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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 2권. 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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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장 자유의지를 변론하고자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반대에 대한 논박

 

(상식적인 근거에 바탕을 두고 자유 의지를 지지하는 주장에 대한 답변. 1-5)

 

1. 첫째 주장 : 필연적인 죄는 죄가 아니며 자발적인 죄는 피할 수 있다

 

그릇된 자유 개념에서 출발한 자들이 인간의 의지가 노예 상태에 있다는 생각을 없어지게 하지 않았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 더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견해를 공격하기 위해서 몇 가지 이유를 든다. 우선 훼방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어리석은 말로 우리의 입장은 상식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며, 다음에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공격한다. 우리는 그들의 공격 무기를 차례로 파괴하겠다. 만일 죄가 필연적인 것이라면 죄는 이제 죄가 아니며, 만일 자발적인 것이라면 피할 수 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펠라기우스도 이 무기로 어거스틴을 공격했다. 그러나 우리는 어거스틴의 권위를 빌어서 그들의 무기를 깨뜨리려고 하지 않고, 먼저 문제 자체를 충분히 처리하겠다. 그러므로 죄가 필연적인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죄라고 볼 수 없다고 하는 생각을 나는 부정한다. 반대로, 죄는 의지적이므로 피할 수 있다는 그들의 추리도 부정한다. 만일 자기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는 구실로 하나님과 쟁론하며 심판을 면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곧 대답을 받을 것이며, 우리는 이 대답을 다른 곳에서 이미 말한바 있다. , 사람이 반드시 죄를 지으며 악한 일 밖에 결심할 수 없는 것은 창조에서 오지 않고, 인간성의 부패에서 왔다는 것이다. 악인들이 서슴치 않고 구실로 삼는 저 무능은 아담이 자기를 악마의 압제 아래에 기꺼이 넘겨주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따라서 우리를 결박한 부패의 쇠사슬은 처음 사람 아담이 자기의 창조주를 배반한 데서 생겼다. 모든 사람에게 이 반역죄가 있다는 것이 당연하다면, 아무도 필연성을 이유로 용서를 받을 줄로 생각하지 말라. 바로 그 필연성이야말로 그들이 정죄를 받는 가장 명백한 원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위에서 이 점을 분명히 설명하면서 악마 자신을 예로 들었다. 이 예를 보아도 필연적으로 죄를 짓는 사람은 여전히 자발적으로 죄를 짓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 점은 뒤집어서,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 그들의 의지는 선을 버릴 수 없지만, 여전히 의지인 것이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베르나르두스도 같은 생각을 적절하게 가르친다. , 우리는 필연성이 자발적인 것이기 때문에 더욱 불행하고 이 필연성은 우리를 그 자체에 동여 맬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죄의 종이 되도록 강요한다 라고 그들의 삼단 논법의 둘째 부분은 "자발적"에서 "자유"로 비약하는 오류를 범하므로 결함이 있다. 그것은 자유로 선택되지 않는 일도 자발적으로 한다는 것을 우리는 위에서 증명했기 때문이다.

 

2. 둘째 주장 : 보상과 처벌이란 말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그들은 덕행과 죄악이 모두 의지의 자유 선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에게 벌이나 상을 주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한다. 이 논법은 비록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것이지만 크리소스톰과 제롬도 어디선가 사용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제롬은 이것이 펠라기우스파가 잘 사용하는 논법이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만일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라면, 수고하지 않는 우리가 아니라 그 은총이 상을 받으리라"고 한 그들의 말까지 인용한다.

벌에 대해서는 우리가 죄책의 근원이므로 우리에게 벌을 주는 것이 정당하다고 나는 대답한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라면, 우리가 자유로운 판단 아래서 죄를 짓거나 노예 상태에서 죄를 짓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특히 사람은 죄의 노예이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가? 의에 대한 보상에 관해서는, 그 보상이 우리 자신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는 것은 참으로 큰 모순이다.

어거스틴에게서 이러한 생각을 자주 불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로에 상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은사에 상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소위 '상급'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당연히 받을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은사에 대해서 주시는 것이다!" 확실히 그들은 자유 의지가 공로의 원천이 아니라면 공로가 있을 여지가 없어진다는 것을 뚜렷이 본다. 그러나 이것을 큰 논쟁점으로 보는 점에서 그들은 큰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그들이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어거스틴은 서슴치 않고 피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항상 가르친다. 예컨대, "사람들의 공로란 무엇인가? 홀로 죄가 없으시며 죄에서 해방해 주시는 그는 당연히 갚아야 할 의무에서가 아니라 거저 주시는 은총을 가지고 오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발견하신다. , "우리가 당연히 받을 것을 받아야 한다면, 우리는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일이 나타나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내리시지 않고, 받을 자격이 없는 은총을 주신다. 만약 은총에서 멀어지고 싶은 사람은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라." , "우리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다. 죄는 우리의 것이지만, 공로는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며, 상급이 있을 때에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주신 은사에 상을 주시게 될 것이다." 같은 뜻으로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 은총이 공로에서 생기지 않고 공로가 은총에서 생긴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조금 뒤에 결론을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공로보다 먼저 은사를 주시고, 그 은사에서 자신의 공로를 나오도록 하려 하시며, 사람을 구원하실 이유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은사를 완전히 값없이 주신다"

그러면 이런 문장이 어거스틴의 글에 자꾸만 반복해서 나오는데, 무슨 까닭에 더 많은 증명을 열거할 필요가 있는가? 그러나 사도가 성도의 영광을 어떤 원칙에서 이끌어 내는가를 들으면, 우리의 논적들은 이 오류에서 더 잘 해방될 것이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한다(8:30). 그러면 신자들은 무슨 까닭에 면류관을 받는다고(딤후 4:8) 사도는 말하는가?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주의 자비에 의해서 택하심과 부르심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유 의지가 성립할 수 없으면 공로도 없으리라는 이 허망한 공포심을 버리라. 성경이 우리를 불러 우리에게 주겠다고 하는 바로 그것을 무서워하며 도망한다는 것은 최고로 어리석은 짓이다. "내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7)라고 사도는 말한다. 이것을 보면, 바울은 공로를 전혀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 모든 것을 빼앗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무한하며 여러 가지이므로, 자기가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을 우리 것으로 만드시고, 마치 우리 자신의 덕행인 듯이 그것에 상을 주신다.

 

3. 셋째 주장 : 선과 악의 모든 구별은 말살될 것이다

 

우리의 논적들은 크리소스톰에게서 취한 듯한 항의를 첨가하여 만일 선악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의 의지가 가진 능력이 아니라면, 동일한 본성을 나눠 가진 사람들은 모두 악하거나 모두 선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입장에 가까운 것이(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암브로시우스의 이름으로 돌아다니는 이방인의 소명(The Calling of the Gentiles)을 쓴 사람의 견해다. 그의 이론으로는 만일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를 변덕스러운 상태에 버려두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아무도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위대한 사람들이 이렇게 건망증이 심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사람들을 그렇게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것을 크리소스톰이 생각하지 못한 것은 어찌된 일인가? 우리는 조금도 두려움 없이 바울이 열심으로 주장한 것을 모든 사람이 부패했을 뿐 아니라 악으로 넘겨졌다는 것을(참조, 3:10)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함께, 모든 사함이 악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라고 첨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선천적으로 같은 병을 앓고 있지만, 하나님이 치료해 주시는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람들만이 나을 것이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으로 그냥 버려두시는 사람들은 부패한 가운데서 쇠잔하며 드디어 소멸하고 만다.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인내하나 다른 어떤 사람들은 출발점에서 넘어지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참으로 인내 자체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다.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원하시는 사람들에게만 주신다. 무슨 까닭에 어떤 사람들은 굳게 견디어 내며 또 어떤 사람들은 동요 때문에 실패하는가 하는 이 차이의 원인을 찾는다면, 그것은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밖에 다른 이유가 없다. , 주께서 인내하는 사람들을 붙들어 주시며 자기의 권능으로 힘을 북돋아 주셔서 멸망하지 않게 하시고, 실패하는 사람들은 변덕스러움의 본보기가 되도록 자기의 권능을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4. 넷째 주장 : 모든 훈계는 무의미할 것이다

 

그들은 더 나아가서, 만일 복종하는 능력이 죄인에게 없다면, 권면하는 것이 헛되며 경고하는 것이 무의미하며 책망하는 것이 미련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옛날에 어거스틴이 비슷한 반대를 받았을 때에, 그는 하는 수 없이 [책망과 은총에 대하여](On Rebuke and Grace)라는 글을 썼다. 거기서 그는 저 비난들을 충분히 논박하지만, 주로 반대자들을 불러 이 중심점으로 돌아오게 한다. "오 사람아, 교훈을 통해서, 그대가 해야 할 일을 깨달으라. 책망을 받아서, 그대에게 그것이 없는 것은 그대의 허물임을 깨달으라. 기도를 드려서, 그대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어디서 받을 수 있는지를 깨달으라." [영과 문자에 대하여](On the Spirit and the Letter)라는 글에서도 거의 같은 논법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교훈들을 사람의 힘을 표준으로 판단하시지 않고, 올바른 일을 명령하신 곳에서는 택하신 자들에게 수행 능력을 풍부히 주신다고 말한다. 또 이 문제는 길게 토론할 필요가 없다. 우선 우리만이 이 입장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모든 사도들이 우리 편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은 이런 상대자들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15:5)고 선언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떠나서 악을 행한 자들을 책망하시지 않으며 징계하시지 않는가? 또는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선행에 전심하라고 권하시지 않는 것인가? 고린도 신자들이 사랑을 등한시했다고 해서 바울이 얼마나 엄중하게 그들을 책망했는가?(고전 3:3, 16:14) 그러면서도 그는 주께서 그들에게 사랑을 주시도록 기도했다. 그는 로마서에서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말한다(9:16). 그러면서도 그 후에 여전히 경고하며 권고하며 책망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무슨 까닭에 주에게 간청해서,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요구하시고 하나님의 은총이 없어서 저지른 일을 징벌하시는 헛수고를 하시지 말라고 하지 않는가? 그들은 무슨 까닭에 바울에게 경고해서 하나님의 자비에 버림을 당하고, 그 자비가 없이는 원하거나 달음질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버려두라고 하지 않는가? 열렬히 구하는 사람일수록 곧 받을 수 있다는 주님의 가르침은 그 최대의 근거를 주님 자신에 둔 것이 아닌가?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 바울은 썼다(고전 3:7). 여기서 그는 교훈과 충고와 책망이 사람의 마음을 변하게 하는 데 얼마나 이바지하는가를 알린다. 이와 같이, 모세가 율법의 계명들을 엄격한 제약 하에 두고(30:19), 예언자들이 범법자들을 얼마나 호되게 위협했는지 우리는 본다. 그러나 그 다음에 그들은 사람이 깨닫는 마음을 받아야만 지혜가 생긴다는 것을 인정한다(예컨대, 5:24, 24:5 ; 9:13이하, 16:11이하, 44:10이하 ; 9:11 ; 2:4). 또 마음에 할례를 주며(참조, 10:16 ; 4:4), 돌같이 굳은 마음 대신에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참조, 11:19),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율법을 새기며(참조, 31:33), 결국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여(참조, 36:26) 그의 교훈을 유효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그들은 인정한다.

 

5. 훈계의 의미

 

그러면 충고의 목적은 무엇인가? 불경건한 자들이 완고한 생각으로 충고를 거부하면, 그들이 주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그 충고가 그들에게 불리한 증언이 될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그들의 양심을 두들긴다. 가장 거만한 자라도 충고를 실컷 냉소는 할지언정, 정죄는 하지 못한다. 그러나 복종하는데 필요한 유순한 마음을 받지 못했는데, 가련하고 약한 인간이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을 것이다. 참으로 그는 완강한 마음을 그 자신 이외의 어느 누구의 탄이라고 할 수 없은즉, 그에게 어떤 변명할 구실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불경건한 자들은 언제든지 또 얼마든지 하나님의 충고를 희롱할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그 충고의 힘 앞에서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자에게는 충고가 특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주께서는 신자들 안에서 성령으로 모든 일을 하시지만, 도구로서의 말씀을 결시하시지 않고 신자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이용하신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들의 의는 모두 하나님의 은총에서 온다는 것을 진리로 인정해야 한다. 예언서에 있는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라고 한 말과 같다(11:19-90). 그래도 그대는 항의하여 무슨 까닭에 그들을 성령의 인도에 맡기지 않고, 지금 그들의 의무에 대해서 경고하는가? 성령이 밀어주시는 정도 이상으로 급히 전진할 수 없는 그들을 무슨 까닭에 충고로 괴롭히는가? 불가피적인 육의 연약 때문에 타락한 것인데, 무슨 까닭에 그들이 길에서 벗어날 때마다 징벌하는가? 라고 물을 것이다.

항의자여, 그대는 누구관데, 하나님에게 법을 부여하려고 하는가? 우리가 충고에 복종하도록 은총으로 우리를 준비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은총을 받도록 충고로 우리를 준비하신다면, 그대는 이 경륜의 어디를 비난하거나 조롱하겠는가? 설사 충고와 견책이 신자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 유익밖에 주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때문에 전연 무용한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성령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실 때에 충고가 능력을 발휘하는 것인즉, 누가 감히 충고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조롱하겠는가?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 충고는 우리 안에서 선에 대한 소원을 일으키며, 태만을 얼어버리며, 죄악과 그 달콤한 독소에 대한 욕망을 제거하는 동시에, 반대로 죄악을 미워하며 싫어하게 만드는 능력을 완전히 발휘한다.

만일 더 분명한 대답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제시하겠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 안에서 두 가지 방법으로 역사하신다. 내면적으로는 성령을 통해서, 그리고 외면적으로는 말씀을 통해서 하신다. 성령에 의해서 그들의 지성을 비추며 의를 사랑하며 함양하는 방향으로 그들의 마음을 개조하셔서, 그들을 새로운 창조물로 만드신다. 말씀에 의해서 그들이 그와 같은 혁신을 원하며 구하며 달성하도록 활발시키신다. 이 두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은 경륜의 방법에 의한 자기의 손의 움직임을 나타내신다. 버림받은 자들을 상대로 같은 말씀을 하실 때에는 그들을 시정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목적이 다르다. 현재는 그들의 양심의 증언으로 그들에게 압력을 가하며, 심판 때에는 그들에게 더욱 변명할 여지가 없게 만드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가 이끄시는 사람이 아니면 자기에게로 올 수 없으며,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아버지께 듣고 배운" 후에 온다고 말씀하시지만 하시지만(6:44-45), 역시 교사의 직책을 경시하시지 않고, 조금이라도 전진하기 위해서는 내면적으로 성령에게서 배울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직접 자기의 음성으로 끊임없이 부르신다. 바울은, 교훈은 망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하나님에게는 아름다운 향기이므로 버림받은 자들 사이에서도 무용하지 않다고 지적한다(고후 2:15-16).

 

(성경에 있는 율법과 약속과 비난과 대한 해석을 근거로 한 자유 의지를 지지하는 주장에 대한 답변. 6-11)

 

6. 하나님의 교훈들은 "우리의 능력의 척도"를 뜻하는가?

 

논적들은 굉장한 노력으로 성경으로 성경 구절을 수집한다. 쉬지 않고 모아서 비록 이기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수효로 우리를 압도하려고 한다. 그러나 전투에서 오합지졸이 아무리 화려한 겉치레를 보일지라도. 일단 백병전에 들어가 한두 번 얻어맞으면 즉시 제각기 도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이 적군의 대부대를 우리는 아주 쉽게 흩어버릴 것이다. 그들이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서 오용하는 구절들은 몇 개의 큰 제목을 붙여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절 몇 개에 대답 하나를 하면 폭하고, 일일이 처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들을 하나님의 교훈들을 가장 중시한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에 알맞게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 명백한 요구를 모두 실천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교훈들을 일일이 검토하며 그것에서 우리의 능력을 측정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결·경건·복종·정조·사랑·유순을 명령하시며, 불결·우상 숭배·불근신·분노·약탈·교만 등을 금지하실 때에, 그는 우리를 희롱하시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을 요구하시는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런데 그들이 산더미같이 모아 놓은 교훈들이 거의 전부를 분류한다면,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어떤 것은 우선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설 것을 요구한다. 어떤 것은 단순히 율법을 준수하라고 한다. 또 어떤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일단 받은 사람은 그 은총 안에서 매진하라고 명령한다. 우리는 먼저 이 모든 교훈에 대한 개론을 말하고, 다음에 그 세 종류를 논하겠다.

오래 전에 하나님의 법규로 사람의 능력을 측정하는 관습이 생겼다. 그것은 진리인 듯하기도, 했으나 율법을 전연 모르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율법은 준수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무서운 죄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면 율법을 주신 것이 무의미하게 된다고 하는, 분명히 그들의 가장 강력한 이유를 우리에게 역설한다. 참으로 그들은 바울이 율법에 대해서 말한 일이 없는 듯이 말한다. 그렇다면 묻겠다. "율법은‥‥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3:19),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20), 율법이 죄를 만들어 낸다(참조, 7:7-8),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5:20) 이런 주장들은 무슬 뜻인가? 율법을 주는 것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능력에 맞도록 제한해야 했는가? 오히려 반대로, 우리의 연약함을 더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을 우리보다 훨씬 높은 데 두셨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정의를 보면, 확실히 율법이 실현하려고 목적한 것은 사랑이다(참조, 딤전 1:5). 그러나 바울이 데살로니가 신자들의 마음에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소서라고(살전 3:12) 기도 할 때에, 그는 만약 하나님이 온 율법의 강령을(참조, 22:37-40) 우리의 마음속에 불어넣으시지 않는다면, 우리 귀에 들리는 율법에 소리가 아무 효과도 없다는 것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7. 율법 자체가 은총에 이르는 길을 지적해 준다

 

만일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율법은 생활 원칙이며 우리는 그 원칙대로 노련해야 한다는 것 뿐 이라면, 물론 나도 즉시 저들의 견해에 양보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의 여러 가지 효용을 충실히 그리고 분명히 설명하므로, 우리는 율법이 사람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그 해석에 따라 고찰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의 당면 문제에 관해서, 율법은 우리의 의무를 설명한 다음에 즉시, 복종하는 힘은 하나님의 인애에서 온다고 가르친다. 이와 같이, 율법은 우리가 이 힘을 받도록 기도로 간구 할 것을 명한다. 만일 명령만 있고 약속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힘이 그 명령에 응답할 만한가를 시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명령에는 즉시 약속이 연결되어 있어서, 우리가 얻는 지지뿐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덕성까지도 전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 주는 도움에 달렸다고 선언하므로, 우리는 율법을 준수하기에 충분한 힘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완전히 무능하다는 것을 그 약속들이 넉넉히 증명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힘과 율법의 교훈들을 비교하는 것을 이 이상 더 강조하지 말라. 주께서는 율법으로 주시려는 의의 표준을 우리의 연약한 힘을 가늠 보아 적용하신 것이 아니다. 모든 점에서 주의 은총이 지극히 필요한 우리는 자기가 얼마나 준비가 빈약한가를 이 약속들을 보아서 더욱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주께서 목석을 위하여 율법을 주셨다는 것을 누가 믿겠느냐고 그들은 말한다. 아무도 이런 논법을 쓰지는 않는다. 악인들이 율법을 통해서 자기들의 정욕이 하나님 뜻에 반대된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인정함으로써 죄책을 느끼게 될 때에, 그들은 목석이 아니다. 신자들이 자기의 무력에 대한 경고를 받고 은총에서 피난처를 구할 때에, 그들도 목석이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거스틴의 심원한 발언들이 적절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명령하셔서 우리가 그에게 무엇을 구해야 할 것인지를 일게 하신다." "자유 의지를 중시하는 사람이 그만큼 하나님의 은총을 더욱 공경한다면, 교훈은 심히 유용하다." "믿음은 율법이 명령하는 것을 성취한다." "참으로, 율법이 명령하는 것은 율법을 통해서 명령된 것을 믿음이 성취하기를 원해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믿음 자체를 요구하시지만, 찾으시는 것을 먼저 주시지 않으면 그것을 요구하려고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을 주시며, 주시려는 것을 명령하시게 하라."

 

8. 여러 종류의 계명은 우리의 은혜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 점은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교훈들을 검토하면 더욱 분명하게 될 것이다.

주께서는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우리를 자기에게로 돌아오라고 명령하시는 때가 많다(을 욜2:12 ; 18:30-32 ; 14:2-3), 그리고 한편에서 예언자는 대답한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 등이다(31:18-19). 주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시며(10:16;4:4), 모세를 통하여 이 할례는 주 자신의 손으로 행하신다고 선언하신다(30:6). 어떤 곳에서는 마음을 새롭게 하라고 요구하시지만(18:31), 다른 곳에서는 그 새로운 마음을 자기가 주신다고 하신다(11:19, 36:26).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선택이나 본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은총을 통해서 하신다"고 어거스틴은 말한다. 그는, 우리는 율법과 약속 또는 계명과 은총을 주의 깊게 구별해야 한다는 견해를 티코니우스의(성경 이해를 위한) 원칙 중에서 다섯째로 둔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복종할 능력이 있다고 추론하는데 이러한 추론은 제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계명들을 성취하게 되는 것인데,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그 은총을 제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둘째 종류의 교훈들은 단순하다. 하나님을 공경하라, 그의 뜻을 굳게 잡고 준행하라, 그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의와 성결과 경건과 순결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라고 증언하는 구절이 무수히 많다.

셋째 종류는 바울과 바나바가 신자들에게 했다고 누가가 언급한 말, ,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한 권고다(13:43). 그러나 지조라는 그 미덕의 근원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를 바울은 다른 곳에서 가르친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46:10) 또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한다(4:30). 여기서 요구하는 것을 사람은 완수할 수 없으므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신자들을 위해서 주께 기도한다.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러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살후 1:11). 같은 식으로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헌금 문제를 논할 때에 그들의 착하고 경건한 뜻을 여러 번 칭찬하지만(고후 8:11), 조금 뒤에 가서 "권고를 받는 마음을 디도에게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한다(고후 8: 16-17, 의역). 만일 디도가 하나님의 감동이 없이는 자기 입을 이용해서 남을 권고할 수 없었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의 직접 지도를 받지 않고서 기꺼이 행동을 취할 수 있었겠는가?

 

9. 회개는 하나님과 인간이 나눠서 하는 일이 아니다

 

논적 중에서도 더 교활한 자들은 이 모든 증언에 대해서 궤변을 눌어 놓는다. 하나님이 우리의 미약한 노력을 도와주시더라도, 우리가 우리의 전력을 다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한다. 또 우리의 회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동등하게 나눠진다고 하는 듯한 구절들을 예언서에서 인용한다.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1:3). 주께서 어떤 도움을 우리에게 주시느냐 하는 것은 위에서 설명했으니, 여기서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나는 적어도 한 가지 점을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 ,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입법자이신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은총이 무리에게 약속되었다는 것이 분명한 데도 불구하고, 주께서 율법에 대한 복종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는 이유만으로 율법을 지킬 능력을 그들이 우리에게서 요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적어도 우리가 응할 수 있는 이상으로 우리에게서 요구하는 것이 명백하다. , 예레미야의 다음 말은 어떤 괴변으로도 논박할 수 없다. , 옛날 백성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문자로만 한 것이었기 때문에 무효할 뿐만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의 영이 언약에 개입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하게 만드시지 않으면 언약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31:32-33). "너희는 내게 돌아오라‥‥‥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는 말씀도(1:3) 그들의 오류를 지지하지 않는다. 거기서 하나님이 돌이키신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며 회개하게 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에게 물질적 번영을 주심으로써 우리를 친절히 대해 주심을 입증하신다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역경을 주셔서 우리에게 대한 불쾌감을 보이시는 때가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여러 가지 불행과 재난으로 지친 백성이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떠나셨다고 불평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만일 그들이 의의 모범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정직한 생활을 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리라고 대답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근거로 회개하는 일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나눠지는 듯하다는 논적들의 추론은 이 구절의 말씀을 일부러 곡해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당연히 율법론에서 논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간단히 언급했을 뿐이다.

 

10. (반대자들의 견해를 따를 것 같으면) 성경의 약속들은 의지의 자유를 전재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종류의 논법은 첫째 논법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그들은 주께서 우리의 의지와 언약을 맺으시는 약속들을 인용한다. "너희는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 그리하면 살리라"(5:14, 의역).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1:19-20). ,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마음이 요동치 아니하며"(4: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98:1). 이 밖에도 비슷한 구절들을 인용한다(26:3이하).

주께서는 이 축복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지만, 만일우리에게 그 약속을 실현하거나 무효로 만들 힘이 없다면, 그 약속이 우리의 의지를 상대로 하는 것은 부적당하거나 희롱일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이 점을 부연하기 위해서 그들이 말하는 웅변적인 항의들을 인용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만일 우리의 의지 자체가 우리의 지배하에 있지 않다면, 자기의 사랑이 우리의 의지에 좌우된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잔인하게 속이신다. 하나님이 우리 앞에 자기의 축복들을 전개해 보이시면서도 그것을 즐길 능력이 우리에게 없다면, 하나님의 이 선심은 대단한 것이다. 걸대로 실현되지 못할 불가능한 일에 의존하는 약속이니 놀랍고 확실한 약속이로다!"

조건이 붙어 있는 약속들에 관해서는 다른 곳에서 언급할 것이다. 그때에 약속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데는 아무 불합리도 없다는 것이 분명하게 될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이 전연 없는 것을 아시면서 자기의 축복을 받을 만한 일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 잔인한 속임수가 아니라고 나는 단언한다. 그런데 약속은 신자들과 불신자들에게 다 같이 제시되므로, 양쪽에 다 유용하다.

하나님께서는 교훈으로 불신자들의 양심을 찔러, 그들이 심판을 잊어버리고 죄악에 탐닉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과 같이, 그들이 하나님의 사학을 받을 가치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증언하도록 약속 안에서 그들을 부르신다고 할 수 있다. 주께서 자기를 공경하는 자들을 축복 하시며, 자기의 존엄성을 멸시하는 자들을 엄벌하시는 것이 완전히 공평하고 적합한 일이라는 것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그러므로 죄의 속박 하에 있는 불신자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약속으로 한 번을, , 그들은 악에서 떠나야만 마침내 축복을 받으리라는 법을 정하시는 것은 적절하며 당연한 처사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정한 경배자들이 받는 축복에서 그들이 배제되는 것이 정당한 처사임을 이해시키기만 해도, 이 법의 목적은 달성된다.

그러나 신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은총을 간구하도록 하나님께서는 백방으로 격려하시므로, 우리가 보인 바와 같이, 교훈으로 그들을 위해서 이미 성취하신 일을 약속으로 이루려고 하시는 것은 조금도 모순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교훈으로 자기의 뜻에 대해서 우리를 가르치실 때에, 우리의 불행을 알려 주시며, 우리가 얼마나 충심으로 그의 뜻에서 어긋났느냐 하는 것도 알려 주신다. 동시에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해 주시도록 성령께 호소하라고 격려하신다. 그러나 교훈은 나태한 우리를 충분히 감동시키지 못하므로, 약속을 첨가하적서 일종의 달콤한 생각으로 우리가 그 교훈들을 좋아하도록 유인하신다. 의에 대한 소원이 간절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더욱 열렬히 구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즐겨한다면", "너희가 순종한다면"이라고 하시는 호소의 말씀으로써 주님이 우리에게 결심하거나 순종하는 자유로운 능력을 부여해 주시는 것도 아니며 우리의 무력함을 조롱하시는 것도 아닌 것이다.

 

11. 우리의 반대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에 나온 비난은 만일 의지가 자유롭지 못한다면 의미를 상실한다고 주장한다.

 

논적들이 쓰는 셋째 종류의 논법은 앞에 있는 두 가지와 비슷하다. 그들은 배은망덕한 백성을 하나님이 질책하시는 그 구절들을 인용하기 때문이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하나님의 지극한 자비에서 모든 좋은 것을 받지 못한 것은 그들의 허물 때문이라고 하신다. 이런 종류의 구절을 들면 다음과 같다.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14:43), "내가‥‥‥너희를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같이‥‥‥이 집‥ ‥‥에 행하리라"(7:13-14), "너희는‥‥‥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국민이라"(7:28). 이 때문에 주께서 그들을 버리셨다고 했다(7:29). 또 저희가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주께 복종하고자 아니하였으므로, 이 모든 재난이 저희에게 임하였다는(참조, 19:16) 말씀이 있다.

이런 질책은 당장 다음과 같이 대답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겠느냐고 그들은 말할 것이다. 곧 우리는 순경을 원하고 역경을 두려워했으며, 그 순경을 얻고 역경을 피하기 위해서 주께 복종하지 않고 주의 목소리를 청종하지도 않은 것은, 우리가 죄의 지배하에 노예가 되어 해방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힘으로 도망할 수 없는 악에 대해서 우리를 비난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라고.

그러나 필연성을 구실로 삼는 것은 무력하고 무익한 변명이므로, 나는 그것을 무시하는 동시에 그들이 그 과오를 변명할 수 있느냐고 묻겠다. 그들이 과오를 범했다는 것이 인정된다면, 그들이 패악해서 주의 자비의 혜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주께서 책망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완고한 원인은 그들 자신의 패악한 의지라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 대답해 보라. 악의 근원을 자기 안에서 발견한다면, 무슨 까닭에 그들은 자기의 멸망을 자초하지 않은 듯이, 그 원인을 외부에서 얻으려고 애쓰는가? 그러나 만일 죄인들이 자신의 과오로 인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빼앗기고 징벌을 받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책망에 귀를 기울여야 할 훌륭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완고하게 죄악을 계속 범한다면 큰 재난을 당했을 때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불공평하고 잔인하시다고 비난하기보다 자기의 무가치를 미워하게 되는 것을 배울 것이며, 또 만일 그들이 배울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자기의 불행과 파멸의 원인인줄로 아는 자기의 죄에 싫증이 났다면, 그들 자신이 비참하고 길일은 자임을 알기 때문에 그들이 바른 길로 돌아오며, 주께서 책망으로 자기들을 깨우쳐 주신다는 사실을 충심으로 인정하며 고백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의 책망이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효과를 나타내는가 하는 것은 다니엘서 제 9장에 있는 다니엘의 위대한 기도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4-19). 첫째 효과의 실례를 우리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예레미야를 보내 그들의 불행한 원인을 설명하라고 명하셨으나, 이 일은 주께서 미리 말씀하신 대로였다.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을 할지라도 그들이 너를 청종치 아니할 것이요 네가 그들을 불러도 그들이 네게 대답지 아니하리니"라고(7:27) 하신 대로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예언자들은 무슨 목적으로 귀머거리들을 당대로 노래를 부른 것인가? 그들이 듣기 싫어하더라도 그 말씀이 옳음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 그들의 불행의 원인이 그들 자신에게 있는데, 그 책임을 하나님에게 전가하는 것은 사악한 신성 모독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을 부정하는 자들은 계명에서, 또 율법을 위반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에서 무수한 증거를 끌어다가, 자유 의지가 있는 것 같은 망상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여기 있는 몇 개의 설명으로 독자는 그들에게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다. 시편에서 유대인들은 "마음이 정직하지 못한 사악한 세대"라는 책망을 듣는다(78:8). 다른 시편에서도 예언자는 동시대 아람들에게 "마음을 강퍅하게 말라"고 권한다(95:8). 확실히 이것은 모든 완고한 마음이 사람들의 사악함에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근거로 마음은 주께서 준비하신 것이니(참조, 16:1) 선악간 어느 쪽으로든지 굽힐 수 있다고 추리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내가 주의 율례를 길이 끝까지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라고 예언자가 말하는 것은(119:112) 유쾌한 생각으로 기꺼이 하나님에게 자기를 바쳤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성향을 자기가 만들었다고 자랑하지 않고, 같은 시편에서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고백한다(119:36).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신자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의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한 경고의 말에 유의해야 한다(2:12-13). 참으로 사도가 그들에게 할 일을 지정하는 것은 육의 태만을 허락하지 않게 하려는 뜻이다. 그는 두려움과 조심성을 명령해서 그들의 자만을 깼으며, 그들에게 주어진 의무는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일침을 기억하게 한다. 여기서 바울은 신자의 행동이 이를테면 피동적임을 분명히 알리며, 그들이 아무것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못하도록, 능력은 하늘이 공급하는 것이라고 이유를 말한다. 또 베드로는 "너희 믿음에 덕을‥‥‥공급하라"(벧후 1:5) 권하면서도, 우리가 무슨 일을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듯이 이차적인 의무들을 우리에게 지정하지 않고, 다만 육에서 오는 나태를 분발시킬 뿐이다. 이 나태가 믿음을 자주 질식시키기 때문이다. 태만은 시정하지 않으면 모르는 사이에 신자들을 끊임없이 습격하므로, 바울이 "성령을 소멸치 말라"(살전 5:19) 말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말한다. 그러나 이것을 근거로, 받은 빛을 키우는 것은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라고 결론짓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우둔한 생각은 쉽게 반박될 것이다. 바울이 명령하는 열성 그 자체는 하나님에게서만 오기 때문이다(고후 7:1).

사실, 성결케 하는 직책은 성령이 홀로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시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갖 더러운 것에서 깨끗케 하라는 명령을 자주 듣는다. 요컨대 하나님에게 속해 있는 것을 우리에게 양보해 주셨다는 것이 분명하다. ,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라고 한다(요일 5:18). 그런데 자유 의지를 주장하는 자들은 우리가 한 부분은 하나님에 의해서, 또 다른 부분은 자신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처럼 이 구절을 악용한다. 그들은 마치 사도가 우리에게 알게 해 준 바로 이 보존이 하늘에서 오지 않은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스도도 우리를 악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도록 아버지께 기도하신다(17:15). 또 우리는 경건한 자들이 사탄과 싸울 태에는 하나님의 무기만으로 승리를 얻는다는 것을 안다(참조, 6:13이하).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진리에 복종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깨끗케 하라고 명령했을 때에, 시정하는 의미로 즉시 "성령을 통하여"라고 첨부한다(벧전 1:22). 간단히 말해서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라"(요일 3:9) 가르침으로써 영적인 전투에서 사람의 힘은 전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간단히 밝힌다. 그리고 다른 구절에서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하는 말로 그 이유를 알린다.

 

(성경에 있는 특별한 구절들과 사건들을 근거로 한 주장에 대한 답변. 12­19)

 

12. 신명기 30:11이하

 

그러나 반대자들은 우리의 설명에 강력히 반대되는 듯한 구절을 모세의 율법에서 인용한다. 모세는 율법을 공포한 후에 백성 앞에서 증언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30:11-14).

그런데 만일 이 말씀을 단순히 교훈으로 주어진 것으로 해석한다면, 당면 문제를 위해서는 적지 않은 중요성이 있다고 나는 판정한다. 이것은 계명들을 이해하는 능력과 성향에 관한 것이지 계명들을 지키는 능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서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쉬운 일이긴 하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의심이 남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믿을 수 있는 해석가인 사도 바울은 모세가 여기서 복음의 가르침에 대해서 말한 것이라고 단언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의심을 제거한다(10:8). 그러나 어떤 완고한 사람이 있어서, 바울이 이 말씀을 복음에 연결시키기 위하여 심하게 곡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런 사람의 대담성은 불경건한 것이지만, 우리는 사도의 권위를 빌 것 없이 그를 논박할 방법이 있다. 만일 모세가 교훈들에 관해서만 말한 것이라면, 그는 백성에게 심히 허망한 자신을 불어넣은 것이 된다. 만일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처운 일인 듯이 자기 힘으로 지키려 했다면, 그것은 파멸로 돌진한 것 외에 달리 무 이었겠는가? 율법에 접근하려면 반드시 죽음이 걸려 있는 절벽을 지나야 하는데 그 율법을 지키는 능력을 어디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면 모세의 이 말씀은 자비의 언약을 의미한 것이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다. 그는 율법의 규정들과 함께 그 자비의 언약을 공표했던 것이다. 몇 절 앞에서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실 필요가 있다고도 가르쳤기 때문이다(30:6). 그러므로 그는 곧 뒤에서 말한 그 능력을 사람의 힘에 두지 않고 성령의 도움과 보호에 둔 것이다. 성령은 연약한 우리 안에서 자기의 사업을 힘차게 실현하신다. 이 구절도 단순히 교훈들에 대해 언급한다고 해석할 것이 아니라, 복음의 약속들에 대해 언급한다고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복음의 약속은 의를 얻을 능력이 우리 안에 있다고는 전연 주장하지 않고, 도리어 그런 능력을 전적으로 부인한다.

바울은 이러한 증언을 확인한다. , 복음 안에서 주어진 구원은 율법에 의해서 우리에게 제시된 어렵고 가혹하고 지키기에 불가능한 조건 아래 주어진 것이 아니라, 쉽고도 언제든지 지킬 수 있으며 공적으로 따를 수 있는 조건하에 주어진 것이라고 한다. 물론 율법에 의해서 주어진 구원은 모든 율법을 성취한 사람만 결국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경 말씀은(10) 인간 의지의 자유를 확립하는 데는 아무 가치도 없다.

 

13. 하나님이 인간의 행동을 "기다리신다"는 것은 자유 의지를 전제 한다는 주장

 

하나님께서 간혹 사람들을 시험하시는 의미에서, 은총의 도움을 철수하시고 그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서 노력의 방향을 돌리는가를 기다려 보신다고 하는 구절들을 반대자들은 자주 끌어온다. 예컨대 호세아서에,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내 얼굴을 구할 생각을 할 때까지 기다리리라"는 말씀이 있다(5:15, 의역). 그래서 그들은 말한다. 만일 이스라엘백성의 마음이 그 본유적인 능력으로써 어느 쪽으로든지 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주께서 그들이 자기의 얼굴을 구하게 될까 하고 생각하시는 것이 우스운 일일 것이라고. 마치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백성이 그들의 생활을 바르게 고치기까지 그들을 멸시하며 버리시는 듯한 일을 극히 자주 하시는 것처럼 생각한다. 반대자들은 이런 위협의 말씀에서 결국 무슨 결론을 내리려는 것인가? 만일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백성이 자기 힘으로 회심할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그들은 성경 전체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회심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다고 인정한다면, 무슨 까닭에 우리와 싸우는 것인가? 그러나 그들은 사람의 고유 능력을 보유하는 조건으로 은총이 필요하다고 인정한다. 무엇을 근거로 그런 생각을 증명하는가? 물론 그것은 그 구절이나 유사한 구절일 수는 없다. 사람에게서 물러서시고 그들이 자기 지혜만으로 무엇을 판 것인가를 고려하신다는 것과,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그 약한 정도에 따라 도와주신다고 하는 것과는 다른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말씀들은 무슨 뜻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바꿔 말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라고 나는 대답한다. "이 백성은 완고해서 경고와 권고와 책망이 아무 효과도 없으므로, 나는 잠깐 물러서서 그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조용히 내버려두겠다. 오랫동안 재난을 겪고 나서 언제 나를 기억하고 내 얼굴을 찾게 되는지 볼 것이다." 주께서 떠나가신다는 것은 예언을 중지하신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그 다음에 무엇을 하는지를 보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동안 그들을 여러 가지 고난으로 조용히 말하자면 비밀히 시험하신다는 뜻이다. 이 두 가지 일을 하시는 목적은 우리를 더욱 겸손하게 만드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를 공순하게 만드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정을 받기 전에 역경의 채찍으로 타도되겠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완고한 고집에 노하시고 심지어 지치신 주님께서 잠깐 우리를 떠나실 때에-바꿔 말하면, 자기가 함께 계신다는 것을 항상 조금씩 이라도 나타내시는 그 말씀을 일시 주시지 않을 때에-그리고 주가 계시지 않는 동안에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를 시험하실 때에, 우리는 하나님 관찰하며 시험하실 어떤 자유 의지의 힘이 우리에게 있다고 잘못 해석한다. 하나님이 일시 떠나시는 목적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시려는 것뿐이다.

 

14. 그러면 이 행위들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가

 

그들은 또 성격이나 사람들이 보통 말하는 방식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논한다. 선행을 "우리의"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이며, 우리는 죄를 짓지만 거듭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도 한다고 인정된다. 죄가 우리에게서 왔다고 해서 우리에게 들리는 것이 옳다면, 같은 이유로 선행에서 우리가 하는 몫도 인정해야 마땅하다. 그러고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이 밀어 주신다고 해서, 우리가 거저 돌덩이처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에 첫째 자리를 드리지만 저 표현들은 우리의 노력이 둘째 자리를 차지한다고 일러준다.

만일 우리의 논적들이 선행을 "우리의" 것이라고 단순히 주장한다면, 나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원하는 떡도 "우리의" 것이다 라고 대답하겠다(참조, 6:11). 여기서 "우리의"라는 소유 대명사는, 원래는 우리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 우리의 것이 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라고 그들은 생각하는가? 그러므로 그들은 주기도에도 같은 어리석은 점이 있다고 조롱하든지, 그럴지 않으면 오직 하나님의 선심에 의해서 할 뿐인 선행을 "우리의"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은 아니라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둘째 항의는 좀더 강하다. 성경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경배하며 의를 보존하며 율법을 지키며 열심히 선행을 한다고 확언하는 때가 많다. 이런 일은 마음과 의지의 고유한 기능이므로 만일 우리의 열성이 하나님의 힘을 어느 정도 나눠 받는 것이 아니라면, 이 일들을 어떻게 동시에 성령에게도 돌리고 우리 자신에게도 돌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주의 성령이 성도들에게 어떻게 작용하시는가를 잘 생각하기만 하면, 이런 너절한 항의는 쉽게 처리할 수 있다.

그들이 악의로 우리에게 던지는 비유는 적당하지 않다. 어떤 미련한 사람도 우리가 돌을 던지듯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움직이신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가르치는 것은 이런 뜻이 아니다. 우리는 찬성과 배척, 원함과 원치 않음, 추구와 저항 등의 행동은 인간의 본성에 있는 기능이라고 한다. 바꿔 말하면, 허망한 것에 찬성하고 완전한 선을 배척하며, 악을 원하고 선을 원하지 않으며, 사악을 추구하고 의에 저항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이런 부패 행위를 자기의 진노의 도구로 이용하고자 하시면, 그것을 뜻대로 조종하셔서 사람의 썩은 손을 통해서 자기의 선한 사업을 실현하신다. 그러면 자기의 정욕만을 따라 노력하는 악인이 하나님의 권능을 섬길 때에, 우리는 그런 악인을 외부의 힘에 움직여 자기의 운동이나 감각이나 의지가 전연 없이 거저 굴러가는 돌에 비교 할 것인가? 우리는 거기에 큰 차이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여기서 특히 문제되는 선한 사람들은 어떤가? 주께서 그들 속에 자기의 나라를 건설하실 때에 주님은, 의지의 본유적 성향에 따라 빗나간 정욕에 의해서 전후좌우로 끌리지 않도록 성령으로써 그들의 의지를 억제하신다. 그리고 성결과 의를 향하도록, 자기의 의를 표준으로 삼아 그 의지를 굽히며 형태를 주며 방향을 지시하신다. 비틀거리며 넘어지지 않도록 성령의 힘으로 그들의 의지를 바로잡으며 힘을 주신다. 이런 뜻으로 어거스틴도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작용을 받을 분이고 자기는 행동하지 않느냐?"고 여러분은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행동을 하며 또 작용을 받습니다. 선한 사람의 작용을 받으면 여러분은 좋은 행동을 합니다. 여러분에게 작용하시는 성령은 행동하는 사람들을 도우십니다. '돕는 이'라는 말은 여러분도 행동한다는 뜻을 보입니다. 이 발언의 처음 부분에서 그는 성령의 작용이 사람의 행동을 제거하지 않는다고 한다. 선을 추구하도록 지도를 받는 사람의 그 의지는 본성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돕는다"는 말에서 우리도 무엇을 하는 것이라는 추리를 할 수 있다고 곧 첨가하는데, 이 점은 우리 각 사람에게 무엇을 돌린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의 나태를 조장하지 않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의 행동과 우리의 행동을 연결해서, "결심하는 것은 본성에 속하고 바르게 결심하는 것은 은총에 속한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앞에서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우리는 정복할 수 없고, 심지어 싸울 수도 없다"고 말한 것이다.

 

15. "행위"는 하나님이 주셨으니 "우리의" 것이요, 하나님이 격려하셨으니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과 하나님의 은총과의 관계를 논할 때에, 그 은총은 사람의 의지를 지휘하며 규정하는 성령의 지배라고 해석된다. 성령이 지배하실 때에는 반드시 시정과 개혁과 갱신이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중생의 시작은 우리의 것을 일소하는 것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성령은 이런 기능들을 하시려면 반드시 움직이며 행동하며 재촉하며 참으며 보존하여야 한다. 따라서 은총에서 생기는 행동들은 모두 전적으로 성령의 행동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다. 동시에 우리는 어거스틴이 "은총은 의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재건한다" 가르친 말이 옳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 생각은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 사람의 부패하고 타락한 의지가 시정되어 의의 참된 지배를 받도록 지도될 때에, 그것은 재건된다고 한다. 동시에 새로운 의지가 사람 속에 창조된다고 한다. 본성에 있는 의지는 심히 타락하고 부패해서 새로운 본성을 집어넣을 필요가 있다고 그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이 우리 자신의 적합한 행동이라고 아무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물론 우리의 의지는 하나님의 은총과는 다른 어떤 기의 것을 공헌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데서 인용한 어거스틴의 생각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 세인은 사람의 의지에서 사람 자신의 어떤 선을 찾아보려고 무익한 노력을 한다고 그는 말했다. 사람들은 자유 의지의 힘과 하나님의 은총을 혼합하려고 애쓰지만, 그런 혼합은 은총을 부패시킬 뿐이다. 마치 포도주에 쓴 흙탕물을 타는 것과 같다. 설사 의지에 어떤 선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성령의 순수한 감동에서 생긴다. 그러나 우리는 의지를 타고났으므로, 하나님이 자기가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고 정당하게 주장하시는 일을, 한 편에서는 우리가 했다고 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 이유는, 첫째로, 하나님이 사랑으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은 우리 것이다. 다만 그것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이 선을 향해서 지도하시는 그 마음도 우리의 것이요, 의지도 우리의 것이요, 노력도 우리의 것이다.

 

16. 창세기 4:7

 

그들은 여기저기서 다른 증거를 긁어모으지만, 이미 제시한 논박들을 잘 이해한 사람들이라면, 특별히 총명하지 않더라도 별로 곤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창세기에 있는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는 발언을 인용한다(4:7). 그들은 이 말씀을 죄에 적용해서, 주께서 가인에게 약속하시기를, 만일 그가 죄를 정복하려고 애쓸 결심을 한다면, 죄의 힘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리라고 하신 듯이 말한다. 그러나 이 절을 아벨에 적용시키는 것이 말의 순서에 더 잘 맞는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여기서 하나님은 가인이 아우에 대해서 품은 악한 시기심을 책망하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책망하신 점은 두 가지였다. 우선, 하나님 앞에서는 의로운 것만이 칭찬을 받는 것인데, 가인은 헛되이 범죄를 계획하여 하나님 앞에서 아우보다 나으려고 했다. 둘째로, 가인은 하나님에게서 이미 받은 축복을 감사할 줄 모르고, 아우가 자기의 권위 하에 있었는데도 그 아우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해석이 우리의 견해와 반대되기 때문에 우리가 이 해석을 취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줄는지도 모르는 까닭에, 하나님은 여기서 죄에 대하여 말씀하셨다고, 그들에게 양보하겠다. 그럴게 가정할 때에, 주께서는 이 발언 내용을 약속하셨거나 그렇지 않으면 명령하셨을 것이다. 만일 명령하셨다면, 인간의 능력이 있다는 증명은 거기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밝히 설명했다. 만일 약속하셨다면, 가인이 정복하리라던 죄에 항복했으니, 그 약속은 어디서 실현되었는가? 그 약속에는 무언중에 조건이 예컨대, "네가 싸운다면 승리를 얻으리라"는 식으로 포함되어 있었다고 그들은 말하려는가? 그러나 누가 이런 핑계를 용인할 수 있는가? 이 지배가 죄에 관한 것이라면 말투가 명령법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힘이 미치지 못하더라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지정한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일 자체로 보거나 문법의 원칙으로 볼 때, 가인과 아벨을 비교한다고 해야 한다. 장자가 자기의 죄로 인해서 아우보다 낮게 된 것이 아니였다면, 아우 밑에 들었을 리가 없겠기 때문이다.

 

17. 로마서 9:16과 고린도전서 3:9

 

그들은 또 사도의 증언인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는 말씀을 이용한다(9:16). 이것을 근거로 그들은 사람의 의지와 노력에 어떤 것이 있고, 그것은 비록 자체만으로는 미약하지만, 하나님의 자비의 도움을 받을 때에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나타낸다고 추론한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바울이 여기서 무슨 문제를 논하는가를 침착하게 생각한다면, 그의 발언을 이렇게까지 경솔하게 곡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자기의 해석을 지지하기 위해서 오리겐과 제롬을 인용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내 편에서는 어거스틴을 대립시킬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바울이 말하는 뜻을 이해하기만 하면 이들의 견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자기의 자비를 받을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만을 위해서 구원이 예비되었으며, 하나님이 택하시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파멸과 죽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 사도가 가르치는 뜻이다. 그는 바로의 예를 들어 악인들의 운명을 지적했다(9:17).

그는 또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리라"(9:15 ; 33:19) 모세의 증언을 인용해서 하나님의 거저 선택하심이 확실하다는 것을 단정했다. 그리고 나서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결론지었다(9:16). 그러나 만일 의지와 노력이 이 무거운 짐을 질 만한 힘이 없으니 충분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라면, 바울의 발언은 부적당할 것이다. 이러면, 원하거나 달음박질하는 사람에 달린 것이 아니라고 했으니, 어느 정도의 원함과 어느 장도의 달음박질이 있는 것이라고 하는 이 궤변을 그만 두라, 바울이 말하는 뜻은 비교적 단순하다. 우리를 위해서 구원으로 가는 길을 준비하는 것은(사람의) 의지도 아니요 노력도 아닌 하나남의 자비뿐이라고 한다. 바울은 디도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바로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3:4-5). "원하는 자로 말미암으며 달음박질하는 사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부정했으니(9:16), 원함과 달음질이 있다는 것을 바울은 암시한 것이라고 지껄이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내가 같은 식으로 추론한다면, , 우리는 우리의 행위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바울이 부정하니 우리는 다소의 선행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추론의 권리를 그들까지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 추론에서 결점을 발견한다면, 그들 자신의 추론에도 같은 오류가 있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확고한 추론을 한다. "그러므로 만일 원하거나 달음박질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이 논법을 뒤집어서, 하나님의 자비는 단독으로 행동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둘째 추론이 불합리하므로, 어거스틴은 주께서 사람의 의지를 준비하시지 않으면 사람에게는 선한 의지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라고 바른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원하거나 달음질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이 두 가지 일을 다 성취하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라고 한 바울의 말을(고전 3:9) 비틀어서 똑같이 무지한 곡해를 한다. 이것이 교역자들에 국한된 말씀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뿐 아니라, 그들을 "동역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자기의 무엇을 공헌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일할 능력과 필요한 은사를 주신 다음에 그들의 수고를 이용하시기 때문이다.

 

18. 집회서(묵시 문학서 중의 한 책) 15:14-17

 

그들은 집회서의 저자를 들먹인다. 이 사람의 권위가 의심을 받는다는 것은 세상이 알고 있다. 나는 이 저자를 거부할 수 있는 완전한 권리가 있지만, 가령 그를 거부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는 자유 의지를 어떻게 변호하겠는가? 그는 말한다. "사람이 창조된 직후에 하나님은 그가 자기의 지혜의 힘으로 살도록 맡기셨다. 그에게 계명들을 주셨다. 그가 계명을 지키면 계명이 그를 지키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앞에‥‥‥생명과 죽음, 선과 악을 두셨다. 어느 쪽이든지 그가 택하신 대로 주시리라고 하셨다"(집회서 15:14-17, 의역). 사람이 창조된 때에 생명이나 죽음을 취할 능력을 받았다고 인장하자. 그러나 만일 우리가 사람은 이 능력을 잃어 버렸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나는 솔로몬이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고 한 말에(7:29)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타락해서 자기 자신과 가진 모든 것을 잃어 버렸으므로 처음 창조되었을 때에 그가 가졌던 것이 모두 다 반드시 곧 그의 부패·타락만 본성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논적들뿐 아니라 집회서 저자에게도(그가 누구였든간에) 대답한다. 구원을 얻는 능력을 자기 안에서 찾으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그대의 소원이라면, 우리는 그대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으며, 의심할 여지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대의 권위가 조금이라도 편견을 일으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가령 그대는 육의 악한 경향을 억압하며, 육이 자기의 죄악을 하나님에게 전가하면서 헛된 자기변호를 시도하는 것을 누르려는 생각뿐이며, 따라서 정직한 마음을 사람 속에 넣으신 것은 사람의 파멸이 그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기 위해서였다고 그대가 대답한다면, 나는 기꺼이 찬성한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주께서 처음에 사람에게 베푸신 여러 가지 장식을 사람이 자기의 허물 때문에 지금은 빼앗기고 없다는 점에서, 그대와 나의 견해가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대나 나나 사람은 지금 변호인보다 의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19. 누가복음 10:30

 

들은 그리스도의 비유에서,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되어("절반 산채로") 길에 버려졌던 행인의 이야기를(10:30) 무엇보다도 자주 인용한다. 이 행인은 인류의 큰 재난을 대표한다고, 거의 모든 저자들이 가르친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이것을 근거로 반대론자들은 추론한다. , 행인을 "절반 산채로" 버렸다고 하니, 사람은 죄와 악마라는 강도를 만나 선했던 이전의 모습이 아무 흔적도 없어질 정도로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니며 바른 이성과 의지가 조금은 남아 있지 않다면 어떻게 "절반 살았다"고 하겠느냐고 추론한다.

첫째로 내가 그들의 이 풍유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확실히 교부들은 주의 말씀의 참뜻을 고려하지 않고 이 해석을 고안했다. 성경의 원칙이 지정한 한계를 넘어서 풍유(알레고리) 해석해서는 안 되며, 어떤 교리의 완전한 토대로 삼는 것은 더욱 안 된다. 내가 이 허위를 근절하려면 그렇게 할 근거가 없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절반 살았다"고 하지 않고 축복된 생활에 관해서는 완전히 죽었다고 가르친다. 바울은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죽은 우리를‥‥‥살리셨다"고 말하고(2:5), 성도들이 "절반 살아 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절반 살아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그리스도의 광명을 받으라고 호소하지 않고, 잠자는 자와 무덤에 묻힌 자들을 상대로 한다(5:14). 같은 식으로 주께서는 친히 "죽은 자들이 그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는 때가 왔다"고 하신다(5:25, 의역). 사소한 암시를 들어 이렇게 많은 분명한 발언들에 반대하는 그들은 얼마나 파렴치한가!

그러나 그들의 이 풍유가 확실한 증언의 구실을 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들은 우리에게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절반 살아 있다고 하니, 아직 건전한 데가 있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물론 사람은 천상적이며 영적인 지혜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 지성은 없지만, 그의 지성에는 이해력이 있다. 그는 정직한 일을 다소간 판단할 수 있다.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지식은 얻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조금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속성에 과연 어떤 가치가 있겠는가? 확실히 이런 속성들이 있다고 해서, 여러 학과들의 공통된 찬동으로 인정된 어거스틴의 견해를 우리가 버려야 한다고 할 수 없다. 그는 사람이 타락한 후에 구원에 꼭 필요한 것을 거저 주시는 선한 것들을 빼앗겼고, 사람의 여러 가지 천품은 부패하고 오염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틀림없는 진리, 어떤 공성기로도 흔들 수 없는 진리라고 인정할 것은 이것이다. , 사람의 지성은 하나님의 의에서 완전히 소외되었기 때문에, 그 생각하고 원하고 행하는 것이 불경하고 패악하고 악취가 나고 불순하고 부끄러운 것뿐이다. 사람의 마음은 죄의 독소가 속속들이 배어 있기 때문에, 그 호흡에서 나오는 것은 악취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간혹 선한 외관을 보이지만, 그 지성은 여전히 위선과 간계에 싸여 있고, 심정은 내면적 패악성으로 결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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