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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 3권. 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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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장 보속설에 첨부된 면죄부와 연옥

 

(면죄부의 교리는 오류이며 그 영향은 유해하다. 1-5)

 

1. 로마 교회의 면죄부와 그 해독

 

그런데 이 보속의 교리에서 면죄부(또는 속죄부, Indulgences)가 생겨났다. 우리의 논적들은 보속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능력이 부족한 것을 면죄부가 보충하는 듯이 말한다. 그리고 광적인 극단으로 가서, 면죄부는 그리스도와 순교자들의 공로의 분배라고 정의하며, 교황이 교서에 의해서 그 공로를 분배한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토론의 상대로 삼는 것보다 정신병 치료제로 치료하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까지 어리석은 오류는 논박하려고 애쓸 가치가 없다. 그것은 이미 많은 쇠망치의 공격을 받아 저절로 낡아가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간단한 논박이 유익할 것이므로 나는 그냥 생략하지 않겠다.

면죄부가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공격을 받지 않았으며, 무제한의 방자와 난무를 감행하면서도 이렇게 오랫동안 심판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얼마나 짙은 오류의 암흑 속에 빠져 있었는가를 잘 증명한다. 사람들은 교황과 그 교사 전달자들이 아주 노골적으로 자기들을 우롱하는 것과 자기들의 영혼의 구원을 이익이 많은 장사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과 구원의 값을 돈 몇 푼으로 계산하는 것과 값없이 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았다. 이런 협잡으로 그들은 예물을 빼앗기며, 빼앗긴 것은 매춘부들과 포주들과 난취 난무에 허비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또 면죄부의 최대 선전가들이 자기들을 가장 경멸하는 것을 보았다. 이 괴물은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소란하고 음탕하게 돌아다니며 그칠 줄을 몰랐고 매일 새로운 납을 내놓고, 새로운 돈을 가져갔다. 그래도 그들은 최고의 경의를 표하여 면죄부를 받으며, 경건한 모양을 가진 사기인 줄 알면서도 속는 사람들에게 다소의 유익을 줄 것으로 생각해서 그 앞에 경배하였다. 드디어 세상이 조금 지혜롭게 되려는 용기를 내게 되자, 면죄부는 냉각하며 점점 열기가 식어가고 있으니 결국 완전히 소멸하고 말 것이다.

 

2. 면죄부는 성경에 배치된다

 

면죄부 상인들이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 지금까지 비루한 간객과 기만 수단을 썼고 탐욕과 도둑질을 자행한 것을 지금 많은 사람들이 간과했지만, 이 불경한 죄악의 근원 자체는 아직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면죄부의 성격뿐 아니라, 그 정체를 깨끗이 드러내 보일 필요가 있다. 우리의 논적들은 그리스도와 거룩한 성도들과 순교자들의 공로를 "교회의 보고"라고 부른다. 내가 이미 시사한 바와 같이, 그들은 이 창고의 보관권을 로마 주교에게 위임하였으며, 로마 주교가 이 심히 위대한 혜택의 분배를 주관하여, 직접 분배하기도 하며 분배 사업을 타인에게 위임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완전한 면죄부와 일정한 연한의 면죄부는 교황이 발부하며, 백일간의 면죄부는 추기경들이, 그리고 사십일 간의 면죄부는 주교들이 발부한다고 한다.

올바르게 말한다면, 이런 짓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더럽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분리시켜 구원의 진정한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악마적 간계에 불과하다. 죄의 용서와 화해와 보속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것보다 더 그리스도의 피를 더럽히는 짓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주장은 마치 그리스도의 피가 고갈되어 없어졌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보충해야 된다는 듯한 생각이다. 베드로는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들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라고 증거한다(10:43). 면죄부는 베드로와 바울과 순교자들을 통해서 사죄를 부여한다. 요한은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라고 말했다. 면죄부는 순교자들의 피가 죄를 씻어버린다고 한다. 바울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도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고 말했다. 면죄부는 순교자들의 피가 죄에 대한 보속이 된다고 한다. 바울은 고린도의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만이 십자가에서 그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선언하며 증거한다(고전 1:13 참조). 면죄부는 "바울과 기타 사람들이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고 선언한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20:28)라고 하였다. 면죄부는 순교자들의 피도 교회를 사는 값이 되었다고 한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10:14). 면죄부는 거룩하게 함은 순교자들에 의해 완성하며, 그렇지 않으면 불충분하다고 선언한다. 요한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7:14)고 말했다. 그러나 면죄부는, 성자들의 피로 옷을 씻는다고 가르친다

 

3. 권위자들은 면죄부와 순교자들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다

 

로마 주교 레오는 팔레스틴 교인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아주 분명한 말로 이 모독 행위를 공격한다. "여러 성도들의 죽음을 주께서는 귀중하게 보시지만(116:15), 한 무죄한 사람이 살해된 것이 세상을 위한 화목의 제물은 되지 않았습니다. 의인들은 면류관을 받는 것이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의 용기는 인내의 모범을 보였으나, 의의 선물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의 죽음을 죽은 것이며, 그 죽음은 다른 사람의 빚을 갚는 것이 아닙니다. 주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시며,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매장되고 부활하였습니다." 그는 이 생각을 기억할 가치가 있다고 해서, 다른 곳에서도 반복하였다.

확실히 그 불경한 교리를 부수기 위해서 이보다 더 분명한 발언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어거스틴도 그에 못지않게 적절한 말로 같은 판단을 내린다. "우리는 형제로서 다른 형제들을 위해서 죽지만 순교자가 피를 흘리는 것은 죄의 용서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미 하셨다. 그가 우리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도 그를 모방하라는 것이 아니고 은혜를 기뻐하라는 뜻이다." 그는 같은 생각을 다른 곳에서도 표명하였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는 우리를 그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고 인자가 되셨다. 그와 같이 내놓을 만한 선함이 없고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가 그를 통해서 은혜를 얻도록 하기 위하여 죄 없는 그가 홀로 우리를 위하여 벌을 받으셨다." 그들의 모든 교리가 무서운 소독적인 생각과 말을 꿰매어 붙인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이것은 가장 놀라온 모독이다. 다음에 몇 가지 생각을 열거할 것인데 이것이 그들의 판단인지 또는 아닌지를 알아보자. 그 순교자들은 죽음으로써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것 이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렸으며 그로 인하여 필요 이상의 공로를 세웠다. 그리고 그들의 공로는 너무 많아서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넘쳐흐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위대한 은혜가 헛되이 되지 않도록, 그들은 자기의 피를 그리스도의 피와 섞었다. 그리고 죄의 용서와 배상과 보속을 위하여 이 섞인 피에서 교회의 보고가 구성되었다. 그리고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1:24)고 한 말은 이런 뜻으로 이해해야 된다.

이런 입장은 그리스도에게 이름만을 남기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다른 성자들과 구별할 수 없는 일개의 작은 성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스도만이 선포되며 제시되며 그 이름을 부를 가치가 있는 분이었다. 죄의 용서와 화목과 성화를 얻는 문제가 있을 때에는 그만이 소망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이라고 하는지 들어 보라. 순교자들이 흘린 피가 무익하게 되지 않도록, 그 피를 교회의 공동 재산에 기증하라고 한다. 이것은 사실인가? 그들이 죽음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것은 무익한 일이었는가? 그들의 피로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며, 현세 생활을 멸시함으로써 더 좋은 생명을 구한다는 것을 증거한 것이 무익하였는가? 그들의 굳센 지조로 교회의 믿음을 강화하며 원수들의 고집을 깨뜨린 것이 무익하였는가?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만이 화목의 제물이며, 그만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그만이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회생되셨다고 하면서 순교자들의 죽음에 아무 결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베드로와 바울은 평안히 죽었더라도 승리의 면류관을 받았으리라고 그들은 말한다.

사도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싸웠으므로 그들의 희생에 아무 결실도 없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부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선물의 분량에 따라 그의 종들을 통해서 자기의 영광을 더하실 줄을 모르신다고 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그들의 승리로 인해서 교회에 전투 열이 일어날 때 교회는 전체적으로 큰 혜택을 입는다.

 

4. 반대자들의 성경 해석을 반박함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육체에 채운다(1:24)고한 말을 그들은 얼마나 사악하게 곡해하는가! 바울은 그 남은 것 또는 보충되는 것을 구속, 보속, 속죄와 관련시키지 않고,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 모든 신자들이지상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단련을 받기 위하여 당하는 고통과 관련시킨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아직 남아 있다고 말한다. ,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으로 한 번 당하신 고난을 지금은 그의 지체들을 통해서 매일 당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받는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인정하셔서, 우리에게 이 특별한 영예를 주신다. 그런데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라는 말을 첨가한다. 이것은 교회의 구속이나 화해나 보속을 위해서라는 뜻이 아니고, 교회의 건설과 발전을 위해서라는 뜻이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얻게 하려고, 자기는 모든 것을 참는다고 말한다(딤후 2:10). 그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받는 모든 고난을 참는 것은 그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라고 하였다(고후 1:6).

그는 즉시 자기가 한 일의 뜻을 설명하여, 자기가 교회의 일꾼이 된 것은 구속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한다(1:25, 15:19 참조).

만일 나의 반대자들이 다른 해석자를 요구한다면 어거스틴의 말을 들어 보라. "그리스도의 고난은 머리이신 점에서는 그리스도 한 분에게만 있으며, 몸 전체로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있다." 따라서 한 지체인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이 말을 듣는 분이 누구이든 간에 그리스도의 한 지체라면,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닌 사람들에게서 당신이 받는 고통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다.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 사도들이 교회를 위해서 당한 고난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내게는 여러분에게 가는 문이십니다"(10:7 참조). 이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피로 준비된 그의 양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값을 인정하십시오. 나는 그 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전파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신 것같이, 우리도 우리의 형제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이것은 평화를 수립하며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라고 첨부한다. 이것이 어거스틴이 한 말이다. 바울이 완전하고 충실한 의와 구원과 생명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결함이 있었다고 생각했다는 관념은 버려야 한다. 또는 그가 무엇을 첨가하려고 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바울은 분명하고 웅장한 말로 그리스도께서 풍성한 은혜를 풍부하게 부어주셨기 때문에, 그 은혜가 죄의 세력 전체를 훨씬 능가했다고 전하였다(5:15 참조). 베드로가 웅적으로 증언하듯이(15:11 참조), 모든 성자들도 자신의 생활이나 죽음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이 은혜에 의해서 구원을 얻었다. 그러므로 어떤 성자의 가치를 하나님의 은혜이외에 어떤 다른 것에 의존시키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를 경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괴한 오류는 정체가 폭로되면 곧 정복되는 것인데, 나는 무엇 때문에 아직도 모호한 점이 있는 듯이 여기서 더 시간을 보낼 것인가?

 

5. 면죄부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통일성과 포괄적 활동을 방해한다

 

나는 이런 가증한 것들은 무시하고 이제 묻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복음의 말씀에 의해서 널리 전파하라는 것이 주의 뜻이었는데, 그 은혜를 납과 양피지에 봉인하도록 교황에게 가르친 것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복음과 면죄부 이 둘 중의 하나가 거짓인 것은 분명하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복음을 통해서 하늘의 모든 풍성한 은혜와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와 그의 모든 의와 지혜와 은총과 함께 하나도 예외 없이 우리에게 제공된다고 증언한다. 사역자들이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행동하도록 화해의 말씀이 사역자들에게 위탁되었는데, 이를테면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호소하신다고 바울은 말한다(고후 5:18-21)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0-21). 그리고 신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친교의 가치를 안다. 이 친교는 바울이 증언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받아 즐기도록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제공된다. 이와 반대로 면죄부는 교황의 창고에서 소량의 은혜를 끌어내선 납과 양피지와 일정한 장소에 붙이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은혜를 떼어버린다.

이 악폐의 근원을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이전에는 참회하는 사람들에게 명령된 보속 의무가 견딜 수 없으리만큼 엄격했기 때문인 듯하다. 참회자들은 그들에게 부가된 무거운 고행에 눌려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교회가 그것을 다소 완화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런 사람들에게 허락하는 용서를 "면죄"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들이 보속을 하나님과 관련시키고 그것을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신을 구속하기 위한 상쇄 수단이라고 했을 때에, 그들은 면죄 구속 수단으로 변형시켜, 이것이 우리가 받아야 할 벌에서 우리를 석방시킨다고 했다. 그들은 이렇게 파렴치한 생각으로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짓이라고 한 저 훼방죄를 저지른 것이다.

 

(연옥설 지지용으로 인용된 구절들을 바로 해석함으로써 연옥설을 반박함. 6-10)

 

6. 연옥설은 논박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도끼로 이미 그들의 "연옥"을 쪼개고 베고 송두리째 넘어뜨렸으므로 이제 더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 연옥 문제를 모르는 체하고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는 분들과 생각이 다르다. 그들은 이 문제에서는 맹렬한 충돌이 생길 뿐이고 덕을 세우는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그 심각성이 중대하지 않다면 이런 무가치한 것은 무시하라고 권고하고 싶다. 그러나 연옥설은 많은 신성 모독으로 구축된 것이며, 매일 새로운 모독으로 지탱되며, 여러 가지 중대한 죄악을 선동하고 있으므로 도저히 묵인할 수 없다. 대담하고 경박한 자들이 호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과는 별도로 연옥을 구상했다는 사실을 혹 일시적으로 숨길 수 있을는지 모른다. 또 사람들은 연옥을 간교한 사탄이 조작한 일종의 "계시"로 믿었으며, 이 생각을 확립하기 위해서 무지한 자들이 성경 말씀을 왜곡되게 해석했다는 사실을 일시적으로 숨길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환난의 비밀한 곳에 침입하려는 인간의 무엄한 태도를 하나님께서는 용인하시지 않는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죽은 자들에게서 진상을 알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엄격히 금지하셨다(18:11). 그의 말씀을 불결하게 타락시키는 것도 허락하시지 않는다.

이런 것은 모두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해서 일시 허용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피가 아닌 다른 곳에서 속죄를 구할 때나 보속을 다른 데로 돌릴 때에는 침묵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짓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큰 소리로 옥과 폐에서 나오는 큰 소리로 - 연옥은 사탄이 만들어낸 치명적인 거짓말이라고 부르짖어야 한다. 연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수포로 돌아가게 하며, 하나님의 자비에 참을 수 없는 모욕을 가하며, 우리의 신앙을 뒤집으며 부숴 버린다. 그 자들의 이 연옥은 죽은 후에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죄에 대한 보속을 치른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보속이라는 생각이 부서지면 연옥 자체도 송두리째 뽑혀지고 만다. 우리가 이미 설명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피가 신자들의 죄를 위한 유일한 보속과 유일한 속죄와 유일한 정화라는 것이 분명하다면, 연옥은 그리스도에 대한 무서운 모독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연옥을 옹호하기 위해서 매일 모독적인 말을 하는 사실을 나는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 연옥이 종교 생활에서 빚어내는 비교적 사소한 죄악들과 이 불경건이 근원이 되어 흘러나오는 그 밖의 무수한 일들도 여기서는 말하지 않겠다.

 

7. 복음서에 연옥설을 증명하는 말씀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성경 구절들을 거짓되게 해석하는 습관이 있으므로 우리는 그 구절들을 바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주께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데 대해서(12:32, 3:28-29, 12:10), 그들은 주께서 동시에 오는 세상에서 어떤 죄는 용서된다는 뜻을 암시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주께서는 여기서 죄에 대한 죄책에 대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을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그렇다면 그것과 연옥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들은 죄에 대한 벌은 연옥에서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그들의 죄책이 이 세상에서 용서된다는 것을 무엇 때문에 부정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에게 대한 그들의 욕설을 막기 위해서, 더 분명한 논박을 하겠다. 이런 부끄러운 죄악에 대해서는 용서를 받을 희망이 전연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주께서는 그것이 용서를 결코 받지 못하리라고 만 말씀하시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더욱 역설하시기 위해서 모든 사람의 양심이 현세에서 경험하는 심판과 부활시에 공적으로 내릴 최후의 심판을 구별하셨다. 주의 뜻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악한 반역은 즉각적인 파멸이라고 생각하여 조심하라. 성령이 제시하는 빚을 고의로 끄려고 힘쓰는 자는 죄인들에게 회심할 기회를 주는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끝날에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끝날에는 하나님의 천사들이 양과 염소를 구별할 것이며, 천국에서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버릴 것이다."(22:32-33 참조)이다.

그들은 또 마태복음에 있는 비유를 끌어온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5:25-26).

만일 이 구절에서 재판장은 하나님이고 송사하는 자는 악마요, 관예는 천사요, 감옥은 연옥이라고 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들에게 양보하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공정과 화합을 더 절실하게 역설하시기 위하여, 공정과 선한 생각으로 행동하지 않고 율법의 문자를 완고하게 요구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위험과 재난을 자초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신 것이 누가 보든지 명백하다. 그렇다면 연옥은 어디서 볼 수 있을까?

 

8. 빌립보서와 계시록과 마카비후서에서

 

하늘에 있는 자나 땅 위에 있는 자나 땅 아래 있는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된다고 한 바울의 말에서(2:10) 그들은 증거를 얻으려고 한다. 그들은 "땅 아래"는 영원한 저주에 묶여 넘어간 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된 생각이라고 전제하고 따라서 그 말을 연옥에서 고통하는 영혼들에 적용한다. 무릎을 꿇는다는 말로 사도가 진정한 경배를 의미했다면 그들의 추리가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는 단순히 그리스도께 지배권이 부여되어 모든 피조물을 복종시키게 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땅 아래 있는 자"는 마귀들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끌려와서 공포와 전율로 심판자를 인정할 마귀들을 의미한다고(2:19, 고후 7:15 참조) 보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은 다른 곳에서 그 예언을 이와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내가 살았으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14:10-11, 45:23).

그러나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5:13)라고 한 계시록에 기록된 말씀은 이렇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물론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서 말하는 만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성이 없는 것과 무생물도 포함된 것이 확실하다. 이것은 세계의 모든 부분이 하늘 꼭대기로부터 지구의 중심에 이르기까지 각각 제 모양대로 창조주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데 불과하다(19:1 참조).

그들이 마카비 가문의 역사에서 인용하는 것은(마카비후서 12:43)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성경의 정경에 포함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정경으로 인정했다고 그들은 말한다. 우선 그는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인정했는가? 그는 "유대인들은 마카비서를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속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들에 대해서 주께서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24:44)고 증거하셨다. 그러나 이 책은 침착하게 읽거나 듣는다면 교회에 무익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제롬은 아무 주저함이 없이 마카비서의 권위는 교리를 증명하는 데는 무가치하다고 주장한다. 키프리안이 기록했다고 하는 고대의 저술인 신조의 해석에 관하여(On the Exposition of the Creed)를 보면, 마카비서가 고대 교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또 나는 무엇 때문에 이 무익한 논의에 시간을 보내는가? 저자 자신이 끝에 가서 자기가 잘못 말한 것이 있으면 용서해달라고 간청함으로써(마카비후서 15:39), 자신이 충분한 존경을 받을 만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자기가 쓴 글에 대해서 용서를 비는 사람은 확실히 그것을 성령이 하신 말씀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유다의 경건을 칭찬하는 이유도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예루살렘에 예물을 보냄으로써 종말의 부활에 대한 굳은 믿음을 보였다는 특색뿐이었다(마카비후서 12:43). 또 이 이야기를 기록한 사람은 유다의 행위를 구속의 대가라고 부르지 않고 조국과 종교를 위해서 죽은 다른 신자들과 함께 그 죽은 사람들도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 행동은 미신적인 것이었으며 잘못된 열성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강림 후로 율법에 의한 회생이 없어진 줄 알고 있는데, 그 옛날 관습을 현재까지 연장하려는 것은 완전히 어리석은 자들이 하는 짓이다.

 

9. 고린도전서 3장에 있는 결정적인 구절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그들에게 강력한 전투 부대를 제공하며, 이 군대는 쉽게 제압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들이 인용한 바울의 말은"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 3:12-13,15)고 한 것이다. 이것이 연옥의 불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그들은 묻는다. 연옥의 불이 더러운 죄를 깨끗이 없애버리고 우리는 순결한 사람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고대 저술가들 중에는 이 말의 뜻을 달리 해석한 사람이 매우 많다. 그들은 불을 환난 또는 십자가로 보며, 주께서는 이런 것을 통해서 그 백성이 육의 더러움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그들을 시험하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편이 공상적인 연옥보다 훨씬 더 가능성이 있는 해석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람들과도 의견을 달리한다. 나는 이 구절을 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해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해석을 소개하기 전에 반대자들에게 사도들과 성자들은 모두 이 연옥의 불을 통과해야 되느냐고 묻고자 한다. 나는 그들이 아니라고 대답하리라는 것을 안다. 사도들과 성자들의 공로가 모든 교인들에게 무한한 혜택을 준다고 상상하면서 그들도 연옥을 통과해야 된다고 요구하는 것은 전연 불합리하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는 일부사람들의 업적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의 업적이 시험을 받으리라고 언명한다. 이것은 내가 하는 논박이 아니고 그런 해석에 반대한 어거스틴의 주장이다. 또 그들의 해석에는 더욱 어리석은 점이 있다. 바울은 그들이 어떤 행위 때문에 불을 통과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일 그들이 지극히 성실하게 교회를 건설했다면 그 업적이 불로 시험을 받은 후에 상을 받으리라고 말한다.

우선 우리는 사도가 사람의 두뇌로 고안해낸 주장들을 "나무와 풀과 짚"이 라고 비유적으로 부른다. 이 비유는 나무를 불에 넣으면 곧 타버리는 것과 같이, 이런 것도 시험을 받게 되면 견뎌내지 못하리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시험이 하나님의 영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자기의 비유의 줄거리를 따라 각 부분의 상호 관계를 종합하여 성령의 시험을 ""이라고 부른다. 금과 은은 불에 가까이 두면 둘수록 그 순수성이 더욱 확실하게 증명된다. 그와 같이 주의 진리는 조심스럽게 영적 검토를 거치면 거칠수록 그 권위가 더욱 완전히 확립된다. "나무와 풀과 짚"은 불에 넣으면 즉시 타버린다. 그와 같이 인간의 조작품은 주의 말씀을 토대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에 의한 시험에 견뎌나지 못하고 즉시 몰락하고 소멸한다. 간단히 말하면, 조작한 교리는 "나무와 풀과 짚"과 같이 불에 타버리기 때문에 "나무와 풀과 짚"에 비교되지만 그런 교리를 태워 없애버리는 것은 주의 성령뿐이다. 따라서 교리들을 시험할 불은 성령이다. 이 성령에 의한 시험을 바울은 성경의 통례에 따라 "주의 날"이라고 부른다(고전 3:13). 주께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시는 때를 "주의 날"이라고 부른다. 주의 진리가 빛을 나타내는 때에 그의 얼굴이 가장 빛난다. 이제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은 성령에 의한 시험을 의미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공력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은(고전 3:15) 어떻게 저 불을 통과하여 구원을 얻는가? 사도가 어떤 사람들을 겨냥하여 두고 말하는지를 알면, 이 점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사람들은 합당한 기초 위에 부적당한 재료로 교회를 세운 사람들이다. 바꿔 말하면 그들은 신앙의 중요하고 필요한 교리에서는 떠나지 않지만, 덜 중요하고 덜 위험한 교리에서는 곁길에 들어, 자기들이 생각해낸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섞어 넣는다. 이런 사람들은 그들의 조작품과 함께 그들의 공력까지 잃어버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사람 자신은 불 속에서 살아 나오는 것처럼 겨우 구원을 받을 것이다(고전 3:15). 바꿔 말하면 그들의 무지와 망상이 주 앞에서 용납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총과 권능으로 그것들이 깨끗이 씻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의 금같은 순수성을 이 추악한 연옥설로 더럽히는 사람은 반드시 그 공력을 잃어버릴 것이다.

 

10. 초대 교회에 호소하는 것도 로마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교회가 지켜온 극히 오랜 관습이라고 말한다.

이 항의에 대해서 바울은 자기의 시대까지도 판단의 대상에 포함시키면서, 교회를 부적당한 기초 위에 세우는 사람은 모두 그 공력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선언한다(고전 3:11-15)

그러므로 나의 반대자들이,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과거 1300년 동안 있은 관습이라고 항변하나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어떤 말씀에 의해서, 어떤 계시에 의해서, 어떤 전례에 의해서 그렇게 했느냐고 반문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성경에 증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거기서 읽을 수 있는 성도들의 예를 보더라도 이런 일은 전연 없었다. 애도와 매장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많으나, 이런 기도에 대해서는 일점일획도 볼 수 없다. 문제가 중요할수록 분명한 의사 표시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은 싸들을 위해서 기도한 고대 저술가들도 이 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명령이나 합법적인 전례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 그들은 왜 그런 일을 감히 했는가? 그들은 인간 본성의 약점에 굴복한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한 일은 모방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바울이 가르친 것과 같이(14:23), 신자는 양심에 확신이 없는 일을 해서는 안 되며 특히 기도에서 이 확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을 강요한 것은 다른 이유였던 것 같다. , 그들은 슬픔을 덜어줄 위로를 구했고 죽은 사람들에 대한 자기들의 사랑을 하나님 앞에서 표시하지 않는 것은 몰인정한 것같이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느낌을 가지는 것이 인간성이란 것은 누구나 체험으로 아는 일이다.

또 일반적으로 공인된 풍습이 불붙은 나무같이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모든 이교도들 사이에 옛날부터 죽은 자를 위한 의식이 있었고 매년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정결케 하는 의식이 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탄은 이런 술책으로 우둔한 인간들을 속였지만, 그는 바른 원칙에서 그들을 속이기 위한 기회를 얻었다. , 올바른 원칙이란 죽음은 소멸하는 것이 아니고 이생에서 다른 생으로 넘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미신 자체가 이교도들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정죄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은 자기들이 믿는다고 공언하는 내세 생활에 생각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계속 사람들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 죽은 사람들이 마치 없어진 것같이 그들을 위해서 의식을 행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여기서부터 저 잘못된 정신이 생겨났다. 장례식이나 연회나 제사에 참석하지 않으면 큰 비난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그릇된 경쟁심에서 시작한 일이 새로운 것을 추가함으로써 끊임없이 성장했기 때문에, 고통 중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돕는 것이 교황권의 신성성을 표시하는 중요 요지가 되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완전한 위로가 있다. 성경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주장한다(14:13). 그리고 그 이유로서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라고 부언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인정에 빠져서 교회 안에 패역한 기도 풍습까지 장려한다는 것은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조금이라도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 문제에 대해서 고대 저술가 들이 기록한 일은 당시의 사회 풍습과 무지로 인해서 허용되었다는 것 을 쉽게 알 수 있다. 나는 교부들도 오류에 휩쓸려 들었다는 것을 단정한다. 부주의한 경신(輕信)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판단력을 빼앗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글을 읽어보면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권할 때에 그들이 많이 주저한 것을 알 수 있다. 어거스틴은 제단에서 예식을 행할 때에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자기를 기억하라고 간곡하게 요망했다는 것을 그의 참회록(Confession)에서 밝힌다. 이것은 분명히 한 노인의 요구였고 아들은 그것을 성경의 기준에 의해서 시험하지 않고 자기의 자연적인 애정을 다른 사람들이 시인해 주기를 원했다. 그뿐 아니라, 그가 쓴 사자(死者)를 위하여 할 일(The Care to Be Taken for the Dead)이라는 책에는 너무도 많은 의혹이 있어서, 그 냉정한 태도는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미련한 열심을 즉시 꺼버릴 것이다. 이 책에 있는 냉정한 상상들을 읽으면 정성이 있던 사람들도 성의가 없어질 것이다. 이 관습에 대해서 이 책이 주는 유일한 지지는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지금까지 있는 관습이니, 멸시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죽은 사람들을 도우려는 것은 경건한 행동같이 생각된다는 점에서는 나도 교회의 고대 저술가들에게 양보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속일 수 없는 지켜야 할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의 것을 우리의 기도에 집어넣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요구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하며, 그것은 어떤 기도를 받으시고자 하는가를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율법이나 복음에는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를 허락하는 말씀이 한 마디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명령하시지 않은 일을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기도를 더럽히는 짓이다.

그러나 우리의 논적들이 고대 교회가 이를테면 그들과 오류의 동지가 된다고 자랑한다면, 나는 거기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고대인들은 죽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버린 것같이 보이지 않기 위해서, 그 죽은 사람들에게 대한 기념으로서 기도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죽은 사람들의 상태에 대해서는 의심을 가졌다는 것을 고백하였다. 연옥에 대해서 그들은 확신이 없었고 그것을 확실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우리의 현재 논적들은 그들이 상상해낸 연옥을 하나의 신앙 조항으로 받아들이고 의심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고대인들은 성만찬에서, 죽은 사람들의 일을 하나님에게 형식적으로 간혹 기도했을 뿐이다. 지금의 사람들은 죽은 자들에 대한 관심을 열렬히 추진하며, 끈덕지게 선전함으로써 사랑으로 하는 모든 일보다 그것을 우선시킨다.

참으로 고대 저술가들의 증언은 고대에 사용된 죽은 자를 위한 모든 기도를 분명히 부정한다. 그런 증언을 제시하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다. 일례로서 어거스틴이 한 말을 들 수 있다.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영광이 모든 사람을 기다리고 있으며, 사람은 죽은 후에 그럴 만한 자격이 있으면 모두 평안한 휴식을 얻는다고 어거스틴은 가르친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신자가 예언자와 사도와 순교자들과 똑같이 죽은 후에 즉시 복된 휴식을 얻는다고 증거한다. 그들이 이런 상태에 있다면 우리의 기도는 그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 것인가라고 나는 묻고자 한다.

그들이 단순한 사람들을 미혹하는 데 사용한 유치한 미신에 대해서 나는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 이런 미신은 무수히 많지만 그 대부분이 너무도 괴상해서 도저히 점잖게 꾸밀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의 무지몽매를 이용해서 그들이 비열한 장사를 하며 그 욕심을 채우고 있는 것도 나는 말하지 않겠다. 그런 이야기는 끝이 없을 것이며 그들의 추악상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선량한 독자들은 양심을 바로잡는데 필요한 것을 충분히 얻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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