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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및 로마시대, 헬레니즘시대 개관 : Helle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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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헬레니즘 및 로마 시대

 

개관 : 헬레니즘(Hellenism) 시대

 

고전(古典) 그리스의 뒤를 잇는, 세계사상 한 시대를 규정짓는 개념. 이같은 의미로 헬레니즘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1863년 독일의 드로이젠이 그의 저서 헬레니즘사()에서 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 말은 그리스문화, 그리스정신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이 시대의 특징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리스문화의 확대발전으로 보는 견해, 반대로 오리엔트문화를 통한 그리스문화의 퇴폐로 보는 등의 견해도 있으나,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질적 변화를 일으키면서 새로 태어난 문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시대범위 헬레니즘 시대의 범위에 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먼저 그 시작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시아 원정 출발(BC 334)에 두는 설,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해(BC 330)에 두는 설, 대왕의 죽음(BC 323)에 두는 설 등이 있다. 그 종말도 극단적인 경우는 마호메트의 출현까지로 보는 설이 있다. 그 밖에 로마 제정기(帝政期)를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시대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BC 330년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제국 정복에서 BC 30년의 로마가 이집트를 병합하기까지의 300년간이 그 시대범위로 간주된다. 지역적 범위는 마케도니아그리스에서부터 대왕의 정복지 전역(인더스 유역박트리아메소포타미아소아시아이집트)까지이며, 서방의 로마도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 문화권에 든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로마는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 관례이다.

 

역사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킨 뒤 다시 동방으로 진군하였으나, 인더스강 유역에서 군대를 돌려 바빌론으로 돌아왔다(BC 324). 그러나 그 다음해 대왕이 갑자기 병사하자, 디아도코이(遺將)들은 서로 싸운 끝에 대왕이 남긴 영토를 분할하였다. 입소스전투(BC 301), 쿠르페디온전투(BC 281) 등을 거쳐 디아도코이의 세력 범위는 대개 결정되었다. 카산드로스(훗날의 안티고노스)왕조가 지배하는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왕조가 지배하는 시리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하는 이집트의 3헬레니즘 왕국으로 분열하였으나 결국 로마에 합병되었다. 그리스 본토는 아이톨리아동맹아카이아동맹이라는 두 도시동맹을 만들어 독립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문화의 중심으로서 아테네가, 상업의 중심지로 코린토스가, 그리고 에게해()의 섬 가운데서는 델로스섬과 로도스섬이 노예매매의 중개 무역지로서 번영한 것 외에는 쇠퇴 일로를 걸었다. 그리고 최후에는 역시 로마령()이 되었다.

 

사회경제 헬레니즘 제왕국(諸王國) 가운데 마케도니아는 국력이 가장 약하였으나, 시리아이집트에는 오리엔트풍의 강력한 군주국가가 성립되었다. 이집트는 지리적 조건이 좋고 물산(物産)도 풍부하여 헬레니즘 왕국 중에서 가장 강력한 전제지배가 확립되었다. 전국토의 소유권은 원칙적으로 국왕에게만 소속되었다. 신하에게 주는 사여지(賜與地), 병사에게 주는 봉토(封土), 신전령(神殿領) 등이 있었으나 이것도 점유권이 주어져 있을 뿐, 왕은 언제라도 이를 회수할 수가 있었다. 왕의 부()를 늘리기 위해서는 개간(開墾)이 필요했는데, 유력한 신하에게 토지를 주어 개간시키고 개간이 되면 다시 몰수한 실례도 알려져 있다. 농경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왕료지(王料地)󰡐왕의 농민󰡑이라고 불리는, 이동의 자유가 없는 농노적(農奴的) 소작인이 경작하였다. 상공업과 그 밖의 모든 산업경제는 왕 한 사람의 부를 위해 강력하게 통제되어 제유식물(製油植物)의 재배, 착유(搾油)와 맥주양조제염(製鹽)제지(製紙) 등 거의 모든 산업은 전매제였다. 광업은행 등도 모두 왕이 독점하고 수입은 엄격하게 제한하였으며, 수출은 국내 소비를 채우고 남은 것만 사인(私人)이 행하였다. 이집트에는 알렉산드리아나우크라티스프톨레마이오스 등 그리스풍의 폴리스가 셋 있었다. 이 중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수도이기도 한 알렉산드리아는 상업항으로서 번영하였고, 또한 무세이온대도서관 등이 있는 그리스적 학예의 중심지로, 󰡐없는 것은 눈[]󰡑이라고 할만큼 번영을 누렸다. 프톨레마이오스왕조는 수족이나 다름없는 관료군(官僚群)이 이집트를 강력하게 지배하였는데, 고래(古來)의 토착종교와 왕가의 극단적인 근친결혼과 같은 풍속습관 등을 그대로 유지하고, 이집트 토착민과의 마찰을 피하여 현명하게 통치하였다. 신전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감독하였으나, 토착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신관(神官)의 힘은 마침내 강력해져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말기 왕권을 위협하였다. 그러나 헬레니즘 왕국 중에서는 가장 오랜 왕국으로, BC 30년 로마에 합병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셀레우코스왕조가 지배한 시리아에서도 오리엔트적인 전제군주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그 지배영역은 헬레니즘 왕국 중 가장 광대하여 호족(豪族)과 어떤 종류의 자치권을 가진 민족(유대인 등), 영내(領內)에 많이 만들어져 있는 그리스풍의 폴리스 등 정치적으로 이질적인 요소가 많아 지극히 복잡하였다. 자료가 부족하여 상세한 점은 분명치 않으나, 이곳에서도 전국토가 원칙적으로 왕의 소유였다. 그리고 왕유지(王有地)󰡐왕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농노적 농민이 경작하였다. 국토가 광대하고 정치적으로 복잡하였기 때문에 왕의 지배력이 고루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어 멀리 파르티아박트리아와 서쪽의 페르가몬 등이 독립하였고, BC 64년에는 로마에 합병되어 그 속주가 되었다. 마케도니아에 관해서는 자료가 없어 그 정치경제 등의 상세한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으나, 로마와 싸워 패하여 BC 168년 로마령이 되고, BC 146년에는 그리스와 함께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문화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정복한 각지에 만든 새로운 폴리스와, 그 뒤 셀레우코스왕들이 영내(領內)에 많이 만든 새로운 폴리스가 중심이 되어, 그리스문화는 오리엔트의 오지(奧地)에까지 침투하였다. 그리고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간소화한 그리스어가 공통어(코이네)로서 사용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오리엔트적인 전제군주풍의 의례를 채용하고, 페르시아 왕녀와의 결혼, 페르시아 귀족을 친위대로 채용하는 등 이민족 통치의 수단으로서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문화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그래서 전대(前代)와는 다른 새로운 헬레니즘문화가 탄생하였다. 이로써 그리스인이 이민족을 야만시한 관념이 희박해지고 세계시민주의가 역설되었다. 그러나 한편 폴리스의 강력한 지배가 사라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을 꾀하는 개인주의적인 철학의 제파(諸派)가 출현하였다. 제논이 시작한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의 에피쿠로스학파, 디오게네스의 키니코스학파, 아리스티포스의 키레네학파 등이 모두 이 시대의 철학파이다. 이 시대의 조각은 매우 훌륭하나, 전시대의 특징인 이상화는 약화되고 보다 사실적육감적으로 되었으며, 육체의 운동과 정신의 격동 등을 나타내기를 좋아하였다. 라오콘》 《밀로의 비너스》 《사모트라케의 니케등은 모두 이 시대를 대표하는 조각들이다. 이 시대의 학예 중심지는 알렉산드리아아테네페르가몬 등이었는데, 특히 문헌학자연과학 등이 발달하고, 창조적인 문학 등은 오히려 쇠퇴하였다. 일반적으로 이 시대에는 그리스문화의 창조성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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