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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상, 사회계약설과 루소 계몽사상 : Enlighte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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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계몽 사상(enlightenment)

 

18세기 프랑스 사상의 주류를 이루고, 프랑스혁명에 원리를 제공한 사상. I.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1784)를 저술한 후부터 사상사(思想史)에서의 용어가 되었다. 계몽이란, 아직 미자각상태(未自覺狀態)에서 잠들고 있는 인간에게 이성(理性)의 빛을 던져주고, 편견이나 미망(迷妄)에서 빠져나오게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또 신학(神學)에 대응되는 의미에서 철학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 경우, 철학이란 좁은 의미의 형이상학(形而上學)이 아니라, 널리 인간세계나 자연인생 등에 관한 지혜와 교양을 나타낸다. 또한 신학이 죽음을 주제로 하는 데 대해서 삶의 실학(實學)을 가리킨다. 따라서 계몽사상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영원의 물음에다가 󰡐어떻게 행복해질 것인가󰡑라는 현세(現世)의 과제가 덧붙여진다. 본류(本流)는 몽테스키외, 볼테르, J.J.루소를 비롯한 프랑스의 사상가, 문학가의 여러 저작작품에 있으나, 그 원류(源流)T.홉스, J.로크를 비롯하여 17세기의 영국에서 시작된다. 그리하여 T.레싱, J.G.헤르더를 비롯한 독일의 여러 사상가에게까지 미쳤다. 이런 뜻에서는 18세기의 모든 문학운동사상활동의 저류(底流)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으며, 각국에 싹트기 시작했던 시민정신의 형상화(形象化)에 있어 매개자의 역할도 하였던 것이다. 영국의 홉스는 프랑스의 R.데카르트와 함께 계몽사상의 원조라 할 수 있으나 고유의 의미에서의 영국 계몽철학은 로크와 D.흄에서 시작된다. 로크는 경험론을 인식론 안에 도입하여, 인간의 자연상태를 자유의 실존이라 규정하였으며, 자유로운 개인이 자유의지에 따라 공동체에 대한 복종을 선택한 이상, 선택은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계약에 의한 것이며, 인간의 자유의 지주(支柱)가 사유재산권의 보유에 있는 이상, 국가는 시민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존재요, 국왕은 그 집행기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프랑스의 계몽사상은 1734년에 출판된 볼테르의 철학서간(哲學書簡)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어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1748)을 지어 삼권분립의 원칙을 밝히고, 절대왕정(絶對王政)에 쐐기를 박았다. D.디드로, J.R.달랑베르, 뷔퐁, E.B.콩디야크, P.H.돌바크 등에 의해서 18세기 중엽부터 백과전서(百科全書)가 발간되었으며, 종교나 관습제도의 주술(呪術)에 묶여 있는 인간을 감성적심정적으로 해방시키고, 앞으로 꽃필 과학에 대한 꿈을 고취하며, 각자가 자신의 주체성 위에 서서 새로운 세계관처세술창조에의 참가를 실현하도록 촉구하였다. 볼테르는 캉디드 Candide》 《자디그 Zadig를 통하여, 디드로는 라모의 조카》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을 통해서, 문명의 상식에 등을 돌리고, 태어난 그대로인 자연아(自然兒)로 하여금 현실세계 속을 걷도록 함으로써, 사회와 인간 간의 깊은 상대관계를 알아내려고 하였다. 이 주제는 루소에 의해서 더욱 추구되었으며, 인간 불평등 기원론(55) () 엘로이스(61) 사회계약론(62) 에밀(62) 고백록(8188, 사후 출판) 등을 낳는 원동력이 되었다. 계몽사상은 루소에 의해서 인간성의 전가치체계(全價値體系)로 완성되었으며, 18세기뿐만 아니라 널리 근대 시민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루소 뒤에는 G.B.마블리, J.르나르, M.콩도르세 등이 나와서 진보사상을 주창하였으며, 전제정치와 교회에 대해서 공격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계몽사상의 본류는 어느덧 사상을 기술화(技術化)하는 몇 가지 말류(末流)로 갈라졌으며, F.케네, A.R.J.튀르고 등에 의해서 중농주의(重農主義)가 제창되는 한편, 시에예스 등에 의해서 제3신분의 정치론이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 사회 계약설과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사회계약설: 정치사회 성립의 역사적논리적 근거를 평등하고 이성적인 개인간의 계약에서 구하려는 정치이론. 17, 18세기 영국 및 프랑스에서 전개된 이론이며, 부르주아혁명 때에는 근대시민계급의 이데올로기적 기둥으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이 이론은 국가 기타의 정치적 제도는 실제적실체적 성격을 잃고, 계약을 지탱하는 개인의 의지에 따라 그 존재가 좌우되는 인공적 가구물(假構物)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종래의 지배질서는 모두가 비판을 당하게 된다. 따라서 사회계약설의 혁명적 성격도 이 점에 있지만 동시에 그 이론적 결함도 또 여기에 있다. 그러나 정치사회 성립의 실증성이 약함에도 불구하고 민주국가의 윤리성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가치는 간과할 수 없다. 이 이론의 전형적 전개론자로는 T.홉스, J.로크, J.J.루소 등을 들 수 있다. 홉스는 자연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 생각하고 사람들이 자연권을 지배자에게 위양함으로써 평화적인 상태로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여, 17세기 절대왕정제 이론을 성립시켰다. 로크는 계약에 의해서도 생명자유재산 등의 자연권은 지배자에게 위양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입헌군주제의 이론을 선도하였다. 그리고 루소는 인간의 불평등 원인을 사유재산에 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사회계약에 입각하여 각인이 자유 평등을 누릴 수 있는 자연상태를 구상하였다. 즉 인민의 일반의지로서의 국가가 자유 평등을 보장할 수 있는 정치체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여 프랑스혁명의 이론적인 근거를 세웠다.

 

루소: 프랑스의 사상가소설가. 스위스 제네바 출생. 가난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루소를 낳다가 죽자 아버지에 의해 양육되었다. 10세 때는 아버지마저 집을 나가 숙부에게 맡겨졌으며, 공장(工匠)의 심부름 따위를 하면서 소년기를 보냈다. 16세 때 제네바를 떠나 청년기를 방랑생활로 보냈는데, 이 기간에 바랑 남작부인을 만나 모자간의 사랑과 이성간의 사랑이 기묘하게 뒤섞인 것 같은 관계를 맺고, 집사로 일하면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1742년 파리로 나와 디드로 등과 친교를 맺고, 진행 중인 백과전서의 간행에도 협력하였다. 49년 디종의 아카데미 현상 논문에 당선한 학문과 예술론을 출판하여 사상가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그 뒤 인간불평등기원론(1755) 정치 경제론(55) 언어기원론(사후 간행) 등을 쓰면서 디드로를 비롯하여 진보를 기치로 내세우는 백과전서파 철학자나 볼테르 등과의 견해 차이를 분명히 하였다. 특히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연극에 관한 편지(58) 이후 디드로와의 사이는 절교상태가 되었고, 두 사람은 극한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독자적 입장에 선 루소는 다시 서간체 연애소설 () 엘로이즈(61),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논한 민약론(民約論)(62), 소설 형식의 교육론 에밀Emile(62) 등의 대작을 차례로 출판하였는데, 특히 신 엘로이즈의 성공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에밀이 출판되자 파리대학 신학부가 이를 고발, 파리 고등법원은 루소에 대하여 유죄를 논고함과 동시에 체포령을 내려 스위스영국 등으로 도피하였다. 영국에서 흄과 격렬한 논쟁을 일으킨 후, 프랑스로 돌아와 각지를 전전하면서 자전적 작품인 고백록을 집필하였다. 6845년 이래 함께 지내온 테레즈 르바쇠르와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그 후 파리에 정착한 루소는 피해망상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자기변호의 작품 루소, 장자크를 재판한다를 쓰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쓰기 시작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파리 북쪽 에르므농빌에서 죽었다. 그가 죽은 지 11년 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는데, 그의 자유민권 사상은 혁명지도자들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94년 유해를 팡테옹(위인들을 合祀하는 파리의 성당)으로 옮겨 볼테르와 나란히 묻었다. 평생 동안 많은 저서를 통하여 지극히 광범위한 문제를 논하였으나, 그의 일관된 주장은 󰡐인간 회복󰡑으로, 인간의 본성을 자연상태에서 파악하고자 하였다. 인간은 자연상태에서는 자유롭고 행복하고 선량하였으나, 자신의 손으로 만든 사회제도나 문화에 의하여 부자유스럽고 불행한 상태에 빠졌으며, 사악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다시 참된 인간의 모습(자연)을 발견하여 인간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인간 본래의 모습을 손상시키고 있는 당대의 사회나 문화에 대하여 통렬한 비판을 가하였으며, 그 문제의 제기 방법도 매우 현대적이었다. 한편, 그의 작품 속에 나오는 자아의 고백이나 아름다운 자연묘사는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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