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장 중보자의 두 본질성은 어떻게 한 위격을 이루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적 본질과 신적 본질에 대한 설명. 1-3)
1. 이중성과 통일성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 1:14)는 발언을 말씀이 육신으로 변했다거나, 말씀이 육신과 혼합되어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말씀이 그 거처할 성전으로서 처녀의 태중을 택하셨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는 뜻이다. 여기는 본질의 혼합이 있는 것이 아니고, 위격(Person)의 통일이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의 신성은 그의 인성과 결합·통일되어 두 본성은 각각 그 특이성에 손상을 받지 않은 대로 결합하여 한 그리스도를 이루었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만약 위대한 이 신비와 유사한 것을 인간사에서 찾을 수 있다면, 가장 적절한 것은 두 가지 본질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그 본질들은 각각의 특이성을 유지하지 못하리만큼 다른 본질과 섞인 것이 아니다. 영혼은 신체가 아니며, 신체는 영혼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은 영혼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고 신체에 대해서는 결코 해당되지 않으며, 또 신체에 대해서 하는 말이 영혼에는 결코 적합하지 않은 것이 있다. 또 사람 전체에 대해서 하는 말을 각각 영혼이나 신체에 대해서 한다면 반드시 부적당하게 된다. 끝으로, 마음의 특색을 신체에, 또 신체의 특색을 영혼에 옮기는 때가 있다. 그러나 이 부분들로 된 것은 한 사람이요 여러 사람이 아니다. 이런 표현들은 사람에게는 두 가지 요소가 결합하여 된 한 인격(person)이 있으며, 이 인격의 기반으로서 두 가지 서로 다른 본질이 있어서 한 인격을 이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도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때에는 그의 인간성에 대해서만 말해야 할 일을, 또 어떤 때에는 그의 신성에만 속하는 일을, 또어떤 때에는 두 가지에 속하고 어느 한 쪽에만은 적합하지 않은 것을 그에게 돌린다. 그리고 성경은 그리스도에게 있는 이 두 가지의 통일을 열심히 주장해서 드디어 양성을 서로 교환하는 때도 있다. 이런 표현법을 고대 저술가들은 "속성(屬性)의 상통(相通)"이라고 불렀다.
2. 신성과 인성과의 상호 관계
이 여러 가지 사실들은 성경에서 자주 반복되는 많은 어귀에 의해서 사람의 조작이 아닌 것이 증명되지 않는다면, 설득력이 전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자기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요 8:58)고 하신 말씀은 그의 인성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그릇된 생각으로 이 구절을 곡해하는 사람들의 비꼬인 논법을 나는 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계획에서와 경건자들의 마음속에서 구속자로서 이미 예지되었으므로, 영원 전에 계신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기가 나타나신 때와 자기의 영원한 존재를 분명히 구별하시며, 자기의 권위는 아브라함의 권위보다 시대적으로 앞선다고 명백히 높이시므로, 여기서는 자기의 신성에 고유한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시는 것이 틀림없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고 선언한다(골 1:15, 17). 또 주께서는 창세전에 아버지 앞에서 영광을 가졌다고 하시며(요 17:5), 아버지와 함께 일을 하신다고 하신다(요 5:17). 이런 속성들은 인간에게 전혀 이질적(異質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속성들은 그의 신성에만 해당한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종"이라고 하며(사 42:1, 기타),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하며(눅 2:52),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며"(요 8:50), "최후의 날을 모르며"(막 13:32 ; 마 24:36),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며"(요 14:10), "그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며"(요 6:38), 사람들이 그를 보고 만졌다고 한다(눅 24:39). 이 모든 말들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에만 관한 것이다. 하나님이신 한, 어떤 것이든 자랄 수 없으며, 모든 일을 자기를 위해 하신다. 아무 일도 그에게서 숨길 수 없다. 그는 자기의 뜻으로 결정하신 대로 모든 일을 하시며, 사람이 보거나 만질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이런 속성들을 자기의 인성에만 돌리지 않고, 중보자로서의 위격과 조화되는 것으로 인정하며 자기의 속성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고유성 또는 특성의 상통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의 피로 교회를 사셨으며"(행 20:28), "영광의 주가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고전 2:8) 말한 것과 같다. 요한도 같은 뜻으로 "생명의 말씀을 손으로 만졌다"고 한다(요일 1:1). 물론 하나님은 피가 없으며, 고난 받지 않으며, 손으로 만질 수 없다. 그러나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그가 인간성으로서 하신 일을 그의 신성에 돌리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이유가 없지 않지만, 적합한 일은 아니다. 비슷한 예를 들면, 요한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고 가르친다(요일 3:16). 따라서 여기서도 인성에 속한 성질을 신성과 나눈다. 또 그리스도께서 아직 지상에 계시면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요 3:13) 말씀하셨을 때에, 물론 육신을 쓰고 계신 사람이었으므로 하늘에는 계시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 사람이었으므로, 신인 양성의 통일을 위해서 한 쪽에 속한 것을 다른 쪽에 주신 것이다.
3. 중보자의 위격의 통일성
그러나 두 본성을 동시에 포함한 구절들이 요한복음에 많고, 그런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참본질을 가장 분명히 나타낸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신성이나 인성만을 말하지 않고 양성을 일시에 말한다. 즉, 그리스도는 아버지에게서 권능을 받았으니 죄를 사하며(요 1:29), 원하는 사람을 살리며, 의와 성결과 구원을 베풀어 주실 수 있다. 그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로 임명되어 아버지와 같이 공경을 받게 되셨다(요 5:21-23). 마침내 그를 "세상의 빛"이요(요 9:5, 8:12), "선한 목자"요, "유일한 문"이며(요 10:11,9), "참포도나무"라고 한다(요 15:1). 하나님의 아들은 이런 특권들을 받고서 육신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이 특권들을 가지고 계셨지만, 같은 모양이나 방법이 아니었으며, 또 인간에 불과한 인간에게는 이 특권들이 부여될 수 없었을 것이다.
심판이 있은 후에 "그리스도께서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리라"는(고전 15:24 의역) 바울의 말도 이와 같은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는 시작도 없었고 끝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빌 2:7) 존엄성의 광채를 제쳐놓고 낮은 육신 밑에 숨어 계셨을 때에는 아버지에게 순종하셨다(참조, 빌 2:8). 이 순종 생활을 마치신 후에 "드디어 영광과 존귀로 관 쓰셨으며"(히 2:9) 최고의 주권자로 높아져서 그의 앞에 "모든 무릎이 꿇게" 되었다(빌 2:10).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영광과 이름과 면류관,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바쳐,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앞에 계시게"(고전 15:28)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권능과 주권을 주신 것은 그의 손을 거쳐 아버지께서 우리를 주관하시려는 목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셨다고 한다(참조, 막 16:19 ; 롬 8:34).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일이고, 우리는 결국 하나님을 직접 뵙고 즐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옛날 교부들이 중보의 위격을 무시하며, 요한복음에 있는 가르침의 거의 대부분에 대해서 그 참뜻을 모호하게 만들며, 여러 가지 올무에 스스로 걸려든 그 오류를 용서할 수 없다. 그러면 올바른 해석의 열쇠는, 중보의 직책에 해당하는 일들은 신성이나 인성에 대해서만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의 심판주로 임하실 때까지 그리스도는 지배하실 것이며, 연약한 우리의 힘이 미치는 데까지 우리를 아버지와 결합시키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 영광에 참가하여 하나님을 그 계신 그대로 뵙게 될 때에는, 그리스도는 중보의 직책을 다하셨으므로 아버지의 대사됨을 그만 두시고 천지창조 이전에 누리시던 그 영광으로 만족하실 것이다. 그리고 ""주"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의 위격이 하나님과 우리의 중간에 있는 지위를 표시할 때에 한해서 그리스도의 위격에만 속한다. 바울의 발언은 이와 일치한다.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말미암았느니라"(고전 8:6). 즉, 우리가 그의 신직 존엄성을 대면하여 보게 될 때까지 아버지께서는 주로서의 권능을 그에게 맡기셨다. 그 때가 오면, 그는 주권을 아버지에게 돌려서, 그의 존엄성을 감소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욱 한층 빛나게 하실 것이다. 또 그 때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신성이 지금은 아직 휘장에 가리워 있지만, 그 때에는 스스로 빛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와 세르베투스의 오류들에 대한 비난. 4-8)
4. 두 본질은 융합 또는 분리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독자들이 이 견해를 지혜롭게 적용한다면, 아주 많은 어려움들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교육받지 않은 사람들이나 완전히 무식하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까지도, 이런 종류의 표현들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 것을 보면,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인성에 꼭 적합하지 않은 말이라고 해서 놀라리만큼 고통을 당한다. 이것은 이 표현들이 하나님과 사람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인격이나 중보자로저의 그의 직분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침착한 해설자가 이 위대한 신비들을 그에 합당한 경건한 태도로 검토할 때에는, 이 여러 가지 발언들이 분명히 또 아름답게 서로 일치한다. 그렇지만 저 미친 듯이 날뛰는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뒤섞어 버린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의 속성들을 붙잡고 그의 신성을 제거하며, 반대로 신성의 속성을 붙잡고 인성을 제거한다. 또 양성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말해서 어느 한 쪽에만 적용되지 않는 속성들을 붙잡고 두 본성을 모두 제거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므로 사람이 아니며, 또 사람이시므로 하나님이 아니며, 또 동시에 사람이시며 하나님이시므로 사람도 아니며 하나님도 아니라고 쟁론하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는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두 성품이 통일되었으나 혼합되지 않은 것이므로, 인성 때문이 아니라 인성에 의해서까지도 우리의 주시며 하나님의 참아들이시다. 우리는 네스토리우스의 오류를 배척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구별하지 않고 분리시키고자 해서 이중의 그리스도를 생각했다. 성경은 분명한 목소리로 이 생각에 반대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처녀에게서 나신 이에게 적용하며(눅 1:32), 그 처녀 동정녀를 "우리 주의 어머니"라고 부른다(눅 1:43). 우리는 유티케스의 미친 생각도 경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격의 통일성을 증명할 생각으로 어느 한 본성을 파기하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구별하는 증언을 많이 인용했고 그밖에도 증언이 많으므로, 가장 투쟁적인 사람이라도 입을 다물게 될 것이다. 조금 뒤에 나는 그들의 공상을 더 효과적으로 분쇄할 증언들을 첨가하겠기에 지금은 한 구절만 인용하면 충분할 것이다. 즉, 만일 그리스도의 몸 안에 그 몸과 다른 신성이 계시지 않았다면, 그리스도는 자기의 몸을 성전이라고 부르시지 않았을 것이다(요 2:19). 따라서 에베소 회의가 네스토리우스를 비난한 것이 정당한 것과 같이, 후에 콘스탄티노플과 칼케돈 회의에서 유니케스를 비난한 것도 정당하다. 그리스도의 두 성품을 혼합하는 것이나 분리하는 것은 모두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5.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나 현대에도 그들에게 못지않게 흉악한 괴물 미가엘 세르베투스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본질과 영과 육과 그리고 세 가지 창조되지 않은 원소로 혼성(混成)된 허구(虛構)라고 주장했다. 우선 그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녀의 태중에서 났기 때문일 뿐이라고 한다. 그의 궤변은 다음과 같은 방향을 취한다. 즉, 두 본성의 구별을 없애 버리고서는 그리스도는 약간의 신적 요소와 인간적 요소의 혼합체이지, 하나님이며 또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한다. 그의 논리 전체는,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나타나기 전에는 하나님 안에 그림자 같은 형상들만이 있었다는 생각을 토대로 삼았다. 그리고 아들이 되는 영예를 받도록 예정되었던 말씀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시작했을 때에 처음으로 그 그림자 같은 형상들의 진상 또는 효력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동정녀에게서 난 중보자는 원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인간인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독생자며 또 그 이름을 가지는 존엄성을 받으시지 않았다면, 그는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의 거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내린 정의는 확고부동하다. 즉, 모든 시대 이전에 아버지에게서 난 말씀이 인성을 취하여 위격(hypostasis)의 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고대 저술가들은 "위격의 통일"을 정의해서 두 본성이 한 위격을 이룬 것이라고 했다. 이 표현은 네스토리우스의 망상을 반박하기 위해서 생각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 안에 거하였으며, 동시에 인간이 아니었다고 공상했기 때문이다. 영원한 말씀은 육신을 입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시었다고 말하는 우리에 대해서, 세르베투스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둘로 만든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으로 나타나셨다고 할 뿐이다. 그가 사람이 되시기 전에 하나님이셨다면, 인간이 되셨다고 해서 새로운 하나님이 되기 시작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으로 나타나셨지만, 영원한 생산에 의해서 항상 아들의 지위를 가지고 계셨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도 불합리한 주장이 아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은 이 점을 암시한다.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35). 마치 율법아래에서 희미했던 "아들"이라는 이름이 앞으로 도처에서 분명히 알려지리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바울도 같은 생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지금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자유로 또 자신 있게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했다(롬 8:14-15 ; 갈 4:6). 옛날 족장들도 하나님의 아들들 가운데 들어 있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들은 이 권리를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기도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독생자가 세상에 나타나신 후에 하나님이 아버지시라는 것이 더욱 분명히 알려졌다. 따라서 바울은 이 특권을 그리스도의 나라에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확고부동하게 주장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와 관계없이 천사들이나 사람들의 아버지가 되신 일이 없으며, 특히 사람들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미움을 받지만, 그리스도께서 본질상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들을 값없이 하나님의 양자로 삼아주시는 것이라고. 이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정하신 부자 관계에 의한 것이라고 세르베투스가 맹렬히 반대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여기서는 속죄를 짐승의 피로 표시하던 것과 같은 상징이 문제가 아니다. 양자로 정하시는 일이 저 머리를 토대로 삼지 않았다면, 그들은 실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지체들에게 공통된 것을 머리에 주지 않는 것은 불합리하다. 나는 한 걸음 더 나가겠다. 성경에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르는데(시 82:6), 그들의 높은 위엄은 장차 올 구속에 달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과 하나님을 화해시키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지위상 그들 위에 계셔야 했다. 나는 이 발언을 간단히 반복해서 인류에게도 적용하겠다. 창조 당시에 천사들과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공통된 아버지가 되시도록 지어졌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항상 머리가 되시며,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로 만물의 으뜸이 된다고(참조, 골 1:15이하) 한 바울의 발언이 옳다면, 그리스도는 우주 창조 이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다고 결론하는 것이 옳다고 나는 생각한다.
6.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사람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그러나 그리스도가 아들 되심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때부터 시작했다면, 그는 인성에 관해서도 아들이었다는 결론이 된다. 세르베투스 및 그와 같이 미친 사람들은 육신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은, 육신을 떠나서는 이 이름을 받을 수 없었겠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두 본성에 의해서 또 두 본성에 관해서 아들이신지 그들의 대답을 들어보자. 그들은 이렇게 지껄이지만 바울은 아주 다르게 가르친다. 인간의 육신을 쓰신 그리스도를 "아들"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신자들이 양자가 되어, 또 은총에 의해서만 아들들이라고 하는 것과 같지 않고 진정한 본질상의 아들, 따라서 유일한 아들이시며 이 표식에 의해서 다른 모든 아들들과 구별되신다. 새로운 생명으로 중생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영예를 주시지만, "진정한 독생자"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에게만 주신다. 그러나 우리가 선물로서 받은 것을 그는 본성으로서 가지신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많은 형제 중에서 "독자"가 되시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 영예를 중보자의 위격 전체에 확대한다. 그래서 그는 당연히 동정녀에게서 나시며 또 십자가에서 자기를 희생 제물로 아버지에게 바치신 분, 참으로 또 바른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가르친 것과 같이, 그의 신성에 관해서 하는 말이다.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그의 아들에 관하여‥‥‥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라고 한다(롬 1:1-4). 무슨 이유로 바울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부르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는 말을 따로 하는가? 이것은 그의 육신 이외의 무엇에 좌우된 일임을 알리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런 뜻으로 바울은 다른 곳에서 그는 육신이 약하시므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셨다고 한다(고후 13:4). 이와 같이 그는 두 본성을 구별한다. 그가 어머니에게서 "다윗의 아들"이라는 이름의 이유를 받으신 것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의 이유를 받았다는 것을 그들은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인성이 아닌 것, 인성과는 다른 것이다.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두 가지로, 즉, 어떤 때에는 하나님의 아들로 또 어떤 때에는 사람의 아들로 부르고 있다. 그는 아담의 후손이므로 히브리어로는 "인자"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인 만큼 이 이름에 대해서 그들은 싸움을 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신성과 영원한 본질 때문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그를 "인자"라고 부르는 사실을 그의 인성에 돌리는 것이 적당한 것과 똑같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사실은 그의 신성에 돌리는 것이 적당하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내가 언급한 구절, 즉,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며"라고 한 구절에서(롬 1:3-4) ,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며 저는‥‥‥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고(롬 9:5) 가르치는 것과 같은 뜻을 말한다. 이 두 발언이 그리스도의 두 본성 사이의 구별에 주목하는데, 우리의 논적들은 무슨 권리가 있어서 육신으로 인자이신 분이 그의 신성에 관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가?
7. 세르베투스의 빈약한 반증
그들은 자기의 오류를 변호하기 위해서 소란하게 주장한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시지 않았다고 하며(롬 8:32), 천사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날 자를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고 부를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눅 1:32). 그러나 그들이 자기들의 논리가 얼마나 타당한가를 우리와 함께 잠깐 검토한다면, 이런 무익한 항의를 자랑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잉태된 이를 "아들"이라고 부르니, 그는 잉태된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하는 이 결론이 옳다면, 요한이 그리스도는 생명의 말씀이며 저희가 손으로 만졌다고 하므로(요일 1:1),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때에 말씀이기 시작하셨다는 결론이 될 것이다. 예언서에 있는 것도 요한의 발언과 같다.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을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이니라"(미 5:2와 마 2:6의 융합) 만일 그들이 이런 식으로 주장할 결심이라면, 그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겠는가? 나는 이미 증언했다. 우리는 이중의 그리스도를 공상한 네스토리우스에 찬성하지 않으며, 그리스도는 우리와 형제이신 인연으로 우리를 자기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드셨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라고. 우리에게서 육신을 받으신 그리스도는 그 육신에서 하나님의 독생자시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우리에게 현명하게 경고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놀랍고 특이한 은총의 빛나는 거울이시며, 사람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영예를 얻으셨다고. 그러므로 그는 육신에서, 태중에서부터도, 이와 같이 훌륭히 탁월성으로 장식된 하나님의 아들이시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통일된 인격에 어떤 혼합이 있어서 그의 신성에 속한 것을 제거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또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두 본성이 한 위격으로 통일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를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순되지 않다. 마치 그를 여러 가지 점에서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며, 혹은 인자라고 부르는 것이 모순되지 않는 것과 같다.
세르베투스의 다른 비방도 우리를 괴롭히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나타나시기 전에는 상징적 의미 이외에는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곳이 없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가 그 때에는 다소 희미했지만, 그가 영원한 하나님이 낳으신 말씀이시었다는 오직 이 이유 때문에 영원한 하나님이시었다는 것이 분명히 증명된다. 또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이시었다는 오직 이 이유 때문에 이 이름은 그가 자취하신 중보자의 위격에 속했다는 것이 분명히 증명된다. 또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엡 3:15) 분과 아들 사이에 이미 그 때에 상호 관계가 있던 것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으리라는 것도 분명하다. 이 증거를 근거로 우리는 쉽게 결론지을 수 있다. 이 이름이 교회내에서 유명하게 되기 전에 율법과 예언자들의 시대에도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었다고. 그러나 가령 솔로몬이 하나님의 무한한 숭고성에 대해서 하는 발언 하나를 가지고 그들은 논란할 수 있다.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하면서(잠 30:4) 솔로몬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 증언이 쟁론가들에게 충분한 무게가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따라서 나는 이 증언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지만 그것은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신 점을 제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악한 훼방꾼임을 보여 준다는 것은 밝혀 둔다. 이 밖에 고대 저술가들도 이구동성으로 이 사실을 분명히 증언했으므로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이 우리에게 반대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철면피는 가증하고 가소롭다. 이 두 저술가들은 하나님의 아들은 눈으로 볼 수 없었으나 후에 눈에 보이게 나타나셨다고 하기 때문이다.
8. 세르베투스의 교리에 대한 납득이 가는 계시와 반증
세르베투스가 한 말에는 무서운 조짐이 많으며, 거기 찬성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육신에서만 하나님의 아들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더 자세히 추궁하면, 그들은 그리스도가 성령에 의해서 동정녀의 태중에 잉태되셨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옛날 마니교도들도 다음과 같은 공상을 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셨다고 성경에 있으니(창 2:7)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영혼을 옮겨 받는다고 한다. 그들은 "아들"이라는 이름을 완강히 고집해서 본성들의 차이를 남겨 두지 않으며, 사람인 그리스도는 그 인간성에 따라 하나님에게서 났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혼란한 말을 지껄인다. 그래서 솔로몬이 말하는(집회서 24:9. 참조, 잠 8:22이하) 지혜의 영원한 출산이 말살되며, 중보자에게 있는 신성이 무시되며, 또는 단순한 가현(假現)이 진정한 사람을 대신한다.
세르베투스는 더욱 졸렬한 기만적 언어로 자신과 타인을 현혹했다. 그의 말들을 논박한다면, 경건한 독자들이 그의 전례에서 경고를 받아 침착하고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게 되겠고, 그만큼 유익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단행본에서 반박했으므로, 여기서는 필요하지 않다고 믿는다. 문제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세르베투스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은 처음부터 한 관념이었고, 그 때에도 하나님의 본질적 형상인 사람이 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외면적으로 찬란한 말씀 이외의 하나님의 말씀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출생에 대한 그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곧 아들을 낳겠다는 의지가 처음부터 하나님 안에 있어서 창조 자체에까지 행동으로 연장되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성령과 말씀을 혼동하여,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과 성령을 육신과 영혼 속에 분배하셨다고 한다. 간단히 말하면, 세르베투스의 생각에서는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출산(出産)을 대신한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그 때에 한 그림자 같은 아들로 보이던 이가 드디어 말씀에 의해서 출산되었다고. 이와 같이 그는 말씀에 씨로서의 기능을 배정한다. 이런 생각이라면 개와 돼지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처음 씨에서 창조되었으므로 똑같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결론이 생길 것이다. 세르베투스는 그리스도를 창조되지 않은 세 원소의 혼합체라고 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본질에서 출산되었다고 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났다고 상상하지만, 돌(石)들에도 그 정도에 따라 똑같은 본질적 신성(神性)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서 신성을 빼앗는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그리스도의 육신은 하나님과 똑같은 본질로 되었고, 육이 하나님으로 변함으로써 말씀이 사람이 된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와 같이, 그는 그리스도의 육신이 하나님의 본질에서 와서 신성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고 함으로써, 말씀의 영원한 위격을 말살해 버리며, 우리의 구속자로서 약속된 다윗의 후손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버린다. 참으로, 그가 여러 번 반복하는 생각은 이것이다. 곧 아들은 예지와 예정에 의해서 하나님에게서 났지만, 종국적으로는 물질을 재료로 삼아 사람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물질은 처음에 하나님 앞에서 세 가지 요소에서 빛났고 후에 세계의 처음 빛과(창 1:3) 구름과 불기둥에서(출 13:21) 나타난 요소라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세르베투스가 간혹 부끄러운 아기 모순에 빠지는 것을 이야기한다면 너무도 지루할 것이다. 정신이 건전한 독자들은 이 요약을 읽고 이 더러운 개의 간교한 도피적 언사가 구원의 희망을 완전히 소멸시켰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만일 육신이 신성 자체라면 그것은 신성의 성전이 아니겠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나서 육신으로는 참사람이었던 분만이 우리의 구속자가 될 수 있다. 세르베투스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의 말을(요 1:14) 자기 입장의 기초로 삼지만, 이것은 사악한 짓이다. 이 말은 네스토리우스의 오류에 대항하는 동시에, 유티케스의 불경건한 조작도 지지하지 않는다. 요한의 유일한 목적은 두 본성이 통일된 위격을 이루었음을 선언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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