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장 그리스도는 중보자의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인간이 되어야만 했다
(중보자가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이 되셔야 한 이유들. 1-3)
1.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신 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공간을 연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중보자가 될 분이 동시에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인 것이 우리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럴 필요는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보통 말하듯이) 단순한, 즉, 절대적인 필연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일은 인간의 구원을 좌우하는 하늘 결정에서 유래했다. 우리의 지극히 자비하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장 최선의 길을 결정하신 것이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가리워진 구름과 같이,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천국에서 완전히 격리해 버렸기 때문에(참조, 사 59:2),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면 평화를 회복할 중재자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누가 하나님에게 도달할 수 있었겠는가? 아담의 후손 중의 하나인가?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은 그 조상과 같이 모두 하나님을 보면 공포에 떨었다(창 3:8). 천사 중의 하나였는가? 그들도 우두머리가 있어야 했으며, 그의 연줄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견고하게 붙어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참조, 엡 1:22, 골 2:10).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께로 올라갈 힘이 우리에게 없으므로 존엄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강림하시지 않았다면 사태는 확실히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되시며(사 7:14, 마 1:23),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의 신성과 우리의 인성이 서로 연결되어 함께 성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바라기에는 친근감이 충분히 가깝지 못하며 친밀함이 충분히 견고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더러움과 하나님의 완전한 순결 사이에는 그만큼 큰 차이점이 있다. 사람이 본래대로 아무 오점도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처지는 중보 없이 하나님에게 도달하기에는 너무도 비천했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현상은 어떠한가? 치명적인 타락으로 죽음과 지옥에 떨어졌고, 무수한 오점과 부패로 더럽혔고 모든 저주로 압도되었다. 그러면 바울이 중보를 설명하면서, 그는 사람이라고 분명히 지적하는 것은 훌륭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사도는 "하나님이신"이라고 할 수도 있었고, 적어도 "하나님"이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과 같이 "사람"이라는 말도 생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신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적당한 순간에 가장 적당한 대책을 쓰셨다. 즉,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와 같은 한 사람으로서 친근하게 우리 사이에 두셨다. 그러므로 중보를 어디서 찾을까, 어느 길로 그에게 가야 하는가 하고 근심하는 사람이 없도록, 성령께서는 그를 "사람"이라고 부르시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다는 것과 참으로, 우리와 같은 육신이시므로 우리와 접촉해 계시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분명히 성령이 여기서 가르치시는 뜻은 다른 곳에서 더 자세히 설명된 것과 같다. "우리에게 있는 대 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못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2. 중보자는 참 하나님인 동시에 참된 인간이어야만 한다
이 점은 중보자가 성취하려고 한 것이 비상한 일이었음을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그의 임무는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시킴으로서 사람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지옥의 상속자들이 천국의 상속자들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자가 되시지 않았다면, 또 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것을 취해서 자기 것을 우리에게 주시며, 본질상 그에게 속한 것을 은총으로 우리 것으로 만들지 않으셨다면, 누가 중보의 그 임무를 다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보증을 신용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는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난 아들이 우리의 몸을 취해서 자기 몸을 만드시고, 우리의 살로 자기의 살을, 우리의 뼈로 자기의 뼈를 만들어, 우리와 하나가 되셨기 때문이다(엡 5:29-31, 창 2:23-24). 그는 자기 것을 우리에게 주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동시에 우리와 같은 사람의 아들도 되시려고, 쾌히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다. 그래서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말씀하시면서, 저 거룩한 형제 관계를 친히 칭찬하신다(요 20:17). 이와 같이 우리는 천국 상속의 확약을 받았다. 천국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독생자의 것인데, 그가 우리를 자기의 형제로 삼아주셨기 때문이다. "형제면 또한 그와 함께 후사기 때문이다"(롬 8:17 의역)
똑 같은 이유로, 우리의 구속자가 되실 분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의 임무는 죽음을 삼켜 버리는 것이었다. 생명이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의 임무는 죄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의 자체가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의 임무는 세상과 공중(空中)의 권세들을 괴멸시키는 것이었다. 세상과 공중보다 더 높은 권능이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생명이나 의나 하늘 주권과 권위는 하나님에게만 있지 않고 어디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지극히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기로 정하셨을 때에, 자기의 독생자를 통해 친히 우리의 구속자가 되셨다(참조, 롬 5:8).
3. 오직 참 하나님이시며 참된 인간이신 분만이 우리 대신해서 순종할 수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한 두 번째로 요구되는 조건이 있었다. 즉, 불복종으로 멸망한 사람을 바로 고쳐서 불복종을 순종으로 하나님의 심판대로 이행하며, 죄에 대한 형벌을 받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 주께서는 참 사람으로 나타나시며 아담의 몸과 이름을 취하셔서 아담 대신에 아버지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대로 이행하는 값으로서 우리의 육신을 바치시며, 같은 육신으로 우리가 받을 벌을 받으셨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만으로서는 죽음을 느낄 수 없으며, 인간만으로서는 죽음을 정복할 수 없겠으므로, 인성과 신성을 결합하셔서 죄를 대속하는 데는 약한 인성을 죽음에 내어 주고, 다른 본성의 권능으로 죽음과 싸워 우리를 위해서 승리를 얻으려고 하셨다.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인성을 박탈하는 자들은 그의 존엄성과 영광을 감축하거나, 그의 인애를 희미하게 만든다. 동시에 그들은 이런 방법으로 사람들의 믿음을 약화하며 전복시키므로, 인간에게도 적지 않은 해를 준다. 믿음은 이 토대 위에서 안정하지 않으면 굳게 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밖에 대망했던 구속자는 하나님이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약속하신 분, 즉, 다윗의 후손이어야 했다. 이 일은 경건자들에게 혜택을 더한다. 그가 다윗과 아브라함의 후손이셨기 때문에 그들은 그가 무수한 신탁이 환영한 그 기름부음을 받은 분임을 더욱 확신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방금 설명한 점을 특히 지지해야 한다. 즉, 우리와 그리스도가 본성이 같다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교제한다는 보증이며, 우리의 육신을 입으신 그가 죽음과 죄를 모두 정복하셔서 그 승리와 개선(凱旋)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서 받은 육신을 제물로 바치셔서 그 대속 행위로 우리의 죄를 씻어 버리시며 하나님의 의로우신 진노를 진정시키셨다.
(이 교리에 대한 반대론에 대답한다. 4-7)
4. 그리스도의 성육신되신 유일한 목적은 우리의 구원이다
이런 문제들을 주의 깊게 연구할 때에 필요한 근면하고 주도면밀한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경박한 자나 신기한 것을 추구하는 자를 매혹하는 허망한 사변을 쉽게 버릴 것이다. 이런 사변의 예를 들면, 인류를 구속할 필요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는 역시 인간이 됐을 것이라는 것이다. 창조된 처음의 질서와 아직 타락하지 않은 자연 상태에서 그리스도가 천사와 사람의 우두머리로 그들 위에 위치하셨다는 것을 나는 물론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를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골 1:15)라고 부른다. 그러나 모든 성경이 그는 우리의 구속자가 되려고 육신을 입으셨다고 선포하므로, 다른 이유나 다른 목적을 상상하는 것은 경솔한 짓이다. 무슨 까닭에 처음부터 그리스도가 약속되었는가를 우리는 잘 안다. 타락한 세계를 재건하며 멸망한 인류를 구원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에서 희생 제물로 그리스도의 형상이 표현되었으며, 신자들의 죄가 대속되고 하나님이 그들과 화해하신 후에 그들에게 은총을 베푸시리라는 희망을 주려고 했다. 율법이 아직 발표되지 않은 때에도, 어느 시대에나 피 흘림 없이 중보가 약속된 일이 없으므로, 그는 인류의 불결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으로 임명되셨다고 우리는 확실히 추론한다. 피를 흘리는 것은 속죄의 증표이기 때문이다(참조, 히 9:22). 그래서 예언자들은 그를 선포할 때에 그가 하나님과 사람을 화해시키리라고 약속했다. 여기에 대한 모든 증언 가운데서 이사야의 유명한 말을 들면 충분할 것이다. 백성의 죄악을 인하여 그는 하나님의 손에 맞으며 평화의 징계가 그에게 내리며(사 53:4-5), 그는 대제사장이 되어 자기를 희생 제물로 바치고(히 9:11-12), 그가 맞은 채찍으로 다른 사람들이 나음을 얻게 되며, 모두 양같이 그릇 행하여 흩어졌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괴롭혀 모든 사람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시리라고 한다(사 53:5-6). 가련한 죄인들을 돕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자신을 임명하셨다고 하므로, 이 범위를 넘는 사람은 어리석은 호기심에 너무도 깊이 빠진 것이다.
그리스도가 친히 나타나셨을 때에 자기가 강림하신 이유를 설명하셨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킴으로써 우리를 모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려는 것이라고 하셨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와 똑같은 증언을 했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요 1:14)고 가르치기 전에 인류의 반역을 말한다(요 1:9-11).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이 자기의 직책에 대해서 선언하신 것에 특히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리라"(요 5: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마 18:11).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마 9:12). 모든 구절을 인용하려면 끝이 없을 것이다.
사도들은 한결같이 우리를 불러 이 원천으로 돌아가게 한다. 확실히, 만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면, 그의 명예로운 제사장직은 없었을 것이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를 중재하는 중재자로서 임명되기 때문이다(히 5:1). 또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가 아니실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시지 않기 위해서(고후 5:19) 우리를 위한 희생이 되셨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리스도는 성결이 그에게 드리는 모든 칭호를 잃으실 것이다.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을, 즉, 우리를 위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죄 많은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셨다고 하는(롬 8:3-4) 바울의 발언도 소멸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자로서 오셨을 때에, 이 거울에서 하나님의 인애와 무한한 사랑이 사람들에게 나타났다고(참조, 딛 2:11) 바울이 다른 곳에서 가르치는 것도 허사일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육신을 취하기로 결심하시며, 아버지에게서 이 명령을 받으신 유일한 이유로서,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아버지의 진노를 푸는 희생이 되시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또 그의 이름으로‥‥‥회개가‥‥‥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6-4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10:17, 15,18).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요 3:14). 또 다른 구절에서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당신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27-28,23절과 융합)라고 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자기가 육신을 취하신 이유를 분명히 알리신다. 즉, 우리 죄를 소멸시키기 위해서 희생과 속죄 제물이 되시려는 것이라고 하신다. 같은 의미에서 사가랴도 그리스도는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눅 1:79) 족장들에게 하신 약속대로 오셨다고 단언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말씀임을 우리는 알며, 바울이 다른 곳에서 증언하듯이, "그의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으며"(골 2:3), 그를 떠나서는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바울은 자랑한다(고전 2:2).
5. 만일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래도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셨을 것인가?
혹 누가 항의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정죄된 인간들을 구속하셨지만, 구원을 받아 안전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사람의 육신을 취하심으로써 그 사랑을 나타내시는 것을 이 모든 일은 방해 않는다고 한다면 그 대답은 간단하다.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에 의해서 이 두 가지가 결합되었다고 성령이 선언하시므로, 어떻게 그리스도가 우리의 속죄주이신 동시에 우리의 본성의 동참자가 되셨는가를 더 탐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명령으로 만족하지 않고 무엇을 더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우리가 속죄를 얻는 대가로서 우리에게 주신 이 그리스도에도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인다. 참으로, 바울은 그리스도가 파견되신 목적을 설명할 뿐 아니라, 예정의 고원한 신비에까지 솟아올라가서, 인간성의 모든 방자함과 경망한 호기심을 적절한 말로 억제한다. "아버지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그 기쁘신 뜻대로‥‥‥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며"(엡 1:4-5),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를 받을 만한 자로 만드셨으며(엡 1:6), "우리는 그리스도 잔에서‥‥‥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았다"고 한다(엡 1:7). 여기서는 확실히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작정보다 시간적으로 앞섰다고 전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타난 일은 모든 시대 이전에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며, 그 때에 하나님이 인류의 불행을 고쳐 주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가령 우리의 대적자들이 다시 항의해서, 하나님의 이 계획은 그가 예견하신 인류의 타락에 좌우된 것이었다고 한다면, 내가 할 말은 이것이면 아주 충분할 것이다. 즉, 그리스도에 대해서 하나님이 비밀한 결정으로 정하신 일 이상의 일을 물으며 알려고 하는 사람들은, 불경건하고 외람된 생각으로 어떤 새로운 종류의 그리스도를 만들려고 덤빈다는 것이다. 또 바울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직책을 논한 다음에, 에베소 신자들이 깨닫게 하는 영을 받아(엡 3:14-17)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즉, "모든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되기를 원한다고(엡 3:18-19) 올바른 기도를 드린다. 그는 마치 우리 마음의 주위에 계획적으로 울타리를 치고, 그리스도가 화제에 오를 때마다 우리는 화해의 은총에서 조금이라도 떠나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미쁘다‥‥‥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임하셨다"라는 바울의 증언에 따라(딤전 1:15) 나는 기꺼이 이 일에 찬성한다. 또 같은 사도가 다른 곳에서, 지금 복음에서 계시된 은총은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라고 가르치므로(딤후 1:9) 나는 끝까지 항상 이 은총 안에 머무를 결심이다.
이와 같은 온건한 태도에 대해서 오시안더(Osiander)는 부당한 항의를 한다. 이전에 몇 사람이 간단히 언급한 이 문제를 그가 현대에 새로 일으킨 것은 불행한 일이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으로 나타나지 않았으리라고 하는 사람들을 그는 외람되다고 비난하며, 성경에 이 공상을 반박하는 증언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삼는다. 바울은 이런 도착된 호기심에 굴레를 씌우지 않았던가!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는 구속에 대해서 말한 후에 곧 우리에게 명령하기를 "어리석은 변론을 피하라"고 한다(딛 3:9). 어떤 사람들은 미친 듯이 날뛰며, 미련한 생각으로 재치를 보이고자, 하나님의 아들은 나귀의 본성을 취하실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까지 일으킨다. 경건한 사람들은 모두 당연히 이 해괴한 짓을 가증한 것으로 보아 타기하건만, 오시안더는 그것을 특별히 반박한 말씀이 성경에 없다는 구실로 변명하고 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귀중하거나 알 가치가 있다고 여기지 않은 바울은(고전 2:2) 나귀가 구주라고 인정했는가! 또 그는 다른 곳에서, 아버지의 영원한 계획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만물을 통일하는 머리로 임명되었다고 전파하니(엡 1:10, 22), 속죄 사역을 위임받지 않은 어떤 다른 머리를 그는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6. 하나님의 모습에 대한 오시안더의 주장
그러나 오시안더가 자랑하는 원칙은 전혀 보잘 것 없는 너절한 것이다. 사람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본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며, 아버지께서 육신을 입히기로 이미 결정하신 이와 사람이 같게 하려고 하신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출발해서 그는 추론하기를, 아담이 시초의 올바른 상태에서 결코 타락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는 역시 사람이 되셨을 것이라고 한다.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은 모두 이것이 얼마나 너절한 편견인가를 자연히 이해한다. 또 오시안더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자기가 처음으로 알아냈노라고 생각한다. 아담을 장식한 비상한 재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빛났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그의 안에 거하신 것이라고 한다.
아담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한(이것은 진정하고 가장 완전한 존엄성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모든 다른 생물보다 뛰어난 우수성의 표지들을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점에서만 이 형상을 찾아야 된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그 때에도 하나님의 형상이었다고 모든 사람이 일제히 인정한다. 따라서 아담에게 새겨진 우수성은 모두 그가 독생자를 통해서 창조주의 영광에 접근했다는 사실에서 왔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창 1:27), 하나님은 아담에게서 마치 거울에 비치듯이 창조주 자신의 영광이 보이기를 원하셨다. 아담은 독생자의 덕택으로 이렇게 높은 영예에까지 승진되었다. 그러나 나는 첨가한다. 아들 자신은 천사들과 사람들의 공통한 머리였다고. 이와 같이, 아담에게 부여된 존엄성은 천사들도 가졌다.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으면서(시 82:6), 그들이 그 아버지와 같은 어떤 성질을 받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영광이 천사와 사람에게서 나타나며, 그 두 본성에서 나타나는 것을 아버지께서 원하셨다면, 오시안더가 천사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없었으므로 사람보다 지위가 낮았다고 하는 것은 무지해서 지껄이는 말이다. 천사들이 하나님과 같지 않다면 항상 하나님을 직접 뷜 수 없을 것이다. 또 바울은 같은 뜻으로, 사람들은 천사들과 합하여 한 머리 아래서 서로 밀착해야만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새로워진다고 가르친다(골 3:10). 요컨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늘에 영접될 때에 천사들의 형태를 취할 것이며(마 22:30),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 행복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형상의 처음 모형은 사람인 그리스도에게 있었다는 오시안더의 추론을 허락한다면, 누구든지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형상이 천사들에게도 있었으므로, 그리스도는 천사의 본성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7. 오시안더에 대한 요점 하나하나에 대한 논박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아들의 성육신에 대한 확고부동한 결정이 없었다면, 하나님은 거짓말쟁이로 인정될 수 있다는 오시안더의 걱정은 아무런 이유가 없다. 아담이 끝까지 순전한 상태로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는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과 같았을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나 천사가 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다른 걱정도 근거가 없는 어리석은 것이다.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요지부동한 계획에 따라 그리스도가 속죄주로서가 아니라 처음 사람으로서 태어나시기로 되지 않았다면, 그는 그의 특권적 지위에서 떨어졌으리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멸망한 인류를 구해야 한다는 역사적 우연이 없었다면 태어나시지 않았을 것이며, 이것은 그가 아담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죄를 제하고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이 되셨다고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데(히 4:15), 오시안더는 무슨 까닭에 이 일이 무서워 떠는 것인가? 누가도 서슴지 않고 그리스도를 아담의 후손이라고 인정한다(눅 3:38). 또 아담의 후손들을 그리스도가 멸망에서 구출하도록 그의 인간 상태가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바울이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이라고(고전 15:47) 부르는 그 이유를 나는 알고 싶다. 그리스도가 창조 이전에 오셨다면 그는 첫째 아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오시안더는 분별없이 선언한다. 사람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미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를 모형으로 삼아 인류가 창조된 것이라고.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이라고 부름으로써 아담의 타락 사건을 자연을 회복할 필요성의 원인이된 이 타락 사건을 사람의 처음 창조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는 회복 사이에 둔다. 그러면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이 되려고 나셨다는 결론이 된다. 그런데 오시안더는 서툴고 부적당한 추리로 아담이 그대로 근직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아니라, 자신의 형상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대답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의 형상이 그의 몸과 영혼에서 빛났을 것이라고. 이 형상의 광채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참으로 만유의 머리시며 만유의 수위(首位)를 점유하신다는 것이 항상 명백하다. 그래서 우리는 오시안더가 퍼뜨리는 무익한 궤변을 배제한다. 아담의 죄가 없었더라도 하나님이 아들에게 육신을 입히기로 결정하시지 않았다면, 천사들에게는 이 두령이 없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궤변이다.
그런데 정신이 건전한 사람이라면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일에 오시안더는 경솔하게 달라붙는다. 그리스도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천사들에 대한 수위권이 없을 것이며, 천사들은 그를 지도자로서 즐기지 않을 것이라고 오시안더는 주장한다. 그러나 옳은 추리는 바울의 말에서 곧 나온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므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다(골 1:15). 이것은 그가 창조되었거나, 창조물 중의 하나로 계산되셔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에 가장 아름답게 장식되었던 그 완전 상태의 세계는 그 이외에 다른 기원(起源)이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사람이 되신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였다(골 1:18). 사도는 한 짧은 구절에서 두 가지 점을 생각하게 만든다. ⑴ 만물이 아들로 말미암아 창조되어 그가 천사들을 지배하시게 되었으며(골 1:16), ⑵ 우리의 구속자가 되시기 위해서 그는 사람이 되셨다고 한다(참조, 골 1:14).
오시안더의 다른 주장도 역시 그의 무지를 폭로한다. 그리스도가 사람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모실 수 없었으리라고 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인간의 육신을 입으시지 않았더라도 천사들과 사람들을 모아 자기의 하늘 영광과 생명을 나누게 하며, 스스로 만물 위에 수위권을 행사하셨는데, 그것으로는 하나님 나라가 성립하지 못하리라는 말인가! 그러나 오시안더를 항상 속이는 또는 그가 스스로 속는 그릇된 원칙이 있다. 곧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나타나시지 않았다면 교회에는 머리가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지도를 즐겁게 받고 있었는데, 그리스도는 무슨 까닭에 자기의 하나님으로서의 권능으로 사람들을 지배하시지 못하겠는가! 또 자기의 영의 비밀한 힘으로 자기 몸같이 사람들에게도 생명과 양식을 주어, 드디어 그들을 하늘에 모으며, 천사들과 똑같은 생명을 즐기게 하실 수 없겠는가!
내가 지금까지 논박한 이 너절한 생각들을 오시안더는 가장 확고한 말씀으로 여긴다! 자기의 사변에 도취되어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어리석게 찬양한다. 후에 그는 훨씬 확고한 증명이라는 것을 제시한다. 아담이 자기 처를 보았을 때에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한 말을(창 2:23) 그는 "아담의 예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오시안더는 이것이 예언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마태복음에서 그리스도가 같은 말을 하나님에게 돌리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하신 말씀에는 모두 어떤 예언이 포함되었다는 말인가! 율법의 교훈들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분명한즉, 오시안더는 그 교훈들에서 예언들을 찾아보라. 그뿐 아니라, 만일 그리스도께서 문자적인 의미에 자기를 국한하셨다면, 그것은 땅에 붙은 유치한 생각이었을 것이다(마 19:4-6).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시는 문제는 교회와 자기와의 신비적 결합이 아니라, 결혼 생활에서의 성실뿐이다. 그래서 부부는 한 몸이라고 하나님이 선언하셨다고 하며, 해소할 수 없는 이 결합을 아무도 이혼으로 해체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신다. 만일 오시안더가 이 단순한 뜻을 싫어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말씀을 더 미묘하게 해석해서 제자들을 신비 가운데로 인도하시지 않는다고 그가 비난하도록 내버려 두라. 그러나 바울은 오시안더의 망상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의 살이라고 말하고(엡 5:30-31) 즉시 "이 비밀이 크도다"라고 첨부한다(엡 5:32). 아담이 이런 말을 한 뜻을 말하려 하지 않고, 결혼을 한 비유로 삼아, 우리와 그리스도를 하나가 되게 하는 그 거룩한 결합을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이 점은 그의 말 자체에 나타나 있다. 그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서 말하노라고 하면서, 시정하는 의미에서 결혼의 원칙과 그리스도 대 교회의 영적 결합과를 구별한다. 이와 같이, 이 망령된 주장은 곧 사라진다. 그리고 나는 이런 너절한 생각들을 이 이상 더 상대 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이 아주 간단한 논박으로 그 모든 것의 허무성이 폭로되겠기 때문이다. 다음의 엄숙한 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양식을 넉넉히 주고도 남는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려 하심이라"(갈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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