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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현대사상사 요약 (칼바르트,불트만,본회퍼,몰트만,로잔회의,WCC,다원주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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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0세기
6.1 칼 바르트(1886~1968년)
1. 자유신학이 최종적으로 꽃피는 동안 독일에서 수학함. 부친은 보수적 신학자로 베를린에서 개혁신학을 배우도록 강요했으나 베를린, 튀빙겐 및 마르부르크에서 수학함.
2. 당시 대표적 자유주의 신학자들인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과 빌헬름 헤르만(Wilhelm Hermann)의 제자가 됨.
3. 개혁파 목사가 되어 1912년 스위스 자펜빌 교구를 맡음.
4. 진보와 이성에 대한 세속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유주의 신학 교리들을 발견치 못하고 인간 이성 또는 종교로 발견될 수 없는 신비로운 하나님, 즉 세상 이면에 계시는 목소리를 발견함. 성경의 하나님은 결코 예시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5.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에 대해 흥미롭고 빨리 전개되는 얘기를 읽을 수 있는데 그분이 누구시고, 무엇을 하시고, 세상에서 어떻게 행하시고 또 인류의 삶을 어떻게 바꾸시는지 알 수 있다.
6. 세계 1차 대전이 1914년 종전된 며칠 후 93명의 지성인들이 서명한 공개서신이 국가의 적대자들을 지지하는 내용으로 출판되었는데 바르트가 수학했던 자유주의 진학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르낙이 쓴 내용을 황제가 읽게 되면서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의 손과 도덕적 부도에서 돌아선다.
7. 새롭고 성경적 접근방법을 찾게 되면서 1919년 출판된 로마서 주석에 담는다. 1922년 개정판을 출판함.
8. 그가 말하는 하나님은 사람과 인간적인 것에서 질적으로 구별되는 분이시고 우리가 하나님으로서 명명하고, 경험하고, 예배드릴 수 있는 분으로 정의내릴 수 없다. ‘서라!’는 무조건적인 명령에 모든 인간이 힘들어 하지만 ‘진행하라!’는 무조건적인 말씀으로 쉼을 얻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니오!’라는 가운데 ‘예!’가 되시고 우리의 ‘예!’ 가운데 ‘아니오!’가되시고, 처음과 나중이시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들로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니신 알 수 없는 분(Unknown)이시다. 주님, 창조자, 구속자이신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9. 대학교 교수로서 조직신학의 분야를 전해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래서 기독교 교의학을 1927년에 썼지만 지속하지 않고 대신하여 교회 교의학을 1932년부터 쓰기 시작함.
10. 하나님 ― 로마서에서 묘사한 하나님의 타자성(otherness)에 대한 심오한 감각과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바르트 신학의 하나님은 인류 너머에 계시면서 측량할 수 없고 공통점이 전혀 없는 분으로 초월하시는 하나님(Transcent God)으로서 그분을 말한다.
11. 하나님께서 발견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발견케 하시는 키르케고르 주장에 영향을 받았지만 인격적 경험과 주관성을 강조하는 그를 거절한다.
12. 기독교교의학에서 거부했던 이성은 실존주의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게 한다.
13. 모든 인성이 공유하는 하나님에 대한 감정을 우리가 가질 수 있다는 슐라이어마허의 주관적 신앙을 거절한다. 그의 위대성을 인정하지만 선한 어떤 것도 발견치 못한다.
14. 계시 ― 하나님께서 단순히 ‘아니오!’라고 말하지만 동시에 ‘예!’가 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하나님에게 우리는 이르지 못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내려오셔야 한다. 결국 우리는 계시를 통해서만 그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15. 바르트 신학은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오는 하나의 계시이다. 성경과 교회의 교훈을 통해서 중재될 수 있기에 성경과 교회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불릴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 길이다. 이 말은 성경의 역사적 환경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16. 그리스도와 구원 ―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모든 지식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데 그리스도는 인성으로 오신 하나님 바로그분이시다.
17. 그리스도의 다양한 이름들과 표현들을 신약성경이 사용한다고 지적하고 하나님과 인류 간에 중재하시는 동적인 방법을 파악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18. 그리스도 안에서 무력하게 되신 하나님의 목적은 구원키 위함이고, 이것을 전통적이고객관적 용어로 표현한다. 하지만 그는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강조하므로 속죄에 대한 주관적 견해들에 받은 영향을 인정한다: “속죄의 핵심은 죄를 극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반대하여 일으킨 인간의 모반으로 죄를 성격 지을 수 있고 또 죽음 가운데 인간의 소망 없는 운명의 근거로 성격 지을 수 있다.
19. 기독교 신학에 끼친 그의 영향은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으로 엄청나다.

6.2 루돌프 불트만
1. 1884년 올덴부르크에서 태어났고 그의 부친, 조부, 증조부 및 고조부 등 모두 루터란 목사였다. 그는 튀빙겐, 베를린 및 마르부르크에서 신학을 수학했고 그곳에서 빌헬름 헤르만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헤르만은 자유신학 옹호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2. 신학자라기보다 신약성경 학자로서 초기 주요한 작품은 공관복음 전통사(1921)였다. 그 안에서 형식주의 비평 접근방법을 복음서 연구에 적용시킨 선구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3. 예수님의 기록된 교훈 대부분이 그분 안에서 기원을 가질 수 없지만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의 삶에서 기원을 둬야한다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삶의 가장 사실 그대로의 개요보다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19세기 자유주의자들과는 정반대로 그는 신약성경 안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들과 기적들의 역사를 확신할 수 없다고 했다.
4. 3가지 이유로 자유주의 질문을 반대했다.
① 복음서들에 대한 그의 회의적인 접근방법은 예수님의 역사적 그림을 재 구성할 수 없다. 역사적 예수님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을 가지고 삶을 기록할 수 없다.
② 역사적 예수님의 지식은 필요치 않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사셨고 죽으셨다는 역사적 기반 보다 더 확고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불트만은 키르케고르의 견해를 받아들인다.
③ 역사적 예수님에 대한 흥미는 실제로 불법적이다. 그는 역사적 예수님에 대해 바울이 더 이상 흥미를 가지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육체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않기도 한다는 바울의 선언(고린도후서 5:16)을 택한다.
5. 역사에서 예수님을 찾으려는 자유주의자들의 질문을 거절하고 바르트와 관계를 끊었다. 그는 자유주의 질문을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 회의주의의 극단적인 형태로 대신했다. 이런 견해는 1950년대 역사적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질문이 시작할 때에 이를 때까지 독일에서 주도적이었다.
6. 그는 비신화화하려는 프로그램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바르트가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했지만 불트만은 바르트가 크게 무지했던 이슈에, 즉 해석학에 매달렸다.
7. 불트만이 보기에 해석자의 문제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신비적 세계관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천사들, 악마들 및 이적들과 같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신앙을 ‘3층’ 우주를 의미한다. 이런 세계관은 신약성경 저자들이 가졌던 것이다.
8. 비신화화를 위한 그의 해결책은 신약성경의 신비적 설명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의 목적은 신약성경의 신화를 해석하는데 특별히 실존주의적 해석을 신화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9. 그런 실존주의적 해석은 복음서의 실제 스캔들을 현대인에게 제시하고 진부한 세계관의 방해물을 무시한다.
10. 비신화화를 위한 형식 비평주의(form-criticism) 그의 방법론은 세 가지 단계로 나눈다.
① 첫 번째 단계: 성경의 단편들을 나누는 작업
② 두 번째 단계: 나뉜 단편들을 분석하는 작업
③ 세 번째 단계: 분석된 단편을 함께 조합하는 작업
11. 결국 그는 성경의 본질을 격하시켰다. 불트만은 현대 세계관을 규범으로 채택하는 비판을 받고 성경이나 기독교 메시지를 그것에 모순되는 것으로 허용한다.

6.3 디트리히 본회퍼
1. 1906년 블레슬라우에서 태어나서 1945년 4월 9일에 나치정권 하에 플로센부르크에서 처형을 당해 죽었다.
2. 튀빙겐 대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아돌프 폰 하르낙, 제베르크 및 리츠만 아래서 배웠다. 또 바르트와 관계도 가졌다.
3. 미국교회와 신학을 배웠고 1929년 나치 독재자에 반대하여 저항하기 시작했다.
4. 히틀러 암살기획이 실패하자마자 독일 비밀경찰에 검거되고 처형당했다.
5. 그의 신학은 두 범주로 나뉠 수 있다. 잡히기 전 ① 칼 바르트의 신학 사상의 영향으로 정통을 고수했다. ② 신학의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세속세상, 종교성 없는 인간 및 하나님이 명령하신 경건성: 하나님 앞에서 그분 없는 삶과 그분과 함께 하는 삶.
6. 그의 사상은 ① 성년에게는 하나님이 필요없다. 필요하다면 사람 너머 있는 분이 아닌 사람 가운데 있는 하나님, ② 구원은 죽음 후가 아니라 세상에서 고난에서부터 구원받을 대이다. ③ 기독교는 하나님의 존재론적 개념이 아니라 실천적 기독교의 개념이다. ④ 교회의 임무는 개인적 구원이 아니라 사회적 구원이다. ⑤ 부활에 대한 그의 개념은 역사적 차원에서만 제한되어야 한다. 부활에 대한 소망은 미래에 있는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6.4 라인홀드 니부어
1. 1892년 미국 미주리 주에서 태어나 부친의 교파에서 운영하는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신학교에서 수학했다. 1913년 그는 고향 교회의 목회를 맡았고 부친을 대신하였다.
2. 그는 디트로이트에 있는 베델 복음교회의 담임을 맡기 전 예일신학원에서 2년 공부했다. 뉴욕에 있는 유니언 신학교에서 가르쳤다.
3. 사회복음 운동에 관련되었고 기독교인의 기치성에서 사회개혁을 위해 힘을 쏟았다.
4. 부유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 간에 또 중산계층과 노동자 간에 문제를 해결하는데 자유주의를 통해서는 불가능하다고 알았다.
5. 도덕적 인간과 불멸의 사회, 급진적 종교, 기독교인과 위기와 같은 작품들을 남겼다.
6. 그는 신학자라기보다 사회 윤리가였다. 종교가 문명을 윤리적으로 만들지 못했기라기보다 지성적 체면을 유지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현대 더 많은 사람들이 비종교적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7. 슐라이어마허와 그의 자유주의 후계자들이 기독교를 지성적으로 신빙성 있도록 만들려했던 시도들이 시간을 허비하는 것과 같았고, 이와 유사하게 바르트와 불트만의 대륙 변증법 신학이 한 편으로나 다른 편으로 기독교 교리를 다시 설명하려는 임무를 전적으로 맡은 것처럼 보인다고 비평했다.
8. 니부어에게는 어떤 기독교 사상의 출발점은 인간성임이 틀림없다. 그는 전적으로 항상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바르트와는 자유주의 전통에 더 가깝고 그와는 너무나 달랐다.
9. 그는 제한적이고 기만적인 염세적 상황을 직면한 인간적 조건을 보았지만 인간성과 문명의 과정에 대한 자유주의 낙관주의에 동의하지 않았다.
10. 실제로 죄라는 것보다 더 크게 자신을 높이려는 교만과 시도를 본질적으로 죄라고 그는 여긴다. 죄는 사회적 현상이지 개인적 현상이 아니다.
11.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달리 그는 인간적 수단으로 인해 부서졌기에 죄성적 순환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고 이와는 다르게 우리 자신의 수단으로 사회에 일어난 모든 것이 힘에 의존적으로 달려 있는 체제이기에 억압이 최소한으로 억압하지만 사랑과 자기희생에 강조하므로 종교가 사회에 있는 죄성적 순환을 잠재울 수 있다고 한다.
12. 그는 인간적 조건을 극복하기 위한 종교의 힘에 이상적으로 강조하는 것과 그 조건에 대한 염세적인 분석을 결합한다.

6.5 폴 틸리히
1. 1886년 독일 브란덴부르크 지역에서 루터란 목회자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베를린, 튀빙겐, 할레 및 브레슬라우대학교에서 수학했다.
2. 제 1차 세계 대전 중 군목으로 활동했고 1919년부터 그는 베를린, 마르부르크,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및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가르쳤다. 1933년 그는 니치당으로 인해 해체 당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서 유니언 신학교에서 철학적 신학 교수가 되어 1955년 은퇴할 때까지 가르쳤다.
3. 그는 196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하버드와 시카고 대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는 자신의 걸작 3권으로 구성된 ‘조직신학’을 1951~1963년에 썼다.
4. 그는 정통을 반대했고, 더 이상 유용하지 못한 현대적 상황에 신학을 설명하고 과거의 것에 대해 설명했던 신학을 정통이 취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원한 진리에 대한 특별하고 일시적인 표현과 그 진리를 혼동한다고 비난했다.
5. 또 그는 바르트와 다른 사람들의 ‘케리그마 신학’(kerygmatic theology)을 반대했다. 그 이유는 이 신학이 성경이나 일시적 상황과 복음서의 불변적 메시지를 단순히 일치시키려는 실수를 피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케리그마 신학의 불균형이 변증 신학으로 수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신학이 변증학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6. 변증신학은 서로에게 어떤 것을 주지 않고 영원한 메시지와 당시의 상황을 연결 지으려는 방법, 즉 기독교 메시지를 그 독특한 성격을, 즉 메시지를 본문에 적용시키는데 필요한 유용성을 상실하지 않은 채로 현대정신에 채택하는 방법을 ‘상호관계의 방법’(method of correlation)이라 불리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7. 그는 자신의 신학을 현대적 삶에서 나타난 질문들에 대한 연속적인 답변들로 나타낸다. 그렇지만 그의 대답들은 현대사상, 즉 실존주의의 언어로 확실하게 표현한다.
8. 키르케고르처럼 하나님에 대해 말하길 그는 삶이 실패되거나 해결될 수 없는 모순들과 역설들에 대한 모든 것이라는 통찰력으로 시작한다.

① 기독교 신앙에 대한 그의 해설은 현저하게 철학적이다. 성경적 구절들은 조직신학에서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우리에 관심을 가지는 분’ 또는 ‘우리 존재의 근거’로 나타낸다. 하나님은 존재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존재(a Being)가 아니고 실존의 능력 또는 존재의 힘으로서 비존재(non-being)를 우리가 극복하도록 하는 존재 자체(Being-itself)이다.
② 자신의 관점이 아퀴나스의 견해와 동일하다고 하는데 아퀴나스는 하나님께서 타인들 가운데 있는 한 존재가 아니고 실존과 본질 간에 구별도 없다고 한다. 이에 반해 그의 신학은 아퀴나스보다 추상적이라 할 수 있다.
③ 기독교의 위대한 교리들이 ‘상징들’인데 예를 들면, 하나님의 개념을 창조주로, 구속자로서의 그리스도의 개념으로, 본다. 이런 전제로 그는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상징이 하나님께서 존재 그 자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비존재의 파괴적인 능력 너머로 우리를 밀어내고 우리를 우리의 유한성을 극복하도록 한다.

9. 죄와 구원은 동일한 동전의 양면으로서 삶의 극도의 반대들이 결코 화해될 수 없는 본질적 신앙을 반영한다. 그것들은 항상 서로 긴장 가운데 존재한다. 그에게서 ‘죄’와 ‘구원’은 상징들이다.

① 존재와 비존재의 긴장은 우리 자신으로부터와 피할 수 없는 심리적 결과, 즉 범죄, 고독 및 무의미로부터 소외를 일으키는 것이다.
② 새로운 존재라 불리는 것의 외모로서 구조를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삶의 새로운 방법이다. 본질과 실존 간에 빈곳을 정복하면서 존재의 조건들 아래 있는 존재이다.

10. 개인적 삶에서 소원의 극복을 완전하게 일으킬 수 없다면 무의미한 것이라 한다.

① 이것은 그리스도의 역사적 실재가 구원을 위한 사역에 본질적인 것이라는 의미다.
② 예수님이 역사적 실재의 구심점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을 매개체로 하여 드러난 ‘새로운 존재’로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을 관련시키는 ‘그리스도의 사건’(Christ-event)을, 즉 그분의 삶, 죽으심 및 그 이후의 삶과 같은 연결된 사건들이고, 추종하는 자들 안에서 새로운 존재를 깨달아야 하고, 그리고 신약성경 문서들의 작품이다.
③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 모습 없이 구원도 없지만 그 모습이란 그분 주위에서 일어나는 또 메시지를 모습으로 변화시키고 그분을 해석한 믿음의 공동체 없이 어떤 중요성도 가지지 않는다.
④ 구원이란 실제적인 것으로 우리를 실제로 변화시킨다. 이것은 믿음 안에서 지속적으로 갱생되어야 한다. 역사적 인간인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이 보내셔서 새로운 존재를 가져온 분이다.

11. 노스 와잇헤드(North Whitehead, 1861년 2월 15일~1947년 12월 30일)와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년 5월 18일~1970년 2월 2일)은 1920년대 ‘본체들’에 대한 모든 것인 전통적 형이상학을 철폐하고 도 과정이란 개념으로 대신하자고 제안했다.
12. 과정신학의 본질은 때와 우주와 관련된 하나님의 계시를 바라보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높은 탑에서부터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처럼 역사를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을 ‘외부의 시간’(outside time)으로 묘사한 것처럼 과정신학자들은 하나님을 ‘내부의 시간’으로 묘사하므로 보다 구조적으로여긴다. 하나님은 세상 안에 있는 연속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13. 과정신학은 하나님이 변화와 사건의 세계에서 파악될 수 없는 분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은 불변하시고, 그분은 고통당할 수 있고, 그리고 어떤 형이상학으로 중요한 방법으로 우주를 초월하시는 분이 아니다. 이 말은 세상에서의 그분의 능력과 지식은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14. 과정신학의 강점은 부분적으로 성경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특별히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일들을 행하는 능동적인 성격이심을 과정신학 지지자들은 지적한다.

6.6 해방신학
1.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은 최근 수십 년간 기독교사상에서 가장 눈부신 발전들 중 하나였다. 서방신학의 교리적 망상들에 대한 발전하는 세계의 반응으로 여겼다.
2. 해방신학은 1960년대와 1970년대 남아프리카에서 발전되었다. 이 신학은 그 대륙의 가난한 자들이 견디는 무시무시한 조건들에 대한 반응이었다. 후안 루이스세군도(Juan Luis Segundo, 1925년 3월 31일~1996년 1월 17일)와 같고 특히 페루인 구스타보 구띠에레스(Gustavo Gutiérrez, 1928년생)와 같은 ‘신신학자들’(New Theologians)은 교리보다 실천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3.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기독교사상은 실존의 기반, 가난한 자들의 해방의 경험 안에서만 발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성경은 수많은 가난한 자들과 고통 받고 노동하는 계층의 사람들과 동일시하려는 행위의 하나님을 그들에게 자유를 주시는 분으로 생각한다.
4. 남아메리카의 해방신학자들은 거의 로마 카톨릭적이었고, 1980년대 그들은 자신들이 마르크스주의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바티칸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해방신학은 공산주의 유물론과 무신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신학은 마르크스주의와 친밀하기 때문에 공산주의와 연관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5. 해방신학의 메시지는 온 세상에 심금을 울렸다. 특별히 북아메리카에서 활동하는 디오티스 로벗(J. Deotis Roberts)과 제임스 콘(James Cone, 1938년 8월 5일생)은 그리스도의 ‘검음’(blackness)에 대해 말한다. 해방신학은 미국에서의 ‘여성신학’(femninist theology)로서 표현되었고 한국에서는 ‘민중신학’(Minjung theology)로 표현되었다.
6. ‘상황신학’(contextual theology)은 남아프리카 형 해방신학이라 할 수 있는데 특별히 인종차별에 대한 갈등에서 특별히 강력한 힘을 발하고 있고 1930년대 나치주의에 대한 독일 고백교회의 자세를 여러 방면으로 반영하는 갈등이라 할 수 있다.

6.7 위르겐 몰트만
1. 1926년 독일에서 태어난 그는 ‘희망의 신학’(Theologie der Hoffnung)으로 1964년 신학계에서 탁월한 이름으로 나타나기 전 여러 독일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2. 1967년 이후 몰트만은 튀빙겐 대학교의 조직신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루터와 칼빈에서부터 슐라이어마허를 통해 바르트에 이르렀다.
3.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출발점이 된다고 주장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에 대한 개념과 그리스도와 관련시키므로 그 개념을 수정시키기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단순하게 지적한다.
4. 신학적 출발점으로 전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그리스도에 대해 가장 두드러진 성격은 그분이 고통당하시고 죽으셨다고 지적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성격을 바라보는 창문으로 심각하게 여긴다면 이것이 하나님이심을 반드시 수용해야 한다고 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대한 정보의 근원이라면 고통이 하나님의 주된 특질임을 의미한다.
5.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신 것처럼 고통을 받는다.
6. 하나님은 고통을 받는 분만은 아니고 부활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그는 이것을 종말론에 대한 신약성경의 강조와 묶는다.
7. 예수님과 최초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종말론적 메시지는 과거보다 훨씬 관련을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르트가 삼위일체론을 위해 무엇을 행했느냐가 바로 종말론이라고 한다. 기독교 교리에 과소평가된 부끄러움이 무엇이냐를 구조했고 자신의 신학의 구심체로 삼았다.
8. 그는 마르크스주의자 에른스트 블록(Ernst Bloch, 1885년 7월 8일~1977년 8월 4일)의 ‘희망의 원리’(Principle of Hope)에 영향을 받았다. 교회에 대한 3중 개념들을 제안하는데 대중을 위한 교회, 대중의 교회 및 참된 교회 등이다.
9. 그의 주요한 신학 개념들은 언약과 희망이다.

① 그리스도가 누군지에는 중요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미래에 무엇을 하실 것인지에 중요성을 둔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희망에 관심을 둔다는 것이다.
② 이 희망은 오늘날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희망과 지속적으로 관련을 맺는다.

10. 그는 구약성경사에 나타난 언약 개념을 추구한다. 언약의 개념은 히브리 역사에서 시작해야 하고 희망의 뜻은 미래에서 찾아야 한다(종말론적 접근방법).
11. 희망의 신학은 종말론 중심이고 부활을 일으키는 희망에 초점을 맞춘다. 기독교 신앙의 희망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희망을 찾는다.
12. 창조와 종말은 서로 의존적이다. 무에서 창조하고 창조의 소멸 가운데 창조의 지속적 과정, 즉 지속적인 창조가 그 가운데 존재한다. 창조의 소멸은 이 창조를 새로운 창조로 종말론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구성할 것이다.

6.8 찰스 피니
1. 1792년 미국 코네티컷 주의 와런(Warren)에서 태어난 피니는 법학을 배웠고 법정 변호사가 되었다. 1921년 혼자 성경을 연구하는 가운데 회의주의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개종하였다.
2. 설교하기 시작한 후 1824년 장로교 목사로 수임을 받고 동부 주들에서 ‘부흥’(revival)을 주도하였다. 그는 새로운 방법들을 사용했는데 부흥의 목적을 위해 비전통적이었다.
3. 복음화를 위해 칼빈주의 수동적 방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그는 복음화를 위한 능동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전통적으로 부흥은 그분이 기뻐하실 때에만 주어지는 그분의 주권적인 행위로 보았다. 이에 대해 피니는 부흥을 위한 준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4. 인간의 책임과 직관을 하나님의 주도적인은혜 이전에 우리가 수동적이어야 한다는 널리 퍼지는 교훈에 균형으로서 강조했다.
5. 그는 ‘뉴잉글랜드 신학’(New England Theology)의 전통을 고수했다. 그의 사상은 나타니엘 테일러(Nathaniel Taylor, 1786~1858년)에 의해 후에 발전했다. 테일러의 견해는 ‘뉴 스쿨 칼빈주의’(New School Calvinism) 또는 ‘뉴 헤이븐 신학’(New Haven Theology)로 알려져 있었다. 테일러는 19세기 초 영향력을 가진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로서 그의 주요한 기여는 기독교신앙이 당시의 종교적 부흥주의로 적응하기 위해 역사적 칼빈주의를 수정하였다.
6. 그의 신학은 이 전통에 서 있고 활동적인 복음주의자며 목사였다. 그는 사회 개혁에 관심을 가졌고 노예 반대 운동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7. 그는 인간 의지의 자유와 능력을 강조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배하는 도덕 정치와 우주에 대한 그의 이론을 따랐다. 불가피한 자연 법률들을 통해 물질적 우주를 하나님은 지배한다. 우리는 복종하는 자유를 받거나 불복종한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선택은 자유로서 우리의 의지로 결정된다.
8. 그 결과 자유로운 의지에 또 결심에 너무 그가 강조하기 때문에 원죄론을 부인하게 되고 만다. 어린이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특징짓는 죄성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죄성이 없다면 왜 모두가 죄를 짓는 것일까? 죄가 필연적이지 않고 확실한 것이라 한다. 그의 설명은 자기 은혜 베품을 향해 편협심이 물질적 타락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9. 그의 신학은 마음의 급진적 변화들보다 개별적인 선택들을 만든다는 복음주의 개념을 고부시킨다. ‘도덕 행위의 단순성’(simplicity of moral action)에 대한 그의 교리는 전적 사랑 또는 전적 죄성 외에 다른 중간 장소 또는 다른 가능성이란 없음을 뜻한다.

6.9 위필드
1. 1851년 미국 캔터키 주 렉싱턴 근교에서 태어난 벤저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1851년 11월 5일~1921년 2월 16일)는 프린스턴과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1878~1887년 피츠버그에 있는 신학교에서 가르친 후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교육학과 논증신학의 교수가 되어 192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르쳤다.
2. 1811년에 설립된 프린스턴 학파의 대표자들 중 한 사람이었고 1820년 찰스 핫지(Charles Hodge, 1797년 12월 27일~1878년 6월 19일)가 찰스 피니와 다른 사람들의 ‘칼빈주의 신파’(New School Calvinism)에 반대하여 ‘칼빈주의 구파’(Old School Calvinism)를 고수하였다.
3. 성경 강해자로 잘 알려진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되고 무류한 말씀이라는 전통적 신앙을 변호하였다.
4. 성경에 대한 그의 견해는 성경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전적으로 인간 저자들의 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각 저자들의 다른 특징들과 구별된 형태들에서 볼 수 있다.
5. 인간 저자들은 자유롭게 썼지만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자신들의 책임을 준비했고 그분은 그들의 임무를 위해 필요한 정도까지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6. 근본주의(Fundamentalism)는 문화에 반지성적이고 문화에 적대적이었다. 워필드의 다른 측면에서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유지했던 자들은 성경이 믿음을 위한 최종적 규범이라 믿는 자들이고 역사와 지리학 영역에서 나타난 성경적 사실적 오류들이라도 배제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6.10 베르까워
1. 베르까워(Gerrit Cornelis Berkouwer, 1903년 6월 8일~1996년 1월 26일)는 1903년 홀란드에서 태어나서 암스테르담에 있는 자유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개혁교회(Gereformeerde Kerk)의 목사가 되었고 1996년 세상을 떠났다.
2. 다작가로서 조직신학을 쓰는 대신 14권의 교의학 연구 시리지를 썼다.
3. 수년동안 바르트의 영향아래 있었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비판적이었다.
4. 초기 베르까워는 성경관에서 워필드를 따랐고, 다음 해 보다 교수로 임명된 후 보수적이지 않는 입장으로 바꾸었다.
5. 성경이 성령에 의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와 신빙성 있는 것으로 가득 찬 신비임을 지적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인하지 않지만 워필드보다 성경의 인간성을 더 강조한다.

6.11 존 스톳트
1. 존 스토트(John Robert Walmsley Stott, 1921년 4월 27일생)는 1921년 세속주의자 부친과 기독교인 모친의 자녀로 태어났고 모친은 그를 런던의 랭함 플레이스에 있는 올서울 처치(All Soul's Church)에서 주일학교에 신앙훈련을 받도록 했다.
2. 케임브리지에서 언어학과 신학을 수학했다. 영국국교회 목회자로 훈련받은 후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제로 수임을 받았다.
3. 그는 주요한 복음주의 정치가로서 1974년 로잔회의(Lausanne Congress)에 참여하여 로잔 언약을 작성하는 위원이 되었고 다작가로서 그의 책들은 널리 읽히고 있다.
4. 그의 주요한 책들은 아래와 같다.

① 기독교 기본진리(Basic Christianity, 1958년)는 기독교 신앙을 단순하게 개종치 않은 사람들에게 설명한다. 약 2백만 권정도 팔렸고 20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② 그리스도의 십자가(The Cross of Christ, 1986년)는 가장 무게 있는 작품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분은 우리 죄 때문에 처벌을 당했다는 전통적 교리를 조심스럽게 설명하고 있다.
③ 본질적인 것(Essentials, 1988년)은 스톳트와 그의 동역자 영국국교회 데이빗 에드워즈 간의 있었던 자유주의와 복음주의 대화라 할 수 있다. 에드워즈는 스톳트가 20세기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 1881년 10월 15일~1944년 10월 26일)을 떠나 영국국교회에 가장 영향력 있는 성직자라고 생각했다.

5. 지옥의 성격에 대해 처음으로 공개 발표를 했다. 모든 자들이 구원받는 보편주의(universalism)를 거절하면서 버린 자들이 직면하는 ‘영원한 심판’이 끝없는 고통이라기보다 전적인 영혼 소멸설(annihilation)이라는 견해를 고수했다.
6. 이 선언으로 인해 많은 논쟁이 있었다. 그 결과 ‘영혼 소멸설’은 일반적으로 복음주의자들 간에 선택으로 남아 있다.
7. 스톳트는 공개적으로 ‘영혼 소멸설’을 발표하여 지옥이 비실존으로 소각된다고 신앙을 고수했다. 전통적 복음주의는 영원 고통 인식(eternal conscious torment)이다. 이것은 복음주의 기독교 내부에서 열띤 논쟁을 일으켰고 일부 저자들은 스톳트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8. 2005년 타임스 잡지는 세계에서 영향을 끼치는 100명의 인사들 중 존 스톳트를 소개했다.

6.12 로잔회의
1. 로잔회의는 스위스 로잔에서 1974년 개최된 최초의 세계 복음화를 위한 국제회의이다.
2. 1974년 7월 16~25일에 개최된 이 회의는 이따금 ‘로잔회의’(Lausanne Congress), '로잔 74‘(Lausanne 74), 또는 ’ICOWE‘라 불린다.
3. 회의는 ‘로잔언약’(Lausanne Covenant)을 만들었는데 현대 복음주의 기독교에서 만든 가장 영향력 있는 문서들 중 하나이다. 이 언약을 작성하는 위원장이 존 스톳트였다.
4. 그 회의는 4,000명의 복음주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인 매우 영향력 있는 회의였다. 세계 복음화를 위한 과정, 근원 및 방법들을 논의했다.
5. 회의는 미국 복음주의자 빌리 그래엄의 사회로 시작하여 150개국 종교 지도자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었다. 1972년 10월 회의를 위한 장소로 로잔을 택했고 1973년 10월 회의소가 만들어졌다. 회의 주제는 ‘세상이 그분의 목소리를 듣도록’(Let the earth hear His voice)였다.
6. 회의는 1972년 8월에 시작하여 1966년 복음주의를 위한 세계회의가 베를린에서 개최되었는데 그 정신을 잇는다고 했다.
7. 2차 세계 회의는 흔히 ‘제 2의 로잔회의’(Lausanne II) 또는 ‘로잔 89)은 15년 후 매마니아(Mania)에서 개최되었다.

6.13 헨리 뉴먼
최근까지 로마 카톨릭교회는 현세계를 향해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로마교황 23세와 더불어 주요한 말은 ‘현대화’(modernization)이었고 20세기의 로마 카톨릭교회를 지배했다.

1. 1801년 복음주의 가문에서 태어난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 1801년 2월 21일~1890년 8월 11일)은 옥스퍼드에서 수학한 후 1822년 오리엘 대학의 연구원으로 활동하다가 1890년 세상을 떠났다.
2. 다양한 칼빈주의 작품들에 깊게 영향을 받았고 복음적 개종을 경험했다. 자신의 복음적 확신들이 서서히 침식되었다.
3. 그는 루터란으로 기울어진 후 케블는 다른 방향으로 강한 고무를 받았다. 존 케블(John Keble, 1792년 4월 25일~1866년 3월 26일)은 로마 카톨릭 방향(복음주의→자유주의→로마카톨릭주의)로 그의 사상과 초대교회 교부들에 관심을 가졌다.
4. 기독교의 고정되고 불변하는 교리, 즉 프로테스탄트주의와 로마카톨릭주의에 도전장을 던졌다. 변화들은 교리들이 발전하고 시대를 통해 성장하거나 발전하기 때문에 일어났고, 성경에 대한 비조직적인 교리는 순서대로 질서가 잡혀야 하고 정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리석은 교훈에 반응해야 한다고 하고, 새로운 시대들은 새로운 답변들을 요구하는 새로운 질문을 고려해야 하기에 변화와 발전은 불가피하다.
5. 그는 교리의 신실한 발전을 위한 7가지 점검들을 제안한다. 발전 전체를 통해 기본 원리의 연속성, 한 교리부터 다른 교리로 이어지는 논리적 결과와 시대의 점검 등이다. 그는 이 모든 점검들을 사용하여 교리에서 일어난 로마 카톨릭 발전을 변호했다.
6. 그는 로마 카톨릭교회에 반대하여 교황지상주의(Ultramontanism)와 같은 옥스퍼드 운동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옥스퍼드 운동으로 많은 학생들은 로마 카톨릭교회로 개종했고 영국국교회의 100명 목회자들은 그 교회로 이전했다.
7. 어떤 의미에서 그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위대한 개혁자였다.

6.14 1차 바티칸 종교회의
1. 1차 바티칸 종교회의는 로마교황 피우스9세에 의해 1868년 6월 29일 ‘교의헌장’(Pastor Aeternus)이란 교서를 발표하면서 소환되었다. 1차 회기는 1869년 12월 8일에 개최되었다. 로마 카톨릭교회의 20차 종교회의로서 800교회 지도자들이 참여했다. 그들은 1869년 12월 8일~1870년 9월 1일 간에 93차례 모임을 가졌다.
2. 로마교황이 가진 두 가지 목적은 로마교황의 무류성의 교리를 정의하고 ‘오류들의 목록’(Syllabus of Errors, 1864년)에서 언급한 입장을 확언하면서 합리주의, 자유주의 및 유물론과 관련된 폭넓은 입장들을 정죄하였다.
3. 3차 회기에서 두 가지 헌장들만 논의했고 인정했다: 로마카톨릭 신앙에 대한 교의헌장인 하나님의 아들(Dei Filius)과 교황의 지상권과 무류성을 다루는 그리스도 교회에 대한 1차 교의헌장인 ‘교의헌장’(Pastor Aeternus)이다.
4. 로마교황의 무류성에 대한 정의는 논쟁적이다.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교의를 정의할 때 로마교황이 무오류하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믿은 자들이 교의를 형식적으로 정의하는데 신중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5. 존 헨리 뉴먼은 외국인 동맹을 맺었다는 로마 카톨릭들의 의혹이 될 수 있다고 일부는 두려워했다.
6. 종교회의 약 60명은 투표에 들어가기 전날 로마를 떠났다. 스페인 황실 고백자인 안토니오 대감독 마리아 클라레트는 이 종교회의 마루에서 신성모독자들과 이단자들을 강력하게 정죄했다. 로마교황 무류성과 로마교황청의 지상권의이슈에 대해 강력하게 변호한 자들 중 한 사람이다.
7. 그는 종교회의 일원들 중 성자가 된 유일한 인물이었다. 1870년 10월 24일 프랑스 퐁프로드에 있는 시스틴 수도원에서 죽었다. 헌장에 대한 논의와 인정은 구 로마 카톨릭들의 교회로부터 철회하도록 이끌었던 심각한 논쟁들을 일으켰다.
8. 프랑스 프러시아 전쟁이 발발하면서 종교회의는 중단되었다. 흔히 로마의 포로라 불리는 로마에서 이태리 군인의 들어오므로 긴장을 받았고 다시 재개되지 못했다. 로마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1960년 후반 될 때까지 공식적으로 마무리 되지 못했다. 그 때는 2차 바티칸 종교회의를 위한 준비의 부분가 일어나므로 종결을 짓게 되었다.

6.15 2차 바티칸 종교회의
1. 2차 바티칸 종교회의는 1962~1965년에 개최되었다. 약 2,600명의 감독들이 참여했고 라너, 큉 및 라찡거를 비롯한 주요한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이 참여했다.
2. 초기 종교회의와는 달리 그들은 다른 기독교인들, 다른 종교들 및 현대 세계에 대해 교의적보다 목회적이고 대결적이기보다 화해적이다.
3.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문서들이 ‘교회와 신적 계시’에 대한 교의헌장이 발표되었다.

① 교회는 로마교황의 절대 주권성을 강조했던 1차 바티칸 종교회의 불균형을 수정하고자 했다. 만일 1차 바티칸 종교회의가 베드로의 후계자로 로마교황을 강조했다면 바티칸 종교회의는 권위와 목회적 규율을 가르칠 때 사도들의 동료들에게 후계자들로 감독들의 서열을 그린다.
② 신적 계시는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 간에 드러난 투쟁을 일으켰다. 5개의 제안들에 나타났는데 1차 제안서는 궁극적인 보수적 경향을 가졌고 종교회의 교부들 중 60퍼센트에 의해 결정적으로 거절되었다.

4. 종교회의는 불교, 유대교 및 이슬람교와 같은 다른 종교들에 대해 새롭고 긍정적인 태도를 채택했다. 그것들도 참되고 선한 많은 것을 가르친다고 보았다.
5. 다른 교회들 간에 연결들을 구축하려 했던 초교파 운동에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진 사건이었다.
6. 로마교황 요한 23세와 같이 종교회의를 따랐던 로마교황들은 다시 보수적 방향으로 교회를 밀고 가고자 했다. 바티칸 종교회의가 암시했던 모든 것들은 이뤄졌고 이행하게 되었다.

6.16 로마 카톨릭교회 교리문답서
1. 1566년 로마교황 피우스 5세(1566년l~1572년 5월 1일)는 로마 카톨릭주의를 세계적 로마 카톨릭교회를 위한 1차 바티칸 종교회의였던 트렌트 종교회의 교훈을 교리적으로 해설임을 선포했다.
2. 2차 바티칸 종교회의가 로마 카톨릭 새로운 예식서를 만들었던 것처럼 새로운 교리문답서를 만들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3. 라틴본문에서 로마교황 요한 바울 2세는 1997년 선포하면서 피우스 5세 이후 400년 이상동안 로마 카톨릭교회를 위한 최초의 교리문답서라 선포했다.
4. 교리문답서는 전통적인 4가지 형태를 따랐다.

① 신앙 고백과 특별히 사도신경
② 기독교 신비를 축제한다. 특별히 7성례들을
③ 그리스도와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큰 계명들을 포함한 10계명을 따르는 삶
④ 기독교 기도와 특별히 주기도문

6.17 세계교회회의
20세기는 기독교 연합체에 대한 큰 관심을 가졌다. 세계교회외의는 교회들을 함께 하려고 노력했다. 다른 교회들 간에 잇단 대화를 통해 특별한 교리들에 대해 공통점을 찾았다.
복음주의자들은 공동 목적을 위해 로잔회의에서 기독교인들을 함께 할 수 있는 ‘현장교회’(para-church) 단체들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1. 세계교회회의(World Council of Churches, WCC)는 44개국에서 온 147명의 교회 대표자들이 암스테르담에서 1948년 공식적으로 제정되었다. 이 회의 전 3차례의초기 운동들이 있었고 1910년 에든버러에서 개최된 세계선교협의(World Missionary Conference)에서 고무를 받았다.
2. 프로테스탄트와 동방정교회 교파들을 위한 포럼으로 여겨져서 교리적 유사성들과 상이점들을 살피고 다양성 업무들을 WCC를 통해 협력하고자 했다.
3. 후기 세계 1차 대전 이후 두 차례의 초교파적 노력들이 있었는데 ‘삶과 사역의 운동’(Life and Work Movement)과 '신앙과 질서 운동'(Faith and Order Movement)이었다.
4. 이런 두 개의 조칙체들의 힘은 종교개혁 후 최초의 협력인 1910년 에든버러에서 국제 선교협회에서 나왔다.
5. 로마 카톨릭교회는 WCC 일원이 아니지만 협회들에 대표들을 파송했다. 보다 근본적인 프로테스탄트 교파들은 이 협회에 가입하지 않았다.
6. 세계교회회의는 아래와 같은 모임을 개최했다.

① 1948년 8월 22일~1948년 9월 4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② 1954년 8월 15일~1954년 8월 31일 일리노이의 에반스턴
③ 1961년 11월 19일~12월 5일 인디아 뉴델리
④ 1968년 7월 4일~1968년 7월 20일 스웨덴 웁살라
⑤ 1975년 11월 23일~12월 10일 케냐의 나이로비
⑥ 1983년 7월 24일~8월 10일 브리티시 콜럼비아 뱅쿠버
⑦ 1992년 2월 7일~2월 21일 오스트랠리아 캔버라
⑧ 1998년 12월 3일~2월 21일 짐바위 하라레
⑨ 2006년 2월 14일~2월 23일 브라질 리오 그랜데 도 술의 포르Xh 알레그레

6.18 한스 큉
1. 한스 큉(Hans Küng, 1928년 3월 19일생)은 1928년 루케른의 스위스 캔턴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사제 훈련을 받은 후 그는 파리로 가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했다. 칼 바르트의 교리와 로마 카톨릭 반영이란 논문은 1997년 출판되었다.
2. 트렌트 종교회의의 교훈과 이것이 화해할 수 없을 만큼의 차이점이 없다고 주장했다.
3. 2차 바티칸 종교회의에 공식 신학 자문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했지만 몇몇 결과들에 대해 실망했다. 그의 주요한 작품들은 로마교황청의 인준을 받지 못했다.
4. 자신의 책, 『문의』(Inquiry)에서 로마교황의 무류설에 대해 강력하게 공격했다. 그는 성경과 교회 전통에서 그것의 추정된 지지를 받는지 문의했다.
5. 그는 다작가로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에 대해』(On Being a Christian, 1974년)과 『하나님은 존재하는가?』(Does God exitst? 1978년)와 같은 비신학적 논조를 위해 신학을 썼던 주역이었다.
6. 신앙의 교리를 위한 회중은 그가 더 이상 로마카톨릭 신학자도 아니고 가르칠 역할을 해서도 안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는 출교를 당하지 않았고 대중에 대한 그의 영향력 때문에 사제직분을 상실하지는 않았다.
7. 그의 작품은 약해지지 않고 지속되었다. 그는 1988년 3천년을 위한 신학 작품을 썼다. 그 안에서 그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신학에 접근방법을 생각한다.
8. 그는 1차 세계 대전 이후 초교파적 신기원을 선호하곤 했다. 어떤 의미로 다양한 교파들 종교들 및 지역들을 지구촌적 새로운 이해를 선호했다. 신학으로의 그의 접근방법은 세계 종교들의 신학을 향한 새로운 출발이다. 2002년 자유를 위한 나의 갈등이란 제목 하에 추상집을 최근에 출판했다.

6.19 다원주의
1. 다원주의(pluralism)는 정확하게 규범적 종교 다원주의로서 주요한 세계 종교들이 신적 실재에 독립적인 구원 접근방법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2. 교리의 다원적 근거들은 다음과 같다.

① 비관용적이고 공격적 세계에서 공의를 증진시키려는 유일한 방법은 윤리적이다.
② 종교적 경험의 비효과성이란 의미에서 어떤 종교도 절대적 자세를 주장할 수 없다.
③ 다양한 문화적이고 역사적 상황들은 절대적인 종교적 주장을 배제한다는 역사적 가정을 통한다.

3. 다원주의는 세계종교들이 궁극 실재와 관련을 맺지만 다른 방면들로 관계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4. 세계종교들의 문화적이고 역사적 환경들이 실재(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개념들을 만들지만 자기중심에서부터 실재(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자세로 인간들이 돌이키면서 모든 종교들에 있는 공동적인 구원론적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5. 하지만 구원론적으로 다른 종교들보다 우수하거나 유일한 어떤 종교가 있다는 공개적 증거가 없으며 궁극적 실재에 보다 가까운 접근방법을 갖고 있다는 증거도 없다.

존 힉(John Hick, 1922년생)이 말하는 규범적 다원주의

1) 모든 윤리적 종교들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2) 많은 종교들은 구원적이다.
3) 가끔 몇몇은 상대주의와 같은 것에 인접하는 것처럼 보인다.
4) 하지만 대부분의 당대 다원론자들은 상대주의처럼 보이지 않는다.
5) 구원의 종교들은 인간 실존을 자기중심에서부터 하나님 또는 실재 중심으로 변화를 포함하고 있다.
6) 이런 정의는 구원을 이해하려는 보다 전통적인 기독교적이고 이슬람적 이해와 모순된다.
7) 결과적으로 다원주의라는 용어는 종교에 관한 자체적 규범적 진리 주장들을 숨기고 있다.
8) 다른 종교들의 도전들, 즉 기독교와 다른 세계 신앙들 간에 관계를 다원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수용하는 법은,

① 유대교 회당들, 모슬렘 모스크들, 힌두교 신전들 등등
② 언어, 개념들, 의식적 행위 및 문화적 윤리는 서로 너무나 다르지만 기본적인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동일한 것도 하나님께 자신들의 마음들과 정신을 열려고 하는 것을 갖고 있다.
③ 하나님은 다양한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불린다.

i 회당에서는 아브라함, 이삭 및 야곱의 주 하나님 아도나이
ii 모스크에서는 은혜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인 알라 라만 라힘
iii 시크 그루와라스에서는 하나님은 아버지, 사랑하는 자, 주, 및 위대한 수여자
iv 힌두 신전들에서는 비시누, 키쉬나, 라마, 쉬바
v 신들과 여신들과 신들처럼 많은 다른 종교들에서 브라만의 궁극적 실재를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vi 성부, 성자 및 성령과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의 기독교 교회들에서는 궁극적으로 유일한 하나님이신 분을 모든 종교적 공동체들은 동의한다.
9) 유일한 한 분 하나님,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 둘 또는 셋 분명한 가능성들은

① 특별한 종교 내에 알려진 하나님은 실재 하나님이시고 모든 다른 종교들은 실재적이지 않다.
② 기독교인들, 유대인들, 모슬렘들, 힌두교도들, 시크들 및 다른 자들에게 알려진 하나님은 인간성과 관련하여 명시되지만 하나님, 즉 궁극적 실재의 얼굴 또는 마스크 또는 인격체가 다르다.
③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및 시크교에 알려진 하나님은 기독교 내에서만 알려진 실재 하나님에 대한 부분적이거나 왜곡된 모습이다.
10) 다원주의에 대한 비판

① 종교들의 도덕적 부분들에 대해(기독교 도덕성과 다른 종교들)

i 다른 신앙들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효과적으로 죄인들을 변화시키는 것을 어떻게 우리가 아는가?

ii 변화시키는 힘에 대한 문의를 그들이 어떻게 가질 수 있나? 틀림없이 도덕적 변화는 영적 변화(중생)와 동일하지 않다.

iii 신앙들과 행위가 밀접하게 연결되어있지 않는 것처럼 당신이 도덕적으로 행하는 한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② 알져지지 않은 실재

i 세계 종교들에서 하나님에 대해 모든 문화적으로 만들어진 형식들을 초월하는 하나님에 견해가 있지만 동방 수도원적 전통들과 유사한 진리를 주장한다.
ii 실재가 존재하는데 어떻게 알 수 없다는 것을 아는가? 이것이 그들에게 계되었는가?
iii 실재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이 어떻다는 것을 전혀 알 수 없다.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는지 증오하는지 아니면 엘리야가 바알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잠을 자고 있는가?
iv 보다 나은 해결책은 불가지론으로 빠지지 않고 진리를 공개적으로 문의하는 것이다.

③ 기독론에 대해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반응으로 살았던 인간적 삶에 대한 개념을 구체화했던 것과 다를 바 없고 그 안에서 하나님은 활동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육신은 은유적이다. 이것이 세계 평화와 상호 종교적 대화 의 근거로 헌신하도록 한다.

i 하나님의 성육신이 비록 역사적이지 못하고 은유적이고 기독교 교리와 모순된다.
ii 사실 예수님은 성육신교리를 가르쳤다. 후에 성육신 교리로 알려질 것을 예수님은 미리 아셨기에 그것은 신빙성 있다.
iii 성육신은 하나님의 신비에 속한 것이기에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이지 않지만 신비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합리적이길 기대하지 않는다. 반드시 신앙에 의존해야 한다.
iv 안셀름의 구원론이 서방신학에 성육신을 구축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힉은 역사적 기독론을 지성적으로 비판한다. 그의 결합적인 다원주의는 전통적 신앙들을 무너뜨리려는 인상적인 시도들로지지 받는다.


6.20 아프리카 신학
1. 기독교 신학은 실질적으로 아프리카에서 고안되었다. 테르툴리아누스, 오리게네스 및 어거스틴과 같은 신학자들이 있어싸.
2. 5세기 후 로마제국의 붕괴와 더불어 대륙 신학자들이 기독교 인식에서부터 대규모로 떨어져 나갔다.
3. 7세기 모슬렘 침입으로 인해 단성론자들과 네스토리안 교회들은 소규모로 전락했고 변화를 가져왔다.
4. 콥트 기독교는 에티오피아에서만 생존했고, 4세기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파송된 선교사들에 의해 기원적으로 개종되었다.
5. 18세기 기독교는 유럽에서 노역했던 노예들에 의해 널리 퍼졌고 자유를 얻어 아프리카로 돌아가기로 선택했다.
6. 18세기 후반 조직적 복음화는 경건주의자들과 모라비안들과 같은 복음주의 단체들은 자신들의 임무로 ‘어두운 대륙’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 느꼈다.
7. 오늘날 아프리카 기독교는 이슬람과 일치하지 않는 다양한 방법으로 공존하고 있다. 수단과 같은 지역에서는 기독교는 제거될 위험에 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매우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8. 아프리카 기독교는 세 형태로 존재한다.

① 로마 카톨릭주의로서 세계 다른 국가들에 있는 로마 카톨릭주의와 유사하다.
② 프로테스탄트 교파들은 다른 국가들에 영국국교회와 같은 형태로 존재한다.
③ 아프리카 사람들은 교회들 또는 AIC들을 시작했는데 외부의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전혀 받지 않거나 최소한 받으면서 아프리카 선교들 밖에서 설립된 교회들이다.

9. 아프리카 사람들은 기독교의 초 혼합적이고 전통적인 지역 종교들 또는 종파들과 동일한 서방 프로테스탄트와 거의 같은 교회들에서부터 다양하게 교회들을 시작했다.
10. AIC들의 일원들은 비 기독교 이웃들의 영적 개념들을 함께 공유하지만 마녀와같은 전통적인 이교적 관례들을 여전히 부인하고 가능하다면 음식을 줄여 먹는 규례들을 준수하며 다른 옷들을 입는 것처럼 스스로를 차별화 하려고 한다.
11. 아프리카에 있는 기독교에 가장 초자연적인 접근방법과 같은 것, 즉 강력한 카리스마와 비형식적인 경향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방법은 주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에서도 적용하고 있다.
12. 오순절주의는 이런 교회들에 매우 강력하게 영향을 끼친다. 그들은 가끔 교리적으로 봏수적이고 복음적ㅇ으로 19세기 복음주의 선교사들로부터 받은 유산을 유지하고 있다.
13. 이따금 보수주의 교회들과 자유주의 교회들은 서로 여인들과 동성애와 같은 문제들 때문에 서로 투장했다.
14. 인종차별 신학이었던 아프리카 신학 내에 지난 세기 동안 발전한 중요한 사랑들이 있었는데 이것은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주의를 위한 신학적 합리성을 제공했다.
15. 국가의 네덜란드 유산은 칼빈주의가 그곳에 주도적인 전통이었음을 의미했고 인종차별 신학자들은 다른 인종을 분리하는 것이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의 부분이었다고 주장했다.
16. 1960년대 1939년대 독일 기독교 내에서 나치주의의 영향에 맞섰던 바르트와 본회퍼의 고백교회에 의해 의식적으로 영감 받은 남아프리카 고백 신학이 일어난 때였다.
17. 이 전통에 서 있는 사상가들은 흑인 문화를 축하하려는 신학을 만들려고 했고 그것에 강조하므로 해방신학과 공통적인 부분을 갖게 되었다.
18. 이 아프리카 흑인 신학은 가난한 자들을 위하고 하나님이 동일시하시는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검음과 상징을 찾는 북아메리카 편과 너무나도 유사하다.
19. 보다 독특한 신학은 상황신학(contextual theology)를 위한 연구에 의해 작성된 ‘카이로스 문서’(Kairos Document)가 1985년 출판된 이래 최근에 일어났다.
20. 카이로스의 개념은 사회적인 것에 관심을 가진 기독교인들에 의해 예언적으로 이해한 기회의 순간들을 의미한다. 억압받는 자들을 해방시키거나 설득시키려는 헛된 시간보다 억압받는 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신학이다.
21. 예언신학(prophetic theology)은 카리스마 전통과 해방신학의 연맹과 같은 것이고 강력한 복음주의 연합체들과 같은 것이다. 가장 잘 알려진 대표는 데스먼드 투투(Desmond Tutu, 1931년 10월 7일생)로서 케이프타운의 전 영국국교회 대감독이었다.

6.21 아시아 신학
1. 아시아 신학은 오래되고 기존 종교들과 관련하여 자체를 정의내려고 투쟁하면서 항상 소규모적 신앙을 소유한다.
2. 오늘날 다른 개인들과 공동체들이 발견했던 해결책들은 기독교가 다시 한 번 소규모 신앙이 되었던 서방에 대해 가지는 학문적 관심보다 더한 것이다.
3. 기독교는 5~6세기에 중국에 소개되었지만 로마 카톨릭들이나 정교회가 아니라 네스토리안 교회였다. 이 교회는 5세기 정교회로부터 분열된 후 동방으로 뻗어나갔다.
4. 초기 시대의 영웅들 중 한 사람은 네스토리안 수도사 올로펜(Olopen)이었는데 그는 7세기 중국 당태종의 법정에 방문했던 존경받는 자였다. 네스토리안 교회는 불교와 같은 종파로 오해된 것처럼 여겼고 경교(景敎, Jinjaio)로 오해되었다. 불교가 당무종 시기에 추방 당할 때 고통을 받았고 대규모로 사라졌다.
5. 16세기와 17세기는 모든 예수회 보다 로마 카톨릭 선교사들에 의해기독교가 동양으로 소개하려는 재개된 시도들을 보았다.
6. 중국에서 이런 시도들 중 어떤 것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1616년 로마 카톨릭주의는 추방당했고 선교사들도 귀향할 수밖에 없었다.
7. 이와는 달리 일본은 처음에는 보다 환영적이었다. 위대한 예수회 선교사 프란체스코 하비에르(Francis Xavier, 1506년 4월 7일~1552년 11월 2일)는 1549년 가고쉬마에 도착하였다. ‘키리시탄’ 신앙은 서방 개념들의 소개를 일본인들이 환영했기에 매우 인기를 얻었다.
8. 그 세기 말에 이르러 일본에 있던 기독교인들은 300,000명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개종되었다고 판단하기 이르고 기독교인들은 간헐적으로 핍박을 받았다. 가장 힘든 사건은 1597년에 일어났는데 26명의 일본과 외국 기독교인들은 나가사키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 당했다.
9. 1614년 기독교는 전 일본으로부터 추방을 당했다. 51명 이상의 기독교인들은 1622년 나가사키에서 순교 당했고 2년 후 50명이 에도에서 화형 당했다.
10. 1630년대에 이르러 일본은 모든 선교사들을 추방시켰고 서방에 대한 개방문을 완전히 닫았다. 기독교는 지하로 들어가서 생존했다.
11. 당대에 기독교는 아시아 문화들에서 생존하는 최선의 길이 그들의 문화들에 일치하는 것이었다.
12. 보다 많은 구 네스토리안 교회에 덧붙여 영국 규칙의 유산으로 강력한 영국국교회 전통을 가졌던 인디아에서 기독교 사제들과 예배자들은 교회에 들어오기 전 신발들을 벗어야 했고 힌두교 신전들처럼 제단을 향해 자신들의 등을 보여서는 안되었다.
13. 이런 접근방법의 보다 극적인 실례는 1850년대와 1860년대에 발견되었다. 이때는 일본이 마침내 외부 세계로부터 문을 닫는 정책을 끝냈던 시기였다.
14. 외국 선교사들을 파문내리는 가운데 거의 6만 명에 이르는 기독교인들은 키리시탄 시기의 핍박 이래 신앙을 유지했다. 그들의 신앙은 몇몇 심각한 변화들을 가져왔다.
15. 그러는 동안 주류 기독교는 19세기 후반 아시아에 다시 소개되었고 재빨리 토속 문화에 적용시켜 생존할 수 있었다.
16. 중국에서 현지인화 하는 운동으로 인해 유교와 유사한 것들을 강조했던 기독교를 이해시키기 위해 유럽의 자유주의신학에서 가져온 개념들을 잘 적용했다. 하지만 20세기 초 마누 중국 신학자들은 바르트가 유럽에 유행했던 자유주의에 반대하여 모반했던 것처럼 이 운동에 대해 모반했다.
17. 19세기 변증적 단체가 베이징에서 결성되었는데 중국 문화의 다양성과는 달리 문화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처럼 기독교를 나타내려는 목적을 가졌다.
18. 오뢰천(吴雷川, Wu Leichuan)은 1920년대와 1930년대 연경 대학교에서 가르쳤는데 예수님이 가난한 자들과 동일시키시고 사유재산의 철폐를 주장했던 정치적이고 사회적 개혁자였다고 지적했다. 중국에서 고수했던 공산주의와 분명하게 유사한 점들이 있지만 이런 개념들은 남아메리카의 해방신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자유주의적이고 급진적인 기독교 해석들은 전통적인 교리와 관례에 대한 바르트형 보다 중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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