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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사상, 프로테스탄티즘과 칼뱅이즘 : Protestantism and Calvi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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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과 칼뱅이즘(Calvinism)

 

1)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

16세기 M.루터, J.칼뱅 등의 종교개혁의 결과로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하여 성립된 그리스도교의 분파. 가톨릭을 구교(舊敎)라고 하는 데 대해 신교(新敎)개신교라고도 한다. 로마 가톨릭교회 및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3대 교파를 이룬다.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프로테스트에서 기원했는데, 이 말은 1529221일에 열린 독일 슈파이어 국회에서 루터계 제후(諸侯)와 도시들이 황제 카를 5세 등 로마 가톨릭 세력의 억압에 항거한 데서 유래하였다.

 

역사 루터가 독일에서 일으킨 종교개혁은 1526년 이후 독일의 여러 지방으로 확산되었으며, 30년 독일 루터교회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이 작성된 이후 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 3국으로 확산되었다. 이 종교개혁은 스위스에서도 일어났다. 취리히에서는 츠빙글리, 슈트라스부르크에서는 부처, 제네바에서는 칼뱅 등이 주로 상공업자와 손잡고 프로테스탄트적 종교개혁에 앞장섰다. 이 같은 일련의 교회개혁 운동 과정에서 프랑스에서는 위그노전쟁이, 독일에서는 30년전쟁 등의 종교전쟁을 치르기도 하였다. 그 결과 유럽의 종교적 통일성은 무너져, 독일에서는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었다. 유럽에서는 드디어 각 분파가 형성되었는데, 스위스계의 프로테스탄트를 개혁교회(改革敎會) 또는 장로교회(長老敎會)라고 부른다. 이 개혁교회는 프랑스영국스코틀랜드네덜란드헝가리폴란드 등으로 확산되었다. 영국에서의 종교개혁은 유럽 대륙과는 달리 영국성공회(英國聖公會)를 성립시켰는데, 이것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그 후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아 퓨리턴 제파(諸派)로 나뉘어 각각 장로파(長老派)회중파(會衆派)뱁티스트파퀘이커파메노나이트파 등 여러 교회로 성장하였다. 이들 여러 교회의 신학적 특징은 칼뱅주의뿐만 아니라 교파에 따라서는 재세례파(再洗禮派)나 스피리튜얼리즘의 요소를 간직하기도 하였다. 18세기에 들어서 영국 성공회로부터 갈라져 메서디스트 교회가 생겼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파가 주종을 이루었다. 미국은 영국의 퓨리턴 제파에서 나온 교회와 메더디스트 교회를 주종으로 하는 대표적인 프로테스탄트 국가로서, 사상적으로나 문화형성에 크게 공헌하였다. 유럽의 여러 교파가 이식되었고, 기존의 대교파에서 갈라져 나온 많은 교파로 그룹을 형성했다. 이들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 중에서 잉글랜드의 성공회,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 독일의 루터교회, 네덜란드의 개혁파교회 등은 본래 국가와 결부된 국가교회(國家敎會)이지만, 퓨리턴 이후에는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기 시작하여 이른바 자유교회(自由敎會)가 성립하였다. 이와 같은 자유교회 제도가 전형적인 방법으로 시행되고 있는 곳이 미국이며, 따라서 국가교회형의 앵글리칸교회(에피스크탈교회라고도 한다)루터교회개혁파교회 등도 미국에서는 자유교회화되어 있다.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는 모두가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쳐 적극적으로 외국 전도에 힘써 각 교파는 아시아아프리카남아메리카 등지에 교회와 미션스쿨사회사업단체 등을 창립하였다.

 

프로테스탄티즘의 특색 종교개혁은 단순히 가톨릭교회의 타락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신학적인 대립에서 유래하였다. 프로테스탄트 쪽에서 말하는, 루터의 󰡐복음의 재발견󰡑이야말로 종교개혁의 출발점인데, 여기서 시작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기본적인 신학적 특징은 다음의 3가지를 들 수 있다. 신앙에 의한 의인(義認):프로테스탄티즘은 󰡐오직 신앙에 의하여(solfida)󰡑 또는 󰡐오직 은혜에 의하여󰡑 ()로 인정됨을 강조한다. 물론 가톨리시즘(가톨릭교)에서도 󰡐은혜에 의하여󰡑를 주장하지만, 거기서는 은혜에 의하여 의화(義化)가 더해져서 드디어 성화(聖化)에 이른다고 하며, 의화는 구제(救濟)과정의 한 단계로 되어 있다. 이에 비해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인간은 선업(善業)이 없어도 은혜에 의하여 죄를 용서받는 것인데, 이 같은 죄의 용서가 의인이다. 따라서 똑같은 의인이라도 한편에서는 의화 내지 성의(成義)로 해석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의인 내지 선의(善義)로 해석된다. 선업 없이도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의()로 인정하는 신의 은혜를 거저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에 의한 의인󰡑이며, 이 은혜에 대한 감사로서 나타나는 것이 선업이다. 그것은 󰡐오직 신앙에 의하여󰡑라고 해도 행위가 무시되는 것은 아니며 신앙과 행위의 관계가 가톨리시즘의 경우와는 다른 것이다. 성서원리(聖書原理):가톨리시즘에서는 권위의 통로로서 성서와 교회의 전통이라는 두 가지를 주장하고, 성서의 해석도 교회의 전통에 따라 규정되므로 결국 교회가 성서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대해 프로테스탄티즘은 권위의 통로를 성서에만 한정한다. 교회는 성서보다 우위에 있지 않고 오히려 성서에 기초하여 존재한다. 또한 성서의 정경화(正經化)는 교회로 인하여 이루어졌으나 성서를 진실로 정경화한 것은 성서 자체의 힘이며, 교회는 그것을 인정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만인사제(萬人司祭):가톨리시즘에서는 설교보다도 전례(典禮)가 중요하며, 이것은 담당하는 사제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그 권위는 사도 베드로에게서 전승된 것으로 되어 있다(使徒傳承).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전례보다도 설교가 중시되어 교직제(敎職制)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교직자는 제사라는 성격보다도 설교자목회자(牧會者)의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교직자라고 해도 그 직위에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대신 교직자의 신앙과 인격이 중요해지는데, 엄밀하게는 신의 말씀만이 권위이며 교직자는 신의 말씀을 전도하는 기능이다. 원리적으로는 만인이 설교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제사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만인이 바로 제사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전개 프로테스탄티즘은 루터칼뱅 이후 17세기에 정통주의를 낳았는데, 18세기의 계몽주의 이후 근대사상과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신학사상의 전개를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상사에서는 정통주의까지의 프로테스탄티즘을 고()프로테스탄티즘이라 부르고, 계몽주의 이후에 새롭게 전개된 것을 신()프로테스탄티즘이라고 한다. 18세기의 이신론(理神論), 19세기의 자유주의적 그리스도교 등이 그것인데, 물론 거기에 대항하는 움직임도 일찍부터 일어났으며, 영국의 메서디즘옥스퍼드운동, 독일의 신앙각성운동()루터주의 등에서 신앙의 부흥과 교회의 전통으로의 복귀운동이 일어났다. 근대 프로테스탄트의 역사는 이 양자의 결합으로써 구성되었다.

 

*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독일의 종교개혁자신학자. 아이슬레벤 출생. 아버지는 만스펠트로 이주하여 광부로 일하다가 광산업을 경영, 성공하여 중세 말에 한창 득세하던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다. 그는 엄격한 가톨릭신앙의 소유자였고 자식의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마르틴은 1501년 에르푸르트대학에 입학, 1505년 일반 교양과정을 마치고 법률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자신의 삶과 구원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무렵 도보여행 중 낙뢰(落雷)를 만났을 때 함께 가던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그 해 7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업을 중단,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 계율에 따라 수도생활을 하며 1507년 사제(司祭)가 되고, 오컴주의 신학교육을 받아 수도회와 대학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다. 11년 비텐베르크대학으로 옮겨, 12년 신학박사가 되고 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는 이때, 하느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하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는 신임을 재발견하였다. 이 결과가 당시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죄부(免罪符)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17󰡐95개조 논제󰡑가 나왔는데, 이것이 큰 파문을 일으켜 마침내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破門勅令)을 받았으나 불태워 버렸다. 21년에는 신성로마제국 의회에 환문되어 그의 주장을 취소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부,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분을 받았다. 그로부터 9개월 동안 작센 선제후(選帝侯)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독일어 통일에 크게 공헌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썼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의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성서 신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들과는 분명한 구분을 지었다. 그 뒤 만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와 종교개혁 좌파 사이에서 이들과 논쟁대결하면서, 성서강의설교저작성서번역 등에 헌신함으로써 종교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는데, 영주(領主)들간의 분쟁 조정을 위하여 고향인 아이슬레벤에 갔다가, 병을 얻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업적은 대부분 문서 형태로 남아 있어, 원문의 큰 책이 100(바이마르판 루터전집)에 이른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1520)로마서 강의(151516)와 함께 초기의 신학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루터는 상황 속에서 자기를 형성하고 발언하는 신학자였기 때문에, 만년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저서와 강의를 통하여 그의 사상을 남김없이 토로하였다. 그는 신학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철저한 은혜와 사랑에 두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느님께 반항하고 자기를 추구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자유로운 군주󰡑이면서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며, 신앙의 응답을 통하여 자유로운 봉사, 이 세계와의 관계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면에서는 특히 모든 직업을 신의 소명(召命)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 그 이후의 직업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이러한 견해는 성서에만 그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실천한 것도 중요한데, 1525년 카타리나와 결혼한 것도 이같은 실천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정세 속에서 이러한 신앙적 주장을 관철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인데, 캘빈이나 다른 종교개혁자와 함께 종교개혁을 르네상스와 함께 근세에의 전환점으로 만들었다.

 

2) 칼뱅이즘(Calvinism)

 

프랑스의 종교개혁자 칼뱅에게서 발단한 프로테스탄트 사상. 칼뱅은 신앙에 의한 의인(義認), 신앙의 유일한 규준(規準)으로서의 성서, 루터의 사상을 계승하고 동시에 독자적인 사상을 발전시켰다. 신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하는 신관(神觀), 구원을 받는 자와 멸망에 이르는 자는 영원한 옛날부터 신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고 하는 예정설(豫定說), 성찬(聖餐)에서는 루터의 말처럼 빵과 포도주 속에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것이 아니며, 츠빙글리가 말하듯 그것들이 그리스도의 혈육을 상징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성령(聖靈)의 힘으로써 영적으로 관여한다고 하는 성찬론 등이 칼뱅 신학의 특징을 이룬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자기를 신의 용기(容器)로 보는 루터의 수동적인 경건에 대해, 자기를 신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보는 활동주의적 경향을 가졌으며, 사회생활에서의 적극적인 태도를 창출하였다. 또한 루터가 국가권력을 영광화(榮光化)하는 경향을 띤 데 반해, 칼뱅은 저항권을 인정하고 국가에 대한 교회의 자유를 확보하였다. 예배에 관해서도 가톨릭 교회의 미사를 폐지하고 예배를 설교 중심으로 만들었으며, 교회제도에 관해서는 목사교사장로집사 등 4개의 직무를 정하고, 목사와 장로로 이루어진 콘시스토리움에 따라 교회가 운영되도록 하였다. 칼뱅의 사상은 스위스뿐만 아니라 유럽 각지에 파급되어 독일네덜란드 및 기타 국가의 개혁파, 프랑스의 위그노파, 스코틀랜드의 장로파, 잉글랜드의 퓨리턴 제파(장로파독립파뱁티스트파 등)를 탄생시켰다. 또 이러한 칼뱅주의의 전개 속에서 신학적인 발전과 변모를 볼 수 있는데, 그 주요한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 신의 예정을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타락 이전으로 보는 것과 그 이후로 보는 것과의 대립, 그리스도의 죽음을 구원받기로 정해진 자만을 위한 것으로 보는 것과 만인을 위한 것으로 보는 것(아르미니우스주의)과의 대립, 천지창조로부터 완성까지를 신과 인간과의 계약의 실현과정으로 보는 계약신학의 성립 등이다. 이와 같은 발전과정에서 칼뱅주의는 근대 서유럽 문화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했으며, 근대 민주주의 형성과 근대주의 󰡐정신󰡑에 대해, 트뢸치나 M.베버가 지적한 바와 같이 큰 영향을 미쳤다.

 

* 칼뱅(Jean Calvin, 15091564)

 

프랑스의 신학자종교개혁자.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방 누아용 출생. 아버지는 지방 귀족의 비서경리 등으로 일한 소시민이었다. 1523~28년 파리에서 신학을, 그 후 오를레앙 부르주의 대학에서는 법학을 공부했다. 1532년 세네카의 관용에 대하여의 주해(註解)를 발표하여 인문주의자로서의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33년 에라스무스와 루터를 인용한 이단적 강연의 초고를 썼다는 혐의를 받고, 은신해 지내면서 교회를 초기 사도시대의 순수한 모습으로 복귀시킬 것을 다짐하고 로마 가톨릭과 결별했다. 그는 이른바 󰡐돌연한 회심(回心)󰡑에 의해 복음주의적(福音主義的), 즉 프로테스탄트주의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35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이단에 대한 박해로 신변의 위험을 느낀 그는 스위스의 바젤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36년 복음주의의 고전이 된 그리스도교 강요(綱要: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저술하였다. 이것은 박해받고 있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해 변호하고 그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무렵,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위해 함께 일할 것을 G.파렐에게서 요청받고 그의 종교개혁 운동에 참가하였는데, 처음부터 신정정치(神政政治)에 기반을 둔 엄격한 개혁을 추진하려 했기 때문에 파렐과 함께 추방되어,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설교자(說敎者)신학교수로 있으면서 로마서 주해를 저술, 추기경 사드레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3년 후에는 상황의 변화로 다시 제네바에 초빙되어 거기서 교회규율(42)을 제정하고 교회제도를 정비하여, 세르베토스 등의 인문주의자들을 누르고 제네바의 일반 시민에게도 엄격한 신앙생활을 요구하여, 신정정치적 체제를 수립하였다. 제네바는 그 후 종교개혁파의 중심지로서 전 유럽에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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