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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 3권.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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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장 현세생활과 그 보조 수단들을 사용하는 법

 

(현세 생활에서 좋은 것들은 하나님의 선물로 생각하여 즐겨 사용하라. 1-2)

 

1. 두 가지 위험 : 잘못된 엄격한 금욕과 잘못된 방종

 

성경은 이런 초보적인 교훈으로 동시에 지상의 복리를 어떻게 이용하는 것이 좋은가를 우리에게 충분히 가르친다. 이 문제는 우리의 생활을 설계하는 데 있어서 등한시할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가 살아가려면 사는 데 필요한 보조 수단들도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필요하다기보다 즐거움을 주는 듯한 것들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필요나 즐거움을 위한 것이든지 그것을 깨끗한 양심으로 이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정한 방침을 지켜야 한다. 주의 말씀에 이 방침을 정하신 것이 있는데, 현세 생활은 주의 백성들이 하늘나라로 가려고 서두르고 있는 나그네의 생활이라고 한 것이다(25:23, 대상 29:15, 39:13, 119:19, 11:8-10,13, 16:13,14, 벧전 2:11).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을 단순히 지나갈 뿐이라면, 현세의 좋고 유익한 사물을 이용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갈 길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돕는 범위 내에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바울은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고전 7:30-31)고 우리에게 올바로 권고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미끄럽고도 좌우로 경사져서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전하게 설 수 있는 곳에 발을 든든히 붙이도록 해 보자. 엄격한 제약을 가하지 않을 때에 무절제와 방종한 생활은 걷잡을 수 없이 극단으로 달음질한다. 이 미친 듯한 죄악의 위험성을 보고 무절제와 방종을 시정하고자한 사람들이 있었다. 다른 점에서는 선하고 거룩한 이 사람들이 생각한 유일한 방안은 필요성이 요구하는 범위 내에서만 물질의 이용을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생각은 경건한 것이었으나 지나치게 엄격하였고 주의 말씀에 비해서 사람의 양심을 더욱 구속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그런데 그들이 필요성이라고 한 것은 없이도 지낼 수 있는 것은 일체 멀리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맨 빵과 물 이외에 다른 음식물을 첨가하는 것은 일체 허락하지 않을 정도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보다도 더 엄격하였다. 테베사람 크라테스(Crates)는 재산을 없애버리지 않으면 그 때문에 자기가 망하게 된다고 재산을 전부 바다에 던졌다고 한다.

물질 사용에 있어서 육의 무절제를 변명하며, 방종한 쾌락 생활의 길을 준비하려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다. 그들은 내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것을 당연한 일같이 생각한다. 이 자유에는 아무런 제한이나 구속을 가할 것이 아니라, 각자의 양심에 맡겨 자기에게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대로 그것을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정확한 법률 조문으로 양심을 구속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합당한 사용에 대한 일반적인 표준이 있으므로 우리는 거기에 따라서 우리의 사용을 제한하는 것이 마땅하다.

 

2. 대원칙

 

우리가 다룰 원칙은 이것이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여러 가지 선물들을 창조하신 목적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지, 우리를 멸망시키시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정하신 그 목적에 따라서 하나님의 선물을 사용한다면, 그러한 사용은 방향이 바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목적을 주시하는 사람이 가장 곧은길을 걷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양식을 만드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면, 하나님의 뜻은 필요한 것을 주실 뿐 아니라, 또한 즐겁고 유쾌하게 만드시려는 데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것이다. 의복의 목적은 필요성뿐만 아니라, 외모와 풍습을 단정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풀과 나무와 열매는 여러 가지 이용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그와는 별개로 모양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가졌다(2:9 참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예언자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104:15)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사람에게 주셨다는 말을 성경은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상기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또 만물이 본래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보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어디에 이용하며 어느 정도까지 이용할 것인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주께서 우리가 보기에 아름다운 옷을 꽃에 입히시고 우리 코에 달콤한 향기를 풍겨 보내게 하셨는데, 우리의 눈이 그 미를 느끼며 코가 그 향기를 느끼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가? 생각해 보라. 주께서는 빛에도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아름답도록 구별하여 만드시지 않았는가? 금과 은과 상아와 대리석에는 그것들을 다른 금속이나 돌보다 더 귀중하게 만드는 아름다움을 주시지 않았는가? 한 마디로 주께서는 필요한 이용 가치를 떠나서 우리가 보기에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만드시지 않았는가?

 

(우리는 하늘로부터 받은 이런 각종 은혜를 무절제하게 사용하거나, 탐욕스럽게 재물을 탐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명을 따라 충실히 섬겨야 한다. 3-6)

 

3. 선물을 주신 분을 우러러보면, 옹졸한 생각과 방종을 막을 수 있다

 

그러면 피조물의 이용을 필요한 용도에만 제한하는 몰인정한 철학을 버려라.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의 은혜에 합당한 열매를 우리에게서 빼앗는 사악한 생각이며, 인간을 무감각한 목석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실행할 수 없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육의 정욕을 억제하는 데도 이만 못지않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육의 정욕은 절제하지 않으면 한없이 흘러넘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육욕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자유가 허용되었다는 구실로, 무엇이든지 육욕에 허락한다. 정욕을 억제하는 방법의 하나는 우리를 위하여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의 뜻은 우리가 그를 인식하며 그의 인자하심에 감사하도록 하시려는 데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만일 연락과 폭음 폭식으로 둔하게 되어 경건과 소명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의 감사는 어디 있는가? 만일 우리의 육의 힘이 끓어 넘치고 추악한 정욕이 정신을 침범하며, 죄의 더러움이 바르고 고상한 일들을 분간할 수 없게 만든다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어디 있는가? 우리의 의복이 사치한 탓으로 우리 자신에 탄복하고 남을 멸시한다면, 또는 그 우아하고 찬란한 옷을 입고 부끄러운 일을 준비한다면, 의복에 대하여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생각이 어디 있는가? 우리의 마음이 찬란한 옷에 잡혀 있다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어디 있는가? 즐거운 일들에 모든 감각이 예속되어 정신이 압도된 사람들이 많다. 대리석과 금과 그림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그들은 대리석이 되었고, 말하자면 금으로 변했고, 색칠한 우상과 같이 되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주방의 냄새와 그 좋은 향기에 마비되어, 정신적인 것은 전연 냄새를 맡지 못한다. 다른 것에 관해서도 똑같은 사태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물의 남용을 허락하는 것은 명백하게 다소간 억제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바울이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3:14) 한 법칙이 확인된다. 만일 우리가 육욕에 너무 양보한다면, 그것은 걷잡을 수 없이 무한정 끓어오르기 때문이다.

 

4. 영생을 갈망하는 것도 우리의 외면적 생활을 바르게 결정한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길은 현세에서의 생활을 멸시하고 하늘의 영생불멸을 명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 법칙이 나온다. 첫째는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라는 바울의 교훈이다(고전 7:29-31). 둘째는 빈곤을 조용히 참고 견디며, 부유함을 절제하라는 것이다. 세상 물건을 쓰되 쓰지 않는 것같이 하라고 충고하는 사람은 폭음 폭식과 식도락과 건물과 의복의 사치와 야심과 자만과 교만과 까다로운 성벽뿐만 아니라, 천국 생활을 생각하며 영혼을 함양하려는 우리의 열의를 방해하거나 탈선시키는 모든 관심과 취미까지도 끊어버린다. 옛날에 카토(Cato)"의복에 대한 관심이 크면, 덕에 대한 무관심도 크다."고 한 말은 옳다. 옛날 속담을 사용하면, 육체를 돌보는 데 시간을 많이 쓰는 사람은 영혼에 대해서는 대개 등한하다.

그러므로 외면적인 일에 대한 신자의 자유를 고정된 조문으로 속박해서는 안 된다고 하더라도, 확실히 자유는 이 법에 복종해야 한다. , 될 수 있는 대로 쾌락에 흐르지 말라. 오히려 불필요하게 풍요한 것은 형적도 없이 끊어버리도록 불굴의 정신으로 싸우라. 방탕한 것은 입에 담지 말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도움을 주는 보조물들이 장애물로 변하지 않도록 부단히 경계하라는 것이다.

 

5. 검소와 위탁물인 지상 소유에 대하여

 

둘째 법칙은 가난한 사람은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망으로 고통받지 않기 위해서, 없이 지내며 견딜 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절제의 법칙을 지킨다면 그들은 주님의 학교에서 많이 전진할 것이다. 또 조금도 전진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점에서는 주의 제자라는 증거를 보일 길이 없다. 대부분의 죄악이 물욕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은 제외하고라도, 빈곤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여유가 생기는 때 대개는 반대되는 증세를 나타낸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 초라한 의복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비싼 옷을 자랑할 것이요, 빈약한 음식으로 만족할 수 없어 더 좋은 음식에 대한 욕망으로 고통하는 사람은 그런 음식을 얻게 되는 때에 무절제하게 남용하게 될 것이다. 빈곤하고 낮은 처지를 부득이 참기는 하나, 마음이 평온하지 못한 사람은 명예를 얻는 때에 반드시 교만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저 사도의 모범을 따라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대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4:12).

그뿐 아니라, 성경에는 지상 물질을 이용하는 데 대한 세 번째 지도 법칙이 있다. 사랑에 대한 교훈을 논할 때에 그것에 대해 언급한 일이 있을 때 이 법칙에 의하면,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을 주시며 우리의 유익에 충당되도록 하셨을 때에, 그 물질은 우리에게 맡겨진 것으로 우리가 언젠가는 청산해야 한다고 명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네 보던 일을 셈하라."(16:2) 말씀을 항상 귀에 들리게 하면서 일을 처리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이 셈을 누가 요구하시는가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곧 극기와 단정한 정신과 검소와 절제를 권장하시고 무절제와 자만과 허식과 허영을 극도로 싫어하시는 분이다. 유용한 물질을 분배하더라도 사랑이 동반되지 않으면, 그것을 시인하시지 않았다. 사람을 즐겁게 하는 물건이 사람의 정신을 정절과 순결에서 떠나게 하거나, 그 마음을 흐리게 할 때에는 친히 전적으로 배격하셨다.

 

6. 주의 부르심이 우리의 생활양식의 기초임

 

끝으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주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이 모든 행동에서 각각 자기의 소명에 관심을 둘 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께서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큰 불안으로 타오르며, 얼마나 경박하고 방탕하며, 여러 가지 것을 한꺼번에 움켜잡으려는 야심이 얼마나 맹렬한가를 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매하고 경솔한 우리가 만사를 혼란에 빠뜨리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각 사람에게 그 독특한 생활양식에 따라 의무를 지정하셨다. 그리고 아무도 자기의 한계를 경솔히 벗어나지 않도록, 그 다양한 생활들을 소명이라고 부르셨다. 그러므로 각 개인에게는 주께서 지정하신 생활 방식이 있다. 그것은 일종의 초소와 같아서, 사람이 생각 없이 인생을 방탕하지 않도록 하시려고 지정하신 것이다. 이 구별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주의 앞에서 이 구별의 표준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이나 철학적 이론과는 그 판단이 훨씬 다를 때가 많다. 철학자들도 조국을 압제자의 손에서 해방하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이 고귀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사로운 개인이 직접 압제자에게 손을 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정죄하셨다(삼상 24:7,11, 26:9).

그러나 이 이상 더 예를 들지 않겠다. 모든 일에 있어서 선행의 시초와 기초는 주의 부르심에 있다는 것만 알면 넉넉하다. 주의 부르심에 전심하지 않는 사람은 의무의 길을 결코 바르게 걷지 못할 것이다. 간혹 칭찬할 만한 일을 할는지 모르나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는 배척을 받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런 사람의 생활의 각 부분 사이에는 조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이 이 목표를 향하고 있을 때에 가장 잘 정리될 것이다. 소명의 한계를 넘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아무도 경솔하게 굴어서 소명이 허락하지 않은 일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미천한 처지에 있는 사람은 아무 불평 없이 자기의 생활을 해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대열을 이탈하지 않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의 인도자이심을 알면, 걱정과 수고와 곤란과 그 밖의 짐이 있더라도, 적지 않은 위안을 받게 될 것이다. 정치하는 사람은 더욱 기꺼이 직무를 수행할 것이요, 일가의 가장은 그 의무에 전심할 것이다. 각자의 생활양식에서 받는 불편과 근심과 권태와 불안에 대해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지워주신 것이라고 믿을 때에,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참고 견딜 것이다. 여기서 또한 소명임을 알고 순종하면, 아무리 낮고 천한 일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빛날 것이며 아주 귀한 것으로 인정받을 것이라는 유일한 위안이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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