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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 3권.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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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장 행위에 대한 공로를 자랑하는 것은 의로움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구원의 확신을 파기한다

 

(의롭다함을 얻으려면 인간의 공로가 필요하다는 교리는 성경뿐만 아니 라 어거스틴과 베르나르드도 반대한다. 1-4)

 

1. 잘못된 물음과 올바른 물음

 

우리는 이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처리했다. , 의가 행위에 의해서 지탱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무너지지 않을 수 없으며 의는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에,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따라서 오직 믿음에 제한된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일반 사람들뿐 아니라 학자들까지도 망상에 빠져 끌려 들어가게 된다. 믿음의 칭의와 행위의 칭의가 문제가 되는 때에는, 그들은 곧 하나님 앞에서 행위에 약간의 공로가 있다고 하는 듯한 구절들을 인용한다. 하나님 앞에서 행위에 약간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도 완전히 증명된다는 듯이 그들은 생각한다.

우리는 위에서 행위의 의는 율법을 완전무결하게 준수해야만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따라서 완전성의 최고에 올라서서 가장 사소한 어떠한 범법도 없는 사람이 아니면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 여기서 별개의 문제가 제기된다. , 칭의를 위해서 행위는 결코 충분한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가치는 있지 않은가라는 점이다.

 

2. "공로"란 말은 성경에 없으며, 위험한 말이다

 

우선 이 "공로"란 말에 대해서 서론적인 말을 하겠다. 하나님의 심판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사람의 행위에 이 말을 처음으로 적용한 사람은 진실한 믿음에 나쁜 영향을 주었다. 물론 나는 말에 대한 논쟁은 피하고 싶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저술가들은 성경에 없는 말을 큰 해독을 끼치고 유익은 극히 적은 말을 사용하지 않도록 항상 주의하기 바란다. 선행의 가치는 다른 말을 사용해도 잘 설명될 수 있고 폐해도 남기지 않을 수 있는데 "공로"란 말을 쓸 필요는 무엇인가? 이 말에 얼마나 큰 잘못된 원인이 내포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그것이 세상에 준 독을 보면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참으로 그것은 심히 강한 자존심을 표시하는 말이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가리며, 사람들에게 패악한 자만심을 불어넣을 수밖에 없다.

고대 교회의 저술가들이 자주 이 말을 썼다는 것을 나는 인정하며, 그들이 이 작은 말 한마디를 잘못 써서 후세에 잘못의 원인을 남긴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구절에서 그들은 진리를 상하게 하려는 생각이 없다는 것을 증언한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아담으로 인해서 없어진 인간의 공로는 여기서 침묵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지배하게 하라." "성도들은 자기의 공로에는 아무것도 돌리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 당신께만 돌리리이다." "사람이 자기에게 있는 선한 것은 모두 자기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에, 그는 자기에게 있는 칭찬할 만한 것도 모두 자기의 공로에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비에서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사람에게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함으로써 공로의 가치를 부정하였다.

그뿐 아니라, 크리소스톰도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를 불러주신 후에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빚을 갚는데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들은 은혜와 인자하심과 위대한 관용이다."

그러나 우리는 말보다도 일 자체를 보아야 한다. "공로가 있는 체하지 않는 것이 공로이므로, 공로가 없음은 심판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한 베르나르드의 말을 나는 이미 인용했다. 그러나 그는 곧 이 말에 대한 해석을 첨부해서 그 거친 표현을 완화한다. "따라서 공로가 있도록 유의하라. 공로가 있을 때에는 그것을 받은 것인 줄 알라. 결실을, ,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라. 그러면 빈곤과 감사할 줄 모르는 망은과 교만 등의 모든 위험을 피할 수 있다. 공로가 있어도 있는 체하지 않으며, 공로가 없어도 담대한 교회는 복되다." 이 말보다 조금 전에 그는 그가 사용한 공로란 말의 경건한 뜻을 충분히 설명했다. "무엇 때문에 교회는 공로에 관심을 두는가? 하나님의 목적이야말로 자랑할 더욱 견고하고 확실한 이유가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다. 약속하신 것을 실행하실 것이다(딤후 2:13 참조)." 그러므로 '무슨 공로로 우리는 은혜를 바랄 수 있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다.

특히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는 말씀이(36:22,32) 있기 때문이다. 공로로써는 불충분하다고 알기만 하면 그것 자체가 충분한 공로가 된다.

 

3. 선행의 모든 가치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온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불결한 것이 가득함으로 하나님의 주시하심을 감당할 수 없다는 성경 말씀은 우리의 행위에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밝혀 준다.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보상을 받아야 할 것인가? 성경에는 우리가 명령받은 일을 모두 행한 후에도, 자기를 무익한 종으로 생각하라는 명령이 있다(17:10). 우리는 주를 위해서 필요없는 일을 한 것이 없고, 다만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며 이에 대해서는 감사받을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행을 주시고, 그것을 "우리 것"이라고 부르시며 그것을 받아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해서 상까지 주시겠다고 증거하신다. 우리로서는 이렇게 위대한 약속에 감격해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않도록(6:9, 살후 3:13 참조) 용기를 내며 하나님의 큰 친절을 충심으로 감사하게 받아들일 의무가 있다. 행위에 참으로 칭찬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이다. 당연히 우리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은 조금도 없다.

이 점을 진심으로 성실하게 인정한다면 공로를 믿는 생각이 일체 사라질 뿐만 아니라, 공로라는 개념까지도 없어질 것이다. 우리는 궤변가들처럼 선행에 대한 공로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나누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완전히 주의 것으로서 보존한다. 사람에게 돌리는 것은, 선한 일들을 그의 불결로 더럽히고 오염시킨다는 것뿐이다. 사람은 아무리 완전할지라도 오점이 없는 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선한 행위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면, 거기서 하나님 자신의 의를 보시는 동시에 사람의 불명예와 치욕을 발견하실 것이다. 따라서 선행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며 행하는 사람에게 무익하지 않다. 그러나 사람이 일종의 보상으로서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한 은혜를 받는 것은, 당연히 받을 만하기 때문이 아니라 친절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런 가치를 붙여주셨기 때문이다. 사람은 상을 받을 가치가 없는 행위에 상을 주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태도를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순전히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행위의 공로인 것같이 보이려고 애쓴다. 이 얼마나 모독적인 야심이며 사악한 생각인가!

나는 여기에서 각 사람의 상식에 호소한다. 너그러운 사람에게서 토지 사용권을 얻은 후에 그 토지의 소유권까지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렇게 배은망덕한 사람은 그 가지고 있는 것까지 빼앗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주인이 너그럽게 해방시켜 준 노예가 해방된 노예의 낮은 처지를 숨기고 날 때부터 자유인이었노라고 주장한다면 그런 사람은 이번의 노예 상태로 환원시키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받은 은혜를 바르게 누리는 방법은 받은 것 이상을 요구하지 않으며, 은인에게 돌아갈 칭찬을 빼앗지 않으며, 그가 우리에게 넘겨준 것은 여전히 그의 것이라는 듯이 처신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대해서 이런 신중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면 하나님께는 어떤 신중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를 우리는 각각 깊이 생각해야 한다.

 

4. 반증에 대답함

 

"하나님께 대한 공로"란 말이 성경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궤변가들이 성경의 말씀을 오용하는 것을 나는 안다. 그들은 집회에서 "행위의 공로에 따라 각 사람을 위하여 자비가 자리를 마련하라"고 한 말을 인용한다(집회서 16:15). 다른 구절은 히브리서에 있는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고 한 말씀이다(13:16).

나는 집회서의 권위를 부정할 권리를 여기서 포기한다. 그러나 그는 이 책의 저자가 그가 누구였든 간에 쓴 말을 충실히 인용하지 않는다. 희랍어 원본에는 이와 같다. pavsh ejlehmosuvnh poihvsei tovpon. e{kasto?gar kata; ta; e[rga aujtou' euJrhvsei("그는 모든 자비로운 행위에 자리를 주시리라. 각 사람은 그 행위에 따라 얻으리라" 집회서 16:14). 이것이 정확한 원문이며 라틴 역이 오역이라는 것은 이 낱말들의 구조뿐 아니라, 그 앞에 있는 문장의 문맥을 보더라도 명백하게 히브리서의 인용문에는 그들이 우리를 함정에 빠뜨릴 만한 말이 한마디도 없다. 사도가 쓰는 희랍어의 뜻은 이런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용납하신다는 것뿐이다.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있는 정도 이상으로 행위를 중요시하지 않으면 충분하다. 그런데 성경에는 우리의 선행도 항상 불결한 점이 많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시며 우리에게 대해서 노하신다고 가르친다. 우리의 선행은 도저히 하나님의 노여움을 진정시키거나, 우리에 대한 자비를 일으킬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를 검토하실 때에 그 최고의 법에 의하시지 않고 자비로 판단하시기 때문에, 마치 완전히 순결한 것같이 용납해주신다. 또 그렇기 때문에 비록 가치가 없는 행위지만, 이 세상뿐만 아니라 내세에서도 무한한 은혜를 보상으로 주신다. 경건한 학자들이 선행은 현세에서 우리에게 부여되는 은혜를 받을 가치가 있게 하며 영원한 구원은 믿음에 대한 보상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런 구별을 인정하지 않는다. 주께서는 거의 항상 수고에 대한 보상과 싸움에 이긴 면류관을 하늘에 두신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 위에 은혜를 풍성히 받는 사실을 행위의 공로에 돌리고 은혜와는 절연시키는 것은 성결의 교훈과는 반대되는 생각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라고 하시며(25:29, 8:18), 적은 일에 착하고 충성된 종은 많은 일을 맡게 되리라고(25:21) 하시지만 동시에 다른 곳에서는 신자들이 풍부하게 되는 것은 값없이 주시는 그의 자비의 선물이라고 가르치신다(1:16 참조). 그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신다(55:1). 그러므로 지금 경건한 자들이 구원을 위한 도움으로서 받는 것은, 복락까지도 모두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복락과 성도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행위를 고려하신다고 증거하신다. 우리에 대한 그의 위대한 사랑을 확실히 알리시기 위해서 우리 뿐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선물까지도 이런 영예를 받게 하신다.

 

(인간의 공로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대치하는데 반대함. 5-8)

 

5. 그리스도께서는 유일한 근본이며, 창시자이시며, 완성자이시다

 

만일 이런 문제들을 과거에 올바르게 처리했다면 그렇게 많은 소란과 분열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은 기독교의 교리를 형성하려는 사람은 그가 고린도 신도들 사이에 닦아 놓은 터를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고전 3:10 참조). 그리고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고전 3:11). 그리스도는 어떤 터인가? 그는 우리의 구원의 시초였고 완성은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인가? 그는 길을 열어주셨을 뿐이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우리 힘으로 해야 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바울이 조금 전에 말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고백하면, 우리는 그를 우리의 의로서 받는다(고전 1:30).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의를 가진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든든하게 터로 삼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지신 이유는 우리가 의를 얻는 것을 돕기 위해서라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의가 되시기 위함이라고 한다(고전 1:30). 참으로 바울은 "창세 전에" 영원 전부터 우리의 공로로 말미암지 않고 "그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하였다(1:4-5). 바울의 말들을 더 인용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죽음의 정죄에서 구속되고 멸망을 면하게 되었으며(1:14-20 참조), 하늘 아버지에 의해서 자녀와 후사로 선정되었으며(8:17, 4:5-7 참조),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화목하게 되었으며(5:9-10), 그리스도의 보호를 받아 멸망하거나 넘어질 위험성이 없게 되었고(10:28), 이렇게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았으므로(11:19 참조), 이미 영생에 참가했으며 소망에 의해서 천국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이므로 우리 자신은 미련하지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지혜가 되셨으며, 우리는 죄인이지만 그가 우리의 의가 되셨으며, 우리는 불결하지만 그가 우리의 순결이 되셨으며, 우리는 약하며 사탄에 대항할 무장과 방비가 없지만 우리를 위해서 사탄을 가도하며 지옥문을 분쇄하시려고 그가 하늘과 땅에서 받으신 권세가(28:18) 우리 것이 되었으며, 우리는 여전히 죽음의 몸을 쓰고 다니지만 그가 우리의 생명이 되셨다. 간단히 말하면 그의 것이 모두 우리 것이며 그의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가졌으므로 우리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가 주안에서 성전이 되기를 원한다면(2 :21 참조) 이 터 위에 서서 건축이 진행되어야 한다.

 

6. 로마 교회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힘과 영광을 감소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지금까지 오랫동안 이것과는 다른 생각을 배웠다. 각종의 "도덕적"인 선행을 발견해서 그것을 행하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접목 붙임을 받기 전에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모두 죽음 속에 있다고(요일 5:12) 하는 성경의 말씀은 마치 거짓말인 듯이 말이다. 죽음에 처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생명이 있는 열매를 낳을 수 있겠는가!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14:23) 말은 무의미하다는 것인가! 악한 나무에서 선한 열매가 생길 수 있다는 말인가!(7:18, 6:43 참조). 이 가장 해악한 궤변가들은 그리스도께서 행사하실 수 있는 권능을 얼마나 남겨 놓았는가?

그들은 말한다. 그리스도는 그의 공로로 우리를 위하여 최초의 은혜를 얻어주셨다. , 공로를 세울 기회를 얻어주셨다. 그러나 이 제공된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우리가 현재 할 일이라고 한다. , 이 얼마나 거만하고 파렴치한 불경인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는 자들이 이렇게까지 감히 그의 권능을 박탈하며 그를 사실상 짓밟게 되리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스도에 대한 공통적인 증거는 그를 믿는 사람은 모두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궤변가들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유익은 각 개인이 자력으로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 주신 것뿐이라고 가르친다. 이 자들이 다음 구절들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 것은 유감이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요일 5:12), "믿는 자는‥‥‥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5:24, 6:40 참조), 우리는 그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어 영원한 생명의 주사가 되었다(3:7, 5:1-2 참조).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므로(요일 3:24),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 굳게 연결된다. 그의 생명에 참여한 자들은 하늘 자리에 앉는다(2:6). 그들은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으며(1:13), 구원을 얻는다. 이 밖에도 유사한 구절이 무수하다. 그 구절들의 의미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의를 얻는 능력 또는 구원을 얻는 능력뿐만 아니라 의와 구원 둘 다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든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으면 즉시 하나님의 자녀와 하늘의 후사와 의에의 참여자와 생명의 소유자가 된다. 그리고(여기 그들의 거짓을 더욱 잘 논박하는 점이 있다) 공로를 세울 기회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부 옮겨 받는다.

 

7. 로마 교회의 신학은 어거스틴이나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모든 오류의 어머니인 소르본누(Sorbonne)의 학파들은 우리에게서 모든 경건의 요점, , 이신 칭의를 빼앗았다. 참으로 그들은 말로는 사람은 "내실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고백하나, 후에 이것을 설명할 때 선을 행하는 것은 의롭다 하는 능력을 믿음으로써 얻어진다고 하는 근거를 내세운다. 그들은 믿음을 농담처럼 말하는 듯하다. 성경에 믿음이란 말이 자주 반복되므로 믿음을 말하지 않으면 대단히 거북하겠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만족하지 않고, 그들은 선행을 찬양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것을 훔쳐다가 사람에게 넘겨준다. 선행을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고 본다면, 그런 선행은 사람을 칭찬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며 그것을 공로라고 부를 수도 없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돌에서 기름을 짜내려는 듯이 선행은 자유 의지의 능력에서 온다고 주장한다.

그들도 첫째 원인이 은혜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유 의지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며 자유 의지에 의해서 모든 공로가 성립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생각은 후기 궤변가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피타고라스인 퍼터 롬바르드도 이렇게 가르쳤다. 이 사람을 그들과 비교한다면 정신이 바르고 건전했다고 할 것이다. 그런 롬바르드가 끊임없이 어거스틴을 말하면서도 이 교부가 선행에서 야기되는 영광을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넘겨주지 않으려고 심히 주의한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소경 같았음을 참으로 분명히 나타낸다.

위에서 자유 의지를 논했을 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어거스틴의 말을 몇 가지 소개했다. 그의 저작에는 비슷한 말들이 자주 나온다. 예를 들면 우리 자신의 공로까지도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결코 자랑하지 말라고 한다. , 우리의 모든 공로는 은혜로써 온 것뿐이며 우리의 능력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은혜를 통해서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롬바르드가 성경의 빛을 보지 못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는 성경에 대한 훈련이 잘됐던 것 같지 않은데, 그렇더라도 그와 그의 제자들을 논박하는 말로서는 사도가 한 말보다 더 명백한 것을 바랄 수 없다.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자랑을 금한 다음에 자랑이 잘못인 이유를 설명한다. "우리는‥‥‥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2:10). 우리가 중생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서 선한 일이 나타날 수 없으며, 우리의 중생은 전적으로 일점의 예외도 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금이라도 선을 행했노라고 주장할 근거는 전연 없다.

끝으로, 그들 소르본느 학파들은 선행을 가르치고 또 가르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 행위를 친절하게 고려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양심에 가르친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공로를 말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교훈으로 분명하게 신자들의 마음에 기쁨과 위로를 준다. 그들은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확실히 하나님이 그것을 용납하신다고 신자들에게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믿음 없이 일을 계획하거나 실행하지 말라고 한다. 바꿔 말하면, 일을 하려면 그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를 반드시 먼저 마음에 확정하라고 가르친다.

 

8. 바른 교리를 기초로 한 충고와 위로

 

그러므로 우리는 이 유일한 기초에서 손가락 넓이만큼이라도 어긋나서는 안 된다. 일단 기반이 놓이면 현명한 공사 감독은 그 위에 똑바로 건물을 짓는다.

우리가 교훈과 충고를 받을 필요가 있을 때에 사도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쳐 준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이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 3:8-9),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며(벧전 4:3),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은 귀하게 쓰려고 택한 그릇이므로 모든 불결을 깨끗이 씻어버려야 한다(딤후 2:20-2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원하시는 제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16:24, 9:23) 알려주실 때에, 모든 것이 단 한 번에 다 언급되었다. 자기를 부인한 사람은 악의 모든 뿌리를 끊어버렸고, 다시는 자기의 것을 구하지 않는다. 십자가를 진 사람은 모든 인내와 온유를 실행할 준비가 다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보이신 모범에는 인내와 온유 뿐 아니라, 경건과 거룩에 관한 모든 의무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셨고(2:8), 하나님의 일을 완전히 성취하셨으며(4:34, 2:49 참조), 전심전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고(8:50, 7:16-18 참조), 형제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셨다(10:15, 15:13 참조). 그는 원수들에게 선을 행하시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6:27,35, 23:34 참조).

만일 위로가 필요하다면 놀라운 위안을 주는 구절들을 들 수 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라"(고후 4:8-10),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딤후 2:11-12),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그의 고난에 참예하면 그가 부활하신 모양대로 부활할 것이다(3:10-11)‥‥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8:29). 그러므로 "사망이나‥‥‥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우리를‥‥‥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며(8:38-39), 모든 일이 우리의 유익과 구원으로 바뀔 것이다(8:28 참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그의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모두 거듭나며(벧전 1:3),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고후 5:17) 죄의 나라에서 의의 나라로 옮겨간다고 말하는 것을 주의하기 바란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증언으로 그들의 부르심을 굳게 하며(벧후 1:10), 나무와 같이 그들의 열매에 의해서 판단을 받는다고(7:20, 12:33, 6:44) 우리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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