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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 2권.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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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장 구약과 신약 성경의 유사점

 

(구약성경의 언약은 신약성경의 언약과 실제로 같다. 1-6)

 

1. 문제

 

이미 말한 바에 의해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 곧 창세 이후로 하나님이 택하사 자기 백성 중에 가입시키신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되었으며, 그 언약을 맺게 한 율법과 교리는 현재 우리 사이에서 인정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점을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족장들은 우리와 같은 중보자의 은총에 의해서 같은 기업에 참여하며 동일한 구원을 바라보았지만, 이 교제에서 그들과 우리는 경우가 어느 정도로 다른가를 일종의 부록으로서 논하겠다.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수집한 증언들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경외와 경건에 관해서 어떤 다른 원칙이 있은 일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신구약의 차이점을 많이 논해서 단순한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우리는 당연한 조치로서 이 문제를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논하는 몇 장을 특별히 마련해야 한다. 참으로 저 놀랄만한 불량배 세르베투스와 재세례파의 일부 미친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은 돼지 무리에 불과했다고 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매우 유익했을 일이 이제는 꼭 필요한 일이 되었다. 주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상 생활에서 살찌우셨지만, 그들에게 하늘 영생에 대한 희망은 주시지 않았다고 그들은 지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악취 나는 오류에 경건한 사람들이 전염되지 않도록 하며, 동시에 신구약의차이점을 말할 때에 즉시 일어나는 난제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강림전에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과 그리스도 강림한 후에 우리들과 맺으신 언약이 얼마나 서로 같으며 또 얼마나 다른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2. 일치되는 주요사항

 

한 마디로 두 가지 점을 다 설명할 수 있다. 모든 족장들과 맺어진 언약과 우리와의 언약은 그 실질과 실상이 매우 동일하기 때문에, 사실상 이 둘이 하나다. 다만 처리 방법이 다르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히 말해서는 분명히 이해할 수 없으므로, 더 자세한 설명이 있어야만 논의에 전진이 있겠다. 그런데 신구약의 유사성이라기보다 그 동일성을 밝히려면, 이미 고찰한 세부를 검토할 필요는 없겠다. 다른 곳에서 논의 될 문제들을 여기서 뒤섞는 것도 합당치 않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세 가지 점을 주장해야겠다. 첫째로, 노력할 목표로서 유대인들에게 제시된 것은 육적인 번영과 행복이 아니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오히려 그들을 선택하셨을 때에 영생의 희망을 주셨고, 신탁(神託)과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서 이 선택을 보증하시며 확인하셨다. 둘째로, 그들을 주에게 묶어 놓은 언약은 그들 자신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유지되었다. 셋째로, 그들은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결합되며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리라고 믿었다. 둘째 점은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는지 모르므로, 적당한 곳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주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셨거나 약속하신 축복은 모두 오직 그의 선하심과 자비에서 왔다는 진리를 예언자들의 수많은 분명한 증언에 의해서 확증할 것이다. 셋째 점에 대해서 우리는 여러 곳에서 분명한 증거를 보였고, 첫째 점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지 않았다.

 

3. 구약은 미래를 기대한다

 

첫째 점이 특히 바로 눈앞의 문제에 관계된다. 이 점에 대해서 우리의 논적들은 논란이 더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더욱 면밀히 주의해 보기로 하자. 그러나 우리가 하는 설명에 빠진 곳이 있을 때에는, 설명을 추진하면서 보충하든지, 또는 다른 적당한 곳에서 첨가하겠다. 사도는 확실히 이 세 가지 점에 관해서 우리의 의혹을 제거해 준다. "오래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성경에 복음을 미리 약속하시고," 지정된 때에 "그의 아들에 관하여" 복음을 선포하셨다고 사도는 말한다(1:2-3). 마찬가지로, 율법과 선지자들이 믿음으로 인한 의를 증언하며, 이것을 복음 자체가 가르친다고 한다(3:21). 물론, 복음은 사람의 심정을 현세의 기쁨에 국한하지 않고, 영생을 바라보는 경지로 들어올린다. 지상의 쾌락에 얽어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안식을 얻는 희망을 전언함으로써 이를테면 사람의 심정을 하늘로 옮겨간다. 이 점을 바울은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너희도‥‥‥복음을 듣고‥‥‥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1:13-14). ,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전에 복음 곧 진리의 말씀에서 들은 것이라"(1:4-5). 마찬가지로, "그는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4). 그러므로 복음을 "구원의 말씀"(13:26),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1:16), "천국"이라고 부른다(3:2, 13). 만일 복음의 교훈은 영적인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썩지 않는 생명을 얻게 한다면, 그 복음의 약속과 선포를 받은 사람들이 영혼의 일을 돌보지 않고 우둔한 짐승같이 육적인 쾌락을 추구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복음에 관한 약속은 율법서와 예언서에 인봉되었고 새로운 백성을 위해 있었던 것이라고 하는 패악한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사도는 율법에 복음이 약속되었다고 말하고, 조금 후에 "무릇 율법에 있는 것은 특히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위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첨가한다(3:19 의역). 바울은 다른 것과 관련하여 이 말을 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율법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의례히 유대인에게 해당된다고 말할 때에, 그는 몇 절 앞에서 자기가 복음이 율법에서 약속되었다고 주장한 말을 잊은 것이 아니다(1:2; 참조, 3:21). 복음의 약속이 율법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함으로써 사도는 구약이 특히 내세(來世)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증명하는 것이다.

 

4. 구약에서도 의롭다 함은 오직 은총에서 그 타당성을 얻었다

 

같은 이유로, 구약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총을 토대로 삼았으며 그리스도의 중보에 의해서 확립되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복음이 선포하는 것도 죄인이 자기의 공로와는 별도로 아버지 같은 하나님과 사랑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선언하는 데 불과하며, 그 전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요약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누가 감히 유대인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분리할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 복음의 언약을 주셨다고 하며, 복음의 유일한 토대는 그리스도가 아닌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누가 감히 거저 얻는 구원의 선물에서 격리할 수 있는가? 분명한 문제를 길게 논의할 것 없이, 우리에게는 주의 유명한 말씀이 있다.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8:56).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에 관해서 증언하신 것을 사도는 신자들의 전반적 경험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13:8). 바울이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능이며, 이 권능을 신자들은 영원히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처녀 마리아와 사가랴의 노래에서도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구원을 전에 주께서 아브라함과 족장들에게 하신 약속들이 나타난 것이라고 부른다(1:54-55, 72-73). 주께서 그리스도를 나타내심으로써 옛날 맹세를 실행하신 것이라면, 구약의 목적은 항상 그리스도와 영생에 있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5. 언약의 비슷한 표징들

 

참으로 사도는 언약의 은총뿐 아니라 성례전의 의미에서도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를 동등하게 한다. 성경에 있는 대로,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한 형벌들을 사도가 예로 든 것은 고린도 신자들이 그와 같은 죄를 짓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래서 사도가 출발점으로 삼은 전제는 우리가 특권을 요구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벌을 받지 않겠다고 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우리와 같은 은혜를 베푸셨을 뿐 아니라, 은총을 나타내실 때에 같은 상징들을 쓰셨기 때문이라고 했다(참조, 고전 10:1-6,11). 그의 말뜻은 다음과 같다. "만약 그대들은 세례로 인치심을 받았고 매일 성찬에 참여하면서 세례와 성찬에는 놀라운 약속이 있으므로 그대들에게는 아무 위험도 없으리라고 믿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인애를 경멸해서 방자한 행동을 한다면, 유대인들은 그런 상징이 없지 않았으면서도 주께서 그들을 엄격하게 처벌하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바다를 건넘으로써 세례를 받았고 뜨거운 태양을 가리워 준 구름 속에서 세례를 받은 것이다." 우리의 논적들은 바다를 건넌 것을 육적인 세례라고 부르면서,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의 영적 세례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고 인정된다면, 사도의 논법은 아무 효력이 없게 될 것이다.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세례의 특권에 의해서 유대인들보다 자기들을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설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곧 계속되는 발언도 논적들에게 트집을 잡힐 수 없다. "그들은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고전 10:3-4). 이것을 사도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로 해석한다.

 

6. 요한복음 6:49, 54을 근거로 한 반대에 대한 논박

 

바울의 발언을 뒤엎기 위해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다"(6:49), "내 살을 먹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6:54)는 말씀을 들어 반대를 제기한다. 그러나 이 두 구절은 조화시키기 어렵지 않다. 주께서 그때에 상대로 말씀하신 사람들은 음식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려고만 하고 영혼의 진정한 양식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의 이해력에 알맞도록 말씀하셨다. 특히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만나와 그들의 육체를 비교하셨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자기의 권위를 증명하기 위해서 어떤 기적으로 권능을 증명할 것을 요구했다. 모세도 하늘에서 만나를 얻었을 때 광야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한 만나는 그 당시에 굶주린 사람들을 신체적으로 도와준 것을 의미할 뿐이었고, 그들의 생각은 바울이 문제로 삼은 더 깊은 신비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조상들이 모세에게서 받았다고 한 것보다 자기에게서는 얼마나 더 위대한 은혜를 기대해야 하는가를 알리시고자, 이 비교를 말씀하셨다. 주의 백성이 광야에서 아사하지 않도록 주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하늘 양식을 주시고 그들을 단시일 동안 지탱해 주신 것을 위대하고 기억할 만한 기적이라고 한다면, 영생을 주는 양식은 얼마나 더 훌륭한가를 추론해 보라고 하신다. 주께서 만나의 가장 중요한 면을 간과하시고 그 최저의 이용 가치만을 말씀하신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이 그를 비난하려고 모세를 그에게 대립시키고, 모세는 궁지에 빠진 백성을 만나로 구출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는 훨씬 더 고귀한 은총을 전달하는 사람이며, 거기 비할 때에 백성의 신체적 요구를 만족시킨 것은, 비록 그들은 그것만을 중요시하지만 멸시해야 될 것이라고 대답하신다. 주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떨어뜨리신 것은 그들의 배만을 불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한 영적 신비로서 주셨다는 것을, ,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영적 생명을 예시하셨다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었다(고전 10:1-5). 그러므로 그는 특히 고려할 가치가 있는 이 측면을 무시하지 않았다. 이것을 보면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결론지을 수 있다. 주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것과 똑같은 영원한 하늘 생명의 약속을 유대인들에게도 알리셨을 뿐 아니라, 진정한 영적 성례전으로 그 약속에 인을 치셨다고. 어거스틴은 마니교도 파우스투스를 논박함(Against Faustus the Manichee)이라는 저서에서 이 문제를 상세히 논의했다.

 

(영생에 대한 소망에 관한 주장은 구약성경의 족장들이 다가올 삶 속에서 약속이 이행될 것을 기대했음을 보여 준다. 7-14)

 

7. 그와 더불어 또한 영생을 얻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와 사도들에게서 들은 바와 같이, 족장들에게도 모두 공통적인 영적 언약이 있었다는 데 대해서, 독자들은 그것을 증명하는 말씀들이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인용되기를 바랄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그 소원대로 하겠다. 더욱이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논적들은 더 확실히 반박을 받을 것이며 다시는 문제를 회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내가 우선 제출하려는 증거를 재세례파는 무의미하며 심지어 우스운 것이라고 해서 멸시할 줄을 나는 알지만, 역시 그것은 정신이 건전하고 배우고자하는 사람들에게 지극히 귀중한 증거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속에 큰 생명력이 있어서, 하나님이 이미 거기 참가하는 것을 허락하신 사람들의 영혼을 모두 살린다는 것을 나는 이미 당연한 사실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썩지 않는 씨며 항상 있다고 한 베드로의 말은 언제든지 타당했고(벧전 1:23), 그는 이 점을 이사야의 말로 추론하기도 한다(벧전 1:25, 40:8). 그런데 하나님께서 옛날 유대인들을 이 거룩한 유대로 자기와 연결하셨은즉, 그들을 성별하셔서 영생의 희망을 주신 것이 확실하다. 그들이 말씀을 받아들여 하나님과 더욱 긴밀히 결합되었다고 내가 말하는 것은 천지와 우주 만물에 편만한 전반적인 전달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방법도 만물에 각각 그 본성의 정도에 따라 생명을 주지만, 썩어가는 곤경에서 해방하지는 못한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경건한 사람들의 영혼을 비추는 특별한 방법이다. 이 방법은 하나님에 대한지식을 주는 동시에, 이를테면 그 영혼들을 하나님에게 결합시킨다. 아담, 아벨, 노아, 아브라함 이하의 족장들은 이와 같은 말씀에 의한 조명으로 하나님에게 밀착하여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영원불멸하는 나라에 틀림없이 들어갔다고 나는 단정한다. 그들은 참으로 하나님께 참여했으며, 이 참여에는 영생의 축복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8.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사귐을 허락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영생을 주셨다

 

이것도 아직 조금 분명치 못한 것 같은가? 그렇다면 언약의 말씀 자체를 보기로 하겠다. 그렇게 하면 조용한 사람들은 만족할 것이요, 반대자들의 무지도 충분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자기의 종들과 언약하신 말씀은 항상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것이었다(26:12). 선지자들도 보통 설명하기를, 생명과 구원과 모든 축복이 이 말씀에 포함되었다고 했다. 다윗이 자주 한 말에는 근거가 있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144:15),"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33:12). 이것은 지상의 복을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출하시며, 영원한 자비로 영원히 보호하시며 지켜 주시기 때문이다. 다른 예언자들도 같을 말을 한다. "당신이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죽지 않겠나이다"(1:12, 의역). "여호와는 우리에게 율법을 세우신 자시요 여호와는 우리의 왕이시니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니라"(33:22). "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너희는 여호와의 구원을 얻을 백성이로다"(33:29).

그러나 공연한 일로 애쓸 것 없이, 예언자들이 반복하는 경고를 들어야 한다. 주께서 우리 하나님이신 동안, 우리에게는 온갖 좋은 것이 풍성하며 구원이 확실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한다. 옳은 말이다. 하나님의 얼굴이 비치시는 순간 그 얼굴이 구원의 가장 확실한 보증이 된다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그의 하나님으로서 나타나실 때에 이 계시와 동시에 자기의 구원의 보고를 그에게 열어 주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조건은, 모세를 통해서 증언하신 대로(26:11), 하나님이 우리 사이에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렇게 함께 계시는 사람은 동시에 생명을 받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더 다른 설명이 없었지만, "나는‥‥‥너희 하나님이 되리니"라는 말씀에서(6:7) 그들은 영적 생명에 대한 분명한 약속을 받았다. 이는 그들의 신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특히 그들의 영혼에 대해서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다만, 의를 통해서 하나님과 결합되지 않은 영혼은 여전히 하나님에게서 격리되어 있으며 죽음 속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결합이 있을 때에는 영원한 구원을 동반하게 될 것이다.

 

9.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죽음보다 강하였다

 

그뿐 아니라, 당시에 그들의 하나님이 된다고만 말씀하시지 않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렇게 하신 것은 그들의 소망이 현세의 은혜로 만족하지 않고 영원한 장래에까지 확대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미래 생명의 성격 묘사를 이렇게 해석했다는 것은 여러 구절이 증명한다. 신자들은 현재의 불행에 대해서 위로를 받았을 뿐 아니라, 장래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위로를 받았다. 그런데 약속에는 둘째 부분이 있었고, 거기서는 하나님의 축복이 그들을 위해서 지상생활의 한계를 넘어 더욱 연장되리라는 것이 더욱 분명히 보장되었다.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17:7). 후손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써 죽은 사람에게 대한 후의를 선언하셨은즉, 죽은 사람 자신에 대해서는 더욱 확실히 은혜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은 다르다. 사람은 친구가 죽으면 그에게 호의를 보일 기회가 없어지기 때문에, 친구의 후손에게 그 호의를 옮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죽음의 방해를 받지 않으므로, 자비의 열매를 죽은 자에게서 철회하시지 않고, 그들 때문에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20:6). 그러므로 주께서는 이 훌륭한 증거로 자기의 인애가 위대하고 풍부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리시려고, 모든 후손에게까지 넘쳐흐르리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은 그 은혜를 죽은 후에도 받으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주께서 당자들이 죽은지 오랜 후에 자기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신 때에(3:6), 이를테면 이 약속을 실현하심으로써 그 진실성을 확인하신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만일 그들이 죽어 없어졌다면 이것은 불합리한 칭호가 아니었겠는가? 바꿔 말하면 "나는 없는 사람들의 하나님이라"는 뜻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복음서 기자들의 기록에, 그리스도께서는 이 한 가지 증거만으로 사두개파를 논박하셨다고 한다(22:23-32, 20:27-38). 그래서 그들은 모세가 죽은 자들의 부활을 증언했다는 것까지도 부정할 수 없었다. 이는 모세 자신에게서 "모든 성도가 그 수중에 있으며"(33:3)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 점을 근거로 생사의 심판자이신 이가 인도하시며 돌보시며 보호해 주신 사람들은 죽음에 의해서도 소멸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쉽게 얻을 수 있다.

 

10. 옛 사람들의 축복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제 우리는 이 논쟁의 중심점을 검토하겠다. 그들의 더 좋은 생명은 다른 곳에 있으며, 지상의 생명을 무시하고 하늘 생명을 명상하라는 것이 주께서 신자들에게 가르치시며 그들이 깨닫기를 원하신 뜻인가 하는 것이 논쟁의 중심점이다. 첫째로, 주께서 신자들에게 명령하신 생활양식은 일종의 계속적인 훈련이었다. 그들이 현세 생활만으로 행복을 느낀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가련한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훈련이었다. 잃어버린 행복을 회상하기만 해도 지극히 슬펐던 아담은 고된 노동으로 겨우 살아갔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어려운 육체노동을 하는 것도 부족하다는 듯이(3:17), 남아 있는 위로 가운데서도 극도의 슬픔을 견뎌야 했다. 두 아들 가운데서 한 아들은 다른 아들에게 무참히 죽었다(4:8). 살아 있는 아들은 보기만 해도 밉고 몸서리쳐진 것은 당연하다. 한창 때에 참살을 당한 아벨은 인간의 재난을 대표하는 듯했다. 온 세상이 쾌락 추구의 태평세월을 보냈을 때에 노아만은 일생의 상당한 부분을 방주 건조로 시달렸다(6:22). 겨우 죽음을 면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백 번 죽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고생이었다. 방주가 십 개월 동안 일종의 무덤 같았을 뿐 아니라, 그 오랜 시일 동안을 짐승들의 배설물에 거의 묻히다시피 하면서 갇혀 지내는 것은 비할 수 없이 불쾌한 일이었다. 이런 큰 곤란을 극복하고 나서 그는 새로운 슬픔을 당했다. 자기 아들이 자기를 조롱하는 것을 보았으며, 부득이 자기 입으로 그 아들을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홍수에서 살아난 아들을 저주했다(9:24-25).

 

11. 아브라함의 믿음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생각할 때에 그를 십만인의 가치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그의 믿음은 믿는 자들의 가장 훌륭한 모범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우리는 아브라함 족속의 일원으로 인정되어야 한다(12:3).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구석지고 으슥한 곳에도 차지하지 못했던 그가 모든 신자의 조상이 되리라고 하였으니(참조, 17:5), 이보다 더 불합리한 이야기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를 신자들 사이에서최고의 존경을 받는 계급에서라도 제거한다면, 교회는 전적으로 말소될 것이다. 그런데 그의 생애의 경험을 보면, 그가 처음으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을 때에(12:1), 그는 고향과 부모와 친구들을, , 인간 생활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연으로 인정되는 것들을 떠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고의로 그에게서 인생의 모든 즐거움을 빼앗으시는 것 같았다. 그는 거주지로 지정된 땅에 도착하자, 기근 때문에 그곳에서 쫓겨났다(12:10). 도움을 얻으려고 도망해 간 곳에서는 자기가 살기 위해서 자기 아내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12:11이하). 이것은 여러 번 죽기보다도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거주지에 돌아오기는 했으나, 다시 기근으로 쫓겨났다. 이렇게 자주 배를 곯아야 하며, 거기서 도망하지 않고는 목숨을 유지할 수 없는 그런 땅에서 산다는 것을 행복하다고 할 것인가? 아비멜렉의 땅에서도 같은 궁지에 빠져 자기가 살기 위해서 처를 내놓았다(20:1이하). 불안한 방랑을 여러 해 계속하는 동안에, 종들이 끊임없이 싸우기 때문에, 자기 아들같이 사랑한 조카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13:5-9). 확실히 그는 이 이별을 자기의 수족을 끊는 것같이 느꼈을 것이다. 조금 뒤에 그 조카가 원수들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14:14-16). 어디를 가나 무섭게 야만적인 이웃들이 있어서, 자기가 공들여 판 우물들도 마시지 못하게 했다. 먼저 우물을 쓰지 못하게 되지 않았다면, 아비멜렉에게서 도로 찾지도 않았을 것이다(21:25-31). 그런데, 그는 노쇠하여서도 자식이 없었다(15:2). 이것은 노년에 가장 서글프고 괴로운 일이었다. 드디어 천만 의외에 이스마엘을 낳았으나(16:15), 이 아들의 출생이 그에게는 큰 고통이 되었다. 마치 그가 여종을 교만하게 만들어 가정불화를 일으킨 듯이 사라가 원망하기 때문에 그는 지쳐 버렸다(16:5). 드디어 이삭이 났지만(21:2), 맏아들인 이스마엘을 거의 원수같이 쫓아내어 버리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21:9 이하). 이삭만이 남아 있어서 노쇠한 이 착한 사람이 의지할 아들이었는데, 그를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잠시 후에 받았다(22:1이하).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다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을 상상할 수 있는가? 이삭이 병으로 죽었더라도 누가 아브라함을 가장 불행한 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희롱당한 것같이 아들을 얻었다가 그 아들 때문에 아들이 없는 슬픔이 갑절이나 더 고통스럽게 되었을 것이다. 만일 이삭이 낮선 사람에 의해 죽었다면, 그 부끄러운 죽음이 재난을 더욱 큰 것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의 손에 죽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큰 재난이다. 간단히 말하면, 아브라함은 일평생 세파에 시달렸으므로, 비극의 일생을 그리고 싶은 사람은 아브라함같이 적절한 모델을 얻어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많은 폭풍을 겪으면서도 결국 안전하게 빠져났다고 해서, 그의 일생이 완전한 불행은 아니었다고 항변하지 말라. 무한히 많은 곤란을 당하면서 오랫동안 악전고투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산다고 우리는 말하지 않는다. 슬픔을 느끼지 않고 현재 여러 가지 혜택을 고요히 즐기는 사람을 우리는 행복하게 산다고 하는 것이다.

 

12. 이삭과 야곱의 믿음

 

이삭이 당한 고생들은 비교적 심하지 않았으나, 조금도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도 역시 지상의 행복을 허락하지 않는 여러 가지 고통을 경험했다. 기근 때문에 가나안 땅에서 쫓겨났고(26:1),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겼다(26:7이하). 이웃들은 백방으로 그를 괴롭혀, 우물물 때문에도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26:12이하). 가정에서는 그의 자부들이 큰 말썽을 일으켰다(26:34-35). 그의 아들들이 싸워서 괴로웠고(27:41이하), 이 큰 재앙을 제거하기 위해서 자기가 축복한 아들을 먼 곳으로 보내야만 할 수밖에 없었다(28:1, 5).

야곱으로 말하면, 극도의 불행만을 겪은 사람의 특출한 표본이 되었다. 소년 시절에는 가정에서 형의 위협에 전전긍긍하는 세월을 보냈고, 드디어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27:41-45). 부모와 고향을 떠나갔을 때에 이런 추방에서 오는 슬픔뿐 아니라 그의 외삼촌인 라반도 친절하거나 다정하게 받아주지 않았다(29:15이하). 야곱은 칠년 동안 가장 힘들고 잔혹한 종살이를 했건만, 그것도 부족했고(29:20), 거기다가 흉계에 걸려 처까지 빼앗겼다(29:23-26). 둘째 처를 얻기 위해서 다시 종살이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어(29:27), 그 자신이 불평한 것과 같이 온종일 불볕에서 타며, 추위에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31:40). 이십 년 동안 이런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 매일 장인의 부당한 처사로 고통했다(31:41). 자기 가정에서도 아내들이 서로 맞서 미워하며 싸우기 때문에 집안이 항상 어수선하고 거의 분열 상태였다(30:1이하).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고 부끄럽게 도망치듯 떠나야 했다(31:17이하). 그래도 장인의 악의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여행 도중에 그에게서 모욕과 질욕을 받게 되었다(31:23). 불원에 그는 훨씬 더 잔혹한 곤란에 부딪혔다. 형이 있는 곳에 접근했을 때에, 그는 잔인한 원수가 계획한 것 같은 죽을 위험성을 내다보았다. 그래서 에서가 오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에, 무서운 공포심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32:7,11).

에서를 보고 야곱은 거의 죽은 사람같이 형의 발 앞에 엎드려, 의외의 호의를 느낄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33:1이하). 그 후 고향에 들어가자 사랑하는 처 라헬을 잃었다(35:16-20). 후에 그는 라헬이 낳은 아들이 다른 아들들보다 특히 사랑하던 아들이 짐승에게 찢겼다는 말을 들었다(37:31-32). 아들이 죽은 슬픔에 압도되어 오랫동안 울고 나서 모든 위로를 완강히 거절하고, 죽어 아들에게 가기까지 슬퍼할 것뿐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는 동안에 딸 하나가 잡혀 강간을 당했고(34:2,5), 아들들이 담대한 복수를 감행해서(34:25), 그는 모든 지방 주민에게 미움을 받을 뿐 아니라, 언제 피살될는지 모르는 위험한 지경에 빠졌다(34:30). 이 모든 일이 불안과 슬픔과 염세의 큰 원인이 되었다. 거기다가 맏아들 르우벤의 극악한 범죄가 있었는데, 이보다 더 중대한 일이 있을 수 없었다(35:22). 처가 능욕을 당하는 것만도 가장 큰 불행이라고 하거든, 하물며 그 죄를 지은 자가 자기 아들이었으니,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근친상간의 추태가 있었다(38:18). 이렇게 많은 부끄러운 일을 겪으면, 아무리 재난에 굴하지 않는 강직한 정신이라도 좌절될 것이다. 일생이 거의 끝나려 할 때에 그는 자신과 가족의 주림을 면하려고 하다가, 새로운 재난이 닥쳐온 소식을 들었다. 아들 하나가 옥에 갇혔다는 것이었다. 그 아들을 꺼내기 위해서 자기의 유일한 위로인 베냐민을 다른 사람들의 손에 맡기지 않을 수 없었다(42:34, 38). 이렇게 홍수같이 밀려오는 재난 속에서 야곱은 어떻게 일순간이라도 평화로운 숨을 쉴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그는 자신에 대한 가장 훌륭한 증인으로서, 자기의 지상 생활은 짧고 험악했다고 바로에게 대답했다(47:9). 자기는 끊임없는 불행의 일생을 보냈고, 주께서 약속하신 번영은 전혀 경험하지 못했노라고 단언했다. 그러므로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적대적으로 배은망덕한 태도를 취했든지, 그렇지 않으면 지상에서 비참한 생애를 살았다는 그의 말은 진실한 고백이었을 것이다. 만일 그의 주장이 옳았다면, 그는 땅의 일에 희망을 두지 않았다는 결론이 된다.

 

13. 족장들은 영원한 삶을 추구했다

 

만약 이 거룩한 족장들이 하나님에게서 축복된 생활을 받으려 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행복을 지상 생활 이외에 다른 축복을 생각하고 구한 것이다. 사도가 이 점을 아름답게 증명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믿었으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원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1:9-10, 13-16). 만일 그들이 약속의 실현을 다른 곳에서 기대하지 않았다면, 지상에서 실현 될 가망이 없는 약속을 추구하여 마지않았다는 것은 목석보다도 더 어리석은 짓이었을 것이다. 모세와 같이(47:9) 그들도 현세를 "나그네 길"이라고 불렀다고 바울이 우선 주장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만일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외국인이며 나그네라면, 그들을 아브라함의 후사로 만든 약속의 땅은 어디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에게 소유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분명히 아주 다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는 무덤 이외에 "발붙일 만큼도" 얻지 못했다(7:5). 이것으로 그들은 사후에야 약속의 결과를 받으리라고 기대한다는 것을 증언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은 그 땅에 묻히는 것을 심히 원해서 아들 요셉에게 맹세로 이 일을 약속시켰고(47:29-30), 요셉 또한 자기의 뼈가 흙이 되어 수백 년 지난 후에라도 그 뼈를 그 땅으로 옮겨가라고 명령했던 것이다(50:25).

 

14. 성도들의 죽음은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끝으로, 족장들이 이 세상에서 온갖 노력을 하면서도 내세의 축복을 소망으로 삼았다는 것은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이다. 만일 야곱이 더 높은 행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면, 무슨 까닭에 장자의 권리를 그렇게까지 원했으며, 그것을 얻으려고 그렇게 큰 모험을 했겠는가? 그 때문에 그는 외국으로 쫓겨가며, 거의 가족으로부터 의절당할 뻔했고, 소득은 조금도 없었다(27:41). 운명하려 할 때에 그는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라는 말로(49:18) 자기의 의도를 밝혔다. 만일 그가 죽음에서 새로운 생명의 출발을 본 것이 아니라면, 자기가 죽어 가는 줄을 안 그가 무슨 구원을 기다렸겠는가? 우리는 무슨 까닭에 거룩한 분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는가? 진리를 공격하려고 하던 자까지도 이런 일을 어렴풋이 알고 있지 않았는가? 발람이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인가?(23:10) 그는 후에 다윗이 언명한 것같이 느낀 것이 아닌가? 다윗은 말하기를,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116:15), 그러나 "불경된 자의 죽음은 극히 악하도다"라고 했다(34:21). 만일 죽음이 최후의 경계선이요 종점이라면 죽음에 선인과 악인의 구별이 없을 것이지만, 그들의 사후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서로 다르다.

 

(다윗과 욥과 에스겔과 기타 인물들을 인용해서 이 논의를 계속한다. 15-22)

 

15. 다윗이 희망을 선포한다

 

우리는 아직 모세까지 왔을 뿐이다. 모세가 풍부한 각종 물자와 옥토에 대한 약속으로 육적인 백성을 유인해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만든 것이 그가 다한 유일한 직책이었다고 우리의 논적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제시된 광명을 고의로 피하는 것이 아니라면, 영적 언약이 이미 분명히 확인된 것을 알 수 있다. 예언자들을 보면, 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가장 찬란하게 제시되었다.

우선 예언자들의 선배였던 다윗은 하나님의 경륜의 순서에 따라 하늘 신비들을 다른 예언자들보다 아주 희미하게 나타냈다. 그러면서도 그의 모든 발언은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그 목표를 겨눈 것이었다. 그가 지상 생활에 어느 정도의 가치를 인정했는가는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라는 말이 증언한다(39:12). "사람마다‥‥‥허사 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39:5-6).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39:7). 지상에는 견고한 것이나 완전한 것이 없다고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견지하는 사람은 확실히 자기의 행복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윗은 신자들을 참으로 위로하려고 할 때에는 항상 이 명상을 권고했다. 다른 구절에서 그는 인간의 단명함과 무상함을 말한 다음에, 이어서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라고 첨부한다(103:17). 이와 같은 그의 발언이 시편 102편에도 있다.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두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如常)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주의 종들의 자손이 항상 있고 그 후손이 주의 앞에 굳게 서리이다"(102:25-28). 천지가 멸망하더라도 경건자들이 하나님 앞에 여전히 굳게 서 있다면, 그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결합되어 있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나 이 소망은 이사야서에 있는 약속을 토대로 하지 않고서는 전연 성립할 수 없다. "하늘이 연기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같이 해어지며 거기 거한 자들이 하루살이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51:6)고 주께서 말씀하신다. 거기서는 의와 구원에 영구성이 있다고 하며, 이것은 하나님 안에 영구히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영구히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16. 미래의 삶에 적용되는 첨부적인 구절들

 

그가 시편에서 성도들의 번영에 대하여 노래하는 많은 구절들도 하늘 영광이 나타난 뜻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다르게 이해할 길이 없을 것이다. 예컨대, "저가 그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97:10). "의인을 위하여 빛이 동트며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이 밝아오도다"(97:11, 의역). 마찬가지로 "의인의 의가 영원히 있고 그 뿔이 영화로이 들리리로다"(112:9). "악인의 소욕은 멸망하리로다"(112:10). , "진실로 의인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가 주의 앞에 거하리이다"(140:13). "의인은 영원히 기념하게 되리로다"(112:6). 또 다른 구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 하시나니"라고 한다(34:22). 주께서는 자기의 종들이 악인의 정욕 때문에 고통당할 뿐 아니라, 찢기고 몰락하는 것까지 허락하시는 때가 많다. 선인들이 어둡고 누추한 곳에서 신음하는 것을 버려두시는데, 악인들은 거의 별 사이에서 빛난다. 또 자기의 얼굴의 광채로 선인들을 격려하셔서 그들이 영구한 행복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까지도 만일 신자들이 현세의 사태만을 주목한다면, 그들은 심히 중대한 유혹에 걸려, 마치 하나님은 무죄한 사람들에게 호의와 보상을 베푸시지 않는 것같이 생각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이만큼 악인들은 심히 창성하며 번영하는데, 경건자들은 치욕과 빈곤과 멸시와 각종의 십자가에 눌려지낸다.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고 다윗은 말했다(73:2-3). 그러나 그는 이 발언의 결론으로서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닫겠나이다"(73:16-17)라고 한다.

 

17. 믿는 자들의 소망은 현세의 곤경을 초월하여 미래를 바라본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윗의 이 고백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종들에게 하신 약속을 이 세상에서 성취하시는 일은 매우 드물거나 전혀 없다는 것을 구약하의 거룩한 족장들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들은 마음을 하나님의 성소로 들어 올려, 현세의 그림자 속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이 거기 숨겨 있는 것을 보았다. 이 곳이 곧 하나님의 최후 심판대였다. 그들은 비록 그것을 육안으로 볼 수 없었지만, 믿음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 확신에 의해서 때가 오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는 어떤 일이 있든 간에,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때가 오리라는 것을 이 점은 다음 발언들이 증거한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17:15). ,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52:8). ,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92:12-14). 조금 앞에서 그는 말했다. "여호와여‥‥‥주의 생각이 심히 깊으시니이다‥‥‥악인은 풀같이 생장하고‥‥‥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92:5,7). 이 현상계가 하나님 나라의 출현에 의해서 전복될 때가 아니면 어디서 신자들의 아름답고 우아한 점이 나타나는가? 그들은 저 영원을 바라보면서 현세 재난의 일시적인 고통을 멸시하고 대담하게 부르짖었다.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저희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55:22-23). 악인을 삼키는 영원한 파멸의 웅덩이가 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악인들의 행복에 대해서는 "그 날을 형통하여 지내다가 경각간에 음부에 내려 가느니라"고도 한다(21:13). 성도들의 위대한 평안은 어디 있는가? 다윗이 각처에서 한탄하듯이, 그들은 난폭하게 휘둘릴 뿐 아니라, 완전히 눌리고 소멸된다. 바꿔 말하면, 다윗은 바다의 파도보다도 더 불안정한 현세의 변화무상한 사태를 보지 않고, 하나님이 장차 심판대에 앉으셔서 천지의 영구한 상태를 확립하실 때에 하실 일을 내다보고 있다.

시인은 이 점을 다른 구절에서 적절하게 묘사한다. "어리석은 자들은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도다 아무리 고귀한 자라도 그 형제를 죽음에서 구속하지 못하며‥‥‥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 못하리로다‥‥‥지혜 있는 자는 죽고 악인과 우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 것을 그들은 보면서도 저희의 속생각에 자기 집이 영영히 있고 자기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하여 땅에서 자기의 이름을 칭송하는도다 사람의 존귀는 장구치 못하며 멸망하는 짐승 같으리로다 저희가 이같이 생각함은 우매의 극치이건만, 그 후손들은 그들을 열심히 본받는도다 양같이 저희를 음부에 모으시리니 사망이 저희를 지배하리로다‥‥‥빛이 동트면 의인이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소멸하여 음부가 저희 거처가 되리로다"(49:6-14).

현세의 소위 "행복"은 믿을 수 없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인데, 그것을 믿고 안심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조롱하는 것은, 첫째로 지혜 있는 자는 훨씬 다른 종류의 행복을 구해야 한다는 것을 밝힌다. 그러나 다윗은 악인들이 멸망한 후에 결경자들의 나라가 있으리라고 함으로써 부활의 신비를 더욱분명히 밝힌다. 묻노니, 빛이 동튼다는 것은 현재의 이 시대가 끝난 후에 새로운 생명이 계시되리라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18. 그들의 행복한 운명을 악인들의 운명과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신자들이 불행 중의 위로와 고난에 대한 대책으로 사용한 저 큰 소망이 생겨났다. "주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30:5). 거의 한 평생을 계속한 곤란을 그들은 어떻게 순간에 제거할 수 있었는가?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를 거의 맛본 일도 없는 그들이 어디서 이렇게 영구적인 은혜를 볼 수 있었는가? 만일 땅에 집착했다면 이런 것을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을 우러러보았기 때문에, 성도들은 주께서 주시는 십자가를 지되, 그것은 "잠시 동안"이며, 그들이 받는 "자비""영원하다"는 것을 인정했다(54:7-8). 그러나 하루 동안 꿈같이 행복했던 악인들에게는 영원히 계속하는 파멸이 있으리라고 그들은 내다보았다. 여기에 대한 발언들은 예컨대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으리라"(10:7),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116:15),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34:21)가 있으며 사무엘서에 "주께서 그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으로 흑암 중에서 잠잠케 하시리라"(삼상 2:9)는 말씀도 있다.

이런 구절들을 보면, 성도들은 아무리 곤란으로 시달리더라도 결국은 생명과 구원이며, 악인의 길은 즐거운 행복이지만 거기서 그들은 점점 죽음의 소용돌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는 것을 고대의 조상들은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악인의 죽음을 "할례 받지 않은 자의 죽음"이라고 불렀다(28:10; 참조, 31:18, 32:19이하; 기타). 악인들은 부활할 희망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생각한 가장 무서운 저주는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라는 것이었다(69:28).

 

19. , 영생불멸의 증인이다

 

다른 구절들보다도 더욱 놀라운 것은 욥이 한 말이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내 마음이 초급하구나"(19:25-27). 자기의 영리함을 자랑하고 싶은 자들은, 이 구절은 최후 부활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욥이 하나님이 자기를 더 인자하게 대해 주시리라고 생각한 그 첫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지껄인다. 우리는 부분적으로는 이 주장을 인정한다. 그러나 욥의 소망이 땅에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면 그는 이렇게 고상한 소망에 도달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나는 그들이 싫든 좋든 인정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미래의 영생불사를 우러러보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는 자기가 무덤 속에 있을 때라도 자기의 구속자가 자기와 함께 계시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참으로 현세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은 최후의 결정적 절망이지만, 그 죽음도 욥의 소망을 끊어버릴 수 없었다. "그가 나를 죽이시더라도 나는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고 그는 말한다(13:15, 불가타역).

이런 발언들은 소수 사람들이 한 것이고, 유대인들이 이런 생각을 했다는 증명으로서는 불충분하다고 궤변가들은 나를 공격하지 말라. 나는 곧 대답하리라. 이 소수 사람들은 이런 발언에서 어떤 감추인 지혜를 우수한 사람들만이 개인적으로 비밀히 배울 수 있는 지혜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성령에 의해서 일반 사람들의 교사로 임명되어 하나님의 비밀들을 널리 발표했고, 그 신비들을 백성이 배워 경건의 지도 원칙으로 삼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유대인 교회에서 영적 생명을 아주 분명하고 명백하게 논하시는 그 공개적인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을 육적인 언약으로 돌리며, 땅과 땅에 붙은 재물에만 언급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은 용납할 수없는 완악한 고집일 것이다.

 

20. 영생에 대한 예언자들의 증언

 

후기 예언자들에게 내려오면, 우리는 마치 우리 자신의 분야를 활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윗과 욥과 사무엘에 관해서 주장하는 점을 우리가 쉽게 증명했다면, 예언서들에서는 그 증명이 훨씬 더 쉽다. 주께서는 자비의 언약을 실행하실 때에 질서 정연한 계획에 따르셨다. , 세월이 흘러 완전 계시의 때가 접근함에 따라 주께서는 날마다 계시를 더욱더 빛나게 하셨다. 따라서 맨 처음에 아담에게 구원을 약속하셨을 때에는(3:15), 그것은 미약한 불꽃이 비치는 정도였다. 그 후에 점점 빛이 더욱 밝게 되어 더욱 강하고 더욱더 넓게 광채를 퍼뜨렸다. 드디어 모든 구름이 흩어지고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전세계를 완전히 비추셨다(참조, 4) 우리는 우리의 논점을 예언자들이 지지하지 않으리라는 의구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나는 우리 앞에 거대한 산림같이 많은 자료가 나타나는 것을 본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이 책의 체재를 많이 벗어날 정도로 논해야 하겠고, 그렇게 한다면 이 문제만으로 큰 책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오솔길을 표시해 놓았으니, 어지간히 총명한 독자라면 그 길을 따라 이 산림 속을 무사히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많은 말을 하지 않겠다.

그러나 내가 전에 그들에게 쥐어준 열쇠를 써서 앞길을 열어 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독자들에게 미리 경고하겠다. , 믿는 백성의 행복을 선지자들이 말하며, 그런 행복을 현세에서는 흔적조차 보기 어려울 때마다 독자들은 그들의 특색에서 피난처를 구해 야 한다. ,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욱 잘 추천하기 위해서 그 인애를 현세에서 받는 혜택의 모양으로 백성에게 이를테면 그려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린 그림은 백성의 마음을 들어 올려, 땅을 초월하며 이 세상 초등 학문과(참조, 4:3) 멸망해 가는 세대를 초월하게 만들었다. 그 그림은 필연적으로 그들이 장차 올 영적 생명의 행복을 깊이 생각하도록 각성하리라고 기대한 것이다.

 

21. 에스겔서에 있는 마른 뼈의 골짜기

 

우리는 예를 하나만 들겠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 그들은 이 민족 분산이 죽음과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민족 부흥에 대한 에스겔의 예언은 한 우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서 이 그릇된 생각을 버리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예언자의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썩어가는 시체들이 다시 살게 되리라는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이런 어려움이 있더라도 주의 은혜는 여전히 있으리라는 것을 증명하시고자, 예언자에게 마른 뼈가 가득한 지면의 환상을 보이시고, 오직 말씀의 능력으로 일순간에 그 뼈들에 생명을 불어넣어 자라게 하시는 것을 보이셨다(37 :1-14). 참으로 이 환상은 당시의 회의를 시정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동시에 주의 권능이 유대 백성의 부흥뿐 아니라, 훨씬 그 이상의 일을 하신다는 깊은 인상을 유대인들에게 주었다. 간단한 명령으로 흩어진 마른 뼈들을 살려 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스겔의 말과 이사야에 있는 구절을 비교할 수 있다."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놓으리로다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 보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 땅이 그 위에 잦았던 피를 드러내고 그 살해당한 자를 다시는 가리우지 아니하리라"(26:19-21).

 

22. 다른 예언서들에서 부가한 구절들

 

혹 누가 모든 다른 구절들도 이런 식으로 해석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구절들은 사람들을 위해서 준비된 미래의 영생이 하나님 나라에 있다는 것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런 구절들을 우리는 몇 개 설명했지만, 다른 구절들도 대개 같은 뜻이며, 특히 여기서 인용하려는 두 구절이 그러하다. 하나는 이사야서에 있다. "나의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같이 너희 자손과‥‥‥항상 있으리라‥‥‥매월삭과 매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하리라 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66:22-24). 또 한 구절은 다니엘서에 있다. "그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12:1-2).

 

23. 요약과 결론 : 영생 문제에서 신구약은 일치한다

 

아직 두 가지 점이 남았다. , 구약의 조상들은 그리스도를 언약의 보증으로 소유하였고, 미래의 행복은 그에게 있다고 전적으로 믿었다는 사실이다. 둘은 비교적 분명하고 논쟁할 여지도 적기 때문에, 우리는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모든 술책으로도 공격할 수 없는 한 원칙을 담대히 견지하겠다.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구약, , 옛 언약은 땅에 붙은 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영적 생명에 대한 약속을 포함했다는 것이 우리의 원칙이다. 이 언약에 참으로 찬동한 사람들은 모두 그 마음에 이런 생명에 대한 기대가 깊이 새겨져 있었다. 어떤 자들은 주께서 유대 백성에게 약속하신 것 또는 그들이 추구한 것은 배가 부르는 것, 육의 즐거움, 불어가는 재물, 외면적인 권력, 번성하는 자손, 기타 자연인이 갈망하는 모든 것뿐이었다고 하지만, 우리는 이 위험스런 사상을 물리친다. 주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에게 지금 약속하시는 "천국""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식탁에 앉는" 천국에 불과하다(8:11). 베드로는 당시의 유대인들을 향해서, 그들은 복음의 은총을 상속할 자들이라고 선언하며, 그 이유로서 그들은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옛날에 자기 백성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에 포함되었다고 말했다(3:25). 주께서는 이 일을 말로만 증거하시지 않고 행동으로도 인정하셨다. 부활의 순간에 주께서는 많은 성도들을 자기의 부활에 참가할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셨고, 그들이 예루살렘 시내에서 보도록 하셨다(27:52-53). 이렇게 하심으로써 주께서는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 자기가 하신 일과 겪으신 고난은 우리들과 똑같이 구약 시대의 신자들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확실히 보증하셨다. 참으로 베드로의 증언과 같이, 우리를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신 믿음의 영을 그들도 받았다(15:8). 우리 안에서 영생 불사의 불티와 같으시며, 따라서 다른 곳에서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고 한(1:14) 그 성령께서 그들 속에도 마찬가지로 계셨다는 뜻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찌 그들에게서 생명의 상속을 감히 빼앗을 것인가? 옛날 사두개파가 부활과 영혼의 존재를 부정할 정도로 어리석었다는 것은(22:23; 23:8) 이 두 가지 교리를 성경이 이미 분명한 증언으로 인친 후였으므로, 더욱 놀라운 일이다.

지금 유대 민족은 전체적으로 메시아의 지상적 왕국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들이 복음을 거부하기 때문에 이 형벌을 받으리라고 성경이 벌써 예언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우둔함은 사두개파에 못지않게 해괴할 것이다. 제시된 하늘 광명을 거부하고 고의로 암흑을 덮어쓰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심판을 내리셔서 그 마음을 어둡게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모세를 읽으며 항상 그의 글을 깊이 생각하지만, 그들의 눈을 수건이 가리워 그의 얼굴에 있는 빛을 보지 못한다(고후 3:13-15). 그래서 그들은 지금 모세의 얼굴을 그리스도에게서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떼어놓으려고 하지만, 모세의 얼굴은 그리스도에게로 돌릴 때까지 그들에게 항상 가리워 있으며 숨겨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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