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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 3권.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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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장 우리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칭의 교훈을 깊이 확신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대를 우러러보며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존엄성과 완전성에 비추어 칭의를 논함. 1-3)

 

1.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아무도 의롭지 않다

 

이 모든 일은 명백한 증거에 의해서 완전히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되지만, 이 일들이 얼마나 필요하냐 하는 것은 이 논의 전체의 근거가 무엇이냐를 안중에 두지 않으면 분명히 깨달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무리의 논의는 인간 법정의 공의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늘 법정의 공의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만족시킬 만한 행위의 성실성에 대해서 우리 자신의 보잘것없는 척도로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통 놀랄 만큼 경솔하고 대담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단정한다.

사실 행위에 의한 의를 가장 자신 있게, 가장 요란하게 떠드는 자는 현저한 병에 걸려 괴이한 모습을 보이거나, 피부 속까지 곪아서 뒤뚱거리는 인간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공의를 느낀다면, 그렇게 까지는 우롱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모르면 그것을 존중할 줄도 모르게 된다. 하나님의 공의는 완전해서 모든 부분이 완전무결한 것, 아무 부패나 오염이 없는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렇게 완전한 사람은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수도원의 회랑에 앉아서 누구든지 사람을 의롭게 하는 행위 가치에 대해서 쉽게 지껄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문제를 다루게 되며, 경박한 언쟁을 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런 유희를 버려야 한다. 만일 우리가 진정한 의에 관해서 유익한 탐구를 하고 싶으면, 유의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하늘 심판자가 우리에게 책임을 추궁하실 때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이것이 그 문제이다. 우리는 이 심판자를 우리의 마음이 본래 상상하는 대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성경이 묘사하는 대로 마음에 그려야 한다. 그의 광채 앞에서는 별들이 어두워지며(3:9) 그의 힘은 산들을 녹이며 그의 진노는 땅을 떨게 만든다(9:5-6 참조). 그의 지혜는 지혜 있는 자들을 자기들의 간계에 빠지게 하며(5:13), 그의 순결에 비하면 모든 것이 불결하여(25:5 참조), 그의 의는 천사들도 감당할 수 없으며(4:18 참조), 유죄한 자를 무죄하다고 아니하시며(9:20 참조), 그의 복수에 한번 불이 붙으면 지옥 밑바닥까지 뚫고 들어간다(32:22, 26:6 참조). 그가 사람들의 행위를 심사하기 위하여 심판대에 앉으셨다고 생각해 보자. 누가 그의 보좌 앞에 자신 있게 설 것인가?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 오직 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라고(33:14-15) 선지자는 말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지 앞으로 나오라. 아무도 나오는 자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무서운 말이 들려온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130:3).

또 다른 곳에도 쓰여 있듯이 참으로 모든 사람은 곧 멸망할 것이다.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조석 사이에 멸한 바 되며"(4:17-20).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 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15:15-16)라고 하였다.

사실 욥기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의를 말한다. 이 구별은 계속할 가치가 있다.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모든 이해력을 초월하는 의 앞에서는 검사에 견딜 수 없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욥은 양심에 부끄러운 일이 없지만 천사들의 거룩도 하늘 저울로 달 때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아연 실색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의를 나는 논하지 않겠다. 나는 다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려고 한다.

기록된 율법의 표준에 따라 우리 생활을 검토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서 많은 저주를 말씀하신 것에 공포와 고민을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너무도 둔감하다. 예컨대 이런 일반적인 저주가 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3:10, 27:26). 간단히 말하면, 만일 모든 사람이 하늘 재판관 앞에서 자기의 죄책을 인정하며, 용서를 받고자 기꺼이 엎드려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이 논의 전체는 어리석고 무력하게 될 것이다.

 

2. 사람 앞의 의와 하나님 앞의 의

 

우리는 허망한 자랑을 할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위로 향하고 두려워 떨 줄 알아야 한다. 사람과만 비교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멸시하지 못할 것을 가졌노라고 누구나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올라갈 때 우리의 그런 확신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또 우리의 육체가 눈에 보이는 하늘과 관련해서 한없이 무력하다는 생각을 갖는 것과 똑같은 현상이 하나님과 관련해서 우리의 영혼에도 나타난다. 가까운 물건만을 볼 때에는 눈의 식별력에 자신이 있다. 그러나 태양을 볼 때에는 우리의 시력은 엄청난 광채로 마비되며, 땅에 있는 물건을 볼 때에 느끼던 강한 힘은 없어지고 무력함을 느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빈껍데기뿐인 자기 자신에게 속지 말아야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동등하거나 또는 우월하다고 느끼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아무 가치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일에 대한 판결을 받아야 한다. 이런 경고를 듣고도 우리의 야성이 길들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바리새인에게 하신 대답을 우리에게도 하실 것이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16:15). 사람에게로 가서 당신의 의를 교만하게 자랑하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당신의 의를 미워하신다.

그러나 성령으로부터 참된 교훈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은 어떻게 말하는가?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143:2). 다른 종은 조금 다른 뜻으로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9:2-3)고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의의 성격이 어떻다는 것을 분명 히 듣는다. 곧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행위로는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고 한다. 우리의 천 가지 죄를 검토할 때에, 우리는 하나도 깨끗하게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선택된 그릇인 바울이 자기는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없지만, 그것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을 때에(고전 4:4), 그는 이런 의를 진지하게 숙고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3. 진정한 의의 증인으로써 어거스틴과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드

 

이런 예는 성경에 있을 뿐 아니라, 경건한 저술가들도 모두 이것이 그들의 견해란 것을 표시하였다. 어거스틴은 "경건한 사람은 모두 이객을 육신의 짐을 지고 현세의 생명의 연약함 중에서 신음하면서 한가지 희망을 품고 있다.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시며,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물이 되셨다는 것만이 그 희망이다."(딤전 2:5-6 참조)라고 말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라면, 행위에 대한 확신은 어디에 있는가? "유일한" 희망이라고 하였으니 다른 희망을 남기지 않는다. 베르나르드는 "구주의 상처를 제외한다면 약한 자가 안전하고 든든하게 쉴 곳이 어디 있는가? 구주의 힘이 강할수록 나는 더욱 안심하고 거기서 산다.

세상은 위험하고, 육체는 내리누르며, 마귀는 올무를 놓는다. 나는 넘어지지 않는다. 이는 견고한 반석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나는 중대한 죄를 지었으며 나의 양심은 어지럽다. 그러나 나는 내 주의 상처를 기억하기 때문에 혼란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런 생각에서 그는 후에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주의 자비가 나의 공로다. 분명히 그에게 자비가 있으면 나에게도 공로가 있다. 주의 자비가 풍성하면, 나의 공로도 똑같이 풍부하다. 나는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노래할 것인가? , 주여, 저는 당신의 의만을 기억하겠나이다.

당신의 의는 또한 저의 의옵나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주를 나의 의로 만드셨다. 또 다른 곳에서 "사람을 전적으로 안전하게 만드시는 일을 전적으로 믿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그의 완전한 공로가 된다."고 했고 같은 뜻으로, 그는 평화를 유지하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린다.

"당신의 영광이 여전히 쇠하지 않기를 바라나이다. 저는 평화가 있으면 만사가 형통하겠나이다. 또한 일체의 영광을 거부하나이다. 제 것이 아닌 것을 횡령한다면, 주신 것까지 잃어버릴 것입니다. 더욱 분명히 말한 구절이 있다. "무슨 까닭에 교회는 공로에 관심을 두는가?"

자랑할 더욱 확실한 이유는 하나님의 목적에 있지 않은가? 무슨 공로로 은혜를 바랄 수 있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다. 이는 특히 예언서에 "주 여호와의 말씀에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고 했기 때문이다(36:22,32).

공로로는 넉넉하지 못하다고 아는 것이 곧 넉넉한 공로이다. 그러나 공로가 있는 체하지 않는 것이 넉넉한 공로이므로, 공로가 없는 것은 심판을 받기에 넉넉하다. 베르나르드가 선행에 대해서 공로란 말을 많이 쓰는 것은 당시의 풍습으로 보아서 용서해야 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의 목적은 위선자들의 가슴에 공포심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위선자들은 방자한 죄악 생활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곧 이 점을 설명한다. "공로가 있어도 있는 체하지 않으며, 공로가 없어도 담대한 교회는 행복하다."

교회는 담대할 이유는 있으나 공로는 없다. 공로가 있으나, 가치 있는 공로가 되게 하려면 있는 체하지 않아야 한다. 있는 체하지 않는 것이 참다운 공로가 아닌가? 그러므로 교회는 공로가 있는 체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담대하게 자랑한다. 주의 풍성한 자비가 자랑할 까닭을 넉넉히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적인 자기비판은 선행이 있노라는 생각을 일체 버리게 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게 한다. 4-8)

 

4. 하나님의 엄숙한 심판을 생각하면 모든 자기기만이 없어진다

 

이것은 사실이다. 각성한 양심이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할 때에는, 이것만이 안전한 피난처이며 마음 놓고 호흡할 곳임을 깨닫는다. 밤에 찬란한 별들이 태양 앞에서 빛을 잃는다면, 인간의 가장 회귀한 순진성일지라도 하나님의 순결과 비교할 때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비교는 지극히 엄격한 시험이 될 것이며, 마음속에 가장 깊이 숨어있는 의지까지도 드러낼 것이다. 바울이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라고 한 것과 같다(고전 4:5).

이렇게 되면 게으르게 숨어 있던 양심은 이미 잊어버린 일까지도 모조리 실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를 고소하는 마귀는 지금까지 우리를 시켜 짓게 한 죄악을 모두 알므로, 우리에게 압력을 가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밖에 보이는 선행만을 존중하며 자랑하지만, 곳에서는 그런 것이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서 요구되는 것은 순결한 의지뿐일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자기도취에 빠져 담대하게 자기를 자랑하는 위선은 그 때에는 당황하며 붕괴될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느끼면서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잘난 체 하는 그 위선뿐이 아니다. 우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속이며 자기에게 아첨하는 그 위선도 같은 운명을 당할 것이다. 이런 광경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잠시 동안은 즐겁고 평화롭게 자기의 의를 구축할 수 있지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심판으로 빼앗길 것이다. 꿈에 많은 대물을 쌓았다가도 깨고 나면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같이 진지하게 진정한 의미의 의의 규준을 탐구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행위를 그 자체의 가치대로 판단한다면, 모두 쓰레기와 오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드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통 의라고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순전히 불의이며 정직이라고 보는 것은 부패이며, 영광으로 여기는 것은 치욕이다.

 

5. 모든 자기 찬양을 버리라

 

하나님의 완전성을 생각해 본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와서 자기에 대한 아첨이나 맹목적인 사랑을 일체 버리고, 자기를 검토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 점에서 본래 맹목적이다. 이는 아무도 잘난 체하는 악폐를 경계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 악폐가 우리 모든 사람의 본성에 내재한다고 선언한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라고 솔로몬은 말한다(21: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16:2)라고도 하였다. 그렇다면 사람은 이 망상 때문에 무죄 방면이 되는가? 물론 되지 않는다. 같은 구절에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16:2) 하였다. 바꿔 말하면, 사람은 자기가 쓰고 있는 의의 가면 때문에 우쭐해 하지만, 주께서는 마음속에 숨어 있는 불결을 저울에 다신다. 이와 같이 사람은 이런 아첨에서는 유익을 얻지 못하므로 우리는 알면서 자기기만에 빠져 멸망해서는 안 된다. 자기 검토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양심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불러내야 한다. 이는 우리의 패악성의 비밀한 곳을 심판대의 빛으로 철저히 드러낼 필요가 있으며, 너무도 깊이 숨어 있어서 다른 방법으로는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때라야 우리는 비로소 성경에 있는 말씀들의 가치를 분명히 깨달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25:4, 6), "악을 짓기를 물 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15:16).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14:4). 그 때라야 우리는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9:20)는 욥과 같은 체험을 할 것이다. 예언자가 이스라엘에 대해 불평한 말인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53:6)이란 말은 한 시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적용된다. 참으로 그는 여기서 구속의 은혜를 받게 될 모든 사람에 대해서 말한다. 이 검토의 엄격성은 우리를 완전히 놀라게 할 때까지 되어야 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선 교만한 마음을 철저히 꺾지 않는다면 속고 있는 것이다. 여기 유명한 말씀이 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4:6, 3:34 참조).

 

6. 하나님 앞에서는 무엇이 겸손인가

 

그러나 우리가 겸손하게 되는 방법은 철저하게 가난하고 부족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자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기가 아직 무엇을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것을 겸손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대해서 겸손하게 생각해야 하며, 우리의 의에 어느 정도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이 두 가지 생각을 함께 가진 사람들은 지금까지 파멸적인 위선을 가르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는 것과 자기 마음에 느끼는 것이 반대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는 악행이다. 그러나 올바른 느낌을 가지려면, 우리는 즉시 자기에게 있는 고귀한 듯한 것을 일체 짓밟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주께서 겸손한 백성을 구원하시며 교만한 눈을 낮추시리라는(18:27, 라틴역 17:28 참조) 예언자의 말을 들을 때에 첫째로, 우리는 모든 자랑을 버리고 완전히 겸손하게 되지 않으면 우리 앞에는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닫힐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둘째로, 이 겸손은 어떤 점잖은 행동으로 우리의 권리의 털끝만한 부분을 주에게 양보하는 것과도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어느 정도의 우월감을 가졌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교만하거나 모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겸손하다고 본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다는 것은 우리 마음을 정직하게 바치며 복종하는 것을 의지한다. 자기의 비참함과 빈곤함을 알고 진실하게 굴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서나 겸손을 이렇게 설명한다.

주께서 스바냐서에서 "내가 너의 중에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를 제하여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의 중에 남겨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3:11-12)고 말씀하실 때 이 말씀은 누가 겸손한 사람인가를 분명히 지적하시지 않는가? 그 사람은 자기의 빈곤함을 알고 고통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교만한 자들은 "자랑한다"고 하신다. 번영하여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은 대개 자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하시려는 겸손한 사람에게는 주를 바라는 것만을 남겨주셨다. 이사야서에도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66:2)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손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57:15)고 하였다.

우리는 "통회"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에 상처가 있어서 땅에 엎드린 채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판단에 따라 겸손한 사람과 함께 높임을 받으려면, 우리 마음에 이런 통회로 인한 상처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있는 손에 교만이 꺾이며, 수치와 치욕을 당할 것이다.

 

7. 그리스도는 의인을 부르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신다

 

우리의 지존하신 주께서는 말씀으로 하는 설명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비유로 올바른 겸손의 모습을 그려 보이신다. 주께서는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고 설명하셨다(18:13). 세리가 한 행동을 가짜 겸손의 표징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가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거나 더 가까이 오지 못한 것, 가슴을 치면서 죄인이라고 고백한 것은 거짓이 아니라 그가 충심으로 느낀 것을 고백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주께서 소개하시는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보통 사람들, , 강탈하거나 불의하거나 간음하는 사람이 아닌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매주 두 번씩 금식하며, 가진 것의 십일조를 바치기 때문에 감사하노라고 한다(18:11-12). 그의 공개적인 고백에서는 그에게 있는 의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자기를 의롭다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 앞을 떠날 때에는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고 그의 미움을 받았다. 세리는 자기의 불의를 인정하기 때문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18:14). 그러므로 우리의 겸손을 주께서 심히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은 자기의 가치에 대한 생각을 일체 버리고 완전히 비우지 않으면, , 우쭐하는 생각이 차 있는 동안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열리지 않으며 따라서 자비를 받을 수 없다. 아무도 이 점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땅에 보내실 때 그리스도의 사명은 바로 이것이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슬픈 자를 위로하되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61:1-3). 이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만을 불러 자신의 은혜를 받게 하신다(11:28). 그리고 다른 곳에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신다(9:13).

 

8.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과 자기만족은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을 막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면, 우리는 모든 교만과 자기만족을 버려야 한다. 자기의 의를 미련하게 믿을 때, 하나님 앞에 추천할 만한 공로가 있노라고 생각할 때에, 우리는 교만하게 된다. 행위에 대한 자신이 없더라도 자기만족은 있을 수 있다. 많은 죄인들이 그 죄악 생활의 재미에 취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않고, 그야말로 취한 것처럼 자기들에게 베풀어진 자비를 얻으려고 애쓸 줄을 모른다. 자기의 의에 대한 확신과 같이 그런 태만도 버려야만 우리는 비워지고 주린 마음으로 거리낌 없이 주의 앞으로 달려가, 주의 주시는 좋은 것으로 배부를 수 있다. 우리 자신을 불신하는 생각이 깊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충분히 믿을 수 없을 것이며, 우리의 마음이 우선 우리 안에서 타도되지 않으면, 주를 향하여 충분히 비약할 수 없을 것이며, 우리 자신 안에서 이미 절망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결코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한 위로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감을 완전히 뽑아버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만 믿고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을 준비가 된다. 어거스틴은 "우리 자신의 공로를 잊어버리고 그리스도의 선물을 받아 안을 때에"라고 말한다. 그가 우리 안에서 공로를 구하신다면, 우리는 그의 선물을 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드도 이와 일치하는 뜻으로 교만한 자들을 불성실한 하인과 비교한다. 그들은 자기를 지나쳐 가는 은혜를 자기의 것인 듯이 생각하여 사소한 일에도 자기의 공로를 주장한다. 이는 마치 벽이 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빛을 받으면서 자기가 그 빛을 낸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 문제에 시간을 더 보내지 않기 위해서, 간단하면서도 일반적이며 확실한 원칙이라고 할 만한 것을 말하겠다. , 자기를 비우는 사람은, , 없는 의를 비우는 것이 아니라, 허무한 가짜 의를 비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의 열매를 분배받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에게 만족하면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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