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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현대사상사 요약 (계몽사상,이성주의,역사비평주의,세속화,포스트모더니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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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현대
5.1 계몽사상
종교개혁 시대의 갈등이 안정되자마자 기독교 사상가들은 주요한 교리들의 가정들을 흔들리는 많은 도전들을 직면했다. 기독교인들은 교회의 전통적 교리들만 아니라 기독교 자체의 성격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를 평가해야만 했다.

르네상스처럼 계몽사상(Enlightenment)은 정의내리기 어려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상의 흐름이었다. 그 특징은 자연과학(Natural Science)에서 진행되었다. 16~17세기에 일어난 과학적이고 철학적 진보들에서 계몽사상은 자라났다. 또 자연과학들은 생물학자 카롤루스 린나에우스와 수학학자와 물리학자인 아이작 뉴턴의 손에 있는 주요한 지성적이고 문화적 힘이 되었다. 그리고 과학자들을 하나님을 확실히 믿었지만 어떤 다른 것도 발견될 수 없을 때 청원되는 막다른 과학적 가정과 같이 그분을 믿었을 뿐이다. 그분은 ‘빈곳을 채우는 하나님’(God of gaps)으로 과학적 지식에 구멍들을 채우는 분에 불과했다. 17세기의 현대 과학은 기독교에 의해 적셔진 토양에서 일어났다.

5.2 이성주의
17세기 사람들은 기독교를 이성의 이름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신론(Deism)으로 이것은 하나님과 종교에 대한 경쟁적 개념의 형태를 택하면서 하나님과 종교를 공격했다. 19세기 무신론(atheism)과 불가지론(agnosticism, 대표적 인물로 T. H. Huxley)은 서구 기독교에서 처음으로 공통점을 갖게 되었다. 이성의 힘을 확신하는 것은 현대 세계를 커졌다가 시들어갔지만 계시에 대한 공격은지속적으로 누그러지지 않았다.

5.3 역사 비평주의
역사비평주의는 19세기에 일어났다. 이것은 전문적인 역사가들이 새롭게 탄생시킨 것으로 새롭고 보다 과격하게 역사에 접근하였다. 비평적 역사가는 권위들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근원들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고 한다. 성경은 비평을 받아야하는 근원으로서 또 수용될 수 있는 권위로서 부족하다고 보았다. 같은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기록들은 점검받아야 하고 그분에 대해 새로운 그림을 급진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5.4 세속화
기독교 신앙은 우주적 수용이 더 이상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사회는 다른 이상적 기반에 관심을 가졌다. 새로운 세속화 종교로 채택된 것은 마르크스 레닌주의(Marxism-Leninism)였다. 서방에서 사회는 세속화, 비종교적 추장들을 기반한다. 종교는 복수적 사회가 일어나므로 고무된 과정에 대해 개인적 관심을 위한 개인적 일로 점점 여겨졌다.

5.5 포스트모더니즘
이성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객관적 진리와 같은 것이 더 이상 수용되지 않는 시대가 되므로 모든 사람들의 관점이 자신들의 시작점으로 인해 채색되었기에 주관성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객관적이거나 절대적 진리에 대한 주장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권위를 부리는 억압하는 시도들로 여겨졌다. 이런 것은 수직적 관계가 부패되었고 따라서 탈구조화 체계가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이런 모든 변화들은 기독교 신학에 큰 도전을 주었고 권위에 대한 도전을 의미했다.

5.6 고트홀드 레싱
역사적 극작가이며 비평가로서 독일 계몽사상에 가장 탁월한 인물들 중 하나였다. 1729년 카멘츠에서 태어난 레싱은 의학을 수학했으나 문학에 관심을 가졌다. 역사가로서 그는 수많은 신학적 이슈들이 실제로 역사적인 것임을 깨달았는데 특별히 성경이 다른 작품들처럼 역사적 근원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보았다. 예수님께서 도래할 세상 끝을 믿었음을 주장했었던 헤르만 라이마루스의 작품의 발췌문들을 썼고, 그분이 죽은 후 그분의 제자들은 곧 돌아올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실패하자 메시지를 바꾸었다고 했다. 기독교는 실수와 기만 위에 세워졌다고 했다. “내가 점프하여 건널 수 없는 역사의 넓고 더러운 웅덩이가 있다”고 하며 역사의 시대들 사이에 웅덩이가 있다고 믿었다. 종교의 진리가 영원하고 필연적이지만 이론적으로 계몽된 이성의 실행으로 발견될 수 있다고 믿었다. “역사의 우연적 진리들은 이성의 필연적인 진리들에 대한 물증이 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역사적 종교, 즉 기독교, 유대주의 및 등등 인간성의 발전상 중요하지만 제한된 역할을 수행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윤리적 가치들을 강조했다. 다른 종교들이 동일한 가치를 갖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역사적으로 제한적이고 어느 날 쓸모없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또 종교적 관용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어떤 의미로 그의 주장은 복수주의자들이 주장했던 것과 동일한 것이다.

5.7 임마누엘 칸트
계몽사상의 가장 위대한 산물인 그는 머뭇거리는 천재임에 틀림없다. 그는 현대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여겨지고 그의 지성적 유산은 여전히 연구 대상이다. 1724년 코닉스베르크에서 태어난 그는 1804년 세상을 떠나면서 고향 대학교에서 대부분 인생을 보냈다. 결혼하지 않고 애완견과 함께 지냈고 모든 음악과 시를 제외한 예술을 증오했다. 시계와 같이 판에 박힌 삶을 살았다. 유명한 그의 책은 『순수이성비판』(Critique of Pure Reason), 『실천이성비판』(Critique of Practical Reason), 그리고 『판단의 비판』(Critique of Judgement)이다.
그의 본질적 관점은 인간이성이 인간 경험의 내용에 관심을 제한되지 않으면 어떤 이해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바로 그 사실은 경험이 순수하게 객관적이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확실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성이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과 같은 이슈들을 설명할 수 없을뿐더러 우리 경험 밖에 있다고 생각했다. 칸트 이전 아퀴나스로부터 데카르트까지 이르는 모든 사람들은 수학적 일반법칙처럼 그분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했다. 칸트 이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제안하는 수많은 물증들이 있지만 더 이상 그 작업을 하려하지 않는다. 종교가 인식의 문제가 아니고 행함의 문제라 생각했다. 종교적 삶은 곧 도덕적 삶인 것이다. 윤리적 원리가 합리적으로 결정될 수 있지만 그것들을 확립하기 위해 종교의 독재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또 종교들 사이에 있는 차이점이 유사성들의 기초를 갖고 있는 마스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교리는 본질적으로 부적절한 것이고 선한 종교의 마스크는 윤리의 유용성과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루터란으로 경건주의 배경을 갖고 있고 극단적인 영향력을 가지는 종교에 대한 비합리적 윤리적 개인적 신앙의 영향을 볼 수 있다. 더욱이 19세기 신학에 중심적인 그의 사상은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종교(가치)와 과학(사실)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 법을 설명하는데 큰 영감을 주고 있다. 종교가 본질적으로 생존을 위한 것이라는 사상이 그에 의해 강력하게 부인되었지만 현대신학의 창시자인 슐라이어마허에게 영향을 주었다.

5.8 슐라이어마허
1768년 지금의 폴란드의 브레슬라우에서 개혁파 군목의 아들로 태어난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는 슈페너의 전통 속에서 경건주의 교육을 받으며 자라나서 경건주의 신학교에 입학했다. 전통 신학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할레 대학교의 신학교육을 받기 위해 떠났다. 목사로 수임 받은 후 대부분의 목회는 베를린에서였다. 개혁교회 목회와 함께 베를린대학교를 설립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그곳에서 신학교수로 봉직하다가 1834년 세상을 떠났다.
그는 현대신학을 설립한 자로 불리는데 그의 사상은 주로 두 권의 작품에서 나타난다. 하나는 『종교: 경멸하는 문화인들에게 주는 글』(Religion: Speeches to Its Cultured Despisers, 1799년). 이것은 자유주의 신학의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회의주의에 반대하여 종교를 변호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기독교신앙』(The Christian Faith, 1821~1822년, 개정판 1830~1831년)으로 조직신학책이라 할 수 있다.
종교는 신학과 윤리, 지식과 행위, 바른 것을 아는 것과 행하는 것(경건주의 견해) 이상의 것이다. 종교는 세 번째 영역에 속하는데 감정(feeling)의 영역이다(주관론의 시작). 참된 종교는 무한한 자에 대한 감성과 맛이다. 종교는 신학과 분리되지만 이 의미는 신학이 어떤 장소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교리와 교의가 종교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종교는 감성과 경험 일 뿐이라 그는 주장했다. 느낌과 경험된 종교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경건주의 통찰력을 답습했다. 계시는 각 개인이 겪은 종교적 경험이라 정의내린다. 모든 직관과 모든 기원적 감성은 계시로부터 나온다. 만일 기원적인 것이 당신 안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올 때 당신을 위한 계시가 될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성경의 가르침을 규범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외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다.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나 역사 속에 행하신 하나님의 행위의 기록보다 인간적 종교 경험으로 다뤄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정통 기독교에 대한 합리적인 계몽사상적 비판을 수용했고 새로운 합리적 종교가 아니라 종교적 경험에 입각한 종교를 보았다. 이것은 18세기 합리주의에 반발하여 일어난 낭만주의 운동(Romantic Movement)의 정신에서 가져온 것이다. 신학을 위한 그의 기준은 신약서경 교리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성경에 기록된 경험에 순응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그의 개념은 인간의 죄성에 대한 부당한 견해 때문에 매우 저조하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속죄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의 실례가 되기 위한 선생일 분이라 그는 말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만을 우리 안에 본질적으로 일으키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희미하고 무능력하지만 모든 순간에서 그것은 완전했다.

5.9 알브레히트 리츨
1822년 베를린에서 루터란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852~1864년 튀빙겐 대학교 신학과 교수였고 죽을 때까지 괴팅겐에서 교수로 봉직했다. 그의 주요한 두 가지 작품은 각각 3권으로 구성된 『칭의와 화해에 대한 기독교 교리』(The Christian Doctrine of Justification and Reconciliation)와 『경건주의 역사』(History of Pietism) 이다.
슐라이어마허 자유주의 전통을 따르지만 많은 영역에서 수정했다. 슐라이어마허처럼 기독교인의 경험에 신학을 기반을 두었지만 감정(feeling)과 정동(emotion) 또는 주관적이고 신비한 것에 강조하는 슐라이어마허의 접근방법을 따랐다. 주관론과 합리주의를 역사로 돌이키는 해결책으로 제안했다. 슐라이어마허의 개인주의와 주관론에 반대하여 그는 기독교의 공공성을 강조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 구원은 교회의 교제에서만 경험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초대교회 교부들이 그리스 철학을 기독교에 도입하면서부터 기독교를 부패시켰다고 주장했다. 성경의 하나님을 철학자들의 절대자로 변화시켰고 복음의 그리스도를 그리스 플라톤주의의 영원한 말씀으로 변환시켰다는 책임을 물었다.
신학의 출발점은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사색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들을 용서하시는 은혜를 주시는 그분의 행위이라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실존에 신학의 출발점을 삼지 않고 하나님의 행위에 출발점을 삼았다. 원죄를 부인했고 죄 없이 생명으로 인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죄를 반대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없기에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화해의 필요성 역시 없다고 주장한다. 리츨은 예수 그리스롤 선존재(pre-existent) 하신 분으로 말했고 사후의 영향 때문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분의 교훈은 ‘사회 복음’ 운동의 일어남을 부추겼다.

5.10 아돌프 폰 하르낙
1851년 도르파트에서 독일 신학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876년 라이프치히, 1879년 기센, 1886년 마르부르크 그리고 1888~1921년 베를린 대학교에서 신학교수로 활동했다. 그는 교의 역사학자로서 주요한 작품은 역시 3권으로 구성된 교의사(1886~1889년)이다. 그는 초대교회에 관심을 가졌다.
리츨과 더불어 그는 복음이 그리스 철학의 생소한 영향으로 인해 부패되었다고 믿었다. 그리스화 되는 과정사를 추적하면서 그는 예수님의 단순한 복음이 사도바울에 의해서 예수님에 대한 종교로 변화되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성육신 된 성자의 교의로 변환되었다고 했다. 그는 “외적 형태의 수많은 변환을 맞이한 복음의 핵심을 구별해야만 한다”고 했다.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교훈의 개념에 기초하였다. 19세기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1906년에 쓴 ‘역사적 예수님의 질문’과 같은 역사 비평주의 방법론을 사용했다. 예수님에 대한 자유주의적 그림이 역사적 옷을 입은 현대신학에 의해 합리주의로 변화되었다고 주장했다.

5.11 알베르트 슈바이처
1875년 독일과 프랑스가 전쟁을 치렀던 알사케(Alsace)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당시에 독일에서 목회하고 있었고 아들은 홀트만(Holtmann)의 지도하에 슈트라스부르크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는 의료선교사가 되리라 확신하고 1905년 의학공부를 위해 출발했다(1905~1912년). 이 기간 동안 그는 여러 권의 책들을 썼는데 그중에 하나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질문』(The Quest of Historical Jesus)였다.
그는 ‘마가의 교리’를 ‘역사적 것들’의 요소들로 보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역사적 요소를 강조했다. 그는 예수님을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에게 미래 나라를 선포한 사람으로 보았다. 하지만 예수님 자신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시키는 사역자로 여겼다고 확신했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그 나라의 규율되기를 기대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런 이상론으로 완전히 사로잡힌 자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자신의 임무를 결국 성취하지 못했다고 주장한 슈바이처는 그리스도 자신이 도래할 성자로 자신을 여겼고 성자의 뜻에 따라 세상의 끝을 향하도록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려고 했지만 실패했다고 했다. 그런 실패는 결국 십자가에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가 메시아라는 사실이 비밀이라고 말했다. 먼저 예수님이 세 명의 제자들, 즉 베드로, 야고보 및 요한에게만 자신이 메시아라는 비밀을 나타냈다고 했다. 베드로가 이 비밀을 12제자에게 알렸고, 이 비밀은 가룟유다에게 알려졌고 그는 대제사장에서 알리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5.12 쇠얀 키르케고르
키르케고르는 1813년 코펜하겐에서 태어났고 부친은 교회 뜰을 관리하던 농노였다. 부친으로부터 좋은 외모를 가졌으나 건강치 못했다. 어릴 때는 왕따를 당하며 힘들게 살았다. 하지만 매우 지성적이었고 외국을 여행하지도 않았는데도 10개의 언어를 구사했다.
당시의 철학과 종교에 영향을 받았다. 칸트와 헤겔과 같은 철학자들은 자신의 체계를 발전시키고 있던 시기였다. 삶에서 우리를 직면하는 선택과 그것을 어떻게 이끌 것인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세상에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결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나 그분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다. 또 그것에 대한 칸트식 해결책을 잘 알고 있다. 각 개인이 경험하며 살고 있다면 하나님은 세상의 부분으로 자신의 행위들에서 나타낸다. 하나님과 세상은 함께 개인에 의해 듣고 살게 된 이야기 안에 성격들을 가진다.
기독교 신앙은 믿어진 전제들의 연속들과 무관하다. 살게 된 삶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칸트의 메마른 윤리주의에 퇴행이 아니다. 칸트는 객관적 도덕적 규율을 정의하려고 했던 자였다. 그는 삶이란 직면하는 것이고 급진적 선택들 간에 선택하는 문제이다. 예를 들면, 그는 사람이 선택하도록 이끌리는 몇 가지 삶의 형태를 묘사했다. 미적 삶(esthitical life), 윤리적 삶(ethical life), 그리고 종교적 삶(religious life) 등이다. 오늘 날 그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지성적 운동들의 하나인 실존주의 아버지로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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