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장 믿음에 의한 칭의 : 명칭과 문제에 대한 정의
(칭의와 중생 : 용어를 정의함. 1-4)
1. 칭의의 교리가 갖는 그 위치와 의미
율법 아래서 저주를 받은 인간을 위하여 구원을 회복하는 수단이 단하나 남아 있다는 것을, 즉, 믿음으로 회복하는 수단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나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 이미 설명했다고 믿는다. 믿음 자체는 무엇인가라는 것과 믿음이 사람에게 주는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이 사람 안에서 일으키는 결과도 설명했다고 믿는다. 이제 이 설명들을 요약하겠다. 관대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를 붙잡고 소유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써 우리는 주로 이중의 은혜를 받는다. 첫째는 흠 없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써 우리가 하늘의 심판자대신 은혜로우신 아버지를 소유할 수 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성화됨으로써 우리는 흠 없고 순결한 생활을 신장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선물 중의 둘째인 중생에 대해서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될 만큼 말했다. 칭의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보다 가볍게 논했다. 왜냐하면 먼저 믿음은 선행을 겸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 편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만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는다. 그리고 이 문제가 부분적으로 관련된 선행의 문제를 성도들의 선행의 성격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 문제들을 철저하게 토의해야 한다. 그리고 이 토의를 진행할 때에, 이것이 종교 생활의 요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 문제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그리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을 우선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구원을 세울 토대가 없으며, 하나님께 대한 경건을 수립할 기초도 없기 때문이다. 이 일을 알아야 할 필요성은 그것에 대한 지식에서 더 잘 나타날 것이다.
2. 칭의의 개념
우리는 출발점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모르는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할 때에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 우선 다음과 같은 표현들의 뜻을 설명하도록 하자. 즉,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과 믿음에 의해서 또는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표현들이다. 하나님의 판단으로 의롭다고 인정되며, 의롭기 때문에 용납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불법을 미워하시므로 죄인이 죄인인 동안은 그리고 죄인으로 인정되는 동안은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지 못한다. 따라서 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와 벌이 나타난다. 그런데 죄인이 아니고 의로운 사람으로 여겨지는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굳게 서며 모든 죄인들은 넘어진다.
무죄한 사람이 고소를 당해서 공정한 재판관 앞에 불려갔을 때에, 그의 무죄한 사실대로 판결이 나면, 그는 재판관 앞에서 "정당한 것이 인정되었다."("의롭다함을 얻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이 죄인들과의 교제에서 풀려나고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증거하시며 확인해주실 때,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 같은 방식으로 어떤 사람의 생활이 순결하고 거룩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의롭다는 증언을 얻을 만할 때에는, 그는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한다. 또는 그 행위의 완전성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그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한다. 그와 반대로 행위에 의해서는 바르다는 증거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 신앙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아, 그 의를 입고 하나님 앞에 나타날 때에는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의로운 사람으로서 나타날 때에는 신앙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를 간단히 설명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이라고 한다. 또 칭의는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3. 성경에 있는 용법
이 사실을 확인하는 명백한 증거가 성경에 많다. 우선 이것이 이 용어의 바른 뜻이며 가장 많이 통용되는 뜻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구절을 수집하고 비교하는 것은 너무 긴 작업이고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므로 그들의 주의를 환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리의 논제인 칭의를 특별히 다룬 구절을 몇 개만 소개하겠다.
누가복음에서는 일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했으며(눅 7:29), 그리스도께서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의롭다함을) 얻느니라."고 하셨다(눅 7:35). 첫 구절에서(29절) 누가는 백성이 하나님께 의를 드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의는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는 일이 없으며, 온 세상이 빼앗으려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35절에서도 누가는 구원에 대교리의 정당성을 변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교리는 그 자체가 정한 것이다. 누가의 이 두 구절은 같은 표현을 지니고 있다. 즉, 하나님과 그의 교훈에 마땅히 받으셔야 할 찬양을 드린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을 스스로 옳다(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라고 꾸짖으실 때에(눅 16:15), 말씀하시는 뜻은 그들이 선행으로 의를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의가 없으면서 의롭다는 세평을 얻으려는 야심을 품었다는 것이다. 히브리어에 능통한 사람들은 이 뜻을 더 잘 이해한다. 히브리어로는 자기의 죄를 아는 사람들뿐 아니라, 정죄를 받는 사람들도 "죄인"이라고 부른다. 밧세바가 자기와 솔로몬이 "죄인"이라고 한 것은(왕상 1:21)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와 아들은 수치를 당하며 죄인과 정죄받은 자들같이 인정되리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문장의 전후 관계로 보아서, 라틴어로 읽을 때에도 이 말은 어떤 성질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만 해석해야 된다는 것을 곧 알 수 있다.3a)
그러나 당면한 문제에 관련해서, 바울이 성경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이방인들을 의롭다 하실 것을 미리 알았다고 말할 때에(갈 3:8), 이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에 의해서 의를 전가하신다는 뜻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지 않은가? 또 바울이 그리스도를 믿는 불경건한 자를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다고 말할 때(롬 3:26). 그것은 불경건하여 당연히 정죄를 받을 사람들이 믿음의 덕택으로 그 정죄에서 풀려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점은 그가 결론으로 외친 말에서 더욱 명백하게 나타난다. "누가 능히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이것을 바꿔 말하면 "하나님이 사면해주신 사람들을 누가 고소할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변호하며 보호하시는 사람들을 누가 정죄하겠는가?"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의롭게 한다."는 뜻은 고소를 당한 사람에 대해서, 마치 그의 무죄가 확정된 것같이, 그 죄책이 없다고 무죄 석방을 선고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중재로 의롭다고 하시므로 하나님의 이 사면은 우리 자신의 무죄가 확증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셨기 때문이며, 그 결과로 우리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사도행전 13장에 있는 바울의 설교에 이런 말이 있다.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 여기에 보면 죄의 용서를 말한 후에, 그에 대한 해석으로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말을 한다.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을 분명히 죄의 사면으로 해석하며, 의롭다함을 율법의 행위에서 분리시키고 있다. 의롭다함은 순전히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그것은 믿음에 의해서 받는다고 한다. 끝으로, 보속이 도입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죄의 용서와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고 바울은 말한다. 그래서 세리가 의롭다함을 받고 성전에서 내려갔다고 할 때에(눅 18:14), 그가 어떠한 행위의 공로로 의를 성취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죄의 용서를 받은 후에는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리가 옳은 사람이 된 것은 그의 행위가 옳다는 인정을 받아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거저 사면해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암브로시우스가 죄의 고백은 합법적인 칭의라고 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었다.
4. 칭의는 곧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용납이며 죄의 용서이다
용어에 대한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 말이 표현하려는 내용 자체를 주시한다면, 거기에는 아무 의심도 없다. 에베소서 1장 5-6절에서 바울은 확실히 "용납"이란 말로써 칭의에 대해서 말한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5-6). 이것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고 한 것과 똑같은 뜻이다. 그뿐 아니라, 로마서 4장에서 그는 처음으로 칭의를 "의의 전가"라고 부르며 칭의를 죄의 용서에 포함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사함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7, 시 32:1)고 말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칭의의 일부분이 아니라, 그 전체를 논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다윗이 죄를 값없이 용서받은 사람들은 행복하다고(시 32:1-2) 그 선언한 그 정의에 찬성한다. 이것을 보면 바울이 말하는 의는 단순히 죄액의 반대 개념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가장 좋은 구절은, 그가 복음 전파사명의 요점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곳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그의 은혜 가운데 기꺼이 받아들이시며,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시지 않기 때문이다(고후 5:18-20). 나는 독자들이 이 구절 전체를 심사숙고하기를 바란다. 이는 바울이 조금 뒤에 일종의 설명을 붙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고후 5:21) 화해의 수단이었다고 한다(고후 5:18-19 참조). 그가 "화해됨"이란 말과 "의로 인정됨"이란 말을 같은 뜻으로 쓰는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그는 다른 곳에서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고 가르치는데, 이 주장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우리 자신과는 별개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간주되지 않는다면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오시안더(Osionder)의 "본질적 의"라는 생각을 논박함. 5-12)
5. 오시안더의 "본질적 의"라는 사상
그러나 오시안더(Osiander)는 "본질적 의"라는 이상한 괴물을 도입해서, 값없이 주시는 의를 폐지하려는 것은 아니나 이 의를 깊은 안개 속에 묻어버리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생하게 체험하지 못하게 만든다. 다른 문제들로 넘어 가기 전에, 이 황당무계한 공상을 반박할 필요가 있다.
우선 이 사변은 단순히 무기력한 호기심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가 성경에서 많은 증거를 수집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하나이며, 우리는 그와 하나인 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이 결합의 유대를 보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속는다. 그가 빠진 난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쉬운 일인데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의 신비한 힘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결합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시안더는 하나님의 본질을 사람 속에 이입하기 위해서 마니교와 비슷한 그 무엇을 생각하였다. 여기서부터 다른 공상이 생겨났다. 즉,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은 그리스도가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이미 인간성의 원형으로 예정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간단한 서술을 원하므로 그전의 문제에 주의를 집중하겠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라고 오시안더는 말하는데 우리도 그 말에 찬성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본질과 우리의 본질이 혼합된다고 하는 데는 반대한다. 그리고 그는 이 원칙을 그의 기만적인 개념들에 잘못 적용한다고 우리는 주장하는 바이다. 예컨대,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인인 것은 그가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의의 원천이시며, 하나님의 의 자체이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의 계획대로 다른 곳으로 넘겨야 할 문제를 여기서 간단히 다루는 것을 독자들은 양해하기 바란다. 그는 "본질적인 의"라는 용어에 대해서, 그것을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롭다고 인정된다는 견해에 응답할 뿐이라고 변명하지만 그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적 죽음에 의해서 받는 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생각을 분명히 발표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이 우리 안에 주입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본질적으로 의롭다고 생각한다. 그가 그리스도뿐 아니라, 아버지와 성령도 우리 안에 계시다고 맹렬히 주장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나는 이것을 옳은 생각이라고 인정하지만 그는 이 생각을 패역하게 왜곡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내주의 방식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와 성령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며, 신성의 충만함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골 2:9), 그의 안에서 우리도 신성 전체를 소유한다는 것을 그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아버지와 성령에 관해서 따로 제시하는 것은 단순한 사람들을 꾀어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도록 도울 뿐이다.
그 다음에 그는 여러 가지 실체를 혼합하여,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우리 속에 주입하심으로 우리를 그의 일부로 만드신다고 한다.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자라며, 그가 우리의 머리가 되시며, 우리가 그의 지체가 되는 사실에 대해서, 오시안더는 그리스도의 본질이 우리의 본질과 섞이는 것이 아니라면, 거의 아무 중요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과 성령에 대해서 말할 때에, 다음과 같이 자기 생각을 더욱 밝히 나타낸다. 즉, 우리는 중보자의 은혜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며, 중보자 안에서 의가 단순히 또는 완전히 제공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이 우리와 본질적으로 결합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6. 오시안더는 죄의 용서와 중생을 혼합한다
가령 그가 한 말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실 때에, 본질의 결합에 의해서 그는 우리 것이 되시며 그것은 그가 사람이시므로 우리의 머리가 되실 뿐 아니라, 신성의 본질이 우리 안에 주입되기 때문이라는 것임을 상상해 보자. 그렇다면 그는 이런 진미를 먹어도 해(害)가 덜했을 것이며, 이 망상으로 인한 큰 싸움도 일어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원칙은 검고 탁한 피를 뿜어 그 많은 꼬리를 숨기는 오징어와 같다. 우리에게 구원을 자랑할 확신을 주는 유일한 의를 우리가 알면서 또 기꺼이 빼앗기고자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원칙을 맹렬히 배척해야 한다. 그는 이 논쟁 전체를 통해서 "의"라는 명사와 "의롭다함"이라는 동사의10a)뜻을 두 방향으로 연장한다. 그래서 첫째는,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은 값없이 받는 용서에 의해서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의롭게 되는 것이며 의는 값없이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이 우리 안에 거하면서 감동시키는 거룩함과 의로움이라고 한다. 둘째로, 그는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의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죄를 속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푸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이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생명이시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첫째 점을, 즉, 하나님께서 의롭다하심은 용서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중생에 의한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하신 후에, 그들의 악을 하나도 고치지 않고 그들을 본성대로 버려두시겠느냐고 묻는다. 이것은 대답하기가 매우 쉽다. 그리스도를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없는 것과 같이, 그의 안에 있는 두 속성, 즉, 의와 거룩하심도 서로 분리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 가운데 받아들이신 사람에게 동시에 양자의 영을 주셔서(롬 8:15), 이 영의 힘으로 자신의 형상에 따라 사람을 개도하신다. 그러나 태양의 빛과 열을 서로 분리할 수 없다고 해서 우리는 태양의 빛이 지구를 덥게 하고 태양의 열이 지구를 비춘다고 하는가? 목전의 문제에 대해서 이 비교보다 더 적절한 것이 있는가? 태양은 그 열에 의해서 땅에 생명과 열매를 주며, 그 광선에 의해서 땅을 비추며 밝게 한다. 이에는 서로 뗄 수 없는 관련이 있다. 그러나 한쪽의 특성을 다른 쪽으로 옮기는 것은 이성이 금한다. 오시안더가 두 가지 은혜를 흔동하는 데는 그와 비슷한 불합리성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의를 보존하시기 위하여 값없이 의롭다고 간주하신 사람들을 새롭게 하시기 때문에 오시안더는 이 중생의 선물과 값없이 용납하심을 혼합해서 이 둘은 하나요,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두 가지를 연결시키면서도 따로따로 기록하여,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가 우리에게 더 잘 보이게 한다. 바울이 우리의 의와 성화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할 때에(고전 1:30), 그는 불필요한 말을 붙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우리를 위하여 얻으신 구원과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출발점으로 삼아우리는 거룩하며 정결하게 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고 논할 때, 그는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과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암시한다.
성경에 관해서 오시안더는 성경 구절을 인용할 때마다 그릇된 해석을 한다. "일하는 자"가 아니라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는 바울의 언명에 대해서(롬 4:4-5), 그는 "의롭다함"을 "의롭게 만든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똑같이 경솔하게 그는 로마서 4장 전장을 곡해한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인용한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도(롬 8:33) 그는 동일한 속임수로 변질시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 구절에서는 단순히 죄책과 무죄 방면이 문제가 된 것이 분명하고 사도가 말하려는 뜻은 이 대조를 토대로 한 것이다. 결론에 있어서나 성경을 인용하는데 있어서 오시안더는 자기 자신이 무능한 해석자임을 증명하였다.
"의"라는 말에 대한 그의 논의도 이보다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없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인정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의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여러 가지 덕에서 뛰어나게 된 후였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보면, 그는 두 개의 건전한 발언에서 출발하여 그릇된 생각으로 하나의 거짓말을 만들어낸 것 같다. 여기서 언급된 의는 아브라함이 소명을 받은 과정 전체에 관련된 것이 아니다.
그는 탁월하게 선한 사람이었고 장기간 그것들을 견지함으로써 더욱 선을 쌓았지만, 여기서 성령이 증거하시는 것은 다만 그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였을 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능숙하게 주장하는 것과 같이, 이 사실에서 칭의에는 행위가 전연 문제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7. 칭의를 위한 믿음의 의의
믿음 자체에는 의롭다 할 능력이 없고 그 능력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데서 온다고 오시안더는 항변한다. 나도 이 항의를 기꺼이 인정한다. 만일 믿음이 독자적으로 또는 어떤 고유한 능력에 의해서 의롭다 한다면, 믿음은 항상 약하고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의롭다 하는 일을 부분적으로밖에 하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구원의 한 단편만을 주는 의는 불완전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상상을 하지 않는다. 올바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만이 의롭다 하실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음에,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의롭다 하는 기능을 그리스도에게 옮긴다. 우리는 믿음을 일종의 그릇에 비교한다. 빈 영혼, 즉, 입을 벌린 영혼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를 받기 전에 믿음으로 그를 받아들인다고 우리가 가르치는 것이, 의롭다 하는 권한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빼앗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이 궤변가가 "믿음은 그리스도다."라고 말하는 그 왜곡된 비유를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금이 들어 있다고 해서 질그릇을 보물이라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이치는 마찬가지다. 믿음 자체는 가치나 값이 없는 것이지만,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를 의롭다고 할 수 있다. 돈이 가득한 질그릇이 부자를 만드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는 믿음은 의를 닫기 위한 그릇에 불과하며, 무지한 자들이 믿음과 그리스도를 혼동하지만, 그리스도는 이 위대한 은혜의 중요한 근거인 동시에 그 원천이자 분배자시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것으로 우리는 칭의를 고려할 때에 "믿음"이란 말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문제를 처리하였다.
8.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에 의해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오시안더의 주장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문제에 대해서 오시안더는 외면적인 말씀의 작용으로 내면적인 말씀을 받는다고 한다. 이런 주장으로 그는 우리를 제사장이시며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분리시켜 그의 외면적인 신성으로 인도하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양성을 분할하지 않고 그 육신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심으로써 우리에게 의를 주신 이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시며, 또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중보자로서의 의무를 이행하거나 우리를 위하여 의를 획득하실 수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오시안더의 견해는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므로 그의 신성에 의하여 우리의 의가 되셨으며, 그의 인성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말이 신성에 관해서 옳게 적용된 것이라면, 특히 그리스도께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성령께도 공통으로 적용된 것이다. 한쪽의 의가 다른 쪽의 의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본래 영원부터 계셨으므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일관성이 없는 것이다. 가령 하나님이 우리의 의가 되셨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생각은 바울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가 되게 하셨다는 말과(고전 1:30) 어떻게 조화되는가?
이것은 중보자로서의 위격의 특이한 점이다. 이 위격에는 신성이 내포되지만 고유한 명칭에 의해 중보자는 아버지나 성령과는 구별된다.
오시안더는 여호와가 우리의 의가 되시리라고 약속한 예레미야의 말 하나를(렘 51:10, 23:6, 33:16 참조) 어리석게도 기뻐한다. 그러나 그는 이 말에서,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이시라는(딤전 3:16 참조) 사실 밖에는 추론해 내지 못할 것이다. 다른 곳에서 우리는 바울의 설교에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한 말을(행 20:28) 인용했다. 이 말에서 죄를 대속한 피는 하나님의 것이며 신성을 가진 것이라고 추론한다면, 누가 이런 추악한 오류를 용인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시안더는 이 대단히 유치한 항변으로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생각한다. 그는 의기양양해서 기뻐 날뛰며, 여러 장에 호언장담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말은 곧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여호와가 다윗의 후손이 되실 때에 경건한 자들의 의가 되겠다고 하시는 것인데, 이사야는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라는(사 53:11) 의미에서 그렇게 가르친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이는 아버지시라는 사실과 그가 의롭게 하는 일을 아들에게 맡기셨다는 사실과 그 이유로서 아들이 의롭다는 것을 부언하신 사실과 가르침 안에 그들이 말하는 대로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알리시는 그 방법과 수단을 두셨다는 것에 유의하자. 여기에 있는 다아트(t[d)라는 말은 피동형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당하다. 그러므로 첫째, 그리스도께서 의가 되신 것은 그가 "종의 형체를 가진" 때이며(빌 2:7) 둘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은 스스로 아버지에게 복종하셨기 때문이다(빌 2:8). 그러므로 그가 우리를 위하여 이 일을 하시는 것은 그의 신성에 의해서 하시는 것이 아니고 명령을 받은 직무에 따라서 하신 것이다. 하나님만이 의의 원천이시며,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써 우리는 의롭게 되지만, 불행하게도 하나님께 반대하여 그의 의에서 이탈되었기 때문에, 이 비교적 낮은 방법을 써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의 권능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게 할 수밖에 없다.
9. 중보자의 하시는 일로서의 칭의
만일 오시안더가 이 사역은 그 우월한 가치 때문에 인간성을 초월한 것이며 따라서 신성에 돌릴 수밖에 없다고 반박한다면 나는 첫번째 반박은 인정한다. 그러나 둘째 반박에 관해서는 그가 큰 망상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우리의 영혼을 그의 피로 정결하게 하실 수 없었을 것이며, 그의 회생으로 그의 아버지의 노여움을 풀지 못했을 것이며, 우리의 죄책을 사면할 수 없으셨을 것이다. 요약하면, 제사장의 직책을 다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육의 힘으로는 그 무거운 짐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이 모든 일을 그의 인성에 따라서 수행하셨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었느냐고 물으면, 바울도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라고 대답하기 때문이다(롬 5:19 참조). 그러나 그는 종의 모습을 취하시지 않고(빌 2:7) 어떤 다른 방법으로 복종 하셨겠는가?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우리는 그의 육신에서 의가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결론을 내린다. 마찬가지로 다른 말로서 바울은 의의 근원을 그리스도의 육신에만 둔다. 그런데 나는 오시안더가 바울의 이 말을 자주 인용하는 것을 보고 놀란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오시안더는 하나님의 의를 큰 소리로 찬양하며,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유령 같은 "본질적 의"를 확인하시는 듯이 개선가를 부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속죄를 통해서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말은 뜻이 훨씬 다르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 하나님이 시인하시는 의라는 옷이라는 것은 어린 학생들도 다 아는 일이며,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영광을 비교하는 것과 같다(요 12:43, 5:44). 간혹 그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의의 근원이며, 그 의를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인 것도 나는 안다. 그러나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분별력이 있는 독자들은 이 표현의 뜻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회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임을 이해할 것이다.
오시안더가 우리와 의견이 일치한다면 용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그가 우리를 위해서 속죄 제물이 되셨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속죄 제물이 된다는 것은 그의 신성과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의와 구원에 인을 치시고자 하셨을 때에, 자신의 육신으로 확실한 보증을 삼으셨다.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부르시고(요 6:48), 그 이유를 설명하시려고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부언하셨다(요6:55). 이런 교수 방법은 성례전에서 볼 수 있다. 성례전은 우리의 믿음을 부분적인 그리스도가 아니라, 전체적인 그리스도로 향하게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의와 구원의 두 가지가 그의 육신에 내주한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사람으로서 자신의 힘으로 의롭다 하며 생명을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숨겨져 있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중보자 안에서 계시하시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평소에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해서 열려 있는 샘이라고 말한다. 깊고 은밀한 샘 속에 숨겨져 있어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을 것을 우리는 이 샘에서 길어내며 또 중보자라는 존재를 통해서 그것은 우리에게로 나온다. 이런 방법으로 또 이런 의미에서, 만일 내가 제시한 확고하고 분명한 이유들을 오시안더가 수락한다면, 나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으로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며, 또 이 일은 아버지와 성령께도 공통된 일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며, 끝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나누게 하시는 의는 영원한 하나님의 영원한 의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10.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어떤 성격을 가졌는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오시안더의 트집에 속지 않도록, 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실 때까지 우리는 이 비할 데 없는 선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러므로 머리와 지체들과의 결합, 즉,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내주하심을 간단히 말하면, 신비로운 연합을 우리는 최고로 중요시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유자가 되심으로써 그가 받은 선물을 우리도 나눠가지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밖에 계신 그리스도를 멀리서 바라봄으로써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옷 입으며 그의 몸에 접붙여지기 때문에, 간단히 말해서 그가 우리를 자기와 하나로 만드시기 때문에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의의 친교를 가졌다는 것을 자랑함으로써 믿음을 의로 생각한다고 하는 오시안더의 중상을 반박하였다.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마음을 비우고 나가서, 그의 은혜를 받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여 그만이 우리 안에 계시게 한다고 우리가 말할 때, 마치 우리가 그리스도의 권리를 빼앗는 것같이, 그는 우리를 중상한다. 그러나 이 영적인 유대를 멸시하는 그는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혼합하여 큰 오류를 범한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광적인 오류, 즉, "본질적 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쯔빙글리과(Zwinglian)"라고 불러 그의 악의를 드러낸다. 그것은 그들이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본체를 먹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교만하고 자신의 기만에 걸린 사람에게서 모욕을 받는다는 것을 최고의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나뿐 아니라 마땅히 겸손한 마음으로 공결해야 할 세계적 학자들까지도 공격한다. 나는 나 개인의 문제를 변호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의 공격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게는 아무런 악한 동기가 없기 때문에, 이 일을 더욱 진지하게 변호한다.
그가 그리스도의 본질적 의와 본질적 내주를 열광적으로 고집하는 사실에는 다음과 같은 결과가 따른다. 우선, 그가 성만찬에서 몸을 먹는다고 공상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도 일종의 조잡한 혼합물로서, 우리 속에 자신을 주입한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의를 불어 보내어, 우리가 그와 함께 참으로 의롭게 되게 하신다고 한다. 오시안더에 의하면, 이 의는 하나님 자신인 동시에, 하나님의 선 또는 거룩이나 완전성이라고 한다.
나는 그가 제시하는 성경의 증명들을 반박하는 데 많은 노력을 허비하지 않겠다. 그는 그릇되이 성경을 인용해서 그 뜻을 왜곡하여 하늘의 삶을 현세의 상태로 바꿔버린다. 베드로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너희로…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라고 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종말에 오실 때에 우리가 어떻게 되리라고 하는 복음의 약속이 현재 이루어진 것 같은 생각이다. 참으로 요한은,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요일 3:2).
나는 한 작은 예만을 독자들에게 보이려고 하였다. 따라서 의식적으로 이 무가치한 일들을 무시한다. 반박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지루하고 무익한 수고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11. 오시안더의 본질적 의라는 생각은 구원의 확실성을 소멸시킨다
그러나 오시안더 사상의 둘째 단계, 즉,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의롭다고 하는 데는 더 많은 해독이 숨어 있다. 나는 총명하고 경건한 독자들이 이 가상을 기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다지 유해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냉담하며 내용이 빈약하며 공허함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원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약화시키며, 우리를 구름 위로 들어가게 함으로써 우리의 고요한 기도, 즉, 속죄를 믿고 은혜를 받아들여, 고요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중 의라는 것을 구실로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불경건이다.
오시안더는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을 법적인 용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비웃는다. 우리는 실지로 의로워야 한다는 것이 그가 비웃는 이유이다. 그는 또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무엇보다도 멸시한다. 그렇다면, 만일 하나님께서 무죄 방면과 사죄로 우리를 의롭다 하지 않으신다면 바울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한 것은(고후 5:19)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21절). 우선 나는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들이 의롭다고 인정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에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심으로써 의롭다 하신다는 뜻이 포함되었다. 이것은 다른 구절에서 칭의가 송사와 대립되는 것과 같다. 이 대조법을 보더라도 이 표현이 법적인 용어에서 왔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히브리어를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정신이 바른 사람이라면, 이 말의 근원이 여기 있었다는 것을, 따라서 그 경향과 뜻이 여기서 왔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다윗이 "허물의 사함을 얻고…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한 말은(시 32:1, 롬 4:7) 행위가 없이 받는 의를 묘사한 것이라고 바울이 말할 때, 이것이 완전한 정의인지 또는 불완전한 정의인지를 오시안더는 내게 대답하라. 바울이 예언자를 인용한 것은 죄의 용서가 의의 일부분이라든가 또는 사람을 의롭다 하는 일의 부수물에 불과하다든가 하는 주장을 지지하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바울은 값없이 받는 용서에 의의 전체를 포함시킨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죄를 덮어주시며, 그 불법을 용서하시고, 그 죄과를 그 앞으로 돌리시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선언한다.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바울이 판단하고 인정하는 이유는 그가 이런 방식으로, 즉, 자기의 원래의 본질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다만 전가에 의해서 의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시안더는 여전히 악한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며, 그의 본성에 배치되는 짓이 된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이미 말한 것을 생각해야 한다. 즉, 칭의의 은혜와 중생은 서로 다른 일이지만 동시에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의인에게도 죄의 흔적이 항상 남아 있다는 것은 경험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므로 그들의 칭의와 생활의 변화는(롬 6:4 참조) 매우 다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이 둘째 단계를 시작하신 후에, 평생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전진하시며, 어떤 때에는 그 전진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사람은 언제든지 그의 심판대 앞에서 항상 죽음의 판결을 받을 위험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분적이 아니고 너그럽게 의롭다고 여겨주셔서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순결을 가진 듯이 하늘에 나타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이 확실해지기까지는 부분적인 의만으로는 우리의 양심에 평화를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칭의에 대한 어떤 주장이 사람의 마음에 의혹을 불어넣으며, 구원에 대한 확신을 동요시키며, 하나님께 대한 자유롭고 담대한 기도를 방해하여 평화와 평온과 영적 기쁨을 주지 못할 때에, 그런 주장은 패악한 것이며 완전히 깨뜨려야 갈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반대 명제를 써서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며(갈 3:18), 만일 그렇지 않다면 "믿음은 헛것이라"고 추론한다(롬 4:14). 행위에 중점을 두는 믿음은 흔들린다. 이는 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도 행위에서는 의지할 것을 전연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칭의와 중생을 오시안더는 "이중의 의"라는 말로 혼동하지만, 바울은 명백하게 구별한다. 그는 자기가 현재 가지고 있는 의에 대해서자기가 받은 바른 성품, 오시안더가 "본질적 의"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비통하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부르짖는다. 그러나 그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을 근거로 한 의에서 피난처를 구하며, 거기서 생명과 사망과 비난과 기아와 전쟁과 기타 고난을 영광스럽게 극복하였다고 한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롬 8:33). 아무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롬 8:38-39). 그는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위하여 완전하고 충분하며 유일한 의를 가졌으며, 그래서 그는 자랑할 확신이 감해지지 않으며, 그가 조금 전에 자기의 처지라고 통탄해 하던 비참한 노예 상태에서도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이 차이는 불의의 짐에 눌려 신음하지만 동시에 승리의 확신을 품고 모든 공포심을 극복하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충분히 또 익숙히 살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는 오시안더의 항변을 와해시킨다. 그는 성도들에게 이 "이중의 의"를 털옷같이 입히지만, 역시 사람은 죄를 용서받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적어도 본래의 의가 없는 자들이 세상이 선하다고 인정하는 일정한 비례에 따라 의롭다고 간주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죄인이 인간적인 의 대신에 거저 주시는 의를 받는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까지 구분할 수 있는가? 한 근씩인가 또는 한 푼씩인가? 물론 그는 확신이 없을 것이다. 확신을 가지기에 충분한 의가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므로 좌우로 흔들릴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법을 제정하려는 사람이 이 문제에 대한 재판관이 아니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는 확고한 말씀이 있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
최고의 심판자가 값없이 사면하실 때에 그를 정죄하며, "나는…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고 하시는 말씀이 그 완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큰 참람한 행위인가?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으로 견제하신 모세의 중보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아무도 용서하시지 말아 달라고 한 뜻이 아니라, 백성에게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책하지 말고 모두 한결같이 사면해 주시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멸망할 사람들이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한다.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은 그가 의롭다고 하신 사람들만을 사랑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칭의의 놀라운 계획이 있다. 즉,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의를 입음으로써 자기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무서워하지 않으며, 그들이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것은 옳지만, 동시에 그들 자신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닌 의로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12. 오시안더를 논함
오시안더가 독자들에게서 숨기고 있지 않다고 장담하는 그 신비에 대해서 나는 독자들에게 조심스럽게 주목하도록 경고한다. 우선 그는 장황한 말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전가받기만 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데(그의 말을 쓴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의롭지 않은 자를 의롭다고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끝에 가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의로서 주신 것은 그의 인성이 아니라, 신성에 의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 의는 중보자로서의 위격에서만 발견되는 것이지만, 여전히 사람의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 그런데 그는 두 가지 의로써 그의 밧줄을 꼬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그리스도의 인성에서 의롭다 하는 직무를 제거해 버린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그의 논쟁 방법을 알 필요가 있다. 같은 곳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다고 하지만(고전 1:30), 이것은 영원한 말씀에만 적용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의가 아니라고 한다. 나는 대답한다. 하나님의 독생자는 참으로 그의 영원한 지혜였으나, 바울 서신에서는 다른 방법으로 이 이름을 그에게 적용하였는데 그것은 그의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기 때문이다(골 2:3). 그는 아버지와 함께 가지셨던 것을(요 17:5 참조) 우리에게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본질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습에 적용되며, 그리스도의 인성에 잘 부합한다. 그가 육신을 입으시기 전에도 빛은 암흑에 비취었으나(요 1:5), 그리스도께서 인성으로 의의 태양으로서 나타나시기까지는 그리고 자기를 "세상의 빛"이라고 부르시기까지는(요 8:12), 그 빛은 숨겨져 있었다.
또 오시안더는 미련하게도 의롭다 하는 능력은 어느 피조물의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임명을 받아야만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천사와 인간을 훨씬 초월한 것이라고 반격한다. 천사들은 이 일을 위해서 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께 보속을 치르기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 성과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특히 인간인 그리스도께 속한 일이었다. 그는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려고 율법에 복종하셨기 때문이다(갈 3:13, 4:4 참조)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이신 것은 그의 신성 때문이라고 하는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오시안더는 심히 비열한 비난을 가한다. 그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양성중 한 가지 성은 버리고 더욱이 두 하나님을 만든다고 비난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고 고백은 하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의해서 의로운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를 없애려고(히 2:14 참조) 죽음을 당하신 것으로 보면, 우리는 그를 생명의 근원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가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이라고 해서 그리스도께로부터 이 영광을 빼앗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받아 누리게 하기 위해서 그 의가 어떻게 우리에게 오는가를 밝힐 뿐이다. 이 점에서 오시안더는 가증스런 오류에 빠졌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계시된 것이 하나님의 은밀한 은혜와 권능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의가 하나님의 의라는 사실, 즉,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한다는 사실도 우리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우리를 위한 의와 생명이 있다는 것을 꾸준히 주장한다. 나는 그가 무분별하고 상식을 벗어나서 성경 구절들을 무수히 인용하여 독자들을 번거롭게 하며, 의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본질적 의"라고 해석해야 된다고 하는 부끄러운 행동을 무시하겠다. 예컨대 다윗은 자기를 도와달라고 하나님의 의에 호소할 때에 백 번 이상 호소하지만 오시안더는 번번이 서슴지 않고 그 뜻을 곡해한다.
그가 제기하는 다른 반대도 더 강력한 것이 못된다. 그는 우리를 바르게 행동하도록 움직이는 것이 의라고 정의하는 것이 정확하며 "하나님만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의욕을 일으키며 일을 행하게"(빌 J:13 참조) 하신다고 반박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우리를 개조하셔서 우리 생활을 거룩하고 의롭게 하신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첫째로, 이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직접 하시는지, 그렇지 않으면 아들의 손을 통해서 하시는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성령의 모든 충만하심을 맡기셔서, 그의 풍성함에서 지체들에게 부족한 것을 보충하신다. 다음에, 비록 의는 그의 신성의 은밀한 원천에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지만, 우리를 위해서 육신으로 오셔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신 그리스도가(요 17:19) 그의 신성에 의해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그리스도 자신도 하나님의 의에 의해서 의로우셨으며 만일 아버지의 뜻이 그를 밀어 주시지 않았다면, 그에게 부과된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오시안더가 첨부하는 내용도 이에 못지않게 불합리하다.
이미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 자신의 모든 공로는 온전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것은 오시안더 자신과 단순한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수단인 그의 공상에 아무것도 더 첨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의 의의 원천이며 시초이시므로 우리는 본질적으로 의로우며, 하나님의 의의 본질이 우리 안에 내주한다는 이런 추론을 누가 누구에게 허락하는가?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의로 호심경을 삼으신다"고 한다(사 59:17).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에게 이미 주신 무장을 빼앗으며, 그리스도를 완전히 구속자가 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는가? 예언자가 말하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자신 이외에서는 아무것도 빌려오시지 않으며,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아무 도움도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뜻을 간단하게 다른 말로 바꿔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의를 나타내 보이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한다(롬 3:25). 그러나 이 말이 그가 다른 곳에서 "단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롬 5:19) 한 말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의를 두 가지로 나누어 말하여 가련한 영혼들이 하나님의 순수한 자비에 전적으로 안주할 수 없게 만드는 사람은 희롱으로 그리스도께 가시 면류관을 씌우는 자이다(막 15:17, 기타).
(선행이 의롭다함을 위하여 유효하다고 하는 스콜라 사상을 논박함. 13-20)
13. 믿음에 의한 의와 행위에 의한 의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의는 믿음과 행위로 이루어진다고 상상한다. 우선 믿음에 의한 의와 행위에 의한 의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즉, 한 쪽을 세우면 다른 쪽은 넘어져야 할 정도로 다르다는 것을 밝히기로 하자. 사도는 "모든 것을…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8-9)고 한다. 여기서는 반대 개념들을 비교하면서 그리스도의 의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의 의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밝힌다. 그러므로 사도는 다른 곳에서, 이것이 유대인들이 멸망한 원인이었다고 말한다.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우리 자신의 의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버리는 것이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의를 완전히 버려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우리의 자랑이 없어진다고 말한다(롬 3:27). 여기서 행위에 의한 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동안은 자랑할 이유도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믿음이 모든 자랑을 없애버린다면, 행위에 의한 의를 결코 믿음에 의한 의와 관련시킬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로마서 4장에서 불평이나 구실의 여지가 전연 없다고 명백하게 말한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 4:2). 그러므로 그는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다음에 바울은 반대 개념을 써서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산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빛으로 여기거니와"(롬 4:4)라고 다른 논법을 제시한다. 그러나 은혜로서 주시는 의는 믿음에 따라서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행위의 공로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믿음과 행위의 두 근원에서 나와 합쳐지는 의, 이런 의를 생각 해내는 사람들의 몽상과는 작별해야 한다.
14. 중생한 사람의 행위도 칭의를 얻지 못한다
성경의 뜻을 곡해하며 무의미한 트집 잡기를 오락으로 삼는 이 궤변가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교묘한 핑계를 발견했다고 자부한다. 그들은 "행위"의 뜻을 아직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이 자기의 자유 의지의 노력으로 율법적인 문자에 따라서만 하는 행위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행위"는 영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행위가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선물이며 중생의 결실이라면 사람은 이런 행위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의는 그리스도의 영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으며, 우리 자비의 본성에서 일어나는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울이 자신의 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의를 가로채려고 하는 그들의 태도가 미련하다는 것을 설복한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율법의 의와 복음의 의를 대립시키는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도입하는 이 대오에서는 어떤 명칭이 그 행위들을 미화하든지 간에, 모든 행위가 배제된다(갈 3:11-12). 사도가 가르치려는 것은 율법이 명하는 것을 준행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율법에 의한 의며,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믿는 것이 믿음에 의한 의라는 것이다(롬 10:5,9).
그뿐 아니라, 후에 적당한 곳에서 알게 되겠지만 그리스도의 은혜인 성화와 의는 서로 다르다. 따라서 의롭다하는 힘을 믿음에 돌릴 때에는 영적인 행위까지도 중요시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그의 행위에 의해서 의로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이유가 전연 없었다고 우리가 방금 인용한 구절에서 한 바울의 말은 문자적이며 또는 외적인 유덕한 모양이나 자유 의지의 노력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아브라함의 생활은 영적이었고 거의 천사 같은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기에 충분한 행위의 공로가 그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5. 은혜와 선행에 대한 로마 교회의 교리
스콜라 학자들은 그들의 조작품을 유치하게 혼합한다. 더구나 그들은 그에 못지않게 패악한 사상을 단순하고 부주의한 사람들에게 감염시킨다. 두려움에 떠는 영혼을 진정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뿐인데도 그들은 영과 은혜라는 가면으로 하나님의 자비까지도 덮어버린다. 그런데 우리는 바울과 함께 율법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의롭게 될 만한 특별히 유익한 행위가 없으므로 행위로써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교황주의에 속한 일반 사람들과 스콜라 학자들은 여기서 이중으로 속는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공로에 대한 보상을 기다리는 양심의 화신이 믿음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의를 전가해 주시는 일이라고 해석하지 않고 성화를 추구하는 것을 도와주시는 성령이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8)고 한 말을 읽는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찾는 방법에 유의하지 않는다. 그들의 저술을 보면, "은혜"라는 말을 쓸 때에 그들이 속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롬바르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롭다함을 받는 길이 두 가지라고 설명한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의롭다 하며 동시에 그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이 자극을 받아 우리를 의롭게 만든다고 한다. 둘째로, 이 사랑을 통해서 마귀가 우리를 사로잡는 데 사용하는 죄가 소멸되어, 마귀가 우리를 정죄할 구실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롬바르드가 칭의 안에서 특히 하나님의 은혜를 감지하는 것은 우리가 성령의 은혜에 의해서 선행으로 인도되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다. 분명히 그는 어거스틴의 견해를 따르려고 하였으나 멀리서 따라갈 뿐이며, 바르게 본받지 않고 상당히 어긋난 쪽으로 가기까지 한다. 어거스틴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을 롬바르드는 모호하게 만들며 어거스틴의 생각이 다소 오염된 때에 롬바르드는 아주 썩게 만든다.
스콜라 학파들은 점점 더 타락해서 드디어 파멸에 빠지게 되었고 일종의 펠라기우스주의로 전락하였다. 그런 점에서 어거스틴의 견해를 적어도 그의 표현 방법을 우리는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는 사람에게 의를 얻을 자격이 없다는 것과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서만 온다는 것을 훌륭히 가르치지만, 여전히 은혜를 성화에 포함시키며, 우리는 은혜로 인하여 성령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난다고 한다.
16.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데 대한 성경의 판단
그러나 성경은 믿음에 의한 의에 대해서 이와는 훨씬 다르게 가르친다. 즉, 우리 자신의 행위를 보지 말고 하나님의 자기와 그리스도의 완전성만을 보라고 한다. 참으로 칭의의 순서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그의 순결하고 값없이 베푸시는 인애하심으로써 죄인을 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다른 아무것도 찾으시지 않고 오직 자신의 자비를 불러일으키는 비참한 상태만을 보신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람을 돌보아주실 이유를 자신 안에서 찾으신다. 다음에 사람이 하나님의 인애를 느끼게 하셔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절망을 느끼던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에서 구원 전체의 근거를 얻도록 하신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체험인데 죄인이 복음의 교훈에서 자기가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을 인정할 때에, 그는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소유하게 되며,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와 죄의 용서를 받아 의롭다함을 얻게 된다는 것을 체험한다. 그는 비록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중생하였으나 그가 받을 영원한 의는 그가 원하는 선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의 의 안에 장만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들을 하나씩 숙고한다면, 우리가 표명한 의견이 분명히 설명될 것이다. 여기서 논술한 순서보다 더 좋은 순서로 배열할 수도 있을 것이나 여러 가지 점이 서로 부합하여 우리가 전체 사항을 바르게 설명하고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면, 배열순서는 문제가 아니다.
17. 믿음의 의와 율법의 의에 대한 바울의 견해
믿음과 복음과의 관계에 대해서 위에서 확립한 것을 여기서 회상해야 한다. 복음에서 제시되는 의를 믿음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믿음이 의롭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복음을 통해서 의가 제시된다고 하므로 행위에 대한 고려는 일체 배제된다. 바울은 이 점을 여러 곳에서 밝히지만, 그 중에서도 두 구절에서 가장 명백하게 밝혔다. 그는 로마서에서 율법과 복음을 비교하여,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롬 10:5) 말한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롬 10:6)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롬 10:9) 구원을 얻는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바울이 율법과 복음을 구별해서, 율법은 행위에 의를 돌리고 복음은 행위의 도움을 받지 않고 거저 의를 준다고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은 중요한 구절이며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여되는 의는 율법의 모든 조항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바르게 이해한다면 우리를 많은 곤란에서 구출해 낼 수 있다. 바울이 약속과 율법을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여 빈번히 대립시키는 이유도 여기 있다.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갈 3:18). 같은 장에는 이 생각을 표현하는 여러 구절이 있다.
그런데 물론 율법에도 그 자체의 약속이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하는 비교가 부적당한 것이 아니라면, 복음의 약속에도 어떤 특이한 점이 있을 것이다. 복음의 약속은 값없이 주는 것,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존하는 것이지만, 율법의 약속은 행위를 조건으로 삼은 것이다. 이것이 그 차이점이 아닌가? 사람이 자기의 힘과 자유 의지로 하나님 앞에서 주책없이 의를 자랑할 때에, 그런 의만이 배척되는 것이라고 하여 나를 반대하고 위협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바울은 오해할 여지가 없는 말로 행위를 요구하는 율법은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하기 때문이다(롬 8:3 참조). 보통 사람뿐 아니라, 가장 완전한 사람이라도 율법을 완전히 행할 수는 없다. 물론, 율법의 극치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인도하여 이런 사랑을 품게 만들 때에 왜 그것이 우리의 의의원인이 되지 못하는가? 성자들도 사랑이 불완전하며, 따라서 그 자체로서는 상을 받을 공로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18. 칭의는 행위에 대한 보수가 아니고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둘째 구절은 이것이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갈 3:11-12 참조). 행위는 믿음을 고려하지 않고 완전히 믿음에서 분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찬성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주장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율법과 믿음은 다르다고 말한다. 왜 그런가? 율법의 의를 위해서는 행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의를 위해서는 행위가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관계를 보면,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 사람들은 행위의 공로와는 별개로, 즉, 행위의 공로가 없이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분명하다. 믿음은 복음이 말해주는 의를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복음이 율법과 다른 점은 의를 행위에 연결시키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만 맡기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자랑할 이유가 없다(롬 4:2-3)고 주장하는 것도 이와 같다. 그리고 바울은 이 주장을 강화하는 의미에서, 보수를 받을 만한 행위가 없는 곳에서 믿음의 의가 성립된다고 부언한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참으로 그가 여기서 쓰는 말들의 뜻은 이 구절에도 적용된다. 그는 조금 후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유업을 받으며, 이 일은 은혜로써 오는 것이라고 부언한다. 또한 믿음으로 받는 것이니, 이 유업은 거저 받는 것이라고 추론한다(롬 4:16 참조). 믿음이 행위의 도움을 받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면, 바울의 추론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겠는가? 그는 다른 구절에서도 확실히 같은 의미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것이라"고 가르친다(롬 3:21). 그는 율법을 배제함으로써, 우리가 행위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나 행함으로써 의를 얻는다는 생각을 부정한다. 우리는 빈손으로 의를 받게 되는 것이다.
19. "믿음만으로" 통해서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롬 3:28) 하는 우리의 교리에 대해서, 궤변가들이 잡는 트집이 어느 정도로 공정한가를 독자는 이제 알 것이다.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씀이 성경에 빈번히 나오기 때문에 그들은 감히 이 교리를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만"이란 말이 성경에 없기 때문에, 그들은 이 말을 첨가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바울이 거저 주시는 의가 아니면 믿음에서 오는 의라고 할 수 없다고(롬 4:2이하) 주장하는 데 대해서 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하려는가? 거저 주는 선물과 행위가 어떻게 서로 어울릴 수 있는가?바울이 다른 구절에서,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다고(롬 1:17) 한 말을 그들은 어떤 기만 수단으로 회피할 것인가?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다면, 확실히 그 의는 불구가 된 의나 반쪽 의가 아니라, 완전하고 충실한 의일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는 율법이 관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은 거짓된 구실, 분명히 어리석은 구실을 만들어서 이 "만"이란 말을 제거해야 된다고 고집한다. 모든 것을 행위에서 빼앗는 사람이 모든 것을 믿음에만 돌리는 것이 아닌가? 다음에 열거하는 말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롬 3:21),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롬 3:28).
여기서 그들은 교묘한 궤변을 쓴다. 그들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고 오리겐과 기타 고대 교부들에게서 빌려온 것이지만, 그것은 아주 미련한 구실에 불과하다. 그들은 율법의 의식적인 행위는 배제되지만, 도덕적 행위는 그렇지 않다고 지껄인다. 끊임없는 언쟁으로 그 방면에 능숙하게 된 그들은 논리의 초보자라 이해하지 못한다. 사도가 자기의 견해를 증명하기 위해서 성경 구절들을 인용할 때에 정신없이 지껄인 것인가?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갈 3:12, 3:18), 또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0, 신 27:26). 그들이 미치지 않았다면, 의식을 행하는 사람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거나, 의를 어기는 사람들에게만 저주가 선언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 구절들이 도덕적인 면의 율법에 관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의롭다 하는 권한에서 도덕적 행위가 배제된 것이 틀림없다. 바울은 같은 목적으로 다른 논법을 쓴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으로(롬 3:20), 의는 생기지 않는다. "율법은 진노를 키우게"하므로(롬 4:15), 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양심에 확신을 주지 못하므로 의도 주지 못한다. 믿음을 의로 여기시므로 의는 행위에 대한 보수가 아니라 행함 없이 얻는 것이다(롬 4:4-5).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으므로 우리의 자랑은 제거되었다(롬 3:27).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갈 3:21-22). 그러면 이런 발언들은 의식적 행위에 적용되고 도덕적 행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감히 지껄일 수 있으면 지껄여 보라. 어린 학생들이라도 그런 철면피를 야유할 것이다. 그러므로 의롭다 하는 능력이 율법에 없다고 할 때에, 이 말씀은 확실히 율법 전체에 적용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20. "율법의 행위"
사도가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율법의"라는 제한을 첨부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곧 설명할 수 있다. 행위는 귀한 것이지만, 행위의 가치는 하나님이 시인하시기 때문이지 그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시인하시지 않는다면 누가 감히 행위에 대한 의를 하나님에 천거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보상을 약속하시지 않았다면, 누가 감히 당연하게 보상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행위가 의라는 이름과 보상을 얻기에 충분하다고 인정되는 것이다. 또 사람이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나타내려고 하기 때문에, 행위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 아님을 증명하려고 사도는 다른 곳에서, 언약을 한 후 사백삼십 년이 지나서 율법을 주셨다고 선언한다(갈 3:17). 무지한 자들은 율법이 선포되기 전에도 의로운 행위가 있을 수 있었다는 근거를 들어 이 논법을 비웃는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증거와 허락이 있어야만 행위에 큰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율법이 있기 전에는 행위에 의롭게 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을 사실로 생각한 것이다. 그가 칭의의 조건을 율법의 행위에서 빼앗으려고 할 때에, 율법의 행위라는 말을 한 분명히 이유는 율법의 행위만이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임이 명백하다.
그는 간혹 아무런 제한도 가하지 않고 모든 행위를 부정한다. 예컨대 다윗의 증거를 근거로 삼아서, 행위와는 별도로 하나님께서 의를 인정해주시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한다(롬 4:6, 시32:1-2). 그러므로 그들이 아무리 트집을 잡더라도 우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저 특수한 표현을 일반적 원칙으로 생각한다.
또 그들은 세밀하나 어리석은 구별을 하려고 무의미한 노력을 한다. 즉,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으며, 믿음은 사랑을 통하여 역사하므로 의는 사랑에 의존한다고 한다. 사실 우리는 바울과 함께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만이(갈 5:6) 의롭다함을 얻게 한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를 얻게 하는 믿음의 힘이 사랑을 행하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믿음이 의를 얻게 하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도록 인도하기 때문이고 그 외의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도가 역설하는 일이 모두 와해되고 말 것이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빛으로 여기거니와"(롬 4:4). 바울이 그의 주장을 하기 위해서 이보다 더 분명한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는 당연히 보상을 받을 만한 행위가 없는 곳 이외에는 믿음의 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당연히 은혜를 베풀어야 할 경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의를 부여하는 곳에서만 믿음이 의로 인정된다고 주장한다.
(다만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죄가 용서된다. 21-23)
21. 칭의와 화해와 죄의 용서
믿음의 의는 하나님과의 화해이며, 이 화해는 곧 죄의 용서라고 정의한 말이 얼마나 옳은가를 이제 검토해야 하겠다. 우리가 항상 돌아가야 할 원리는 사람들이 여전히 죄인인 동안은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사람 위에 있다는 것이다. 이 원리를 이사야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1-2)라고 잘 표현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죄가 사람과 하나님을 분리시키니, 하나님의 얼굴을 죄인에게서 돌이키시게 한다는 말을 듣는다. 죄인을 상대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는 이질적인 일이므로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도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를 다시 받게 되기까지는 하나님의 원구라고 가르친다(롬 5:8-10). 그래서 주께서 받아들여 자신과 하나가 되게 하신 사람은 주께서 의롭다 하신다고 한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시지 않고는 자신의 은혜 가운데 받아들이거나 자신과 결합시키실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일이 죄의 용서로써 이루어진다고 부언한다. 주께서 자신과 화해시키신 사람들이 만일 행위에 의해서 판단된다면, 그들은 죄인으로 판명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에서 해방되고 죄를 깨끗이 씻어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포용하시는 사람들은 죄의 용서로써 오점이 씻길 때에 정결하게 된다는 사실에 의해서만 의롭게 되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런 의는 한 마디로 "죄의 용서"라고 부를 수 있다.
22. 칭의와 죄의 용서 사이에 있는 긴밀한 관계를 성경에 의하여 증명함
내가 이미 인용한 바울의 말은 이 두 가지 점을 아름답게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신이 전하는 내용을 요약하여 말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여기서 바울은 의와 화해를 서로 구별하지 않고 말하여, 서로 한 쪽이 다른 쪽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이 의를 얻는 방법은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는 것이라고 그는 가르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심으로써 우리를 자신과 화목케 하신다는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가를 더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다윗의 증거를 인용하여 로마 교회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행위와는 별도로 의를 돌려주신다는 것을 증명한다. 다윗은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다(롬 4:6-8, 시 32:1-2). 분명히 다윗은 여기서 의를 말하는 대신에 복을 말한다. 그는 죄가 용서되는 것을 복이라고 하므로 우리는 다른 정의를 생각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구원을 아는 지식이 죄의 용서에 있다고 노래한다(눅 1:77). 바울이 안디옥 사람들에게 구원의 요점에 대하여 설교할 때에도 이 원칙을 따른다. 누가가 보고한 것을 보면, 바울은 설교를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는 말로 끝맺는다. 바울은 죄의 용서와 의를 연결하여, 둘이 똑같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을 근거로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하여 얻는 의는 값없이 주시는 것이라고 바른 추론을 한다.
죄인은 행위에 의하지 않고 거저 용납해주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하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성경에서 아주 빈번하게 나타나며, 고대 저술가들도 간혹 그렇게 말하였기 때문이다. 어거스틴도 그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의 의는 완전한 덕성에 있지 않고 죄의 용서에 있다." 베르나르드의 유명한 말도 이와 부합한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의다. 그러나 사람의 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는 전에도 "그리스도는 죄의 사면에 있어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 그러므로 그의 자비로 용서를 받는 자들만이 의롭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23. 우리 자신이 의로운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것이다
이 점을 보아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분명하다. 이 말은 사람이 자신만으로서는 의롭지 않으나 그리스도의 의가 그에게 전가되며 전달됨으로써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신중히 고찰할 만한 점이다. 참으로 여기서는 저 경박한 생각이 사라지고 만다.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에 참여하며,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의롭게 되기 때문이라고 하는 이 경박한 사상은 위에서 말한 교리와 반대되는 것이며 도저히 조화시킬 수 없다. 자기 밖에서 의를 찾으라는 지시를 받는 사람은 그 자신 안에 의가 없는 것이 확실하다. 그뿐 아니라, 사도는 극히 분명하게 주장한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우리의 의는 우리에게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우리가 의를 소유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기 때문이란 것을 여 기서 알 수 있다. 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의를 완전히 또 풍부하게 가졌다. 이것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의 육신에 죄를 정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율법의 의가 이루어졌다고(롬 8:3-4) 가르치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의를 이루는 방법은 다만 한가지이며, 우리는 전가에 의해서 그것을 얻는다. 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나눠주시며, 놀라운 방법으로 자신의 힘을 우리 안에 넉넉히 부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 있게 하시기 때문이다. 바울이 조금 전에 한 말에서도 똑같은 뜻을 표명한 것이 명백하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다만 그리스도에 의해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고 선언하는 것은 우리의 의를 그리스도의 순종에 맡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의 순종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곱이 축복을 받은 것을 이 의의 한 예로 해석한 암브로시우스의 말은 아름답다고 나는 생각한다. 야곱은 자기에게 장자의 권리가 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형의 옷 안에 숨고 향기 나는 형의 겉옷을 입은 후에(창 27:27) 다른 사람으로 행세하면서 아버지의 호감을 얻고 자기를 위하여 축복을 받았다. 그와 같이 우리도 우리의 맏형 그리스도의 고귀한 순결 밑에 숨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 암브로시우스의46x)말은 이렇다. "이삭이 옷의 향취를 맡았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행위에 의하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육신의 연약은 행위를 방해하나 믿음의 광채는 죄의 용서를 얻게 하며 행위의 과오를 덮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것은 진리이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구원을 얻으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취로 좋은 냄새를 풍기며, 우리의 악을 그의 완전성으로 덮고 묻어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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