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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 2권. 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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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장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어떻게 구속자의 기능을 완수하였으며 여기서 그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죄로 인하여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우리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화해를 얻었다. 1-4)

 

1. 구속자

 

지금까지 그리스도에 관해서 우리가 한 말은 오직 한 가지 목적으로 향해야 한다. 원래 정죄를 받아 죽고 멸망한 우리는 의와 해방과 생명과 구원을 그리스도에게서 구해야 한다는 것이 그 목적이다. 이것은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라는(4:12) 베드로의 유명한 말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와 같다. "예수"라는 이름을 그가 받게 된 것은 이유 없이, 또는 우연히, 또는 인간의 결정으로 된 일이 아니라, 최고의 명령을 전달한 천사가 하늘에서 가져온 이름이었다(1:28-33). 그 이유로서 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파견되었다고 첨부하였다(1:21. 참조, 1:31). 우리는 이 말씀에서 우리가 다른 곳에서 언급한 점을 보아야 한다. , 우리의 구주가 되시도록 속죄주의 직책이 그에게 부과된 것이다. 그렇더라도 만일 그가 구원의 종점까지 줄곧 인도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구속은 불완전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견고하지만, 조금이라도 그에게서 떠나는 순간에는 점점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 결과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일체의 은총을 스스로 버리게 된다. 버나드의 경고는 기억해 둘 만하다. "예수의 이름은 광명일 뿐 아니라 양식이다. 그것은 또 기름이다. 이 기름이 없으면 영혼의 모든 양식은 마른다. 그것은 소금이다. 이 소금으로 맛을 내지 않으면 우리 앞에 놓이는 음식은 온통 맛이 없다. 끝으로, 예수의 이름은 입에 꿀이요 귀에 음악이며, 마음에 기쁨이요, 동시에 약이 된다.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 강화는 향기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가 어떻게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이것은 그가 우리의 구주이심을 확신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믿음에 대한 충분하고 확고한 토대를 얻으며, 우리를 어느 방향으로든지 이탈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제하기 위해서다. 누구든지 자기 속에 내려가서 자기의 진상을 성실하게 생각한다면, 반드시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적의를 느낄 것이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노염을 푸는 방법과 수단을 애써 찾아야 하며, 여기는 충분한 배상이 요구된다. 죄인이 죄책에서 사면되기까지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항상 그들 위에 머무를 것이니, 필요한 것은 평범한 보증이 아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심판자이시므로 자기의 법을 어기는 자를 벌 없이 버려두시지 않고, 처벌할 준비를 하고 계시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진노를 알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감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더 나가기 전에 잠깐 생각할 일이 있다. , 우리를 앞질러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신데,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와 화목하시기 전에는 우리의 원수였다는 것은 어떻게 합당한 일이었는가? 만일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로 우리를 이미 용납하신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어떻게 자기의 독생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의 특별한 보증을 주실 수 있었겠는가? 여기서 일종의 모순이 생기므로, 나는 이 문제들을 처리하겠다. 성령께서는 성경에서 보통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 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5:10). 그의 희생으로 그들의 불의가 속량되기 전에는 그들은 저주 아래 있었다(3:10,13). 그의 몸으로 말미암아 화해되기 전에는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었다"(1:21,22) 이런 발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얼마나 가련한 파멸 상태에 있는가를 더 잘 이해하도록, 우리의 능력에 알맞게 표현된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와 처벌과 영원한 죽음이 우리 위에 덮여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자비를 받지 않고는 우리가 얼마나 가련한가를 우리는 깨닫지 못했을 것이며, 해방의 혜택을 경시했을 것이다.

예컨대, 누가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고 가정하자. "그대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하나님이 그대를 미워하셔서 그대가 당연히 받을 일을 하셨다면, , 그대를 버리셨다면, 무서운 파멸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꺼이 또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로 그대를 은총 가운데 두시고 그대가 자기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 위험에서 그대를 구출하신 것이다"라고. 이렇게 들은 사람은 확실히 하나님의 자비의 덕택을 얼마만큼은 느끼며 체험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알게 된다고 가정하자. , 그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으며, 진노를 받을 자, 영원한 죽음의 저주를 면치 못할 자, 구원을 얻을 희망이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길이 전혀 가망이 없는 자, 사탄의 종, 죄의 멍에를 멘 포로, 결국 무서운 멸망을 당할 운명이며 이미 멸망 중에 있는 자임을 알게 된다고 하자. 또 이때에 그리스도가 그의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모든 죄인에게 내리려는 그 벌을 자기가 대신 맡아 받으셨으며, 죄인들을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자로 만든 죄악들을 자기의 피로 깨끗이 씻으셨으며, 이 속죄로 하나님 아버지에게 올바른 배상과 희생을 드리셨으며,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푸셨으며, 이 터전 위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가 성립하였으며, 이 인연으로 하나님의 인애가 사람들을 향해서 계속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가정하자. 그럴 때에 이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큰 재난에서 구출되었는가를 역력히 그려 보이는 이 모든 일에서 더욱더 깊은 감동을 받지 않을 것인가?

요컨대, 우리 마음은 우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과 영원한 죽음에 대한 공포심으로 놀라며 압도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도 생명을 붙잡는 열성이 부족하거나, 생명을 받아도 올바로 감사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이를테면 우리의 원수이며, 그의 손은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무장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도록 가르친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자비와 아버지 같은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

 

3.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화해보다 앞선다.

 

이 발언은 연약한 우리의 이해력을 고려한 것이지만, 거짓은 아니다. 최고의 공의이신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에게서 보이는 불의를 결코 사랑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미움을 받을 것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과 거기 따르는 악한 생활 때문에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노엽게 하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 있는 자며, 나면서부터 지옥의 저주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인자하신 주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자기의 것을 잃지 않으시길 원하시므로, 우리 안에서 사랑하실 수 있는 것을 발견하신다. 우리는 비록 자신의 허물 때문에 큰 죄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피조물이다. 비록 우리는 스스로 죽음을 초래했지만, 그는 우리를 살도록 창조하셨다. 그래서 그는 값없이 주시는 순수한 사랑으로 우리를 받아들여 은총을 베풀려 하신다. 의와 불의는 화합할 수 없으며, 이 불화는 영구히 화해시킬 수 없으므로, 우리가 죄인인 동안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히 받아들이실 수 없다. 따라서 적대관계의 모든 원인을 제거하며, 우리와 완전히 화해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제시된 속죄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악을 일소하신다. 이전에 불결하고 불순하던 우리가 그가 보시기에 의롭고 거룩한 자로 나타나게 하시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화목을 얻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으로 미리 손을 쓰시는 것이다. 참으로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요일 4:19), 후에 우리를 자기와 화해시키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우리를 구출하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노염을 받아야 할 불의가 우리 안아 그대로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저주와 정죄를 받는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기와 결합하실 때에 한해서 하나님과 완전히 또 굳게 결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며 호의를 가지신다는 확신을 가지려면, 눈과 마음을 그리스도에게만 고정시켜야 한다. 사실, 그를 힘입어야만 우리는 우리의 죄가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을 면할 수 있다. 죄가 돌아오면 하나님의 진노를 동반하는 것이다.

 

4. 속죄 사업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생긴다 : 그러므로 속죄가 하나님의 사랑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받아주신 그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확고한 기초를 가졌다고 한다(1:4-5). 이 일들은 명백하며 성경과도 일치한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선포하셨다고 하며(3:16), 반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다시 우리에게 은혜를 가지게 되시기 전에는 우리의 원수였다고 하는(5:10) 구절들도 서로 훌륭히 조화된다. 그러나 고대 교회의 증언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이 일을 더 확실히 알 수 있도록, 나는 어거스틴이 바로 이 점을 가르치는 구절을 인용하겠다. "하나님의 사랑은 헤아릴 수 없으며 변함이 없다. 우리가 성자의 피를 통해서 화해를 얻은 후에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시작하신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세상창조 이전에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도 독생자와 함께 아들들이 되도록 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아직 무엇이 되기 전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화해를 얻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마치 아들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심으로써 하나님이 전에 미워하시던 자들을 이제부터 사랑하시기 시작하도록 만드셨다는 듯이 해석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우리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원수였지만,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그와 화해했다. 내가 하는 말이 옳은지는 사도가 증언 할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미워하며 악을 행했을 때에도 그는 우리를 사랑하셨다. 이와 같이, 그는 우리를 미워하신 때에도 놀랍고 거룩한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는 그가 창조하시지 않은 우리의 상태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셨지만, 우리의 죄악이 그의 피조물을 완전히 소멸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각 사람에게 있는 우리가 만든 것을 미워하시는 동시에, 그가 만드신 것을 사랑하실 수 있었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말이다.

 

(그리스도의 복종과 죽음의 결과. 5-7)

 

5. 그리스도는 복종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는 이를 위해 평생 동안 복종을 실행하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묻기를 그리스도는 어떻게 죄를 없애 버리며,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없애며, 의를 얻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하여 은혜와 친절을 품으시게 만드셨느냐고 한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일반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데 곧 그의 복종 생활 전체에 의하여 우리를 위해 이 일을 성취하셨다는 것이다. 이 점을 증명하는 바울의 증언이 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느니라"(5:19). 참으로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하는 용서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에 확대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4:4-5). 그래서 주님은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아버지의 명령을 준행함으로써 의의 일부를 완성한다고 주장하셨다(3:15). 요약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종의 형태를 취하신 때부터 우리를 속량하시려고 자유의 대가를 치르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길을 더욱 정확하게 밝히기 위해서, 성경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죽음의 고유한 특색이라고 한다. 그리스도 자신이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다"고 언명하신다(20:28). 바울은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었다"고 가르친다(4:25).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세상 죄를 지고 가려고" 오신 분이라고 선언했다(1:29).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화해자로 세우셨느니라"고 가르친다(3:24-25).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죽으심으로 말미암아‥‥‥화목 되었느니라"고 한다(5:9-10).

,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한다(고후 5:21). 모든 증언을 열거하려면 한정이 없을 것이므로 나는 그 전부를 인용하려 하지 않을 것이며, 그 중의 여러 구절을 적당한 곳에서 언급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사도신경"은 적절하게 그리스도의 탄생으로부터 즉시 그의 죽음과 부활로 간다. 여기에 완전한 구원의 전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일생 동안 보이신 복종의 다른 부분도 제외되지 않는다. 바울은 자초지종을 전부 포함시켜서 "그는‥‥‥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한다(2:7-8). 그리고 참으로 죽음 자체에서도 그가 기꺼이 하신 복종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기꺼이 바치는 희생이 아니면 의를 더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자기는 "자기의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을 때에(10:15), "이를(목숨을)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적절한 말씀을 첨가하셨다(10:18). 이런 뜻으로 이사야는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라고 말한다(53:7. 참조 행 8:32). 복음서에 있는 이야기에서도 예수께서 나아가 군대를 만나셨다고 하며(18:4), 빌라도 앞에서 자기를 변호하지 않고 순순히 재판을 받으셨다고 한다(27:12, 14). 물론,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우리의 약점들을 맡으셨고, 이렇게 하심으로써 아버지에게 대한 복종이 시험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여기 우리에게 대한 그의 무쌍한 사랑에 대한 비범한 증거가 있는 것이다. , 무서운 공포심과 싸우며 저 잔인한 고통 중에서도 자신에 대한 생각을 일체 버리고, 우리를 도우려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견지해야 할 점은 이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감정을 무시하고 아버지의 뜻에 전직으로 자기를 바쳐 복종하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에게 합당한 희생을 드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 사도가 시편에서 인용한 증언은 적절하다."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10:7),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40:8),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왔나이다"(10:7, 9, 40:7, 8). 그러나 괴로운 양심들은 오직 죄를 대속하는 제사와 성결에서만 안식을 얻는 것이므로,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는 것은 옳다. 그리고 우리를 위한 생명의 근거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다.

 

(빌라도를 통한 정죄)

 

우리의 죄로 인한 저주가 하나님의 하늘 심판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서 성경은 우선 유대 총독 빌라도 앞에서 그리스도가 정죄를 받으신 이야기를 해서, 우리가 받아야 하는 벌이 이 의인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을 가르친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 그 심판에서 우리를 구출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는 죽을 인간에게 더군다나 악한 불신자에게 정죄를 받는 것을 허락하셨다. "총독"이라는 칭호를 말하는 것은 이야기의 진실성을 주장할 뿐 아니라, 우리가 이사야의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53:5)라고 가르친 뜻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정죄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가 거저 죽으시기만 하면 충분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를 구속하는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는 죽음의 종류를 택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정죄를 자기에게 옮기는 동시에 우리의 죄책도 맡으심으로써 우리를 해방하는 죽음이 되어야 했다. 만일 그가 도둑에게 죽거나 폭도들이 일으킨 반란에서 죽으셨다면, 이런 죽음에는 배상을 치렀다는 증거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재판정에서 죄인으로서 고발을 당하시고, 유죄 증거가 제출되고, 재판관의 입으로 사형 선고를 받으셨으므로, 이런 증거들에 의해서 우리는 그가 죄인과 악인의 처지에 서신 것을 안다. 여기서 우리는 예언자들의 신탁을 통해서 예언된 두 가지 일에 주의해야 하겠고,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많이 도우며 강화한다. 그리스도께서 재판정에서 사형장으로 끌려가서 두 강도 사이에서 달리셨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에, 우리는 복음서 기자가 언급하듯이, "그는 불법자와 함께 인정함을 받았다"고 한 예언이 실현된 것을 안다(15:28. 참조, 53:12). 무슨 까닭이었는가? 그가 의인이나 무죄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죄인을 대신해서 죽으시려는 것이었다. 그는 무죄하기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유죄하기 때문에 죽으신 것이다. 그러나 그를 정죄한 바로 그 사람이 그의 무죄를 주장했다는 말을 들을 때에(빌라도는 여러 번 그의 무죄를 공중 앞에서 증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컨대, 27:23), 우리는 다른 예언자가 그는 도둑질하지 않은 것도 물어 주었다고 한 말을(69:4) 상기해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가 죄인과 악인을 대표하신 것을 보지만, 동시에 그의 빛나는 결백을 볼 때에, 그가 자기의 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를 지셨다는 것이 명백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고, 총독의 공식 선고에 의해서 범죄자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범죄자가 아니었다. 재판관 자신이 자기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고 증언해서(18:38) 그가 의인이심을 선언했다. 바로 우리가 벌을 받아야 할 죄책이 하나님의 아들에게로 전가된 것이 우리의 무죄 석방이 된다(53:12).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이 대속적인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로운 벌을 하나님의 아들이 맡아 받으셨는데, 그 벌이 지금도 우리를 위협하는 듯이, 우리는 평생 떨며 불안해 할 것이다.

 

6. "십자가에 못박힘"

 

그리스도의 죽으신 모양도 독특한 신비를 나타낸다. 사람들의 의견뿐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 규정에서도(21:23) 십자가는 저주를 받은 것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때에 스스로 저주를 받으셨다. 일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아니, 우리를 덮고 있던 저주를 완전히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에게 옮겨 놓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또 율법에서 희미하게 예시된 일이었다. 그런데 죄를 위해 바치는 희생과 속죄 제물을 "아슈모트" 라고 불렀다. 이것은 원래 죄 자체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다. 성령께서는 이 말을 상징적으로 사용하심으로써 이 제물들은 죄로 인한 저주를 맡아 쓰고 가는 속죄 염소와 같다는 것을 알리셨다. 모세의 율법에 있는 희생 제물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 그 상징들의 원형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났다. 그러므로 그는 완전한 속죄를 성취하려고 자기의 목숨을 "아샴"으로서(53:10), 곧 선지자들이 말한 것 같이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서 내주셨다. 그 제물 위에 이를테면 우리의 오점과 벌을 던져서 우리에게 돌리지 않게 만드신 것이다. 사도는 이 점을 더욱 명백하게 증언해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가르친다(고후 5:21).

하나님의 아들이 아무 죄도 없이 완전히 깨끗하면서도, 우리가 지은 죄악의 수치와 비난을 맡으시고, 그 대신에 우리에게 자기의 순결을 입히셨다. 바울이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의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고 말하는 것도(8:3) 같은 뜻인 듯하다. 죄의 저주가 그리스도의 육신에 전가되었을 때에, 아버지께서 죄의 세력을 깨뜨리셨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아버지에게 드려 속죄 제물로서 죽으시게 한 것은 그의 희생으로 모든 배상을 치른 후에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기 위해서였다고 하는 말뜻이 여기 있다. 이제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53:6) 하는 예언자의 뜻은 분명하다. , 더러운 불의를 깨끗이 하려는 사람이 책임 전가에 의해서 그 불의를 썼다는 것이다. 그가 못박히신 십자가가 이 일을 상징한다는 것은 사도의 증언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3:13-14, 21:23). 베드로가 "그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가르치는 것도 같은 뜻이다(벧전 2:24). 우리는 바로 그 저주의 상징을 보고 우리를 압박하던 짐이 그에게 옮겨졌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깨닫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저주에 압도되어 쓰러졌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그는 저주를 담당하셔서 그 힘을 전적으로 꺾고 부수어 버리셨다. 그래서 믿음은 그리스도가 받으신 정죄에서 무죄 방면을 얻으며, 그가 받으신 저주에서 축복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마치 수치가 가득하던 십자가가 개선하는 전차로 변한 듯이, 자기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얻으신 승리를 웅장하게 선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십자가에 못박으시고‥‥‥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셨느니라"고 바울은 말한다(2:14-15).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른 사도가 증언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자기를 드렸기" 때문이다(9:14). 여기서 저 본성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 일들이 우리 마음속에 굳고 깊게 뿌리를 박기 위해서 우리는 희생과 씻음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희생 제물이 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가 우리의 구속과 몸값과 대속물이시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구속 방법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피를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는 배상이 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 버리는 놋대야가 되었다(참조, 5:26, 3:5, 1:5).

 

7. "죽으시고 묻히시며"

 

사도신경에는 다음에 "그리스도의 죽으시고 묻히시며"라고 한다. 여기서도 그가 우리를 구속하는 값을 치르기 위해서 모든 점에서 우리를 대신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죽음의 멍에 아래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죽음의 권세에 자기를 넘겨주시고 우리를 죽음에서 구출하셨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다"(2:9) 하는 사도의 말도 이런 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죽지 않게 하셨다. 바꿔 말하면, 자기의 죽음으로 우리를 구출해서 확실히 살게 하셨다. 그러나 그와 우리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었다. , 그가 이를테면 죽음이 자기를 삼키는 것을 허락하신 것은 죽음의 깊은 연못에 자기가 빠져 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불원에 삼켜 버렸을 그 죽음을 자기가 삼키시려는 생각이었다(참조, "죽음을 삼키심"은 벧전 3:22의 불가타역에 있음). 그가 자신이 죽음에 따른 것을 허락하신 것은 그 세력에 압도되시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위협하며 우리의 몰락한 상태를 기뻐한 그 죽음을 굴복시키시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목적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는 것이었다(2:14-15). 이것이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처음 열매다.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우리가 얻는 둘째 효과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그의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죽음이 땅에 붙은 우리의 지체들을 죽여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며, 우리 안에 있는 옛 사람을 죽여 번성하거나 결실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의 장사지낸바 된 것도 같은 결과를 나타낸다. 그 매장에 우리도 참가함으로써 그와 함께 죄에 대해서 매장되는 것이다. 사도는 가르치기를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와 연합한 자가 되었으며"(6:5), "그와 함께 장사되어" 죄에 대하여 죽었으며(6:4),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2:19, 6:14),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한다(3:3). 이런 발언들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신 모범을 나타내 보이라고 우리에게 권면할 뿐 아니라,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무용하고 무효한 것으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그 죽음에 내포된 효력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서 나타나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는 우리가 받아 즐길 이중의 축복을 제시한다. , 우리가 묶여 있던 그 죽음에서 해방되며, 우리의 육신을 죽이는 것이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교리에 대한 설명. 8-12)

 

8. "지옥에 내려 가사"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옥에 내려간 사실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구속을 실현하기 위해서 적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고대 저술가들의 글을 보면, 사도신경에 있는 이 어귀가 교회에서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 않은 때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교리의 요점을 설명할 때에는 이 어귀를 보존해야 한다. 매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귀중하고 유용한 신비가 거기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일부의 고대 저술가들은 이 어귀를 생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어귀는 얼마 후에 삽입되었고, 교회내에서 즉시 통용되지 못하고 점진적으로 관례가 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 표현이 모든 경건자의 공통된 신념을 반영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교부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지옥 강하를 말하지 않은 사람이 한 명도 없고, 다만 해석이 서로 다르다. 그러나 누가 언제 이 문구를 삽입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도리어 이 신경에 대해서 주목할 점은, 거기 우리의 믿음의 전체가 모든 세부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포함되었으며,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서 오지 않은 것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이 조문을 신경에 넣는 데 대해서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신조가 우리의 구속 전체를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가는 곧 명백하게 될 것이다. , 이 신조를 제거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의 혜택은 많이 상실될 것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이 신조에 아무 새로운 말이 없고, 그리스도의 매장에 대해서 이미 말한 것을 반복하며, "지옥"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자주 "무덤"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말의 뜻에 대해서 그들이 하는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한다. "지옥""무덤"으로 해석해야 할 때가 많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가 그들의 의견에 반대하며, 나를 그들에게 찬성하지 않도록 설복한다. 그 자체로서 전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일을 분명하고 쉬운 말로 표명한 다음에, 그것을 밝히기보다 도리어 모호하게 만드는 말로 되풀이한다는 것은 얼마나 부주의한 짓이었겠는가! 같은 문맥에서 같은 일을 위해서 두 가지 표현이 사용될 때에는 후자는 전자의 설명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장사한 바 되셨다"는 것이 "그가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뜻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설명이 될 것인가? 둘째로, 우리 믿음의 중요한 점들을 적절하고도 가장 간결하게 요약한 글에 이런 쓸데없는 반복 문구가 잠입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이 문제를 신중하게 고려한 사람이라면 곧 내게 찬성하리라는 것을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9. 그리스도는 음부 세계에 가셨는가?

 

어떤 사람들은 해석이 달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율법 하에서 죽은 족장들의 영혼들에게 내려가서 이미 성취된 구속을 발표하며 갇혀 있는 감옥에서 그들을 해방하셨다고 한다.

이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그들은 시편에서 "저가 놋 문을 깨뜨리시며 쇠 빗장을 꺾으셨다"라는 말씀을(107:16) 인용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마찬가지로, 스가랴의 "그가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으리라"는 말씀을 인용한다(9:11 의역). 그러나 시편은 먼 나라에서 노예가 된 사람들이 해방되리라는 예언이며, 스가랴는 백성이 당한 바벨론의 비극을 깊고 물 없는 구덩이에 비교하는 동시에, 교회 전체의 구원은 낮고 깊은 곳에서 석방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이럭저럭하는 중에 그곳을 지하에 있다고 생각해서 "림보"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이 이야기는 유명한 저술가들이 반복했고, 지금도 여러 사람이 참말이라고 열심히 옹호하지만, 여전히 이야기에 불과하다.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감옥에 가둔다는 것은 유치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무슨 필요가 있어서 그리스도의 영혼이 그들을 석방하러 그리로 내려가셨을 것인가?

나는 기꺼이 인정한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힘으로 그들에게 비추셔서, 그들이 소망으로만 맛보던 그 은혜가 그 때에 세상에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을 베드로서에 있는 구절도 아마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망대'에 있는 또는 보통 번역하는 대로, ''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벧전 3:19). 문맥으로 보아서, 그 때보다 먼저 죽은 신자들도 우리와 같은 은총에 참가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힘이 죽은 자들에게까지 미친다고 해서 그 힘을 찬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건한 영혼은 간절히 기다리던 강림을 목전에 보고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악인들은 자기들이 구원에서 전적으로 배제된 것을 더욱 분명히 깨달았다. 그런데, 베드로는 경건자들과 불신자들을 분명히 구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양자를 무차별적으로 혼동했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는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알았다고 가르치려는 것뿐이다.

 

10. "음부에 내려가심"은 우리를 위해서 받으신 영적인 고통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신경과는 별개로, 그리스도의 지옥에 내려간 것에 대해서 더 확실한 설명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 있는 설명은 거룩하고 경건할 뿐 아니라, 놀라운 위로가 가득하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것이 육체의 죽음뿐이었다면, 그 죽음에는 효험이 없을 것이다. 참으로 그는 동시에 하나님의 엄격한 천벌을 받으며, 그 진노를 진정시키며, 그 공정한 심판대로 배상을 치르실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그는 지옥의 세력과 영원한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상대로 직접 맞붙어 싸우셔야 했다. 조금 전에 인용한 예언자는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며",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라"고 한다(53:5). 예언자가 말하려는 뜻은 그리스도가 악인들을 대신해서보증과 담보가 되시며, 심지어 피고가 되셔서 그들이 받아야 하는 모든 벌을 참고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벌을 받으셨다. 다만 예외가 하나 있었다. "그는 사망의 고통에 매여 있을 수 없었다"(2:24). 그러므로 그가 지옥으로 내려가셨다고 말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악인들에게 가하신 죽음을 그가 당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매장이 있기 전에 있었던 일을 그 뒤에 두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이유로 순서가 이렇게 뒤집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너절하고 가소로운 반대를 하는 것이다. 문제의 요점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당하신 고난을 신경이 말한 다음에, 그가 하나님 앞에서 받으신 저 보이지 않고 헤아릴 수 없는 심판에 대해서 적절히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구속하시는 대가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 보다 더 위대하고 훌륭한 값도 주셨다는 것을, , 정죄와 버림을 받은 사람의 무서운 고민을 그의 영혼이 겪으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하려는 뜻이다.

 

11. 성경 구절로 이 설명을 변호함

 

이런 뜻으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고 살아나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의 고통에 매여 있거나 능가될 수 없었음이라"고 한다(2:24). 베드로는 단순히 죽음을 말할 뿐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의 고통에 붙잡히셨다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에서 오는 고통이며 죽음의 원인이다. 아무 두려움 없이 나서서 장난같이 죽음을 당하게 되셨다면, 그것은 얼마나 사소한 일이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몹시 무서워 하시면서도 그것을 피하시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무한한 자비를 참으로 증명했다. 히브리서에서 사도가 그리스도는 "그의 공포로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하는 것도(5:7) 같은 뜻임이 확실하다(다른 사람들은 "경외하심" 또는 "경건하심"이라고 번역하지만, 사실 자체와 표현 방법으로 보아서 그것은 부적당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으로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5:7). 죽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가지고 계셨으므로 죄인으로서 죽음에 삼켜 버리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또 참으로,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아 멀어진다고 느끼며, 하나님에게 간구해도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보다 더 무서운 심연을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멸망을 계획하신 것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심히 낙망하셔서 깊은 고민 가운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27:46 ; 22:1) 외치지 않을 수 없으신 것을 우리는 본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외치심을 그리스도 자신의 느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전혀 믿을 수 없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분명히 그의 심중에 있는 깊은 고통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미워하셨다거나 노하셨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에 대해서, "내 마음을 안식하게 하는 자"라고 하신 이에 대해서(참조, 3:17) 노하실 수 있었겠는가? 만일 그리스도 자신을 하나님이 미워하셨다면, 그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위한 중재자로서 아버지의 노염을 푸실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엄격한 벌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 채찍을 맞아 고통을 받으셨으며(53:5), 노하시며 벌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표징을 체험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힐라리는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이 정복되었다는 결과를 얻었다." 그가 다른 구절에서 "십자가와 죽음과 지옥이것들이 우리의 생명이다"라고 하며, 또 다른 구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지옥에 계시지만, 사람은 하늘로 들려 올라간다"고 한 말도 우리 생각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사도가 같은 주장을 한 것이 있는데, 내가 무슨 까닭에 한 사사로운 개인의 증언을 인용하겠는가? 사도는 그리스도의 승리의 결과를 회상하면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한다(2:15).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나면서부터 끊임없이 괴롭히며 압박하는 공포심을 그리스도께서 정복하실 필요가 있었다. 이 일을 하시려면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의 슬픔은 보통 슬픔이나 사소한 원인에서 생긴 슬픔이 아니었다는 것이 곧 더 명백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악마의 권세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지옥의 고통을 상대로 직접 맞붙어 싸우심으로써 그것들을 모두 정복하고 개선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죽음에 대해서 우리의 왕이 삼켜 버리신 그 일들을 무서워하지 않게 하시려는 뜻이었다(참조, 벧전 3:22, 불타카역).

 

12. 오해와 오류에 맞서는 이 교리를 옹호함

 

여기서 어떤 배우지 못한 가엾은 사람들은 내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서운 훼방을 한다고 외친다. 그들의 항의는 무지해서가 아니라, 악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영혼의 구원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시는 것은 그리스도답지 않은 일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 다음에 더 심한 중상을 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아들에게 믿음과 반대되는 절망을 돌린다고 한다. 첫째로, 복음서 기자들이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두려움과 공포심에 대해서 그들이 논쟁을 일으키는 것은 악한 짓이다. 죽으실 때가 가깝기 전에 그는 "심령에 민망"하여(13:21) 슬퍼하셨고, 그때가 다가오자 두려워 더욱 심히 떨기 시작하셨다(참조, 26:37). 그들이 말하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무서운 시늉을 하셨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도피다. 암브로시우스가 바르게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는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슬픔을 확실히 인정해야 한다. 또 사실, 그의 영혼도 함께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면, 그는 신체에 대해서만 속죄주가 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절망에 쓰러진 사람들을 일으키기 위해서 싸우실 필요가 있었다. 그가 움츠리지 않고 우리의 약점들을 담당하신 데서 그의 인애가아무리 찬양해도 다할 수 없는 그 인애가 빛난다. 따라서 이 일은 그의 하늘 영광을 조금도 손상하지 않는다. 또 사도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위로도 우리의 고민과 비애에 대한 위로도 여기서 생겨난다. , 이 증오자는 불행한 우리를 더 잘 구출하기 위해서 우리의 약점들을 체험하신 것이다(4:15).

그들은, 본질상 악한 일을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것은 비열한 짓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면서(4:15) 이 두 가지 일을 조화시키시는 성령보다 그들이 더 현명하단 말인가! 그리스도께서 연약하셨다고 해서 우리가 놀랄 이유는 조금도 없다. 그는 폭력이나 필연성의 강요를 받아서 굴복하신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우리에게 대한 사랑과 긍휼로서 굴복할 생각을 하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받으신 모든 고난은 조금도 그의 권능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이 훼방꾼들이 속아 넘어간 점이 하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순종하는 태도를 견지하셨기 때문에, 연약하셨을지라도 아무 죄나 오점이 없었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한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격렬하고 충동적인 감정이 한도를 모르며 따라서 절제가 없다. 그래서 우리의 논적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이 표준으로 측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그는 타락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감정의 움직임에서 극단을 억제하시는 훌륭한 절제가 있었다. 그래서 슬픔과 두려움과 공포심을 느끼는 점에서 우리와 같으실 수 있었지만(참조, 2:17), 이 특성에 의해서 그 느끼시는 법이 우리와 확실히 달랐다.

논적들은 반박을 당하자, 다른 허위 궤변으로 비약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무서워하셨지만,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무서워하신 것이 아니며, 도리어 이 저주와 진노에 대해서는 자기가 완전한 줄로 아셨다고 한다. 그러나 경건한 독자들은 그리스도가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보다 더 씩씩하지 못하며 겁이 많으신 것이 그에게 얼마나 명예가 되었겠나를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도둑과 그 밖의 악인들이 거만하게 죽음을 서두르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죽음을 멸시하여 만용을 보이며, 어떤 사람들은 고요히 견딘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이 무서워서 놀라며 거의 마비되셨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항구성과 위대성이라고 할 것인가? 그에 대해서 기적적이라고 보통 생각하는 일이 전해지는데, 격렬한 고민 때문에 그의 얼굴에서 핏방울이 흘렀다는 것이다(22:44) 또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때에 그는 비밀히 아버지에게 신음으로 호소하신 것이다.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와서 특별한 위로로 그의 용기를 고무해야 했다는 사실은(22:43) 모든 의심을 흩어 버린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만일 그리스도께서 보통으로 죽으시면서 그 죽음이 무서워 심히 고민하며 피땀까지 흘리셨고, 겨우 천사들이 나타났어야 기운이 되살아났다고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나약이었겠는가? 대답하라. 믿을 수 없이 비통한 마음에서 우러난 저 기도,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하고 세 번 반복하신 저 기도는(26:39) 그리스도께서 보통 죽음보다 더 가혹하고 더 곤란한 싸움을 하셨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이것을 보면, 내가 싸우고 있는 이 궤변가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 대담하게 지껄이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속되었다는 것이 무슨 일이며 무슨 뜻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한 일이 없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셨는가를 바르게 느끼는 것이 우리의 지혜가 된다.

그런데 누가 묻기를, 그리스도는 죽음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때에 지옥에 내려가셨더냐고 한다면, 나는 대답한다. 이 기도는 출발이었고, 여기서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고. , 그가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피고로서 서 계시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그가 얼마나 가련하고 무서운 고민을 하셨는가를 추측할 수 있다고. 그리스도의 영의 신적 능력이 일시 숨어 있고 육의 연약이 자리를 차지했지만, 고통과 두려움에서 온 그 시련은 믿음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래서 베드로의 연설에서"그가 사망에서 매여 있을 수 없음이라"고 한 말이(2:24) 실현되었다. 그는 이를테면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느끼셨지만, 하나님의 인애를 믿는 점에서는 조금도 동요가 없었다. 이 점은 격렬한 고민 중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27:46)하고 외치신 그의 비범한 기도가 증명한다. 그는 무한한 고통을 느끼셨지만 자기를 버리셨다고 외친 그 하나님을 여전히 자기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셨다. 그런데 이 점은 아폴리나리스와 이른바 단의론자(單意論者)들의 과오를 논박한다. 아폴리나리스는 그리스도에게 영원한 영이 있었으나 영혼은 없었다고 하며, 따라서 그리스도는 절반 사람에 불과하셨다고 한다. 그가 아버지에게 복종하시지 않고 어떤 다른 방법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신 것같이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복종하는 성향이나 의지는 영혼에 있지 않고 어디 있는가? 그의 영혼이 불안을 느낀 것은 공포심을 구축하고 우리 영혼에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주려고 하셨기 때문이었음을 우리는 안다. 우리는 단의론자들과는 반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신성에 따라서 원하신 일을 인간으로서는 원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말한 공포심을 반대 감정으로 극복하셨다는 사실을 나는 말하지 않겠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하시니(12:27-28), 이것은 분명히 커다란 모순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시면서도, 우리가 자신을 억제하려고 굉장히 애쓸 때에 보이는 그런 극단적인 행동이 없으셨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하늘에 정좌하심. 13-16)

 

13.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다음에 있는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이다. 이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것이 완전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과 장사에서 나타난 것은 무력함뿐이므로, 믿음은 이 모든 것을 초월해서 그 완전한 힘을 얻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대로 배상을 치르며, 저주가 제거되며, 형벌을 완전히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완전히 실현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죽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되었다고 한다(벧전 1:3).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에 대한 승리자가 되신 것과 같이, 우리의 믿음이 죽음을 이기는 것도 오직 그의 부활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의 의롭다 함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느니라"고 하는(4:25)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성격을 더 잘 표현한다. 그 뜻을 바꿔 말하면, "그가 죽으심으로써 우리 죄가 제거되고 그가 부활하심으로써 의가 소생하며 회복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 자신이 죽음에 굴복해 버리셨다면, 어떻게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하실 수 있었겠는가? 그 자신이 싸움에 지셨다면, 어떻게 우리를 위해서 승리를 얻어 주실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의 내용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나누어, 그의 죽음에 의해서 죄가 말소되고 죽음이 말살되었으며, 그의 부활에 의해서 의가 회복되며 생명이 소생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부활의 덕택으로 그의 죽음은 우리 안에서 그 권능과 효력을 나타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라고 한다(1:4) 그 때에 그가 드디어 하늘 권능을 나타내 보이셨고, 이 권능은 그의 신성(神性)을 분명히 반영하는 거울인 동시에 우리의 믿음을 굳게 지탱해 주기 때문이다. 다른 데서도 바울은 그는 육신이 약하시므로 고난을 받으셨으나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살으셨다고, 같은 뜻으로 가르친다(고후 13:4). 같은 의미에서 바울은 다른 곳에서 완전성을 논할 때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함이라"고 말하고, 즉시 계속해서 "그의 죽으심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라고 첨부한다(3:10). 이와 긴밀히 일치하는 것이 베드로의 발언이다. "하나님께서는 저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셨으니 이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 1:21).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지탱되는 믿음이 흔들린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아래서 우리를 지켜주는 하나님의 권능이 특히 부활에서 나타났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동시에 그의 부활에 속한 일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부활"이란 말에 대해서도 부분으로 전체를 대표하는 이 표현법이 적용된다. , 죽음과 별도로 부활이 화제에 오를 때마다 우리는 그것은 특히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일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사심으로써 승리자의 상을 타셨으므로, , 부활과 생명이 있게 하셨으므로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속임수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고전 15:17) 주장하는 것은 바르다. 따라서 그는 다른 구절에서 정죄가 일으키는 공포심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랑한 후에, 더욱 역설하는 의미로, 확실히 죽으신 이가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의 중보로서 하나임 앞에 나타나신다고 첨부한다(8:34).

그뿐 아니라, 우리의 육을 죽이는 일은 그의 십자가에 참가하는 데 달렸다고 우리가 이미 설명한 것과 같이, 우리는 그의 부활에서도 거기 부합하는 혜택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에 합하여 접붙임이 된 것을 그의 부활에 참여하여 우리로 하여금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사도는 말한다(6:4) 따라서 다른 구절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에서(3:3) 우리는 지상에 있는 우리의 지체를 죽어야 한다는 증명을 얻어낸다(참조, 3:5). 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근거로, 우리는 지상의 일이 아니라 위에 있는 일을 구해야 한다고 추론한다(3:1-2). 이런 말은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새로운 생명을 추구하라고 권고할 뿐 아니라, 우리는 그의 권능에 의해서 중생하여 의를 얻었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그의 부활에서 셋째 혜택도 받는다. , 그의 부활이 실증하는 일종의 보증을 받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얻는다. 바울은 이 문제를 고린도전서 15:12-26에서 자세히 논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이 말은 그의 죽음과 부활의 진리를 표현한다.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이 자연히 죽는 것과 같은 죽음을 겪으셨고, 그가 죽을 인간으로서 입으셨던 그 육신으로 영생 불사를 받으셨다는 것이다.

 

14. "하늘에 오르사"

 

부활과 승천이 연결되어 있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그리스도께서는 비천한 지상 생활과 십자가의 수치를 벗어버리고 부활하심으로써 영광과 권능을 더욱 완전히 나타내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참으로 나라를 창건하신 것은 비로소 승천하신 때였다. 그리스도는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는 사도의 말은 이 일을 가리킨다(4:10). 거기는 모순이 있는 것 같지만, 훌륭한 일치가 있다는 것을 바울은 밝힌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떠나셨으나, 떠나심으로써 우리에게 더욱 유익하게 되도록 하셨다. 지상에 우거하신 동안은 미천한 육신을 집으로 삼으시고 그 안에만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오라"고 하는 유명한 초청의 말씀을 기록한 다음에(7:37),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믿는 자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첨부했다(7:39 의역). 주께서도 친히 이 점을 제자들에게 확인하셔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6:7). 그는 육신으로 계시지 않는 문제로 그들을 위로하시면서, 그들을 고아같이 버리지 않고,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더 좋은 방법으로 그들에게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셨다(14:18-19, 16:14).

사실, 그들은 그때에 더욱 확실한 체험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 행사하시는 권위와 권능은 신자들을 축복 가운데 살며 기쁨으로 죽게 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 후에 성령을 얼마나 풍성하게 부어 주셨으며, 얼마나 놀랍게 그의 나라를 확대하셨으며, 얼마나 그의 큰 권능을 발휘하셔서 자기 백성을 도우며 원수들을 흩으셨는가를 안다. 그러므로 승천하심으로써 육체적으로 우리 앞에 계시지 않게 하셨지만(1:9), 그것은 아직 지상 순례를 계속하는 신자들과 함께 계시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더욱 직접적인 권능으로 천지를 주관하시려는 뜻이었다. 승천하심으로써 약속하신 일을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것을 실현하셨다. 그의 몸이 모든 하늘 위로 들려 가신 것과 같이, 그의 권능과 힘은 온 천지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확산되며 보급되었다. 나는 내 말보다 어거스틴의 말로 이 점을 설명하겠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셔서 아버지의 우편으로 가셨다가, 그리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게 되어 있었다. 그는 순수한 가르침과 믿음의 원칙에 따라 육체적 임재로 이 일을 하려 하셨다. 그가 영으로 함께 계시는 것은 그의 승천 후에 있게 되어 있었다." 다른 데서 어거스틴은 더 자세하고 분명하게 말한다. "말할 수 없고 볼 수 없는 은총에 의해서는, 그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이(28:20) 실현될 것이다. 말씀이 취하신 육신에 의해서는, 처녀에게서 나신 사실에 의해서는, 유대인들에게 잡혀 나무에 달리며 십자가에서 내리워 세마포로 싸여 무덤에 눕히며 부활로 나타나신 사실에 의해서는,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이(26:11) 실현되었다. ? 그는 40일 동안 육신으로 제자들과 함께 다니시며, 그들과 함께 계셨을 때에 그들이 보면서도 따라가지 못하는 가운데 승천하셨고(1:3, 9) 여기는 더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는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16:19). 그러나 그의 숭엄성의 임재를 거두지 않았으므로 그는 여기 계신다(참조, 1:3). 그러므로 숭엄성의 임재에 의해서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 그러나 육신의 임재에 관해서는 제자들에게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이(26:11) 바르다. 교회는 육신의 임재로는 그리스도를 며칠 동안 모셨고 지금은 믿음으로 모시며 눈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15. "아버지 우편에 않아 계시다가"

 

결과적으로 곧 이어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라는 말이 있다. 이 비유는 임금들이 정사를 맡기는 신하들을 자기 옆에 앉히는 데서 왔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통치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으로 영접되셨다고 한 것이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천지에 대한 주권을 받으시며, 위임된 정권을 엄숙히 장악하셨으며, 일단 차지하셨을 뿐 아니라, 심판 날에 내려오실 때까지 통치를 계속하시리라는 것이다. 사도가 이렇게 해석한 발언을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1:20-21. 참조, 2:9),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고전 15:27),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1:22). 이것으로 저 "앉아 계시는" 목적을 알 수 있다. , 천지의 모든 피조물들이 그의 숭엄성을 우러러보아 경탄하며, 그의 지배를 받으며, 그의 명령에 복종하며, 그의 권능에 순종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목적을 가르치려고 사도들은 자주 이 일을 회상해서, 만사는 그리스도의 결정에 위임되었다고 했다(2:30-36, 3:21, 4, 1:8). 그러므로 이 말은 그의 축복된 처지를 가리킬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못이다. 사도행전에 스데반이 그리스도가 서 계신 것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7:55) 중요한 점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문제된 것은 그의 자세가 아니라, 그의 숭엄한 권위였기 때문이다. "앉아 계시다"는 것은 하늘 심판대에서 주재하고 계시다는 것과 다름이 없다.

 

16. 그리스도의 승천이 우리의 신앙에 주어지는 혜택

 

이 일에서 우리의 믿음이 받는 많은 혜택을 받는다. 첫째로, 주께서 승천하심으로써 아담 때문에 닫혔던 천국 길을 여셨다는 것을(14:3) 깨닫게 된다. 그가 우리의 육을 쓰시고 우리를 대신하시듯이 하늘에 들어가셨으므로, 사도가 말한 것과 같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는 결론이 된다(2:6). 그래서 우리는 소망만으로 하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믿음이 인정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된다. 손으로 만들지 않은 성소에 들어가신 그리스도께서 항상 우리의 예언자와 중보자로서 아버지 앞에 나타나시기 때문이다(7:25, 9:11-12, 8:34). 이와 같이, 그는 아버지께서 우리의 죄를 보시지 않고 자기의 의를 보시게 하신다.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와 화해하게 하셔서, 자기의 중재로 우리가 아버지의 보좌에 가까이 가는 길을 준비하신다. 가련한 죄인들에게는 무서움이 가득했을 그 보좌를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사랑으로 가득하게 하시는 것이다.

셋째로, 믿음은 그리스도의 권능을 깨달으며, 그 힘에 우리의 힘과 능력과 보화와 또 지옥을 이긴 영광이 있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4:8. 참조, 68:18), 원수들의 것을 빼앗아 자기 백성을 풍성하게 만드시며, 그들에게 매일 영적 양식을 아낌없이 부어 주신다. 그러므로 그는 하늘에 앉으시사, 우리에게 자기의 권능을 주입하셔서 우리를 영적 생명으로 살리시며, 성령으로 우리를 성결하게 하시며, 각종 은사로 교회를 장식하시며, 교회가 해를 받지 않고 안전하도록 보호하시며, 그의 십자가와 우리의 구원에 반대하여 대적하는 원수들을 그의 강한 손으로 억제하시며, 끝으로 천지의 모든 권한을 잡고 계신다. 이 모든 일을 계속하시다가 드디어는 그의 원수이자 우리의 원수인 자들을 모두 굴복시키고(고전 15:25. 참조, 110:1) 교회 건설을 완성하실 것이다. 이것이 그의 왕국의 진상이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권능이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셔서 최후의 치리를 완수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가 심판하러 미래에 다시 오심. 17)

 

17.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있는 자기의 권능에 대해서 자기 백성에게 분명한 증거를 주신다. 그러나 그의 나라는 지상에서는 이를테면 비천한 육신 밑에 숨겨졌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그가 저 마지막 날에 나타내실, 눈에 보이는 임재(臨在)를 심사숙고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옳다. 그는 승천하신 때와 같이, 보이는 형태로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이다(1:11, 24:30). 그리고 그의 나라의 형언할 수 없는 숭엄성과 영생 불사의 광채와 신성(神性)의 무한한 권능과 함께 일단의 수호천사들을 데리고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실 것이다. 우리는 그가 그 날에 저리로부터 우리의 구속자로서 오시는 것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시면 양과 염소, 선택된 자와 버림받은 자를 분리하실 것이다(25:31-33). 생사 간에 아무도 그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나팔 소리가 땅 끝까지 울려 모든 사람을 심판대 앞에 부를 것이니, 그날에 살아 있는 사람들과 이미 산 자들 사이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모두 소집될 것이다(살전 4:16-17).

"산 자와 죽은 자"라는 말을 다르게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대 저술가들 중에 이 표현을 설명하는 방법에 대해서 의심을 품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물론 안다. 그러나 방금 제시한 설명은 평이하고 분명하므로 신경에 훨씬 더 가깝다. 신경은 분명히 보통 사람이 이해하도록 쓴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 뜻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라"고 한 바울의 발언과 다르지 않다(9:27). 최후 심판 때에 아직 육신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은 자연적인 죽음은 겪지 않겠지만, 그들이 당할 변화는 죽음과 같을 것이므로 "죽음"이라고 불러도 부적당하지 않겠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다 변화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고전 15:51). 이것은 무슨 뜻인가? 그들의 죽을 운명의 생명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삼켜 버리고, 새로운 본성으로 직접 변화하리라는 것이다(고전 15:52). 이렇게 육신이 사라지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산 자와 죽은 자가 심판에 호출되리라는 것은 여전히 바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될 것이다(살전 4:16-17). 그런데 이 표현은 누가가 기록한 베드로의 설교와(10:42) 디모데에게 보낸 바울의 엄명에서(딤후 4:1) 따온 것 같다.

 

(사도신경에 대한 결론 : 그리스도의 충족성. 18-19)

 

18. 심판자가 구속자시다

 

여기서 우리에게는 놀라운 위로가 생긴다. 우리를 심판하실 이는 자기와 함께 심판하는 영광을 나눠주시기로 이미 결정하신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기 때문이다(참조, 19:28). 참으로 그가 심판대에서 우리를 정죄하실리는 만무하다! 우리의 지극히 자비하신 왕께서 어떻게 자기 백성을 멸하실 수 있겠는가? 머리가 어떻게 자기의 지체들을 흩어 버리실 수 있겠는가? 우리의 대언자가 어떻게 자기의 피()보호자들을 정죄하실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니, 우리를 정죄하려고 능히 나설 자가 없다고 사도가 담대히 외치므로(8:34,33),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맡아 보호하시는 사람들을 정죄하시지 않으리라는 것은 훨씬 더 확실하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리라고 우리가 기대해야 하는, 바로 그 우리의 구속주가 우리를 심판하는 심판대에 계시리라는 것은 평범한 보장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 복음을 통해서 영원한 축복을 약속하시는 이가 그때에는 심판정에서 그 약속을 실행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심판을 맡기셔서(5:22) 영예를 주신 목적은 심판이 무서워 떠는 자기 백성의 양심을 그가 보호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랐다. 그것은 신경이 우리의 구속의 중요한 점들을 간단히 요약하며,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일들을 일일이 분명히 보여 주는 일람표와 같은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도신경이라고 부르지만, 그 저자 문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고대 저술가들은 신경을 사도들에게 돌리는 점에서 상당히 의견이 일치했다. 사도들이 공동으로 써서 발표했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전한 가르침을 충실히 수집하며 요약한 것이므로 넉넉히 사도들의 이름을 붙일 만하다고 생각했다. 신경이 어디서 나타났든 간에, 교회의 바로 초창기, , 사도시대에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그것을 공중(公衆) 고백서로 인정했다고 나는 확신한다. 어느 한 개인이 사적으로 쓴 것 같지 않고, 사람들이 회상할 수 있는 가장 오랜 옛날부터 확실히 모든 경건자들이 그것을 신성한 권위로 인정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유일한 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 우리의 믿음의 역사 전체가 신경에 간명하고 질서 정연하게 요약되었으며, 성경의 순수한 증언에서 보증을 얻지 못하는 것은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저자 문제로 불안을 느끼거나 남과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물론 성령의 진리를 확실히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누가 그것을 말했다거나 썼다는 것까지 알지 못하면 만족하지 않는 사람은 문제가 다르다.

 

19. 사도신경의 모든 조항에는 그리스도가 계실 뿐이다

 

우리의 구원은 전체적으로 또 그 모든 부분이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4:12). 그러므로 그 가장 사소한 부분이라도 다른 데서 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구원을 추구한다면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구원은 "그에게서" 온다는 것을 가르친다(고전 1:30). 우리가 성령의 다른 은사를 구한다면, 그것은 그가 기름부음을 받으신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힘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의 주권에 있으며, 순결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의 잉태에 있으며, 온유함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의 탄생에서 나타난다. 그는 탄생하심으로써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이 되셔서(2:17), 우리의 고통을 느낄 수 있게 되셨다(참조, 5 :2). 우리가 구하는 것이 구속이라면 그것은 그의 고난에 있으며, 무죄 방면이라면 그것은 그가 정죄 받으신 데 있으며, 저주를 면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의 십자가에 있으며(3:13), 배상을 치르는 일이라면 그것은 그의 희생에 있으며, 정결이라면 그것은 그의 피에 있으며, 화목이라면 그것은 그의 지옥에 내려감에 있으며, 육을 죽이는 일이라면 그것은 그의 무덤에 있으며, 새로운 생명이라면 그것은 그의 부활에 있으며, 영생 불사라면 그것도 그의 부활에 있으며, 천국을 상속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그의 승천에 있으며, 보호나 안전이나 모든 풍부한 축복이라면 그것들은 그의 나라에 있으며, 안심하고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가 받으신 심판권에 있다. 요약하면, 그리스도 안에 모든 종목의 선한 것이 풍성하게 장만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다른 데로 갈 것이 아니라, 이 원천에서 마음껏 마셔야 한다.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런 희망 저런 희망으로 떠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그리스도에 관심이 있지마는 생각의 일부를 다른 방향으로 돌린다는 점에서 그들은 바른 길에서 떠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풍부한 축복을 한번 참으로 안다면 이런 불신(不信)이 그들 속에 끼어들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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