 위해서 자기가 하는 말을 맹세로 확인했다(왕상 18:10).
이와 같이 우리의 맹세를 규정하는 가장 좋은 원칙은 경솔하며 무분별하며 함부로 하는 또는 너절한 맹세가 되지 말고, 정당한 필요가 있어서 하는 맹세가 되라는 것이다. 즉, 주의 영광을 변호하거나 형제의 덕을 세우려는 것이라야 한다. 이것이 이 계명의 목적이다.
넷째 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8-10).
28. 일반적인 해석
이 계명의 목적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기호나 일에 대해서 끝내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명상하며 하나님이 제정하신 방법으로 그 명상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이 계명은 다른 계명들에 없는 특별한 고려를 하므로, 해석하는 순서도 약간의 차이가 필요하다. 초대 교부들은 이 계명을 예시(豫示)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 그리스도가 강림하셔서 다른 상징들과 함께 폐기된 일이, 즉, 어느 하루를 외면적으로 지키는 일이 이 계명에 포함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만, 그들은 문제의 절반만 언급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깊이 해석하며, 이 계명을 준수하는 세 가지 조건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숙고해야 한다.
첫째로, 제 칠일의 안식은 하늘 입법자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적 안식을 알리시는 방법이었다. 신자들은 자기의 일을 제쳐놓고 하나님이 자기 안에서 일하시게 하라는 것이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의도는 그들이 일정한 날에 서로 모여 율법을 배우며 의식을 행하며 적어도 그 날은 특별히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명상하는 데 바쳐서, 이렇게 회상함으로써 경건의 훈련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그밖에 남의 권위 하에 있는 사람들과 종들에게 휴식하는 날을 주셔서, 그들의 노고를 쉬는 때가 있게 하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29. 약속으로서의 안식일 계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서 이 영적 안식의 예시(豫示)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을 우리는 여러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주께서 이 계명에 대해서와 같이 엄격한 복종을 명령하신 계명이 거의 없다(민 15:32-36, 참조, 출 31:13이하, 35:2). 모든 경건이 전복되었다는 것을 예언자들을 통해서 알리고자 하실 때에는, 안식일을 더럽히며 범하며 지키지 않으며 거룩하게 하지 않았다고 비난하셨다. 안식일에 대한 공경이 없어지면 하나님을 공경하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듯이 말씀하셨고(겔 20:12-13, 22:8, 23:38, 렘 17:21,22,27, 사 56:2), 안식일 준수에 대해서는 최고의 칭찬을 주셨다. 따라서 신자들도 다른 계명들 가운데서도 안식일에 대한 계시를 가장 존중했다. 느헤미야서를 보면, 레위 사람들은 공회 앞에서 말했다. "거룩한 안식일을 저희에게 알리시며 주의 종 모세로 계명과 율례와 율법을 저희에게 명하시고"(느 9:14). 율법의 모든 교훈 가운데서 안식일을 극히 존중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교훈은 이 신비의 존엄성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며, 모세와 에스겔이 이 존엄성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는,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고 하며(출 31:13-14, 참조, 35:2),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라"고 하셨다(출 31:16-17). 에스겔은 이 뜻을 더욱 자세히 표현하지만, 그 요점은 안식일이 한 표징이라는 것과, 이 표징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인 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겔 20:12).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곧 우리의 의지를 억제하는 것이라면, 외면적인 표징과 내면적인 실상 사이에 아주 긴밀한 일치가 나타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기 위해서 우리는 전적으로 쉬어야 하며, 우리의 의지를 바쳐야 하며, 우리의 마음을 맡겨야 하며, 우리의 모든 육적 욕망을 버려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생각한 우리 자신의 일은 일체 쉬고, 사도가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일하시며(히 13:21), 우리가 그분 안에서 안식을 얻도록(히 4:9) 해야 한다.
30. 제 칠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칠일 중 하루를 지키는 것은 이 영원한 휴식이라고 생각하는 관습이었다. 주께서는 친히 모범을 보이심으로써 그들이 더욱 경건하게 그 날을 지키게 권장 하셨다. 그가 조물주를 본받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열심을 자극시키는 데 적지 않은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완전수로 되어 있는 일곱이라는 숫자에서 어떤 비밀한 뜻을 캐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수를 택한 것은 영구성을 표시하시려는 것이며, 이유가 있다. 모세의 말이 이 점을 지지한다. 그는 차례차례 계속되는 낮과 밤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하나님이 그 창조주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날로 끝맺는다(창 2:3). 이 수는 달리 해석할 수도 있다. 주께서는 이와 같이 마지막 날이 오기까지는 안식이 완성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리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 안에 있는 복된 안식을 가지기 시작하며, 매일 새로운 전진을 성취한다. 그러나 아직도 육과의 싸움이 계속하고 있으므로, "매월삭과 매안식일"에 대한 이사야의 말이(사 66:23) 실현될 때까지는, 바꿔 말하면,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게" 되는 날까지는(고전 15:28) 안식은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일곱째 날을 통해서 마지막 날에 자기의 안식이 완성될 것을 백성에게 대략 알리시며, 그들이 평생 안식에 대해서 끊임없이 명상함으로써 이 완성을 동경하게 만들려고 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31. 안식일 계명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만일 누가 일곱이라는 수에 대한 이 해석을 너무 미묘하다고 해서 싫어한다면, 나는 더 간단히 생각하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 예컨대, 주께서는 하루를 정하셔서 백성이 율법의 지도하에 영적 안식을 끊임없이 명상하게 하셨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또 일곱째 날을 제정하신 이유에 대해서도, 혹은 그 날로서 충분하리라고 보셨다고 하며, 혹은 자기가 하신 예를 보여 주심으로 백성을 더욱 잘 분발시키려 하셨다고 하며, 흑은 적어도 그들이 조물주를 본받게 하려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이 안식일에 없다는 것을 지적하려고 하셨다고 해석한다. 여기서 주로 제시된 신비를 우리의 수고를 영구히 쉰다는 점을 보존하기만 하면, 어느 해석을 취하든 간에 별로 차이가 없다. 예언자들은 유대인들이 이 점을 회상하게 만들며, 신체적 노동만 하지 않으면 의무를 완전히 다한 줄로 생각하지 않게 만들려고 반복 호소했다. 이미 인용한 구절 이외에 이사야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사 58:13-14).
그러나 주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 계명의 의식적 부분이 폐지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 자신이 실상이시므로 그가 계시는 곳에서는 모든 상징이 사라지며, 그가 본체이시므로, 그가 나타나실 때에 그림자는 버려지기 때문이다. 즉, 그는 안식의 진정한 실현이시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으며, 그와 연합하여 그의 죽음에 참여한 목적은 그의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살려는 것이다(롬 6:4-5).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다른 곳에서 안식일은(골 2:16)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한다(골 2:17).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는 실상의 바로 본체시며,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이 구절에서 잘 설명했다. 이 일은 어느 하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죽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할 때까지 우리의 일생을 통해서 있을 일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날을 미신적으로 지키는 것을 철저히 피해야 한다.
32. 넷째 계명은 어느 정도까지 외적인 법규를 벗어나는가?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둘째와 셋째 이유들은 고대의 그림자로 돌릴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똑같이 적용된다. 안식일은 폐지되었으나, 우리는 여전히 ⑴ 일정한 날에 모여 말씀을 들으며 신비의 떡을 떼며 공중기도를 드려야 한다(참조, 행 2:42). 그리고 ⑵ 종들과 노동자들의 노고를 쉬게 해야 한다. 주께서 안식일을 명령하셨을 때에 이 두 가지 점을 고려하신 것은 틀림이 없다. 처음 것은 유대인들의 관습만 봐도 증거가 많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둘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신 5:14-15). 또 출애굽기에서는,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종의 자식과‥‥‥숨을 돌리리라"고 한다(출 23:12). 이 두 가지 일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집회를 우리에게 명령하며, 우리는 일상 경험으로 모임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안다. 그러나 집회 제도와 일정한 날이 없으면 어떻게 이런 모임을 가질 수 있겠는가? 사도가 말하는 대로, 우리는 모든 일을 적절하게 하며 질서 있게 해야 한다(고전 14:40) 예정과 규정이 없이는 적절과 질서를 유지할 수 없으며, 따라서 교회가 즉시 혼란과 파멸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주께서 유대인들의 곤란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안식일을 제정하셨고, 우리도 같은 곤란을 느낀다면, 아무도 이 일이 우리와는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지 말라. 우리의 지극히 천명하시고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유대인들에게 필요한 일에 못지않게 우리에게 필요한 일에도 유의하셨던 것이다.
혹자는 우리가 날들의 구별을 일체 철폐하고 매일 모이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영적 지혜를 위해서는 매일 얼마만큼 시간을 배정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연약해서 매일 모일 수 없고, 사랑의 원칙이 그들에게서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무슨 까닭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정해 주신 질서에 순종하지 않을 것인가?
33. 우리는 왜 주일을 지키는가?
지금 침착하지 못한 사람들이 주일에 관해서 소동을 일으키므로, 나는 부득이 이 문제를 길게 논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날들을 지키기 때문에, 유대교의 정신을 받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날을 지키는 것은 유대인들과 아주 다르기 때문에, 이 점에서 유대교를 초월한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장 엄격하고 신중한 의식으로서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며, 거기 영적 신비가 상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교회내의 질서 유지에 필요한 대책으로서 이용하는 것이다. 바울은 어느 누구도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로 그리스도인들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며, 그것은 장차 올 일의 그림자라고 가르친다(골 2:17). 그래서 갈라디아 신자들이 아직도 날들을 지키니, 자기는 그들 사이에서 헛수고를 한 것이 아니냐고 염려한다(갈 4:10-11). 그리고 날을 서로 구별하는 것은 미신이라고, 로마 신자들에게 단언한다(롬 14:5). 미친 사람이 아니라면, 사도가 어떻게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가를 어느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그가 상대한 사람들은 지키는 목적을 사회 및 교회의 질서에 두지 않고, 영적인 일을 예시하는 것으로서 안식일을 보존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과 복음의 빛을 그만큼 흐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이 육체노동을 쉰 것은 육체노동이 거룩한 연구와 명상을 방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중히 그날을 지킴으로써 옛적에 권장된 신비적 의식들을 존중하노라고, 일종의 소심에서 오는 상상을 한다. 사도는 날에 대한 이 어리석은 구별을 비난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인 사회의 평화에 도움이 되는 합법적 날짜 선택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그가 세운 교회들을 이 목적으로 안식일을 보존했다. 사도는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을 돕기 위한 기부금을 모으는 것도 그 날 하라고 지정했다(고전 16:2). 미신을 염려하는 사람이 있다면,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지키는 주일보다 유대인들의 성일들에 위험성이 더 많았다. 미신을 없앨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성일을 제쳐놓았고, 교회의 예절과 질서와 평화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 목적을 위해서 다른 날을 제정한 것이다.
34. 성일의 영적 준수
그러나 고대인들이 우리가 말하는 주일로 안식일을 대신한 데는 신중한 고려가 없지 않았다. 고대의 안식일이 대표한 저 진정한 안식은 주의 부활에서 그 목적이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그림자를 끝낸 그 날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그림자였던 의식을 집착하지 말라고 하는 경고가 된다. 나는 일곱이라는 수를 고집해서 교회를 그것에 예속시키는 것도 아니다. 또 다른 날에 엄숙히 모이는 교회들도 미신만 없으면 나는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규율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만을 생각할 때에, 거기는 미신이 없다고 할 것이다.
요약하면, 유대인들에게 진리가 상징으로 전달된 것같이, 우리에게는 그림자 없이 진리가 제시된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일을 쉬는 영원한 안식을 평생 명상해서, 주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시게 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각각 개인적으로 틈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활동을 부지런히 그리고 경건하게 명상해야 한다. 또 말씀을 들으며 성례전을 집행하며 공중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교회가 제정한 합법적 질서를 일제히 지켜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수하에 있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압박해서는 안 된다.
이리하여 거짓 선지자들의 너절한 이야기는 사라진다. 그들은 수 백년 전에 유대교적 견해를 사람들에게 감염시켰다. 이 계명의 의식적 부분만이(그들의 소위 제 칠일의 "지정"만이) 폐지된 것이고 도덕적 부분은, 즉, 이레 가운데서 하루를 정하는 것은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인들을 비난하는 의미로 날을 변경했을 뿐이고, 그 날을 거룩하다고 하는 생각은 여전하다. 유대인들이 생각한 것과 같이, 그날의 신비성에 중요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이런 사상을 가르침으로써 이익을 얻는다. 자기들의 교회 규정을 고집하는 자들의 미신은 유대인 이상이요 세 갑절이나 더 유치하고 육적인 안식일 미신이다. 따라서 이사야가 당시의 사람들을 책망한 말은 현대의 그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된다(사 1:13-15, 58:13). 그러나 우리가 특히 견지해야 하는 일반적 교훈은 이것이다. 즉, 우리들 사이에서 경건이 소멸하거나 쇠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성회에 부지런히 출석하며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도울 수 있는 외면적 보조수단들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35. 이 계명의 폭넓은 범주
이 계명의 목적은, 주 하나님께서 자기의 경륜이 유지되는 것을 기뻐하시므로, 우리는 그가 제정하신 상하 등급을 거역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점은, 하나님이 우리 위에 세우신 사람들을 우리는 존경하며 경의와 순종과 감사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멸시, 고집, 배은망덕 등으로 그들의 존엄성을 손상하는 것을 금지한다. "공경한다"는 말은 성경에서 의미가 넓다. 그래서 사도가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라"고 할 때에(딤전 5:17), 그는 그들이 받아야 할 경의를 의미할 뿐 아니라, 그들의 봉사에 대해서 당연히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웃어른을 인정하라는 이 교훈에 대해서 타락한 인간성은 강경히 반대한다. 인간성은 높은 자리를 갈망하는 생각이 가득해서 아랫자리에 서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윗자리 가운데서도 그 본질상 가장 인자하고 남의 시기도 가장 받지 않는 종류를 예로 드신다. 이렇게 하시면 우리의 마음을 더 쉽게 부드럽게 만들어 복종하는 습성이 생기도록 인도하실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가장 용인하기 쉬운 복종으로 우리를 훈련하셔서 점점 모든 합법적 복종이 습성화하게 하신다. 복종하는 이유는 모두 같기 때문이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상위에 두신 사람들에게 필요하다면 자기의 이름을 나눠주셔서 그 위치를 유지하게 하신다. "아버지", "하나님", "주" 등의 칭호는 오래 동안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런 칭호 중의 어느 것을 들든지 반드시 우리는 곧 그의 존엄성을 연상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나눠주시는 사람들을 자기의 광채의 불꽃으로 빛나게 하셔서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정도에 따라 눈에 띄게 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아버지인 사람은 이유 없이 거룩한 칭호를 가진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어떤 신적(神的)인 것을 그에게서 인정해야 한다. "왕"이나 "주"가 되는 사람도 하나님의 영예에 어느 정도로 참여한다.
36. 명령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 여기서 한 일반적 원칙을 세우셨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해서는 안 된다. 즉, 주의 임명으로 어떤 사람이 우리 위에 세워진 것을 알면, 우리는 그에게 경외와 순종과 감사를 드리며, 그밖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의무를 다해야 한다. 우리의 웃어른이 이런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로 그 지위에 있게 된 것이며, 이 일이 우리가 그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낳아준 우리의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백히 말씀하신다. 자연 자체도 이 일을 우리에게 가르칠 것이다. 반항이나 고집으로 부모의 권위를 무시하는 자들은 사람이 아니라 기괴한 동물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신다. 자기를 낳아 준 분들의 노고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인생의 혜택을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이 공경에 경의와 복종과 감사의 세 부분이 있다고 우리가 말한 것은 율법에 첨가된 여러 말씀을 보아도 분명히 바르다. 주께서는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죽이라고 명령하심으로써(출 21:17, 레 20:9, 잠 20:20) 처음 부분인 경의를 확인하신다. 즉, 멸시와 박대를 벌하신다. 또 순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자녀에 대해서 사형을 명령하심으로써(신 21:18-21) 둘째 부분인 순종을 확인하신다.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5장에서 부모를 후대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하신 말씀은(4-6절) 존경의 셋째 부분인 감사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이 계명을 언급할 때마다 복종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엡 6:1-3, 골 3:20).
37. 약속
권면하는 의미로 약속이 첨가되었다. 이것은 여기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복종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가를 보다 더 잘 알리시려는 뜻이다. 바울이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째 계명이라고 한 의도는(엡 6:2) 이 말을 바늘로 삼아 무감각한 우리를 찌르려는 것이다. 이미 첫째 판에 주어진 약속들은 어느 한 계명에 국한되지 않고 율법 전체에 관련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계명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약속하신 땅에 대해서 특히 말씀하신다. 땅을 가진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보증한다면, 하나님이 자기의 은혜를 오랫동안 받아 즐길 수 있는 장수함을 약속하심으로써 자기의 은혜를 증명하시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계명의 뜻은 "부모를 공경하여 나의 호의의 보증으로서 너희의소유가 될 그 땅에서 장수하면서 그 소유를 즐기라"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신자들에게는 지구 전체가 축복 하에 있으므로, 현세 생활을 하나님의 한 축복으로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장수도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한 증거라는 의미에서 이 약속은 우리에게도 관계가 있다. 우리에게나 고대 유대인들에게나 장수는 그 자체에 축복을 내포했다고는 약속하시지 않았지만, 장수는 경건자에게 하나님의 친절을 알리는 한 관습적 상징이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복종하는 아들이 미성년으로서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자주 있더라도, 주께서는 천 평밖에 약속하시지 않은 사람에게 십만 평이나 주시듯이, 요지부동한 자세로 끝까지 약속을 실현하신다. 요컨대, 장수는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의미에서 우리는 장수하리라는 약속을 받았으며, 장수는 하나님의 호의를 증거하는 때에만 축복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종들에 대해서 자기의 호의를 죽음을 통해서 훨씬 더 풍부하고 확실하게 증언하시며, 실지로 증명하신다.
38. 위협
이밖에도 주께서는 부모를 올바로 공경하는 자녀들에게 현세의 축복을 약속하시는 동시에, 고집 세고 불순종하는 자녀들에게 저주를 피할 수 없으리라고 암시하신다. 이 계명이 확실히 실행되도록, 주께서는 그런 자들을 모두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고 율법에서 선언하시고, 처벌을 명령하셨다. 그들이 이 판결을 교묘하게 피한다면, 하나님 자신이 어떻게 해서든지 벌을 주신다. 우리는 이런 자들이 많이 전쟁에서나 개인 싸움에서 죽으며, 혹은 다른 더 드문 방법으로 쓰러지는 것을 본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이 경고가 헛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고령에 이르기까지 벌을 받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는지 모르나, 그들은 현세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겨우 살아가며, 앞에는 더욱 큰 벌이 기다리고 있다. 참으로 그 때에는 경건한 자녀들에게 약속된 축복에 결코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겸해서 주의해야 한다. 우리에게 대한 명령은 부모에게 순종하되, "주 안에서"만 하라는 것이다(엡 6:1). 이 점은 이미 언급된 원칙을 보아서 명백히 알 수 있다. 부모가 앉아 있는 높은 자리는 주께서 주신 것이며, 그들에게는 주의 영광의 일부를 나눠주신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순종하는 것은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공경하는 한 걸음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이 우리를 자극하여 율법을 어기게 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부모가 아니고 우리를 참 아버지에게 순종하지 못하게 유혹하는 이방인이라고 인정할 충분한 권리가 있다. 군왕들과 귀족들과 그 밖의 각종 높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 그들이 윗자리에 있다고 해서 그 위세로 하나님의 존엄성을 끌어내린다는 것은 부끄럽고 어리석은 짓이다. 그들이 높은 지위를 가진 것은 하나님이 높으시기 때문이며, 그들은 마땅히 우리를 높으신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한다.
여섯째 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출 20:13)
39. 계명
이 계명의 목적은, 주께서 인류 전체에 일종의 통일성이 있도록 한데 묶어 두셨으므로 우리는 각각 전체의 안전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이웃의 신체를 해할 일은 폭행, 상해 기타 어떤 것이든지 일체 금지하신다. 따라서 이웃의 생명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충실히 이용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들의 평화에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라, 해로운 것이면 막아내라, 이웃이 위험한 처지에 있으면 도와주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입법자로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그는 이 원칙으로 우리의 영혼을 인도하려 하신다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마음속의 생각을 보시며 특히 그것을 중시하시는 분이 육체에만 진정한 의를 가르치신다면, 그것은 우스운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마음으로 살인하는 것을 금하며, 형제의 생명을 구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라고 명령하신다. 참으로 살인은 손이 낳는 것이지만, 마음이 분노와 증오심에 감염될 때에 살인을 잉태한다. 형제에 대해서 노하면서 그를 해하려는 욕망이 치밀어 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형제에 대해 노하지 않는다면 미워할 수도 없다. 증오심은 지속되는 분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분노나 증오심이 있는 곳에는 해를 주려는 의도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수단으로도 감출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문제를 회피하려고 애쓰더라도, 성령께서는 이미 "마음속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선언하셨고(요일 3:15), 주 그리스도께서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자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고 선언하셨다.
40. 이 계명이 생긴 이유
성경은 이 계명에 대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인 동시에 우리의 혈육이라는 이중의 근거를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을 침해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웃을 신성하게 생각해야 한다. 또 모든 인류의 관계를 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이웃의 신체를 우리의 몸같이 존중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어떻게 이 권면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업과 은총에서 귀결되는가를 논하겠다. 주께서는 사람에게 자연히 있으며 우리를 인도해서 이웃 사람의 생존을 돕게 할 수 있는 두 가지 일을 우리가 숙고하기를 원한다. 그 두 가지 일이란, 사람에게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존경하며 그에게 있는 우리의 혈육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피를 흘리지 않은 것만으로는 살인죄를 피하지 못한다. 이웃의 안전에 해로운 일을 실행했거나, 시도했거나, 원했거나, 계획했다면, 그것은 살인죄로 간주된다. 또 능력과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이웃의 안전을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역시 똑같이 율법에 대한 흉측한 위반이다. 그러나 이웃의 신체의 안전에 대해서 이렇게 관심이 많은즉, 영혼의 안전을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열성과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인가를 우리는 추론할 수 있다. 주께서 보시기에는 영혼이 육체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일곱째 계명
"간음하지 말이니라"(출 20:14)
41. 일반적인 해석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이 정숙과 순결을 사랑하시므로, 우리는 모든 부정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우리는 육의 추악이나 정욕의 난무에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 대응하는 적극적인 계명은 우리 생활의 모든 부분을 정결과 극기로 지속적으로 제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음행은 모든 정욕의 귀착점이며, 육체에 그 낙인을 찍는 점에서 그 추악상은 더욱 현저히 저열한 것인데, 그 음행을 명백히 금하심으로써 주께서는 우리가 모든 정욕을 타기 하도록 인도하려 하신다.
인간이 이런 상태로 창조된 것은 고독 생활을 하지 않고 돕는 사람과 함께 즐겁게 살도록 하시려는 뜻이다(참조, 창 2:18). 사람은 죄의 저주를 받아 더욱 이렇게 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대책으로서 결혼 제도를 제정하시고, 그의 권위에서 출발한 결혼 생활을 축복으로 성별 하셨다. 따라서 결혼이 아닌 남녀 결합은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저주받은 것이며, 우리가 무절제한 정욕에 빠지는 것을 막는 데 필요한 대책으로서 결혼생활이 제정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결혼하지 않은 남녀의 동거 생활은 반드시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고 들을 때에, 우리는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한다.
42. 독신생활은?
하나님이 특별한 은사로 놓아주신 사람들이 아니면, 우리는 모두 우리의 본성의 상태 때문에, 또 타락 이후에 타오른 정욕 때문에 이중으로 여성과 결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각각 자기가 받은 것을 알아야 한다. 순결은 멸시하지 못할 덕성임을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일시적으로 사람에 따라 혹은 거부되고 혹은 부여된다. 그러므로 정절을 지키기 어려워 이 싸움을 이길 수 없는 사람들은 결혼에서 도움을 구하며, 그들의 부름의 정도에 따라 정조를 지켜야 한다. 이 교훈을(참조, 마 19:11)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무절제에 대해 주신 타협안을 채용하지 않는 다면, 그들은 결국 하나님에게 반항하며 그의 규정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도움을 얻어 자기는 하지 못할 일이 없노라고 내게 반대하는 사람이 지금 많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길을 걷는 사람들만을, 바꿔 말하면, 자기가 부르신 대로 걷는 사람들만을 도우신다(참조, 시 91:1, 14) 하나님의 도움을 무시하고 자기들에게 불가피한 일을 충족하려고 어리석고 경솔한 노력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소명에서 떠나는 것이다. 주께서는 정절을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라고 확인하신다. 그것은 교회라는 몸 전체에 무차별적으로 주시는 종류의 은사가 아니라, 소수 지체에게만 주시는 것이다. 주께서는 우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를 구별하신다(마 19:12). 즉, 그들이 천국 일에 더욱 전적으로 또 자유롭게 헌신하는 것을 허락하신다. 그러나 이렇게 고자가 되는 것을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주께서는 즉시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특히 하늘에서 "허락된" 자들뿐이라고 지적하셨다(마 19:11).그래서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라고 결론하신다(마 19:12). 바울은 더 분명히 말한다.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고전 7:7)
43. 이 계명에 관련지은 결혼
비록 대단한 열의와 노력으로 전심전력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독신생활에서 정절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주께서 자기의 사업에 곧 쓰실 수 있기 위해서 정해진 일부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특별 은총이라는 것을 우리는 주의 공개 선언에서 배웠다. 따라서 우리 능력의 정도에 합당한 생활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정해 주신 우리의 본성에 항거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주께서는 간음을 금하신다. 따라서 순결과 정조를 요구하신다. 순결과 정조를 보존하는 길은 다만 하나뿐이다. 각각 자기의 표준으로 자기를 측정하는 것이다. 아무도 결혼을 무익한 것이나 무용한 것이라고 경솔하게 멸시하지 말라. 처가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독신 생활을 동경하지 말라. 또 동시에 독신 생활에서는 육신의 안식과 편리를 구하지 말고, 결혼 생활의 구속이 없으므로 경건의 모든 의무를 더욱 민첩히 다할 수 있도록 대비하라. 그리고 이 축복을 얼마 동안만 받는 사람이 많으므로, 독신을 계속하기에 자기가 적합한 동안만 결혼을 단념하라. 정욕을 억제할 힘이 없어지면, 주께서 이제는 결혼의 필요성을 자기에게 부과하신 것을 인정하라. 사도의 명령은 이 점을 증명한다.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하며(고전 7:2), 또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주 안에서 혼인하라"고 한다(고전 7:9). 사도가 말하는 뜻은 첫째로, 남자의 대부분은 무절제의 죄를 짓는다는 것이며, 둘째로, 그런 사람들은 불결과 싸우는 유일한 대책에서 피난처를 구하되 한 사람도 예외가 없도록 명령한다. 그러므로 무절제한 자들이 이런 방법으로 자기의 약점을 고치지 않는다면, 그들은 사도의 이 명령을 지키지 않는 점에서도 죄를 짓는다. 여자와 접촉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자랑하지 말라. 마음속에서 정욕이 타오르는 사항이 무절제하다는 비난을 멸할 수는 없다. 바울은 "마음의 순결과 몸의 정조"를 합해서 정절이라고 정의한다.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고전 7:34) 이와 같이 사도는 위에서 언급한 교훈을 도리상 주장하면서, 창기와 합하여 몸을 더럽히기보다(참조, 고전 6:15이하) 처를 두는 것이 낫다고 할 뿐 아니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고 한다(고전 7:9).
44. 정숙과 정조
결혼한 남녀가 자기들의 결합을 하나님이 축복하신다고 인정한다면, 동시에 그들은 정욕을 억제하지 않고 방탕하게 되어 결혼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권면도 받는 것이다. 결혼은 존귀하여 무절제의 추악을 덮지만, 무절제를 격발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결혼한 남녀는 무슨 짓을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신중히 대하며, 혼인의 존귀상과 절제에 합당하지 않은 일은 전혀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이와 같이 주 안에서 맺어진 결혼 생활에 절도와 정숙을 회복해서 극단적 음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암브로시우스는 이 방탕을 힐난하여 엄격하고 당연한 비판을 내렸다. 즉, 결혼 생활에서 수치나 체면을 개의치 않는 사람은 자기 처를 간음하는 자라고 불렀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음행을 정죄하시는 입법자는 누구신가를 우리는 고려해야 한다. 그는 권리상 우리를 완전히 소유하셔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과 정신과 육체가 완전하기를 요구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음행을 금하시는 동시에, 우리가 문란한 의복과 음탕한 몸짓과 추악한 말로 다른 사람의 정절을 유혹하는 것도 허락하시지 않는다. 지나치게 방자하고 사치한 옷을 입은 청년을 향해서 아켈라우스가 그의 어느 지체가 불결한가가 문제가 아니라고 한 말에는 적절한 점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영혼과 육체의 어떤 부분에 불결이 나타나든 간에, 그것을 일체 싫어하시는 하나님을 상대로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정숙을 권장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서, 아무 의심도 없어야 한다. 주께서 우리에게 정숙을 요구하신다면, 거기 반대되는 것은 일체 정죄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순종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마음속에서 악한 음욕이 타오르는 것이나, 눈이 타락한 욕망으로 달리는 것이나, 몸에 음탕한 장식을 하는 것이나, 추잡한 말로 생각을 더럽히는 것이나, 욕망이 무절제한 생각을 타오르게 하는 것을 일체 허락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죄악은 모두 정조의 순결을 더럽히는 오점과 같기 때문이다.
여덟째 계명
"도적질하지 말지니라"(출 20:15)
45. 일반적 해석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이 불의를 미워하시므로, 우리는 각 사람의 소유를 그에게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출 13:7). 요약하면, 이 계명은 다른 사람들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금지하며,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의 소유를 보존하도록 충실히 애써 노력하라고 명령한다.
사람의 소유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만물의 최고의 주인이신 분이 분배해 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악한 계략으로 남의 물건을 빼앗는다면 그것은 반드시 사기 수단으로 하나님의 경륜을 배제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도둑질도 여러 가지다. 폭력을 쓰는 노골적인 강도 행위, 기만수단으로 남의 소유를 집어 가는 흉악한 사기 행위, 외관상 법적인 수단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더욱 음흉하고 간교한 것 등이 있다. 아첨하며 선물로 받는 체하면서 속여 빼앗는 것도 있다.
도둑질의 종류는 자세히 말하지 않겠다. 이웃의 소유나 돈을 우리가 취득하는 방법은 그것이 진지한 애정을 떠나서 속이거나 해하겠다는 욕망이 될 때에 모두 도둑질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법적 절차를 통해서 남의 재산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변하지 않는다. 간교한 사람이 복잡한 사기 수단으로 단순한 사람 앞에 올무를 놓아 결국 끌어넣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기 수단을 보신다. 세력 있는 자들이 약한 사람들을 법으로 압박하며 꺾어 버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냉혹한 법을 보신다. 간악한 자가 부주의한 사람들을 미끼로 호려 낚시에 걸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교한 호림을 보신다. 이 모든 일은 인간의 심판을 받지 않으며 눈에 띄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불의는 돈이나 상품이나 토지에 관해서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의 권리까지도 침범한다. 우리가 이웃에 대해 지고 있는 의무를 거부할 때에, 우리는 그들의 재산을 횡령하는 것이다. 만약 게으른 관리인이 주인의 재산을 소비하며 주인의 살림을 돌보지 않을 때, 맡은 재산을 부당하게 소비하거나 함부로 허비할 때, 하인이 주인을 조롱할 때, 주인의 비밀을 폭로할 때, 주인의 생명이나 재산에 대해서 배신행위를 할 때, 그러나 반대로 주인이 집안사람들을 난폭하게 괴롭힐 때, 이 모든 경우는 하나님 보시기에 도둑질인 것이다. 자기가 소명받은 책임에 따라 남에게 해야 할 일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남의 것을 주지 않고 자기가 횡령하고 차지하기 때문이다.
46. 이 계명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염려하도록 만든다
그러면 우리가 자기의 처지로 만족하며 정직하고 합법적인 이익만을 얻는 데 힘쓴다면, 우리는 이 계명을 바르게 순종하는 것이다. 또 불공평한 짓으로 치부하려 하지 않으며, 이웃의 재산을 빼앗아 우리 재산을 긁어모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또 잔인한 수단으로 다른 사람들의 피를 뽑아 거부가 되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수단의 선악을 묻지 않고 아무데서나 미친 듯이 긁어모아 우리의 탐욕을 만족시키거나 방탕 생활에 낭비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 때에 우리는 이 계명을 바르게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항상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지혜와 조력으로 힘자라는 데까지 모든 사람이 자기 것을 가지고 있도록 진실히 돕는 것이다. 그러나 신용이 없고 부정직한 사람들을 상대로 해야 할 때에는, 그들과 싸우기보다는 차라리 우리 것을 내줄 생각을 하라. 그뿐만 아니라,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의 곤란을 나누며, 우리의 풍성한 것으로 그들의 곤궁을 도와야 한다.
끝으로, 우리는 각각 어느 정도까지 남에게 대한 의무가 있는가를 알아서 성실히 빚을 갚아야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백성들은 지배자들을 존경하며, 그들의 정치를 참고 견디며, 그들의 법과 명령에 복종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거절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롬 13:1이하, 벧전 2:13이하, 딛 3:1). 또 지배자들은 일반 백성을 돌보며 공공안녕을 유지하며 선한 사람들을 보호하며, 악인들을 처벌해야 한다. 만사를 처리할 때에 최고의 재판관이신 하나님에게 근무 보고를 하려는 듯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참조, 신 17:19, 대하 19:6-7). 교회의 목사들은 말씀을 충실히 전하며, 구원의 교리를 불순하게 하지 않고(참조, 고후 2:17) 순수하고 순결하게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달해야 한다. 교훈으로 가르칠 뿐 아니라, 실생활의 모범으로 가르치라. 간단히 말하면, 그들은 맡은 양들에 대해서 선한 목자로서의 권위를 행사하라(참조, 딤전 3장, 딤후 2장, 4장, 딛 1:6이하, 벧전 5장). 신자들은 그들을 하나님의 사자와 사도로서 그것들을 영접하며, 최고의 선생이 허락하신 영예를 그들에게 돌리며, 생활에 필요한 것을 제공해야 한다(참조, 마 10:10이하, 롬 10:15, 15:15이하, 고전 9장, 갈 6:6, 살전 5:12, 딤전 5:17-18). 부모들은 하나님이 맡기신 자녀들을 양육하며 다스리며 가르치며, 학대로 노엽게 하거나 부모를 배반하게 만들지 말고(엡 6:4, 골 3:21), 부모답게 인자하고 친절하게 자녀를 사랑하고 포옹하여야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할 의무가 있다. 청년들은 노인들을 공경하라. 노인이 공경을 받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이다. 노인은 부족한 청년들을 자기들의 우수한 지혜와 경험으로 지도하며, 그들을 가혹하게 책망할 것이 아니라, 온화하고 인자한 태도로 엄격한 언사를 완화해야 한다. 종들은 열심으로 부지런히 주인에게 복종하되,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충심으로 해서 하나님을 섬기듯 하라. 또 주인들은 종들에 대해서 까다롭고 고집을 피워, 공연히 엄격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그들을 형제로 인정하며, 자기도 주님 앞에서 그들과 같은 종임을 인정해서, 서로 사랑하며 인자하게 대우해야 한다(참조, 엡 6:5-9, 골 3:22-25, 딛 2:9-10, 벧전 2:18-20, 골 4:1, 몬 1:16).
이와 같이 각각 자기가 처한 지위와 처지에서 이웃에게 무슨 빚을 졌는가를 생각하며, 또 진 것은 갚아야 한다. 더구나 우리는 항상 입법자이신 하나님을 생각해서, 이 원칙은 우리의 손뿐만 아니라 마음을 위해서도 제정하셨으며, 그 의도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행복과 이익을 보호하며 증진하도록 노력하라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아홉째 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출 20:16)
47. 일반적 해석
이 계명의 목적은,(진리이신) 하나님이 거짓말을 증오하시므로 우리는 서로 진실을 실행하여 속이지 말라는 것이다. 요약하면, 우리는 남을 중상하지 말며 거짓으로 남의 재산에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 간단히 말해, 함부로 거짓된 험담을 해서 남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금지에 연결된 명령은, 모든 사람의 명예와 소유에 손상이 없도록 보호하기 위해서, 진실한 말로 될 수 있는 대로 충실하게 남을 도우라는 것이다. 출애굽기 23장에 있는 주의 말씀은 이 계명의 뜻을 표명하시려고 한 것 같다.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출 23:1). 마찬가지로, "거짓 일을 멀리하며"(출 23:7). 다른 구절에서는 중상과 풍설을 퍼뜨리고 다닌다는 의미의 거짓말뿐 아니라(레 19:16), 형제를 속이는 것도 금하신다(레 19:11). 이 두 가지 일을 특별한 계명으로 금하신다. 바로 앞의 계명들에서 야비함과 음란과 탐욕을 금지하신 것과 같이, 여기서는 거짓을 금하시는 것이 확실하다. 방금 언급한 것과 같이,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악의와 악한 중상모략으로 이웃의 명예를 상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거짓말이나 심지어 훼방으로 남의 재물을 빼앗는 것이다. 엄숙한 법적 증언으로서 하거나, 사적인 대화중에서 하거나, 나쁘기는 마찬가지다. 언제나 문제의 귀착점은 같다. 여러 가지 가운데서 특히 추악한 죄 하나를 예로 들어, 나머지는 같은 종류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웃을 부당하게 해치는 중상과 훼방도 여기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으로 편리하다. 법정에서의 거짓 증언에는 항상 위서가 내포된다. 위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으로 셋째 계명에서 충분히 설명된다. 그러므로 이 계명을 올바로 지키려면, 진실을 말함으로써 이웃의 명예와 이익을 지켜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가 더욱 귀하다면(잠 22:1),명예 훼손은 재물 탈취보다 더 큰 상해가 된다. 그러나 재물을 약탈할 때에도 손으로 빼앗는 것에 못지않게 거짓 증언으로 횡령하는 때가 있다.
48. 우리 이웃의 명예
그러나 우리는 놀라리만큼 경솔하고 냉정하게 이 죄를 짓는 때가 많다. 이 질병이 현저하지 않은 사람은 극히 드물다. 우리는 남의 죄악을 들추어 폭로할 때에 독성 있는 쾌감을 즐긴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닌 때가 많다는 것으로 적절한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형제의 명예가 거짓말로 손상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사람은, 진실이 용인하는 범위 내에서 형제의 명예에 오점이 찍히지 않기를 원한다. 참으로 그는 거짓말만을 상대로 형제의 명예를 지키지만, 거기는 그것을 지키도록 위탁을 받았다는 생각이 포함되었다. 이웃의 명예에 대해 하나님이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그것을 보호하도록 분발해야 한다. 따라서 험담이 전적으로 정죄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우리가 험담이라고 하는 것은 징계할 목적으로 하는 비난이 아니며, 악을 시정하기 위한 비난이나 공정한 비평이 아니다. 다른 죄인들에게 공포심을 일으키기 위한 공개적 징계도 아니며, 미리 경고해 두지 않으면 무지 때문에 위험 상태에 빠질 염려가 있는 사람들 앞에 사실을 알리는 것도 아니다. 험담은 미워서 하는 비난이며, 악한 의도로 거저 훼방하고 싶어서 하는 비난이다.
실제로, 이 교훈은 농담을 가장해서 정중한 체하면서도 가시가 있는 신랄한 조롱을 하는 것까지도 금지한다. 재담을 잘한다는 칭찬을 받고 싶은 자들이 이런 짓을 하는 예가 있다. 그들은 이런 건방진 짓으로 형제들을 상하게 하여 고통스런 수치와 슬픔을 준다. 그런데, 우리의 혀뿐 아니라 귀와 마음도 지배할 권리가 있는 입법자이신 하나님을 볼 때에, 우리는 험담을 듣고 싶어하는 것이나 불리한 비판을 너무 쉽게 표명하는 것도 다 같이 금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혀로 험담하는 병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이 심중의 악한 의도를 비난하시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랑한다면, 할 수 있는 대로 그리고 사랑이 요구하는 대로 혀나 귀가 험담과 악랄한 농담에 끌리지 않으며, 이유 없이 교활한 의혹에 마음이 끌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언행을 공정하게 해석하며, 우리의 판단과 귀와 혀로 그들의 명예를 신중하게 보호해야 한다.
열째 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출 20:17)
49. 이 계명의 뜻
이 계명의 목적은, 우리의 영혼 전체가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므로, 우리는 사랑과 반대되는 욕망을 모두 마음속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이웃의 손해를 초래할 만한 탐욕을 우리의 마음속에 일으키는 생각이 엄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 대응하는 것은 반대되는 교훈이다. 즉, 우리가 계획하며 숙고하며 결심하며 시도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이웃의 행복과 이익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외관상 심히 복잡한 문제에 직면한다. "간음"과 "도둑질"이라는 말에는 간음하려는 욕망과 해치며 속이려는 의도가 포함된다고 이미 말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여기서 따로 다른 사람의 재산을 탐내지 말라는 금지를 받는 것은 불필요한 것같이 생각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의도와 탐심의 차이를 생각하면 문제는 곧 해결될 것이다. 앞에 있는 계명들에 관련해서 우리가 말한 의도는 마음이 정욕에 굴복한 때에 의지가 의식적으로 찬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의식적인 찬동이 없어도 탐욕이 있을 수 있다. 즉, 마음이 허망하고 패악한 것에 찔리거나 유혹을 받기만 할 때에도 탐욕이 있을 수 있다. 주께서는 앞에 있는 계명들에서 사랑의 원칙이 우리의 의지와 노력과 행동을 지배하도록 명령하셨다. 여기서는 같은 목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의 생각을 제어하라고 명령하신다. 즉, 우리의 마음을 반대 방향으로 몰아갈 수 있는 타락한 생각이나 비틀어진 생각이 전혀 생기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분노나 증오심이나 음란이나 강탈이나 거짓말 등으로 기울며 끌려드는 것을 금하신 것과 같이, 여기서는 거기에 다시 자극을 받는 것까지 금하신다.
50. 가장 깊숙한 의로움
하나님께서 이런 위대한 고결함을 요구하시는 데는 훌륭한 이유가 있다. 영혼이 전력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을 누가 옳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어떤 영혼이 사랑이라는 목표에서 이탈해 버린다면, 그것에 병이 들었다는 것을 누가 인정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형제를 무시하고 자기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형제에게 해로운 욕망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올 것인가? 우리의 마음에 사랑이 완전히 배어 있다면, 이런 공상을 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탐욕이 있는 이상, 거기는 사랑이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항변하기를 탐욕은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며, 생각 속에 방향 없이 오락가락하다가 사라져 버리는 공상을 탐욕의 예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즉, 우리가 여기서 문제시하는 공상은 생각을 점령하는 동시에 탐욕으로 우리의 마음을 강렬히 욕심으로 자극하는 종류의 공상이다. 우리의 생각이 원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의 마음을 충분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놀라리만큼 열렬한 사랑이다. 한 점의 탐심도 방해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놀랍게 안정된 마음을 요구하시며, 사랑의 원칙에 어긋나는 자극은 바늘 끝만한 것이라도 허락하시지 않는다. 나의 견해에는 권위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이 계명을 이해하는 길을 나에게 처음으로 열어 준 사람은 어거스틴이었다.
모든 사악한 욕망을 전적으로 금지하는 것이 주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즐거운 듯한 거짓된 인상으로 우리를 가장 빈번히 매혹하는 것들을 그는 실례로 드신다. 이와 같이 우리의 욕망을 자극해서 광분 난무하게 만드는 것들을 빼앗음으로써 그 욕망 자체를 소멸시키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율법의 둘째 판의 내용이며,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사람에게 다해야 할 의무를 풍부하게 가르친다. 하나님을 명상해야만 사랑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공격을 토대로 삼아서 가르치지 않는다면, 이 판에 있는 의무들을 가르치려고 해도 효과가 없을 것이다. 내가 돕지 않아도 현명한 독자는 일부 사람들이 고집으로 탐심에 관한 계명을 쪼개서 두 계명으로 만드는 것을 비판할 것이다. "탐내지 말지니라"는 말씀이 반복된 것은 우리 생각과 반대되지 않는다. 이웃의 "집"을 말씀한 다음에, 그 "집"의 내용을 "아내" 이하에 열거하신다. 이 점을 보아서, 이 계명은 히브리 사람들의 바른 예를 따라 우리도 한 계명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남의 소유를 안전하게 지켜 침해를 받지 않게 하라고 명령하신다는 것도 분명하다. 손해를 입히거나 속여 빼앗고자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탐내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조차 금하신다.
(율법의 원칙들을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비추어 본다. 51-59)
51. 율법의 개요
이제 율법 전체의 목적을 결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즉, 의를 실현해서 하나님의 순결을 본받아 인간 생활을 이루어 나가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에서 자기의 성격을 충분히 묘사하셨기 때문에 율법의 명령들을 수행하는 사람은 자기의 생활에서 이를테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낸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의 요점을 상기시키고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2-13). 모세는 율법의 목표를 지적해야 할 때마다, 항상 같은 생각을 되풀이해서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율법의 교훈이 목적하는 것은 거룩한 생활로 사람을 하나님과 연결하며, 모세가 다른 곳에서 말했듯이, 사람이 하나님에게 부종하게(꼭 붙어 있게)하려는 것이다(참조, 신 11:22, 30:20).
그런데 저 성결을 완성하는 데는 이미 언급한 두 가지 제목이 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것과(신 6:5, 참조, 11:13),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것이다(레 19:18, 참조, 마 22:37,39). 참으로, 첫째는 우리의 영혼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가득 충만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곧바로 흘러나올 것이다. 이 뜻을 밝히기 위해서 사도는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고 가르친다(딤전 1:5). 양심과 진실한 믿음을 선두에 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바꿔 말하면, 이것이 진정한 경건이며, 이 경건에서 사랑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의를 훈련하기 시작하는 기초와 예비 단계를 가르칠 뿐이고, 사람을 진정한 목표인 선행으로 인도하지는 않는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오해다. 모세와 바울의 발언들에 나타난 것보다 더 위대한 완전성은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 묻노니, 하나님을 경외하며, 영적인 경배를 드리며, 계명에 복종하며, 주의 바른 길을 걸으며, 끝으로 순결한 양심과 진지한 믿음과 사랑을 가지라고 하는 교훈으로 만족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어디로 가기를 원하는 것인가? 그러므로 율법의 계명들에서 경건과 사랑의 모든 의무를 찾으며 발견하는 해석은 확인된다. 율법이 하나님의 뜻을 절반만을 가르치지 않는 듯이 건조무미한 초보만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도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율법의 목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52. 성경이 왜 가끔 둘째 판만을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러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율법을 요약할 때에 때때로 첫째 판을 빼놓기 때문에, 그들의 발언을 두 판에 다 적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태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의와 인과 신"을 "율법의 더 중한 바"라고 부르신다(마 23 :23). 여기서 신은 사람에게 대한 신실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 즉, 경건이라고 해석해서, 율법 전체에 적응한다.
확실히 이 해석은 어리석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자기의 의를 증명하는 행위를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 이유를 안다면, 다른 구절에서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계명을 지켜야 하느냐고 묻는 청년에게 주께서 다만 다음과 같이 대답한 이유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즉,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19:18-19). 첫째 판에 대한 복종은 대개 심정의 의도로 하거나 의식에서 했기 때문이다. 심중의 의도는 밖에 나타나지 않으며, 위선자들은 항상 의식을 행하기에 분주하다. 그러나 사랑의 행위는 실지로 의를 우리 눈에 보여 준다.
예언자들도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예언서에 매우 정통하지 않은 사람들도 이 점을 잘 안다. 선지자들이 회개를 권고할 때에는 대개 첫째 판을 생략하고, 신실과 정의와 긍휼과 공정을 촉구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두려움의 증거를 표적으로 보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참으로 그들이 율법 준수를 논할 때에 대개 둘째 판을 역설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둘째 판에서 의와 성실에 대한 열성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말은 누구나 다 확인할 수 있으므로 구절들을 인용할 필요가 없다(예컨대, 사 1:17).
53. 믿음과 사랑
그러나 혹자는 "의의 본질은 하나님을 경건하게 공경하는 것보다 사람들과 결백하게 사는 데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지 않고는 모든 점에서 사랑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사랑은 경건의 증거도 된다. 그뿐만 아니라, 주께서는 우리에게서 어떤 유익을 얻으실 수 없다는 것을 아시며, 또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 점을 증언하시므로, 우리가 다할 의무를 자기에게 국한하시지 않고 우리가 이웃에 대해서 선행을 하도록 훈련하신다(참조, 시 15:2- 3).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성도의 완성은 사랑에 있다고 하는 것은 근거가 있다(엡 3:19, 1:5, 골 3 :14). 다른 곳에서 그는 사랑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부르며(롬 13:10),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첨가한다(롬 13:8). 또,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말씀에 이루었나니"고 한다(갈 5:14). 바울은 그리스도 자신이 가르치신 것을 가르칠 따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하신다(마 7:12). 율법과 선지자들이 믿음을, 또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경배에 속한 것을 첫 자리에 두고 사랑을 그보다 낮은 자리에 보내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시는 뜻은 사람에 대해 바르고 공정하게 행하라고 율법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목적은,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두려움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바르고 공정한 행위로 증거하는 훈련을 우리가 얻게 하려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54. 이웃에 대한 사랑
그러므로 우리가 확고하게 할 입장은 이것이다. 즉, 우리의 생활은 모든 점에서 형제들을 위한 결실이 가장 많을 때에, 하나님의 뜻과 율법의 계명에 가장 잘 합치하리라는 것이다. 자기 육신의 이익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나 해서는 안 될 일에 관해서는 율법 전체의 어디를 찾아보아도 한마디도 정한 것이 없다. 사람은 원래 너무도 이기적 경향이 강하게 태어났으므로 그리고 아무리 진리에서 벗어나더라도 이기심만은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이미 너무 많은 이기심을 조장하거나 자극할 법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따라서 분명히 우리는 계명을 지키려면 자기를 사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며, 가장 착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려면 할 수 있는 대로 자신을 위해 애쓰지 말아야 한다. 자기만을 위해서 살며 노력하며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구하는 사람은 분명히 가장 비열하고 악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참으로 주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이웃을 사랑하려는 경향이 얼마나 깊이 박혀야 하는가를 표현하시기 위해서(레 19:18) 우리의 이기심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측정하셨다. 이기심같이 강렬한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표현법의 힘을 잘 생각해야 한다. 어떤 궤변가들이 미련하게 공상하듯이, 주께서는 이기심에 첫 자리를 주시며 사랑을 둘째 자리에 두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자연히 느끼는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옮기시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는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한다(고전 13:5). 이 궤변가들이 쓰는 논법은 털끝만큼도 고려할 가치가 없다. 즉, 측정되는 것은 언제든지 측정하는 표준보다 낮다고 그들은 말한다. 참으로, 주께서는 우리의 이기심에 관한 표준을 정하시고, 타인에 대한 사랑을 거기 예속시키신 것이 아니라, 본성이 부패한 우리 안에 일반적으로 있는 사랑의 감정을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확대해야 된다는 것을 알리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유익을 구할 때에 못지않은 성의와 열심과 주의를 다해서 언제든지 이웃에게 유익을 주려는 자세를 가지라는 뜻이다.
55.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이웃"이라는 말에는 가장 인연이 먼 사람도 포함된다는 것을 알리셨으므로(눅 10:36), 우리는 사랑의 교훈을 인연이 가까운 사람들에 국한해서는 안 된다. 인연이 가까운 사람일수록 우리는 도와 줄 의무가 더욱 절실하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혈족 관계나 친분 관계나 이웃 관계가 긴밀할수록 책임도 더 많이 서로 분담하는 것이 인류의 공통한 습성이다. 이 점은 하나님의 뜻에 거스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를 그렇게 되도록 인도하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는 점은, 우리는 사랑이라는 한 감정으로 인류 전체를 예외 없이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야만인과 문명인, 가치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친구와 원수 등의 구별을 하지 말며, 사람을 사람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보아야 한다. 사람을 보는 법이 이와 다를 때에, 우리가 여러 가지 오류에 얽히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이 향할 방향을 바르게 잡으려면, 먼저 사람을 보아서는 안 된다. 사람을 볼 때에는 사랑보다 미움이 생기는 때가 많을 것이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기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확장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성격이 어떻든 간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그 사람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변하지 않는 원칙이 되어야 한다.
56. 복음적 권고
"원수를 갚지 말라,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들은 옛날에 모든 유대인에게 주셨고, 후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것인데, 스콜라학파는 이것을 복종해도 자유, 복종하지 않아도 자유인 "권면"으로 바꿔 버렸다. 이것은 얼마나 흉악한 무지 또는 악의인가! 그뿐 아니라, 그들은 이 "권면"에 복종하는 의무를 수도승들에게 지우고, 그들은 이 "권면"을 준수하겠다고 기꺼이 서약했으므로 이 한 가지 점에서는 단순한 신자들보다 더욱 의롭다고 한다. 이 계명들을 율법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너무 무거운 짐이 되며, 특히 은총의 율법 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거운 짐인 것 같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영원한 율법을 감히 폐지하려는 것인가? 율법책에 이런 구별을 어느 곳에 있는가? 도리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심히 엄격한 계명이 자주 나타나지 않는가? 배고픈 원수에게 먹을 것을 주며(잠 25:21),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바른 길에 데려다 주며, 원수의 짐승들이 짐이 너무 무겁거든 도와주라고 하는 것은(출 23:4-5) 어떤 계명인가? 원수의 짐승들을 도와주면서 원수 그 사람에게는 호의를 보이지 말 것인가?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하신 주의 말씀은(히 10:30, 참조, 신 23:35) 영원하지 않은가? 다른 데서는 더욱 평이하게 표현하여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라"고 하셨다(레 19:18). 그들은 이런 말씀들을 율법에서 말소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주께서 입법자시었다는 것을 인정하든지 해야 한다. 그리고 주께서는 단순히 권고하실 뿐이라는 거짓말을 버려야 할 것이다.
57.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참된 계명이다
네가 다음과 같이 묻노니, 그들이 감히 어리석은 해석으로 조롱한 이 발언들은 무슨 뜻인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눅 6:27-28, 마 5:44-45의 융합). 누가 여기서 크리소스톰과 함께, 이 발언들은 의무를 지우는 것이므로, 분명히 권고가 아니라 명령이라고 결론짓지 않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의 반열에서 배제된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그들은 수도승들만이 하늘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며, 수도승들만이 감히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와 같은 이론으로 추리한다면, 교회는 이방인과 세리의 무리로 인정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너희가 친구에게만 친절하다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이방인과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고 했다(마 5:46-47, 눅 6:32, 마 18:17의 융합) 우리는 하늘나라의 유업을 상속받지 못할 것이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이라도 남으면 다행일 것이다. 어거스틴의 논법도 이에 못지않은 설득력이 있다. "주께서 우리에게 간음하지 말라고 명령하실 때에는, 친구의 아내와 마찬가지로 원수의 아내도 건드리지 말라고 금하시는 것이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주의 명령은 친구의 것이든 원수의 것이든 일체의 도둑질을 허락하지 않는다.
바울은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는 이 두 계명을 사랑의 원칙에 관련시킨다. 참으로 그는 이 계명들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에 포함시킨다(롬 13:9). 그러므로 바울이 틀림없이 율법을 잘못 해석했든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친구와 똑같이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는 결론이 그 계명에서 필연적으로 나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공통한 멍에를 벗어 버리는 방자한 자들은 스스로 사탄의 아들들임을 확실히 폭로한다. 그런데, 그들이 이 생각을 퍼뜨리는 것은 우둔하기 때문인가 또는 파렴치하기 때문인가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교부들 가운데는 이 말씀들이 참으로 계명이라는 사실을 부정한 사람이 없다. 그레고리우스 때에도 이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강경히 주장하는 바와 같다. 이 말씀들이 계명이라는 것은 논의할 여지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또 그들의 논법은 얼마나 미련한가!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리라고 한다! 그들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을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계명에 비교한다면 다른 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나, 복수심을 송두리째 마음속에서 뽑아 버리라는 것이나 모두 쉽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이런 요구들은 율법의 가장 사소한 점까지도(참조, 마 5:18, 눅 16:17) 연약한 우리에게는 모두 곤란하다. 우리의 덕행은 주 안에서 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명령하시는 것을 주시오며, 뜻하시는 것을 명령하시 옵소서." 은총의 율법 하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율법의 규례를 벗고 함부로 헤맨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어 그의 은총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풀리며, 그의 영으로 우리의 마음에 율법이 새겨진다는 뜻이다(렘 31:33). 이 은총을 바울은 "법"이라고 부른다. 엄격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관련시켜서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율법과 이 은총을 대조시킨 것이다(롬 8:2). 이 사람들은 "율법"이라는 말을 가지고 허무한 사색을 하고 있다.
58. 치명적인 죄와 가벼운 죄의 구별은 타당하지 않다
그들이 "소죄"라고 부르는 것은 첫째 판을 위반하는 비밀한 불경건이나, 마지막 계명을 직접 어기는 것 같은 것들이다. 그들의 정의를 보면, 소죄는 의식적인 찬동이 없는 욕망이며,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지 않는 욕망이라고 한다. 그러나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 마음속에 없는 경우가 아니면, 소죄는 거기 침투할 수도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우리는 "다른 신을 있게 하지 말라"는 금지명령을 받았다. 우리의 마음이 불신의 간교한 술책에 압도되어 다른 곳을 둘러볼 때, 갑자기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고 싶어할 때 이런 순간적인 충동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인가? 그것은 영혼 속에 어떤 빈곳이 있어서 이런 유혹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이 논의를 더 길게 끌 것 없이,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았다. 그러므로 영혼의 모든 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율법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양심 속에 하나님 나라에 반대하는 원수들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명령을 방해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좌가 우리의 양심 속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증명이 된다. 마지막 계명이 원래 여기 해당한다는 것은 이미 설명했다. 어떤 욕망이 우리의 마음을 자극했다면, 우리는 이미 탐심이라는 죄를 범했고, 따라서 율법을 범한 자들이다. 주께서 금하시는 것은 타인에게 손해가 될 일을 결심하고 계획하는 것뿐 아니라, 탐심에 불이 붙어 타오르는 것도 금하신다. 주의 저주는 항상 율법 위반을 추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경미한 탐심이라도 사형 판결에서 면제할 근거가 없다. 어거스틴은 말한다. 죄의 경중을 달 때에는 "부정한 저울을 가져다가 우리 멋대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 생각에 따라 '이것은 무겁다, 이것은 가볍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저울인 성경을 하나님의 창고에서 내듯이 해서 이 저울로 경중을 달아야 한다. 아니, 우리가 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이미 달아 놓으신 것을 알아보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물론 바울이 죽음을 죄의 삯이라고 부르는 것은(롬 6:23) 이 타기할 구별을 그가 몰랐다는 것을 증명한다. 우리는 너무도 위선으로 기울어졌으므로 결코 이 완화제를 붙여서 우리의태만한 양심을 위무해서는 안 된다.
59. 죄는 모두 치명적인 죄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잘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고 하신다(마 5:19). 율법에 대한 범행을 감히 가볍게 보아서 사형에 해당하지 않는 듯이 말하는 자들은 이런 무리들이 아닌가? 그들은 율법의 명령뿐 아니라, 누가 명령하시는가를 생각해야 마땅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율법에 대해서는 경미한 범행일지라도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한 것이다. 그들은 무슨 일에서든지 하나님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을 사소한 일로 생각하는가? 율법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계시하셨다면, 율법에 위반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미약해서 사형이 즉시 따르지 않으리라고 공상하는가? 또 하나님에서는 이 점을 분명히 선언하셨다. 그들이 미련한 궤변으로 명백한 진리를 흐리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생각을 한다면, 하나님의 선언은 이것이다.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 18:4,20). 방금 인용한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는 구절도 같은 뜻이다(롬 6:23). 그들은 부정할 수 없어서 죄라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은 대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기의 어리석은 생각에 너무 오래 빠져 있었으므로 적어도 한 번만은 현명해야 하리라. 그러나 만일 잠꼬대를 고집한다면, 우리는 그들과 작별하겠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는 모두 죽을죄라고 생각해야 한다. 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역이며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기 때문이다. 죄는 율법 위반이며, 여기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성도의 죄는 용서를 받을 수 있으나 그것은 그들의 성도로서의 본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용서를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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