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기독교강요 : 2권. 7장

본문

반응형

7 장 율법을 주신 목적은 구약 백성을 그것으로 구속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희망을 주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을 뜻하는 도덕적이며 의식적인 율법. 1-2)

 

1. 중보자는 타락한 인간만을 돕는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 약 400년이 지난 후에 율법이 첨가되었다(3:17 참조). 우리가 지금까지 살핀 증언들이 끊임없이 뒤를 이어온 것을 보면, 율법을 주신 것은 택하신 백성을 그리스도에게서 분리시키려는 뜻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출현시까지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며,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을 일으키며 그들의 기대를 강화해서, 오래 지체되더라도 지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나는 "율법"이라는 말을 경건하고 의로운 삶의 원칙을 가르치는 십계명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전하신 종교 형태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모세를 입법자로 세우신 목적은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말소하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유대 민족의 조상들이 거저 받은 언약과 그들이 그 언약의 상속자임을 여러 번 그들에게 회상시켰다. 마치 그는 그 언약을 부활시키려고 파견된 것 같았다. 이 사실은 여러 가지 의식에서 아주 분명히 나타났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해서 동물의 기름에서 나는 악취를 드리는 것보다 더 허무하고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또 자기의 더러운 살결을 씻어 버리기 위해서 물과 피를 뿌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간단히 말해서 율법의 예배 형식은 진정한 것에 대응하는 그림자와 상징이라고 이해하지 않고 문자적으로 생각한다면, 그 전체가 전혀 우스운 것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장막에 속한 모든 것을 산에서 보이신 규례대로 만들라고 명령하신 구절을(25:40) 스데반의 설교와(7:44) 히브리서에서(8:5) 아주 주의 깊게 고찰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만일 유대인들이 생활 목표로 삼아야 할 어떤 영적인 것이 아니었다면, 이방인들이 너절한 짓에 정력을 소모한 것과 같이, 유대인들도 그 의식들에서 공연한 노력을 낭비했을 것이다. 경건을 위한 열성으로 노력한 일이 없는 무()종교인들은 이런 복잡한 의식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진저리날 정도다. 그들은 무슨 까닭에 하나님이 저 고대 민족을 이 많은 의식으로 괴롭히셨느냐고 할 뿐 아니라, 이 의식들을 멸시하며 어린애 장난이라고 비난한다. 바꿔 말하면, 그들은 율법의 목적에 주목하지 않는다. 율법의 형식을 그 목적에서 분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허망한 것이라고 정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제사를 명령하신 목적은 세상적인 일로 경배자들을 분주하게 만들려고 하신 것이 아님을 바로 저 모형이 알린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들의 마음을 더 높이 들어 올리시려는 것이었다. 이 점은 그의 본성을 생각해도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 , 하나님의 본성은 영적이기 때문에 영적인 경배만이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있다. 예언자들의 많은 말들도 이 점을 증거하며, 유대인들의 미련함을 비난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제물에 가치가 있다고 보시는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율법의 가치를 낮추려고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율법의 진정한 해석가였으므로, 목표에서 멀어져 가는 일반 사람들의 눈을 이런 방법으로 다시 그 목표로 향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제시된 은총을 보면, 우리는 확실히 율법에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점이 없지 않다는 언급을 할 수 있다. 그들을 택하신 목적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 라고 모세가 그들에게 설명했기 때문이다(19:6). 이것은 짐승의 피로 얻는 화해보다 더 위대하고 우수한 화해가 사이에 끼지 않으면 그들이 도달할 수 없는 일이었다(참조, 9:12이하). 아담의 후손은 모두 유전적 오염이 있어서 태어날 때부터 죄의 노예다. 그러면 그들이 왕 같은 존엄한 지위에 오르며,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만일 이런 탁월한 명예가 어떤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면, 가장 합당치 못한 일이 아니겠는가? 더러운 죄악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그들이 거룩한 머리 안에서 성별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제사장직의 권리가 그들 사이에서 잘 실현될 수 있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모세의 말을 교묘하게 돌려, 유대인들이 율법 하에서 맛본 은총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나타났다고 한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라고 베드로는 말한다(벧전 2:9). 그가 이렇게 말을 바꾼 것은, 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조상들보다 더 많이 얻었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이 제사장과 임금의 영예를 받았고, 중보를 믿고 의지함으로써 감히 자유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2. 율법은 약속을 내포하고 있다

 

다윗의 가문을 중심으로 드디어 건설된 왕국은 율법의 일부분이며, 모세의 제도 하에 포함되었다는 점에 우리는 여기서 잠깐 주목해야겠다. 따라서 레위 지파 전체에서와 다윗의 후손 사이에서는 그리스도가 그 고대인들의 눈앞에 마치 이중의 거울에 비치듯이 제시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내가 방금 말한 것처럼, 죄와 죽음의 노예가 되며 자신의 부패에 오염된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왕과 제사장이 될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약속을 받은 후손이 나타날 때까지 유대인들은 "몽학 선생"의 감독 아래에 놓였다고 한 바울의 말은 옳다(3:24).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를 친숙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 일에 관한 완전한 지식을 감당할 수 없는 연약한 어린애들과 같았다. 의식들이 어떻게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했는가 하는 것은 위에서 말했다. 이 점은 예언자들의 많은 증언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노염을 풀기 위해서 매일 새 제물을 드려야 했지만, 그들의 모든 악행을 다만 한 제물이 대속하리라고이사야는 약속했다(53:5). 다니엘도 같은 생각이었다(9:26-27). 레위 족속에서 임명된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다만 한 제사장에 대해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하나님이 엄숙한 맹세로 선택하셨다고 한다(110:4 ; 5:6, 7:21). 그 때에는 눈에 보이는 기름을 부었는데, 다니엘은 환상 가운데서 다른 종류의 기름 부음이 있으리라고 선언했다(9:24). 여기서 무수한 예를 말하지 않고 히브리서 기자의 예를 보면, 그는 제 4장부터 제 11장까지, 그리스도의 때가 오기 전에는 의식들이 무가치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자세하고 분명하게 지적한다.

십계명에 관해서는 바울이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10:4) 경고한 말에 주의해야 한다. , 의문 자체는 죽이는 것이지만(고후 3:6), 그리스도는 그 의문을 살리는 영이시라고 한다(고후 3:17). 율법의 마침이라는 발언은, 그리스도께서 의를 거저 전가해 주시며 중생의 영으로 의를 베풀어주시지 않으면, 계명으로 가르치는 것이 쓸데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리스도를 율법의 완성, , 마침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더라도, 그 감당할 수 없는 멍에와 짐에 눌려 고생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가 구원하시지 않는다면 그 지식에 아무 가치도 없을 것이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율법은‥‥‥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고 가르친다(3:19). , 사람들이 자기의 유죄를 깨닫게 함으로써 그들을 겸손하게 만들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찾기 위한 참되고 유일한 준비가 되므로, 바울이 여러 가지로 표현한 교훈들은 서로 잘 일치한다. 율법을 행함으로써 그 공로로 의를 얻는 듯이 말하는 악한 거짓 교사들을 상대로 사도는 논쟁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오류를 논박하기 위해서 율법 자체를 좁은 의미로 해석하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있었다. 그렇지 않은 때에는 율법은 거저 택해 주시겠다는 언약을 포함한 아름다울 것이었다.

 

(우리는 도덕적인 율법을 수행할 수 없다. 3-5)

 

3. 율법은 우리에게 변명의 여지를 없게 만들며 절망 상태에 빠뜨린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의 죄를 알고 용서를 구하게 되기 위해서는, 도덕적 율법을 배울 때에 변명할 여지가 더욱 없어진다는 것을 간단히 알아두어야 한다. 만약 율법이 완전한 의를 가르치는 것이 사실이라면,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가 된다는 결론이 된다. 그럴 때에 인간은 하늘 심판대 앞에서 분명히 외로운 자로 인정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율법을 선포한 후에, 자기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놓았노라고 하면서(30:19), 주저하지 않고 하늘과 땅을 불러 증인으로 삼았다. 주께서 약속하신대로,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면 그 보상으로서 영원한 구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다음의 문제 곧 우리가 완전히 복종할 수 있는지와 그 공로로 확실히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를 검토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율법을 준수하는 자에게 영생이라는 보상이 제시되어 있다는 것을 알더라도, 만일 우리가 이 길을 취함으로써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겠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율법의 무력함이 나타난다. 아무도 율법을 지키지 못하므로 우리는 약속된 생명을 받을 수 없고, 다시 완전한 저주로 떨어진다. 나는 있는 일을 말할 뿐 아니라, 있지 않을 수 없는 일을 말한다. 율법의 교훈은 인간의 능력을 훨씬 초월한 것이므로, 사람은 제시된 약속을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어도 그 약속에서 혜택을 얻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남는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약속이 선하심으로 사람은 자기의 불행을 더욱 잘 알게 될 것이며, 동시에 구원받을 소망이 없어졌으므로 자기는 분명히 죽으리라는 위협을 느낀다. 여러 가지 무서운 협박이 몇 사람뿐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을 예외 없이 압박하며 괴롭힌다. 협박은 우리를 지나지 않고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추궁하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에서 가장 임박한 죽음을 볼 뿐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약속은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율법만을 볼 때에 우리는 낙심하며 당황하며 절망할 수밖에 없다. 율법에서 얻는 것은 우리 모든 사람의 정죄와 저주이기 때문이다(3:10). 율법은 지키는 사람에게 축복을 약속하면서도, 그 축복과 우리 모든 사람과의 거리를 멀게 만든다. 또한 주께서 이렇게 우리를 희롱하시는 것이냐고 질문할 것이다. 행복을 얻으리라는 소망을 보이시며, 그것을 얻으라고 불러 인도하시며, 얻을 수 있다고 다짐하시면서, 한 편으로 그것을 감추며 가까이 갈 수 없게 만드시니, 이것은 희롱과 다른 데가 없지 않은가? 나는 대답한다. 율법의 약속에 조건이 붙어 있는 점에서는 율법을 완전히 준행해야만 약속을 얻을 수 있으며 완전한 준수는 아무 데서도 찾아볼 수 없지만, 그렇더라도 약속을 주신 것은 허사가 아니다.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인애로 우리의 행위를 보심 없이 우리를 받아주시지 않으며, 우리도 복음이 보여 주는 그 인애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율법의 약속에 아무 결실이나 결과가 없으리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에, 그 약속은 조건이 붙어 있더라도 효과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때에 주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값없이 베풀어주시며, 자기의 충만한 친절에 다시 다른 선물을 첨가하신다. , 주께서는 우리의 불완전한 복종을 물리치시지 않고 도리어 부족한 것을 보충해서 완전히 만드시면서, 마치 우리가 조건을 이행한 듯이 율법이 약속하는 혜택들을 받게 만드신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제목 하에 이 문제를 더 자세히 논해야 하겠으므로, 지금은 더 이상 논의하지 않겠다.

 

5. 율법의 수행은 우리에게 불가능하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우리는 말했다. 제롬이 아무 저주함 없을 만큼 이 생각은 불합리한 것이라고 일반 사람이 생각하므로, 우리는 곧 간단히 설명하여 재확인해야겠다. 나는 제롬의 생각에 시간을 보내지 않고, 무엇이 바른 생각인가를 살펴야 하겠다. 여기서 나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구질구질한 말로 길게 늘어놓지 않겠다. 지금까지 있은 일이 없는 것과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이 있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을 나는 "불가능하다"고 부른다. 우리가 가장 오랜 과거를 찾아본다 하여도 성도들은 사망의 몸을 입었기 때문에(참조, 7:24), 한 사람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함을 다하며"(12:30) 하나님을 사랑할 만큼 사랑의 목표에 도달한 일이 없었다고 나는 말한다. 또 정욕이라는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나는 말한다. 누가 이것을 반대하겠는가? 물론 나는 우리가 어리석은 미신으로 어떤 성자를 공상하는가를 안다. 하늘 천사들도 그 성자들처럼 순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과 또 경험에서 얻는 증거와는 반대된다. 그뿐 아니라 앞으로도 육체의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지 않고서 진정한 완전성이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나는 말한다.

이 점을 지지하는 명백한 증언들이 성경에는 얼마든지 충분히 있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고 솔로몬이 말한다(7:20 ; 참조, 왕상 8:46).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다윗이 말한다(143:2). 욥은 여러 구절에서 같은 생각을 주장한다(참조, 9:2, 25:4). 바울의 말은 가장 분명하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5:17). 율법 아래 있는 자는 모두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증명할 때에 바울이 드는 이유는 다 큰 것이 아니라, 바로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는 것이다(3:10 ; 27:26). 여기서 그는 아무도 그렇게 항상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거나 전제한다. 성경에서 기록된 일은 영구적인 것, 심지어 필연적인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펠라기우스파는 어거스틴을 궤변으로 괴롭혔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얻어 행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오해한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어거스틴은 그들의 주장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원하신다면 물론 죽을 인생을 천사 같은 순결 상태에 끌어올리실 수 있다고 인정했지만, 하나님은 이미 성경에서 선언하신 것과 반대되는 일은 하시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 말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성실을 대립시키는 것은 생각이 부족하다고 첨가한다. 그러므로 누가 말하기를, 성경이 선언하는 것은 있지도 않고 또한 있을 수도 없다고 말한다고 하면 이런 발언은 냉소해 버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씀 자체에 대해서 반대한다고 하자. 제자들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하고 물었을 때에, 주님께서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대답하셨다(19:25-26). 또 어거스틴은 우리가 육신을 쓰고 있는 동안은 하나님에게 당연히 드려야 할 사랑을 드리지 못한다고, 설득력이 있는 주장을 한다. "사랑은 지식에 따르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인애를 완전히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완전히 사랑하지 못한다. 땅에서 방랑하는 동안 우리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다'(고전 13:12) 따라서 우리의 사랑도 불완전하다." 그러면 우리 자신의 본성이 무력한 것을 볼 때에, 율법을 이 육신 생활에서 완전히 지킬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의 견해가 완전히 일치하기를 바란다. 이 점은 바울의 다른 구절도 밝힌다.(8:3).

 

(율법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보여주며, 거울처럼 우리의 죄 많음을 밝혀 줌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도록 인도 한다. 6-9)

 

6. 율법은 엄격함이 우리에게서 모든 자기기만을 제거해 준다

 

그러나 이 문제 전체를 더욱 분명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른바 "도덕적 율법"의 기능과 용도를 간단히 개관하기로 하겠다. 그런데 내가 알기에는 그 기능에 세 부분이 있다.

첫째 부분은 하나님의 의, ,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유일한 의를 밝히는 동시에, 우리 각 사람의 불의를 경고하며, 알리며, 죄를 깨닫게 하며, 결국 정죄한다.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므로 눈이 어둡고 정신이 마비되었으므로, 자기의 무력함과 불순함을 알고 자백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만약 자기의 허무함을 분명히 믿게 되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의 정신력에 대해서 지나친 자신을 가지며, 자기가 택한 표준으로 재는 동안은 자기의 정신력이 빈약하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게 될 수 없다. 그러나 자기의 능력과 율법의 난해함을 비교하게 되면, 자기의 오만불손함이 다소간 꺾이는 것을 느낀다. 지금까지 자기의 능력을 아무리 굉장한 것으로 생각했더라도, 이 무거운 율법을 지고는 숨이 가쁘고 비틀거리는 것을 곧 느끼며, 결국은 심지어 넘어지며 지쳐버리는 것을 느낀다. 이와 같이, 율법을 배운 사람은 지금까지 자기의 눈을 맹목적으로 만든 그 교만을 탈피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는 다른 병도 고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가 자만이라는 병에 걸렸다고 했다. 그가 자신의 판단을 근거로 삼는 것을 버려두는 동안은 위선을 의로움 이라고 가장하며, 여기 재미를 붙여서 가짜인 여러 가지 의로운 행위로 하나님의 은총에 반역한다. 그러나 그 모든 허구적인 가짜 의를 제쳐놓고, 율법의 저울로 자기의 생활을 저울에 달지 않을 수 없게 되면, 그는 자기가 성경에서 멀며, 참으로 지금까지 자기는 오염되지 않았다고 생각한 그 무수한 죄악이 자기 안에서 가득차 있는 것을 깨닫는다. 탐욕의 죄는 아주 깊고 꼬불꼬불한 구석에 숨어 있기 때문에, 사람의 눈을 속이기 쉽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고 사도가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7:7). 율법이 탐욕을 그 숨어 있는 굴에서 끌어 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련한 인간을 아주 비밀히 죽여 버리기 때문에, 인간은 그 칼에 찔려 죽는 것을 느끼지도 못한다.

 

7. 율법의 징벌하는 기능은 그 가치를 감하지 않는다

 

율법은 거울과 같다.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무력함과, 무력에서 생기는 죄악을, 그리고 결국은 그 두 가지에서 오는 저주를 본다. 거울이 우리 얼굴에 있는 오점들을 보여 주는 것과 똑같다. 왜냐하면 의를 따라가는 능력이 없을 때에, 인간은 죄의 수렁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죄악의 뒤를 곧 따라오는 것이 저주다. 그러므로 율법이 우리를 유죄로 인정하는 범행이 중대한 것일수록 우리의 책임을 묻는 심판도 더욱 엄중하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20)고 한 사도의 발언은 여기 해당한다. 그가 거기서 말하는 것은 율법의 첫째 기능, , 아직 중생하지 않은 죄인들이 경험하는 것뿐이다. 여기에 관련된 발언들이 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5:20), 그래서 율법은 "죽게 하는 직분"으로서(고후 3:7) "진노를 이루게" 하며(4:15) 죽인다. 양심이 자기의 죄를 분명히 깨달을수록 가책이 더욱 커진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럴 때에 입법자에 대한 완고한 불복종이 범행에 첨가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율법은 죄인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무장시킨다. 율법 자체만으로는 고발하며 정죄하며 멸망시킬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의 말과 같이, "은총의 영이 없으면 율법은 우리를 고발하며 죽이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율법을 공경하지 않거나 그 훌륭한 우월성을 깎아내리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우리의 의지가 율법에 순종할 태세가 완전히 준비되어 있으면 율법을 알기만 해도 구원을 얻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육적이고 부패한 본성은 하나님의 영적인 율법과 맹렬하게 싸우며, 그 징계를 받아도 결코 시정되지 않으므로, 원래 적합한 경청자를 만나면 구원을 주기로 계획된 율법이 죄와 죽음의 원인으로 변하는 결과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범법자임이 증명되므로, 율법이 하나님의 의를 명백하게 나타낼수록, 반대로 우리의 죄를 더욱 폭로하기 때문이다. 생명과 구원이라는 보상은 의에 달렸다고 율법이 확실히 다짐할수록, 그것은 악인의 열망을 더욱 분명하게 만든다.

이 격언들은 결코 율법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자비를 더욱 분명히 칭송하므로 가장 가치있는 발언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사악과 부패로 인해서 율법이 우리 앞에 명백히 제시하는 복된 삶을 즐기지 못하게 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율법의 지지 없이 우리를 양육하는 하나님의 은총이 더욱 감사하며, 우리에게 은총을 주는 하나님의 자비가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결로 지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계속해서 은혜를 베푸시며 새로운 은사를 더욱 많이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8.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에게 작용하는 율법의 징벌하는 기능

 

우리 모든 사람이 사악하다는 것과 정죄를 받는다는 것은 율법의 증언에 의하여 확인한다. 그러나 이 확인은 우리가 낙심해서 주저앉아 버리거나, 완전히 용기를 잃고 낭떠러지에 뛰어들게 하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율법의 증언에서 마땅한 유익을 얻으면 된다. 율법이 악인들에게 공포심을 일으키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율법을 아는 것이 다른 효과를 나타낸다. 참으로, 율법이 우리 모든 사람을 심판하며 정죄하는 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3:19)고 사도는 단언한다. 그는 같은 생각을 다른 곳에서도 가르친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심은" 모든 사람을 멸망시키거나 멸망하게 버려두시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11:32). 이 말씀의 뜻은 그들이 자기의 힘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그들이 다만 하나님의 손이 받들어 주시기 때문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벗은 몸과 빈손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피난해서 완전히 그 안에서 쉬며, 그 안에 깊이 숨으며, 의와 공로를 얻기 위해서 그 자비에만 전적으로 매달린다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 자비는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다. 율법의 교훈에서 하나님은 다만 완전한 의에 보상을 주시며 그러나 이런 의는 아무에게도 없다. 반대로 악행은 엄격히 심판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의 얼굴이 가련하고 무가치한 우리 죄인들을 대해서까지 은총과 인자로 충만한 빛이 난다.

 

9. 율법은 어거스틴이 말하고 있듯이 비난함으로써 우리가 은총을 구하게 만든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총의 도움을 간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자주 말한다. 예컨대, 힐라리에게 보낸 서간에서, "우리가 율법의 요구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다가 연약하여 피로할 때에, 율법은 우리에게 은총의 도움을 구할 줄 알라고 합니다." 아셀리우스에게도 비슷한 글을 써 보내었다. "사람이 자기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며 그 대책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총을 구하게 만들기 때문에 율법은 유용합니다"라고. 또 로마의 이노센트에게 보낸 서간에서는, "율법은 명령하고 은총은 실천력을 공급합니다"라고 썼다. 발렌티누스에게 보낸 글에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구해야 할 것을 알게 하시려는 뜻"이라고 한다.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를 책망하며, 책망을 받은 우리가 두려워하며, 두려워하므로 용서를 빌며, 우리 자신의 힘을 믿고 감히 행동하지 않게 하시려는 뜻이다." , "율법을 주신 목적은 위대한 체하는 우리를 작게 만들며, 우리 자신에게는 의를 얻을 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며, 무력하고 무가치하고 궁핍하여 우리가 은총으로 피난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 후에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한다. "주여, 행동하소서, 자비하신 주여, 행동하소서, 행할 수 없는 일을 명령하소서, 아니, 당신의 은총을 받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을 명령하소서, 사람은 자기 힘으로 할 수 없으므로, 모든 입이 막히고 아무도 자기를 큰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하소서, 모든 사람이 작은 자가 되며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알게 하소서" 그러나 그가 특히 이 문제에 대해서 영과 문자에 대하여(On the Spirit and the Letter)라는 글을 썼는데, 내가 그의 증거를 많이 늘어놓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는 율법의 둘째 가치를 이렇게 명백히 설명하지는 않는데, 그것은 첫째 가치에 의존한 것이라고 알았거나 또는 철저히 이해하지 못했거나 또는 그 정확한 뜻을 뚜렷하고 분명하게 표현할 말을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율법의 이 첫째 기능은 버림받은 자들에게도 작용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같이, 육을 억누른 후에 속사람이 새로워지며 다시 꽃이 피는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무서운 첫 인상에 놀라 절망 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그들의 양심이 이런 타격을 받는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버림받은 자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을 회피하기를 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심판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율법과 양심의 증거에서 철저한 타격을 받아, 마땅히 받은 것을 스스로 탄로시킨다.

 

(율법은 죄인과 아직 믿지 않는 자들을 구속한다. 10-11)

 

10. 율법은 부정한 악인들로부터 사회를 보호한다

 

율법의 둘째 기능은 적어도 벌을 받으리라는 공포심을 일으켜 일부 사람들을 억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에 있는 무서운 위협을 듣고 강압을 느끼지 않으면 바르고 공정한 일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다. 그들이 억제되는 것은 속마음에 감동이나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라, 이를테면 굴레를 쓰고 있어서 외면적인 활동에 손을 대지 못하며, 제멋대로 즐겼을 부패한 생각을 가슴속에만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조금도 나아졌거나 의로워진 것이 아니다. 공포심이나 수치심이 방해하기 때문에, 마음속에 품은 것을 감히 실행하지 못하며, 날뛰는 정욕을 공공연하게 발산시키지 못할 뿐이다. 더구나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순종하겠다는 마음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 참으로, 자기를 억제할수록 정열의 불길은 더욱 강하게 타오르게 되며, 마음속이 뜨겁게 끓어올라, 무서운 율법만 방해하지 않는다면 곧 무엇이든지 하며 어디서든지 폭발할 자세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율법 자체를 극히 미워하며 입법자인 하나님을 저주해서, 될 수만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을 없애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이 바른 일을 하라고 그들에게 명령하실 때나, 하나님의 존엄성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벌을 내리실 때에, 그들은 그 하나님을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가 율법을 지키는 쪽으로 기꺼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싫어서 반대를 해보지만 하도 무서워서 억지로 복종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이 억제된 또 강요된 의는 인간 사회를 위해서 필요하다. 주께서는 만사가 소란·혼돈하지 않고 사회가 평온하도록 이런 방법을 마련하셨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일을 허락한다면 사회는 소란하고 혼돈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들까지도 부르심을 받기 전에, 또 성결의 영을 받기 전에(1:4), 어리석은 육의 욕심대로 날뛰는 동안은, 이런 감독을 받는 것이 유익하다. 하나님의 벌이 무서워서 적어도 외면에 나타나는 난동을 삼가는 동안은 그들의 마음이 아직 길들여지지 않고 적지만, 그래도 의의 멍에를 담당하므로 조금은 야성이 꺾인다. 그 결과로, 부르심을 받을 때에는 전혀 규율에 대한 초보지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사도의 다음과 같은 교훈은 특히 율법의 이 기능에 대해 언급한 듯하다.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딤전 1:9-10). 사도는 여기서 율법은 육의 미친 듯한 정욕, 버려두면 한정 없이 뻗어 나가는 정욕을 억제하는 굴레와 같다고 가르친다.

 

11. 율법은 아직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방해물이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3:24)라고 한 말은 율법의 두 가지 기능에 다 적용할 수 있다. 율법이 몽학 선생이 되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사람들은 두 종류가 있다.

처음 종류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다. 이 사람들은 자기는 덕이 있고 의롭다고 믿기 때문에, 먼저 자기를 비우지 않는 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에 부적당하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들이 자기의 불행을 깨닫게 해서, 그 교만을 꺾고 겸손하게 만들어, 지금까지 자기에게 없는 줄을 몰랐던 것을 구하게 되도록 그들의 마음을 준비한다.

둘째 종류의 인간들은 굴레가 필요하다. 그들이 육의 정욕이 날뛰는 대로 포기하여 의를 전혀 추구하지 않게 되는 것을 굴레로 억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아직 지배하지 않는 곳에서는 정욕이 몹시 끓어올라 영혼을 결박하고,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멸시하는 상태에 떨어뜨릴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이 방법으로 대항하시지 않으면 이런 일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나라를 상속시키기로 정하신 사람들을 즉시 중생시키지 않는 때에는, 그들에게 찾아오실 때까지 공포심과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그들을 안전하게 보존하신다(참조, 벧전 2:12).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져야 할 순결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에 따라 진정한 경건을 가르치는 데 유익한 공포심이다. 이 일에 대해서는 많은 증거가 있기 때문에 예를 들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모르고 암중모색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율법이 굴레가 되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공경을 유지하다가, 드디어 성령으로 중생해서 충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모두 인정할 것이다.

 

(율법은 주로 믿는 자들을 깨우치며 선행을 촉구한다. 12-13)

 

12. 믿는 자라 할지라도 율법이 필요하다

 

셋째 용도는 가장 중요한 것이며, 율법의 본래의 목적에 더욱 가까운 것이다. 이 용도는 하나님의 영이 이미 그 영혼 속에 사시며 주관하시는 신자들 사이에서 발견된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율법이 기록되고 새겨져 있지만(31:33; 10:16),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과 격려로 하나님께 복종하겠다는 열심이 있지만, 역시 두 가지 방면에서 율법의 혜택을 입는다.

그들이 앙모하는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매일 더욱 철저히 배우며 확고하게 이해하는 데 율법은 가장 훌륭한 도구가 된다. 마치 주인의 마음에 들겠다는 성의와 준비가 있는 하인이 주인의 습관을 따르며 거기 순응하기 위해서는 그 습관을 자세히 연구하며 관찰해야 하는 것과 같다. 또 이 필요성은 아무도 피할 수 없다. 율법을 매일 공부하여도 하나님의 뜻을 더욱 순수하게 아는 일에서 새로운 전진이 없으리만큼 지혜가 많은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다.

또 우리는 배울 뿐 아니라 권면을 받을 필요가 있으므로, 하나님의 종이 율법에서 받는 혜택은 이 방면에도 있다. , 율법에 대해서 자주 명상함으로써 복종하겠다는 열성을 얻으며 복종하는 힘을 얻으며 범죄의 미끄러운 길에 들지 않게 된다. 성도는 이와 같이 전진을 계속해야 한다. 그들은 성령에 따라 하나님의 의를 향해서 아무리 정성껏 노력하더라도, 무관심한 육이 짐이 되어 제대로 전진할 수 없다. 율법은 육에 대해서 마치 가지 않는 게으른 나귀를 가게 하는 채찍과 같다. 영적인 사람이라도 육의 짐을 벗지 못하고 있는 동안은, 율법이 여전히 끊임없이 자극이 되어 일시도 한 자리에 서 있지 못하게 한다. 확실히 다윗은 율법을 찬양했을 때에 이 용도에 대해 언급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생케 하고‥‥‥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19:7-8). 마찬가지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19:105) 이 밖에도 같은 시편에 유사한 말씀이 무수히 많이 있다(예컨대, 119:5). 이 구절들은 바울의 발언들과 모순되지 않는다. 사도는 중생한 사람들에 대해서 율법이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그 자체만으로서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여기서 예언자는 율법의 위대한 효용가치를 선포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복종심을 불어넣으시고, 그런 사람들이 율법을 읽을 때에 그들을 가르쳐 주신다는 것이다. 예언자는 교훈뿐 아니라, 거기 동반하는 은총의 약속을 붙잡는다. 이 약속만이 쓴 것을 달게 만든다. 만일 율법이 명령과 위협만으로 사람의 영혼을 무섭고 놀라게 하여 괴롭히며 슬프게 만든다면, 율법보다 더 싫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다윗은 특히 율법에서 중보를 인식했다는 것을 알린다. 중보가 없으면 기쁨이나 즐거움이 없는 것이다.

 

13. 믿음이 깊은 자들을 위해서 율법이 전적으로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은 율법을 오해한 것이다

 

어떤 무지한 사람들은 이 구별을 이해하지 못하고 경솔하게 모세의 율법을 전적으로 집어던지며, 율법의 두 판을 버린다. "죽음의 직분"이 포함된 가르침을 고수하는 것은 명백히 그리스도만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악한 생각을 우리의 머릿속에서 추방하라. 모세의 훌륭한 교훈에 의하면, 율법은 죄인들 사이에서는 죽음만을 만들어내지만, 성도들 사이에서는 더 좋고 훌륭한 이용법이 있다고 한다. 그는 세상을 떠나려 할 때에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증거한 모든 말을 너희 마음에 두고 너희 자녀에게 명하여 이 율법과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는 너희에게 허사가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32:46-47). 그러나 만일 율법에 의의 완전한 모범이 나타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면, 우리는 바르고 공정한 생활의 표준이 필요하지 않거나, 그렇지 않으면 율법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 생활을 지도하는 영원불변의 표준은 많은 것이 아니라 하나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인의 생활은 율법에 대한 끊임없는 묵상이라고 한 다윗의 발언은(1:2) 한 시대뿐 아니라 모든 시대에 세상 끝까지 적용된다.

율법이 요구하는 엄격한 도덕적 순결은 우리가 이 육체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는,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 율법을 무서워하여 도망하거나 그 교훈을 피해서는 안 된다. 율법은 지금 우리에 대해 법의 요구 조건을 지키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 엄격한 사법관인 것이 아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충고하는 그 완전성은 우리가 도달하려고 일평생 애써야 하는 목표다. 이 점에서 그것은 우리의 의무와 일치하는 동시에 또한 도움을 준다. 우리가 이 싸움에서 기진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참으로 인생 전체가 경주다(참조, 고전 9:24-26). 경주로를 다 달릴 때에, 지금 멀리 바라보면서 뛰어가는 그 목표에 우리가 도달하는 것을 주께서 허락하실 것이다.

 

(이른바 율법의 "철폐"는 양심의 해방과 고대 의식들의 단절을 뜻한다. 14-17)

 

14. 율법이 어느 정도로 믿는 자들에게는 철폐되었는가?

 

그런데, 율법에는 신자들에게 권고하는 힘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양심을 저주로 속박하는 힘이 아니라, 권고를 반복해서 태만한 그들을 일깨워 주며 잠자는 그들을 꼬집어 자기의 결함을 보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 저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고자 해서, 신자들에게는 율법이, , 내가 말하는 도덕적 율법이 철폐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율법이 신자들에게 지금은 바른 길을 명령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대해서 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 지금은 그들에게 공포심을 불어 넣으며 당황하게 만들어 그들의 양심을 정죄하며 파멸에 몰아넣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율법이 이와 같이 철폐된 데 대해서 바울은 아주 분명히 가르친다(참조, 7:6). 주께서도 철폐를 가르치셨다고 생각할 수 있는 점이 있다. 주께서는 자기가 율법을 폐하리라는 생각을 부정하셨는데(5:17), 만일 이 생각이 유대인 사이에 돌아다니지 않았다면 그것을 부정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무 구실도 없이 우연히 그런 생각이 생겨났을리가 없으므로, 아마 그리스도의 교훈에 대한 오해가 있었을 것이다. 오류는 거의 모두가 진리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도 똑같은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율법 가운데서 폐기된 것과 아직도 유효한 것을 정확히 구별해야 한다. 주께서 자신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하시며,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5:17-18)고 선언하심으로써, 주의 강림으로 인해서 율법 준수가 조금이라도 경감되는 것이 아니라고, 충분하고 확실하게 말씀하신다. 또 이것은 옳은 말씀이다. 그는 도리어 율법 위반을 고치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인해서 율법의 교훈은 여전히 범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가르치며 경고하며 책망하며 교정함으로써 율법은 우리가 모든 선행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단련하며 준비시킨다(참조, 딤후 3:16-17).

 

15.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폐기되었다

 

바울이 저주에 대해서 하는 말은 그 의식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양심을 속박하는 계명의 힘에 대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율법은 가르칠 뿐 아니라 그 명령을 솔직하게 실시한다.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참으로 사람이 한 가지 점에서라도 의무를 지키지 않으면, 율법은 저주의 벼락을 내린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한다(3:10; 27:26). 사도가 "율법 행위에 속한"자라고 하는 것은 죄의 용서에 우리를 엄격한 율법에서 해방하는 그 용서에 자기의 의의 근거를 두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는 율법의 속박 하에서 비참하게 멸망하고 싶지 않으면, 우리는 반드시 그 속박에서 풀러나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속박을 의미하는가? 가혹하고 위험한 요구의 속박이다. 그것은 율법의 철저한 형벌을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며 어떤 범행이든지 반드시 처벌하고야 만다. 이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저주를 받으신 것이다.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3:13 ; 21:23). 바울은 그 다음 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기"(4:4-5) 위함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같은 뜻으로 한 말이다. 바로 그 다음에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기 때문이다(4:5). 이것은 무슨 뜻인가? 죽음에 대한 공포심으로 우리의 양심을 괴롭히는, 끝없는 노예상태에서 우리가 억눌려 지내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율법의 권위는 조금도 손상당하지 않고, 우리는 항상 여전한 경외심과 복종심으로 율법을 받아 들여야 한다. 이것은 언제나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6. 의식적인 율법

 

의식들은 문제가 별개이다. 의식들은 효과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용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그리스도가 강림하셔서 의식을 끝내셨지만 그 신성은 조금도 빼앗지 않으시고 도리어 인정하시며 존중하셨다. 만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권능이 의식들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구약 백성에게 허무한 외관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와 같이, 만일 의식들이 폐지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의식을 정한 목적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의식 준수가 쓸데없을 뿐 아니라 또한 유해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의식은 그림자요 그 본체는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가르친다(2:17). 그러므로 이미 자기를 분명히 계시하신 그리스도를 의식이 상징하는 것보다 멀리서, 또 휘장으로 가리워 있듯이 상징하는 것보다 지금은 의식이 폐기되었기 때문에 진실이 더 잘 빛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셨을 때에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된 것은(27:51),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듯이(10:1) 전에 희미한 윤곽만으로 시작했던 하늘 축복이 명백하고 살아 있는 형상이 이제 나타났기 때문이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16:16) 여기 해당한다. 저 거룩한 족장들은 구원과 영생에 대한 희망을 포함한 말씀을 듣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대낮에 보는 것을 그들은 멀리서 희미한 윤곽으로 잠깐 보았을 뿐이라는 뜻이다. 무슨 까닭에 하나님의 교회는 이 초보적 단계를 아주 초월해야 하는가를 세례 요한이 설명한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1:17). 비록 속죄가 고대의 제사에서 참으로 약속되었고, 언약의 궤는 아버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보증했지만, 만일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영원한 안정성이 발견되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기초로 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림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율법의 의식들은 준수하지 않게 되었으나, 폐지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의식이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에 얼마나 유용했는가를 더 잘 알 수 있으며, 그리스도는 의식들을 폐지하시면서 자기의 죽음으로 그 효력을 확인하셨다. 우리는 이것을 사실로 인정해야 한다.

 

17. 우리에게 불리하게 기록된 유대관계는 삭제되어 있다

 

바울이 지적한 것 가운데 조금 더 어려운 점이 있다.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운운한다(2:13-14). 이 발언은 율법의 철폐를 확대해서 율법의 규정이 이제 우리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정도까지 가는 듯하다. 이 말을 도덕적 율법에 관한 것이라고 간단히 생각하는 사람들은 십계명의 교훈보다 그 용서 없는 엄격성을 폐지한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그 생각은 잘못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더 신중히 고려해서 그 본뜻은 의식적 율법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바울이 "의문"이라는 말을 여러 번 썼다는 점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에베소서에서도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고 한다(2:14-15).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사이를 막힌 담이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2:14),이 발언이 의식에 관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나는 이 둘째 주석가들이 저 첫째 사람들을 바르게 비평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둘째 사람들도 아직 사도의 뜻을 썩 잘 설명하는 것 같지 않다. 두 구절을 세부까지 비교하는 것을 나는 옳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에베소 신자들을 향해서 그들이 이스라엘과 같은 백성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을 다짐하려고, 과거에 그들을 가로막던 장애물이 제거되었다고 가르친다. 그런 장애물은 의식들이었다. 유대인들을 주 앞에 성별한 결례와 제사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리했던 것이다. 그러면 골로새서에서 언급하는 것이 더 숭고한 신비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거기서 문제는 모세에 있는 규례들이며, 거짓 사도들은 그리스도 신자들을 그 규례로 몰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 사도가 더 깊은 데까지 논의를 전진시키는 것과 같이 이를테면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이 구절에서도 같은 논의를 한다. 의식들에 관해서 순수해야 된다는 점만을 생각한다면, 그 의식들을 "우리를 대적하는 증서"라고 부르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2:14) 그뿐 아니라, 무슨 까닭에 우리의 구속을 그 증서가 "도말"되었다는 사실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시키는가? 그러므로 문제 자체가 우리에게 더 내면적인 것으로 인정되기를 강력히 요구한다.

그러나 나는 옳은 해석을 얻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글이 옳다는 전제하에서, 아니 정확하게는 사도의 분명한 말에서 얻었다고 할 수 있는 경우에 그러하다. 곧 유대인들의 의식에는 죄에 대한 속죄보다 죄에 대한 고백이 있었다는 것이다(참조, 10:1이하; 16:21). 유대인들이 제물을 드림으로써 얻은 것은 자기들은 죽을죄를 지었다는 고백에 불과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자기 대신에 결례를 드렸다. 그들이 결례로 얻은 것은 자기의 불결을 고백하는 데 불과하지 않았는가? 이와 같이 그들은 항상 자기의 죄와 불결에 대한 "증서"를 갱신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증거를 준다고 해서 거기서 풀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의 글에 구약아래에서 없어지지 않던 범죄가 그리스도가 죽으신 후에 속량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9:15). 그러므로 사도가 의식들은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을 "대적하는 증서"라고 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이런 의식을 통해서 그들은 자기의 유죄와 불결을 공개적으로 확증했기 때문이다(참조, 10:3).

그들도 우리와 함께 같은 은총에 참여했다는 사실에는 아무 모순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은총을 받았고 의식에서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용한 의식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희미하게 만들었으므로, 사도는 그 구절에서 의식과 그리스도를 구별한다. 의식 자체만을 볼 때에는 사람의 구원에 "적대하는 증서"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의식은 사람들의 의무를 증거하는 의무적인 법적 요구 문서이기 때문이다. 거짓 사도들이 그리스도 교회를 다시 의식 준수의 의무로 얽어매려고 했을 때에, 바울은 정당한 논거에 입각해서 의식의 궁극적인 목적을 심원한 말로 다시 규정하며, 골로새 신자들을 향해서 만일 이 모양으로 끌려서 의식적 율법에 얽매이게 된다면 그들은 어떤 위험에 다시 빠지게 될 것인가를 경고했다(2:16이하). 그들은 동시에 그리스도의 혜택을 빼앗기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일단 영원한 속죄를 완수하신 후에 매일 준수하던 의식을, 죄를 증거할 뿐이고 말소하는 데는 아무 공헌도 할 수 없는 의식을 철폐하신 것이다.

반응형

'신학...공부 > 존칼빈 기독교강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강요 : 2권. 9장  (0) 2017.06.01
기독교강요 : 2권. 8장  (0) 2017.06.01
기독교강요 : 2권. 6장  (0) 2017.06.01
기독교강요 : 2권. 5장  (0) 2017.06.01
기독교강요 : 2권. 4장  (0) 2017.06.01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